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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준호 (청년유니온 광주지역모임)
▲ 지난 3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고 고려대를 자퇴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김예슬 씨가 대자보에 다 담아 내지 못했던 말과 자신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지난 3월, 한 대학생의 선언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 국가와 자본에 포섭된 대학 그리고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제조되어 자격증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양산되는 대학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과 함께 그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였지만 진정한 大學人이 되기 위해 대학교를 거부하는 모습은 파문이 일듯 각종 매체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지성인의 요람으로서의 대학, 대학인의 몰락은 물론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선언에 주목했던 것은 비판의 칼날이 무뎌질 때로 무뎌진 이 시대 지식인(대학인), 청년들에게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며 숫돌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말로서만이 아닌 직접적인 저항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 성찰적 글을 각종 매체에 실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얼마 전에는 김예슬씨의 글을 모은 작은 책이 발간되었고 그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이야기
비인간적인 경쟁과 미친 학습노동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들어간 소위 명문대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유나 정의, 진리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또 다른 트랙이 펼쳐져 학생들을 경주마처럼 양육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지위는 이미 자본의 시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기업이 돈만 준다면 진리나 정의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삼성과 글로벌, 이명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 명문대는 순수한 영혼이나 진리, 자유, 정의, 저항이 사라진 곳, 더 이상 대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눈과 귀를 막아 옳고 그름의 대한 판단을 유보 하고 대학에서 양육하는 경주마가 되어 취업이라는 끝나지 않을 트랙을 돌아야 하는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집어 삼키고 있는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적들의 이야기
대학생의 현실은 무엇일까? 실제 삶을 위한 배움과는 괴리된 자격증과 학점, 어학과 같은 스펙에 매달려 무직(無職), 무지(無知), 무능(無能)으로 대표되는 3무(無)의 졸업장이 그토록 모두가 가고자하는 대학의 결과다. 대학은 학위 자격증을 발급하는 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진정한 의미의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매달리는 졸업장과 자격증은 기업이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윤을 위해 저비용 고효율의 잣대를 최상으로 여기는 자본이 대학을 하청업체로 만들었다. 본질에서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자본에게 대학생은 거대한 이윤구조의 한 부품일 뿐이다.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그러한 구조를 유지하게끔 하는 국가의 역할을 감안하면 국가, 자본, 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이 청년들을 인간이 아닌 자원화하고 그들의 꿈과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할 근원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교육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무교육의 틀은 사회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며 ‘학교 교육의 주술’과 ‘능력사회’라는 구호 속에서 계급적 낙인을 내면화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국가의 의무교육과 자본과 기업이 요구하는 자격증 제도가 살아있는 한 배움의 자유와 삶의 자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교육이나 지식이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고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 당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되어버린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계속해서 주입한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사회적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는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자급자립의 기반과 공동체가 살아나 자격증이 없이도 자신이 나름의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등 각자 자신의 재능을 살려나가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공동체를 꿈꾼다.
거짓희망에 맞서다
그는 한국사회의 진보에 대해 묻는다. 충분히 레디컬(Radical)한가?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일상과의 연결이 느슨한 진보운동, 감동이 없고 사람향기 나지 않는 주장, 권력부터 달라고 하는 진보세력이 진정한 진보일까 라는 회의적인 의문과 함께 우리사회의 진보는 근원적인 가치투쟁에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충분히 근원적이지 못했기에 불필요하게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투박하며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이기 위해서는 넓은 시각과 고민을 가지고 구조에서 생활문화, 감성, 영성까지 품어내는 운동을 해야 하며 진보적 신념을 운동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근원적 문제의식을 끌어내리려는 다양한 담론들을 지적한다. 김연아를 상징으로 청년 세대를 ‘G세대’로 부른다. ‘김연아를 꿈꾸라’는 담론에는 거짓이 숨어있다. 그것은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 없는 현실, 오히려 청년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과 알바생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은폐하고 거짓 희망을 품에 안기는 ‘G세대’는 글로벌 카스트에 가깝다. 88만원 세대 운동도 청년실업 해결과 사회복지 확충과 임금 상향을 위한 연대투쟁으로 현실성이라는 이름의 중도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88만원이라는 수치화가 우리 세대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우리세대는 욕망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진정한 욕망이 아닌 자본에 의해 주어진 욕망이다. 그 안에 단답형이 되어버린 우리의 꿈이 있다. 그건 대개는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꿈들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학습된 두려움에도 갇혀 있다. 우리는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을 버리고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를 직시해야 한다. 대학이나 직업이 먼저가 아니라 내 자신, 나의 삶이 더 큰 존재다.
앞서 말해온 악순환, 국가-자본-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에서 의무교육과 자격증제도는 우리의 삶을 거짓 기준들로 수단화하고 비인간화된 비교경쟁 속으로 등 떠민다. 끝없는 트랙을 그저 당근을 생각하며 의식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트랙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나 자신이 바로 그 적이다.’라는 명제를 자신에게 각인시키며, 대학을 거부하기까지 무수한 성찰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잘못된 사회구조, 의식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그가 얻어낸 결론은 불복종이다. 자신의 불복종을 통해 거대한 벽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냈다. 그러한 저항은 그가 특별하기보다 어쩌면 젊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청년은 곧 저항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있다. 옛 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는데(不鏡於水)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다.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글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 대학이 만들어낸 자격증 시스템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김예슬이라는 사람의 ‘삶’을 거울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서 필자는 주어지는 삶이 아닌 참된 자신의 삶을 선택한 한 개인이 보인다. 또 청년으로서 실천하는 저항만이 진정한 꿈을 품고 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그를 거울로 비춰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앞서 말한 균열은 더 이상 작은 균열이 아니며 거대한 적은 더 이상 그 지위에 있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본 ‘내 깡패같은 애인’이라는 영화에서 옆방 깡패(박중훈)가 취업에 좌절해있는 지방대생인 옆방이웃(정유미)에게 던진 대사를 기억해본다.
“우리나라 백수들은 참 착해. 거 텔레비전 보니까.. 외국에서는 일자리 안 준다고 대학생들이 데모도 하고 난리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그저 자기 잘못인줄 알아.. 사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다 자기 잘못인줄만 알아.. 사회가 잘못한 거야.. 괜찮아.. 당당하게 살아~!”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 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중에서
피엡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교육담론팀)
▲ 서울 성동구청 관내 11개 중학교 1,2학년 학생 40명을 대상으로 한 '성동 영어수월성교육' 개강식이 광희중학교에서 열렸다.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1),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2)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 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 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각주>
(1) 피그말리온 효과 :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2) 낙인 효과 :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이뮤 (대학생)
▲ 5월 27일 진행예정이던 김용철 변호사 강연회 일방적으로 대관취소에 대한 주최 측이 걸은 현수막이다.
학교계단에서 강연회를 들었다.
5월의 끝자락, 조선대학교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강연회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대학교는 강연실로 예정되었던 서석홀 강당의 대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연회는 서석홀 앞 광장에서 이뤄졌다. 지난 전남대 강연회에서도 대학본부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걸로 봐서 비단 조선대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글쎄, 이번 사건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불신을 더 굳히게 만들어줬다고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떤 화두도 되지 못한다. ‘대관 불허’사실은 대학사회에서 어떤 토론거리도 되지 않았고, 그냥 묻히는(드러났었다면) 분위기다. 대학교 학생처뿐만이 아닌 대학교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문제라고 할 만하다.
대학문화는 과연 상큼해질까
강연회에서 흘러나왔던 김상봉교수의 '대학생들의 동맹휴학 제안'이 떠오른다. 시장만능-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만한 대학생들의 운동방식으로서 제안했던것으로 기억한다.(그 운동의 역사는 훨씬 전부터 계속 되었던것이지만) 허나 올해도 상큼한(입시에 쩔어있을텐데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1학년 학생들의 유입은 계속 되었고, 시큼하다 못해 떫어서 입이 얼얼할만한 대학생활은 내년에도 계속될것만 같다.
마치 대학교는 지난 12년간 수능시험체제에 순응하며 지냈던 수험생들을 어떤 '완전체'로 만드 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12년간의 입시생활은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체제를 체화시키려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경쟁몬 완전체'로 향해 간다랄까. 대학교의 학생평가체제는 상대평가이며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은 고민 없이 제적해버린다. 여전히 학생들은 이제까지 하던 대로 시험공부를 하며 하던 대로 성적에 목을 맨다. 신입생들부터 '취직에 도움이 될 만한'따위의 말을 곁들이며 모든 수업의 동기부여는 '기업'에 관련한다. 이 체제의 기반은 쉽게 무너질 것만 같지는 않다. 학생의 자살이나 선생의 자살에도 그다지 눈길을 쏟지 않으며(조선대에서는 한 시간강사가 자살했었다) 강연회조차 그 성격이 불온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찰이 있었음에도 이것들이 대학사회에 큰 이슈로 불거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것은 개념 없는 대학생들이 데모도 안하고 취직자리에만 정신 팔려있어서만도 아니고 어느 순간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도 아니다. "니들은 아직 어려"라는 주문아래 좀비 취급하던 어린애들이 대학입학하면 갑자기 진지한 자세를 취하며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촛불에 기대 한국사회의 젊은이에 대한 갖가지 분석을 시작하는 노인네들을 볼라치면 속이 답답하다. '20대 개새끼론'이나 들먹이면서 그들은 이 사회를 쥐락펴락 하려는 '개새끼 세력'이 여러 세대의 '수많은 개새끼들'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김용철씨의 강연회를 그 성격이 불온하다 하여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대학교의 입장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이명박스러움'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MB의 삽질을 욕하는 일이 정말 시급해 보이지만 대학사회의 '이명박스러움'을 생각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 인것 같다. 조선대학교는 여전히 '정이사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보인다. '정이사 제도로!'라는 구호는 이제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정이사제도' 자체는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제도의 민주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더더욱 반발하는것 아닌가? 이제는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가 '민주적 학생회!','민주적 학내문화!','민주적 학칙!' 따위의 문제로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강연회 대관 불허를 보고
서부원 (살레시오중학교 교사)
▲ 지난 5월 24일 조선대학교 본부측의 대관취소로 인해 조선대학교 서석홀 앞에서 김용철 강연을 진행한 가운데, 200여명의 학생, 시민들이 함께 하였다.
분노가 일기보다 솔직히 가엾은 마음이 앞선다. 대부분의 학과가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현실에다 비리 혐의로 내쫓긴 옛 재단이사들의 복귀를 앞둔 어수선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럴밖에. 조선대학교가 지난 5월 24일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강연회를 갑작스럽게 대관 불허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외 이미지가 나빠지고, 학생들의 취업에 지장을 줄까봐 그렇단다. 조선대학교에서 한 해 삼성에 취업하는 학생이 몇이고, 삼성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삼성에 잘 보이려 애쓴다고 과연 취업률 높아질까. 지방대 졸업생들의 극심한 취업난을 모르지 않지만, 대학 측의 이런 대응은 나가도 너무 나간 '찌질한' 짓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취업하면 현수막 내거는 시대
주지하다시피 대학이 대체로 자본에 포섭된 지는 이미 오래다. 대학생은 물론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까지도 언제부턴가 성균관대를 '삼성대'로, 중앙대를 '두산대'로 부르고 있고, 고등학교 교실마다 내걸려있는 입시지원사정표에 성균관대와 중앙대가 과거에 비해 사뭇 서열이 올라가 있는 것도 삼성과 두산 때문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어처구니없게도 '팔이 안으로 굽듯 성균관대나 중앙대에 진학하면 삼성과 두산에 취업할 기회가 아무래도 더 늘지 않겠냐'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또한 의외로 많다. 기실 지방 사립대학에서는 졸업생이 웬만한 대기업에 취업이라도 할라치면 고시 합격의 경우처럼 학교 구석구석에 경축 현수막을 내거는 건 이젠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니다.
자본이 대학을 통째로 '구매하는' 시대를 넘어 대학이 자본에 자발적으로 알아서 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명문대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어 광고해주듯, 이젠 전국의 대학이 앞 다퉈 대기업을 띄워주고 있는 셈이다. 대학은 대기업의 홍보를 위한 자회사이자, 자본이 요구하는 인력을 공급하는 양성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이 시나브로 돼 버렸다.
현대사 이끌어온 대학생들, 이젠 기억조차 아스라한 전설
'대학'이라는 이름이 어색한 그곳에 대학생이라고 멀쩡할 리 없다. 한때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맨 앞에서 이끌어온 선구적 지식인이었지만, 이젠 기억조차 아스라한 '전설'이 돼 버렸다. 조선대학교의 경우, 대학 측이 삼성에 사과하듯 무릎을 꿇은 모양새가 됐지만 이를 문제 삼을 총학생회조차 꾸려지지 않는 상황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삼성의 탈법적 지배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대학생들이 삼성에 취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삼성의 독점적 시장 지배가 경제 구조를 왜곡시킨다며 핏대 세워 욕하는 그들이 의기투합한다며 에버랜드로 엠티(MT)가는 현실이다. 공교육을 붕괴시키는 주범이 학벌구조라면서도 자녀를, 제자를 기어이 서울대를 보내야 한다는 인식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대학 교수의 '광대짓'도 가엾긴 마찬가지이다.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해야만 하는 처절한 상황이라지만, 명색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자본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대학 본연의 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지성의 상징인 그들도 살고, 그들의 제자이자 미래의 지식인인 대학생도 산다.
대학들의 못난 행태, 비루하기 짝이 없다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적어도 내 아이를 조선대학교에 보낼 일은 없어야 겠다고 다짐한다. 아이가 실력이 되고, 경제적인 여력이 있다고 해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성균관대, 중앙대도 그렇고, 고려대를 비롯해 재벌의 오너라는 이유로 명예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과 같은 황당한 사례를 꼭 기억해 두었다가 아이가 철들 때 납득할 때까지 설명하고 이해시킬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또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대학들의 못난 행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대학 측이 그토록 강조하는 대외 이미지가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또렷이 보여줄 것이다. 삼성을 비롯한 자본을 향해 눈치 보는 일이 대학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과 우리 사회 장삼이사들의 분노가 대학에 얼마나 큰 고통을 안기는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하자면 해당 대학에 대한 입학 거부 운동이자 불매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그 대학에 입학원서 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도록 만들겠다는 의미다. 듣자니까 조선대학교 재학생들의 분위기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지만, 졸업생이라면 이번 대학 측의 '찌질한' 행태를 두고 동문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대학이라고 불매 운동 하지 말라는 법 없다. 학생과 학부모가 없으면 교수도, 대학도 존재할 수 없다. 대학 측, 그들이 말하는 대외 이미지란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것인지 부디 깨닫기를 바란다. 자본 앞에 알아서 설설 기는 대학의 작태를 보고 대학생들이 무얼 배우게 될까. 젊은 세대의 '개념 없음'을 탓하기 전에 기성세대 스스로의 비굴함과 탐욕을 반성하길 바란다.
대학 측의 불허 방침에 따라 건물 안에서는 쫓겨났지만, 예정대로 서석홀 앞 광장에서 강연회를 진행하였다. 정치적 시위나 집회가 아닌 단순한 강연회를 두고 대학 측이 공권력을 동원해 해산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 이 땅의 권력화한 자본이 지성의 전당 대학을 얼마나 천박하게 만들고, 단숨에 숨통을 틀어막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2010년 4월 28일(수), 전남대 법과대
강연 정리/재구성: 오방창환
오늘 강의를 들으러 온 많은 분들이 대학생들인 것 같은데요. 요즘 대학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무슨 놈의 나라가 동년배의 8~90%가 대학을 간답니까?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있나요? 그게 대학이에요? 대다수가 대학 간다면 의무 교육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등록금을 받고 그런답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대학 나와서 취직이 되니 안 되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대학을 나온 사람은 국가시험제도로 말한다면 중간간부이상의 능력을 갖췄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고시를 합격할 수준이 돼야 되고, 7급 공무원은 2년제 대학 정도, 9급은 고졸 ‧ 중졸 정도에 합당한 것이죠. 예전엔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환경미화원 시험에 석사학위소지자가 쓰레기봉투 들고 뛰더라고요. 물론 저는 직업의 귀천을 이야기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적절치 않은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아마 대부분 기업체 취직을 목표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잠시 기업 인사 이야기부터 조금 하겠습니다. 학력제한 철폐되어있다고 외부적으론 그러지요. 그러나 사실은 전국의 대학을 핵심대학/우수대학/그 밖의 대학으로 나누어 서열화하고 있어요. 그래서 핵심대학과 우수대학의 분류에 들어가는 대학출신들을 대부분 등용하고 있죠. 물론 고졸도 뽑아요. 그러나 그 숫자는 상징적일 뿐이죠.
제가 삼성에 근무할 당시, 임원 2천 명 중에 여성이 없었어요. 고가(?)를 6개월에 한 번씩 하는데, 삼성의 인사제도는 사업체를 삼백 개 단위를 나누어 A, B, C등급으로 평가하고, 다시 각 사업체의 하위에서 직원들을 A, B, C등급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이익 및 실적을 가지고 등급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반도체나 휴대폰 이런 곳의 직원들은 A 등급 비율이 더 높지만, 경쟁력 없는 업체, 만년 적자인 업체에 소속된다면 직원의 능력과 무관하게 낮은 등급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진급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승진하려면 몇 년간 A등급을 계속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여성에게는 A등급을 주지 않는 게 일반화되어 있어요. 제가 A등급을 매겨도 무슨 여자가 A냐고 하면서 깎아버려요. 이러니 여성은 승진할 수가 없고, 자연히 여성 임원도 없는 것이죠. 아, 그런데 요즘엔 여성 임원이 있긴 합니다. 윗분들 따님들이 임원 하더라고요. 또 삼성 직원 이십 몇 만 명 중에 장애자가 한 명도 없어요. 그런데 장애인고용은 의무화되어 있거든요. 그럼 아마 고용의무를 안 지키고 과태료 몇 푼으로 때운 것이겠죠. 제가 이런 암울한 이야기부터 강연을 시작한 것은 여러분 대학생들도 현실을 알아야 하거든요. 제가 근무할 당시에 보면 신입사원 50% 정도가 삼년내로 그만둡니다. 물론 무능한 사람이 그만 두는 것은 아니에요. 교사라든지, 공무원이라든지 다른 곳으로 갈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그만두는 거죠.
제가 마침 회사 들어갔을 때, 한국이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고 그 때 HM 명단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여러분 HM이 뭔지 모르시죠? 희망퇴직자 명단이에요. 그런데 이 희망퇴직자는 본인이 희망하는 게 아니고 회사가 희망하는 사람들이에요. 책임자들은 그 명단에 지정된 사람들을, 소주 같이 마시며 울든 어쩌든 간에,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서 자진 사표 내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6만 명을 잘랐죠. 어찌 보면 집안이 어려우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것 당연한 것일 수 있어요. 그런데 집안 형편이 피면 다시 데려와야 하는 거죠. 삼성은 그렇게 해서 내보낸 사람들 한 명도 다시 부르지 않았죠. 뭐 새로운 사람은 늘 있으니까. 삼성은 연봉제를 하는데, 어떤 분은 오십대 부장임에도 불구하고 연봉이 9백만 원이에요. 또 다른 어떤 분은 오십대인데 직급이 대리더라고요. 이런 분들 참 처절하게 출근해요. 지각, 조퇴, 결근 없이 꼭 정시 출근해야 해요. 출퇴근으로 걸리면 안 되니까. 회사는 이들이 나가길 바라기 때문에 일은 안주거든요. 회사에서 나가달라 하는데, 안 나가고 버티는 경우죠. 이게 인간다운 것은 아니죠.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끝까지 붙어있는 경우죠.
제게 반도체 근로자들 중 사망한 분들에 대해서 묻는 분들이 있어요. 저도 거기 한 번 돌아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유심히 안 봤어요. 그 땐 그렇게 위험한 줄 몰랐죠.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어요. 다만 젊은 사람들이 가서 이상하게 병이 많이 걸리고 그러면 문제 있는 거죠. 이럴 경우 외국에서는 개연성 이론이라고 해서 산업체가 손해 배상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판사님들은 굉장히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삼성 사장단 중에 고졸 출신이 대여섯 명 있어요. 물론 입사할 땐 고졸이었는데, 나중엔 박사학위까지 갖추긴 하죠. 그 사람들이 그 학력에도 불구하고 사장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섭외의 대가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장관급에 청탁할 일이 생겼을 때, 지시가 떨어지면 그날 저녁 장관 사모님과 식사를 함께 할 정도에요. 아주 탁월한 능력이죠. 그런 사람이 회사에선 필요하죠. 그런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회사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아니면 세계적으로 탁월한 기술자여서 이건희 말마따나 십만 명을 먹여 살릴 재주가 있던지 해야죠.
제가 대학 다닐 때 유신치하였어요. 고등학교 땐 긴급조치 시대구요. 살벌한 시절이었지만 그때도 학생들은 데모를 했어요. 심지어 고등학생도 데모하다 체포되고 학교를 그만 두고 했어요. 그 당시 학생들은 취업이 너무 잘 돼서, 그렇게 여유가 있어서 학생들이 데모를 했을까요? 여러분들을 나무라자는 것은 아니고, 지금과 견주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교수들 4천여 명이 시국선언을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이 땅의 백만 학도는 어디서 무얼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먹고 살기 열악한 환경이어서 취업 문제로 바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열심히 취업준비하면 취업이 잘 됩니까? 직장을 갖는다 해도,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한갓 기계 부품 취급받고 금세 버려지기 십상이에요. 폭력혁명 이야기하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세상일에 기본적인 관심과 참여의식을 갖자는 이야기예요. 무엇보다 여러분들 모두 유권자일 테니 관심 갖고 선거 잘 하세요. 우리가 사년, 오년 만에 한 번씩 투표하는데, 그 때마다 제발 제대로 뽑으세요. 광주는 대부분이 민주당을 찍죠? 그런데 민주당이 그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합니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경기도 양평 사는데, 아직도 한나라당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사람들이 아파트 산다고 해서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래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라고 한나라당을 찍어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중산층일까요? 중산층이라면 적어도 식욕이나 생존을 위해 먹는 수준에선 벗어나야 해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사하는 것은 인간적인 식사가 아니에요. 동물적인 것이죠.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사가 인간과 인간의 소통과 만남의 기회일 때, 그것이 인간적인 식사죠. 그런데 한국에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이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여러분들 취업이 좀 안됐으면 좋겠어요. 동료들을 짓밟고 몇몇 소수는 성공한 듯이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잠시 잠깐일 뿐이거든요. 좀 잔인한 이야기 같지만 취업도 안 되고 갈 길 모르는 젊은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거죠. 지금이 바로 그런 위험한 시기예요. 여러분들은 등록금 투쟁하고 한 명이라도 더 기업체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환상 깨십시오. 기업은 이제 한국에 생산기지가 없어요. 심지어 된장공장도 중국으로 옮겨갔을 지경이에요. 삼성의 생산기지 현재 70% 이상이 외국에 있어요. 그런 까닭에 국내에서 기업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겠죠. 여기 계신 분들 중 삼성에 몇 분이나 취직할지 몰라요. 그러니 거기에 너무 목을 매지 말란 겁니다. 그럼 대안이 뭘까요? 저는 모릅니다. 저도 대안이 없어요. 여러분들에게 희망적이고 대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것이 별로 없더군요.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기업 1위가 삼성전자라는 말이 있다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거기 들어가서 뭐하려는 건가요? 삼성전자의 핵심산업이 반도체와 휴대폰이니까 거기 들어가서 반도체 만들고, 휴대폰 회로 설계하는 등 기술자로 살려는 건가요? 기술자할 수 있어요? 아니면 뭐 복사할 건가요? 그도 아니면 비자금 만드는 거 심부름하고 그럴 건가요? 그렇게 해서 삼성에서 사장되고 임원 되고 싶은 건가요? 삼성에서 사장되려면 비자금 잘 만들고 뇌물 심부름 확실히 하면 됩니다. 할 수 있으면 하세요. 선망 기업 1위라는 삼성전자의 이미지는 아마 월급 잘 주고, 국가 다음으로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거에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책에서도 말했듯이 삼성이 그다지 인간적이진 않습니다.
삼성이 광고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니 우스운 이야기죠. 누가 자기 식구를 그렇게 죽인답니까?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그런 광고들 별로 진실한 것 아니죠. 광고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삼성은 매 년 초에 광고비를 언론사별로 할당하는데, 이것은 방송CF이나 지면광고의 단가와는 무관한 금액입니다. 언론은 구조적으로 삼성과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주는 사료를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습게도, 진보적인 언론은 그 의존도가 훨씬 심해 거기서 주는 돈이 생존과 직결됩니다. ‘조중동’ 같은 경우는 따로 자산도 있고 임대소득도 있어서 흑자를 유지하지만 진보적 언론들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요즘 김상봉 선생님이 주도하는 ‘삼성 불매 운동’, 이거 프레시안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까닭은 프레시안이 대기업 광고를 받지 않기 때문이죠.
저 같은 경우는 살 날이 산 날보다 적을 겁니다. 그리고 또 이 땅은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살아갈 곳이죠. 그렇다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니에요? 최소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되어야 할 것 아니에요? 현재로선 가장 본받을만한 사례는 서구 북유럽과 같은 시스템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되면 아플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고, 공부하고 싶으면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선 이런 말 잘못하다간 빨갱이되기 쉽죠. 말조심해야 해요. 그런데 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아주 기본이 되는 사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있는 사람 몫을 빼앗아서 없는 사람도 잘 먹고 잘 살자고 주장하는 것 아니에요. 이를테면 병들어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주자는 거예요.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기본 전제는 세금 제대로 걷는 것이죠. 누군가 불법적으로 조성한 검은 돈을 제대로 조사해서 국고로 환수하기만 하면 여러분들 등록금 문제 해결하고, 무상 교육 실현할 수 있는 거거든요. 사실 간단해요. 세금 제대로 걷으면 되는 거예요. 서민들의 푼돈이 문제가 아니라 억, 조 단위의 불법적인 비자금들을 수사하고 찾아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참 암담하죠. 단군기원 이래 희대의 탈세 사건을 불구속으로 하고 사면하는데, 이런 기준에 의하면 전국 7만 교도소 수감자들 다 석방해야 돼요. 그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른 자만 남겨두어야 할 테니까요.
현재 삼성을 생각한다의 출간과 함께 삼성 불매 운동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전략에 있어서 상당히 조심해야 할 지점이 있어요. 삼성이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포장된 현 상황에서는 ‘삼성 불매’라는 화두가 반체제 내지는 반정부와 동일시될 위험이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삼성불매운동이 적절한 대안일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이 정관계는 물론이고 법조계까지 휘어잡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구조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소비자의 권리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이건 누가 누구에게 강요해서 해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니죠. 각자가 판단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삼성 제품을 갖고 다니는 게 부끄러운 세상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옛날부터 국산품 애용을 국민적 운동의 차원에서 실시해왔습니다. 이를테면 저 어렸을 때 모두가 국산품 연필을 썼어요. 그런데 수십 년간을 국산품 써줬는데 요즘 독일제, 일제에 다 내수시장까지 전부 빼앗겨 버렸어요. 이게 우리의 애국심 부족 탓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줄 곧 국산품 써줄 때 국내 연필회사들은 전문가용 연필을 안 만들었어요. 보통 연필만 만들어도 되니까 안이하게 처신했던 거죠. 그런 태도가 지금 이 형국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삼성도 우리 기업 아닙니다. 생산기지가 국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법상 주식회사는 주주가 회사 지분 소유하는 것인데, IMF 체제 때 보니까 삼성 주식의 75%가 외국인 지분이었어요. 그게 어떻게 우리나라 회사입니까? 삼성이 우리나라에 세적지를 두고 있는 까닭은 우리나라가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가 더 나으면 이미 옮겼죠. 실지로 제가 근무할 당시에도 여러 번 세적지 문제를 검토한 적 있어요. 그런데 삼성은 절대로 못 옮겨요. 한국에선 참 편하게 금융에서 흑자를 내거든요. 내수만으로, 내국민만을 상대로 해서 전부 조 단위 흑자를 내는 금융을 유지하고 있는데, 외국으로 가면 이거 불가능하거든요. 더군다나 뇌물 수수로 법령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이렇게 좋은 나라를 두고 어디로 나가겠습니까? 삼성이 여러분의 직장을 위해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에서 기업 꾸리고 있는 거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면 적어도 세금 문제는 확실히 했겠죠.
삼성을 생각한다가 현재 13만부를 넘겼다고 합니다. 제 욕심 같아서는 한 백만 부 팔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인세가 욕심나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제가 엉터리같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읽고 나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저한테 더 이상 험한 욕은 못할 거 아니에요. 제가 거기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썼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세상에 영원히 남을 책인데, 저도 손자가 둘인데 말이에요.
세상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묻는 분이 있던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예가 생각나네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전화 연락을 받는 순간 지옥이잖아요. 비통해지죠. 그런데 조금 이따가 동명이인이라 잘못된 연락이 갔다고 다시 전화가 오면 그 자리에서 천국으로 바뀌죠. 이렇게 객관적 상황의 변화가 없는데 스스로 천당과 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조중동’이나 ‘삼성’과 같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암적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천한다면, 곧 자신이 인식한 바를 널리 알린다면,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 밖에도 또 정계나 법조계도 문제는 많죠.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그 조직의 구성원이 된다면, 분명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거예요. 달리 말하자면, 상식을 가지고선 끝까지 갈 수 없는 조직이라는 거요. 그 때 올바로 판단을 해야겠죠. 저는 검사 재직 시절에 언제든 사직할 생각을 하고 일했어요. 검사, 그거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거든요. 일을 제대로 하다보면 정권 실세나 인사권자와 계속 부딪히게 되거든요. 이 말은 그 조직에서 버티려면 나쁜 짓을 해야 될 때가 온다는 거죠. 그러니 때가 되면 나와야 해요. 그런 직업이니까 사실 좋은 직업은 아니죠. ‘엘리트 검사’라는 말이 있던데, 가족이나 본인에겐 엘리트일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엘리트 아니죠.
저에게 희망이 있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희망을 바란다면, 30년 전 오월 이 땅에서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겠죠.
▲ 김철수 열사 19주기 추모제에 놓여진 제사상.
1991년 5월 18일 고등학생 한 명이 전남 보성고 운동장에서 불길로 나타납니다. 이 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광주민중항쟁 기념식을 위해 모여 있던 학생들은 눈물만 흘릴 뿐 생각이 멈춘 듯 아무런 요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학생은 불길이 온 몸을 휘감아 도는 상황에서도 ‘노태우정권 퇴진’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수십 발자국을 남기며 쓰러지고 맙니다. 질긴 목숨은 그를 저 세상으로 바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급차에 실린 검게 그을린 온몸 그 고통 속에서도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도 친구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렇게 생사를 넘나들며 물 한 모금만 달라고 애원하던 그는 “무엇이 진실한 삶인지 하나에서 열까지 생각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2주일 동안 밥 한술도 못먹고 하루에 물 한 컵만 먹고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지금까지 힘차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확실히 믿습니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 채 운명을 달리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그가 올해로 19주기 추모제를 맞는 김철수 열사입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김철수 열사여!
그가 운명하는 당시 우리는 어른들이 보기에 코 찍찍 흘리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만들어준 환경에 순응하면 살아만 가는 그런 존재였지요. 하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를 세상의 중심으로 점점 다가가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의 죽음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이들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제도교육에 저항하며 사회모순을 향해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야 했습니다. 그러한 삶이 열사와 직통하는 삶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당시 천 여명의 고등학생들이 광주 전대병원 영안실 앞에서 비를 맞으며 철수 형을 지켜야 한다고 우리 손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학교도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청소년단체에 근무하는 선배는 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학교를 자퇴까지 했었습니다. 그렇게 열사는 벌써 19년이 지나 버렸습니다.
김철수 열사의 무덤은 19년 동안 그 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지만 그 시대를 함께 했던 고등학생들의 삶은 많이 변해 있습니다. 아이들의 아빠 엄마로 공장의 노동자로 사무직 노동자로 어떤 이들은 열사가 가고 싶었던 길을 가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열사가 남긴 정신을 위해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제사 날은 소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언제나 열사들의 제사 밥을 챙기며 자식을 먼저 보낸 많은 부모님들은 아픈 몸으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아온 일부의 옛 친구들을 보며 남 몰래 눈물을 흘리며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열사의 죽음은 현재 진행형
자신의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붙이기 전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 소중한 목숨을 내 던지며 열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끝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의 죽음은 사회적 죽임이며 현재 진행형입니다.
아직도 세상은 여전히 많이 가진 사람들과 권력자들에 의해 고통이 심화되고,‘학벌사회’처럼 권력이 세상의 근본이자 주인인 국민들을 목조여 오는데 주저함이 없는 이성이 마비되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 땅의 교육은 여전히 청소년들을 죽음의 벼랑 끝에 매몰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내년이면 김철수 열사 2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그의 추모제는 부모님, 유가족회만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보기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참교육 실현을 염원하던 김철수 열사의 바램이 흩어지는 바람이 되지 않도록 살아남은 우리가 망월 묘역에 모여 힘을 모으고 의지를 모아 시대의 등불을 지켜내고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사람들에 맞서 싸워 나가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살다가 힘들어 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 열사들의 숨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가끔 소주 한 병들고 열사들 곁으로 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끔이라도 자식 먼저 보낸 후 속병 앓고 살아가는 부모님들 한번 씩 찾아뵈었으면 합니다. 열사들과 함께하는 것 어렵지 않은 행동들입니다. 자신의 조건과 상황에 맞게 열사정신을 실천하는 마음만 있다면요.
․ 1973년 3월 전남 보성 출생
․ 1989년 3월 보성고등학교 입학
․ 1991년 5월 18일 보성고 운동장에서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 1991년 6월 1일 전남대학교 병원에서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묘역에 안장
1991년,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를 치루던 도중 김철수 동지는 운동장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행사장으로 달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우리의 소원'을 친구들에게 불러 달라고 했다. 동지는 유서로 보이는 타고 남은 종이에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참교육 실천을 위해 기성세대의 깨달음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동지는 결국 분신 2주만 인 6월 1일 운명하였다. |
횡단대화
체벌 없는 세상을 위한 작은 메아리
시간 : 2009년 6월 30일 저녁7시~9시
장소 : 광주청소년문화의집
주제 : 체벌문화 극복방안
배이상헌 : 오늘 포럼에 참석해신 분들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게 된 배이상헌입니다. 앞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난다 님을 비롯한 세분의 발제를 들어봤는데요. 어떠신가요? 오늘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이제 체벌의 당위성 논쟁이 아닌 실질적인 대안이 나오길 기대하며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강경필 : 제가 학교를 그만 둔 아이들과 교육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는데요. 저 역시 잘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과 만나는 게 쉽지는 않아요. 제 이야기를 듣지 않은 아이들을 접할 때마다 ‘때려야 되나?’ 이런 순간순간 고민들이 있는데, 제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없을 거라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문화를 바꾼다는 것은 세대 간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대 간의 단절이란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주면서 이 사람들이 앞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체벌을 하지 않고 아이들을 만났을 때. 이 아이들이 당장 체벌을 하는 상태에서 교육적 효과를 줄 것인가 보다, 내가 체벌이 문제라 생각했을 때 체벌을 중단한다면 아이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가 문화를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면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조재호 : 왜 체벌을 학생입장에서 이야기를 안 하고 교사입장에서 이야기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요. 일상에서 저는 체벌문화를 이야기할 때마다 늘 교사입장에서만 이야기하는 거 같아요. 사실 과학적으로도 검증이 되었잖아요. 체벌이 교육적으로 효과가 없다. 인간적인 것들이 교육에 효과가 있다. 이건 주체의 문제인 거 같아요. 질문을 바꿔서 생각해보자고요. ‘왜 대통령이 문제가 있지?’보다 ‘왜 저 따위로 하는데도 저항하지 않지?’ 라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학교를 감옥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둘 다 근대사회에 훈육기관이죠. 근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간수가 앞장서서 죄수 인권운동 해줄까요? 감옥에서 죄수운동은요. 죄수들이 며칠 단식하고 있잖아요. 활동시간을 5분을 하기 위해 목숨 걸고 하면서 조금씩 쟁취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학생인권에 학생들의 이야기가 빠졌다고 보는데요. 저는 여기 있는 학생들이 학창시절에 많은 상처를 앉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좀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어떤 저항의 씨앗을 잡아내고 있는가! 이게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막막한 질문인데 학생인권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속은 후련하지만 실질적으로 학생들 입장에서 체벌을 극복하기 위해 학생들은 어떤 노력을 있을까요? 학생들도 사실상 감옥체제에, 한국사회 학벌체제에 마음속으로 동의하면서 다니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내면화되어 있잖아요. 솔직히 대학만 가면된다… 그런 계산들이 있지 않나요? 비슷한 얘기로 선생님들이 시국선언 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요? 왜냐면 밥벌이니까. 학생들이 학교 그만두고 내 인생이 경제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만큼, 선생님들도 분명 힘들 거 같아요.
최유찬 : 앞서 조재호 선생님들이 왜 시국선언 못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로 밥벌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일 거예요. 학교를 다니면서 제 머리 속에 들어있는 건 ‘좋은 대학가자’인데요. 대학 잘 가면 결혼도 잘하고, 마누라 얼굴도 바뀌고, 차도 생기고… 영어 잘 하면 직장취직 잘 된다. 하여간 저는 학생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게 공포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세뇌 당했던 공포심이요. ‘저항했다고 수행평가 점수 까이면 어떻해?’ 라는 고민이 들어요. 사실 선생님들도 수행평가를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수행평가 깎이면 내신 성적에 반영된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저는 그게 협박이고 공포가 되고… 밥벌이 못해 선생님들이 시국선언 못하듯이 학생들도 공포심이 있고, 쉽게 행동하지 못하는 거 같아요.
난다 : 발제를 할 때, 미처 말 못한 게 있는데요. 저는 문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체벌은 구조의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청소년은 이 시기에 교육을 받아야 되는 것이고, 내가 나이가 많고 사람들에게 지식을 얻어가야 하는 거라고 전제가 되어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통제방식이 없애질 수 없는 거예요. 체벌의 대안으로 벌점제가 생겼잖아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공정하고 감정적이지 않게 통제할 수 있냐는 거예요.
배이상헌 : 그런 애기라 한다면, 아수나로의 청소년인권운동은 근대적 학교를 무너트리고 일률적인 학생들의 교육과정이나 폭력적인 것들도 무너트리고 새로운 판의 교육제도를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난다 : 그럴 수도 있어요.
공현 : 궁극적인 지향은 그런데요. 체벌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할게요. 사실 체벌이 문화지만, 구조라고 먼저 애기하는 것은 이유는 학부모 발제를 들으면서 느낀 거지만… 체벌을 온건하게 접근하잖아요. 온건하게 접근해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는 굉장히 도전적인 활동이 필요한 거고, 학생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까 애기한 68혁명의 예시처럼요. 저는 교사들의 노동조건도 연결하면 그렇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의 입장에서 저항사례가 있냐는 물으셨죠? 인천여고 사례를 들면 학생들이 체벌을 하는 교사를 징계하라는 학생들이 서명운동을 해서 교사가 징계를 받았거나, 수원의 예단고 같은 경우 그렇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런 행동을 하고 있고, 사실 학생들이 굉장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실제로 작지만 그런 행동들이 일어나야 되고요. 만약 체벌을 하는 교사가 있으면 처벌을 안 받더라도 계속 신고하는 것들이 필요할 수도 있고… 학생들 부담이 크지 않느냐는 게 있는데, 그래서 조직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단체들이 학교별 모임이던 학생회모임을 꾸리고 있는 거고요. 이 자리에 나온 아수나로도 전청련분들도 희망분들도 노력하고 있어요.
강경필 : 교육자라는 걸 포기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거 같아요. 학생들이 체벌을 하는 교사들에 대해 저항학고 반기를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체벌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떤 이야기냐면 자기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교육자의 역할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의지를 불어넣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은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곡된 의미로 체벌이란 수단이 사용되어 왔잖아요. 그래서 체벌을 하자는 게 아니라, 깽판을 치는 순간조차도 우리는 어떤 의지를 거부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 될 거 같아요. 원론적인 학교를 거부할 것인지, 교육주체에 인정하지만 지금 현재 상황을 해체시켜야 될 것인지에 대해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견고하게 가져가야 할 거 같아요.
교육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가 귀 기울려달라는 말은 교육적인 질문들을 늘 학생들에게 제시해줘야 하는데, 그런 질문조차도 포기해야 한다면 앞으로 더 어두운 전망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앞의 학생도 이야기했지만, 서로 존중하는 것이 큰 착각인 거 같아요. 상호존중 한다는 자체가 그게 문화거든요. 그게 서로 상호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푸는 방식이 서툴 거 같아요. 우리가 서로 상호존중을 한다는 것은 형성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해요.
박은혜 :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제 개인적으로는 여기 계시는 분들이 성적과 관련한 체벌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당하다고 공감하신 거 같아요. 저 역시도 성적과 관련해서 체벌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학생들이 부도덕한 경우를 했을 경우에는 체벌을 안 하고, 교사의 입장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지 어떤 생각을 해보셨나요?
배이상헌 : 애들이 후배들 물건을 훔쳤는데 학생부로 왔네요. 저하고 함께 하는 학생부이 학생들에 대한 존경심도 같고 열정도 있는데… 문제는 과연 그러기 때문에 학생들이 ‘우리 선생님에겐 안 맞겠지.’라는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학생들이 처음 긴장을 하는데, 부도덕한 일이 상습화 되었을 경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난다 : 잘못을 한 것에 대해서 ‘왜 이것이 잘못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지 않을까요.
이영선 : 저는 전제조건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왜 일상적으로 학생들이 남의 물건을 훔치게끔 되는가에 대해서 고민해야죠. 초기 접근을 어떻게 해서 악화되지 않게끔 학교와 교사의 역할이어야 하고, 상습된 것에 대해 통감의식이 있어야지 않나 생각해요. 전제조건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이기 때문에 걸맞지 않는가 아니나요? 방금 교사 분들의 폭력적인 질문들이 청소년들을 몰아붙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공현 님께서) 학부모의 인권지수가 애기했는데, 아킬레스이지요. 근데 교육주체들의 충분히 의견을 학생들에게 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인권지수 또한 영 형편없어요. 이 경쟁교육에 관성화 되었더라고요. 이런 잘못을 했으니까 맞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맞을 짓이 아닌데 맞아야 된다고 길들여진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인권지수가 높은 게 그래도 학생들이 높지 않나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학교운영은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있잖아요. 학부모의견이 교장의 거수기 역할 밖에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용기어린 모습이 부조리 된 학부모로 인해서 무산되는 게 아니나 싶어요. 제 마음 속은 학생들을 운영위 주체가 아닌 학생회에 의식적으로 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두 명의 발제자 분들도 들었는데, 저는 약간의 온건적인 입장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윤종 : 네. 이영선 씨가 말씀하신 대안은 온건할 뿐 아니라, 비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해요. 왜냐면 학생들이 결정을 내려서 체벌의 동의를 하게 하면, ‘우리가 결정했으니까 맞을 수 밖에 없어.’라고 인정하게 되잖아요. 결국 교사가 결정한 게 아니라 학생들이 결정했으니까 학생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거예요.
그 다음, 체벌 말고는 어떤 방식이 있을까? 명백하게 반인권적인 주변인을 두들겨 패는 경우라면 지도가 필요하지요. 근데 가능할까요? 학교 교육과정의 문제기이도 하지만 글쎄요. 답이 안 나와요. 한국사회 부도덕한 학생은 감옥에다가 몇 년 넣는 거 밖에 없잖아요. 사실 그 사람이 저지른 것들이 살아온 환경과 사회적 배경과 경험, 총체적인 만들어낸 결과물이 행위로 이어지는 건데요.
저희 어머니께서 학교폭력상담사인데, 어느 청소년은 다른 사람을 때린 것을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성격 다양한 것들 때문인데,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 그 사람을 어떻게 리셋 시킬 수 있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모든 걸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다만,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지,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리셋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걸 최대한 노력을 통해서 바꿔낼 것이냐, 그게 아니라면 다른 생활환경을 제공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줄 것을 생각하고 줄 수밖에 없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경험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론은 학교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범진솔 : 저는 친구들과 체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저를 비롯해서 체벌에 대해 동의를 하거든요. 대학을 가려면 성적이 좋아야 하고, 성적이 좋으려면 누가 방해하면 안 돼요. 대학에 가서 성공하고 싶으니까, 그게 사회에서 바라는 것이고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 교육은 망한 거 같아요. 교육이란 게 공부나 성적이란 것에 집착을 시키니까 이런 발상을 하는 건데요. 친구들도 많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맞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바라는 사람도 있어요. 성적이 안 나오면 자기를 많이 때려주라고 바라는 이도 있어요.
설연석 : 저는 제일고 교사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체벌을 거의하지 않습니다. 거의 하지 않는다는 건 다른 말로 ‘한다’는 것이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들거든요. 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는 것을 떠나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제 아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건데요. 4살, 8개월입니다. 학교에서 일 년에 한 번 때리는데, 제가 애를 하루에 한 대 때립니다. 집에서 애를 키우면서 느끼는 거랑 학교에서 때리는 거랑 다른 거 같아요. 집에서 애를 때를 때 고민은 때리는 행위가 아니에요. 아내랑 고민할 때, 제 아이의 성격에서 오는 교육방법이예요. 역시 때려서는 효과가 없다는 거예요. 효과가 조금 있다면 조건반사, 즉각적인 현상이 있지요. 또 동일한 사안은 반복이 되지요. 또 그러면 때려야 되냐는 고민보다는 우리 아이는 때리는 것보다 설득하고 말을 하면 더 잘 듣는다는 건데요. 간혹 우리 아이가 남에게 피해를 주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너 맞을래?’ 라고 합니다. 우리 아이는 멈추죠. 아이는 공포를 느끼는 거죠.
학교 애기로 넘어가면, 학교에는 그런 교육적 논의가 없죠. 이를테면 제 옆에 동료 교사가 앉아서 어떤 학생이 싸가지가 없다고 애기하는데, 교육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소통이 없죠. 교무회의 시간에 교육과정(학생생활규정)을 교사들이 만든다고 하는데, 규정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학교생활규정이 과거에 만들어진 경우가 그대로 이어져 오는 경우가 많고, 선생들이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하는 게 학교생활규정이죠. 그러니까 흔히 공교육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대학 잘 보내주는 것이 교육이잖아요. 공교육이 좀 더 의미를 가지려면, 체벌에 대한 문제가 매달 매 시간 안건으로 올라올 수 있다면 공교육의 장이 참 의미가 있겠죠. 학생들 또한 수능시험 보는 만큼 이런 주제가 학생들 간의 논의하는 것이 필요해요. 학교는 공교육을 말하고 교육을 말하지만, 교육적 의미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졌죠. 입시, 용의복장규정이 훨씬 더 일상적인 경우가 많지요. 체벌을 없애자는 말은 지극히 문화적인 거 같아요. 제가 저희 아이들에게 대하는 것이 문화인 것처럼, 더 구체적인 고민 없이 우리아이에게 공포심을 느끼는 체벌문화가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환경이 있고, 체벌은 나쁜 것이니까 없애자는 의견은 공허한 거 같아요. 그렇게 쉽게 없어지기 어려울 거 같아요. 교사들의 책임도 크겠지만, 학생들이 그러한 문화에 심취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저 학생을 때려서라도 수업분위기 잡아주라는 요구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체벌문제가 ‘체벌이 정말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류의 역사에 있어 폭력이 사라진 적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폭력이 나쁘니까 폭력을 없애자고 하는 것이 그게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해요. 이 자리에서 대안이 온건하다고 하는데, 과격하게 표현하면 학교의 학생이 체벌교사 신고단을 만들어 체벌하는 교사를 경찰에 고발하는 게 어떨까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도의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지만요. 체벌을 현장에서 없앤다는 것은 진짜 어려운 문제고요. 교사의 노력으로 애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인 삶의 자세가 더 요구되고 절실한 거 같아요. 체벌에 대한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배이상헌 : 교사로서 꼭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왜 이리 이야기하기 힘들죠? 제가 보는 해결책은 학교자치예요. 지금 교사가 과도한 치안유지 보안관 노릇을 하는 거 같아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변화를 시키는 방법이 있어야겠다? 교사보고 치안유지 하라면서 체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진짜 웃깁니다. 교사보고 교육 포기하라는 게 아니라, 교사가 상담가가 되어야 하고… 교사의 역할의 고민인데요. 학생들이 교사의 눈치를 보며 사는 것이 스트레스고, 처음에는 무섭고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교사의 눈치 깽판 치는 것이 냉소적인 것이 자기 해방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혹을 학교가 가진 것 같습니다.
만약 학생들이 교사의 눈치가 아니라, 내 친구들 때문에 지킨다면 어떨까요? 규칙, 공동체 주인으로서의 회복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학생들이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제가 교직사회에서 주장하는 것이 외면당할만한 것일까요? 체벌교사 체포단만 현실적이고 제가 제안하는 것은 비현실적일까요. 학교 안의 학생들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고요. 언론의 자유거나 표현의 자유거나 학생 다수의 눈총에 대한 잘못된 왕따가 아니라, 필요한 왕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의 시민권이 회복되면 좋겠어요. 전 자치활동이란 대안인데, 시민사회단체나 청소년인권운동단체는 체벌을 없애자는 이야기 말고는 대안이 없는 거 같습니다.
임하성 : 폭력은 폭력을 낳지요. 꼭 학교의 탓으로 넘기지 않았으면 해요. 가정 내에서나 학부모가 자녀에게 가하는 폭력들은 이야기 되지 않는 거 같아요. 교사들이 너무 많은 것들을 쥐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정 내에 학부모가 많은 권력들 친권들 경제적으로 부양해야 될 것들 자녀들을 확대하고 통제하는 것처럼. 그런 의식이 가정을 넘어 학교로 이양하게 되는 거 같아요.
배이상헌 : 오늘 이렇게 이야기가 결국 성공한 것 같은데요. 왜냐면 체벌에 대한 당위적 담론만 이야기 했으면 공감이 될텐데, 만만치 않은 무거운 것은 실천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당위적인 접근 이상에 실질적인 고민의 자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오늘 상당히 무질서한 사회자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채워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멀리서 오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두 박수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생존권 위협하는 금호타이어를 향해, 인권단체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가졌어요.
인권단체 답게!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 박고형준 활동가의 퍼포먼스 작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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