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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청소년인권의 감수성으로 까칠하게 바라보기
아즈(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보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습니까? 장담컨대, 그렇게 1000명의 아무나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잘 되고 있다’, ‘성공했다’ 라 말할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져서, 어제 아침, 직접 밖에 나가 거리를 걸어가면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 200명에게 즉석 조사를 했다. 망했다. “문제 있다”는 즉각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좋다, 괜찮다, 잘 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조차 결국엔 단 한 명에게서도 들어보질 못했다.
별보며 학교가고 달 보며 귀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의 아들딸은 아직도 별 보며 등교해서 달 보며 하교한다.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젠 뜨거운 사교육 열풍까지 덤으로 몰아친다. 그 와중 살고자, 이기고자, 옆 짝꿍의 머리를 밟고 더 높게 올라가고자 쏟아 붓는 기백만 원의 학원비로 만들어진 타율적 경쟁과 양극화속에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60년 교육사를 그 누가 성공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답은 만민 공통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제의 해결책은 가지가지다. 평준화를 해체하고 경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빡세게 전국 수준, 세계 수준에서 경쟁시키고 엘리트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사람들, 더 평등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서열화되지 않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랍시고 정부가 내민 카드 중 하나가 ‘교원평가제’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공통의 카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회의 입법에 상관없이 현재 시범 운영되고 있는 교원평가제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 국회에는 교원평가제 법안이 논의 중이다. 교사들을 평가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겠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를 일정정도 해소시킬 단비로 이 교원평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원평가가 교육을 변화시킬 단비가 아닌 산성비라면?
교사에게 점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교육이 얼마만큼 나아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은,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교육이 발전하지 않기에 건전한 경쟁을 하도록 만들겠다며 입시경쟁의 압박을 지속시켜오고,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 또한 경쟁과 자율을 내세우며 대학교,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서열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사들이 노력이 부족해서 교육이 발전하지 않는다며 교사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압박을 하겠다며 교원평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얼마나 잘 맞는가를 평가하는 것과 교사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비교하는 교원평가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오해인가?
교육활동은 교사요인, 학생요인, 가정요인, 교육 환경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 속에 이루어지며 이런 요소들에 따라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업의 수준은 교사의 학교 내에서의 역할, 수업시수 등에 영향을 받게 되며 학교나 교실의 환경, 학생 요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야 ‘평가’란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될 텐데 열 개가 있으면 그 중 한두 개(교사들에 관한 것들)만 들춰본 다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교육문제의 책임이 교사들한테 전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교사들만 쪼면 학교교육이 더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 만들어질까?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크게 나아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원평가제는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에 둔 제도도 아니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이나 교사들의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좋게 평가하는 교사의 덕목이란 대체로 무엇일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점수매기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지금까지의 평가/비교/경쟁위주와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 같고, 교육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를 않는다.
또한 평가로 사람을 관리하는 제도에는 필연적으로 강압이, 협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평가의 목적이 교원의 ‘능력개발’이기 때문에(교원능력개발평가) 평가결과를 모든 교원의 능력개발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연수를 보낸다던지 잘라버린다던지 하는 징벌의 요소가 있어야 시스템 유지가 가능하다.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폭력과 강압, 차별로 갈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뭐 교사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임용고시를 통과했으니 알겠지만) 평가, 경쟁, 서열화, 점수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는 학교가 별로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교원평가의 목표인가?
교원평가의 미래는 대한민국 교육 60년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과 교사들의 노력 부족이나 학부모의 관심 부족이 아닌 평가/비교/경쟁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다. 주어만 다른 평가/비교/경쟁위주의 교육정책인 교원평가가 교육에 변화를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교원평가로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는 교원평가를 통해 학생/학부모의 만족도를 참고하여 연수를 통해 교육능력을 발전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운영과 교육내용/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학생의 학교운영, 교육내용/과정 참여는 지난 몇 년간 청소년단체와 진보적인 교육단체 등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부분이다.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의견들이 중요한 목소리로 인정되고, 논의를 거쳐 반영되는 것은 교육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원평가가 이 부분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학생들은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낼 현실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 시간에 영어 한 단어를 더 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사치이다. 둘째, 학생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의견을 내다보면 쓴 소리도 당연히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학교장에게, 교육감에게 간언을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청소년은 미숙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타 건설적인 의견들조차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셋째, 어떠한 참여구조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교운영은 물론 교육과정 전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시킬 어떤 통로도 권한도 없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이라 하지만 학생회 회의 또한 교사들이 소집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다. 또한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모든 최종결정은 교장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원평가제는 이런 것들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겐 여전히 교육의 과정/내용과 학교운영에 대해 논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거기다가 현 상황에서는 평가조차 입시 위주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또한 교원평가에서도 ‘미성숙한 학생들’이라는 권위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이번 교원평가 6자 합의체에도 정당의 참여는 있지만 정작 교육정책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생, 청소년들의 참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만들어가기보다는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물어 참고자료로만 쓰겠다는 이 제도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제도에 가깝다.
교원평가제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마치 학생들이 교사들을 평가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평소 불만이 있던 교사들을 평가하고 제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들에게 힘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교원평가제로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만족도를 점수화해서 주는 것이 과연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서열화시킬 자료로 활용될 숫자들을 내놓는 ‘소비자’의 역할일 뿐이다. 학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주체이자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제연수의 최종결정권자는 교장이나 교육감 같은 ‘윗사람’들이다. 교육감이 지금 학교의 촌지, 성추행, 체벌 교사 같은 부적격교사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인터넷에 간단하게 검색만 해 봐도 문제교사들을 성토하는 글이 가득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수백 건의 글이 올라왔지만 교육청은 그 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즉 이 평가를 통해 교육감이 부적격교사를 파악하더라도 문제 있는 부적격교사는 교육감의 권력 속에 숨어 보호받고, 교육감이나 교장 등을 귀찮게 하는 부적격교사에 대한 보복성징계의 근거로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원평가는 오히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만으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헛된 명분에 그쳐 실질적인 학교자치를 가로막고, 지금의 교육을 더욱 썩도록 만들뿐이다.
경쟁 아닌 소통을, 학생에게 권력을,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우리는 평가와 경쟁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교육현장에서는 신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할 수 있고 교사가 학생을 신뢰할 수 있어야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대화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런데 학생이 평가당하고, 교사가 평가당하며 생존을 위해서 서로 앞서가려고 아둥바둥거릴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 불신이 만연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제안한다. 점수를 매기지 말고, 서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학생 등 교육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끼리 협력하고 논의하여 건설적으로 상황을 개선해나가자는 것이다.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고 평가 설문지를 돌리고 채점하고 윗선으로 올려 보내고 점수 매기고 하는 것보다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과밀학급 해소, 학교 시설 개선, 교사 수 증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니 뭐니 하며 다른 나라들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교육예산도 낮은 편이다. 학생들은 냉난방 시설이 불안하고, 급식 질이 안 좋고, 탈의실도 동아리실도 학생회실도 없고, 교사당/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고, 운동장도 좁거나 없는 학교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 교재비 등이 부담스러운 학생들도 많다. 교육예산은 잔뜩 깎으면서 교육의 질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에 가깝게 들린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혁은 교원들이, 교육부가, 크게는 현재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그들의 논의와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은 ‘덜’ 살았다는 이유로, 감정에 쉽게 치우친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종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결정할 권한도,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미성숙’의 기준도 자의적일뿐더러, ‘미성숙’을 이유로 참여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이제 두 번째, 아래로부터의 권력. 우리는 자치를 원하며 정당한 권력을 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들이 초기에는 비록 미진할지라도 청소년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학생이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이를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1의 주체는 학생들이 아닐까? 학생인권을 보장하게 만들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학교 운영이나 교육 방식에서의 개선할 점을 제대로 짚을 수 있는 주체, 어떤 교사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달라. 정말로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를 징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학생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자정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교육과정과 학교운영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논의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하라. 권력을 분립하고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지금의 교육 현장은 독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주는 것은 비단 우리의 발언권 획득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고, 사회적 능력의 발달을 꾀할 수 있다. 기존의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이것저것 결정한 다음에 결정한 사안이 현실에 맞지 않아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때 머리를 싸매고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들끼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잘 되는 교육현장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교원평가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업중단 청소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전망
이치열(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매년 7만여 명의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일은 이 청소년들이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청소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우리사회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또 문제의 진단과 해결방안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없이 근원적 처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학업중단현상을 초래하는 근저에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탐색을 시작하고자 한다.
1. 왜 교육이 문제인가
“그래도 아이들 학원비는 대줘야 할 텐데…” 밤새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는 권고 사직당한 어느 아버지의 넋두리이다. 다니던 직장의 구조조정으로 권고 사직해 이제는 실업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아이들 교육문제를 고민하는데 그 첫 번째로 꼽는 것이 ‘학원비’이다. 여기에 우리사회 교육신화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흐름과 함께 근대적 학교제도가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선택받은 귀족이 아니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학교제도가 갖는 진보성이었다. 한편 자본주의 시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숙련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가 필요했다.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 근대 학교제도인 것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취학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가르친다. 거기에는 개성보다는 획일성이, 비판보다는 순종이, 창의성보다는 무기력이 필연임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러한 학교제도를 통해 양산된 인간은 나만의 행복,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등의 가치를 향해 체제 순응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경쟁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가끔 어려운 집안 출신 가운데는 드물게도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한 모델은 마치 학교제도가 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학교가 사실상 이 사회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틀로서 기능해 왔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학교제도가 갖는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은 어떤가? 2006년 판 OECD의 통계연보에는 우리나라가 OECD국가 30개국 중 GDP대비 공교육비 지출은 23위, 사교육비 지출은 1위로 나타나 있다. 왜 이토록 기형적인 교육비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국사회가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임을 반증한다. 학벌사회로 불리는 우리사회는 교육이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길러낸다는 본연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물론이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임무를 포기한지도 오래된 일이다.
일단 수능시험이 끝나면 바로 점수대별 전국대학의 순위표가 작성되어 나오고, 이에 따라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자본과 권력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에 모든 이들은 이 ‘10대 결정론(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로 인생이 결정된다)’의 신화 앞에서 광신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자본력과 문화자본력이 청소년의 미래 삶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회가 되었다. 아직도 대도시 중·고등학교에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전달한단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에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아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7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고학생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력과 아이의 성적간의 불균등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는 오직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서만 작동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잘못된 이 교육신화와 내 아이만큼은 지긋지긋한 배제와 차별로부터 벗어나 경쟁의 승리자로 키우고픈 욕망에 가난한 노동자들도 너나할 것 없이 승산 없는‘로또 당첨’의 환상으로 그 ‘학원비’를 대주기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과 문제점
(1) 원인파악을 위한 통계자료 부족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책은 그 사유에 따라 다양하게 강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학업중단 청소년들에 대한 실태조사는 터무니없이 열악한 수준이다. [표1]에서 보다시피 현재 중단사유를 제시하는 유일한 통계시스템인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시스템에서는 대책을 세우기에 적당한 구체적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 학업중단 청소년들([표2]참조)에 대한 대책은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표1]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 (단위 : 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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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초 |
중 |
고 |
합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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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
전문계 |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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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
18,403
(0.46) |
15,669
(0.78) |
10,166
(0.81) |
12,910
(2.57) |
23,076
(1.31) |
57,148
(0.73) |
|
‘07.2 |
23,898
(0.61) |
18,968
(0.91) |
12,616
(0.98) |
15,314
(3.10) |
27,930
(1.57) |
70,796
(0.90) |
|
‘08.2 |
20,450
(0.55) |
20,101
(0.98) |
15,477
(1.15) |
17,466
(3.58) |
32,943
(1.73) |
73,494
(0.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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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 |
18,132
(0.52) |
19,681
(0.98) |
16,174
(1.14) |
18,099
(3.76) |
34,273
(1.74) |
72,086
(0.96) |
[표2] 학업중단 이후 동선이 파악되는 청소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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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중단
이후 상황 |
관련기관 |
현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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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 |
- 각 대안학교별 관리
(서울의 경우, 서울시대안교육센터 종합 관리)
- 교육과학기술부 |
중등전원형: 약2,500명
중등도시형: 약 650명
초 등: 약1,3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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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수급자 |
- 주민자치센터, 각 구청
- 보건복지가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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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모지원시설 |
- 시설별 관리
- 보건복지가족부 |
약200명 추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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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중단
이후 상황 |
관련기관 |
현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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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쉼터 등록 |
- 시설별 관리
-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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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홈 등록 |
- 시설별 관리
- 각 구청,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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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관찰소 등록 |
- 관찰소별 관리
- 법무부 |
- 서울지역 5개 보호관찰소
- 무직청소년으로 등록자 (약1,0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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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원 입소 |
- 원별 관리
- 법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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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상황 |
※ 기숙형 학원 등록 / 홈스쿨링 / 아르바이트 / 히끼꼬모리 / 아무일 하지 않는다 등등 |
이는 결국 구체적인 사유에 근거한 대책수립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정책적 실패를 낳고 있다.
(2) 학업중단의 주요 요인
첫째는 제도권 교육의 문제이다. ‘교육=경쟁’의 논리로 교육 본연의 임무는 간 곳 없고 오직 상위 10%의 아이들의 성공신화를 위해 다수의 아이들이 들러리를 해야 하는 현행 제도권 교육의 문제가 1차적인 원인이다. 여기에서는 다수의 아이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개개인의 개성과 인권이 존중되는 것은 고사하고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빈곤층 및 가족해체로 인한 문제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 극심한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빈곤에 기인한 가족해체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소년들을 돌봐야하는 사회적 안전망은 부족하다. 요즘 청년 노숙인이 증가하고 있다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학업중단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라고 한다. 결국 학업중단은 OECD 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빈곤의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청소년들의 개인적, 심리 정서적 어려움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보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과도한 문화적 자극과 소외의식,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혼동 등은 원만한 관계형성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3) 학업중단 이후의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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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형 |
경 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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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요인(1) |
학업부진→학교일탈(게임, 학업흥미 상실, 비행 및 무단결석)→ 장기(반복)결석→ 칩거→ 재수(시험준비)→ 장기실업(비정규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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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요인(2) |
왕따(집단 괴롭힘)→ 전학반복→ 자퇴→ 검정고시(대안학교)→ 부적응→ 칩거→ 게임중독(은둔형 외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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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요인(1) |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학교 중도탈락→ 비행(불법취업)→ 사회적 낙인→ 취업(사회적 기회)상실→ 빈곤화→ 학대방임가정의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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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요인(2) |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기관입소→ 가족복귀→ 기관전전→ 자립기반 실패→ 기관에서 퇴출→ 생존적 취업(동거)→ 성인기관 입소(경계적 적응)→ 사회부적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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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요인(1) |
외향적장애→ 반복적인 징계→ 정학(퇴학)→ 징계프로그램 실패→ 알바(인터넷게임, 폭주)→ 성인범죄(실업, 노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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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요인(2) |
내성적장애→ 불안(공포, 우울)→ 무기력→ 무존재감→ 학교흥미상실→ 칩거(게임) |
(4) 학업중단 대책의 반복적 실패 요인
우선 학교가 아이의 정서적 문제와 행동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학업중단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대응방식이 지나치게 개인상담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또 아이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실생활 반경을 충분하게 알고 못한 채 대책을 강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빈곤의 어려움, 학교문화에 대한 반감, 가족을 잃은 정서적 어려움 등의 요인을 바탕으로 정확한 대응을 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상담을 중심으로, 학업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무료해 하는 이론적 진로교육 등을 반복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적 평가가 필요하다.
3.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안적 제언
(1) 경쟁과 서열중심의 교육을 바꿔야 한다
우리사회의 교육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늪이 되어가고 있다. 경쟁만을 앞세우는 입시지옥 속에서 아이들은 성적의 노예가 된다. 시험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기하고 점수가 인격을 대신하는 야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1등을 하는 아이 외에 모든 아이들은 반복되는 패배와 열등감을 내면화하며 자라고 있다. 이것이 학업중단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이 지속되는 한 학업중단 현상을 지속될 수밖에 없다.
등수는 인격이 아니다. 서열 중심주의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파렴치한 교육관이다. 점수와 등수로 환원되는 ‘경쟁’을 ‘교육’이라 믿는 허상을 깨뜨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학교를 등지는 아이들의 숫자는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 확신한다.
(2) 학교로 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흔히 학교로 다시 복귀하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말한다. 학교라는 제도에 아이들이 모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학교에 잘 맞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해결방식도 더 넓게 열리게 된다.
아이들은 학업중단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과 진로불안, 사회적 고립감, 진학이나 취업 등의 고민을 갖는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해 학교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들이 학습하고 자립하여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3) 학습자의 권리, 청소년의 인권에 주목하자
비록 학교에서 나왔지만 엄연히 이들에게도 천부인권으로서의 교육받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교에 다니지 않기에 받게 되는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이들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학습과 성장이 가능하도록 따뜻한 사회적 배려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학교를 떠나더라도 가정에서 교육의 기회를 펼칠 수 있도록 가정학교(Home schooling)를 활성화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또한 청소년도 엄연한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어야 하겠다.
(4)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
학교는 이제 아이들의 문제를 학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지역 청소년들을 지역사회가 돌봐야한다는 공동체의식으로 학교-가정-지역사회간의 지역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연계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자발적으로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작은 것부터 모범적인 사례를 만드는 것이 우선 중요하며, 정부와 지자체는 이러한 자발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5) 아이들의 실체에 접근하는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선 학업중단 청소년들의 정확한 현황파악을 위한 실태조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이 학교 밖에서 대체 무엇을 하면서 지내는지, 어려운 점은 무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닌 아이들의 감성과 눈높이로 기꺼이 멘토가 되어 줄 다양한 전문가들이 주변에 필요하다. 또한 많은 예산을 들여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산을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존 청소년수련관, 위탁 또는 비인가 대안학교, 청소년 자활기관, 야학, 공부방, 쉼터 등 다양한 공간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학업중단 청소년들이 안정적인 성장과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소통, 상담, 교육, 관계 맺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적절할 것이다.
(6) 새터민,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도 관심 쏟아야
새터민과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업중단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민간차원에서 대안학교(한겨레학교, 셋넷학교, 자유터학교, 여명학교, 아세아공동체학교 등)를 설립하거나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간디교육연구소)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지역에서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임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폐쇄성과 차별의식이 이들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아이들 또한 제도교육 체계에 부적응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새로운 소수자인 이들에게도 각별한 배려가 요구되어진다.
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과 근대 공교육의 이념
지훈(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회원)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사회적 문맥에서 보자면 교육은 소수 특권계급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열린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그리하여 공교육은 모두에게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것의 혜택이 없었더라면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이 근대 공교육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였던바, 그리하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복지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육의 기회가 소수의 특권이었던 봉건적 계급 사회에서는 보편적 공교육이 뿌리내릴 수 없었던바, 공교육이란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때에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보편화된 곳에서 어떤 집단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이를테면 장애인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교육제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육의 가치가 사회적 합의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같은 공교육의 이념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상태는 없었지만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프랑스 교육은 1791년의 헌법에 의해 초등교육은 법적으로 무상이고, 의무라고 선언됨으로써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민주화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무상국민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근대적 공교육제도의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 콩도르세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학교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계몽의 압제가 힘의 압제에 합류해 있었다”고 지적하며 지식의 독점과 교육의 불평등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함을 밝히며 이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부유한 집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모든 원조를 재능에 제공하는 공교육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의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교육에 따른 불평등의 계급적 재생산은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개혁도 주장한다. 교육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 아래에 있거나 학교가 선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교직의 자율성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다. 그는 “교육은 공통적으로 주어져야 하며, 여성도 교육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며 공교육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가정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식의 봉건적 사고도 엿보이는 등의 한계가 보이지만, 당시로서 동등한 교육을 주장했던 것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교육의 일반 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을 혁명의회에 제출함으로써 민주적 교육체제의 선언인 헌법에 기초하여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교육이 더 이상 부와 결부되지 않을 때 교육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평등에 대한 위험이 적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육에 의한 권력화도 경계하였다. 이는 교육이 계급재생산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한국사회에 더욱 의미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시기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교육 개혁론들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은 미미했다. 나폴레옹에 의해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계가 일정 정도 수립되었으며, 1882년 ‘훼리법’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학교교육의 비종교화나 무상의무교육제도의 원칙이 확립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우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보편화함으로써 공교육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장한 점, 무상교육의 제공을 통해 경제적 환경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려한 점, 그리고 교육에 따른 권력화를 경계한 것 등은 매우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공부와 해방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현식(연구공간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11월, 어김없이 수능의 여파가 전국을 흔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 정책이 바뀌어도 벌어지는 현상은 언제나 똑같다. 문제는 이 뜨거운 열기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공부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유쾌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적절한 보상이라도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다. 바야흐로 공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때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프랑스의 지식인인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 있다. 그의 책, 무지한 스승은 제목부터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무지한 스승이 어떻게 제자들을 앎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의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을 보면 그가 말하는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아닌 ‘지적 해방’이다. 일단 우리의 질문을 접어놓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질문 하나. 유식한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
랑시에르가 이 책, 무지한 스승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요체는 이렇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32쪽)” 무척이나 도발적인 질문이다. 어떤 스승을 필요로 하는가. 해방하는 스승,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해방을 위한 스승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식한 스승이어야 할까, 무지한 스승이어야 할까. 놀랍게도 그는 무지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스승이야말로 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유식한 스승은 학생을 끊임없이 바보로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유식한 스승은 끊임없이 학생의 무능함을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어야만 학생이 무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우월한 지능(유식한 스승)이 열등한 지능(무지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바보로 제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월과 열등의 구분을 하는 순간 이 둘은 모두 바보가 된다.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왜냐하면 두 지능의 평등을 입증할 수 있는 비슷한 자에게 말을 거는 자만이 자신의 지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월한 정신은 (자신의 말을) 열등한 자들에게 억지로 들리지 않게 한다. 우월한 정신은 그를 인정해줄 수 있는 자들을 얕잡아봄으로써만 자신의 지능을 확보할 뿐이다.(83-84쪽)”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겠는가. 고상한 지식인의 언어는 그렇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든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란 지능의 퇴화가 아니다. 따라서 그 반대는 ‘천재 만들기’가 아니다. 오히려 바보란 해방되지 못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보 만들기의 반대말은 해방이다. 자기가 가진 고유한 지능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열등한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다른 말로 옮기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국 프랑스에서 망명한 자코토는 루벵에서 강사직을 얻는다. 그가 맡은 수업은 프랑스 문학.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몰랐다는 데 있었다. 유일한 소통 수단이란 통역뿐이었다. 그러나 자코토는 학생들과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맺는다. 바로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주문한 것은 매우 간단했다. 네덜란드 번역문을 가지고 프랑스 텍스트를 익히라는 것. 특별한 교수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외울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그리고 텍스트를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기.
이 실험의 결과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무지한 스승인 자코토가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가르친 그 방법에 랑시에르는 주목한다. 그 공부의 결과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열등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아니면 해방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이야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된 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코토는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것도 히브리어를! 그 뒤 그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무지한 스승, 자코토를 통해 경험한 배움이 그를 구원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 해방된 자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부가 꼭 쓸모 있는 지식을 익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인쇄공 아들에게 히브리어가 결과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질문 둘. 굴레를 씌우는 공부이냐 해방을 이루는 공부이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논어 첫 장을 펴면 나오는 말이다. 논어가 언제, 누구의 손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구절로 논어 시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배움의 문제가 중요하다. 공자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때도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스스로를 호학好學,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한다. 주희는 이 배움(學)을 ‘본받는다(效)’는 뜻으로 해석한다.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를 본받는 것이 바로 배움이라는 것이다. 주희의 해석을 따른다면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學)란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바보 만들기’에 불과할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었다면 주희에게는 먼저 깨달은 자와 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다.
이 바보 만들기는 끊임없이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열등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우월한 자와의 커다란 간극. 공자 시대에도 이미 공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공자의 수제자로 꼽히는 안연이었다. 안연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굳세다. 앞에 계신 듯 보이다가도 홀연히 뒤에 계신다. ... 선생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좇아갈 방도가 없구나!” 안연의 이 말은 도저히 공자를 좇아갈 수 없다는 탄식이다. 공자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안연조차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공자 시대에 일부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성인聖人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스승으로서의 공자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사실 유가전통에서 말하는 스승은 대체로 이렇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이 사제간의 관계에서 열등한 자는 언제나 열등한 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는 제자일 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비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랑시에르가 목표하는 해방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떨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해방된 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속박당한 자인가.
공자는 자신의 삶을 지우학志于學으로 시작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로 정리한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어긋남이 없었다는 말. 이것이 바로 해방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더구나 유가전통에서는 배움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보면 이렇다. 위기지학이란 자기 공부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자기는 물론 사물들을 이루어주는(成物) 데까지 이르는 공부를 말한다. 반대로 위인지학은 남의 평가에 좌지우지하는 공부를 하다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喪己) 데까지 이르는 공부다. 자기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공부, 이것을 랑시에르의 말로 바꾸면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유가전통에서 이런 두 가지 상반된 표상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속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는 그 스승을 통해 자기 해방을 경험한다. 유가 지식인이라면 랑시에르의 말, 무지한 스승이 되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무지한 스승보다는 위대한 스승을!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선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철학적 지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랑시에르가 지식과 지능의 문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를 제시한 반면 유가전통에서는 지식과 지능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랑시에르가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어 모든 존재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지능을 가졌음을, 따라서 지능이 우월한 자도, 열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 해방’이라는 부제는 이처럼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가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곧바로 배움의 문제로 도약할 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경계하듯 지능의 분할, 즉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굴레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전통이 그의 비판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바로 이 때문이다. 스승은 권위를 갖되 해방케 하는 존재다. 따라서 선각자先覺者와 후각자後覺者로 구분한 주희의 구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이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분할로 빠질 수 있지만 또한 그로부터 탈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지적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각자 또한 언젠가는 깨달은 자(覺者)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비판한 우월한 자-유식한 스승을 다시 살펴보자. 그가 말하는 스승은 능력의 우월함을 자임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설명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유식한 스승이란 바로 설명하는 자다. 그래서 ‘보편적 가르침’에 해방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우는 학습 방식. 여기서 해방의 고리가 있다. 무지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을 대신해서 ‘의지’가 필요하다. “이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29쪽)”
유가 지식인들은 유식한 스승이었을까? 적어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유식한 스승의 방법과 닮아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승은 의지를 일깨운다. 무지한 스승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선뜻 대답을 찾기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그 ‘공부’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속박하는 공부가 아닌 해방하는 공부. 그래서 유가 지식인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촉발하는 스승.
질문 셋. 전체의 전체냐 부분의 부분이냐
해방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방의 지식을 얻고 나서는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또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항상 새로운 해방을 찾아야 할까?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힌 네덜란드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익힌 인쇄공의 아들에게 또 다른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이 익힌 프랑스어와 히브리어는 세상의 지식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결국 그 해방이라는 것도 일부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자코토는 말한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그가 학생들과 읽은 텍스트 텔레마코스의 모험, 그 자체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전체가 있다. 그것은 칼립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이 인류 모든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를 가지고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들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우리가 새로 배우게 될 모든 것을 그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어떤 중심. 이 새로운 것들 각각 이해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 것, 그것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수단을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어떤 고리. 보편적 가르침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48쪽)”
전체와 전체가 만나야 한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전체를 볼 것, 끊임없이 전체와 연관시킬 것. 이것을 유가전통의 말로 옮기면 구도求道, 혹은 궁리窮理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이름이 ‘궁리’이다! 책 뒷날개에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위학지요爲學之要 막선어궁리莫先於窮理 궁리지요窮理之要 필재어독서必在於讀書 배움의 요체는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에 있다.” 의상이 지었다는 「법성게法性偈」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세계 전체가 담겨있다. 따라서 진정한 깨달음, 지적 해방이란 배움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나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 텍스트 안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앎을 이룰 수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부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결코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루벵의 프랑스어반 학생들의 지적 모험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지적 모험은 곧 전체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해방이 낯선 빈자들에게 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랑시에르는 설명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거나 여러 해 동안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는 이상 교육받을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빈자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한다고. 그러나 이 것 역시 빈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전체를 위한 것이다. 교육-바보 만들기는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른바 지식인의 자기 해방은 이 지식 해방에 동참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해방은 전체적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누리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해방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누구와 함께 해방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구원해줄 사람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교육생각을 창간하며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암울하지만 다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입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광주에서도 수능시험을 보고 난 재수생이 점수가 낮게 나왔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공부하기가 버겁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기 집 가스배관에 목을 매달은 일도 있었고요. 이런 일은 매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데, 언론에 종종 나오는 이러한 일들은 수많은 학생 자살 가운데 몇 개만 뽑고 있고, 사람들은 그나마 언론에 나온 학생들의 자살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언제까지 학생들의 죽음행렬을 두고 보기만 해야 할까요? 도대체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특정대학 출신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 있는 높은 자리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몇 개 대학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대는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때부터 정치권력의 특별지원과 비호 속에서 한국사회 지배엘리트 양성소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오래 전부터 공직, 언론, 국영연구소, 정치계, 법조계 등 거의 모든 분야 핵심 요직의 십중팔구를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권력 상층부를 독식한 이들은 자기들끼리 남 배척하는 패거리를 만들고 유형무형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권력집단 바깥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사회 운영과정에서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권력, 꼭 필요하나요? 전 권력 없는 사람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근데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흔히 진보적인 사람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높은 공직에 올라가야 한다면, 대학원을 다닌다거나 자신의 직급을 높이기 위해 내조하거나 정치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 이들 역시 불평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생들도 이른바 일류대에 들어가 우리사회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거고요. 이처럼 교육이 계급 획득의 싸움터가 된 까닭에 이 땅의 교육은 지금까지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한국 교육의 목적은 암기위주의 문제풀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일류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고유한 적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게다가 공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이른바 일류대에 간 학생들도 단순한 문제풀이 연습만 했지, 대학에서 고등 학문을 할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지금의 학교교육이 경쟁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다른 직업을 둔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학교 안에서는 시험성적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평가되고 남들과 비교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강요되는 비교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러한 경쟁 속에서 인간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대의 논리'보다 '경쟁의 논리' 교육받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오면 또다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어릴 때부터 경쟁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바꾸려고 하는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처럼 특정대학의 권력독점에서 비롯된 학벌은 온 사회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학벌문제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학벌을 조장하는 갖가지 보도를 일삼아 있지요. 이것은 대부분의 언론도 특정대학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성 언론에서 학벌을 정당화하는 ‘지배 논리’를 퍼트릴 때, 양심 있는 학자라면 ‘대항 논리’를 만들어 그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계는 다른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그 일을 해왔을지 몰라도, 제가 알기론 김상봉, 정진상 교수 말고는 학벌문제와 관련해서는 학문적인 대항논리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열한 고민 없이 서구 학문의 개념을 끌어와 한국 현실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우리학계의 한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의 학계도 특정대학 출신이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었는지 학벌문제는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한 번도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의 계급을 이야기 할 때 학벌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육운동 진영에서조차 이 땅의 교육모순을 이야기 할 때, 정작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인 ‘학벌 없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합니다.
더욱이 학벌체제의 재생산 공간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자신들의 문제인 학벌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게 되는 기득권에 대해 별 고민이 없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일류대가 아닌 대다수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현실을 인정해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고민하고 깨어있어야 할 대학사회도 이런 것을 보면, 우리사회가 차별이 당연시되는 '계급 사회'로 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합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신분제도 자체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육생각>은 한국사회의 경쟁교육을 비판하고, 지배계급이 퍼트리는 학벌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일조로 창간했습니다.
책을 펴내기 위한 자본, 편집 작업,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한 고뇌들… 책을 내기란 참 힘듭니다. 이번 창간호에서는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공교육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공부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밖에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교원평가제’, ‘학생인권조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에서 진행되었던 ‘청소년인권포럼’, 대학평준화를 꿈꾸는 작은 실천들, 서평 등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적어보았습니다.
필진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하는 <교육생각>이 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고와 참여, 토론을 부탁드립니다.

그들이 졸업식에서 두부 퍼포먼스를 한 이유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받으며 지금도 인터넷 여기저기에 다양한 버전으로 떠돌고 있는 문구입니다. 입시경쟁을 중심으로 두발복장규제, 체벌, 강제야자… 그리고 수많은 비인간적인 대우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학교를 감옥’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학생들의 인권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수나로 등 청소년·교육단체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이 너무나 쉽게 무시당하고 침해당하고 있는 학교의 현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졸업식 시기에 ‘두부 퍼포먼스’를 진행합니다. 감옥에서 출소하면 두부를 먹는 사회적 관습처럼, 현재 한국의 학교가 감옥과 비슷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억압적 공간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봄이 오는 신호인가. 요즘 소리 없이 비만 내리네요.
2월 10일에도 비가 왔지요?
이 날, 수요캠페인10회를 맞이하고 KBS ‘학벌조장’드라마 <공부의 신>에 대한 항의차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어요.
굳은 날씨에도 우리 회원, 연대단체들이 참여해주었고, 기자들도 취재에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했답니다.
다만, KBS사측이 우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만 빼고요. ^^

학벌주의 조장하는 KBS드라마 <공부의 신>,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책임을 다하라!
한국의 교육현실은 심각하다. 공교육은 점점 더 황폐해 지고 있다. 학생들은 입시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공부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 교사는 교사대로 답답한 교육 현실을 토로하고, 학부모들은 날로 치솟는 사교육비에 휘청거리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사교육 시장은 날로 번성해, 이제는 열풍을 넘어 광풍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 진학이 인생의 전환점에 달려 있는 ‘학벌’ 사회, 치솟는 사교육비로 가정 경제가 휘청거리는 사회가 바로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사교육을 줄이겠다던 MB정권 집권 이후 교육현실은 더 참담해지고 있다. 국제중, 자사고와 특목고 확대, 일제고사 실시 등으로 교육현장은 ‘경쟁과 줄 세우기’가 더 심각해졌고, 사교육비는 더 증가했다.
이 현실을 신랄하게 보여주려는 것인지 KBS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공부의 신>은 입시경쟁, 교육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획의도를 담아 출발하여 요즘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공영방송의 이 드라마가 한국의 심각한 교육문제를 지적하므로,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내심 관심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공부의 신>의 시나리오는 우리의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리며, 2010년 경쟁교육의 서막을 올리고 말았다.
<공부의 신>은 일류대 가야 성공하는 세상, 일류대 못 가면 낙오자가 되는 세상을 들먹이며 다수의 학생을 존재로부터 소외시킨다. 오로지, 소수 일류대를 향한 특별반이 주인 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요즘 풍자하는 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다.
이처럼 <공부의 신>은 근본적인 교육 전반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담겨있지 않다. 지금 한국 사회 현실에서 일류대학 진학이 학생과 학부모, 교사들의 당면 과제이고 성공의 지름길인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성공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전국 1% 학생만이 진학할 수 있는 일류대의 문이 모든 학생들에게 열려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99%의 학생은 들어갈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국민들로 하여금 1%에 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극하여 교육의 신화와 성공을 부추기는 것이 과연 지금의 교육현실에 맞는 일인가 질문해 본다. 차라리 꼴찌 1% 학생의 성공 신화가 일류대 진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훈훈한 드라마가 입시경쟁에 찌 들린 우리 국민들에게 훨씬 더 희망적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공부의 신>을 우려하는 것은 단지 학벌사회 조장 때문만은 아니다. 드라마 상에 나오는 <특별반>이 대학진학에 경쟁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교육 현장마저 ‘문제풀이 전문가 양성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이고, 행복한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또한, <공부의 신>은 학원재벌, 교복업체 등 으로부터 11억200만원의 제작비 협찬을 받은 상태이며, 자막을 통해 협찬을 고시하기로 계약되어 있다. 문제는 계약 외 내용, 영상, 대사를 통해 협찬한 학원을 간접 홍보하는 장면이 많고, 해당 학원측도 이벤트 등을 통해 공부의 신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도적이거나 이면계약이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사교육을 조장하게 된 셈이다.
반면, <공부의 신>은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 또한 부족하다. 이 드라마 흐름은 ‘교사가 잘 가르치고, 학생이 잘 하면 일류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대안을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부모의 재산과 문화자본이다. 대체로 부모 재산이 성적순이 되며 이것이 일류대 진학으로 이어지는 게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실을 은폐하고 모든 것을 학생 탓으로 바꾸므로 허황된 꿈을 가져다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공영방송 KBS의 <공부의 신>을 시청하며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육의 공적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던 공영방송에서 어떻게 이런 MB식 교육에 가까운 함량미달의 드라마를 방송했는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KBS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교육개혁을 위해 앞장서 주길 요청한다. 교육은 우리 모두의 미래와 직결된 중요한 문제다. 하루라도 속히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육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부터 시작해, 그 목표에 따라 학교 현장은 어떻게 바뀌고, 교육자와 학부모, 학생들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등을 깊이 있게 다뤄주길 바란다.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분발해 줄 것을 촉구한다. 끝.
2010년 2월 10일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
경과보고
1월 4일 <공부의 신> 첫 방영
공부의 신 (1회) 길풀잎(고아성)의 가방에 '대성'이라는 말을 뺀 엔스쿨 로고가 부착 됨.
공부의 신 (2회) 황백현(유승호)가 공부하는 학원 뒷배경에 엔스쿨 로고가 잡힘.
그 이후 대성N스쿨은 홈페이지에서 '대성N스쿨 어디어디 숨었나? 도전! 대성N스쿨을 찾아라'는 이벤트를 통해 <공부의 신>에 대성N스쿨 로고가 어디있는지 찾아보내면 경품을 제공한다고 공시함. 또한 대성N스쿨은 <공부의 신> 천하대 특별반이 풀던 문제가 바로 대성N스쿨이 전수한 공부 비법이라고도 밝힘.
공부의 신 (4회) 방송에서 초빙 수학선생 차기봉(변희봉)은 열흘간의 합숙 이후 홍찬두(이현우) 학생의 수학평가시험 문제지를 보고 "김대성 선생이 출제했구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옴. 통상 고3 대상 수능 모의고사 출제기관 가운데 대성학력평가연구소도 포함돼 있고, 이 기관은 대성N스쿨과 관계사임.
1월 28일 KBS드라마 <공부의 신> 비판,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8회 수요캠페인 전개
2월 3일 9회 수요캠페인 전개
공정방송위원회 개최 <공부의 신>논의
2월 3일 공정방송위원회의 내용 축약
1. 노조 - “공교육 비하와 붕괴 논란과 사교육을 홍보하는 문제점 등이 우려된다. 지금까지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공교육 교사는 나태하고 게으르며 학원선생님들은 능력 있다는 대립되는 구도로 나오고 학원광고가 낯 뜨거울 정도로 나오고 있어 드라마의 결론을 떠나 진행과정이 문제투성이다.”
사측 - "지금 한국 현실은 학생들도 열패감, 교사들도 열패감을 가지고 있어 이들에게 대오각성을 촉구하는 주제이고 교사들에게도 열심히 하면 끌고 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는 충분히 가치 있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2. 노조 - "수학이 암기식, 주입식 교육인가. 공교육 현장이 드라마와 동일한가? 교감선생님은 교장 되기만을 바라고 있고 국어선생은 타성에 젖어 있으며 영어선생은 학원선생에 밀려서 부담임을 맡을 수밖에 없고, 가르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등 공교육에 대한 계속적인 비하가 나오는데 일본 원작과 다른 게 무엇인가"
사측 - “드라마속 공간을 실제로 착각하면 안 된다”
노조 - "드라마를 다큐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교육 문제이고 학부모와 학생이 같이 보는 드라마여서 이를 보고 '우리 아이도 공부하면 서울대 갈 수 있겠구나, 일단 대성학원 보내야 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 아니냐"
3. 노조 - 드라마 내용과 영상, 대사를 통해 협찬한 학원을 간접 홍보하는 장면이 많고 해당 학원측도 이벤트 등을 통해 공부의 신을 최대한 이용했던 점이 제시
사측 - "자체 심의에서 걸러지고 방통위의 심의에서도 지적되는 만큼 철저하게 조심해서 드라마를 제작하겠다."
4. 노조 - "방송광고심의 조항에 학원은 '별도 심의'로 규정돼 있고, '근거 없이 학습효과를 과장하는 표현'은 못하도록 돼있다. <공부의 신>에서 과다하다 싶을 정도로 사설 학원재벌을 홍보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다"
<공부의 신> 대성N스쿨 간접광고 행태
1. KBS노동조합에 따르면 대성N스쿨 2억 원, 아이비클럽 1억9000만 원, 깜빡이영어 1억3000만 원 등 6개 업체로부터 모두 11억200만 원의 협찬을 받는 것으로 전해짐.
2. 대성N스쿨의 경우 협찬조건은 프로그램 말미에 자막을 고지하는 것으로 KBS 2TV 본방송 자막고지 16회, 재방송 16회, 케이블TV(KBS드라마) 16회로 편성됨. 드라마 제작은 중앙일보 자회사 일간스포츠가 100% 출자한 '드라마 하우스'가 맡고 있음.
3. 그러나 <공부의 신>은 방송 중간 중간에 대성N스쿨의 간접광고가 노출돼 계약조건 이외의 내용이 방송되고 있음. 4회 방송에서 초빙 수학선생 차기봉(변희봉)은 열흘간의 합숙 이후 홍찬두(이현우) 학생의 수학평가시험 문제지를 보고 "김대성 선생이 출제했구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옴. 통상 고3 대상 수능 모의고사 출제기관 가운데 대성학력평가연구소도 포함돼 있음. 이 인물, 기관은 대성N스쿨과 관계가 임.
4. 1회 방송에서 길풀잎(고아성)의 가방에 '대성'이라는 말을 뺀 엔스쿨 로고가 있고, 2회엔 황백현(유승호)가 공부하는 학원 뒷 배경에 엔스쿨 로고가 잡힘. 대성N스쿨은 홈페이지에서 '대성N스쿨 어디어디 숨었나? 도전! 대성N스쿨을 찾아라'는 이벤트를 통해 <공부의 신>에 대성N스쿨 로고가 어디 있는지 찾아 보내면 경품을 제공한다고 공시함. 또한 대성N스쿨은 <공부의 신> 천하대 특별반이 풀던 문제가 바로 대성N스쿨이 전수한 공부 비법이라고도 밝힘.
5. 실제로 대성N스쿨측은 협찬비 뿐 아니라 드라마에 콘텐츠 지원도 맡고 있다고 함. 드라마 4회에 차기봉 선생이 "차기봉이 자랑하는 수학 스피드마스터의 비책"이라고 말하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 차기봉 선생이 칠판에 판서할 때 대역은 대선N스쿨 직영학원인 대성마이맥 원장들이 맡게 됨.
안녕하세요.
<월간지 우리교육>이 개념없는 회사 경영진에 의해 <지면축소, 권고사직 등>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우리교육에 편집기자로 김고종호 회원이 근무하고 있기도 합니다.
<월간지 우리교육>은 전교조 결성시기 해직교사들이 평등한 교육실현을 위해 없는 형편에 주머니 돈을 긁어 모아 만들어 시작한 교육 정론지입니다.
단체사정이 여유 치 않아 사무실 구독할 형편이 안되지만…ㅠㅠ…
우리교육이 정상화 될 수 있도록 서명 부탁드리며, 작성한 서명지(첨부파일서명용지.hwp )는 사무실로 보내주심 감사할께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주최한 청소년모의인권이사회 프로그램 '생생 토크쇼'에 참여했습니다.
인권위 진정사례 발표(특정대학교 합격 게시물은 인권침해다) 사례발표로 박고형준 님이 초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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