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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 광주광역시학생인권조례제정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지난 5월 20일 광주 YMCA 백제실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 등 학생인권복지신장 정책협약식’(이하 정책협약)을 가졌다.
요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도 인간답게 살기위해 희생해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나의 주체들이 있다. 바로 ‘청소년’이다. 한국사회 청소년은 과도한 입시경쟁교육 시스템과 열악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누구도 그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늘 그렇듯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그저 청소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고만 있다. 이 처절한 경쟁과 열악한 사회조건 속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힘들어 해야만 세상은 알아줄까.
특히 광주는 수능성적 1위의 허울아래 감춰진 교육청 청렴도 2년 연속 전국 최하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사교육 시설 증가율 전국최고, 지자체 교육복지 투자 예산 전무(교육복지투자우선지원사업 중 해당 부문 최하위 평가) 등 청소년의 삶이 매우 심각한 지경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경쟁교육에만 치중하고 있고, 지자체는 청소년의 행복한 삶의 공간으로서 지역사회가 가지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삶의 주요 의제들이 대두되는 선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들은 여전히 소외되기 일쑤고, 그러한 냉정한 정치적 이해득실의 판단으로 인해 교육․청소년 정책은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학생인권은 물론 노동, 빈곤, 장애, 성차별, 가정형태, 국적 등 사회지원이 절실한 청소년들을 위한 정책까지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급박함과 요구의 절박성에 출발하여, 뜻있는 청소년활동 단체와 개인들이 광주지역 청소년들이 보다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 서로 긴밀히 연대가 필요하다. 경쟁과 보호의 논리로 청소년 권리증진과 지원 축소를 당연시하는 시각을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청소년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건전한 비판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145만 시민들과 함께 학생․청소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청소년인권조례’. ‘학생인권조례’, ‘교육복지조례’ 등을 지방자치의 주된 의제로 다시 회복시켜 광주가 ‘청소년이 행복한 도시’로 재탄생하도록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위가 필요하다. 아울러 지역의 청소년정책을 연구하고 광주지역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을 연계하여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복지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최근 광주학생인권조례 추진위에서는 광주지역 청소년의 다양한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고 참여와 협력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청소년정책회의를 구성하였고 아래와 같은 의도로 시작하였다.
첫째, 청소년들의 실질적인 인권을 실현한다.
둘째, 지역사회 청소년들이 청소년 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권리의식과 참여의식을 확대한다.
셋째, 지역사회의 교육․청소년정책과 현안에 대해 연구 조사하여 정책 대안을 마련한다.
넷째, 지역사회 교육․청소년정책과 행정에 대한 감시 참여활동을 전개한다.
다섯째, 지역사회 청소년 관련 기관 및 단체, 학교와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정책운동의 역할
경기도 교육감이 진보세력의 상징이 되어 고군분투한 끝에 2010년 지방선거의 주요 의제로 ‘교육복지’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지자체 및 교육청의 수장을 준비하고 있는 대부분의 예비 후보자들은 ‘무상급식’을 공약화하며, ‘한정적 복지’를 기조로 하고 있던 MB 정부를 당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미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복지권’을 통해 총체적인 청소년의 권리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지방선거 공간에서의 수동적이고 개별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극복하고 청소년 관련 공약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청소년 단체와 교육운동 단체, 사회복지사, 교육복지가 등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위장된 중립적 개입이 아닌, 보다 공세적인 실천을 말이다.
이를 위해 광주의 교육․청소년정책을 만들 때 우선시 되어야할 점은
첫째, 청소년을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홍보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교육복지 발전을 위하여 교육감 및 지자체장들에게 정책을 제안하고, 관철시키도록 해야 한다.
셋째, 시민들에게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교육복지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향후 제시한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등 감시와 비판 및 견제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각 정치세력의 향후 사회․정치적 기획을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선거 공약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다음 선거를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의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다양한 청소년 조례운동의 기획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물론 정책운동은 전문가 지식, 자료조사, 충분한 검토, 경험 등 이 필요한 일이라 활동가 개인들이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광주지역 청소년을 책임지는 주체로서 청소년정책을 함께 발굴하고, 후보자와 시민들에게 제안함으로써 청소년이 행복한 삶을 형성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뜻 깊은 일이라면 사소한 질의이라도 지금 고민해야지 않을까 싶다.
차진태 (법대생)
▲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헌법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헌법이 죽어간다' 퍼포먼스를 진행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KT 앞으로 이동해 진행하고 있다.
2010년의 한국사회는, ① 수능시험 잘 못 보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② 각종 공무원시험이나 취직의 실패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③ 육아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낙태할 수도 있는 사회, ④ 살인적인 노동 강도 때문에 목숨 걸고 ‘투쟁’ 끝에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⑤ ‘투쟁’ 안 해도 때로는 작업환경 자체가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회, ⑥ 먹고사는 터전을 국가가 ‘개발’의 명목으로 매우 쉽게 제거할 수도 있고 농민들이 농약먹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⑦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⑧ 속칭 ‘남들이 보기에 꽤 괜찮은’ 직장과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주식실패,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⑨ 돈도 있고 ‘먹고 살 능력은 있는’ 노인들도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⑩ 이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장애인들이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⑪ 그러면서도 ‘유색인종’을 무시하는 사회,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정답은 ‘이순신’입니다. 백 중 99는 이것을 ‘정답’이라고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이 잣대를 들이대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저의 본적 성당인 안산 성마리아 성당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지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성당이지요. 이 성당을, 누가 지었을까요?
어떤 신부님은 ‘내가 지었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자들은 ‘신자들과 신부님이 합심해서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신자들은 ‘내 돈 내서 내가 지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직접 그 건물을 건축한 ‘xx건설’도 ‘내가 지었다’고 하겠지요. 아마도 정확하게는 그 회사 사장이 ‘내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직접 망치질하고 시멘트를 바른 노동자들 또한 ‘우리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신심이 깊은’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지으셨다’고 할 테지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철갑선의 구상은 이순신 장군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이 땅의 조선(造船) 노동자들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비용을 댄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음식 등을 제공한 여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갑선의 구상 중에서도 세부적인 부분에 개입하거나 작업에 참여한 이순신 장군의 동료 장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큰 배가 한 척 나가려면 5명 정도는 죽어나가고, 아파트 한 동 짓는데 평균 2명은 죽는다는데, 그 시절에 ‘산업재해’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철갑선을 만들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저는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다’고 정답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만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 작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런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이란 애초에,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만든 게 되는 게 아니라, 거북선을 만든 데 참여한 무수한 사람들 중에 거북선을 만든 사람을 이순신으로 하자고 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만은 분명합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라는 말은 ‘팩트’라기 보다는 ‘합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질문에는 오히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지요? 거기에 정답이 있을 수 있나요? 라구요. 혹은, (그 작업에 참여한 많은 사람 중에 굳이)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라구요.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①에서 ⑪까지 나열한 한국사회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그 만큼 우리 주위에서 죽음을 목격하기가 쉬운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한국사회는 누가 만들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하는. 철갑선은 쉽게 생각해보면, 당시의 ‘바다 위의 살인 병기’였을 것입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조선에서 철갑선이 세계 최초로 등장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란 생각해보면, ‘무역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약한 고리를 공격하거나 자국 스스로 내부 식민 사회를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온갖 좋은 말로 포장을 해 봤자, 누군가(또는 다른 국가)가 받아야 할 몫을 조금씩 떼어 와서 ‘몰아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한국사회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을까요? 비슷한 논리는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경제대국’을 ‘군사강국’ 또는 ‘강성대국’이라는 용어로 바꿔주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 성장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이 박정희가 해낸 일이라고들 합니다. 좋게 봐주자면, 박정희의 ‘지도’ 아래 ‘산업역군’ 한국 국민 전체가 해낸 일이라는 말이겠지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찬양하는 경우에도 김대중과 김영삼과 민주화운동을 한 전 국민이 했다고들 합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도 물어보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자살율과 낙태율이 높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조금 구체화시켜 보겠습니다. 2009년 봄, 용산에서 한 건물 철거에 투쟁하던 세입자 일부와 진압하던 경찰이 죽었습니다. 세입자는 누가 죽였습니까? 강경 진압한 경찰이 죽였습니까? 경찰은 누가 죽였습니까? 투쟁하던 세입자들이 죽였습니까?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강경진압을 지시한 당시 경찰청장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 근본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재개발이익에 개입하는 용산구청과 삼성물산 같은 대자본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집 값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해마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불길한 소식들이 전해집니다. 이제 수능 망친 누구가 어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더라, 와 같은 이야기들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왜 자살하는 것입니까? 수능 시험을 못 보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는데 망쳤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까? 주위 친구들보다 못 봐서 부끄러워서, 부모님 뵙기 죄송해서 자살하는 것입니까? 근본 원인은, 한국 사회가, 사실상 신분이 되어버린 학벌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더욱 근본 원인은, 소수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는 한국 중등 교육이 그 목적에 따라 ‘선발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그에 따른 ‘지식 몰입식 교육 방식’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죽습니다.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구상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저는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훌륭하신 한국의 교수님들과 철학자님들과 선생님들과 정치인님들과 판사님들과 검사님들과 변호사님들과 의사님들과 뭣님들과 뭣님들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 가운데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이 만일 잘 안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어야 할 텐데, 상황은 반대로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명박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을 ‘이명박’이 합니까? 그렇지요. 거북선도 ‘이순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판에. 생명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저는 요즘에야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솔직히 제가 제일 두려운 것은 확실시되는 수질 악화로 인한 전염병 창궐인데, 사람들은 ‘강’을 참 좋아하는구나.
뭐, 이유야 어쨌든, ‘4대강 사업’하는 게 토목 건설사들 배만 불리는 일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 사업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어떤 교수는 4대강 사업을 하면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은 아이큐가 100정도만 되면 알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거구나. 이게 그렇게 신랄한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로구나.
재개발을 해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재개발을 그만 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수능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투쟁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비정규직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주식투자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군 복무 중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군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생각해보면, 제 생각 자체가 참 어리석습니다. 성매매와 도박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세상에 판칩니다. 없애자고 법 규정까지 만들어도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재개발하는 것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재개발 과정에서 죽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수능시험제도 만들어 둔 것이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대학입시 과정에서 자살하는 수험생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비정규직 만들어 둔 것도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비정규직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아군 죽이자고 군대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자살하는 군인들은 생길 것입니다. 투자자 죽이자고 주식시장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주식투자 실패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4대강 사업’도 별반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게 거짓말이든 말든 강 살린답시고 강 좀 파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수질 좀 악화되고 농민들 쫓겨나고 사람들 좀 죽으면 어떻습니까? 돈이 되는데. 언제는 진리와 가깝기 때문에 공부했고 노동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산업역군이 되었고 국방의 의무가 신성해서 군인이 되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속세를 넘어서려다 보면, ‘성경’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도 적나라한 속세를 마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반말’을 합니다. 다른 것을 다 접어두고, ‘무엇이 더 복음적인가’를 항상 고민하시는 신부님, 목사님, 여러 한국의 성직자분들은 공생애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말을 툭툭 던지는’ 것으로 성경을 번역해 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한 번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반말 존댓말 구별이 없는 히브리어이지요. 라틴어나 그리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복음을 존댓말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은 이런 면에서 조금 자유로우신 듯합니다. 말씀이 한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그러니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헌법 10조)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반말 찍찍 싸면서’ 잘난 체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리’라는 것을, 혹자는 ‘논리의 결정체’라면서 추앙합니다. 하지만 논리와 진리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논리는 여러 가지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법리구성이 가능합니다. 조금 조야하게 표현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논리’의 핵심고리란, 실은 ‘우기기’다”라구요.
헌법재판소는 헌법 10조의 적용에 관하여 “기본권제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거나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보장조차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다면, 헌법 제 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반된다”고 판시(98헌마 216)한 바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 필요한 보장만 규정’하면 적어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이라는 판결은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아주 적은 판결들을 보면 대개 10조에서 파생되는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했다는 것들입니다. 유명한 동성동본금혼 헌법불합치 판결(95헌가6등)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고, 18세 미만 당구장 출입금지 위헌 판결(92헌마80)은 당구를 통해 소질과 취미를 살리고자 하는 소년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침해를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18세 미만자에게 당구장 못 들어가게 하는 게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 판결이 이미 18년 전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다른 조문도 아니고 헌법 10조 위배를 이유로 말이지요. 그러나 4대강 사업 한다고, 재개발 한다고, 쫓겨나는 사람들에게는 ‘헌법 10조 위헌’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필요한 보장’, 곧, 보상금이 지급되니까요. 이러한 구조에서는 본질적인 부분은 가려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마음대로 18세 미만자는 당구장 출입 금지 시켜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건물 철거해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농토에서 쫓아내도 돼?” 이런 질문들이지요. 그런데 보상금 싫으니까 농토에서 쫓아내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2010년 한국사회는 ‘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돈 받고 나가라는 거지요. ‘4대강 법’들도 헌법재판에 가면 위헌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날 ‘만들어진’ 한국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본다면,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다니는 하나의 ‘길’일 것이고, 그것은 마치 혈관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꾸 죽어나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어떤 지점들에는 생명의 붉은 피보다는 죽음의 검은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 있는 것이 ‘헌법’일 터, 그래서 저는 반말로 된 헌법전을 존댓말로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가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누가 만들지 잘 모르겠지만, 죽음보다는 삶과 가까운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삶을 대우’받아야만 합니다.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존엄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이 담긴 채로 말이지요.
사람의 몸 안의 수많은 세포들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번식하고 사라지지 않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라고 하더군요. 결코 죽지 않는 암세포들이 신체를 장악하면 생명은 멈춥니다. 사회라고 얼마나 다를까요? 한국전쟁 60년, 한국사회에서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자라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암세포들은 단칼에 쳐내야만 하고, 그것이 서양의학의 ‘수술’일 테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몸을 건강하게 하기는 힘듭니다. 암도 재발할 수 있구요. 따라서 몸 전체에 활기를 띠게 하여 건강을 되찾는 한의학의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를 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암세포의 특징이, 일단 살아 있는 세포를 죽이고 본다는 것인 듯합니다. 살아 있는 세포는 죽이고 암세포를 번식시키자. 이것이 유일한 목표인 듯합니다. 법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부족한 저이지만, 법 공부를 하다보면 사회의 저명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헌법 지식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지한 건지 무지한 척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솔직하게, ‘헌법 기본서 한 번만 읽어 봤어도 저런 말과 저런 행동과 저런 식의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듯이, 남도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다’는 게 현대 자본주의 헌법의 핵심정신(재산권 보장+공공복리)이고 여기서 모든 기본권이론과 기본권 조항들이 생겨나는데, 이걸 부정하는 암세포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활약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도 많이 듭니다. 저는 조금 간단한 지표로, 그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는지’, ‘죽여가고 있는지’는 한국 사회의 자살율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알아갈수록, 또는 알아간다고 생각할수록,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만이 자명해집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주제로 종종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헌법 조문과, 기존의 판례 검토와 해석, 그리고 사견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1) 즐겁게 쉬는 다른 방법을 잊어버렸고-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2) 각종 현안에 대해 몸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듯한 저 자신의 ‘연대 방식’에 대한 고민의 산물입니다.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헌법을 존댓말로 읽어보자고 생각한 저는 혹시빨갱이가 아닐까요? 저도 저를 잘 모르겠는데, 저를 뭐라고 부른다면야... 저를 누가 뭐라고 부르든지 그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으나, 저는 빨갱이라는 용어의 반대용어로 ‘검죽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거무죽죽하다’+‘죽어간다’는 말인데, 시도 때도 없이 남들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검죽이’라고 불러주면 괜찮을 듯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말은 해두어야겠네요. 저는 김정일을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거짓말을 잘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집단을 싫어합니다.
글을 쓰는 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① 대학입시 없는 사회, ② 취업으로 등급 매기지 않는 사회, ③ 낙태 없는 사회, ④ 사람이 할 만한 노동 강도를 요구하는 사회, ⑤ 노동환경이 보장되고 농민이 우대받는 사회, ⑥ 국가권력이 일반국민을 두려워하는 사회, ⑦ 군대 없는 사회, ⑧ 재화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 ⑨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 ⑩ 거리에서 자주 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사회, ⑪ 겸손이 미덕인 사회, 이런 사회가 ‘완벽에 가까운’ 사회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 그런 방식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입시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수능거부를 하는 친구들이 있고, 비정규직 넘쳐나도 비정규직 철폐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고, 의무복무제도임에도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장애인 이동이 현실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거리로 나오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어떤 일들도 결과적으로 악취만을 풍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뿐입니다.
법 공부를 할수록 드는 의문은, 국가에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이유로 법을 공부할 의미가 생깁니다. 국가와 권력과 자본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고삐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로 반드시 법을 알아야 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법은 글자인데, 그 글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또한 법 그 자체도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의 한국 사회는 ‘겸손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저의 자기확장욕은 깨어지고 부서져서 0에 가까워지기도 기도합니다.
MBC와 PD수첩을 지지하면서 다음달을 맞아봅니다.
"이 땅 젊은이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지훈 (대학원생)
삼성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20대인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게으르게 뒹굴대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도체를 검사하기 위해 끝없이 제품을 납에 넣었다 빼며 제 자신을 죽여야 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가 가졌을 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져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된다. 고된 노동에도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테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지나가버린 그 시간을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워했을지.
대학을 아직 떠나지 못한 나는 다시 등교를 한다. 도서관 전산실에 들렀는데 내 앞에는 삼성 컴퓨터가 놓여 있다.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자 삼성 에어콘이 눈에 띈다. 어떤 학생은 삼성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꽃은 채 강의실로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삼성 애니콜에 전화가 와서 강의실을 나가며, 어떤 학생은 삼성 노트북 센스에 강의노트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없는 곳이 없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삼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20대의 어느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반도체가 들어있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공공물품을 거의 삼성 제품으로 구매하고, 학생들은 서비스 좋다는 삼성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삼성의 제품만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학생들의 동아리나 모임 활동을 지원하곤 하는데, 너무나 프랜들리한 삼성은 그 지원에서 가장 앞서가며, 나아가 지원을 넘어 동아리를 대체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누추하게 잔디밭에 둘러 모여 기타치고 노래 부르기보다는 폼나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길 원하는 대학생들은 기업이 지원하는 모임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삼성은 영삼성(youngsamsung)을 운영하여 대학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욕망과 친구한다. 삼성은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 교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들. 이들은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지쳐 있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면,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삼성 문제를 푸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를 보다 낫게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자세한 뒷사정은 알지 못하나, 작년엔 학생회와 삼성이 손을 잡으려한 일이 있었는데, 서울 지역 '한대련'과 삼성의 합작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광고지면을 내주고 지원을 받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삼성 올앳카드 회원을 학생회가 대신 모집해주고 카드 가맹점에서 할인을 받는 형태의 사업으로, 의결이 끝나고 집행을 기다리다가 몇몇 대학의 반대로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다. 욕망을 가진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는 삼성은 이정도로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우리는 그래서 삼성을 멀리하지 못한다.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세상과 이어주고 더위도 식혀주며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도 시켜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삼성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다니.
▲ 영삼성 홈페이지.
그래서 그런지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줄곧 '삼성맨'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지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삼성은 학벌을 중시한다는 것. 얼마 전에 언론에서 삼성 사장단의 학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성 임원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는데, 대개의 기업들이 서울대 인맥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이는 특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에 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로비/섭외 실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로비/섭외는 서울대 인맥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하면 그게 아니다. 뻔히 알고 있는 자기 동창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로비하는 것은 민망하기도 하고 불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관계가 없는 사람이 큰 돈을 챙겨주는 것이 로비에서는 훨씬 더 편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계열사 임원 중에는 비서울대출신이 많을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구조본은 모두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직원이 된다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올렸을지도 모르나 그저 황당함과 경악만을 안겨주었던 동영상에서 본 매스게임을 실제로 하러 동료들과 집결해야 한다. 물론 멋진 콘도에서 삼성은 돈의 힘을 보여줄 것이고, 임원이 방문해서 삼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임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심어줄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내가 삼성맨이라니. 그러나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재미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지속되기 힘들다.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이라는 삼성에서의 재직 기간은 보통 7~8년이라고 하는데, 3~4년차 사원들이 이직률은 30%대나 된다고 한다.
삼성을 발판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것일 텐데, 삼성에 계속 충성하다간 너무 일찍 묘비를 세워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 견뎌낼 수도 있다. 경쟁과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익숙한 것이니까. 삼성 안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못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 삼성에 취직한 친구의 말로는 인터넷 포털 DAUM도 눈치가 보여 접속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한, 무작정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막연히 긍정하며,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멈춰서있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만 하며,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사람들은 삼성의 세련된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현대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인천 송도만 하수처리 시설 사업권을 차지한 '삼성 베올리아 인천환경주식회사'에 취직해서 물 사유화 사업에 앞장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생명에 취직해서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민간 의료)보험", 즉 지금의 건강보험을 통째로 사적 의료보험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에 뛰어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캐피탈에 취직해서 부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고객 도장을 몰래 만들어 불법 대환 대출을 할 수도 있다.(걱정 마시라. 금융감독원은 알고서도 처벌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혹은 운이 좋은 사람은, 분식 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면 서류를 빼돌린 다음 어두운 밤 해운대 백사장에서 불태워버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토탈(주)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했을 때처럼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는 액션을 즐겨볼 수도 있으며, 더 운이 좋아 압수수색과 같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검찰이 주는 충분한 시간동안 내부자료와 파일을 파기하는 스릴을 맛보는 기회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너무 걱정 마시라. 저런 일들은 가벼운 과태료만 내면 끝날 테니.)
더 화끈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무직 노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라인 노동자나 반도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을 개선하려 노조라도 만들라치면,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 묻을 수 있다"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활극을 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삼성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걱정이 되면, 지뢰 제거 활동 홍보처럼 '글로벌 사회 공헌' 광고를 제작할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삼성이 F15-K 전투기를 수출하고 공격형 아파치 헬기를 만들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미지는 이미지니까. 아쉽게 이런 일을 몸소 하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구경할 기회는 얻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에 나오는 일들이다. 더 많은 일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보시기를.)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삼성이 보여주는 기술의 눈부심이다. 영화 아바타에 세계가 열광한 것은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때문이겠거니와, 삼성이 생산해내는 최첨단의 반도체와 LED TV, 휴대폰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거두어보자. 빛에 빼앗겨버린 시선을 조금만 돌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애니콜, 컴퓨터나 노트북 센스에는 백혈병으로 숨져간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눈물이 스며있고, 손 닦는 수건도 없는 화장실에 그나마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시간 외에는 꼼짝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어야 하는(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122쪽) 생산직 노동자의 한숨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여, 만일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교양을 원한다면, 제품의 월등함 때문도 노동자들 임금 때문도 아닌, 임원들 보너스 때문에 비싼 애니콜이나 센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그 곳은, 정의를 위한 발걸음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어 노예로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삼성 센스 노트북을 샀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거대담론을 자주 말하는 그는 이러한 불매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소한 문제인가? 아니다. 여기 사회의 모순이 있다. 여기 눈물이 있다. 여기 피맺힌 울음이 있고, 여기 한숨과 아우성이 있다. 자, 그러니 이제 여기를 떠나라. 그것이 교양이다.
허창영 (전남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과 전국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이 국가인권위 광주지역사무소에서 특정대학교합격 게시물에 관한 인권침해사례 보고 및 인권위 진정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수막에 대한 인권침해 진정은 2회째 진행 중이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의 책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에서는 유독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여러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인신매매에 가까운 국제결혼 광고, 주민등록번호, 무소불위의 '검새', 무노조를 고집하는 기업, 네온사인 십자가 등 그야말로 한국사회에만 있을 법한 얘기들을 위트 있게 꼬집고 있다.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여러 풍경들 중에 '길거리를 뒤덮은 현수막 문화'에 대한 것도 있다. 오 국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히 한국은 현수막이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 광고에서부터 소상인들의 호객행위, 행정당국의 정책홍보와 행사안내, 정당의 의견표출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도 다양하다. 이제 곧 지방선거 국면이니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새긴 선거용 현수막들도 가세할 것이다. 불법 게시물 철거와 과태료 부과 등 행정당국의 엄포는 떼고 나면 곧바로 다시 붙는 현수막에 의해 간단히 무시된다. 현수막 하나 만나지 않고 길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실 현수막이 뒤덮은 거리의 모습은 문화라기보다는 공해라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각의 어지러움은 물론이고 떨어져 너덜거리는 현수막의 위험성, 문구의 선정성 등은 다른 공해에 못지 않다. 현수막을 없앤다면 조금 불편함이야 있겠지만 별 이로운 구석도 없는 현수막이 꼭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의 어지러운 간판문화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요악이라기보다 그저 익숙해진 생활습관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현수막은 봐줄 만하다. 어지럽고 볼썽사납기는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감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시기에 각 고등학교 정문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좀 다르다. 혹 눈여겨보았을지 모르지만, 요즘 고등학교 정문에는 대게 이런 종류의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대 ○○명 합격, 수도권 ○○명 합격 등 대학 합격을 축하하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합격생 이름을 나열해놓은 학교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 대학진학이라는 목표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대다수일 테니 합격을 축하할 만도 하다. 하지만 합격 축하 현수막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선 현수막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졸업생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명문대 위주로 진학한 소수만을 위한 축하는 소위 '마이너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나 재수생들,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아예 설자리조차 없다. 어쩌면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학교당국에게 그들은 단지 패배자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학률이 높은 것이 곧 명문이라는 천박한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현실, 교육당국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합격 현수막이 담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나와 주목된다.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이 합격 현수막이 가진 반인권성을 지적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합격 현수막이 학교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입시학원화를 조장하고, 진학만을 고집하는 학력차별, 특정 대학만을 지향하는 학벌차별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현수막이 주는 패배감과 좌절감 때문에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피해도 양산하고 있다고 한다.
합격 현수막 철거를 위한 운동은 이미 2006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제기되었다. 처음에 각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일부 학교가 시정을 하기도 했지만 매년 게시와 시정이 반복될 뿐 근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지난해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과정에서 각 학교들이 지양하기로 함에 따라 "조치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라며 기각되었던 사안이다. 그렇지만 올해도 여전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또 다시 진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는 비단 고등학교 문제만은 아니다. 대학 현수막도 다르지 않다. 과거 대학의 현수막은 주로 대학생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취업 관련 광고나 교내 행사 안내가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대학의 현실도 상아탑을 버리고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니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이름까지 버젓이 공개하며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 합격을 축하하거나 대기업 취업을 축하하기에 급급한 현수막은 도가 지나쳤다.
합격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행복하다. 더구나 동네에 자랑할 것도 아니고 교내에 내건 현수막이 '자위'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의미 없는 행동이 도서관에서, 각종 취업준비 학원에서, 고시촌에서 시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소외를 줄 수 있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부의 성공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성공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극도 필요하겠지만 상처를 주는 자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대학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가 반드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입시경쟁을 부추기고 서열과 학벌을 조장하는 풍토는 반드시 차별과 연결된다. 고시합격을 자랑하고 대기업 취업을 자랑하는 대학의 풍토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졸업·입학 때만 되면 교문 앞에 현수막이 내걸려요. 매년 한결같아요. 이번에도 서울에서 잘나가는 대학이나 의·치·한의대에 합격한 선배들이에요.
지방변두리 대학합격자 명단이 올라가는 불상사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학교는 명문대만 특별취급 해요. 일류대 진학자만이 학교의 위상을 높인다고 믿으니까요. 왜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런 열패감과 자괴감부터 심어주나요. 이런 학교 짜증나요.
그때 어디선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3학년 진학부장 선생님이에요. 현수막에 자부심을 가지라내요. 내년에는 우리차례래요. 우리가 이름을 올려야 학교의 명예가 드높아진대요.
벌써부터 뒷목이 뻐근해 와요.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대학을 잘 가야 한대요. 저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을 받을 것 같아요. 엄청 부담감도 쌓이고 스트레스도 많아요. 상위권 대학진학이 어려운 친구들은 벌써부터 열등감과 패배감을 곱씹어요.
그런데도 대학만 가면 마치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말해요. 수능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현실이 기분 나빠요. 명문대 진학자 수에 따라 학교평가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웃겨요.
하지만 3학년 학생 부장이자 진학부장 선생님은 SKY 때문에 웃어요. 합격자 수만큼 보너스를 받아요. 해마다 진학숫자에 따라 하늘을 날다가 추락하기도 해요. 일류대에 갈 것 같았던 제자가 시험을 망치면 위로는커녕 욕지기부터 해요. 학생들 성적을 밥줄로 생각하나 봐요.
그래서 학생들은 공부하는 기계가 돼야 해요. 인생은 성적순이라니까요. 개성이나 특기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래요.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소용없어요. 일류대에 간 선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요. 당장 명문대 몇 명 합격시켰는지 만 중요해요.
현수막에 이름을 올린 그 선배는 지금 행복할까요. 내 이름이 올라간다고 해도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 같지 않아요. 현수막에 적힌 그 선배와 나는 서로 잘하는 것도 다르고 관심분야도 달라요. 그런데 학교서열 때문에 비교되는 것이 화가 나요.
그런데도 대학 성적순으로 학교 순위가 매겨지고 입학생 수준이 달라진대요. 우라질레이션이에요.
안정혁 (만화가)
힙합그룹 에픽하이의 래퍼 타블로(본명 이선웅)의 학력위조 논란이 네티즌과 론의 대립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위조 논란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학·석사 과정을 3년 6개월 만에 마쳤다고 주장해왔던 타블로가 지난 4월 학력위조를 주장하는 네티즌을 고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학력위조가 드러나기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타블로와 같은 유명 인사들은 여러 분야에서 능력 있는 인물로 칭송받지 않았는가? 바로 똑같은 언론들로부터 말이다. 그런데 단지 학력논란으로 인해 갑자기 그를 ‘능력 없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결국 역설적으로 증명된 것은 ‘학벌’과 ‘능력’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고졸자가 대졸자나 박사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학벌’이 능력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공인된 장치라고 선전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학벌제도란, 부유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반면 가난한 노동자 민중은 주변부로 밀려나 착취당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학벌제도를 바탕으로, 부자의 자식들은 ‘일류대를 나온 엘리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며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다. 반면 노동자의 아들딸들에게는 ‘학력이 낮은, 능력 없는 우리는 당연히 지배받아야 한다’는 순종의식을 불어넣는다. 빈부격차가 교육격차를 필연적으로 낳는 상황에서, 학벌제도는 결국 부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할 뿐이다.
따라서 핵심 문제는 ‘유명인들의 작은 사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학벌제도의 거대한 사기’다. 이번 사건은 학력위조자들을 희생양으로 처벌해 자본주의 위계질서를 보호하려는 가엾은 시도일 뿐이다.
이젠 '삼성의 어둠'을 얘기해야 할 때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판매 부수가 10만 부를 넘길 때가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삼성 내부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로의 대상인 삼성과 이건희 일가로부터 아직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허황된 거짓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김 변호사의 책을 읽고 단지 삼성의 비리에만 분노한다면, 아직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삼성 말고도 다른 모든 기업이 비리를 저지를 것이다. 문제는 삼성이 단순히 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집단이 지금 한국을, 아니 바로 우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한다는 데 있다.
외환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한국 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심리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너나 가릴 것 없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사회적으로도 자본 또는 기업이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노예적으로 돈을 숭배하는데 어떻게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은 그런 현실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그가 좀 더 정직했더라면 시장이 아니라 삼성이 지배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자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남을 지배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불평등하게 집중된 힘에서 생겨난다. 자본 권력 역시 자본의 불균등한 소유로부터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더 커진다. 삼성의 자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불어나 이제 다른 모든 기업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는 속속들이 기업화되어 대통령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할 정도로 국가 전체가 가히 기업 국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기업이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니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종업원들이 선거로 사장을 뽑는 재벌 기업을 보았는가?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고 기업화된다는 것은 국가가 독재 국가가 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기업 국가는 기업 독재 국가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국가의 CEO를 선출한다.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바지사장일 뿐이다.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장님'은 따로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대통령 특별 사면을 받아내고 동계올림픽 선수단 환영 만찬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 같이 앉은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런 권력 구조의 극명한 상징이다. 선출된 권력 이면에 선출되지 않은 자본 권력이 군림할 때, 나라의 민주주의는 근본에서부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삼성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삼성만 갖고 그러는가? 다른 재벌 기업들이 아니 다른 중소기업들이 삼성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40년 전에 왜 '박정희'만이 문제인가, 모든 군인들이 또는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다 같이 나쁘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물음이었던 것과 같다. 박정희 씨를 제거하고서야 유신독재가 끝날 수 있었고,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추방한 뒤에야 비로소 신군부의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그 권력에서 추방하지 않고서는 기업독재를 끝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지금 재벌 기업이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의 군부와 같다면, 삼성은 군부의 실세였던 하나회와 같고, '회장님'은 '각하'와 같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삼성이 재벌 기업이라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부유한 자본가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무작정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나 시장경제가 타도되어야 할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건희 전 회장이 빌 게이츠 씨 같은 자본가였더라면 우리는 그가 아무리 부자라도 단지 그 때문에 그를 비판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건희 일가를 삼성으로부터 추방하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 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그 자본을 이용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온갖 불법을 일삼아 저지르며, 그것도 모자라 공직자들을 매수하여 국가 기구 전체를 부패에 빠뜨리고 마지막에는 나라의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에 이른다면, 이제 그런 기업, 그런 자본가는 타도되어야 할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삼성의 모든 타락상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업이 저지르는 불법이 아니라 삼성의 특권적 권력에서 비롯된다. 삼성의 권력이 삼성을 다른 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반사회적인 기업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며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라는 조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지만, 과연 이런 경우 사람들은 존경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일까?
삼성이 얼마나 반사회적인 기업인지 알려면, 주변의 장애인 친구에게 삼성이 장애인 2퍼센트 의무 고용을 얼마나 지키는지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것을 또 어떠한가? 3년 전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물산 소속의 배가 인천대교 건설에 투입되었던 해상 크레인을 끌고 가다 가만히 있는 초대형 유조선을 들이받아 충남 서해안 일대를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삼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삼성답게 먼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항해 일지를 조작한 일이었다. 지역 해양청이 충돌 위험을 무선으로 알렸는데도 그런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리고 전 국민 수십만 명이 태안 앞바다에서 손으로 기름을 닦고 있을 때, 삼성은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사건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은 앞으로는 사과하는 시늉을 내면서 뒤로는 배상액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도 한 통속이어서 올해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의 편을 들어 태안 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삼성이 이미 공탁해둔 56억여 원 이외에는 더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액수는 삼성이 퇴직한 김용철 변호사의 차명계좌에 본인도 모르게 넣어 둔 돈 52억보다는 조금 많은 돈이지만, 삼성건설이 지은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의 큰 평수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삼성전자의 2009년 영업이익이 11조 원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56억 원은 주머니 속의 동전에 불과하다. 그런데 천문학적 비자금을 쌓아두고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대선자금으로, 공직자 뇌물로 쓰면서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고에 대해 배상할 돈은 없는 기업이 삼성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삼성을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든 독재 권력이 그렇듯이 삼성은 국가 권력과 법질서의 통제 밖에 있다. 삼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공직자를 매수하고, 이것 역시 불가능할 경우에는 대놓고 법을 무시한다. 분식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자 법원 직원을 매수하여 서류를 빼돌려 불태우는가 하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삼성직원이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몇 천 만 원 벌금으로 모든 불법을 덮어 버린다.
하지만 삼성이 일삼아 불법을 저지른다 해서 우리가 삼성을 일종의 조직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사태를 오해하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는 그것이 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 자체를 이윤 추구의 도구로 삼고, 국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모든 공공적 기능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많은 나라들이 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공적인 사회 보장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장 범위를 확대하려 할 때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기업이 삼성생명이었다. 국가가 다 보장해주면 삼성생명은 보험을 팔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성이 꿈꾸는 세상이란 부자들은 감기만 걸려도 삼성병원 특실에서 황제처럼 대접받고 가난뱅이들은 죽을 병이 걸려도 동네병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앓다 죽는 세상, 부자들은 외국산 수입 생수로 집안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가난뱅이들은 재벌 기업이 운영하는 비싼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해, 화장실과 부엌에 수도가 끊어져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더 늦기 전에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우리가 박정희,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쫒아 내고 군부의 권력을 해체한 뒤에야 비로소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업 독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자식들은 재벌 기업의 머슴으로 종노릇하는 운명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삼성 제품 불매는 자본의 독재, 삼성의 독재를 끝내기 위한 대장정의 첫 걸음이다. 유명무실한 삼성 특검 수사와, 대다수 범죄 행위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요식 행위에 그친 재판과, 그 재판을 통해 내려진 법의 심판조차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린 최근의 특별 사면을 통해 분명해진 것처럼, 국가기구는 더 이상 삼성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삼성에 매수되어버린 국가 기구가 삼성이 온전한 기업이 되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회장님의 비서가 회장님의 불법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삼성을 해체하고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소비자뿐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화폐가 자기 증식 운동을 시작하면 자본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저 혼자 불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털어 불어나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 하더라도 자본은 자기 증식할 수 있다.
자본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까닭도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소비자가 없다면 자본은 절대로 혼자 증식할 수 없으며,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자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노동자들과 소비자들밖에 없다. 하지만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다. 삼성이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더 사악한 반사회적 기업이 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안팎으로 아무런 견제가 없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도 노동조합도 삼성의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직접 행동뿐이다. 삼성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자기 제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면 그날로 삼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삼성은 주방용 가전제품부터 안방의 청소기, 사무실의 전화기와 컴퓨터, 가방 속의 노트북과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 그 속의 반도체 그리고 지갑 속의 신용카드, 생명보험과 자동차보험 등,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삼성제품으로 채운다면,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우리 모두 삼성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삼성제품을 거부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버릴 것은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해약하고 해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자. 지구 위에 생명체가 등장한 뒤에 모래알처럼 작은 개미들은 영원히 살아남아도 공룡이 멸종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게다가 삼성이란 공룡을 멸종시키기 위해 우리가 엄청난 노고를 쏟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하지 않으면 된다. 삼성 제품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는 일은 어려워도 하지 않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마음을 바꾸는 일뿐이다. 우리의 삶을 삭막한 사막으로 만드는 것도, 푸른 초원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그 실상을 깨닫고 삼성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과 삼성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나 개인이 느끼는 만족이 아니라 그 제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고 자연 친화적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이 소비자로서 제품 선택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 불매 운동이란 단순히 외적 억압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탐욕 및 아집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철학자가 삼성 불매 운동의 선두에 나선 까닭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전환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비싸더라도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한다. 아마도 거기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개인적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려 하는 인간의 선한 의지이다. 그런 선한 의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해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삼성을 해체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려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의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재벌 경제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중에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기 전에 무조건 삼성 제품을 불매함으로써 삼성의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즉시 시작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타도'가 무조건적인 대의였으며,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그 독재자의 제거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 문제였던 것과 같다.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삼성 불매를 통해 삼성과 이건희 일가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역사적 과제라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경우이든, 분명한 것은 박정희 씨가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았듯이 삼성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다른 회사 제품을 쓴다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나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이제 우리, 삼성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그리고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이 고상한 인간의 품위와 교양의 징표가 되게 하자.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신영배 (진보신당 20대모임)
▲ 자신(황정음 역)이 다니는 서운대를 숨기기 위해 새벽부터 싸인펜을 들고 자신이 나온 서운대 버스광고판 얼굴에 ‘낙서’을 해야만 했던 지붕하이킥 보셨어요?
이번 6월 2일 지방선거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13,14일 본선에 뛸 후보들이 등록을 마치면 더욱 더 뜨거워 질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김진표 민주당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구여권 단일후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리는 기사들을 보는 중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 바로 경쟁후보들의 인연을 부각시키는 기사다. 한나라당의 김문수 후보,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와 서울대 동문이라는 것. 어느 언론사는 이에 더해서 ‘고대 출신의 안동섭 민주노동당 후보가’ 라며 ‘SK(서울대와 고려대)’의 대결이라는 걸 알리고 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학벌들의 대결이라는 것.
정말 무게 없고 후보를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않음에도 이런 기사들은 큰 폐해를 낳는다. 정치인과 일반인은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들이 정치의 무관심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자들은 알아야 하고 이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또한 후보를 삶과 철학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학벌로 평가하게 되어 돼먹지도 못한 놈이 떵떵거리며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실제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런 폐해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큰일을 할 깜냥이 되지도 않으면서 학벌 하나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학벌네트워크를 공고히 하고 또 자기들이 필요할 때 이걸 사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 학벌네트워크에 들어갈 수 없고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 세대인 20대의 모습을(한 마디로 ‘중복 피해’를 보는) 제대로 보여준 드라마 주인공이 있다면?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난 『지붕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을 뽑고자 한다.(아! 벌써 ‘뭐가 그래’라는 반론이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혹자는 현실성 없는 등장인물이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정음 만큼 현실 속 다수의 20대를 표현한 등장인물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스펙을 늘리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겨우 취직한 회사에서의 반 인권적 행위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장면, 너무나 힘든 삶 속에서 받는 사랑이 부담스러워서 그 사랑을 거부하고 아파하는 장면을 보며 공감하지 못한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이런 그녀에게 학벌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비록 이에 대한 사연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서운대’ 아니 ‘서운하다’라는 말에도 놀라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좋은 대학에 다니지 못해 피해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려 준비하는 대학생들을 보는 거 같다. 또한 황정음이 서운대 출신이라는 걸 알고 과외를 끊어버린 (필요에 따라서 물리적 진압까지 이용한) 이현경은 학벌이란 기준에 사로잡혀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 어르신들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시트콤 속에서 황정음은 취직에 성공했고 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험난한 사회와 싸워 이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20대의 대다수는 아직도 출신이나 재학 중인 대학이란 주홍글씨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학벌이란 편견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사회에 대한 ‘서운함’은 커져 가기만 한다.
정세훈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재학생)
▲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시험인 법학적성시험(LEET)을 치르기 위한 모의시험을 마친 응시자들이 시험장을 나서고 있다.
우리사회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시행 된지도 2년이 되어간다. 로스쿨제도는 기존의 사법시험을 대체하여 법조인을 선발하여 양성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대학 졸업자 중 매년 2000명을 선발한다. 선발된 로스쿨 재학생은 3년간의 엄격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변호사시험을 통해 변호사로서의 자질을 검증받고 변호사로 활동하게 된다. 로스쿨과정을 거친 법조인은 2012년 처음으로 사회에 배출될 예정이다. 기존의 사법시험은 2016년까지 단계적 축소를 거쳐 폐지된다.
현재 1기 입학생의 경우 작년한해동안 기초법학을 이수하였고, 다가올 2학년 여름방학동안 법원, 검찰청, 로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무연수를 가질 예정이다. 2기의 경우 기초법학을 들으면서 법률가로서 초석을 다지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로스쿨은 2009년 첫 개원이 후 성공적인 로스쿨제도의 정착을 위해 내부적으로 정부, 교수, 학생간의 끊임없는 토론과 논쟁을 거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발과정의 공정성이나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진입장벽의 문제 등 아직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로스쿨 제도에 있어 기대되는 긍정적 측면을 살펴보고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강의의 질적 향상의 측면 -교수법, 학생과 커뮤니케이션
로스쿨이 시행되면서 기존 법대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동일한 수업을 듣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로스쿨 수업을 들어보니 기존의 법대 수업과 달리 교수님들의 교수법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간의 법대수업은 교수에서 학생으로의 일방적 전달방식이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법대 학생들이 수업을 등한시하고 신림동 강의에 의존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로스쿨이 시행된 이 후 새로운 제도에 발맞춰 교수 스스로 학생들의 지적수준에 부합하는 교수법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이 수업내용을 잘 이해하고 따라오는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기존 법대수업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학생들 역시 비싼 등록금을 내는 만큼 그에 부합하는 질 높은 수업을 듣기를 요구하고 과거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로스쿨이 기존 법대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교육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 양성 측면
로스쿨 제도의 취지자체가 기존의 획일적인 법조인 양성 시스템을 탈피하기 위한 게 주요한 것인 만큼 로스쿨 재학생의 출신은 실로 다양하다. 인권운동가, 기자, 공무원, 펀드매니저, 군인, 공학박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에 법적 지식을 더해 특화된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몇 년 뒤에 그들이 사회에 진출한다면 법적 분쟁에 특화된 전문변호사가 대거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들 역시 자신의 분쟁에 특화된 전문가를 통해 전보다 질 높은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하지 못한 선발과정
로스쿨제도 도입으로 법조인 양성 과정의 많은 부분들이 변화했지만 아직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산재해 있다. 그 첫 번째가 입학과정에서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수험생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로스쿨을 입학하기 위해서는 1차로 법학적성시험(LEET), 공인영어점수, 학점이 필요하고 2차로 논술, 면접, 기타 경력사항 등이 점수에 반영된다. 그러나 많은 대학들이 그 구체적인 요소별 반영비율을 밝히기 꺼려하고 있어 수험생들은 자신의 실제 점수가 몇 점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로스쿨에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사설 학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입시설명회를 열어 학생들을 유인하는가 하면, 인터넷 카페에서는 추측성 글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로스쿨 입시는 미래 우리 사회의 법조인을 선발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이들이 공정하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 뽑혀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로스쿨의 취지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재를 법조인으로 선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LEET나 영어점수와 같은 정량평가보다는 수험생의 전체적인 자질을 보는 정성평가 비율이 늘어야할 것이다. 즉 선발 주체인 각 로스쿨들이 로스쿨의 취지에 벗어나 학생의 잠재력을 보지 않고 훗날 변호사 시험을 잘 볼 것 같은 시험선수들만을 가려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로스쿨도 하나의 교육기관으로써 한국사회의 대학들처럼 입시에 매달리기보다는 재능 있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다 나은 법조인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한다.
비싼 등록금과 장학혜택의 부족
현재 로스쿨의 한해 평균 등록금은 1,400만 원 정도이다. 이에 더해 3년간의 생활비와 그동안 직장을 다니지 못한데 대한 기회비용까지 생각한다면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법조인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높은 등록금은 비단 로스쿨 재학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선 앞으로 법조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높은 등록금의 벽 앞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이는 소위 ‘가진 자’만이 법조인이 되는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크다.
이에 따라 로스쿨에서의 장학금 비율을 확충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정부학자금 대출을 확대 시행하여 대출금 및 이자 상환을 유예해 주는 방안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로스쿨 선발과정에서 사회적 취약계층 비율을 확대할 필요성도 있다. 첫 입시에서 10%이던 사회적 취약계층 선발 비율을 일부대학의 경우 2기 선발에서 5%로 축소하였다. 기존의 사법시험에 비해 사회적 취약계층의 법조인 선발을 늘리자는 로스쿨의 취지를 고려할 때 이러한 선발 인원을 다시 늘려야한다. 이렇듯 진입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동반 될 때 로스쿨이 ‘그저 가진 자들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조윤리의 교육의 부족
최근 논란이 되었던 ‘검사 스폰서’사건이 시사하듯 법률가는 높은 윤리의식과 공정심을 가지고 직무에 임해야 한다. 따라서 로스쿨에서는 법조인으로서 바람직한 인적 소양에 대한 교육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로스쿨 교육과정에서 이와 관련한 과목은 ‘법조윤리’ 한 과목과 외부인사 초청특강이 전부로써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기존 사법시험 제도에서의 법조인 특권의식이나 윤리의식의 부족이 로스쿨제도 하에서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인은 변호사시험 수험과목에 비중을 두는 수업과정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법조윤리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육당국과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커리큘럼 및 현장교육에 법조윤리 부분을 더 강화하여 법조인으로서의 높은 윤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들뿐만 아니라 한해 전국적으로 2000여명의 로스쿨 정원이 공익의 차원에서 적정한가에 대한 논란, 수도권 출신의 학벌을 가진 지원자들이 지방 로스쿨을 잠식하는 문제, 법조계의 서열문화를 로스쿨이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등 더 숙고해야 할 많은 쟁점들을 로스쿨이 안고 있다. 이러한 쟁점들이 비단 필자와 같은 재학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12년이면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가 활동하기 시작하며 2016년 사법시험이 폐지되면 로스쿨을 통해서만이 법조인을 배출하게 된다. 로스쿨이 사회에서 법조인 양성의 핵심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스쿨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한편 올바른 법조인을 양성해 국민들이 질 높은 법률지원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배주영 (신광중학교 교사)
▲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노무자들의 미불임금 내역 등이 담긴 공탁금 자료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한 가운데 7일 오후 서울 외교통상부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82) 어르신이 우리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있다.
“배주영 샘은 왜 이렇게 바빠~?”
쉬는 시간 전화를 돌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나에게 옆 선생님이 말을 건넨다.
“아 네~ 제가 투잡을 하잖아요~^^”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사무차장이라 한다. 어떤 직책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보거나 누군가에게 소개해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그런 인사가 무척이나 쑥스럽고 어색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하다. 그렇다 나는 현재 중학교 교사이고, 2009년 3월에 출범한 시민모임의 사무차장이다.
2008년으로 기억한다. 광주인권영화제에서 우연히 본 <열 네 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이란 영화는 역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문제가 지금의 문제임을, 과거의 사실(史實)이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고통임을 너무도 아프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광기로 치닫고 있을 1944년에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동원한 여성 노동자들을 이야기한다. 당시 그들의 나이 불과 13~15살. 일본에 가면 중학교에 갈 수 있다, 돈도 벌 수 있다라는 말에 부분 희망을 품고 일본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책상과 공책이 아니었다. 그들은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온갖 학대와 배고픔, 외로움을 견뎌야했다. 약속했던 임금은 한 푼도 없었다. 해방이 되어 돌아온 조국에서도 그녀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 일본에 갔다온 여자라는 이유로 이들은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들의 아픔을 함께 감싸안고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 20여 년 전 일본의 나고야 지원회 사람들이었다.
역사를 가르치고 산다는 내게 영화는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영화를 함께 본 많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공감을 했고,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그 분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잊혀지고 버려졌던 문제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의 20여년이 넘은 운동의 결과 이 곳 광주에서도 답을 하게 된 것이다. 한참 늦은 발걸음이지만, 양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간에 주목하고 함께 평화를 얘기하고 연대를 고민하게 됐다는 점이 참 소중하다.
그렇게 참여한 시민모임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 안이라는 매우 안정된 그렇지만 틀에 박힌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생각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시민모임에는 소위 ‘운동’의 전문가가 없다.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이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발걸음들은 서툴고 더디다. 그러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조그마한 능력이나마 나누고,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는 운동은 그 진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다. 과연 될까? 라고 생각했던 1인 시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고 진행돼 100회를 훌쩍 넘어 200회를 가까이 두고 있다. 누구도 가능을 확신하지 못했던 사죄촉구 10만명 서명운동은 조직을 동원하지 않고도 회원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협조로 7만 명이 넘었다. 시민모임의 활동이 계속되자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역 언론은 물론 중앙언론과 일본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쑥스럽지만 시민모임, 대단하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외로움과 서러움에 혼자 울었던 할머니가 웃음꽃을 피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변화는 우리 스스로, 나 스스로가 변했다는 것이다.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수업도 달라졌다. 현장의 생생함이 수업에도 전달이 되었나보다. 학생들은 내가 수업을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실천하고 변했다. 할머니들께 미안함의 편지를 썼고,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20여 년 동안 이 문제를 붙잡고 있는 나고야 지원회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학생들의 편지는 나고야의 평화전시회에 <광주에서 온 희망의 메시지>라는 제목이 붙어 전시되기도 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오자 매우 신기해하며 자신들의 작은 행동이 뭔가를 변화시킬수도 있다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다. 근로정신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촛불문화제에서 연극을 해 보자고 한 제안을 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작년에 우리학교 학생들이 일본에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최근에 노래가 하나 만들어졌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라는 내용으로,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광주 ‘시민모임’이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화이팅! 용기를 내고!>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일본어로 만들어진 노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도 만들어졌고,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주인공인 하라다 요시오님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함께 수업을 했던 하라다상과 학생들, 그리고 수업을 함께 계획했던 음악 선생님, 수업을 참관한 동료 선생님들께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고, 자체로 감동이었던 수업이다.
살다보면 애초의 계획에는 없었던 일들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다. 시민모임과의 만남이 나에게는 그렇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8년, 그리 열심히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루하루 학교 생활을 하던 내게, 시민모임은 내가 교사라서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민모임에서의 활동도, 학생들과의 만남도, 그리고 올해 여름에 예정된 한․일 청소년의 평화교류까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었고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커진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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