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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폐지를 위한 앞으로의 숙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광주지부장 최은순
▲ 매년 전국적으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치러지는 가운데‘일제고사를 반대하는 광주시민모임’에서는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청소년, 학부모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진행해왔다. 위 사진은 09년 일제고사 당일, 체험학습 출발 기자회견 모습.
며칠 전 일요일 백주대낮에 내가 사는 동네의 초등학교에서 성폭행사건이 일어났다. CCTV도 설치되어 있었고, 경비아저씨도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CCTV에 용의자가 배회하는 장면이 오랜 시간 찍혔다고 한다. 경비아저씨는 아이의 비명을 듣고 나가보니 용의자는 도망가고 아이만 피해를 당한 채 덩그러니 있었다고 한다. 경비아저씨는 아이를 얼른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때문에 피해자 신변이 3~4일 후에 확인되었고 피해자 치료시간도 늦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학부모․시민들은 더 이상 학교도 안전한 곳이 아니니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절망을 하며,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난리들이다.
“아! 정말 한 학교당 CCTV의 수를 엄청 늘려야 할까?”
“경비를 곳곳에 세워야 할까? 호루라기 목걸이를 통해 안심알리미 서비스를 확대하면 더 나을까?”
참 이상하다! 왜 이리 호들갑이지? 아니 이런 일을 예견하지 못했단 말인가? 학교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떠들어대는데 언제는 안전한 곳이었던가? 입시위주 경쟁교육으로 치닫는 학교교육 때문에 매년 200여명 이상이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데 성폭력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학교가 안전했단 말인가? 이렇게 한번 씩 성폭력사건들이 일어나면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떠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파헤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방편으로 현 상황을 빠져 나가려만 들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원인은 뭘까? 바로 성적중심의 경쟁교육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입시경쟁교육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은 친구와 우정도 나눌 기회도 없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동체사회를 만들어 가는 시민의식을 배울 수도 없다. 더군다나 올바른 인성교육이나 성교육 등을 받아볼 기회가 없었다. 오직 국․영․수 중심의 주입식․획일화된 입시교육만을 받았을 뿐이다. 이러한 경쟁교육에서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한 게임이나 인터넷 등 각종 미디어에서 왜곡된 성의식과 폭력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고사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번 성폭력사건도 일제고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고사가 뭔가? 정부에서는 학업성취도평가라는 말로 학습부진아를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부진아들이라고 판단되는 학생들에게만 평가를 실시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 각자의 소질에 따라 다재다능한 아이들에게 왜 똑같은 내용, 똑같은 진도, 똑같은 지식을 강요하는 시험을 봐야 하는가?
이런 식의 평가는 결국 세계적으로 지향하는 사고력이나 창의력,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문제풀이 수업만을 함으로써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고 , 학교는 학원으로 변질되고, 성적으로 인해 학교도 줄 세우고, 교사도 줄 세우고, 학생도 줄 세우고, 학부모의 경제력도 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줄 세우기로 된다면 교육주체들의 현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학생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의식의 혼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배우는데 일상에서는 남을 누르고 이기는 것을 익히고, 교과서에서는 인권의식에 대해 배우는데 일상에서는 인권침해를 몸에 익힌다. 교과서에서는 자유, 평등의 가치를 배우는데 일상에서는 억압과 차별을 몸에 익힌다.
교사들 또한 평가권을 빼앗기는 순간 교육내용마저도 빼앗기게 된다. 왜냐면 아무리 능력 있는 교사가 있어 아이들에게 창의적 수업을 진행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주도적으로 시험을 내서 그 시험의 결과로 평가를 한다면 그 교사는 교육내용을 국가시험이 요구하는 대로 바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사가 일제고사에 충실히 대처하는 순간 아이들에 대해 차별성을 갖게 될 것이며(시험을 못 본 아이들을 미워한다.), 불법(시험컨닝 등)을 자행할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제고사를 치루 게 되면 가장 힘든 사람들이 바로 부모일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학부모들은 일제고사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경쟁적으로 문제풀이를 강요하는 걸까? 사회는 점점 양극화 되어 가는데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줄 것이 없는 부모입장에서는 자식의 행복이 오직 부모의 역할에 달린 현실에서 내 자식이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공부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고, 학교에서 보는 모든 시험을 성실하게 치러야만 손해 보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이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행위인데 이렇게 학교 교육이 파행으로 치닫고 그 파행의 주범이 일제고사인데 생각 있는 부모로써 어떻게 자식들에게 일제고사를 치르게 나둘 수 있단 말인가?
3년 전부터 실시된 일제고사! 첫해엔 지금 막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연한 사명감으로 많은 교사와 학부모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고 체험학습 등을 통해 일제고사의 폐해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체험학생들은 무단결석 처리되었고, 부모는 학교에 불려 다니고, 체험학습을 허가해준 학교는 징계를 받았다. 이렇게 3년 동안의 일제고사거부투쟁은 일제고사거부시민모임에서 주동은 했지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한 체 교육적 소신을 실천으로 옮긴 개인과 그 자녀들에게 희생과 패배감을 안긴 체 지지부진 끝나고 말았다.
다행히 올해 6월2일 지방교육자치 선거에서 치러진 교육감 직선에서 진보교육감 5명이 당선을 하였다. 그들은 성적위주경쟁교육에 제동을 걸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 중 전북교육감과 강원교육감은 교과부에서 실시하는 일제고사에 대해서는 표집실시와 도단위시험은 폐지하겠다고 한다. 서울교육감과 전남교육감도 일제고사에 대한 입장을 하루빨리 내놓아야 할 것이다.(광주교육감은 11월 취임이어서 지켜봐야 할 일) 일제고사를 그대로 두고 교육개혁 운운하는 진보교육감이 있다면 이들은 진정한 교육운동자들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지역 교육단체에서 이제는 더 이상 개인의 희생과 어쩔 수 없는 강요에 의해 일제고사 거부운동을 하지 말고 교육감의 확실한 입장을 듣고 그에 따라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성적위주 줄 세우기 교육, 승자독식의 경쟁교육시스템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불안과 긴장의 날들을 학교 다니는 내내 보내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또한 밝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아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그 시작은 바로 일제고사의 폐지다.
안티고연전에 대해 묻는다 Q&A
안티연고전 모임
Q 친구들 하고 재밌게 놀려고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도가 없는데 왜 즐겁게 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딴지를 거는건가요?
A 고연전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글들을 읽어보셨다시피 학벌주의 문제와 남성 중심적인 고대문화의 문제 그리고 축제답지 않은 축제 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개인에 의해 생긴다기보다는 고연전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학벌문제의 경우 아무리 자신이 학벌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하더라도 고연전에서 ‘고연’이 양대 명문사학이고 그 명문사학이라는 기준도 수능성적의 상위 퍼센티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을 때 애초에 고연전은 학벌이 없다면 열릴 수 없는 행사입니다. 한 개인이 사회에 속해있는 이상 사회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우리가 학벌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고대인’이라는 학벌에 따른 자아인식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학벌의 상위에 있는 사람들이니 상대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무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응원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은 그것을 남성 중심적이라 인식하지 않았고 그저 재밌어서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연전에서 보여 지는 응원문화의 특징들은 사회에서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입니다. 이것 역시 사회의 주류가치로 자리매김해 있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연전의 행사내용을 보면 스포츠 경기와 그에 따른 응원으로만 이뤄지고 있는데 스포츠경기를 보면서 응원을 즐기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남성적’인 놀이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주류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행사인 고연전에서 비주류의 문화는 소외당하고 그 행사를 즐기는 개인들 또한 고연전에 나타나는 주류 가치를 그대로 내면화시키게 됩니다.
고연전의 모든 프로그램은 이미 짜여 있고 학생들은 거기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되는 형식입니다.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축제를 기획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축제에 주변상점과 기업들의 스폰이 들어오면서 우리들의 축제는 상업적인 성격마저 띠게 됩니다. 만들어진 축제에 가서 즐겨야하는 학생들은 축제의 내용을 그저 받아야 들여야 할 뿐입니다.
결국 자신은 ‘순수하게’ 고연전을 즐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연전 자체가 순수할 수 없는 구조로 이뤄져있기 때문에 그 구조로 만들어진 고연전을 즐긴다면 개인들도 고연전의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고연전을 참여하고 그러한 가치들을 즐긴다는 것 은 고연전에서 발현되는 수많은 가치들(학벌주의, 남성중심성 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연전이 고려대의 가장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매년 재생산하는데도 그런 점들을 개선하거나 바꾸려는 그 어떤 반성과 비판도 없는 모습에 고연전이 얼마나 고대문화를 장악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면서 우리는 같이 바꿔가자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Q 학벌에 대한 부분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연전을 즐기는 이유는 학벌보다도 애교심이 더 큽니다. 당연히 다른 학교랑 운동경기를 하면 우리 학교를 응원하고 싶고 그런 응원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닙니까? 학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A 자신이 속한 공간에 대해 생기는 애정에 대해서는 물론 공감합니다. 다른 학교와 하는 운동경기에서 우리 학교를 응원하면서 소속감도 느낄 수 있고 재미도 느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왜 꼭 우리의 상대가 연세대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가까이 있는 다른 수많은 학교들이 아닌 연세대와 매년 이런 운동경기를 하고 유독 연세대와 하는 운동경기에만 특별히 ‘고연전’이란 이름을 붙여 축제로 만든 것은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대 사학으로 매년 수능점수에서도 엎치락뒤치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일 겁니다. 결국은 학벌을 기준으로 한 라이벌 학교와의 운동경기를 통해 애교심을 고취하는 셈입니다. 그 애교심이라는 것도 고려대가 명문 사학이라는 자부심으로 이뤄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자부심 역시 수능점수의 상위권, 결국 학벌에서 오는 것이지요.
학벌의 상위권이라는 자부심이 없다면-고려대와 연세대가 학벌의 상위권이 아니라면- 고연전이 지금보다는 아마 덜 재밌을지도 모릅니다. 기차놀이와 같은 일탈도 학벌의 상위권에 있는 두 대학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용납해 줄 수 있는 것 이구요. 애교심이라는 것이 고려대의 학벌체제에서의 위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단순히 내가 소속했기 때문에 애정을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Q 학벌의식의 발로라고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 고려대 학벌보고 온 것 아닌가요? 애초에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닌가요?
A 물론 고연전에서 드러나는 학벌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학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학벌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혼자서만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학벌주의의 폐해를 알게 된 이상 그것을 같이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 학벌이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데 고작 수능점수를 기준으로 삼고 그 미약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경쟁에 내몰게 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려대에 온 우리는 다행히 입시경쟁에서 승리하여 학벌사회의 수혜자가 되었으니 마음껏 즐기면 된다는 생각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고등학교 때 항상 마음 졸이며 옆의 친구들을 이겨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혔던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했던 그 치열하고 비정한 입시경쟁 속에서 해마다 몇 명의 친구들은 자살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경쟁 속에 내몰려서 서로에게 삭막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는 입시체제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능시험 한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이런 입시체제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이런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Q 제가 느끼기에 대다수의 여학우들은 고연전의 응원문화를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장애학생의 경우에도 요즘은 장애학생을 배려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소외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A 고대의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사발식, FM 그리고 응원 등은 집단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남성 중심적이건 여성 중심적이건 그건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적’인 것을 우위에 놓는 경향을 보이는 현실 속에서 고대의 문화가 남성 중심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 건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성적인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그 기준에 따라 다른 특성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학우들은 현재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고 실제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즐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문화의 남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고연전의 비장애 중심적인 문화를 비판할 때 요구하는 것은 장애친화적인 고연전이 아닙니다.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해서 수화로 응원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는 장애인을 기존의 비장애인 문화에 포섭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존의 비장애인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장애인이 좀 더 ‘수월하게’ 즐길 수 있도록 ‘배려’와 ‘연민’을 보여준다고 해서 비장애중심성을 탈피할 수는 없습니다. 비장애남성중심적인 문화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이 고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Q 고대와 연대의 모든 개인이 고연전을 다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행사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대의 다른 행사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요.
A 물론 고연전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고연전이 고대의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고연전은 개인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고대인’이 되려면 FM-사발식-고연전으로 이어지는 고대 문화의 매뉴얼을 모두 마스터해야 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고연전이 대표하는 집단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고대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대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성적이거나 ‘여성적’인 특성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장애학우들은 자연스럽게 고대의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결국 이런 행사들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고대의 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고연전이 고대의 가장 큰 축제 중의 하나라면 모두가 다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고대의 가장 큰 축제라는 고연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많은 가치들이 배제되는데도 매년 아무런 변화와 비판이 없다는 것은 이 축제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결국 고연전을 없애자는 것인가요? 그럼 고대의 전통적인 문화가 없어지는 것인데 대안은 있습니까?
A ‘안티 고연전’은 고연전이 생산해내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축제답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대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알려내고 같이 변화시켜보자는 취지를 갖고 고연전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안을 ‘안티 고연전’에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안티 고연전’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모두 다 따르자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안티 고연전’의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안티 고연전’에서 그리는 축제는 모두가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고 그 다양한 목소리들이 각각의 주체가 되는 자유로운 축제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 각자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고대 문화라고 대표되던 고연전에 의해 다른 상상력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지만 고연전이 사라진다면 축제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고연전이 없어진다고 해서 학벌주의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는 지금의 가치체계 그리고 비장애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시스템과 점점 상업화되는 교육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의 축제에만도 수많은 사회의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그것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계속 한다면 분명 대학 내에서 나아가 대학을 넘어서서 긍정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연전이 이틀 동안 내 머리 속에 집어넣은 혹은 넣을 것들
민~족의 영원한 고동이 되리라??
moya
▲ 09년 올해로 39회째를 맞는 정기 연고전 또는 고연전에서 파란색(연세대)/붉은색(고려대) 옷을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응원하며, 자신의 집단소속감을 들어내고 있다.
글을 쓰기 전에 응원에 대한 제 생각을 밝히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 응원은 즐거운 행위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하고 몸을 움직이고, 이 과정에서 쌓여 있던 스트레스도 풀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하면 야구장에 가 응원을 합니다.
고연전의 응원도 응원 하나만을 놓고 생각하면 꽤 즐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안티 연고전 자료집에 글을 쓰는 것은 고연전에서의 응원은 콘서트나, 야구장에서의 응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연전은 대학의 공식 행사이며 모든 학생의 축제이고, 고대와 연대가 만난다는 점에서 학벌 사회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고연전에 가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응원에 대한 좋고 싫은 감정이 고연전에 가고 안가는 차이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잠실로 향하며
해마다 고연전 날이 되면 두 개의 물결이 잠실로 몰려갑니다. 이들이 몰려가는 곳은 바로 고연전 개막식이 있는 잠실 실내체육관입니다. 학생들은 반 단위로 혹은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이동을 시작합니다. 잠실까지 걸어갈 수는 없기에 흔히 지하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는 참 장관입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지하철 앞 칸부터 끝 칸까지 가득가득 차게 됩니다. 지하철 안뿐만 아니라 승차장에서부터 지하철입구까지 온통 붉은 색뿐입니다. 고려대 학생들이 전세를 낸 듯한 버스도 있습니다. 붉은 색이란 시각 효과는 참 큽니다. 붉은 색 옷을 입은 학생들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동질감, 소속감을 서로 간에 느끼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붉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알지 못할 친근감을 느낍니다.
타 학교 학생이거나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직장인들은 붉은 티셔츠를 입은 고려대 학생들을 보며 오늘이 바로 고연전 날임을 알게 되고(이미 알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고려대와 고려대 학생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축제를 앞에 둔 고려대 학생들은 단순히 붉은 티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 안에서 응원 연습도 하고 가끔은 소리 높여 FM도 하며, 떠들고 장난치기에 사람들의 눈초리는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고 지하철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고려대 학생이기에 사람들은 못 본 척 조용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려대 학생들의 생각도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도 현재 자신은 개인이 아니라 고려대 학생으로 있기에 할 수 있게 됩니다.
운동장에서
운동장에 도착한 학생들이 처음 보게 되는 것은 거대한 운동장을 꽉 채우고 있는 두 색의 대립입니다. 붉은 색으로 대표되는 고려대와 파란 색으로 대표되는 연세대, 선명한 시각 대비는 수능 성적표로만 생각되던 라이벌 의식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동시에 대학에 대한 소속감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응원이 시작되면 이러한 의식은 더 강해집니다. 붉은 색과 파란 색이란 시각적 효과 위에 응원은 좋은 멜로디와 가사를 바탕으로 한 청각적 효과 그리고 몸을 움직이며 느끼는 즐거움을 얹어 주게 됩니다.
고려대의 응원은 크게 보아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민족의 아리아, 석탑으로 대표되는 소위 무겁고 장중한 응원과 엘리제로 대표되는 연세대를 까고 승리를 기원하는 응원입니다. 이 분류는 응원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나누어집니다. 요즘 응원단이 만든 응원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가볍고 흥겨운 음악으로 엘리제와 비슷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세계로 나가는 고려대’라는 가사가 보여주듯 민족의 기둥을 넘어 GLOBAL 고대를 꿈꾼다는 고려대의 행보를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두 종류의 응원 모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후자는 가볍고 흥겨운 멜로디와 연세대를 놀리고 까는 가사로 응원을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형태이기에 그러한 듯합니다. 그런데 전자가 고연전 등에서 계속 불려오고 있고 많은 학생들에게 응원으로써 사랑받고 있는 사실은 얼핏 보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흥겹게 노는 축제의 응원인데도 이 응원들의 멜로디는 무겁고 장중하며 가사는 ‘민족의 고동이 되리라’와 같이 절대 가볍지 않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마 다른 축제에서 민족 운운하는 가사가 담긴 응원을 한다면 분위기가 금세 냉랭해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학생들은 ‘민족의 아리아’를 최고의 응원 곡으로 꼽습니다. 이 이유에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응원이 고연전에서 불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연전과 엘리트 의식
고연전은 연세대와 고려대 간의 끊임없는 상호 비방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끝은 다릅니다. 운동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들은 다시 안암으로 신촌으로 함께 이동하고 이곳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하나가 됩니다. 경기 중에는 서로를 헐뜯었지만 마치 허물없는 친한 친구 사이에 있는 일과 같이 사실은 서로를 좋아하고 인정하는 라이벌이었다는 것이 그 결말입니다. 그렇게 그 두 학교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고연전의 해피엔딩을 생각해 보면 엘리제나 민족의 아리아가 인기 있는 이유는 훤히 드러납니다. 엘리제는 친한 친구 사이의 짓궂은 장난이었다면 민족의 아리아는 고려대와 연세대가 이후에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아리아는 우리에게 ‘너는 민족의 고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족의 고동, 기둥. 응원을 하는데 있어 이러한 가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이 이 응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학 명문인 고려대와 연세대의 학생들은 이후에 민족의 기둥, 고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고연전이 만들어내는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고 그래서 학생들은 응원을 하며 벅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고연전이 연세대와 고려대 간의 라이벌 의식을 만들어 낸다면 응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연전이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곧 엘리트 의식의 형성을 말합니다. 엘리트 의식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연전은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축제이고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아끼는 미묘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것은 곧 고려대, 연세대 학생의 엘리트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고연전이 벌어지는 이틀 간 학생들은 고연전이 열리는 잠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붉은 티를 입고 응원 연습을 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 응원을 하며 신촌, 안암에서 민족 고대, 통일 연세를 외치며 기차놀이를 하며 뒤풀이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대인’이 되는가
곰팡이
▲ 고려대는 하나은행과 업무제휴를 통해 스마트카드 한 장에 학생증 및 각종 전자화폐 기능이 들어간 고려대학교 전자학생증을 발급한다.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고대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특별한 함의는 단순히 고려대학교를 다니는 ‘고대생’과는 조금 다른 어감을 지닌다. ‘고대인’은 고려대학교를 사랑하고, 그 명문 사립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대가 사랑받을 구석은 별로 없다는 건 캠퍼스 안의 학생들로선 쉽게 공감하곤 한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와 사회적 담론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민주적 체계마저 박탈당한 채 학점과 취업경쟁으로 대학 생활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볼 때, 진리의 상아탑은 이미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어느새 우리는 붉은 색 옷을 입은 이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찬양조의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 합리적인 동기는 없다. 우리는 고대생이기에 고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아주 체계적으로 강요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만이 가능한, 엘리트의식으로 점철된 패거리문화와 ‘고대인’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몇 가지 행동규범에서 그 엄청난 체계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 없는 자기소개’ FM
‘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강요는 대학친구들과의 첫 인사치레, FM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 만나 아직은 어색한 이들과의 거리를 가장 먼저 좁힐 수 있는 이들은 새터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FM을 잘하는 이들이다. 강원도로 향하는 긴 시간동안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선배의 인사말과 함께 가장 먼저 진행되는 인사치레는 요란스러운 FM이었다.
새터 자료집에는 FM이 군사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자랑처럼 써져 있다. 군사문화의 가장 위험한 폭력성 그대로, FM에는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FM을 띄우기 위한 선창과 사람들의 환호는 그 폭력에 대한 거부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타인들의 눈총을 피해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민족고대 호안정대 자주정경6반 06학번’과 같이 전체로부터 수렴되는 정체성을 주입받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문화’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내면을 토해내고 ‘고대인’으로 변신하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는 정체성 주입은 사발식으로 이어진다. 사발식은 일제 치하의 보성전문학교 시절, 일 제국주의와 조선민족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일 경시청 앞에서 토악질을 하던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토사물을 내뱉은 곳은 일본 경시청 앞도, 미 대사관도 아닌 변기통밖에 안 되는 주제에 선배들은 드디어 너도 ‘고대인’이라며 등을 토닥여 준다.
그리고 더 무섭게도, 자유와 인격마저 박탈당한 채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의자위에 올라서서 FM과 막걸리를 대야(사발도 아니다)채 원 샷 하도록 강요받았던 새내기들은 비로소 강요한 선배와 똑같은 모습의 ‘고대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도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지 않느냐’는 변명과 함께 다음 해 과실의 달력에 큼직하게 사발식을 그려 넣는다. 대대로 재생산되면서 점점 커져만 가는 그 패거리 동류의식은 놀라움을 넘어서서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러한 획일적인 정체성과 공통의 가치규범으로 유인하는 ‘고대인이 된다는 것’의 매력이 궁금해진다.
‘학벌’이라는 가면
내적 발로로부터 발산되는 정체성이 차단당할 수밖에 없는 12년의 입시 전쟁을 치른 이들에게 각자의 인격과 개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몽달귀신마냥 몰개성한 이들의 얼굴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의 가면으로 덮어지기가 쉬울 것이다. 월드컵과 고연전의 공통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는 눈곱만큼의 주체성도 없이 비정규직으로서 하루하루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기계처럼 노동하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욕망에 의해 강요받은 대로 소비하며, 매 순간 부딪치는 인간관계마저 경제적 계급에 따라, 학벌과 동류집단에 따라 타산적인 관계로 조작당한 이들, 한마디로 ‘주물’된 인격들에게 집단이라는 가면은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고 자위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고대인’이라는 가면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계산대 앞에서 자랑스럽게 하나은행 학생증 카드를 내미는 쾌감을 또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쾌감은 혼자 즐기면 치졸한 생색이지만, 모두가 함께 즐기면 아름다운 문화가 된다. 경쟁이 습관처럼 굳어진 이들에게 남을 밟고 일어서는 그 쾌감이 FM과 사발식, 거리 응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계적인 정체성 강요의 결과는 절대로 학생증 카드를 내밀고 나서의 단순한 쾌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명문대생을 연예인쯤으로 바라보는 계산대 너머의 점원과 나 사이의 확고한 위계와 그 관계의 불편함. 그것은 학벌사회가 맺어준 관계망에서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일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주의의 피해자는 여기에 편승하지 못하는 ‘비(非)엘리트’뿐만이 아니다. ‘고대인’이라는 조작된 정체성을 강요받아 학벌사회의 경쟁논리에 던져지고, 또 그 그릇된 위계를 강화하도록 규정된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모두에게서도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역설적 지위가 부여된다.
모두가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잊고, 각각 고대와 연대의 가면으로 스스로를 대신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최상위집단으로 한데 뭉쳐진 오늘, 고대의 붉은 가면과 연세의 파란 가면이 내게는 월드컵 때 사방을 도배했던 태극마크로 보인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학생들을 감시했던 태극기의 권위처럼, 초일류 사립대 간의 각축은 엘리트 의식과 권위주의로 무장한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공감주술 FM
아치
▲ 연고전 시즌, 신촌입구에 연세대학교 응원단이 걸어놓은 현수막. 《(문구) 고대! 연대로의 편입의 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해리포터도 입시에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만 마법학교가 이 땅에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호그와트도 이래저래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마법학교 ‘카이(KY)’… 물론 처음 듣는 이름일 수도 있다. 맨 앞의 ‘스(S)’가 스르륵 떨어져 나가 꽤 낯설게 보이니까.
그런데 마법영재 해리는 어떻게 마법학교 ‘카이’ 입학을 거부당하고 재수 없게도 재수(再修)의 길을 걷게 됐을까? 하기야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계단 밑에 엎드려 사는 천덕꾸러기 해리가, 사교육 마술 없이는 결코 통과할 수 없다는 통합형 마술(논술) 입시의 덫을 어찌 재능만으로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 인문 마술학부 대기번호 96번을 가까스로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91번까지만 행운의 여신과 입맞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카이’의 9와 3/4 승강장을 두드리고 또 두드릴 것이다. ‘카이’는 다르기 때문이다. “Look KY. It's different." 글로벌 흐름에 맞춰 마법도 영어로 배우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꼭 별 다방 커피만을 마시니까.
학교에 들어간 새내기는 가장 먼저 선배로부터 공감주술(sympathetic magic) FM을 배운다. 어쩔 수 없이 설명 들어간다. 공감(共感)이란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비슷한 심리를 만드는 일이다. 공감의 대상과 나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심리적 동일성을 경험하려 하기 때문에, 일체화나 동일화와는 다르다. 한 마디로 공감하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위계가 있다는 말이다. 주술은 어떤 행위를 바르게 흉내 내면 그에 걸맞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고, 흉내 내면 어떤 일이 그대로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고 형태다.
새내기는 아무 생각 없이 선배가 시키는 대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몸짓도 크게×3 주문을 외치는 게 좋다. 대략 난감해도 대략 공감이라도 해야 한다. 이 간단한 주술만 제대로 익히면 그 뒤로는 순탄하게 마법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헤르미온느와 같은 성별을 지닌 새내기는 에로틱 FM 주문을 외우면 더 큰 편애를 받을 수 있다. 자칫 가장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다가 자신이 앞으로 누릴 모든 달콤한 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12년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게임으로 즐기시라.
이것만 통과하고 나면 귀찮기는 하지만 꼼꼼히 챙겨주기만 하면 되는 학점주술 밖에 배울 게 없다. 그러면 늙어 죽을 때까지 무한대의 학벌주술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 호그와트처럼 거추장스러운 마술 지팡이 따위는 필요도 없다.
그런데 솔직히 나 같이 천한 머글이 보기에는 그 마술이란 것들이 이해가 안 되고 오해가 오며, 이상한 게 아니라 요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거 뭐 마술도 아니고….’ 부디 고귀하신 마법사들께서 머글의 헛소리를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란다.
87년, 허접한 머글 학교의 새내기였던 나는 영광스럽게도 마법학교 ‘카이’의 ‘퀴디치 경기’인 셈인 ‘카이전(고연전)’의 뒤풀이에 초대받았다. 빗자루 대신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나타난 친구 녀석을 따라 안암골로 간 나는 그날 요단강 강물 대신 막걸리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K와 Y 양쪽의 FM 주문에 귀가 멍멍하고 그들의 광기에 타자로서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떤 권위나 동질화의 논리도 의심하고 거부하던 나였지만, 자리를 지킨 건 그냥 공짜 술이 더 좋아서였을까? 결국 누가 그리핀도르인가를 놓고 K와 Y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가지고 있던 나는 꼼짝없이 친구와 한 패로 몰려 안암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글 출신의 경찰이 웃음기 띤 몇 마디 잔소리로 훈방 처리! 경찰서에서 나온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막걸리 집을 찾아 끈적끈적한 우애를 다졌다. 역시 마법의 힘은 위대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FM주문도 짤막해지고 귀엽게 바뀐 것 같다. 특히 주문 앞머리의 ‘자유 민주’가 ‘통일’이 되고, ‘민족’은 여전히 ‘민족’이라는 게 눈에 띈다. 현재는 자유와 민주가 이뤄진 상황이라 통일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마법사들의 말처럼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가 이뤄졌을까? 10,000,000 비정규 머글에게, 입시 앞에선 인권도 없는 청소년 머글에게,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화장 떡칠하고 살 빼고 성형해야 하는 여성 머글에게 자유와 민주가 오롯이 왔을까? 통일을 사라져버린 구닥다리 ‘통일호’ 열차쯤으로 여기는 젊은 마법사들이, 자기 이름에 앞서는 정체성으로 그것을 내세운다니 믿을 수 없다. 또 'Global KU'에서 쑥스럽게도 변함없이 민족이 들먹여지고 있다. 설마 아직도 단일민족이라는 초글링 개념을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FM이 학생운동의 잔영이라면 이제는 모든 ‘카이’가 이른바 ‘운동권’ 된 것인가?
당신은 선배의 이름으로 후배에게 FM주술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 모진 순응(수능)시험을 보고, 그 지긋지긋한 12년을 떨쳐내려 하는 새내기에게 당신은 웃으며 ‘야전 수칙’을 들이민다. 누구도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할 수 없다. 이곳은 마법 학교다. 위계질서를 체화하고 자유를 꿈꾸지 말 것. 그러면 새장 째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새가 될 수 있다. 대학 역시 폭력과 경쟁밖에 없다. FM으로 기를 팍 죽여서 머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라. 그러니 이왕이면 서로 웃으면서 코미디 클리셰에 충실하면 어떠하리.
사실 진짜 코미디는 하늘 위의 하늘 ‘스(S)’는 FM주술 같은 2류 마법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순응(수능) 1%의 순수 혈통이고, 대기번호 따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 교활하고 뛰어난 슬리데린이니까. 오두방정 떨며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경천동지할 흑마술 정도는 써야 머글을 지배할 진정한 마법사가 아닐까?
담장 없는 사회를 바라보며, 연고전 담장 부수기!
학벌없는사회
"9월은 내게 있어서 정말 신나는 날이다.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응원실력을 우리들과 비슷한 그들과 함께 겨뤄볼 수 있고, 서울 안암/신촌골 거리를 활보하며 우리들의 단합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거 생각만 해도 신나는 걸?"
올해도 어김없이 9월이 찾아왔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에게 9월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정기 고연전’일 것입니다. ‘필승! 전승! 압승!’의 슬로건으로 벌써부터 그들은 크게 들떠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응원단들의 연습소리가 끊이질 않고 학생들의 입에는 올해 고연전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연전은 9월의 즐거움으로 자리 매김 되어 있는 듯합니다.
고연전에 대한 소고
가을은 식욕의 계절, 독서의 계절, 그리고 소위 ‘2만 고대인의 축제’인 고연전의 계절입니다. 고연전이라는 축제는 고대의 문화 중에서 규모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입니다.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고, 또 즐기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대의 '최고'의 문화가 과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을 해봅니다.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고대의 문화토양에서, 고연전은 그것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자리였습니다. 야성과 패기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격렬한' 문화는 여성들에 대한 동의와 배려 없이 진행되는 문화입니다. 그 틈에 끼어 자신의 주장을 밝히지 못했던 많은 여학우들의 역사가 바로 고연전과 고대의 문화의 역사입니다.
고연전, 연고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축제는 순수하고 순결한, 단순한 축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대 사학’이 매년 자웅을 가리기 위해서 5개의 운동경기를 벌이고, 그것을 학생들이 응원하는 행사는 말 그대로 고대와 연대 어느 쪽이 잘났는지 밝혀내기 위한 상징적인 싸움입니다. 마치 한일전과도 유사한 모습을 띠는 이 경기는, 하나의 전제하에 이루어집니다.
이 전제는 바로 '학벌 라이벌'이라는 전제입니다. 매년 연대에서 연고전을 하지 말자고 주장이 나오는데, 이 주장 중 하나가 '수준 이하의 고대와 라이벌로 비추어지면 연대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최고위급 학벌을 가지고 있는 SKY에게만 열을 내고 즐길 수 있는 고답(高踏)적인 농담이겠지요. 고연전은 고대와 연대를 홍보하고, 그들을 다른 대학과 차별하기 위한 학벌주의적인 멋진 기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 대안을 모색하는 안티고연전!
하지만 자신은 축제를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고연전이 너무 좋다는 학우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학교의 운동경기를 편 갈라서 응원하는 행사인 고연전. 학교의 색을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학교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응원. 뜯어보면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이 문화가 고대의 일 년의 최대의 축제라는 것은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축제는 좋습니다. 그런데 축제는 더 다양한 모습으로 다른 형태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존재해 왔던 문화가 아니라 각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축제.
위와 같은 고연전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고연전을 다양다각으로 비판하며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문화를 모색해보자 <교육생각 기획>기사로 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매번 문제제기 되고 있지만, 강행되고 있는 일제고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봤습니다. 글을 읽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생기신 분, 편집일꾼에게 꼭 한 마디 해 주고 싶으신 분, 관심이 생겨서 같이 해보고 싶다는 분,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해달라고 해 주실 분. 이 모든 사항들에 해당되시는 분들과 함께 학벌없는사회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달려 나갔으면 합니다. 자, 출발
김예슬 (자발적 대학교 퇴교자)
▲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 2009년 수능시험날,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수능거부 일인시위를 하는 학생
우리의 삶은 학벌 문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대학의 경쟁을 넘어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을 밟는 사람들, 토플시험을 보겠다며 매일 인터넷 앞에서 죽치고 있는 사람들, 자격증 시험으로 가득 찬 약속과 밀린 과제물,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과외들. 우리 모두는 안정적인 삶을 위한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양심적 삶을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기서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한 증권사 간부로 일하셨다. 아버지의 수입을 통해 우리 가정은 '평범하게' 살았고, 직장 서열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통해 친척들에게 부끄럼 없이 살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장기간의 병원 입원과 통원치료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게 됐고, 집을 팔아서 벌였던 사업은 잘 안 돼 결국 가족이 모두 단칸방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내 삶에서 가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왜 우리 가정은 '가난'이라는 불편한 삶을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왜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같이 돈 때문에 싸우실까? 부모님은 하루도 안 쉬고 밤늦게까지 일하는데도 왜 우리 가정은 지금까지도 가난한 걸까? 왜 나에게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라고 하는 걸까? 이젠 그 답을 알게 되었지만, 그 시절 내게 던졌던 질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의문이 든다.
일탈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초등학교 때 몰랐던 '좋은 학교'란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 '좋은 학교'는 지금도 강조되는 인문계 고등학교, 그리고 명문대(서울대·연세대·고려대)다.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내 친구들은 학교를 마친 후 교복도 벗지 못한 채 운동장이 아닌 학원으로 향했다. 초등학생 시절 뜨겁게 먼지 날리며 공을 찼던 때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 다녔던 학원은 고작 한 달. 부모님 고생하는 미안한 마음에 내가 싫어 그만뒀다. 허나 소외되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교과서로 공부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처럼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특수목적고 진학도 어렵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현실적 조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중 하나는 돈이었고, 두 번째 고민은 진로였다. "우리의 가정 형편으로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좋은 학교 보내려고 내 삶의 일부를 부모님이 책임질 필요가 있나?" 등과 같은 고민 끝에 결국, 전자공고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은 그냥 평범하게 살라며 나를 달랠 뿐이었다.
결국 끌려가다시피 진학한 인문계 고등학교는 입시 사육장과 같았다. 암기를 강요하고, 공부 잘 하라고 용의복장을 단순화하고, 담장 밖에 나가지 말고 말 잘 들으라며 수시로 체벌을 가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새벽에 하던 신문배달도 잠시, 멋지게 보이고파 머리도 길러보지만 그것도 잠시, 오직 학교는 승자를 기르기 위한 수용소 3년의 시간일 뿐이었다. 학교 밖을 벗어나 일탈도 해보았지만, 잠시 내 마음을 위로할 뿐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다른 청소년들과 함께 중고등학생연합이란 단체를 만들어 학생인권과 교육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당연히 학교와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외침을 들어주기는커녕 단체 탈퇴를 강요했고,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징계위원회까지 생겼다. 학생들의 양심적 목소리에 교사들의 권력과 폭력은 더 심해졌다. 교사들은 학벌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뤄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그들에게 학벌은 그저 또 다른 권위와 강자가 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난 스스로 강자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학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대학 진학 거부
실업계 학생이든 인문계 학생이든 고3 수험생이 되면, 대학 진학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나 역시 사회 경험을 통해 사회단체의 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고, 'NGO대학'이라 불리는 성공회대 진학을 고민했다. 하지만 수능 시험이 치러지던 날,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걸어간 곳은 고사장이 아닌 시교육청. '대학 평준화'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며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를 거부하는 나의 양심에 따라 대학 진학 거부를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1인 시위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세상은 학벌사회야.",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후회하지 마라." 그러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난 떳떳하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살 거야!"
단순히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며 시작한 대학 진학 거부였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의 삶으로 치부하기엔 우리 주변엔 치유하지 못한 아픈 과제들이 너무 많다. 매일같이 시험에 쫓겨 사는 학생들, 그 시험제도의 낙오자가 되거나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학생들…. 우리는 일상에 쫓겨 아픔을 느끼지 못할 뿐, 너무나도 아픈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 왔던 청소년 인권운동과 교육운동들이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학벌주의를 거부하며 시작한 나의 대학 진학 거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소년인권운동, 학벌없는사회운동과의 끈도 놓치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과 학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항상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정리가 된다. 현실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면서 학벌 문제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변화가 없을 경우, 세상은 아무 것도 진정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난 학벌주의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며 대학 진학을 거부한 나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형빈 (서울 이화여고를 사직한 교사)
▲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일상의 작은 비위는 물론 거대 권력과 자본도 개인 차원에서 거부한다. 불이익과 불편이 따르지만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승리한다.
경비행기 조종을 취미로 가진 진중권 선생이 내년에 필리핀으로 비행기 여행을 떠난단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MB정부가 끝나는 3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겠단다. 나로서야 비행기 여행, 세계 여행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부럽다. 그의 용기도 부럽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도 부럽다. 그렇다고 최근 중앙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인 그가 돈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닐 것 같다. 베스트셀러 작가, 명강사로서 인세와 강연료가 제법 될 것이 분명하지만 시민단체에서 받은 강연료는 진보신당에 기부한단다. 독일 유학 시절에도 한 달에 50만원으로 숙박을 해결하며 전시회나 여행을 다녔단다.
그의 소식이 담긴 신문을 읽다말고 서둘러 수업에 들어간다. 이제 한 달이면 교직 생활 십년을 채운다. 흔히 교직을 천직이라고 한다. 특히 사립학교는 ‘평생직장’으로 불린다. 평생직장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게다가 평생직장이라는 말에는 “평생 밥벌이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고맙게 생각하라”, “평생 얼굴 보고 살 사람끼리 얼굴 붉히는 일 없도록 하자”는 식의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교사의 사고와 행동을 가둬놓기도 한다. 그 속에서 문제제기라도 하려고 든다면 곧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들리지 “절이 싫으니 주지 스님을 바꾸자”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 말 속에는 “용기 있게 떠나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말라”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십년을 한 학교에서 보냈다. 애당초 이 학교가 ‘평생직장’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이 학교가 교육활동을 실천할 소중한 ‘현장’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인지는 몰라도 지난 십년간 참으로 많은 땀과 눈물을 이 현장에 뿌렸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사랑을 주고받았다. 부당한 학교 현실에 저항하다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성과에 축배를 들기도 했다. 교과서와 입시를 뛰어넘는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며 웃음과 감동이 넘치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나하나 성장하며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정부는 학교가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고 있고, 학교들은 서로 누가 더 나쁜 짓을 하는지 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제 학교 안에서는, 학교를 바꿀 동력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교조 운동의 위기도, 전교조가 그 동안 끊임없이 연대 사업을 강조해 온 것과 무관하게, 전교조 운동이 실제적으로는 ‘학교 안’, 혹은 ‘조합원 내부’에 머물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학교조차 바꿀 수 없는 시기가 분명히 온 것 같다.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학교를 바꾸게 되는 것이 아니나 나 자신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내년부터 우리 학교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다. 한창 신입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즈음, 여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버젓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상식이나 교육자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이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고 있다. 이른바 명문대 진학에 유리한 코스를 선점한 학생들의 욕망과, 이른바 명문고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교사들의 욕망과, 세 배 이상 되는 등록금의 본전을 뽑으려는 학부모들의 욕망이 들끓는 그 곳에서, 내가 학교를 바꾸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바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망명이다. 지금은 자본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식민지화해버린 시대이다. 학벌체제는 그것의 하수인이다. 예전 같으면 두만강을 건너서 망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익환과 윤동주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명동촌을 일구고 거기 학교를 세우고 식민지 반도와는 다른 자유로운 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국경을 넘어 망명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오직 내부로의 망명이 있을 뿐이다. 내부로 망명한다는 것은 체제 내에서 체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의 선친은 창씨개명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일본형사에게 일본 헌법에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지 물어 형사의 말문을 막았다. 어느 시대에나 내부에서 망명할 통로는 있다. 자기에게 정직하고 외부의 억압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내부에서 망명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망명은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오자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자발성이다. 낙오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게다가 모두가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을 때 먼저 낙오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낙오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물구나무 선 사회에서는 거꾸로 성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 김상봉, <내부로의 망명 또는 낙오자 되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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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하기’ 또는 ‘낙오자 되기’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망명지로 떠나는 출발점은 학교가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임을 확인해 본다. 학교에 붙어 있으려고만 한다면, 학교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다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면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그래서였을까. 김상봉 선생님은 어느 강연에서 “교사는 늘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어놓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나이 마흔, 학교를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상상해 본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여행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선생처럼 삼 년씩이나 비행기 여행 같은 것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봄이 시작되는 섬진강이다. 그 시기는 학교에서 일 년 중에 가장 바쁘다는 삼월이다. 학교 안에 있다면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산수유와 매화 꽃망울이 터지는 섬진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김용택의 시를 가르쳐 왔고,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본 적도 없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왔다.
다음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은 대학 도서관이다. 40대의 나이에 영국의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자본론 원고를 집필했던 마르크스와 같은 삶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저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가에 처박혀 하염없이 빈둥대고 싶다. 이제는 한갓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로 전락한 독서가 아닌, 독서 그 자체가 주는 무상성의 즐거움을 나부터 누리고 싶다. 책읽기가 지루해지면 햇볕 따뜻한 대학 교정을 거닐며 싱그러운 젊음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싶다.
공부도 하고 싶다. 요즘 각종 단체마다, 지역마다 인문학 공부가 유행이다. 철학아카데미, 풀로엮은집, 한겨레문화센터, 민예총, 참여연대, 마들연구소 등에서 진행하는 좋은 강좌가 널려 있다. 그 동안 여기저기서 만나봤던 강사들은 홍세화, 하종강, 노회찬, 심상정, 강수돌, 김어준, 한비야, 강풀, 한홍구, 강정구, 김상봉, 진중권, 김규항, 김진혁, 신영복, 조세희, 권인숙, 정태인, 고미숙, 송순재, 고병헌 선생님 등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박노자, 박원순, 정재승, 우석훈 선생님 등의 강연도 꼭 듣고 싶다. 시간을 내서 인내심 있게 공부해야 할 현대 철학, 나에게 너무나 취약한 분야인 경제학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
취미 생활도 하고 운동도 해야겠다.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플루트 연주 실력을 수준급으로 높이고 싶다. 어쩌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가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클래식 기타쯤은 곁들여 배워도 좋다. 자전거 타기 외에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으니 춤을 추면서 뱃살을 빼야겠다. 학교 축제 때마다 아이들을 비명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어설픈 춤 실력을 제대로 갈고 닦아야겠다. “내가 춤추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는 슬로건도 있던데, 춤이라는 몸의 언어를 마음껏 구사해 보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만 살도록 놔두지 않을 것만 같다. 나 혼자 행복하게 사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내년에는 지자체 선거, 교육감 선거가 있다. 그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나를 선거운동 판으로 끌어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 작년 교육감 선거의 분풀이를 해야겠다. 저들은 전교조 조합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경복 후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8명의 교사에게 해직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좋다. 이제 교육공무원이라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었으니 선거운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내친 김에 진보신당에도 가입을 해야겠다.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시민사회단체, 지역운동단체에서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은평 학부모 네트워크’에서 학부모 교육을 진행할 텐데, 학부모와 현장 교사들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다. 교육운동을 경험했던 현장 교사가 놀고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마포 민중의 집’에서도 늘 전교조에 지역 청소년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 왔으나 그 사업에 함께 하지 못했다. 밀양에서 전교조 사업에 지역 운동까지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이계삼 선생은 아예 나더러 밀양으로 내려오라고 꼬드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한 수 더 뜰 것이다.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모임 관리도 하고 연수도 진행하라고 시킬지도 모른다. 학교 그만두면 더 바빠질 것이 분명하다.
‘학교 밖’에서 무슨 일이든 해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낙오자’가 되어 ‘학교 안’과 ‘학교 밖’을 연결하고 ‘내부 망명지’를 확장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결코 나의 선택이 후회스럽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뭐 먹고 살 거냐?”는 질문이 당장 나올 것이다. 교직생활 십 년 퇴직금이면 삼 년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싱글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감사한지. 설마 삼 년 후면 (그 때면 적어도 MB 얼굴은 안 보게 된다)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겠는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는 성경 구절을 참 좋아한다.
만약 충분히 놀고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온갖 일을 벌이다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때 다시 들어가면 된다. 임용고사 나이 제한도 없어졌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나는 김용택의 시를 실감 나게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고, 지리산 둘레 길에서 하염없이 빈둥거리던 나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독서의 무상성을 맛본 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일러줄 수 있게 될 것이고, 온갖 인문사회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이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음악과 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나는 아이들에게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안교육의 상상력으로 공교육에 충격을 줄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지역운동과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운동론으로 현장주의, 대중추수주의의 함정에 빠진 전교조 운동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내부로의 망명길’에 오른 셈이다. 설사 학교 현장에서 매일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부딪히며 너저분한 일상을 반복하더라도 유쾌한 상상의 힘은 다시금 나를 추스르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실제로 망명길을 떠날지 아니면 여전히 현장을 지키며 고군분투 할 것인지, 나의 선택은 끝났을 것이다.
최만원 (조선대학교 강사, 정치학)
▲ 진보신당 광주시당 위원장 윤난실 씨가 지난 1월19일 광주광역시의회 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광주 시립대학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도 5월초 조선대학교 구성원과 시민사회단체에 조선대 공립화를 위한 시민모임을 제안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호남의 대표 사학인 조선대가 교육과학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정이사(正理事) 선임 강행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 장기적인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조선대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커다란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조선대는 단순한 하나의 사립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대는 해방직후, 각계각층에서 72,000여 명의 인사들이 국가를 건설한 새로운 인재를 지역에서 양성하자는 대의에 동의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성의를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다. 그러나 설립자 중의 일인이었던 구 재단의 고(故) 박철웅씨가 재단을 사유화하고 전횡을 휘두르면서 학교운영이 파행을 거듭했으며 결국 1988년 1월 8일 학생들의 100여일이 넘는 투쟁과 뜻있는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고(故) 박철웅씨가 재단에서 물러나면서 정상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구 재단 측은 이후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학교를 다시 탈취하려고 했지만 법에 의해 그리고 학교의 정상화 및 민주화를 추진하던 모든 이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대가 20여 년의 관선이사 체제를 끝내고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려던 시점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으며, 새로 집권한 정부의 친자본적 경향에 편승해 구 재단은 학교 본부, 교수평의회, 교직원노조, 학생회 및 민주동우회를 포함한 동문 등 거의 모든 관련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단이사의 선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교과부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동의하에 새로운 이사진에 구 재단 관계자들을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조선대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교과부의 결정에 반대하고 새로 구성된 정이사 퇴진 투쟁을 전개하면서 조선대학교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학내 곳곳에는 재단이사진의 총사퇴와 구 재단 관계자의 학내 진입을 성토하는 표어로 가득 찼으며, 이로 인해 캠퍼스는 40여 년 만에 찾아온 이상기온처럼 스산하기만 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대가 단순한 하나의 사립대가 아니라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수많은 민초들이 각자의 성의를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거의 대부분의 졸업생과 재학생이 이 지역의 아들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대 문제는 단지 조선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며, 따라서 조선대 구성원을 중심으로 모든 지역 구성원들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미 조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일부 구성원들은 정상화를 위한 4대 원칙(설립정신계승, 구 재단 배제, 1.8학원민주화정신계승, 조선대의 미래지향적 가치충족)에 의한 정이사 재구성, 또 다른 일부 구성원들은 민립대학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으며. 6월에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한 한 시장후보는 조선대를 공립(시립)대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조선대 정상화를 위해 제시된 방안들이 모두 조선대 구성원들이 제시하는 ‘정상화 4대 원칙’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는 문제는 학교를 운영할 자금과 발전을 위한 학교 운영을 위한 이사진의 구성이다. 조선대가 지금까지 내실 있는 운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일정 규모의 기금을 조성했지만, 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 조성된 기금의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중앙대학교의 파행적인 운영에서 보듯이 거대 자본을 재단으로 영입하는 것도 옳지 않다. 동시에 현재의 사립대 재단이사 구성에서 교과부가 승인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구성원들이 주장하는 4대 원칙에 부합하는 이사진을 구성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 조선대의 공립화가 적절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대를 공립화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확신한다. 첫째, 모든 구성원들이 염원하는 민주적 이사진을 구성할 수 있다. 사립학교법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 구조 아래에서는 조선대의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며 설립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민주적 개혁적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조선대 문제에 대해 피상적 이해만 갖고 있는 교과부가 이사 구성의 전권을 행사하는 한 조선대 구성원들이 주장하는 4대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이사진을 구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정부에서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운영 전반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사가 되기 위해 이런 저런 적절치 못한 사람들이 교과부 또는 정치권을 통해 이사로 임명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조선대를 시립대로 전환한 뒤 광주시 산하에 ‘시립대학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학에 대학 깊은 이해를 갖추고 있는 지역 출신의 구성원과 동문, 전문가, 시민단체 인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사진을 구성하여 상호 비판과 견제가 가능한 이사진을 구성하고 독립적인 운영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지자체가 조례로 이를 보장한다면, 지원과 운영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대학의 독자적이고 자율적 운영을 보장할 수 있다.
둘째, 등록금을 인하해 지역 인재의 역외 유출을 방지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 현재 광주/전남 지역의 중·고 수준은 전국 상위권에 속하지만 우수학생 상당수가 수도권으로 진학하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대부분 지역 밖으로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대를 시립대로 전환해 국립대 수준으로 등록금을 낮춘다면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에 남도록 할 수 있다. 특히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자체의 공무원 임용규정을 활용해 시립대 출신의 훌륭한 인재들을 채용하고 이들에게 고향의 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효과는 더울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인재 확보와 지역사회 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지자체의 재정능력에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가 있지만, 지역교육에 한해 380억 원을 투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 정도의 예산은 연말마다 반복되는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치우기나 불필요한 토건사업 한 두건을 줄이는 것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정이사 선임 문제로 다시 점화된 조선대 정상화 문제가 다시 장기화 된다면 가장 직접적으로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학교 구성원들과 이 지역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 공립화라는 단어가 조금은 낯설고 쉽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합의만 이룰 수 있다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모든 구성원들과 지역민들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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