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에 대한 두려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박고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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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저서를 읽으려는 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광화문 교보문고에 대표산문집 '무소유'의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무소유에 대한 소유욕을 보며


지난 3월, 법정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길상사에는 그를 위한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유의 욕망이 넘실대는 시대였기에 그만큼 무소유의 메시지가 힘을 얻었을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스님이 떠나신 후 무소유를 절판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앞다퉈 책을 소유하려는 진풍경을 벌였고, ‘무소유’는 전자책으로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를 차지했다. 이 땅의 인간을 좀 더 이해하셨더라면 법정스님도 책을 절판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법하다. 소유의 욕망은 존재의 욕망만큼이나 뿌리가 깊어, 무소유의 정신조차도 소유하게 만든다.


바로 소유가 문제


이처럼 대개 사람들은 돈을 소비해 물건을 소유하거나, 돈을 축적해 불로소득으로 부를 늘리려 노력한다. 상위 2%에 속하는 자들이 막강한 땅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여전히 경쟁과 착취의 틀 안에서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나는 인간의 ‘욕망’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한가? 얼마 전 김석순 이모(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부회장)가 잠비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열대지방 현지인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적어도 일정 정도 돈과 음식이 생기면 일을 중단하고 가족, 이웃들과 그것을 나눈다.’는 자급자족의 현실상을 그려주었다. 소유를 통해 행복할 수 있지만, 소유하지 않음을 통해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고 열대지방은 미성숙한 비자본주의 사회다. 한 때 한국도 자급자족 했던 사회다.’라며 일축할 수 있지만, 나는 소유의 문제를 꼭 자본주의나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토대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자립생활의 공동체가 대안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국가의 많은 제도는 기회의 평등보다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교육이나 지식조차 상품으로 변했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당한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산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다. 이러한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본다. 자급자립의 공동체, 자본 없이도 나름의 재능과 관심을 꽃 피우며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 정신과 인간됨으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 각자 제 재능을 살려가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나의 삶은 이제…


내가 받는 학벌없는사회 활동비는 한 달,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한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20만원, 통신비가 5만원. 그러니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삶을 충당했지만, 현재 내 자산은 카드빚으로 쌓여있다. 요즘같이 힘들 때가 없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욕망을 없애 준다. 내 처지를 아는지, 사람들은 함께 끼니를 나누고 음악을 가르쳐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건넨다. 배고픈 내게 항상 무언가 던져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의 문제는 결국 돈과 맺는 어떤 관계이기에 불편함이 있고, 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반복해야만 한다. 결국 자발적 가난이든 자급자족이든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긴 힘들 듯 하다. 때로,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어 다른 사람의 짐조차 들어줄 수 없는 삶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삶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 주류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실천하는 일이다. 이제 내 자신을 경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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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조항, 그리고 정치적 권리의 행방불명 -


공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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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보신각에서 '쥐를 잡는 쥐덫을 놓는 1인들'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있다.



정치의 실종


요즘에 청소년인권에 관한 따끈따끈한 신간,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를 읽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교육과 연구 등을 해오던 김민아 씨가 지은 책인데, 이 책의 서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인권교육을 다니다보면) “문제의 답을 고르듯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라고 묻는 청소년도 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쉽게 맞닥뜨릴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자신들이 처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고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인권침해 맞죠?” 그리고 마치 시험 답 맞춰보듯이 헌법 몇 조, 유엔아동권리협약 몇 조를 인용한다. 그 다음은? 인권침해 맞으니까 논리를 잘 갖춰서 얘기하겠다고 하거나 신고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보는 것은 청소년인권 문제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운동이나 저항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겪은 경험에 대해서 ‘인권’이라는 규범이 ‘정답’을 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잘못 채점된 시험 답안지에 대해 항의하러 가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고’를 하거나 하소연을 올리곤 하는 정도?

이때, 인권은 지금 여기에는 없는 권리를 사회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실현시키는 역사적인 과정과 그 결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인권은 이미 존재하는 교과서적 정답이자 도덕률 정도로만 이해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이 질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 그러니까,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2009년부터 만들어져온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2010년 경기도 교육위원회에 발의되었다. 그러나 발의된 안은 처음에 공개되었던 초안과 달리 집회의 자유에 관련된 조항이 삭제되고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세계관․인생관 또는 가치적․윤리적 판단 등 양심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대체된 안이었다. 결국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통과는 무산되었지만, 9-10월 즈음에 경기도의회에 재상정될 안 또한 그 내용은 같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청으로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한 최초의 사례인 경기도교육청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에 관한 부분에서 한 발 후퇴한 안을 내놓음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이 두 부분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슈가 될 듯싶다.

물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에서 집회의 자유에 관한 조항과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빠졌다고 해서 청소년들에게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초안에는 한 번 들어갔던 조항이 최종 발의안에서는 빠진 것을 학생인권에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할 사람들은 널려 있다. 최소한 교육청이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의지가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언론들에서는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안 발표를 “학생들 교내에서 집회 못한다”라는 식으로 표제를 뽑아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욕을 먹는 것일까? 그리고 왜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와 혁신학교로 일각에서 추앙받으시는 김상곤 교육감 님하도 집회의 자유 조항과 사상의 자유 조항을 부담스러워 하며 뺀 것일까? 따져보면 저 장대한 비극의 한국사 100여년을 거슬러 가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한국 사회에서 ‘정치’나 ‘사상’이라는 말에 관련된 프레임을 분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격적인 분석은 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하라고 하고, 나는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라고 말하겠다. (이 글의 컨셉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권 중에서도 정치적 권리의 대표 주자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이다.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 전반을 부정하는 셈이기도 하다. 사실 교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민주노동당에 후원금 좀 냈다고 교사들을 다 짜르겠다고 하는 꼴을 보면 분명 한국의 학교는 정치를 싫어한다. 요컨대, 입시교육은 정치와 정치적 권리, 특히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싫어한다는 얘기다.



입시교육은 어떻게 정치를 억압하는가


입시교육의 특징은 철저한 정답주의이다. 교육의 목적이 입시가 되어있는 이상, (그딴 걸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이 아니라 입시전형과 평가기준에 맞춘 답을 찾는 것이 주가 된다. 또한 입시교육은 개인주의적이다. 입시는 결국 개인의 능력주의와 출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의 이러한 특성들은 정치의 특성과는 여러모로 배치된다. 우선 정치는 상대적이다. 정치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가치의 재분배/조정이라고 정치를 정의하든, 배제된 사람들의 주체화라고 주장하든, 정치에서 정답을 찾기란 힘들다.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해관계들/이념들, 방법론들, 권력들이 있을 뿐이다. 정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는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를 단언하기 어렵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각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능력과 정세 등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교과서에 비추어볼 때 누구의 말이 옳으냐가 아니라, 누구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교과서나 해답지에 명확한 답이 있고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것이다.

또한 정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는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이 부각되는 때에도 사실은 그 개인에 얽힌 집단의 문제일 때가 많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김상곤 교육감의 정책도 김상곤 교육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조직화된 집단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소통, 공론장이 없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제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시키는 입시교육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문제’들이 정치에서는 다루어져야 한다. 입시교육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정치는 낯선 언어와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고, 정치적 언어와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순순히 입시교육에 순응하지 않기 십상이다.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 ‘반교육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그 말이 사람들에게도 왠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그림이 ‘입시교육’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어떤 올바른 것(정답)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학생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정답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장려한다니, 입시교육이 교육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반교육적으로 보이겠는가. 교육이 개인이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문제풀이 능력 등을 개발해서 입시나 취업에서 성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집회의 자유는 반교육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집회의 자유를 놓고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선동’에 휩쓸릴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또한 이런 경향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학생인권조례에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입시교육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눈에 띈다. 예컨대 학내 집회의 자유에 관해서 “학내 집회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장되는 것뿐이고 학교 운영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된다면 학내집회를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학교가 정치의 장이 될 거라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같은 말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결국 집회를 또 하나의 정답 정도로 만드는 것 아닐까?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을 때 학생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집회를 택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정당화되는 집회의 목적과 수단을 한정짓고, 집회를 온건하고 이성적이고 다소 비정치적인 무언가로 만드는 것 자체가 말이다.

사상의 자유를 단지 반성문을 강요하는 등 사상․양심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들을 막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뭐 물론 반성문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건 중요한 인권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만 사상의 자유를 얘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의 의미를, 학생들도 사람이니까,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내면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고 학교가 정치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좀 불만이다.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소극적으로 어떻게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까 하는 선에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에 대해 입시교육의 틀을 깨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전교조 조합원들 중 몇 명이 정당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인권단체 안에서는 이 사건을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청소년들이 집단 정당 가입을 발표해버릴까?” 하는 논의를 했었다. (전교조 자체가 별로 이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징계 절차나 양형이나 기준의 문제 정도로만 다투려는 것 같아서 접기는 했지만…) 이렇게 지금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교육을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교육이 정치의 장이고 사회적인 공론의 장이어야 하며 정답만 강요하고 개인주의를 강화시키는 입시교육을 부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미 그 자체가 정치적인 ‘입시교육’이, 자신은 비정치적인 양 탈을 쓰고 정치를 압살하는 이 시대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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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가 필요하다

- 수완중학교 교사 성추행 의혹사건을 보면서 -


신가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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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산구 주민이다. 수완중학교(이하 수완중) 근처에 사는 주민이다. 동네 주민으로서 작년 초 여름부터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이 왜 학교일에 관심이 있나?”면서 의아해 할 지 모르겠다. 국가기관이 정해준 학교란 공간은 오로지 그 안에서 노동하거나 학습하는 주체들‘학생․교사․학부모’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학교라는 공교육기관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인근 주민과는 그저 “운동장 사용” 혹은 “배드민턴 동호회”정도나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학교 인근에 사는 주민이 학교일과 관련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은 주제 넘는 짓이라고 여기기 쉽다. 나는 반문한다. “왜 안 되는가? 왜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국가가 국민 세금으로 지어놓은 학교라는 공간, 공교육 공간은 과연 교사와 교장의 것인가? 그곳에 다니는 학생만의 것인가? 학생을 둔 학부모만의 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학교 인근 주민은 인근 공적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가? 수완중 주민인 소위 학교라는 공적인 ‘배움의 공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가?


내가 오지랖 넓게 이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또한 교육공무원 노동자기 때문이다. 소위 공교육이라고 불리는 현장에서 노동하고 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수완중에서 근무하고 있지는 않다. 이점은, 내가 수완중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진실’을 볼 수 없는 한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그 안에 있지 않고서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일들이 많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조직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일들을 서술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조직 아니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다. 따라서 이글이 그 내부 구성원에 쓰여 졌으면 신뢰성과 타당성이 더 확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한계가 있다.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그 미세한 일들과 의미들과, 그 안에 중첩된 욕망과 두려움, 무능과 비열한 슬픔을 상세히 서술할 수 없다.


나는 수완동주민이며, 학교라는 노동현장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 자로서, 일정한 것들을 유추해서 내 관점(perspective)을 통해 진실은 구성하려 한다. 수완중에서 6월 16일부터 2박3일간 완도청소년 수련장으로 1학년 학생이 수련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그동안 선생들이 뭘 할 것인지 유추할 수 있다. 애들 줄 세우고, 카운트하고, 아픈 아이들 형식적으로 묻고, 짐 나르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아이들은 소란하고 붕 떠서 말을 듣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고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친다. ‘저놈은 왜 입지 말라는 초미니반바지를 입고 온 거야?’ 라면서 나온 저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을 고민한다. 도착해서 안전하게 교관들에게 넘기고, 그 이후에 같은 학년 선생끼리 모여서 땀을 식히며 음료수 한잔하면서 아이들 이야기하기. 비슷한 노동현장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기에 유추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전해들은 말들과 읽은 신문기사와 동네를 떠도는 풍문과 냄새를 통해 담담히 사실을 적으려고 한다. 이글을 쓰는 목적은 이미 지나간 사건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 누군가를 벌주고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을 기술하여 남김으로서, 사건 내에 담긴 여러 다양한 의미들을 탄광의 광부처럼 캐내서 그를 자세히 검토해보기 위해서다. 물론 망치와 곡갱이, 그리고 어두운 갱도를 밝힐 램프가 필요하고 이는 독자의 몫이다.


1. 수완중, 그리고 K 교장에 대해


6월 16일 수완중은 1학년 10개반은 교사들과 함께 진도청소년회관으로 수련회를 떠난다. 학생들은 대개 수련회를 좋아한다. 교실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 아닌가? 별다른 일 없이 수련활동은 시작되었다. 진도 수련관에서는 지리산 청학동이나, 해병대 극기 훈련과는 다른 유연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는 바다에서 보트로 활동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조교라고 불리는 이들도 강압적이지만은 않다.


수완중은 왜 이 진도수련회를 택했는가? 작년에 갔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학교에서는 관행을 따른다. 작년에 별 문제가 없었으면, 그냥 그대로 추진한다.


수완중은 작년에 개교를 했다. 교장 K(존칭생략)는 평교사 출신의 공모제 교장이다. 이점은 수완중 정체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원 승진은 교감자격증을 소지한 후, 교장이 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K교장은 공모제 교장제도를 통해 평교사에서 바로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새 학교로 부임한다. K교장은 평교사 전교조 출신으로 알려졌다. 또한 전교조가 추진하는 ‘(혁신학교를 위한) 새로운 학교모임’에 관심이 많다. 2년차 되는 해(2010)에는 전교조 상근자 출신(소위 강성 전교조)을 초빙한다. J, B, L 등 광주광역시에서 전교조 핵심 멤버들을 초빙하여 학교를 재구조화 하겠다고 한다. 이들은 경기도의 혁신학교, 그리고 핀란드를 모델로 학교들을 연구하며 새로운 학교를 연구하며 공부하는 분들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새로운 학교를 연구하는 일부 회원들도 같이 초빙하여 학교의 재구조화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 알려진다.


문제는 K 교장이 이들과 의견을 같이하는 이들뿐 아니라, 전혀 색깔이 다른 교사들을 초빙했다는 점이다. 일정한 철학을 공유하고, 학교재구조화의 그림을 그리며, 학생과 학부모를 주체로 세우는 큰 그림 없다. 일부 전교조 선생을 초빙하고, 일부는 교총소속이며, 무난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을 또 초빙했다는 점. 학교는 첫 출발부터 삐그덕 한다.


학교의 교직문화에는 이상한 ‘연공서열’이 있는데, 그 학교 근무 연수가 상당히 중요한 힘이 된다. 학교 개교 멤버들은, 개교과정에서 아주 힘든 업무들을 맡는다. K교장이 전교조 출신이긴 했지만, 교사들의 업무 경감이나 학생인권 문제에는 별다른 주안점을 관심을 전혀 두지 않는다. 원년 멤버들은 개교 첫해 엄청난 업무에 시달렸다. 그들은 두 번째 해에 초빙된 교사들과 보직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동시에 학생인권주장을 하는 일부 극소수 교사와도 갈등하는 상황에 놓인다.


초빙교사와 개교멤버 교사간의 갈등은 물론 전교조라는 교원노동조합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교조 소속이긴 하지만, 학생인권이나 학교재구조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기도 한 조합원도 많다. 회비납부를 기부와 비슷하게 여기는 평범한 조합원과 상근자 출신으로 전교조에 정열적인 조합원간의 갈등이기도 하다. 이는 주로 학생지도 문제를 통해 나타나는데, 두발단속/자치활동/용모 문제에 대해서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상근자 출신중에서도 일부만 학생인권에 관심이 있고 각각 우선순위도 다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전교조 정체성이 강한 J교사와 다른 교사들 사이에서 학급운영을 두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있고, 갈등이 쌓이고 있다고 한다.


원년멤버 vs 초빙교사의 갈등, 그리고 전교조 교사 중에서도 학생인권을 두고 ‘잡자’vs‘놔두자’의 갈등. 이 갈등의 배후에는 전교조 출신 교장 K의 철학부재가 있다. 첫해부터 그가 중점에 둔 것은 시를 통한 학생인성교육이라는 기치였는데, 교육청이 보면 너무너무 좋아 할 말랑말랑한 것들이었다.


그는 첫해부터 전교조 이념을 구현하는 어떤 정책도 없이 시설을 중점적으로(일반 교장들과 같이)‘예산따오기’에 중점을 두었다. (화장실 들어가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두고 인성교육예산투자라고 여기는.) 그래서 ‘시비(詩碑)’등을 제막하고, 학생들에게 ‘시외우기’와 같은 것으로 인성교육을 한다고 했다. 교사들은 그의 의중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어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더구나 명품 수완중 학군에서는 빈부격차가 많아서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는 학생이 한반에 5명이 넘을 정도로 힘든 형편에 있는 학생들이 있고, 본드 등을 흡수해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로 교사들은 지도가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 “시를 외워라”라면서 인성지도를 한다고 하는 교장이 답답하고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일부 교사는 그래서 첫해 교사들은 의견서를 수렴하여 제출했다고 한다. K 교장은 그러나, 방과 후 학교 등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대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전교조에도 멤버쉽을 자랑한 듯 하다. 전교조 핵심멤버들과 함께 <이우학교>나 <핀란드교육모델>을 도입하자고 했지만, 그가 단단한 철학적 배경위에서 학교운영을 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극적인 사건은 올해 6월 교과부가 민주노동당 가입 교사를 징계하려고 했을 때 벌어졌다. J교사가 광주에 5명 징계대상자에 포함되었다. 많은 교사들이 이에 분노하고 항의했으나, 교장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전교조 현수막을 불편해 했다는 것이다. J교사에게 은근히 “내가 안순일 씨에게 전화를 해서 빼주라고 부탁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부 교사는 K교장이 안순일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교장을 한 것이지 전교조 철학과는 무관하다고 실망했다고 한다.


2. 사건에 대해.


6월 16일부터 2박 3일간 수완중 1학년 진도수련회는 진행된다. 참교육학부모회(이하 참학)에서는 7월1일자 성명서에서 교사들이 “교사들이 프로그램과 내용을 채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련관에 모든 프로그램을 맡기는 경우가 허다하다.(중략) 이 때 교사들은 모든 프로그램을 수련관의 강사에게 맡긴 체 교사들만 머무는 공간에서 음주를 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썼다. 맞다. 대부분 교사들은 프로그램을 맡기고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할 일 없이 아이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뒤쳐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하지만, 교사로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교사는 거의 없다. 자유롭게 즐거운 시간 때우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도 교육과정 자체에서 소외된 느낌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소외현상이다. 물론 이 소외는 교사들이 수련회 2박 3일 프로그램을 직접 짜고, 행할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2박 3일 약 400명 되는 집단을 인솔해서 프로그램을 짜고 안전을 다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면, 교사들은 매우 가혹하게 여긴다. 왜 수련회가 필요한가? 모두 거부할 것이다.


교사들끼리 하는 이야길(일명 꼰대토크)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주 독특하다. 대개 서로 딱딱한 갑옷을 차고 말을 나눈다. 자기 삶과 속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성(性)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동료와 이야기 해본 적이 없다는 10년차 여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성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삶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음담패설처럼 히히덕거리는 농담을 하는 중년교사 아니면 서로 자기의 개인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자기 내면과 삶을 드러내기 힘든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좁고, 말 많은 세계라는 인식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 교장흉보는 이야기(같은 그룹에서만), 아이들 이야기로 채워진다. 서먹서먹한 경우, 그 차가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는 ‘알코올’이 필요하기도 하다.


수완중 1학년 교사들 중에 술을 아주 즐겨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남교사도 있었지만, 문제가 된 H교사 외 만취상태까지 술을 즐긴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H 교사는 수련회 도중에 ‘회’를 사서 먹어야 한다면서 일부러 진도까지 나와 회를 사가지고 왔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은, 그가 23일 성추행 논란이 일자 학교 담당자들과 의논하여 ‘병가’를 낸 후 학년 모임 담당선생님한테 “그때 우리가 먹은 회 값을 계좌로 부쳐주라.”라고 문자를 보냈다는 것.


그날은 월드컵 한국전이 있는 날이다. 왜들 그렇게 미치는지 모르겠지만, 4년마다 한 번씩 세계는 축구를 통한 국가주의자들로 넘쳐난다. 한국은 더 심하다. 캠프파이어를 진도청소년수련원에서는 밤에 진행한다. 그러나 이날은 특별히 교사들과 협의 후에 해가 반짝반짝한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진행했다. 저녁에 한국과 아르헨티나 축구경기를 봐야 하니까. 소리 지르면서, 축구경기를 모두 다 관람한다. 아무리 “대~~한민국” 외쳐도 4-1로 농락당한 경기다. 학생들은 흥분해서 소리 지르며 경기를 보고 그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그런데 더 식히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술을 더 마시기로 한다. 마침 17일 오후에 교장이 맥주를 사가지고 방문해 교사들을 위로한다. K교장은 이 사실을 언론과 감사팀에 부인한다. 광주드림 홍성장기자의 <못된 교사, 수련회서 중 1제자 성추행 (6월30일보도)>에 보면, 교장은 모든 것을 부인한다. “(교장 왈)수련회에 함께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그는 수련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수련회에는 교장, 혹은 교감이 따라가서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K교장은 함께 따라가지 않았다. 2학년 수학여행도 6월16일 떠났을 때 오히려 교감에게 가라고 부탁(명령?)했다고 한다. 그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술을 사들고 수련회장을 방문한다. 맥주를 말이다.


그렇지만, 광주드림 기자에게는 딱 잡아떼기로 일관한다. 광주드림 기자가 질문하자 처음 보인 반응은 ‘어디서 알았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많이 들어본 역겨운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가 서부교육청 청렴감사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고 하고, 본인이 전화를 교육청으로부터 받고 질책 맞은 후 일부 사실을 시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술을 사들고 수련회장을 방문한 것은 강력히 부인한다. 이를 후에 2학년 학년 부장인 J선생이 묻자 그때도 그는 강력히 부인했다고 한다. J선생은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열기가 식지 않은 일부 교사들은 방에서 술을 마시고, 일부 교사는 잠을 자러간다.


교사들 일부가 그 다음 경기, 새벽에 하는 경기마저 봐야겠다고 기다렸다고 한다. 평소 조용한 교사인 H가 많이 취했다고 한다. 체육교사인 H는 교총소속이면서,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예절바른 성격에 남다른 체격을 가진 그는 매우 호감이 가는 교사다. 180이상의 키에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외모에 광주 교사들 사이에서 배구로 유명한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다만, 학생들에게는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두발 문제 등에 있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했다고 한다.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교실을 개방하여 저녁 늦게까지 희망자에 한해 공부를 하도록 지도했다고 한다. 초등과 달리 중등교직에서는 배구가 일상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H교사는 수완중에 발령 받자마자, 교사 팀을 조직해서 대회에도 나가는 등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부 여교사들은 뒷담화로 외모가 출중한 그의 과거 연애담을 험담삼아 나누기도 한 모양이지만, 이제 서른 중반의 미남이자 첫아이 출산을 앞둔 초등교사 아내를 둔 그가 성추행 추문에 휩싸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6월 21일, 수련회를 마친 후 월요일, H교사는 출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1학년 학년 부장을 통해 H교사가 성추행 추문에 쌓였다는 사실만 1학년 선생들을 통해 알려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히려 교사들도 모른다. 학부모가 항의를 했고, 교감과 교장이 주말 무렵 H교사를 호출해서 상의를 했다고 한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놀랐고 믿겨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로지 교장과 교감, H교사만이 안다. 6월23일자로 H교사는 병가를 냈다고 한다.


학년 부장과 그 외 1명만이 교육청 청렴감사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학년 부장을 통해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은 것으로 하고, H혼자 술을 마신 것으로 한다.” 정해진다. 두 명이 감사팀에 의해 서약서(거짓말을 할 경우 처벌받겠다)를 썼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은 입을 다물기로 한다. 과연 H가 진짜 그랬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하는 추측들만 조용히 선생님들 사이에서 오간다.


학생들 중 일부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수련회일 때문에 못나오죠?”라고 하는 학생의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왜 체육선생님이 안 나오는지 모른다. 학교는 그 반에 담임배정과 체육시간 땜빵 문제가 오히려 시급해진다.


6월 29일 뉴시스에서 <광주 모 중학교 교사 학생 성추행 논란>이라는 인터넷 기사가 뜬다. 맹대환 기자가 작성했다. 오후 6시 18분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기사다. 이니셜을 수완중을 A중으로, 문제의 교사도 B로 되어 있다. 분명히 ‘피해 학부모의 항의’로 조사 중 이란다. 교육청은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피해학생을 상대로 조사할 방침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교육청은 학생을 상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학무모 동의’가 없기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수련회에 참여한 교사들 진술도 받지 않고, 학교 교직원들도 감사팀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조사가 어디 있는가? 그것이 조사인가? 학년부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 그리고 학교에서 떠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정해주면, 존중해서 해주겠다.”고 했단다. 사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교육청 인사가 와서 조사해서 파헤칠 수 있는 진실이란 것이 있을까? 소위 감사팀 공무원이 보는 사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이름 할 커다란 그림에서 작은 색소도 못 칠하는 것이다. 그는 관료적으로 와서, 적당히 관계망 속에서 조용히 처리되기를 바란다. 다만, 언론에서 떠드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은밀히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3시간 후에 뉴시스에서 다시 기사가 나온다. 속사포 같다. 제목은 “광주 中 수련회 성추행 논란 일단락”이다.


자. 사실들은 갑자기 변한다. 세시간만에 말이다. ‘해당학생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고, 항의했던 학부형은 ‘자녀를 상대로 진위를 파악한 결과 성추행은 없었다.’고 했단다. 왜 이렇게 갑자기 변했을까?


실은 기사가 나온 6월 29일은 사건이 터지고 난 일주일이 거의 지난 무렵이다. 일주일동안 학교에서 나온 말들은 이 기사의 배경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학교 교장과 교감, 학년부장, H교사, 한마디로 사건 관련자들은 매일 그 학부모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H교사는 계속 부인했지만, 어떻게 되었건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학교 관계자들은 학부모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애가 잘되게 하는 것, 아닐까요? 아마 부형님도 그걸 바랄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주 간절하게.


신혼인 H교사는 아내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출근하는 척 했다고 한다. 출산을 며칠 앞둔 아내도 낌새가 이상해서 학교에 몇 번씩 전화했다고 한다. 신혼인 H교사의 개인적인 딱함을 부형에게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그 학부모가 원하는 게 뭘까 라는 말들이 오고 갔다고 한다.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추잡한 이야기들.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오로지 그것은 당사자만 아는 것이다. H교사와 학부형은 ‘술을 마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제 소문만 퍼져 나가지 않으면 된다.


수련회에 다녀온 교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H교사와 같은 방을 쓰던 남교사에 의하면, 새벽에 그가 컴퓨터를 가지고 아이들 방에 갔고, 아이들과 영화를 봤다고 한다. 새벽 6시 무렵, 그가 남자 방에 돌아왔는데, 자고 있는 중에 들으니 혼자서 “아,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라고 중얼대었다고 한다. 그 남교사는 그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니 H교사가 정말 ‘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또 어떤 교사는 추론했다. 만약, H교사가 자기 증언대로 만취한 상태에서 학생들 방에서 잤다면, 어디서 일어났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말로 만취해서 잠에 들었다면, 계속 아이들 방에서 잤을 것 아니냐. 컴퓨터 앞에서 그대로 꼬구라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잤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가 3시까지 만취해서 술을 마신 후 아이들 방에서 영화를 본 후 잠이 들었다가 교사 방으로 6시 무렵 돌아왔다면,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느냐… 등.


교사들은 피해의혹이 있는 학생이 누군지 알았다. 그 아이를 쳐다볼 때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일부 교사들은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7월1일 광주드림 오프라인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기사<못된 교사, 수련회서 중 1제자 성추행>가 나간다. 교장은 전날 기자에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다가 오히려 청렴감사위로부터 지적을 받고, ‘조사 중’임을 시인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 이후에 학교는 범인색출에 들어갔다. “누가 찌른거야?” 말을 하지 않고,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바깥으로 떠벌린 자들을 색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전교조 상근자 출신이며, 강성이미지를 지닌 특성화 부장 B선생은 광주드림에 전화를 걸어 “누가 제보했는가.” 물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학교 내에서 계속 의심을 받는 눈초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학년 부장도 돌아다니면서 교사들에게 “누가 제보했을까?”,“혹시 남편도 알아”라고 물었다고 한다.


7월 1일 동시에 참교육학부모회에서 <광주 A중 여제자 성추행 의혹 철저한 조사를>이란 시원한 성명이 나온다.


성명서 문구 중‘더구나 이 학교는 올해 교사, 학생, 학부모가 힘을 합쳐 배움의 공동체를 실현하고, 공교육의 기능을 살리고자 뜻있는 교사들이 많이 모인 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학교 관계자라면, 대체적으로 수완중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참학 뿐 아니라, 전교조 광주지부도 성명을 냈다고 했지만, 전교조 성명서는 홈페이지에 탑재되어 있지도 않고 찾을 수 없다.


교장은 7월 2일, 사건을 공식화 한다. 몇몇 교사들의 낌새를 눈치 챈 것이다. 몇 명의 교사들이 교장에게 사건을 쉬쉬한다는 항의를 했다. 교장은 직원회의를 연다. 그리고 광주드림 기사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반박했다고 한다.


자신은 수련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못된 교사”라고 수완중 전체교사를 욕보인 점에 분개한다는 것. 처음 언론을 대했기 때문에 약간 미숙한 점이 있었다는 점 등. 참석 교사들의 분위기는 우울하고 교장에 대해서 짜증이 났지만, ‘못된 교사’라는 표현에 대체적으로 분노했다고 한다.


교장은 눈물까지 보이면서, H교사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한국의 공직자들이 늘 보이는 모습이다.) 이를 듣던 교감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수완중의 명예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학교차원에서 직권면직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단다. 재빠른 대응이다. “이제부터 H교사는 수완중 교사가 아닙니다.”라고 선언했다. 전교조 교사 중에 일부교사들이 문제를 삼으려 하자, “이제 우리학교 교사가 아니다. 교육청이 징계할 문제다.”라고 발뺌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제기를 할 주체가 없다. 조용히 있다가 사건은 잊혀지는 것이니까. 그 후에 7월 23일 H교사는 감봉 3개월 처분이 떨어졌다. 학생인권조례 위에서 수완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명서를 발표하지만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상무지구 근처에 있는 중학교로 전보되었다는 ‘인사’발표가 난다. 수완중은 8월26일자로 기간제 교원 모집공고를 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학생들의 수업은?


모두가 그렇겠지만, 학교란 배움이 일어나는 곳이다. 교사의 추문으로 거의 2달 가량 수완중은 파행적인 교육과정이 운영된다. 체육수업은 생략되거나 자율학습으로 대체된다. 다른 체육교사들이 합반을 하는 파행운영이 계속된다. 전교조 평교사 출신 교사라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문제였는데, 교장 K는 이에 관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더구나 징계가 나온 이후에 9월 되어서야 기간제 교원모집공고를 낸 것은 학생들의 수업권을 얼마나 관행적으로 무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처사라 하겠다.


3. 잡생각들.


지금까지 최대한 수완중 동네 주민으로서, 또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으로서 듣고, 보고, 느끼고, 냄새 맡은 것을 적었다. 이는 엄밀하게 법적요건을 충족시키는 사실(fact)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누구를 욕보이기 위해서나 다시 H를 벌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말한다. 다만, 이 사건을 접하면서 느낀 점을 몇 가지 적으려 한다.


첫째, 참학과 학생인권조례위의 성명서관련.


내가 제일 반가운 성명서였다. 아, 우리 편도 있구나.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참학의 성명서 내용에는 ‘성추행 교사 엄중 처벌로 교육비리 추방하라’는 것이고, 부제는 ‘학부모들은 이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곳이 없다’라고 하면서 “교육청은 성추행 교사를 엄중 처벌하라”고 했다. 그러나 교육청이 왜 그렇게 하겠는가? 교과부는 이미 4월 달에 3대비리(성적조작/성추행/금품수수)는 봐주지 않고 중징계 하겠다고 발표했다. 교과부란 관료조직을 우리는 진정성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교육청 관계자들도 시끄러워 비판 받기보다는 성추행이 있다면, 깨끗이 처벌할 분위기는 되었다. 


하지만, 왜 안 되는가? 관료 입장에서 보자. 그들이 문제가 터진 학교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학부모가 항의를 했고, 갑자기 학부모가 잘못 알았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사건은 내부에서만 알 수 있지 않은가? 부에서도 당사자들, 그러니까 공모제 중간평가를 앞둔 교장, 교장승진을 앞두고 있는 교감, 교감승진을 위해 경력을 쌓는 학년부장, 당사자가 아닌 이상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할 수 있는가? 물론 그가 냉정한 관료라면, 학생도 부르고 학부모도 직접 만나서 조사할 수 도 있겠지만, 성명서에 나온대로 ‘~~해라~!!’외치는 것은 효과가 거의 없는 부르짖음이다.


성명서에는 차라리 실명을 그대로 쓰고, 침묵하는 전교조 교사와 분회를 비판했어야 했다. 오히려 참학과 학생인권위가 나서서 직접 목격학생을 조사하고, 교사들을 조사하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바뀔 리가 없다. 참학은 ‘어디에 하소연 할 곳이 없다’고 했지만, 미안하지만, 게으른 외침처럼 느껴진다. 참학 입장에서는 학부모 입장을 충분히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갑자기 학교에 항의를 하다가 입장을 바꾸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애가 잘 되는 게 우리 목표 아닌가요?”라고 굽신거리며 은밀히 협박하는 학교 측에 누가 배겨날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이해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액션이다. 지금은 적이 도처에 있다. 구획을 나눠서 선생편, 학부모편, 학생편을 나누는 것은 구체적인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명서에 ‘하소연도 할 곳 없다. 우리 학부모는 약자다’라는 등의 호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전교조란 조직은 더 이상 어떤 이미지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라, 그야말로 노동조합의 이익에 걸 맞는 국가기구의 한 파트란 점이다. 따라서 그를 환원해서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야 말로 위험하다는 점이다. 이점은 전교조 출신 교육감, 그리고 교육위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역할(Role)과 위치(Position)가 사람을 만들지 그 역은 아니라는 냉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전교조 출신 중에 대다수는 학생인권에 침묵했고, 일부 교사만 반응했다. 일부 교사도 전교조라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자신이 직접 교사에게 당했던 그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분노했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과 관련해서 교사에게, 혹은 전교조에게 기대하기는 접어야 한다. (물론, 이글을 읽는 독자라면 접었겠지만). 기대를 접고 오히려 담담하게 노동조합의 이해관계에 맞도록 파트너 쉽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교사들은 매우 방어적으로 침묵 속으로 자기들의 짓거리를 도피할 수 있는 유용한 기제가 있음을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교사들이 나쁜 놈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 침묵을 어떻게 깨부술 수 있는가를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들에게 침묵문화를 깨라, 라고 강요하는 것은 6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고삼수험생에게 ‘공부 좀 더해라’라는 강요와 비슷하다. 한줌도 안 되는 관료 몇 명이 사건을 만들어 버리고 의미를 창출하여 결론 내버리는 이 구조 자체를 뒤집기 위해 교사 내부의 문화를 미시적으로 파악하고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개 교사들은 침묵하고 자기보신에 강하다.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연애할 때 ‘그/그녀를 어떻게 꼬실 것인가’처럼 고민해야 한다. 침묵하는 그 학생/목격자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중산층 의식에 사로잡혀 아이미래를 위해 침묵을 결정한 학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점들을 현실성 있는 질문으로 제출해야 한다. 범죄자 색출하여 처벌하기 관점에서 벗어나 실효성 있는 토론으로 나가야 한다.


세 번째


행사문화. 수련회를 학생들이 좋아한다. 공부 않고 교실 바깥으로, 야외로 나가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야 이것도 교육과정의 일부로서 구성되는 척한다. 이는 교사도 알고, 학부모도 알고, 당국도 다 알지만, 형식적으로 그럴 뿐이지 잠시 수업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체험학습이라고 이름을 달지만, 수업에서 벗어나 노는 것이다. 왜 놀면 안 되는가? 참학 성명서를 보면, 이러한 수련회 문화, 교사음주문화를 비판했지만, 그 전제는 교육청 꼰대들의 전제와 같다. 학교는 뭔가를 배워야만 하는 곳이며, 교육 과정 속에서 학습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놀아선 안 된다?


아니다. 놀아도 된다. 이런 좀 통 큰 생각을 하자. 그리고 교사가 프로그램 짜고, 교사가 관리하는 것, 바라지 말자. 그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멍청한 짓이다. 수련회 프로그램이 그중에서도 가장 낫다. 학생들을 재미있게 해준다. 400명 가량 는 아이들을 차량 10대 빌려서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형태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수련회 자체를 제고해야 한다. 학년 전체로 뭔가 체험학습으로 행사를 잡고 교육과정에 반영하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작은 학급 단위로 무엇이든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과정에 체험학습 쇼를 하는 척하지 말고 ‘노는 날’을 각 학급에 자율적으로 부여하여 학급 단위로, 혹은 학생회 자치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프로그램 짜고, 니들이 운영해야지, 술판이나 벌여서야 되겠냐.’는 비난은 울림 없는 메아리요, 또 다른 교육청관료 꼰대 목소리에 불과하다.


네 번째


학교 내 성희롱은 권력관계 문제다. 아니, 모든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학교폭력자치위(이하 자치위)가 있는데, 왜 교사의 폭력은 자치위에 회부가 안 되는가? 학교의 주체는 분명히 학생, 학부모, 교사라면서 왜 교사는 자치위에 회부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이점에 비추어 봐도 성폭력은 미세한 권력의 문제다. 따라서 이 권력이 균등하게 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될 리 없다. 또한 권력은 결코 스스로 그 힘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은밀하게 작동한다. 따라서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스스로 주장하는 권력(실은 텅 비어있음)을 개무시하며 개입해야 한다. 즉, 문제가 생기면, 자율적으로 소위 시민단체가 개입해서 조사하는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성문제처럼 민감한 문제일 경우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점(상담과 치료제공)도 있겠지만, 수완 중처럼 미묘하고 미세하게 침묵의 안개 속으로 덮여 버리는 경우가 훨씬 빈번하다.


이 시큼하고, 추잡한 안개 속에서도 눈 또렷이 뜰 램프가 ‘외부’아닐까? 그리고 곡갱이, 망치를 통해 파헤치는 광물을 파헤치는 광부처럼 사실과 진실을 구성해야 하는 것 아닐까? 교장, 교감, 학년부장, H교사, 그리고 아이 미래가 두려운 학부모는 자기들만의 ‘사실’을 만들고 ‘진실’을 만들었다. 한줌도 안 되는 그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더 큰 진실구성력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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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로 읽는 헌법 (사형제도)


법대생 차진태 모세


얼마 전에 모 부장판사님께서 자살을 하셨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동일 직역 등 유사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보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사실, 곧 ‘자살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많이 슬프고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벌 없는 사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사람들을 자꾸 죽고 싶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학벌을 ‘현대판 신분’에 비유하곤 하는데, 신분 사회가 ‘나쁜’ 이유는 그것이 생산력이 약하거나 문화적으로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극소수의 양반층의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벌을 신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던 중에 작년에 초중고생 자살이 47% 급증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자살이 많은 사회.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생명은 등가성을 가진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과 존재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존중하는 문제는 범죄자의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의 문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존재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의 문제가 실은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 지를 바라보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사형제도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사형제도의 문제는 사실, 형벌 제도로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합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것은 거칠게 나누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합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2월 25일 ‘사형제도 사건’(형법 제41조 등 위헌제청)에서 합헌이라고 판시(2008헌가23)하였습니다. 판결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형제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는지 여부’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헌법적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상, 범죄자의 생명권 박탈을 내용으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는 당해 범죄자가 스스로 선택한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의 결과라 할 것인바, 이러한 형벌제도를 두고 범죄자를 오로지 사회방위라는 공익 추구를 위한 객체로만 취급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 것으로 보아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으로 일부위헌의견 1인, 위헌의견 3인이 있었으나 다수의견이었던 합헌의견이 법정의견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합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헌법적으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10년 동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TV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그 생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나은 놈’이라는 판단은 누가 하나요?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죽여야 한다면, 반대로 절대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판단은 누가 하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사형 제도의 논의가 매우 쉽게 해결됩니다. “신의 영역”의 것을 인간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이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선한) 신은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므로,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천주교 등 일반적인 그리스도교계의 입장이고, 논리는 조금 다르지만 불교에서도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입장 아래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해 왔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는 근대 철학에서도, 인권의 문제에 관하여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사실, 신분사회 안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주장할 근거는 매우 미약했지요. 서구에서 ‘인권은 하늘이 준 것이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아주 쉬운 말로 인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물론 그것은 고려시대 ‘만적의 난’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도 알려져 있듯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목영준 재판관은 위헌의견에서 “생명권은... 헌법상 제한이 불가능한 절대적 기본권”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로 돌아가서, 현재는 확립된 판시 사항이기도 한 위 판례를 다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은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바, 어느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보호가 곧바로 다른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제한이 될 수밖에 없거나, 특정한 인간에 대한 생명권의 제한이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나 이에 준하는 매우 중대한 공익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는 비록 생명이 이념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생명권 역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논리적으로 조금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이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내면적 사상의 자유와 같은 권리는 해석상 절대적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고, 따라서 생명권을 절대적 기본권으로 해석하여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사실상 학술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보통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입법자의 결단의 문제로 보아 소극적인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명문 규정이 없으니 일단 생명권은 절대적 기본권은 아닌 것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이와 같이 진행됩니다. “예컨대 생명에 대한 현재의 급박하고 불법적인 침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로서 그 침해자의 생명에 제한을 가하여야 하는 경우, 모체의 생명이 상실될 우려가 있어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하여야 하는 경우, 국민 전체의 생명에 대하여 위협이 되는 현재적이고 급박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거나 그에 못지 아니한 중대한 공공이익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범죄자에 대한 극형의 부과가 불가피한 경우 등 매우 예외적인 상황 하에서 국가는 생명에 대한 법적인 평가를 통해 특정 개인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헌법재판소는 ① 정당방위, ② 산모 보호, ③ 전쟁, ④ 흉악범죄의 경우를 나열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①, ②, ③의 경우에 비해서 ④의 경우는 법률이 사후 개입한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①, ②, ③의 경우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침해에 대한 급박한 방어행위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침해로 이어진 경우 그 방어행위에 대한 법률의 보호에 관한 문제인 반면, ④의 경우는 다른 생명의 침해로 이어진 행위를 한 자 등에 대한 처벌의 문제로써 그 재발방지에 목적을 둔 국가의 사후개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의 법정신에 입각할 때, 다른 것을 같은 것인 것처럼 나열한 점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매우 강한 힘으로 쳐들어와서 모두를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죽어나가야 했던 걸까요?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해’ 보이는데 왜 당한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이자고 하지 않을까요?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유럽’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대중의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0만 유대인들을 히틀러가 혼자서 죽인 것일까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사실, 대중들의 적극적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합법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사실, ‘우기면’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수를 죽인 더러운 민족인 유대인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대중들처럼.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면서 “안 했다”고 우기면 그만인 줄 아는 이스라엘처럼. 광주를 학살한 다음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발표한 전두환처럼. 물론 그 안에는 굉장히 ‘섬세한’ 논리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논리의 존재가 비참하게 희생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청년과, 광주 시민의 무죄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그 논리들도 결국 ‘우기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할 지 여부와 그 생명을 제거할 지 여부는 분명히 사회적 합의의 산물일 것인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기준에서 비추어 보면) ‘짐승보다 나은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라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헌법재판소 판례는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어떻게 잘 우길 것인가’의 한 ‘나쁜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섬세한 논리로 ‘우김’을 포장하면 그걸로 게임은 끝인데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사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부 못하는 초중고생’은 ‘존재 가치’가 있나요? 없나요? 많은 초중고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요?


헌법재판소의 판시에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 사회는 ‘존재 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생명이 존재 가치를 갖게 되는 데 매우 심한 압박을 주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전방위적으로 사회 분위기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 30 대 여성 자살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남성도 비슷하지만;) 최근의 기사는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재생산불능의 사회, ‘웬만하면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존속시킬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합의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폐지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높은 강력범죄율 등은 사형제도와 같은 강력한 형벌로는 결코 잡을 수 없고, 사실은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사랑, 또는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음란물들을 생산, 유포하지 않는 것들과 같은 법 바깥의 노력들을 통해서만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율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절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제대로 되기가 매우 요원하니까요.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정면 승부를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은가요? 죽음으로 도피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뵙지요.


2010. 8. 24.차진태 모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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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직무 연수를 받고 나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광주지역 인권교사연수 후기-


이겨라 (광주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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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지역 초·중·고 교사 40여 명이 지난 25일부터 `인권교육 직무연수’에 참여해 `복지가 숨쉬는 학교’ `인권교육의 원칙’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첫 시간부터 자기들끼리 약간은 도도한 모습으로 중요한 회의라도 하듯 계속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치를 여러 번 주었으나 잠깐 후에는 그들만의 중요한 회의는 여전했다. 작은 쪽지에 자신의 목표나 희망을 담은 명함을 만들어 자기소개를 하게 하였는데 여전히 딴 세상에 있는 듯이 행동하는 그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고 그 아이들 곁에 멈추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함에 휘갈겨 쓴 내용을 어렵게 읽었을 때 내 마음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말을 꺼냈으나 급기야는 호통으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학기 내내 그 아이들과의 씨름은 매시간 나를 고군분투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들과의 부딪힘은 그 반 전체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한 시간도 그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그 반 아이들은 나의 숙제가 되었으며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만남은 특별할 것도 없다. 1년 동안 만나게 되는 학급들 중에서 한 두 반 정도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이 있으며 그 반 아이들은 그해 연구실천의 중심이 된다. 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좀 쉬운 과제는 더 잘 풀 수 있게 되는 식이다. 무난한 반 원만한 아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사실적으로는 그 아이들은 교사의 전제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된다. 한껏 날이 선 아이들은 정말 조심해서 접근하는데 아이들 눈에는 그저 좀 열심히 하고 착한 듯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답답한 인간으로 비춰지는 듯하다.


내가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그저 연구실천의 정반합이다. 이렇게 해보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또 보완해서 저렇게 해보면서 중간 중간 종이에 생각을 표현하게 해본다. 어쩔 땐 시원스러운 결론이 보이는 듯 하다가고 어쩔 땐 미궁속이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한번이라도 더, 한명이라도 더, 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영원한 텍스트다. 문제의 출발도 과정 탐색도 해결 방안도 그들 속에서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가 아이들에게는 숨 막히는 혹은 불쾌한 느낌을 주어 충돌을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반성도 해본다.


이즈음 되면 마치 아이들과 교사의 만남이 진공 유리관속의 관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와 아이들과의 만남은 비유하자면 ‘포화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사는 숱한 외부적 장애와 내적인 편견을 극복하면서 아이들과의 만남을 쟁취해 가고 있다. 교육은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만남 이상의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피상적인 모습만이라도 유지 하는데는 일상적인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마치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녀로서, 좋은 인간으로서 살고 싶지만 마음(자신의 마음 혹은 상대의 마음) 같지 않기에 늘 노력(만남, 소통을 위한 연구실천)해야 하는 점과 같다.


교사인권연수가 남긴 것


“엄마는 내가 어떨 것 같아...지금 행복할 것 같아?” ....

“ 제 아이가 어렸을 때 저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서 방학때 까지도 쉬지 못하고 수업해야 했고, 그런 구조 속에서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내 아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 2010 인권교육 직무연수 - 인권, 교육철학과 만나다 >라는 연수를 받고 나눈 소감 중에서 가슴을 적셨던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삶과 내 자식의 삶,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이 어찌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인권연수 모든 강사분의 강연은 우리의 아픔을 애도하여주고 우리 삶의 어려움을 해석하여 주었으며, 우리가 나아갈 바를 상기시켜주며 우리를 더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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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를 위해 특권층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외고 설립 중단되어야


김대준(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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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시 특수목적고등학교 지정·운영위원회가 24일 오전 광주시교육청에서 열릴 예정인 가운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시교육청 정문 앞에서 외고 설립 반대를 주장하는 집회를 가졌다. 운영위는 이날 비공개, 경찰병력까지 비치된 회의에서 광주 외국어고등학교 전환을 신청한 학교법인 홍복학원(대광여고)에 대해 승인하였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딸의 채용 특혜 문제로 전국이 시끄럽다. 편법․불법으로 얼룩진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일부 장관들의 사퇴가 얼마되지 않아 국민들의 마음은 더욱 허탈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도 연이은 악재로 빛을 바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우리 지역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외고 설립이 과연 공정한 사회와 얼마나 부합되는지 의문스럽다. 이미 외고는 본래 목적과 취지를 달성하지 못하고 명문대 입학 통로로 변질되면서 사교육비 상승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학생들 대다수가 잘사는 부모의 자녀로 채워지면서 교육양극화, 교육불평등을 넘어 국민 통합까지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오죽했으면 자사고, 외고 등을 확대하고자 했던 한나라당 조차 외고 폐지를 언급하고 나섰겠는가. 이렇듯 사실상 외고는 더 이상 확대되어서는 안되는 실패한 학교인 것이다.


반면 시교육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외고가 없는 우리 지역에 외고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과 지역의 우수 인재 유출 방지 등을 위해 외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화, 학부모 선택권, 수요자 중심 교육을 들먹이며 임기가 3개월도 안 남은 현 교육감이 외고 설립을 군사작적 방불케 하듯 밀어붙이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그럴싸하다. 일부 시민들도 시교육청에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시교육청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 시민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일부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서 외고를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속내를 철저히 숨기면서 철저히 국민과 시민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전국에 유일하게 외고가 없기 때문에 외고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매우 비객관적인 주장이다. 외고가 설립되면 광주 교육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 떠들어대지만 다른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지역을 둘러보아도 외고 때문에 그 지역의 교육환경이 더욱 좋아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외고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을 받다보니 사교육비가 상승되고 공교육이 파행으로 흐른다는 지적만 있다. 또한 외고가 설립된 서울, 경기 지역은 전국 하위권 수준의 학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부산, 대구, 대전 등의 지역도 우리 지역보다 학생들의 학력이 낮다. 오히려 외고가 없는 우리 지역이 수능 성적 6년 연속 1위로 전국 최고의 학력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민노당 권영길 의원이 밝혔듯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평준화제도가 훼손되지 않아 학생들의 학력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문제들을 초래하고 있는 외고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과 우수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외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글로벌 시대를 대비하여 외국어가 중요하다면 학교 교육과정의 다양화, 외국어 영재교실 운영 등을 통하여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외고가 설립되면 대다수 졸업생들이 서울이나 수도권 소재 대학으로 진학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것이 지역의 우수 인재 유출을 방지하는 것인지 회의적이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시도로 가는 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시도로 가는 학생보다 애향심이 있기 때문에 외고 설립으로 지역의 우수 인재가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매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셋째, 학교 다양화, 선택권, 수요자 중심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이면은 특권층을 위한 특권학교로서 외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다양화, 선택권 운운하며 생기는 학교들이 대부분 국제중․고, 자사고, 외고 등으로 잘사는 계층의 자녀가 입학하는 귀족학교이다. 다양화, 선택권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교육정책이 작동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학생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일부 특권계층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외고가 설립되면 소위 말하는 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가 과학고 1개교, 외고 1개교, 자율형사립고 3개교, 자율형공립고 3개교 등으로 총 8개교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입시교육을 하고 있는 우리 지역의 50여개 고등학교 가운데 외고를 비롯한 8개교가 일류고로, 나머지 학교가 이류고로 재편되면서 평준화 제도는 해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경쟁교육, 특권교육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확산되면서 공교육 파행과 사교육 조장 등 지역교육에 많은 문제점들이 초래될 것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대단히 계급적, 계층적인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교육 공공성과 가치중립성은 철저히 훼손되고 있다. 자율화, 다양화, 선택권 등등의 그럴듯한 말들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특권층의 요구와 입장을 반영한 교육정책이 전면화되고 있다. 외고를 비롯한 국제중․고, 자사고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무한만능,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이 지속되는 한 공정한 사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경쟁교육, 특권교육을 중단하고 협력교육, 상생교육으로 교육정책 기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 지역의 외고 설립도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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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노동의 주인 된 세상을 위해…


임동헌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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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바바(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내 노동빈곤팀)에서 진행한 캠페인 모습


“신세경(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가정부 역할) 시급 4,110원 이상 받아야 해”

푹푹 찌는 여름이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야속하게도 개학날은 다가왔다. 개학하는 날 광주는 폭염주의보가 내려졌고 아이들은 때 이른 개학에 등교하는 발걸음도 무겁다. 그래도 명색이 선생이라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

이하며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반갑고 힘이 난다. 물론 이 반가움이 얼마나 갈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며 동료선생님들과 방학 때 안부를 묻고 있는데 몇 몇 아이들이 사무실을 쭈뼛거린다. 들어오게 해서 사연을 물으니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임금을 못 받았다고 한다. 못된 사람들. 남들은 방학이라고 여기 저기 놀러 다니거나 대학 간다고 학원이나 학교 교실에서 에어컨 바람 쬐며 공부하고 있을 시간에 사는 것이 힘들어 무더운 여름에 돈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10대 청소년의 임금을 떼어 먹으려고 하다니…


세상이 아무리 염치가 없고 체면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하나 이건 해서는 안될 일이 아닌가? 하지만 실은 이러한 일은 매번 방학이 끝나고 나면 벌어지는 일이고 이제는 의례 이런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결국은 내가 찾아 나서고 있으니 이제 이런 내 일도 없어질 때가 됐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결국 상담일지를 작성하고 사업주와 통화를 시도한다. 최저임금위반, 근로계약서 작성 의무 위반, 가산 수당 지급 위반, 휴게시간 미확보, 휴일 강제 근로, 직원에 의한 성희롱, 사업주에 의한 폭언, 임금지급 4대 원칙 위반 등 위반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위반한 사업주도 전화통화로는 당당하다. 학생과 4,000원을 주기로 사전에 약속을 했다는 둥, 가산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둥, 휴게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둥.


뭐 말하자면 입을 아플 정도로 약속이나 한 듯 사업주들의 태도는 거의 비슷하다. 특히 자식처럼 생각해서 잘 해 주었던 학생이 자신에게 배신을 할 수가 있냐면서 흥분을 할 때는 차라리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보상을 해주겠다는 반응과 같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인간적인 연민마저 든다. 자신도 어렵게 공부를 해서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면서 아이들이 너무 어린 나이부터 돈에 욕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좋지 않다는 교육적인 충고를 하고 있는 사장님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움에 대해서 어떻게 설득하고 가르쳐야 하나?


이번 상담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방학 때 도급업체에 채용되어 원청업체에 가서 일을 하고 도급업체로부터 시급 4,000원씩을 받기로 하고 일을 한 학생들이 있다. 급여가 지급이 안되어 나를 찾아 와서 상담을 하고 받아야 할 임금을 계산해 주려고 하는데 근로시간을 알 수 없어서 일단 일주일만 임금이 입금되기를 기다리고 입금되고 나면 회사에 가서 근무일지를 받아오기로 했다. 5일 정도가 지나자 급여가 지급이 되었는데 너무나 터무니없는 액수가 입금이 되었고 학생들은 담임선생님(여선생님)과 함께 회사에 찾아가 근무일지를 요구했다. 담임선생님은 도급 회사 사장에게 선생이 왜 나서냐며 삿대질과 모욕을 당했고 결국 나에게 전화가 와서 사장과 이야기를 하고 근무일지 사본을 받아 오게 되었다.


참! 담임선생님도 용기가 가상하지? 그 험한 곳을 혼자 가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세상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무모한 용기를 갖게 한 것 같았다. 더 험한 일을 안 당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무튼 근무일지를 받아와 임금계산을 해서 사장에게 받아내기는 했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아이들이 배운 것도 있었을 것이고 상처받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담 과정 중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도급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이 이와 같은 환경에 노출이 되어 있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은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도급회사의 사장이 아르바이트생을 시켜서 원청회사의 근무기록을 조작하도록 하여 원청회사로부터 부당한 임금을 받아내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이지만 이 상담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기성세대의 부도덕한 모습이 학생들에게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편의점에서 야간 근로에 대한 가산수당은 커녕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일하면서 유통기한이 거의 임박하거나 살짝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과 담배연기 자욱한 PC방에서 손님이 아닌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CCTV 아래서 담배연기에 흠뻑 버무려진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PC방 아르바이트생까지,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은 가난의 고통을 온 몸으로 버티며 견디고 있다.


청소년노동인권에 대한 사업은 단순히 노동법을 위반하여 돌아오는 불이익에 대해서 상담하고 구제해주는 수준을 넘어서는 중요한 사회적 과제이다. 청소년들이 노동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학습되는 노동관은 평생의 노동관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러한 노동관은 우리 사회의 노동에 대한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노동자는 언제든지 불이익을 받을 수 있고 좀 무시당할 수도 있으며 노동은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행위이고 노동자라는 것은 별로 되고 싶지 않은, 사실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으로 자리매김 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 이상의 희망을 꿈 꿀 수가 없을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아무도 노동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꿈 꿀 수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 청소년들에게 가혹한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교육을 하고 있다. 마땅히 청소년은 공부만을 해야 하며 일하는 청소년은 불량하거나 불쌍한 청소년으로 우리 사회의 의식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일을 하는 청소년들은 돈을 밝혀서도 안되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해서도 안되는 사람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고 선진 외국인들은 비웃고 있다. 한국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미녀들의 수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외국에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요.”

“언제까지 부모님께 의지를 해야 하지요? 한국은 결혼을 해서도 부모님께 의지하는 것 같아요. 솔직히 한심해요.”

“중학교때부터 여러 가지 일을 했어요. 그 경험들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되요.”


솔직히 이 방송을 보면서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리나라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이러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니 올바른 노동관을 갖는 다는 것은 마치 북한에서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갖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며 실제로 노동자가 되었을 때 주체적인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는 조금 가난해야 하고 자신의 권리는 내세우는 것은 조직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며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어서 가능하며 꾹 참고 조용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에서 마치 청소노동자들이, 혹은 경비노동자들이 아스팔트의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볼품없는 도시락을 계단이나 화장실에서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애써 모른척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비인간적인 인간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되고 노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아름다운 행위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에게 정규교유과정을 통한 올바른 노동인권교육과 일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적극적인 상담과 구제활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또한 현재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는 반노동적인 철학적 접근을 친노동적인 철학적 접근을 개정해야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교육 중 하나는 노동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노동관을 세우기 위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인권이 아름답게 옹호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몸짓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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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 일제고사를 거부한 청소년들이 시험보는 이틀 째에도 모였어요.


첫날 참여한 초등학교6학년 친구 2명과 이 문제를 고민하는 오름학교(도시속 대안학교) 친구 4명이 함께 했답니다.



이 날 프로그램은 지역 속 숨겨져 있는 문화 발굴해 청소년교육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교육문화공동체 결'에서 진행했는데요.


일명, 의제로 투어! 의제 허백련 선생의 이름에 뜻을 길러 무등산 올라가는 길 '의재로'를 만들었는데요. 


의재로 주변에 숨겨져 있는 미술관, 부채박물관, 유적지를 돌며 문화생활을 즐겼답니다.



점심먹고 오후2시 정도에 프로그램이 끝났는데, 가슴이 아픈 말을 들었어요.


"이틀 간, 학교 안가서 좋은데, 이제 학원은 가야되요..."


크기변환_IMG_6259.jpg크기변환_IMG_6263.jpg크기변환_IMG_6267.jpg크기변환_IMG_6269.jpg크기변환_IMG_6271.jpg크기변환_IMG_6272.jpg크기변환_IMG_6273.jpg크기변환_IMG_6278.jpg크기변환_IMG_6281.jpg크기변환_IMG_6282.jpg크기변환_IMG_6284.jpg크기변환_IMG_6289.jpg크기변환_IMG_6292.jpg크기변환_IMG_6293.jpg크기변환_IMG_6294.jpg크기변환_IMG_629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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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거부 첫날, 순천 평화학교 열매반 친구들의 환영 연주 "let it be"를 시작으로

만다라그림그리기, 장명루 만들기, 평화학교 친구들과 뛰어놀며~ 순천만으로 go go~~

신나는 하루 였답니다.


농게.JPG농게2.JPG드럼.JPG만다라.JPG목사님과.JPG민주,단비.JPG순천만.JPG순천만2.JPG장명루.JPG전체사진.JPG준영.JPG준제2.JPG준제.JPG짱뚱어].JPG축구.JPG연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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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를 거부한 어느 해직교사 이야기

박수영 (일제고사 거부로 인해 해직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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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에 시행한 일제고사 때,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박수영 거원초등학교 교사(오른쪽)가 개학한 서울 송파구 거여동 거원초 교문 앞에서 닫힌 교문을 사이에 둔 채 제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항소심에 다녀오다.


오늘 8월31일은 2008년 10월 최초로 전국단위학업성취도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일제고사로 인해 해직되었던 7인의 항소심이 있었던 날이다. 원래는 7월 달에 항소심 결심이 있었고 9월 2일에 일제고사 해임 무효 소송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재판부가 바뀌는 바람에 변론이 재개되었으며, 그 결론은 한 달 더 연기되었고 거리의 교사로 그만큼 더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런 제길... 이명박정권 최후의 발악이 안쓰럽기만 하다.


일제고사 11명의 교사를 길거리 교사로 내몰다.


언론에서 다소 비중 있게 다루었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간의 상황을 정리해 보려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모두가 일제고사를 본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 기억을 조금만 더 집중해 되돌려 보면 전국단위로 이루어지는 일제고사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보통 고등학교의 모의고사는 사설업체에서 만들어진 시험을 학교별로 선택해서 본 것일 뿐이지,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시험이 아니며, 전국단위 일제고사는 수학능력평가(이전에는 학력고사) 정도가 유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조차도 응시 선택권은 철저히 개인에게 보장되어 있고 시험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2008년 이전 성취도평가

2008년 이후 일제고사

목적

국가 교육과정 운영 평가 및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행정조사

행정조사 및 학습 부진아 판별

대상

6학년, 중3, 고2 대상

표집평가(2007년 까지 3%)

6학년, 중3, 고2(2010년부터 고1)

전수조사

결과 처리

교육과정 평가 및 교육정책 수립 자료로 활용

결과에 대한 개인별 통지 및 정보공시법에 따른 학교별 결과 공개.

부작용

국가교육과정 운영 결과에 대한 판단은 있으나 원인 해소에 대한 대책이 없음.

학생 개인 서열화 및 학교별, 지역별 서열화

사교육비 증가

협력적 교육 실종 및 경쟁 만능 풍토 조장

학생 전인적 발달 불가능


문제가 된 2008년 전국단위학업성취도평가(이하 일제고사)는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험방식으로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경쟁 교육 정책의 하나였던 것이다. 2008년 이전에도 국가수준의 학업성취도 평가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 시행 목적이나 방식은 2008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며 일제고사 형태는 아니었다.


일제고사의 목적은 분명하다. 학습부진아를 판별해 내고 기초학습능력을 책임지겠다는 말과는 달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교육적 차별을 정당화 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2008년 이후 벌써 3년째 일제고사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2008년 처음 시행된 일제고사에 대해서는 학생과 학부모의 시험에 대한 자기 결정권 안내와 체험학습으로 일제고사에 대항했고 그 와중에 학생․학부모의 시험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안내한 공립 교사 7인, 사립교사 2인이 학교 밖으로 쫓겨났고, 같은 해 강원도에서 해직자가 4명 울산에서 1명의 해직자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한해가 지난 2009년도에는 많은 교사들이 2008년도와 동일한 방식의 투쟁과 교사선언을 진행 했음에도 해임과 파면 같은 배제징계가 나오지 않고 정직이하의 징계가 나옴으로써 일제고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2010년에는 진보교육감의 등장으로 일부 학교에서 선택권이 보장되고, 서울은 교육청과 교과부의 혼선으로 인해 파행적으로 일제고사가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도 단위 일제고사는 폐지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렸고, 전국단위 일제고사도 그 한계가 명확해 지며 교육주체들이 조금만 더 강고한 연대투쟁을 진행하면 그 생명이 끝날 것이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일제고사가 왜 문제?


그렇다면 교과부가 주장하는 학업성취도를 측정하고 그 결과에 대해 학교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얼마 전 한 일간지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수준별이동수업 학습부진아에 역효과”라는 결론이 경희중 교사의 논문을 인용해 보도된 적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하는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그동안 많은 연구 활동을 통해 입증되었던 주지의 사실인데, 교과부와 수구 보수 세력만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사실이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학교나 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정(부모)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지위이며 학생들의 근본적인 경제적 생활환경을 개선하지 않는 어떠한 노력도 사실은 사기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런데, 교과부는 일제고사를 통해 학생과 학교와 지역을 경쟁 시키면 학업성취도가 올라 간다고 거짓말을 계속 해대며, 공교육의 실패를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들의 책임으로 전가하려고 한다.


사실 공교육의 핵심은 모든 아이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그 결과에 대한 평등까지 책임지는 공적기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경쟁 교육이 만연하면서 특권계층들은 교육을 더 이상 공적 기재로서의 역할을 포기시키고, 계급과 계층의 되물림 기재로 변화시키며 이를 정당화 하려는 음모의 장으로 탈바꿈시키려하고 있다. 그것의 최전선이 바로 일제고사다.


일제고사를 통해 학생과 학교를 서열화 시키고, 그들의 열패감을 이용하여 학교평준화 정책을 포기시키고, 학교선택제, 자사고, 특목고 등을 일부 특권계층들에 의해 점유하고 이를 정당화 시켜 피지배층이 권력에 순응하는 내면화를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일제고사는 우리 아이들의 학업성취에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 아이들의 성취도를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생 스스로의 ‘자아 존중감’을 높이고 자신이 속한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경험을 통해 학습에 전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며, 미래에 대한 명확한 가능성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하지만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거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제고사는 아이들에게 자아 존중감을 형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열패감을 확인하고 스스로 학습에서 멀어지도록 만들고 있으며, 학습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상태에서 아무리 부진아 지도를 한다고 해도 그 아이의 성취도는 결코 올라갈 수 없고, 이미 3년의 경험을 통해 이를 증명한 바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잘하는 대로 문제다. 일제고사는 필연적으로 서열을 확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1등을 지키기 위해 또는 1등을 빼앗기 위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와 사교육이 증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진정한 자아실현이 목적이 아니고, 공부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경쟁에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모두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일제고사인 것이다.


일제고사는 교사들도 억압한다. 일제고사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교사도 평가받는다. 바로 아이들의 성적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아이들과의 건강하고 행복한 만남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사들에게 더 이상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은 등수로 매겨진 실적물일 뿐이다. 그 속에는 더 이상 교육적 만남은 상실되고,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는 그냥 버리고 가야 하는 교사의 방해물인 것이다. 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사소한 실수로 인해 단 한번의 관용도 적용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의 문제가 일상 다반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일제고사가 아니면 어떤 평가


사실 부진아의 판별과 교육적 관심 대상의 파악은 그 아이를 지도하는 교사의 판단이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이다. 학습 부진의 원인은 다양하기에 일제고사와 같은 형태의 지필 평가로는 그 판별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또한 평가는 교육활동 전체의 과정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평가는 아이 활동의 기록이며, 성장(발달) 과정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것이며, 이후 교육활동의 참고 자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아이를 규정짓고 판별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아이의 발달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교육 활동의 하나로 평가를 규정해야 할 것이지 한 번의 시험을 통한 단순 결과로 서열화와 차별의 기재로 이루어지는 그 어떤 평가도 거부해야 한다.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이번 지방 선거에서 다행스럽게도 6명의 민주진보 교육감이 우리 시민과 도민의 힘으로 당선되었다. 그들의 행보 하나 하나가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된 신자유주의 경쟁만능 시장교육에 대한 우리 시민들의 염증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배가 고프다. 민주진보교육감의 당선이 우리 교육의 정상화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조금 주저스럽기는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당선된 교육감이 노무현처럼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가 그들을 강제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의 역사는 또 한번 퇴보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민주진보 교육감의 당선은 많은 기대와 동시에 많은 우려도 함께 하게 만든다. 결론은 하나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최소한 공공재로써의 역할을 하고 모든 사람이 교육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며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아니 이제야 숨막히는 목졸림에서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정도의 여지가 생겼을 뿐이다. 민주진보교육감에게는 같은 지향에 대해서는 협력을, 반동적 행보에 대해서는 단호한 투쟁을 하는 것이 성공하는 교육감으로 만드는 방법이며 우리 시민 사회의 역할이다. 시민 사회의 열정어린 투쟁과 헌신만이 우리 교육의 희망을 조금씩 틔워 나가는 소중한 밑거름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이명박의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공정한 사회’를 주창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음을 알고 있다. 민주진보교육감의 당선과 이명박의 레임덕 속에서 우리 교육운동의 방향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사회의 모든 특권교육과 특권세력의 뻔뻔스러움을 통제하고, 우리의 희망을 일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더 이상 교사를 길거리로, 아이들을 패배자로 만들 수 없다.


오는 10월 14일에 일제고사 해임 무효 판결이 이루어 질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는 교육을 특권계층에게 내 맡기지 않고 만인의 교육으로 되돌리기 위한 우리 모두의 투쟁의 산물이다. 해임이라는 경험은 개인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해준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의 결기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열이 되는 순간 세상은 움직인다. 지금까지 수구반동의 반격에 밀려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고 희망을 찾기가 어려운 듯 했으나, 올바름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이 있는 한 분명 살만한 세상으로 조금씩 운동한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다.


2010년 일제고사 싸움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12월 21일 중1,2학년을 대상으로 도 연합 일제고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던 것처럼 강원, 전남, 경남 등 일부 도에서는 일제고사를 시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서울을 비롯한 광주나 전남 교육청은 일제고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최소한 도 단위 일제고사를 막아내는 것을 올 한해의 목표로 하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성지이자 나의 고향 광주와 전남에서 꼭 승리하는 투쟁을 일궈낼 것이라고 믿는다.


그 승리를 기반으로 2011년 전국단위 일제고사를 막아내고, 일제고사에 의해 피폐된 학교를 복원하고 모든 아이들이 패배자가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진정한 교육의 주체로 행복한 삶을 일궈나가는 귀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교사들도 길거리로 내몰리는 걱정 없이 교육에 대한 참된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투쟁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연대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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