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빈 (서울 이화여고를 사직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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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일상의 작은 비위는 물론 거대 권력과 자본도 개인 차원에서 거부한다. 불이익과 불편이 따르지만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승리한다.

경비행기 조종을 취미로 가진 진중권 선생이 내년에 필리핀으로 비행기 여행을 떠난단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MB정부가 끝나는 3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겠단다. 나로서야 비행기 여행, 세계 여행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부럽다. 그의 용기도 부럽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도 부럽다. 그렇다고 최근 중앙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인 그가 돈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닐 것 같다. 베스트셀러 작가, 명강사로서 인세와 강연료가 제법 될 것이 분명하지만 시민단체에서 받은 강연료는 진보신당에 기부한단다. 독일 유학 시절에도 한 달에 50만원으로 숙박을 해결하며 전시회나 여행을 다녔단다.

그의 소식이 담긴 신문을 읽다말고 서둘러 수업에 들어간다. 이제 한 달이면 교직 생활 십년을 채운다. 흔히 교직을 천직이라고 한다. 특히 사립학교는 ‘평생직장’으로 불린다. 평생직장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게다가 평생직장이라는 말에는 “평생 밥벌이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고맙게 생각하라”, “평생 얼굴 보고 살 사람끼리 얼굴 붉히는 일 없도록 하자”는 식의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교사의 사고와 행동을 가둬놓기도 한다. 그 속에서 문제제기라도 하려고 든다면 곧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들리지 “절이 싫으니 주지 스님을 바꾸자”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 말 속에는 “용기 있게 떠나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말라”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십년을 한 학교에서 보냈다. 애당초 이 학교가 ‘평생직장’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이 학교가 교육활동을 실천할 소중한 ‘현장’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인지는 몰라도 지난 십년간 참으로 많은 땀과 눈물을 이 현장에 뿌렸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사랑을 주고받았다. 부당한 학교 현실에 저항하다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성과에 축배를 들기도 했다. 교과서와 입시를 뛰어넘는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며 웃음과 감동이 넘치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나하나 성장하며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정부는 학교가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고 있고, 학교들은 서로 누가 더 나쁜 짓을 하는지 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제 학교 안에서는, 학교를 바꿀 동력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교조 운동의 위기도, 전교조가 그 동안 끊임없이 연대 사업을 강조해 온 것과 무관하게, 전교조 운동이 실제적으로는 ‘학교 안’, 혹은 ‘조합원 내부’에 머물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학교조차 바꿀 수 없는 시기가 분명히 온 것 같다.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학교를 바꾸게 되는 것이 아니나 나 자신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내년부터 우리 학교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다. 한창 신입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즈음, 여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버젓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상식이나 교육자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이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고 있다. 이른바 명문대 진학에 유리한 코스를 선점한 학생들의 욕망과, 이른바 명문고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교사들의 욕망과, 세 배 이상 되는 등록금의 본전을 뽑으려는 학부모들의 욕망이 들끓는 그 곳에서, 내가 학교를 바꾸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바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망명이다. 지금은 자본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식민지화해버린 시대이다. 학벌체제는 그것의 하수인이다. 예전 같으면 두만강을 건너서 망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익환과 윤동주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명동촌을 일구고 거기 학교를 세우고 식민지 반도와는 다른 자유로운 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국경을 넘어 망명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오직 내부로의 망명이 있을 뿐이다. 내부로 망명한다는 것은 체제 내에서 체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의 선친은 창씨개명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일본형사에게 일본 헌법에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지 물어 형사의 말문을 막았다. 어느 시대에나 내부에서 망명할 통로는 있다. 자기에게 정직하고 외부의 억압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내부에서 망명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망명은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오자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자발성이다. 낙오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게다가 모두가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을 때 먼저 낙오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낙오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물구나무 선 사회에서는 거꾸로 성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 김상봉, <내부로의 망명 또는 낙오자 되기> 중에서

 

‘망명하기’ 또는 ‘낙오자 되기’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망명지로 떠나는 출발점은 학교가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임을 확인해 본다. 학교에 붙어 있으려고만 한다면, 학교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다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면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그래서였을까. 김상봉 선생님은 어느 강연에서 “교사는 늘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어놓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나이 마흔, 학교를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상상해 본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여행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선생처럼 삼 년씩이나 비행기 여행 같은 것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봄이 시작되는 섬진강이다. 그 시기는 학교에서 일 년 중에 가장 바쁘다는 삼월이다. 학교 안에 있다면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산수유와 매화 꽃망울이 터지는 섬진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김용택의 시를 가르쳐 왔고,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본 적도 없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왔다.

다음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은 대학 도서관이다. 40대의 나이에 영국의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자본론 원고를 집필했던 마르크스와 같은 삶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저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가에 처박혀 하염없이 빈둥대고 싶다. 이제는 한갓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로 전락한 독서가 아닌, 독서 그 자체가 주는 무상성의 즐거움을 나부터 누리고 싶다. 책읽기가 지루해지면 햇볕 따뜻한 대학 교정을 거닐며 싱그러운 젊음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싶다.

공부도 하고 싶다. 요즘 각종 단체마다, 지역마다 인문학 공부가 유행이다. 철학아카데미, 풀로엮은집, 한겨레문화센터, 민예총, 참여연대, 마들연구소 등에서 진행하는 좋은 강좌가 널려 있다. 그 동안 여기저기서 만나봤던 강사들은 홍세화, 하종강, 노회찬, 심상정, 강수돌, 김어준, 한비야, 강풀, 한홍구, 강정구, 김상봉, 진중권, 김규항, 김진혁, 신영복, 조세희, 권인숙, 정태인, 고미숙, 송순재, 고병헌 선생님 등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박노자, 박원순, 정재승, 우석훈 선생님 등의 강연도 꼭 듣고 싶다. 시간을 내서 인내심 있게 공부해야 할 현대 철학, 나에게 너무나 취약한 분야인 경제학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

취미 생활도 하고 운동도 해야겠다.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플루트 연주 실력을 수준급으로 높이고 싶다. 어쩌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가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클래식 기타쯤은 곁들여 배워도 좋다. 자전거 타기 외에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으니 춤을 추면서 뱃살을 빼야겠다. 학교 축제 때마다 아이들을 비명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어설픈 춤 실력을 제대로 갈고 닦아야겠다. “내가 춤추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는 슬로건도 있던데, 춤이라는 몸의 언어를 마음껏 구사해 보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만 살도록 놔두지 않을 것만 같다. 나 혼자 행복하게 사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내년에는 지자체 선거, 교육감 선거가 있다. 그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나를 선거운동 판으로 끌어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 작년 교육감 선거의 분풀이를 해야겠다. 저들은 전교조 조합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경복 후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8명의 교사에게 해직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좋다. 이제 교육공무원이라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었으니 선거운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내친 김에 진보신당에도 가입을 해야겠다.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시민사회단체, 지역운동단체에서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은평 학부모 네트워크’에서 학부모 교육을 진행할 텐데, 학부모와 현장 교사들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다. 교육운동을 경험했던 현장 교사가 놀고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마포 민중의 집’에서도 늘 전교조에 지역 청소년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 왔으나 그 사업에 함께 하지 못했다. 밀양에서 전교조 사업에 지역 운동까지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이계삼 선생은 아예 나더러 밀양으로 내려오라고 꼬드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한 수 더 뜰 것이다.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모임 관리도 하고 연수도 진행하라고 시킬지도 모른다. 학교 그만두면 더 바빠질 것이 분명하다.

‘학교 밖’에서 무슨 일이든 해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낙오자’가 되어 ‘학교 안’과 ‘학교 밖’을 연결하고 ‘내부 망명지’를 확장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결코 나의 선택이 후회스럽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뭐 먹고 살 거냐?”는 질문이 당장 나올 것이다. 교직생활 십 년 퇴직금이면 삼 년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싱글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감사한지. 설마 삼 년 후면 (그 때면 적어도 MB 얼굴은 안 보게 된다)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겠는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는 성경 구절을 참 좋아한다.

만약 충분히 놀고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온갖 일을 벌이다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때 다시 들어가면 된다. 임용고사 나이 제한도 없어졌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나는 김용택의 시를 실감 나게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고, 지리산 둘레 길에서 하염없이 빈둥거리던 나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독서의 무상성을 맛본 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일러줄 수 있게 될 것이고, 온갖 인문사회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이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음악과 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나는 아이들에게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안교육의 상상력으로 공교육에 충격을 줄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지역운동과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운동론으로 현장주의, 대중추수주의의 함정에 빠진 전교조 운동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내부로의 망명길’에 오른 셈이다. 설사 학교 현장에서 매일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부딪히며 너저분한 일상을 반복하더라도 유쾌한 상상의 힘은 다시금 나를 추스르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실제로 망명길을 떠날지 아니면 여전히 현장을 지키며 고군분투 할 것인지, 나의 선택은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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