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주영 (신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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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노무자들의 미불임금 내역 등이 담긴 공탁금 자료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한 가운데 7일 오후 서울 외교통상부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82) 어르신이 우리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있다.

“배주영 샘은 왜 이렇게 바빠~?”

쉬는 시간 전화를 돌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나에게 옆 선생님이 말을 건넨다.  

“아 네~ 제가 투잡을 하잖아요~^^”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사무차장이라 한다. 어떤 직책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보거나 누군가에게 소개해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그런 인사가 무척이나 쑥스럽고 어색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하다. 그렇다 나는 현재 중학교 교사이고, 2009년 3월에 출범한 시민모임의 사무차장이다.

2008년으로 기억한다. 광주인권영화제에서 우연히 본 <열 네 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이란 영화는 역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문제가 지금의 문제임을, 과거의 사실(史實)이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고통임을 너무도 아프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광기로 치닫고 있을 1944년에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동원한 여성 노동자들을 이야기한다. 당시 그들의 나이 불과 13~15살. 일본에 가면 중학교에 갈 수 있다, 돈도 벌 수 있다라는 말에 부분 희망을 품고 일본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책상과 공책이 아니었다. 그들은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온갖 학대와 배고픔, 외로움을 견뎌야했다. 약속했던 임금은 한 푼도 없었다. 해방이 되어 돌아온 조국에서도 그녀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 일본에 갔다온 여자라는 이유로 이들은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들의 아픔을 함께 감싸안고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 20여 년 전 일본의 나고야 지원회 사람들이었다.

역사를 가르치고 산다는 내게 영화는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영화를 함께 본 많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공감을 했고,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그 분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잊혀지고 버려졌던 문제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의 20여년이 넘은 운동의 결과 이 곳 광주에서도 답을 하게 된 것이다. 한참 늦은 발걸음이지만, 양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간에 주목하고 함께 평화를 얘기하고 연대를 고민하게 됐다는 점이 참 소중하다.

그렇게 참여한 시민모임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 안이라는 매우 안정된 그렇지만 틀에 박힌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생각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시민모임에는 소위 ‘운동’의 전문가가 없다.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이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발걸음들은 서툴고 더디다. 그러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조그마한 능력이나마 나누고,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는 운동은 그 진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다. 과연 될까? 라고 생각했던 1인 시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고 진행돼 100회를 훌쩍 넘어 200회를 가까이 두고 있다. 누구도 가능을 확신하지 못했던 사죄촉구 10만명 서명운동은 조직을 동원하지 않고도 회원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협조로 7만 명이 넘었다. 시민모임의 활동이 계속되자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역 언론은 물론 중앙언론과 일본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쑥스럽지만 시민모임, 대단하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외로움과 서러움에 혼자 울었던 할머니가 웃음꽃을 피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변화는 우리 스스로, 나 스스로가 변했다는 것이다.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수업도 달라졌다. 현장의 생생함이 수업에도 전달이 되었나보다. 학생들은 내가 수업을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실천하고 변했다. 할머니들께 미안함의 편지를 썼고,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20여 년 동안 이 문제를 붙잡고 있는 나고야 지원회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학생들의 편지는 나고야의 평화전시회에 <광주에서 온 희망의 메시지>라는 제목이 붙어 전시되기도 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오자 매우 신기해하며 자신들의 작은 행동이 뭔가를 변화시킬수도 있다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다. 근로정신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촛불문화제에서 연극을 해 보자고 한 제안을 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작년에 우리학교 학생들이 일본에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최근에 노래가 하나 만들어졌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라는 내용으로,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광주 ‘시민모임’이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화이팅! 용기를 내고!>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일본어로 만들어진 노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도 만들어졌고,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주인공인 하라다 요시오님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함께 수업을 했던 하라다상과 학생들, 그리고 수업을 함께 계획했던 음악 선생님, 수업을 참관한 동료 선생님들께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고, 자체로 감동이었던 수업이다.

살다보면 애초의 계획에는 없었던 일들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다. 시민모임과의 만남이 나에게는 그렇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8년, 그리 열심히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루하루 학교 생활을 하던 내게, 시민모임은 내가 교사라서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민모임에서의 활동도, 학생들과의 만남도, 그리고 올해 여름에 예정된 한․일 청소년의 평화교류까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었고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커진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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