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예수전」

-행동과 가난을 요구하는 인간 예수의 초상

정다영(대학원생)

나는 교회에 다니는 젊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일종의 선입견 탓인데, 내가 만나보았던 교회 또는 선교회의 청년들은 사회변혁에 관심을 가지지도 가난한 삶을 지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이들은 선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지녔고, 이 세계의 가난과 부조리함에 대해서 신께 기도했지만, 대학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을 곱게 보는 이들도 진보정당에 관심을 가진 이들도 없었다.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이들은 있어도 자신이 가난하게 살겠다고 하는 이들은 없었다. 아니, 나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이들이 나와는 다른 예수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웬 예수? 전도하려고? 그건 물론 아니다. 느닷없이 종교인들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올해에 출간된 책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고 싶은 책이 있어 소개하려는 것 뿐. 그것은 김규항의 「예수전」이라는 책이다. 김규항에 관해 아는 사람들은 이 책이 일반적인 종교서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사회의 진보와 사람들의 변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자신의 삶과 사유를 지탱하고 추동해가는 한 축으로 교회의 예수가 아닌 성서에 나타난 예수를 공부한다. 저자는 예수를 신의 아들보다는 역사적인 인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고 축복을 내려주는 이가 아니라,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한 인간의 표본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마르코 복음서」를 강독하는 형식을 취해 인간 예수의 삶과 정신을 따라가며 그 함의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에서 사회변혁과 가난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은 까닭은, 이 책에서 김규항이 바라보는 예수가 그 두 가지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책은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예수가 당시 ‘지배계급과 로마의 이중적 착취에 시달리’던 갈릴래아 사람이며, 때문에 ‘소요와 봉기가’ 끊이지 않던 저항의 환경에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단지 현실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천국에서의 안락한 삶이 있으니 이 고통과 부조리를 참고 견디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지금 이곳에서의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것임을 말한다. 또한 저자는 예수가 이 세상에서의 풍요를 약속하는 이가 아니라 가난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가 권하는 가난은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의 궁핍함이 아니며, 도리어 인간적인 삶을 왜곡시키는 ‘필요를 넘어선 부’를 향한 경계를 의미한다. 그 욕심 또는 욕망이 자신의 자유를 해치고, 그것을 넘어 내 이웃이 혹은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이가 누려야 할 재화를 빼앗고 있는 것임을 상기시키려 한다. 저자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성경구절은 그저 비유가 아니며, 절대로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뭔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권을, 어떤 정책들을 비판하고 보다 나은 체제를 모색하면서 동시에 늘 이 물음을 자신에게 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충분히 가난한가, 가난한 내 이웃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가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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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평준화되는 꿈을 꾸며......

신선식(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딸 아이와의 대화

며칠 전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모임이 있어 귀가 시간이 늦었더니 아내가 전화를 했다. 고등학생인 딸 수민이를 태워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수민이는 현재 일반계 고등학교 2학년이다. 얼마 전까지는 저녁 10시까지 소위 ‘야자’를 했다. 그런데 요즘은 수능이 끝난 3학년 대신 2학년들이 11시까지 ‘야자’를 한다. 내년 대학입시를 위한 긴긴 마라톤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귀가시간에 맞는 차가 없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사는 상사면은 순천 시외에 위치하고 있어서 늦은 시간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별 수 없이 저녁마다 수민이를 태우러 가야하는 이유다. 수민이를 태우고 집에 오는 길에 물었다.

아버지 : 수민아, 대학에 갈 거니?

딸 : 응.

아버지 :무슨 과에 갈 건데?

딸 :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나중에 점수를 봐야죠.

아버지 : 난 점수를 맞춰서 대학을 가려면 대학을 안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대학을 나와도 현실적으로 별 뾰족한 수가 없는데도 누구나 가니까 가는 대학이라면 차라리 등록금 모아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대학에 가서 꼭 공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러니 너도 잘 판단해 봐.

딸 : 응.

수민이의 대답을 들으면서 교육의 주체인 이 땅의 교사, 학생, 학부모가 참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력보다 학벌이 우선시되는 사회

우리나라는 학벌사회이다. 실력보다 학벌이 중요시된다. 그래서 위조를 해서라도 소위 ‘SKY’라고 불리는 일류대 졸업장을 갖고 싶어 한다. 몇 년 전의 신정아를 비롯한 학력위조 파문도 이 때문이다. 특정 대학 출신들이 국가의 중요 공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 이렇듯 학벌을 중시하다 보니 자연히 모든 대학이 서열화 될 수밖에 없다.

초 · 중 · 고등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은 똑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똑같은 내용으로 평가를 받아 등수가 매겨진다. 개인의 적성이나 특기보다는 이 수능 성적에 따라 진학할 대학이 결정된다. 만 18세에 보는 수능의 결과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소위 ‘일류대’를 진학하지 못하면 잠재적인 실패자가 되는 것이다. 모집 정원이 60만 명인데 진학 예정자가 58만 명임에도 불구하고 입시지옥이라는 말이 허용되는 이유는 바로 ‘입시경쟁’이 아니라 ‘일류대 경쟁’이기 때문이다.

일류대를 나와야 인정을 받는 이런 학벌체제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일류대 입학 경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일류대 입학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듯하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자녀의 학교 성적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똑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똑같은 내용을 평가받는 체제에서는 사교육을 많이 받은 학생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부모들은 ‘엄마아빠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데?’하는 자식들의 비난에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래방 도우미라도 해서 자녀의 학원비라도 마련을 하려하는 안타까운 현실도 보게 된다. 자녀의 사교육비가 걱정스러워서 젊은 층이 출산을 기피해 인구가 감소하는 기현상을 목도해야 한다.

학교는 어떠한가? 입시교육의 첨병 역할을 하는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학원강사화 되었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학교의 교과진도는 일사천리로 나가서 잘하면 2학년 1학기까지 고3 과정까지를 끝낸다.(학생들이 소화를 다 못하더라도) 고2 후학기부터는 본격적인 수능대비 문제풀이에 돌입한다. 가르치는 재미도, 배우는 재미도 없다.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다. 교사들은 늦은 밤, 술 한 잔에 넋두리를 쏟아내며 자아상실감을 토로한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또 다시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체념 속에서 0교시부터 문제풀이에 몰두하고 있다. 일부학교는 아예 특수반을 편성하여 ‘될 놈’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 아~!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렇듯 교사, 학생, 학부모 모두가 입시지옥에 빠져 허덕이는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대학이 평준화되어 행복한 나라들

최근 우리나라 교육계에 핀란드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소개되고 있다. 대학이 완전 평준화되어 있고 무상교육을 실시하는 나라. 그러면서도 대학의 학문경쟁력이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나라. 그래서 핀란드 교육은 국내 TV에 소개도 되고, 관련된 책도 번역되어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경쟁보다 협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개인의 서열을 매기는 시험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팀별 협동학습을 하고 팀별 평가를 할 뿐이다. 평가는 학습결과를 파악하고 보완할 부분을 판단하는 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결과를 계량화하지도 않고 등수도 매기지 않는다. 대학들은 평준화되어 있으며 대학입학을 위한 서열화 된 시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대학입학 자격고사를 보아 합격/불합격 여부만 판단한다. 합격한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자유로이 입학을 할 수 있다. 대신 실력이 없는 학생들은 진급이나 졸업이 불가능하다. 또한,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기에 앞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 1년 동안의 사회 체험기회를 통하여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는 기회를 가진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학과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 평준화체제는 핀란드만이 아니라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호주 등 많은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경우도 일부 사립대학을 제외하고는 대학평준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평준화를 위한 노력들이....

우리나라에서도 2004년 『공교육개편안』이라는 소책자를 통하여 현행 경쟁입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경쟁 입시 폐지, 대학평준화를 대안으로 제출한 바 있다. 전교조와 교육관련 단체들의 오랜 공동 노력의 결과였다.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도 언제나 비판만을 한다는 말을 들으며 ‘뒷북’을 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나에게도 가뭄 뒤의 단비와 같은 책자였다. 내용의 핵심은 현재의 경쟁 중심의 입시 정책으로는 우리 교육의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은 대학입시에 묶여 있으므로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경쟁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였다. 그러나 큰 반향을 일으켰던 『공교육개편안』은 전교조 내부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사회적 담론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전교조 내의 정파 간의 갈등 때문에 『공교육개편안』을 중심으로 하는 하반기 사업이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어 버린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행히 ‘입시 폐지 대학평준화’라는 의제는 2007년 여름 진주경상대 정진상 교수의 전국자전거 대장정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진상 교수는 22일에 걸친 전국 자전거 대장정을 통하여 현재의 경쟁 입시의 문제점을 부각하고 대학평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정진상 교수의 노력은 2007년 10월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준)’ 구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공동실천단’이 조직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민 공동행동의 날,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자전거 대장정, 강연회, 토론회, 선전전 등의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필자가 사는 순천지역에서도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순천지역 공동실천단’이 구성되어 미약하지만 꾸준한 활동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평준화를 위해서 나는......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경쟁교육은 이러한 노력들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대학을 평준화시켜 입시지옥 해소는커녕 ‘경쟁만이 살길이다. 경쟁이 부족해서 실력이 부족하다. 교사, 학생, 학교를 더욱 경쟁시키자’는 경쟁 위주의 교육정책을 계속 토해 내고 있다. 대학을 평준화시켜야 할 판에 고교다양화 300정책 등으로 고교 평준화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일제고사를 실시하여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시험을 치르게 하여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와 학생들을 서열화 시키고 있다. 교사와 학생들은 더욱 경쟁에 내몰리고,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고통은 커져 가고 있다.

현실이 이렇게 암울하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교육적 모순이 커질수록 저항도 커질 것이다. 머지않아 더 이상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학부모들이 생겨날 것이고 부자들의 들러리를 서는 무의미한 경쟁에 반기를 드는 학생들이 생겨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문제풀이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할 수 없다는 교사들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쟁 위주 교육정책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교육의 공공성을 담아낼 수 있는 대학평준화가 사회적 담론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아직은 입시폐지 대학평준화를 위한 명확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여 답답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좀 멀리 바라보면서 차분히 가고자 한다. 내 주변부터 교육해 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면 현행 경쟁 입시의 모순이 커지는 만큼 대학평준화에 대한 관심도 커질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일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작지만 가능한 일부터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선전지를 돌리고, 회원을 늘리고, 인터넷에 관련된 글을 올리는 등등........

대학 평준화로 모두가 행복한 그 날을 꿈꾸며......

내 딸이 점수로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적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학벌을 취득하는 대학이 아니라 자아 성취를 위한 학문의 장으로써의 대학이 되었으면 좋겠다. 부모의 경제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대학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은 수능점수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자식들의 사교육비 때문에 직종을 불문하고 돈벌이를 하는 상황은 없어졌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문제풀이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끼는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다. 아마 수민이가 대학에 진학하는 2011년에는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중학교에 진학하는 막내아들 때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더 늦을 수 있더라도 ‘경쟁입시 폐지 대학평준화’는 시기가 문제일 뿐 언젠가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나의 노력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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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수능 거부인가

김찬욱(탈학생)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운 듯싶다. 2009년 11월 12일은 더 춥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에서 대접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잘’ 봐야만 하는 수능 날이었다. 매년 11월이면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미친다. 아니 그 전부터 미쳐 있다.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코스를 밟을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점수를 받아 높은 코스로 가게 된다면 높은 연봉과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허나 낮은 코스로 가게 된다면 낮은 연봉은 물론이거니와 일자리 자체도 보장받을 수 없다. 코스에 따라 사회의 시선이 달리지는 건 당연하고, 그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절대’적인 ‘상대’평가인 수능시험의 점수로 이 모든 것이 판단되고 결정된다. 사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쇠고기를 1등급부터 분류하듯 학생들은 성적별로 분류되어 자본에 팔려나가야만 살 수 있다.

2009년 지금 나와 당신들은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수능 거부해볼래?” 원래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과 복잡한 관계로 인해 대학진학을 하게 된 나로서는 대학진학 자체도 큰 부담이었던 나에게 수능 거부를 했을 때, 이미 수시에 합격하고 주변에 친한 친구들 대부분 수능을 보고 수능을 보지 않는 ‘나’에게 다가올 시선들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주변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의 시선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도 뭐라 할지 걱정됐다(물론 결국은 지지해주었지만).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난 잠깐의 고민도 없이 친구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

‘수능’은 왜 보는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아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좋은’ 대학은 무엇인가? 능력 좋은 교수진과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춘 대학이다. 아니, 수능을 잘 본 사람들이 가는 ‘높은’ 대학이다. ‘높은’ 대학은 왜 가는가? 좋은 일자리와 고연봉의 직업을 위해서다. 아니,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못 받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까지나 시궁창 같은 현실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간디학교를 다니는 동안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며 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그리고는 수능을 앞두고서야 수능 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수능이 싫었다.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제도 하에서 시행되는 시험이었다. 나는 곧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제고사의 결정체인 수능, 나아가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이 빌어먹을 제도가 사라져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학생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수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어도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회에서 말하는 적응이고 모범생인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자 발버둥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렇게 만드는 지금의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수능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수능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그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녀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사교육에 돈을 퍼붓는 학부모와 그것에 복종하는 학생과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학교교육을 하는 교사. 이 모든 구성원들이 지금의 시궁창을 만든 것이다. 이곳이 시궁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만 잘살면 되지 라는 일념하나로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하고 난 다음날부터 핸드폰과 미니홈피를 통해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기사를 보고 연락이 온 것이다. ‘짱 이다’ ‘멋있다’ ‘역시 너다’ 등등 많은 친구들이 수능 거부에 대해 긍정적이고 공감해주었다. 혹시나 나 자신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지 않으려 했으나 어쩌다 보게 된 댓글들에는 어김없이 다수의 악플들이 달려있었지만 격려하고 공감하는 댓글들이 더 많았다.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한다고 해서 수능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건 1인 시위를 준비할 때부터 누구보다 잘 알고 시작했다. 1인 시위를 릴레이로 한들 기껏해야 4명인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하러 갔다. 지금의 제도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또 잘못된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아니,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청소년들에게는 투표권도 없고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한국에서,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공유함으로서 앞으로의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문자와 댓글들을 보며 그 희망에 확신을 가졌다.

단지 암기력만을 평가하는 수능시험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나, 대학에 서열이 매겨져 명문대를 가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런 현실에서 무엇이 ‘대안’이라고 한가지만을 딱 내놓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은 대학평준화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와 친구들의 작은 행동이 앞으로 지금의 입시제도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대안에 대한 논의들이 더 활성화 되고 지금의 제도를 바꾸기 위한 노력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물론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바꾸고자 행동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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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 문화’ 없애기 위해서, 좀 크게 꿍시렁거리다

  난다(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활동가)

체벌, 아직도 학교에서 애들을 때리냐구요?

“90년대에는 두들겨 팼고 2000년대에는 때린다.”는 말이 있듯이 ‘체벌’에 대해 살펴볼 때 10년 20년 단위로 보면 약간 ‘정도’가 덜해졌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하로 수그러들지는 않고 있어요. 최근에는 경기도 지역의 어느 학교에서 학생이 ‘엎드려뻗쳐‘를 한 상태로 몽둥이로 맞다가 꼬리뼈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가 일주일 동안 입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광주에서는 체벌을 받고 집에 돌아간 한 학생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체벌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던 사례부터 가장 일상적인 체벌까지, 여전히 존재해요. 지각해서 맞고, 문제집 안 가져와서 맞고, 좀 크게 꿍시렁거렸다가 맞고. 언론에 이슈화되는 체벌은 극히 일부일 뿐이에요. 오히려 더 경우가 심하거나 비슷한데도 이슈화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체벌이 왜 일어나냐구요?

그러게요. 정말 체벌은 왜 일어나는 걸까요? 그동안 체벌의 대안이니 원인이니 여러 가지분석이 있었는데요. 체벌.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매를 드는 것. 많은 수의 학생들을 한꺼번에 만나고,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매를 듭니다. 그렇게 하면 쉽게 집중을 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많은 수의 학생들을 집중시켜야 하고, 수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할까요? 집중을 잘 시켜서, 수업을 잘 진행해서 점수 따야 하니까요. 시험 잘 봐서 입시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니까요. 그 밖에도 말 안 들으면 맞아야지,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해야지, 라는 한국 사회의(매우 폭력적인)오랜 관습이 체벌 문화가 고정되어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이유로 들 수 있겠습니다. 아니, 때려서 자신의 말을 인정하게 하고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폭력적인데요.(여기 계신 분들은 다 잘 아실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렇다. 체벌이 문제 많다는 거 알겠다. 그래서 대안은? 체벌 없애면 어떻게 할건데? 하는 고민 속에서 아마 그래서 상벌점제, 일명 ‘그린마일리지’가 등장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올해 교과부의 기조 중 하나가 “준법과 질서가 살아 숨쉬는 학교 만들기”라고 하죠. 상벌점제는 잘못에 대해서 매를 드는 게 아닌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체벌보다 공정한 적용이 가능하다며 꽤 좋아하시는데요. 제가 보기엔 이 벌점제도 문제가 많아 보여요. 학교에서 학생들 벌점 많다고 쫓아내기 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등 말이지요.

우리는 흔히 체벌의 대안이라고 하면 체벌을 대체할 다른 ‘합리적’ 통제수단을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체벌보다는 좀 더 ‘합리적’이고, ‘공정한’ 벌점제, ‘그린마일리지’가 도입된 듯 해요. 하지만 그게 아니라 아예 그런 통제 자체를 포기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체벌이든 벌점이든 통제와 규제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럼 대안이 뭐냐” 고 한다면 정말 간단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권적인 학교’. 좀 더 널널한 학교. 통제와 규제와 규칙만이 존재하는 게 아닌 통제와 규제와 규칙이 없어도 잘 될 수 있게 하기. 하지만 하도 준법, 준법 얘기하신 덕분에 이미 준법의식은 과도하게 살아서 흘러넘치고 있답니다. “어떻게 규칙을 잘 지키게 할까”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규칙일까”, “무엇을 위한 규칙일까”를 먼저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체벌 ‘진짜로’ 없애려면...

그럼 정말로 이 문제 많은 체벌을, 아니, 체벌이 없어진다 해도 체벌 같은 ‘벌’로 학생들을 통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 ‘체벌문화’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벌은 청소년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지위와 권력 관계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황이죠. 누가 ‘잘못’을 했을 때, 때려서라도 그걸 고쳐야 한다니 무슨 노예도 아니고…. 학생은 ‘때릴 수 있다’, ‘맞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엄청난 권력 관계를 내포하고 있어요. 학생들, 부모들, 교사들, 모두가 다시 그런 권력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체벌에 순응하고 있진 않은지 각자의 위치에서 반성해야 하지요.

대표적으로 체벌 문제에서 가해자로 지목되곤 하는 교사들. 교사들은 체벌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거나, 교권vs인권 개념으로 볼 때가 많은데요. 그런 생각을 벗어나는 것도 중요한 방법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체벌의 가해자로 지목되는 교사들도 어쩌면 집단적으로는 피해자 아닐까요?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경험도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니까요. 거기다가 사고가 생기면 책임은 교사 독박.(체벌을 가혹하게 가하는 교사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교사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말한다면 이렇다는 것-_-) 교사들은 당연히 이런 노동환경에 대해 변화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도 체벌폐지를 요구하는 교사들의 파업이나 농성은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 수도 있겠네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학생인권을 얘기하는 것이 교권을 침해하는 게 아니고, 교권과 학생인권은 대립 되는 게 아니에요. 체벌이나 깐깐하고 과도한 ‘생활지도’ 없이도 럴럴하고 인권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학교는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좋은 곳이죠.

학부모들의 경우에도 체벌에 대해 많은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간혹 부모들이 학교에서의 체벌을 반대하는 게, 내 귀한 자식 왜 당신이 패냐는 식일 때가 있지요. 정작 그런 부모들은 집에서 자기가 교육을 위해서 자식들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자식들에게 권위적으로 대하기도 해요. 이런 식으로 체벌을 반대한다면 정말 한계가 많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체벌에 반대하는 것은 학생들, 청소년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권력 관계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거여야 하지 않겠어요? 부모와 자식 간의 권력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교사나 부모가 체벌 문제를 매 맞고 사는 불쌍한 학생들만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잘못을 깨달은 착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줘야 할 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역할도 아주 커요. 설령 체벌에 대해 법적으로 금지한다는 게 만들어진다 해도 결국 현장에서 권력관계와 관행에 맞서는 움직임들이 없으면 체벌 ‘문화’는 끈질기게 살아남을 테니까요. 상당수의 학생들이 체벌에 동의하는 한 체벌의 완전한 폐지는 정당성이 약하니까요. ‘벌’로써 다스리겠다는 생각, 벌을 내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인식, 그리고 그러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방식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한 그 ‘문화’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와 움직임이 참 중요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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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운동의 흐름과 과제

전누리(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활동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삶을 바꾸기 위한 청소년들의 저항들이 존재했었다. 저항의 흐름은 청소년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때로는 무시 못 할 정도의 큰 흐름이 되어 기존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한국 사회 역시 짧게는 약 20년 전부터 청소년들의 행동이 나타났었고 그 흐름은 계속되어 미약하지만 일정한 성과와 변화를 얻어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의 청소년운동이 문제제기 했던 억압의 구조들은 여전히 강력하게 청소년들을 옥죄며 존재하고 있다. 지금 청소년운동은 억압의 구조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어려운 물음에 딱 맞는 정답을 내놓을 자신은 없다. 다만 답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단서들을 모아본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제목과 같이 그동안의 청소년운동의 흐름, 사회구조 속에서 억압받고 있는 청소년의 상황과 그것을 거부했던 청소년들의 저항을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시대에서 펼쳐지고 있는 청소년운동이 갖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청소년운동이 쟁취해야할 과제는 무엇인지 개인적인 짧은 고민을 담았다. 내용적으로 부족한 글이지만 먼저 글을 쓴 목적대로 답을 찾기 위한 단서가 되길 바라고, 이 글을 계기로 답을 찾기 위한 더욱더 치열한 고민과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적극적인 토론을 부탁드린다.

 

1. 청소년의 탄생, 억압의 현실

사실, 근대자본주의 이전에 생애주기 상 청소년 시기라는 개념, 혹은 순진무구함으로 대표되는 아동에 대한 특별한 생각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자본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미성숙’이라고 특징되어지는 아동-청소년기가 인간에 의해 ‘탄생’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성숙’이라는 관념은 사회 속에서 청소년을 따로 분리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나아가 아동기의 시기에 있는 그들을 관리할 수 있는 다양한 공적·사적 시스템이 마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아동기의 탄생과 그 시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의 등장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효과적인 재생산구조의 도입.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가 별 탈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자본과 국가권력 등 체제의 지배세력에 대해 묵묵히 순종하면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역할에 익숙해지기 위해 부당한 지배와 규율을 일찍부터 경험시키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의 청소년을 둘러싼 구조인 학교, 가족, 그리고 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자.

<학교>

아동기를 관리하기 위해 탄생된 대표적인 공적 시스템이 바로 ‘학교’(로 나타나는 교육제도)이다. 물론, 학교 등의 교육제도가 민중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반영되어 만들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현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구조에 저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기 위한 지배세력의 의도가 깊이 반영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결과 학교공간은 억압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이 작동될 수밖에 없었다. 그 중 대표적으로 ‘통제’는 학생들을 지배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수단중의 하나이다.

구체적인 학교현장의 현실을 살펴보자. 통제의 형태는 다양하다. 체벌을 가하거나 두발 및 복장 규제 등의 규율을 통한 신체에 대한 직접적 통제. 혹은 소지품을 확인한다거나 학생의 교제에 대한 규율을 통한 사적 영역의 광범위한 통제. 반성문이나 학생의 글에 대한 검열을 통한 양심과 사상에 대한 통제. 이 통제들은 공과 사의 영역을 가르지 않고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의 전반적인 삶을 규제한다. 나아가 통제는 학교공간을 넘어서(물론, 대부분의 생활이 학교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그가 어느 곳에 있던 작동되는데, ‘학생의 신분에 어긋나지 언행’이라는 규칙(그러지 않을 경우 처해지는 처벌들)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통제는 교칙, 혹은 학생생활규칙이라는 다양한 규율들을 통해 정식화되고 정당화된다. 물론, 이 통제들은 체제가 원하거나 유지되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무엇보다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통제와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감시들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통제와 규율을 내면으로 따르는 결과들을 초래한다. 어떤 외부의 감시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행동과 생각들을 스스로 감시하고, 혹은 다른 친구들의 행위들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심지어는 그 자신도 당하게 될 혹은 당하고 있는 부당한 통제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오히려 옹호하기도 한다. 결국, 그들 내부에서 통제라는 것은 싫긴 하지만 익숙해지고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가는 것이다.

한편, 학교공간에서 청소년들에게 통제와 더불어 강력히 다가오고 있는 것은 경쟁이다. 경쟁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지식에 대해 남보다 얼마나 더 많이 습득했느냐, 다시 말해 시험 등의 평가를 진행할 때 다른 이보다 더 높은 점수와 더 낮은 등수를 얻을 것을 청소년들에게 요구한다. 경쟁 속에서 자기 자신과 사회의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교육의 목적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1등만을 요구하고 인정하는 경쟁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스스로를 옥죄는 고통스러운 경주가 될 뿐이다.

그동안 한국교육에 있어 경쟁은 끊임없이 강화되어왔다. 집권을 했던 어느 정당이든 교육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경쟁의 강도를 계속 높여왔을 뿐이었다. 최근에만 살펴보더라도, 반과 학교 친구들과 상시적인 경쟁을 시작하게 만든 내신등급제, ‘어륀지’라는 웃지 못 할 에피소드와 시작된 영어몰입교육, 국제중-특목고-자사고 등으로 이어지는 학교서열화, 전국의 학교를 경쟁의 수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제고사 시행과 그 등수를 알려주는 학교정보공개 등등. 물론 이 모든 경쟁은 보다 명문대학으로 가기 위한 대입경쟁으로 모아지고 있다.

경쟁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교육에 쏟아 붓는 시간과 스트레스는 높아져간다. 학교 선택제, 기초학습강화라는 이름의 경쟁교육의 강화는 그나마 상태가 양호했던 서울에서도 다시 0교시와 강제야간자율학습, 그리고 방과 후 학교 등의 강제학습의 붐을 일으키며 학생들에게 아침잠과 저녁잠, 그리고 방학을 빼앗았다. 공교육의 경쟁강화는 자연스레 사교육을 자의든 타의든 사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학생들은 학교수업이 끝난 후, 혹은 주말에 학원에서 자신의 일과를 보내야만 한다. 휴일도 휴식도 없이 진행되는 과중한 학습부담은 청소년들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정신적인 스트레스 부담은 심히 우려가 되고 있다. 한 조사에서는 최근 3년간(2005~2008) 강박장애 환자 중 청소년이 58%(2005년, 1824명에서 2008년, 2878명으로)나 증가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가족>

한편 청소년을 관리하는 사적영역, 즉 가족역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봉건제를 무너트리고 근대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한 프랑스혁명 등 변화의 움직임은 인간이 어떠한 사적소유물이 될 수 없고, 그 개인으로서 신과 법 앞에 평등한 존재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은 위험한 것이었다.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체제의 문제가 드러나고, 충돌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기존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성과 모순이 망각될 수 있고, 인위적으로 배제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로 했다.

그 결과 사회의 지배세력, 당시 부르주아들은 공적영역과 분리되는 사적영역으로 가족을 분리시키고, 전부터 흘러내려왔던 가부장제적 가족구조를 다시금 강화하고 과장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주인으로서 인정되고 권위를 갖게 되었으며 가족 속의 여성과 아동은 그 권위에 복종해야만 했다. 이 같은 가족모델은 처음에는 부르주아 가족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차 노동자계급의 가족까지 확대되어갔다.

아동기의 탄생과 더불어 이 같은 가부장제적 가족구조의 강화는 가족 속에서 아동과 청소년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독자적인 생각과 권리를 실현하는 주체로서 청소년들이 인정되기 보다는 친권이라는 이름아래 전적으로 아버지나 혹은 부모의 통제와 지시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부모에 의해 종교를 강요받거나 혹은 연예 문제이던, 나아가서는 진로까지 생활 전 영역을 통제받는 경우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나아가 통제는 갈등으로 이어진다.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가 지난해 전국 일반 청소년 1만4716명의 유해환경 접촉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8.2%가 학업 성적이나 진로·진학 등 다양한 사안을 놓고 부모와 갈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삶에 대한 통제는 학교의 통제처럼 청소년들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와 갈등이 점점 극대화되면 될수록, 가족이란 억압과 통제의 공간을 떠나는 다시 말해, 가출을 선택하는 청소년의 수도 많아진다. 경찰청의 아동‧청소년 가출신고 건수자료에 따르면, 2008년에는 2만 3097건으로 역대 최고의 수준을 기록한 바 있고, 무엇보다 가출원인에 있어서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부모님과의 갈등이 그 1위로서 19.4%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서울지역의 한 실태조사 연구보고서에서도, 54.9%의 가출청소년이 부모나 가족갈등을 가출원인으로 응답한 바 있다.

물론, 많은 청소년들이 쉽게 가출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가부장적 혹은 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내면화된 결과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집을 나온 후, 살아갈 방편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청소년 스스로의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 한 현실이다. 일반적인 가정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부모는 자신들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끈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소년은 집을 떠나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소소한 갈등을 일으키면서 어쩔 수 없이 통제를 받아드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

학교와 가족 외에 있는 사회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거리 곳곳에 있는 ‘청소년은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표어는 청소년에 대한 인식을 여실하게 드러내 준다. 청소년을 ‘현재의 주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미래의 주체’일 뿐 지금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상징되는 ‘미성숙’한 상태로 보고, 그들을 소위 ‘일탈’에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억압과 통제를 가하고 있다. 당연히 그 속에서 청소년의 ‘참여’와 ‘자치’가 낄 여지는 없다.

대표적인 것이 청소년에게 정치권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 못하는 현실이다.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청소년은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 선거는 물론, 자신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지역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교육감 선거에서도 투표할 수 없다. 17살 고등학생이 하원의원에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영국 등 외국의 현실은 우리의 사회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사실 이다. 청소년은 선거과정에서 단순히 투표만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2007년, 선관위는 “현행 선거법상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10대 미성년자는 후보자 지지 혹은 반대 동영상 UCC를 만들어 올릴 수 없다”라고 밝혀 청소년들이 선거기간에 인터넷 속에서 정치에 관련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조차 막고 있다.

선거권 외에도 정치적 권리에 대한 통제는 수없이 많다. 청소년의 집회참여가 금지되는 현실 역시 눈여겨 볼만 하다. 지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정국 때 교육당국은 상황실을 설치하고 장학사와 교사를 대규모로 광화문에 파견해 지도라는 명목으로 청소년들을 감시하고, 참여자체를 막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다. 또한 같은 때 전주에서는 광우병 관련 집회신고를 한 고등학생에게 배후가 누구냐며 정보과 형사가 학교를 찾아가 조사를 가한 일이 이슈가 되기도 했다. 물론 청소년들의 집회를 막기 위한 시도는 예전부터 있어 왔다. 지금처럼, 80~90년대 청소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때에도 장학사들이 집회장소에 찾아가 학생들을 막기도 하였다. 특히 2003년, 부안 핵 폐기장 건설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때 노무현 정부는 ‘18세 이하의 청소년을 금지된 집회 또는 시위 등에 강제로 참가시키거나 참가를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3백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도록’ 아동복지법 개정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정치적 활동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생활과 문화의 통제역시 무시할 수 없다. 청소년보호법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후 10시 이후 PC방-찜질방을 출입 금지 시키는 등의 생활적인 측면에서부터 만화나 영화, 음악의 심의를 통해 문화적인 통제까지 가하는 청소년보호법은 일찍이 청소년계와 문화계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반두비’라는 청소년 영화의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은 큰 이슈가 되었다. 청소년을 주 관람 층으로 하는 청소년 영화지만 정작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에서 모방위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갔기에 불이익을 받은 것은 아니냐고 의견이 나오지만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어떤 내용이든 보호라는 이름아래 심의가 실질적인 검열으로서 표현의 자유뿐 아니라 청소년의 문화적 접근에 장벽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청소년을 착취하는 현실 역시 계속 반복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청소년노동’이다. 산업혁명 초기, 아동을 착취하는 현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근래 빈곤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 살펴봤듯이 경제적인 자립이 불가능 한 많은 청소년들이 아르바이트로 상징되는 노동을 선택하고 있다. 2007년,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라는 단체에서 1500여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태 조사를 진행했는데 52.3%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을 했다. 이 결과는 청소년들의 노동이 노동임금시장에서 밑바닥에 처해있음을 알리고, 무엇보다 저임금으로 착취되고 있는 청소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생애 첫 노동의 기억이 비참한 저임금 노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억압의 다양한 수용>

물론, 그 같은 억압에 대해 수용방식은 굉장히 다양하다. 예컨대, ‘일탈’의 경우, 자신들의 미래가 밝지 않음을, 즉 체제가 요구하는 성공을 이룰 수 없음을 ‘간파’한 후, 적극적으로 학교를 그만두거나 소극적으로 수업을 포기하고 학교 및 사회가 요구하는 규율에 반항한다. 최근 교육포기와 일탈은 양극화의 심화-빈곤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데, 정부도 이를 인식하고 일탈청소년에 대한 교정정책 재정비와 특별복지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자살’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체념의 의미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현실을 받아드리지 못하겠다는 소극적인 저항행위이다. 2007년, 교육과학기술부가 황우여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에서 학생 자살 수가 142건으로 5년 전보다 42%나 증가했고, 2008년 통계청 조사자료 따르면, 청소년 사망원인에서 청소년자살이 운수사고에 이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교생 8만 명을 대상으로 한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에서도 5명 중 1명이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입시경쟁교육의 강화와 억압적인 사회시스템은 청소년들의 자살을 증가시키고 있다. 아래 박스는 입시경쟁을 거부하며 자살을 선택한 청소년들의 유서들이다. 유서의 내용들은 죽음을 강요하는 경쟁교육의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청소년들이 선택하는 것은 체념, 그리고 경쟁의 참여이다. 성공할 수 있다는 달콤한 거짓말을 믿으며,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자의든, 혹은 타의에 밀려 경쟁의 대열 속에 들어가 12년 교육과정 내에 다른 학생들과 치열한 싸움에 빠져든다. 경쟁과 현실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나를 억압하는 것 따위야 지금의 현실을 조금만 참아내어 성인이 되고, 또 사회에서 성공하게 되면 해방 될 수 있다는 사회의 부조리한 조언을 진통제 삼는다. 그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연대는 꿈꿀 수 없다. 주위에 있는 친구들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보기보단 더 나은 점수를 획득해서 밟고 일어서야 하는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폭력에 대해 민감해지기 보다는 부당한 권력, 혹은 구조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고, 폭력에 무감각하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소위 경제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그 후 다가오는 결과는 일부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 다시 시작되는 노동시장의 경쟁이다.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폭력과 구조는 다시 또 다른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가해지고, 체제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이렇게 청소년들이 이 억압의 체제를 그저 손 놓고 받아드렸던 것은 아니었다. 억압과 폭력에 맞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찾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펼친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 요구하며, 적극적인 저항을 펼쳤다.

어른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 보지 않고 그렇게 죽어간 학생들만 욕했습니다. (중략) 저는 지금 막 교실을 뛰쳐나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부르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묵묵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감정도 없는 사람 같고 다 똑같아 보입니다. 전혀 개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친구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어른들이 밉습니다. (중략) 반 학우들아, 너희들은 죽더라도 대학에 가서 죽어라. 나는 단지 죽음을 너희보다 빨리 불렀을 뿐이다. 잘 있거라.

- 1989년 10월 13일, 서울 면목고 3학년 김 아무개 씨가 남긴 유서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 2002년 11월 자살한 어느 초등학생의 유서

부 힘들어서 자살하는 사람들... 다 남이야기 같았어. 하지만 아니야.

공부 공부 공부 공부. 좁디 좁은 교실에 선풍기4대 히터2대. 40명이 넘는 아이들.. 같은 곳에서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 오직 한 가지만 배우고 있었어. “대학가는 법”.

슬펐어.

……내가죽는다고 변하는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선생님들의 강력한 몽둥이도,,선생님들의 강력한 두발규제도,,선생님들의 공부공부소리..사회의 공부공부공부공부,,,

……난 사실 평범한 여중생일 뿐이야.

노래부르길 좋아하고, 그림그리길 좋아하고, 수다떨길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하지만 사회는 내게 그걸 바라지 않아.

같은 머리 같은 옷 그리고 같은 공부.

쫍디 쫍은 교실에 아이들을 구겨 넣고, 선풍기4대와, 히터2대. 그리고 선생님..

- 2007년 4월 자살한 어느 중학생의 유서

2. 억압의 현실에 거부하는 청소년의 저항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적 통제시스템은 20세기부터 큰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기존 교육에 반대하는 교육운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통제시스템에 대해 저항을 진행한 것이었다. 서구사회에 큰 충격을 준 68혁명에서부터 청소년의 저항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인권’이라는 것을 통해, 특히 인권의 중요한 원칙중의 하나인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지금 바로, 인권을 누릴 수 있다.’라는 보편성에 기대어 자신들이 속해있는 사회전반에서 억압과 통제에 맞서 청소년의 해방을 위해 ‘참여’와 ‘자기결정권’등을 요구하는 운동을 진행했다. 청소년운동의 시작이었다.

68혁명은 일명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라는 슬로건처럼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펼치며 저항했었다. 청소년들 역시 자신들의 삶 속의 요구를 거리에서 외쳤다.

1. 학교생활은 수감생활과 다름없다. 교육에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2. 자유롭게 조직을 결성, 가입하고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3. 두려움 없이 학교나 교사에게 불만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4. 부모의 동의서는 학생 의사가 아니므로 정당하지 않다.

5. 우리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체벌은 없어져야 한다.

6. 자의적인 검열은 폐지되어야 한다.

7. 금지된 지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8. 우리에게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 68혁명 당시, 영국의 청소년들이 주장한 요구들

68혁명 당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온 프랑스에서는 각 고등학교마다 자치회가 건설되었다. 그들은 교육이 결코 교사나 학교의 일방적인 지식의 전달로 되는 것이 아니고, 교사-학생이 동등한 위치 속에서 소통과 참여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인식하고, 교육에 있어 학생들의 더 많은 접근과 참여를 위해 교육에서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다양한 교육적 실험들을 진행했다. 특히, 고등학생의 대규모 참여는 대학평준화 등 체제전복을 두려워한 지배세력의 큰 양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한편으론, 문화와 생활적인 측면에서도 자기 삶의 과정을 자기가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다는 요구를 하며 가족과 사회의 분위기를 변화시켜 나갔다.

그들의 행동은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물려줬다. 경험들은 계속 이어져 와서,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은 지금도 부당한 교육정책에 반대하거나 자신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주장을 펼친다. 2006년 4월, 대만에서는 학생들이 인터넷에 두발규제 반대 토론방을 만들고, '학생 두발규제 금지 자치협회'까지 결성한 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결국, 대만 교육부는 국‧공립학교에 학생의 두발 전면 자유화방침을 결정했다. 그 다음해인 2007년, 칠레에서는 대학의 무시험 진학, 교육의 지역 차 해소, 교원 수 확충 등의 교육개혁을 요구하며 6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수업거부와 가두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다. 같은 해 덴마크에서는 20년간 무료로 사용해오던 청소년회관을 코펜하겐 시가 일방적으로 매각해버리자 강력한 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사르코지 정부가 취임한 뒤, 추진했던 고용을 유연화하려는 CPE법안을 노동자, 교사들과 함께 청소년들이 강력한 행동을 하여 법안추진을 무력화시켰고, 2008년 4월에는 교원감축안에 반대를 하며 전국 고교생 연맹(UNL)과 고교자주민주연맹(FIDL) 등의 청소년단체들이 2만 명의 반대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한편, 작년 10월, 이탈리아의 청소년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추진하던 교육개혁에 대해(학업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퇴학시키고, 초등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5년간 한 교사에게 배우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학교 개혁안) 수업거부와 학교건물을 점거하고,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3. 한국 청소년 저항의 흐름

세계의 청소년들처럼 한국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년들 역시 짧게는 20년 전, 길게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동안 저항과 운동을 펼쳐왔었다. 청소년들의 저항, 청소년운동은 단순하게 펼쳐져온 것이 아닌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이어져왔다. 간략하게 확인해보도록 하자.

<청소년인권 담론의 출발, 온라인에서 다시 거리로>

90년대 초반, 중·고등학생 운동진영은 학교 밖에 지역 조직의 성격을 가진 청소년단체를 건설하는 등 운동의 활로를 모색했지만, 공안사건 등을 빌미로 한 정부와 학교의 계속된 탄압으로 인해 운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저항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공간 속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공간은 바로 당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던 피시통신이었다.

헌법의 고귀한 정신을 준엄하게 지키는 헌법 재판소에 학교장의 지나친, 전횡적인 학교 운영으로 말미암은 학생들의 기본권의 억압을 원상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고자 합니다.

95년 7월, 춘천고를 다니고 있는 학생인 최우주는 학교의 강제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시행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며 청와대, 교육부, 강원도교육청 등에 민원을 제출하며 하이텔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학교장의 지나친, 전횡적인 학교운영’으로 인해 기본권의 침해를 당했다며 헌법소원을 이전 구제절차를 밟기 위해서 민원을 넣고, 글을 올린 것이었다.

그의 민원은 미적지근한 답변을 준 교육청과 대조적으로 온라인 공간과 언론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문민정부가 집권을 하고 전반적인 민주화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비민주적이었던 학교의 모습과 5.31교육 개혁안이 발표되고 교육현실에 대한 여론이 모아지고 있을 때 최우주의 문제제기는 학교와 청소년의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논의를 촉발시킨 것이었다. 8월 3일 하이텔에서는 [최우주 군의 학교 문제, 함께 따라가 봅시다]라는 토론방이 개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의견과 소통을 시작했고, 논의는 최우주 씨의 문제제기 방법에 대한 비판과 재반박에서부터 체벌, 보충수업, 분반, 입시교육, 심지어 선거연령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청소년문제와 교육구조 전반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사건의 주목할 점은 청소년인권담론의 등장이다. 그전 중·고등학생운동에서도 인권이란 담론이 쓰였으나, 예컨대 정권의 탄압에 맞서 쓰이는 제한적인 사용에 그쳤다. 그러나 최우주의 헌법소원사건이후, 청소년운동에서 인권담론은 중심적인 근거와 운동적 프레임이 된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에서부터 다양한 운동으로 분화했던 과정처럼 청소년 운동이 청소년자체에 중심을 두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온라인의 공간 역시 주목받게 되었다.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주위 또래들과의 소통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서 온라인은 하나의 소통의 기회가 되었다. 청소년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온라인 공간에서 당시에는 급속도로 활성화되고 있었던 피시통신은 사회적인 광장이 되고 자유롭게 학교 등의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소통하고 고발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온라인공간은 계속 청소년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과 공간으로 자리 잡히게 된다.

최우주의 헌법소원사건과 하이텔의 치열한 토론은 청소년들의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토론 속에서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나타나고, 모임을 구성해 구체적인 활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결국, 같은 해 12월 경 피시통신 <하이텔>과 <나우누리>에서 중고등학생복지회<이하 학복회>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학복회는 인권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하거나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고 진행했다. 무엇보다 학생인권의 담론을 사회에 알리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며, 98년에는 학생의 날을 맞아 ‘중고등학생인권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활동의 한계는 많았다. 무엇보다 오프라인까지 구체적인 힘이 발현되지 못했고, 활동을 하는 이가 성인이 되어버린 이후 활동가를 충원하지 못해 운동의 연속성을 유지하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도 새천년을 맞아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가 진행된다.

 

<노컷운동의 시작과 온라인과 오프라인 운동의 확산>

새천년을 맞이하고 수업거부, 탈학교 등 선정적인 미디어의 보도로 학교붕괴라는 현상의 이름으로 이슈가 되었고, 해법을 찾기 위해 민간영역에서는, 특히 문화담론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하자센터와 미지센터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프라인 공간 속에서 청소년들이 소통할 공간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이 쉽게 접근하고 소통할 수 있었던 공간은 여전히 온라인 공간이었다. 90년대, 피시통신이 역할을 했다면 2000년대는 인터넷이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다양한 청소년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채널 텐, 사이버유스(CyberYouth), 청소년인권동아리 타래 등이 그 대표적인 모임이었다. 특히 사이버유스의 경우, 청소년들은 성, 자퇴, 교실붕괴 등 다양한 섹션을 구성해 토론을 할 수 있었다. 한편, 피시통신의 학복회도 변화의 시기를 맞는다. 98~99년 침체기를 겪었던 상황에서 학복회 내부에서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소규모밖에 참여하지 못하는 동아리 식의 활동을 바꿔 대중적인 중고등학생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접근성이 높은 인터넷 공간으로 기반을 옮겨야 하는 주장이 나오고, 결국 ‘업그레이드 학복회’가 탄생하고, 논의는 더욱더 진전되어 2000년대 초 ‘전국중고등학생연합(준)’(아래 학생연합(준))이 탄생하게 된다. 한편, 70년대 학생운동을 계승하겠다는 주장을 펼치며 10개 지역의 학생회 및 여러 학생들이 모여 ‘전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고협)이란 조직이 나타나기도 했고, 5개 서울지역에서 각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단체들이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하기도 하였다.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세계 각지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외국 청소년들은 다른 나라 아이들과 같이 앉아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물어보곤 했지만 유독 우리나라 학생들은 자기들끼리만 같이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교복, 똑같은 3cm 스포츠형 머리로 나온 학생은 창피하게도 대한민국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1999년 5월, 어느 현직 교사가 나우누리에 올린 글이 인터넷웹진에 실리면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 글은 학기 초 학교의 두발단속 때문에 쌓여가던 학생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마침내 아이두, 채널 텐, 사이버유스가 모인 웹연대 ‘위드’에서 두발제한반대 서명게시판이 만들어지게 된다.

2000년 봄, 학생들의 폭발적인 호응과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 속에 두발제한반대 서명운동은 16만 명을 돌파한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진 운동은 오프라인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학생연합(준)을 중심으로 캠페인과 거리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사실, 운동을 주도했던 운동 단위에서도 두발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견이 존재했다. 두발자유화를 원칙으로 운동을 진행하는 단위(학생연합 (준))가 있었고, 교육부가 자율화를 선언하고 각 학교학생회별로 자유화의 기준을 정하자는 주장(웹연대 위드)도 있었다.

노컷운동에 대해 2000년 10월, 교과부는 “각 급 학교별로 교사·학부모·학생 대표가 참가하는 토론회를 열어 두발규정을 다시 정하라”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이 지침은 학교현장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교사-학부모와 학생의 의견 차이가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힘의 권력차이가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학교 현장에서 두발개정이 이루어진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고, 심지어는 당시 운동을 주도했던 서울지역의 활동가들의 경우 시 교육청(교육감:유인종)에 의해 학교에서 퇴학 등의 징계를 받기도 하였다.

비록 목표는 달성되지 못 했지만 노컷운동은 청소년들 스스로 활동을 고민하고 진행하는 계기가 되었고, 청소년 조직들의 급속한 성장을 갖고 왔다. 학생연합(준)의 경우, 광주, 부산, 목포 등 각 지역에서 지부가 만들어졌고,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는 오프라인 활동을 하는 회원이 200여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지센터에서 청소년인권센터를 운영하면서 2000년 12월 22일,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하 학생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을 하게 된다. 학생연합은 이후, 두발자유화를 넘어 체벌반대, 학교운영위원회의 참여, 고교등급제-자사고 반대 등의 교육투쟁까지 이슈를 제기했다. 무엇보다도, 학교 안 지회모임을 구성하기 위해 큰 역량을 쏟기도 했다.

2002년, 미군장갑차 사건으로 인해 많은 청소년들이 분노를 갖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같은 해 점차 학생연합을 필두로 청소년 조직들은 활동가 부재라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경험들이 축적되지 못하고, 무엇보다 중고등학생이외의 참여를 엄격히 배제한 것도 큰 원인이 되었다. 다행이 학생연합은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흐름은 계속되어 청소년인권과 관련한 ‘청소년의 힘으로’, ‘희망네트워크 작은숲’ 등의 풀뿌리 지역모임이 생기게 되었다. 이 모임들은 2003년 발생된 네이스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10월 경 서울, 강릉, 산청, 부산 등에서 전국동시다발 교육청 1인 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네이스 투쟁과 지역모임은 학교 밖의 싸움을 학교 안 까지 가져가지 못하는 한계에 처했지만, 다음해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투쟁이 나타나게 된다.

<청소년 인권 담론의 확대와 거리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거리로>

새로운 흐름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청소년들의 싸움이 학교현장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바로 2004년에 일어났던, 대광고 강의석의 종교자유투쟁과 인천외고의 사학민주화 투쟁이었다. 6월 16일, 강의석은 학교에서 종교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학교의 현실을 지적하는 학내방송 한 후, 교육청 앞 1인시위와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그러나 여기에 학교는 퇴학이라는 징계로 화답하고, 강의석은 45일간의 단식을 들어간다. 결국,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강제적으로 실시되는 예배를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의 자율권을 준다.’는 내용에 합의에 이르고, 이후 법원에서도 퇴학처분무효라는 승소를 거두게 된다.

같은 해에 활발히 싸움이 진행되었지만 청소년운동진영에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인천외고 투쟁의 경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년 전, 새로운 교장(이남식)이 부임하면서 인천외고는 교사의 발언권을 제한하고 경고장을 남발하는 비민주적인 공간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억압도 강화되어 수업시작 시간 앞당기기, 전원강제야자 실시, 두발규제 강화, 외출제한, 벌점제와 유급제 등이 도입되었다. 4월 24일, 교장과 학교 운영이나 학생 지도 등의 문제를 두고 마찰을 빚어왔던 전교조 박춘배 교사와 이주용 교사가 파면되었고, 이에 학생들은 학생대책위를 꾸리고 교장실 앞에서 집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6월 4일부터 600여 명의 학생들이 100일 가까이 수업거부를 시작, 결국 교장이 옆 학교로 전근이 되면서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특히 강의석의 투쟁은 학교 내 다른 학생들을 모으기보다 이슈파이팅에 기댄 점이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두 투쟁은 공통적으로 무엇보다 ‘학교 내 저항’의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인천외고의 경우, 2003년 용화여고를 포함해 사학민주화 투쟁의 흐름이 이어진 것도 있지만, 학생인권 문제를 포함해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 현장의 학생들이 모임을 만들고 강도 높은 투쟁을 벌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같이 학교현장에서의 투쟁의 흐름들은 2005년 송파공고 비행기시위, 2006년 동성고의 학생인권보장을 촉구한 오병헌의 학교 앞 1인시 위, 두발자유를 요구하며 학내 집회를 연 양동중 사례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두 번째는 기존의 청소년운동의 의제들이 다시 광장에서 분출된 점이다. 2005년,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라카 시위’가 진행되었다. 강제적인 두발규제와 강제이발에 맞서, 두발자유를 요구했던 것이다. 학교의 두발단속을 고발하는 글이 온라인에서 이슈가 되고, 청소년웹 사이트인 아이두에서는 두발제한폐지 온라인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5년 만에 대규모의 두발자유운동이 일어났다. 청소년단체의 활동가들은 ‘두발자유 학생운동본부’(이하 학생운동본부)를 결성하기도 하고, 거리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운동의 흐름은 이어져 5월 14일, 광화문에서는 학생인권수호전국네트워크에서 마련한 ‘두발제한폐지·학생인권보장을 위한 청소년 거리축제’와 학생운동본부가 개최한 ‘두발자유와 인권을 위한 5.14 청소년 행동의 날’이 열려 많은 청소년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5년 전, 노컷운동의 움직임과 다른 점은 앞서 언급한 송파공고의 비행기 시위, 성남 풍생고의 운동장 시위 등 (앞서 학교 내 투쟁의 흐름이 이어진)집단학내시위들이 일어나 거리와 학교 곳곳에서 투쟁이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같은 해 5월 또 눈여겨봐야 할 투쟁은 내신등급제 투쟁이다. 80~90년대 이후, 교육관련 의제와 관련 거리로 나오는 청소년들의 자발적이고 강력한 행동이 나타났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내신등급제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을 ‘저주받은 89년생’이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로 분노가 모아지고 있었다. 마침, 입시경쟁으로 자살을 선택한 학생들의 뉴스가 줄을 이으며 보도가 되었고, 결국 분노는 행동으로 촉발 되었다. 5월, 한 청소년단체가 광화문에서 자살학생 추모제를 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몇몇 내신등급제를 반대하는 청소년 카페들도 촛불문화제를 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했고, 학생들 사이에서 촛불문화제에 참석하자는 문자가 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한 교육당국과 경찰당국의 협박과 방해가 있었지만 결국, 5월 7일 광화문에서는 청소년들이 약 천 여명이 모여 촛불을 들고, 내신등급제 반대와 자살한 학생들을 추모했다.

세 번째는 청소년인권담론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문제에 치우쳤던 청소년인권담론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일군의 청소년단체들이 모인 18세선거권낮추기연대는 말 그대로 선거권 하향을 주장하며 다양한 행동을 펼쳤고, 2005년에는 비록 원했던 목표를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국회가 19세로 선거권을 낮추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청소년 성소수자의 인권문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학교와 가정 안에서 성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갖가지 탄압을 받았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성소수자 운동진영에서도 큰 화두가 되었다. 이어서 비록 법의 규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온라인 커뮤니티가 등장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다양한 고민과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청소년노동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점차 그 수가 증가하고 있는 청소년노동에 대한 관심들이 높아져가고 있는데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결성, 실업계 학생들의 간접고용의 실태, 청소년 저임금노동실태를 사회에 공론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의제들은 점차 확대되어 최근에는 청소년보호주의 문제나, 여성청소년 문제가 고민되기도 한다.

2006~2007년에는 그동안 청소년운동진영의 숙원이었던 학생인권의 제도적 장치의 마련 요구가 민주노동당 최순영의원이 대표 발의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 일명 학생인권법으로 모아지고 법안통과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청소년인권운동의 대중화와 안정화 및 전문화를 고민하기 위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학생인권보장을 위해 인권침해현장을 기습방문하거나 학생들의 학내집회를 지원하고, ‘청소년행동의 날’을 개최하였다. 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기도 하였고, 앞서 청소년인권의제를 더욱더 포괄적으로 확대하기위해 다양한 고민을 가졌다.

<이명박 정부 하의 청소년의 분노>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초기부터 특히, 교육 분야에 더욱더 경쟁을 강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청소년들은 강력한 분노와 거부의 표시를 나타냈다. 인수위 시절, 어륀지로 대표되는 영어몰입교육은 분노의 시작이었다. 청소년들은 싸이월드의 이명박 미니홈피 방명록에 영어몰입교육에 반대하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학교자율화 조치가 발표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의 부활 혹은 정당화를 우려한 청소년들이 학교자율화 조치를 규탄하는 수많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수도권 학생들의 75.2%가 학교자율화 정책이 학업스트레스를 증가시켰으며, 66.3%의 학생이 입시경쟁교육이 심화되었다고 응답해 학교자율화 조치에 반대하는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분노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고 표출된 것은 미국산쇠고기 반대 촛불집회였다. 5월 3일, 촛불집회의 하나의 전환점이 된 날, 집회에 참가한 청소년의 모습은 언론에 큰 이슈가 되었고, 이내 그들이 거리에 나온 이유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스타들이 인기를 위해 그들의 팬인 순진한 청소년들을 선동한 결과, 혹은 광우병에 관련된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의 결과라고 얘기한 보수·경제언론. 386세대의 자식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물려받았고, 또 논술교육을 받아 논리적인 자기주장의 능력이 있었기에 거리로 나왔다는 주장을 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었다.

물론, 그런 해석들은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당시의 삶을 살펴보지 않았기에 큰 한계를 지닌다. 우리에게 촛불집회에 나온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큰 단서를 준다.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처음 촛불집회에 나오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고 응답한 것 보다(14.0%) 많은 수의 학생들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고 응답했다(56.1%). 이 응답은 다른 질문과 연관되는데 ‘만약 쇠고기 협상이 타결될 경우, 다른 현안에 대해 촛불집회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가’라는 질문에 67.0%가 ‘예’라고 응답하고, 쇠고기 협상 관련 이외 다른 이슈 의 집회에도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이면서 67.8%정도가 교육 문제(0교시 수업, 영어몰입 교육 등)에 참여를 밝혔다.

자신들에게 경쟁을 강요하고 억압을 가하는 학교교육에 대한 분노는 쌓여있었고, 광우병 위험은 청소년들에게 쌓여있던 분노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결국 청소년들은 촛불집회라는 ‘저항이라는 행위’를 표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특히 촛불정세 중, 현재의 교육에 대해 '미친교육'이라고 명명함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지금의 교육에 대한 인식과 분노를 드러냈다. 촛불이 사그라진 이후에도 청소년들의 저항은 은밀한 방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으로 일제고사를 둘 수 있는데, 청소년들은 차라리 시험을 보는 예산을 갖고 어려운 친구를 돕는 복지예산을 더 늘렸으면 좋겠다는 얘기들을 하며, 자발적으로 OMR카드를 백지로 혹은 낙서를 해 제출하기도 하였다.

청소년운동진영 역시, 이명박 정권하에서 분노하고 있는 청소년들의 흐름과 함께 하고 있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해 집회를 조직하거나 등교거부의 움직임에 함께하려고 했었고, 이 가운데에서는 수많은 촛불청소년단체들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청소년운동진영은 이어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도 적극 참여해 진보후보였던 주경복 선본에 적극 결합하는 단위들도 있었고 ‘기호 0번 청소년 후보’를 띄어 독자적인 청소년 공약을 제출하고 교육감 선거에 청소년의 참여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 단위들도 있었다. 일제고사 투쟁역시 놓칠 수 없는데, 일군의 청소년단체들이 ‘무한경쟁 일제고사 반대 청소년모임 Say-NO’를 결성해 등교거부와 백지동맹 등 청소년들의 저항을 모아내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4. 청소년운동의 성과와 한계

간략하게 청소년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치열한 운동의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큰 성과들이 있었다. 성과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청소년인권이란 의제를 어느새 한국사회에 공론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동안 청소년의 인권이란 것은 회피되거나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의제였다. 그러나 청소년들의 저항은 점차 한국사회 속에서 청소년인권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수많은 인식의 전환들을 가져왔다. 기존질서와 인권적 기준사이에 타협점을 추구해온 한계는 있지만 청소년의제와 관련 된 국가인권위의 전향적인 권고, 국회에 발의된 학생인권법과 최근 경기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가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살펴봤듯이 또 학생인권이외에 다양한 청소년관련 의제들이 드러나고 있다.

둘째, 당사자인 청소년들의 인권의식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청소년인권이란 의제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론화되는 가운데, 무엇보다 청소년들 역시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민감해지고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억압된 공간 속에서 자신들이 당하는 인권문제를 고발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저항의 경험이 익숙해지고, 또한 저항에 대한 접근이 쉬어지고 있어 자신들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발적인 저항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인터넷은 이러한 점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학교나 사회에서 겪었던 일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거나, 혹은 자신이 있는 공간 속에서 저항을 하기위해 청소년운동진영에게 도움을 구하거나 그 전에 있었던 사례들을 보는 일이 쉬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분명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이 쟁취한 큰 성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앞서 청소년운동의 흐름을 살펴봤듯이, 성과 외에도 운동의 한계 역시 나타났다. 운동의 흐름 속에서 한계들이 나타났을 때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활동가들이 고민을 나눴지만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고 한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운동과정에 참여하고 또 지켜보면서 느꼈던 한계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한계지점>

① 소규모로 계속되는 청소년운동

그동안 청소년들의 저항은 무수하게 나타났지만, 정작 운동조직에 참여하는 청소년의 수는 계속 소수로 머무는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시기에 따라 대규모의 청소년들이 저항을 펼칠 때, 그에 비례해서 청소년단체의 활동에 참가하는 청소년의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운동의 흐름을 살펴봤듯이, 이 규모는 지속화되지 못하고, 계속 제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급격하게 축소되고, 심지어는 조직의 해체까지 가져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실, 청소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체성이 변화하는 특성(청소년에서 성인으로)을 가지고 있기에 청소년운동진영의 흐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청소년을 지속적으로 충원해야하는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청소년의 특성 상 시기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은 것(길어야 6년)도 있고, 또 한국의 교육현실 상 치열한 입시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이 쉽게 시간을 내 참여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운동진영 역시 조직화 사업에 큰 힘을 쏟지 못한 책임도 있다. 그동안 청소년운동진영은 조직의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임에도, 조직화의 고민과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이슈파이팅의 방식에 머무르거나 현안 싸움에 치이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특히 학교에서 혹은 인터넷 상에서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저항의 흐름에 청소년운동진영이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에 일어났던 촛불집회의 경우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흐름이 거리로, 운동적으로 가시화 됨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 속에 들어가 그들과 계속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하고, 나아가 이 청소년들의 흐름을 영속화시키지 못했던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② 청소년운동진영 내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설정

그동안 청소년 운동진영의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운동 내 청소년과 비청소년(성인)의 관계설정 부분이다. 청소년 운동의 목적 중에 하나는 나이로 인해, 차별받는 현실을 극복하고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어나가자는 것이 있다. 그런데 정작 실제적인 관계, 특히 운동 안에서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마련되지는 못했다. 또한 당사자운동의 성격을 지닌 청소년운동의 특성상 예컨대, 장애인운동 속에서 비장애인의 참여, 그리고 그의 역할 문제처럼 당사자운동 속에서 당사자의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주체는 어떻게 참여하고 어떤 역할을 맡아 나가야 할지의 물음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나오지 못 했다.

예전 운동의 흐름 속에서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소위 ‘피터팬주의’라 불리는 것처럼 비청소년의 활동을 배제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청소년의 의견이 청소년의 의견보다 비중이 높아질 수도 있다는 것에 우려도 있었고, 무엇보다 당사자운동은 당사자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들은 많은 한계를 가져왔다. 위의 한계와 연결되지만 조직의 운영에 있어 연속성과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것과 더불어 당사자 운동의 범위를 좁게 가둘 필요가 없다는 문제제기가 있어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청소년단체에서 청소년과 더불어 비청소년들이 함께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특히 경험에 있어 비청소년이 더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 시간적으로나 더 많은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역할이 집중되는 상황, 그리고 여전히 나이를 통한 권위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경우도 있어 관계설정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변화된 사회 속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청소년 운동 속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져야 할지, 여전히 답은 나오지 못한 채 한계로 남아있다.

③ 운동문화의 한계

사회운동 내 문제가 되고 있는 운동문화가 청소년운동 내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상황은 그 자체로 큰 한계이다.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조직에 따라 생각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소통하지 않는 부분이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조직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입장이 다른 것에 대해 논의하고 점차 그 차이를 극복해서 운동진영 안에서의 연대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전 조건인 소통에 대해 별다르게 노력하지 않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런 가운데 조직에 대한 소통이 안 되어서 생긴 입장차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잦아 운동의 큰 장애물이 되고 있다.

두 번째는 명망가적 운동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운동진영 내 일부 활동가들의 경우, 자신들이 하고 있는 운동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까 고민하고 노력하기 보단, 자신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지는 것과 조직 내 직위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특히 수시 등의 대학입시에 유리하고자 경력을 쌓기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운동진영 안에서 큰 물의를 빚고 있다.

세 번째는 사업만이 중요시되고 정작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태도이다. 현안과 사업만을 중요시 할 뿐, 정작 활동을 진행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문제나 혹은 사업을 준비하는 공간이용 등 일상적인 부분에 고민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다반사이다. 다시 말해, 운동 내 재생산의 영역에서 발생되고 있는 문제들을 사업보다 부차적인 문제로 생각하는 등, 예컨대 가족 내 가부장의 모습처럼 운동의 목적과 모순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운동문화에 대해 활동가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에 대한 소통과 해결은 요원하다.

④ 구체적 변화가 없는 현실

그동안 청소년운동진영에 의해 청소년인권담론이 확대되거나 혹은 청소년과 관련된 의제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이는 앞서 지적했듯이 청소년들의 의식을 높이는 등 큰 성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정작 그동안 청소년운동진영이 제기해왔던 요구들은 거의 수용되지 않고, 변화가 더딘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학생인권과 관련 학생인권법이나 학생인권조례 추진이 그것이다. 제도화, 혹은 법의 제정과 개정이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성과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관심을 기울이고 또 많은 노력을 쏟았으나 성과는 미진하다. 사실 학생인권의 경우, 청소년운동진영에서 오랜 시간 동안 제기되어왔기에 약간의 변화가 있어왔지만 다른 의제의 경우, 여전히 출발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 같은 현실은 운동의 방법이 이슈파이팅에 머물고 있는 것이 크다. 각 의제에 따라 당사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중심을 두고 같이 고민을 나누며 함께 운동을 하면서 변화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드물었고, 지금도 쉽게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⑤ 운동의 중‧장기적인 계획 부재

무엇보다 청소년운동에 있어 앞서 언급해왔던 한계를 넘기 위해 또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요할지에 대한 중‧장기적인 계획이 부재한 것은 큰 한계이다.

그동안 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갑자기 발생하는 현안에 대해 대응하기 바쁘거나 혹은 연초에 정세를 전망하고 계획을 급급하게 세웠지만 지극히 단기적이고, 달력사업 중심적인 계획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런 상황 속에서 운동의 구체적인 미래를 구상하고, 운동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 추상적인 고민을 넘어 구체적인 고민을 나누긴 어려웠다. 결국 단기적 사업에 치여 중‧장기적으로 준비가 필요한 운동의 과제들은 매번 아쉬움을 남긴 채 해결할 수 없었고, 운동의 발전은 더디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5. 청소년운동의 과제

짚어본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청소년운동진영이 지금보다 더 성장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이뤄내야 할 6가지 과제를 제안해보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구체적인 제안이 아닌 추상적인 내용으로 머물러 있어 아쉬움이 남지만 그러나 이것을 바탕으로 풍부한 논의가 나와 더욱더 세세한 내용을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많은 의견을 부탁드린다.

(1) 청소년운동의 중‧장기적 계획 마련

앞서 살펴봤듯이 단기적 대응에만 치중할 뿐 긴 호흡을 갖고, 운동의 발전을 위한 기반마련 혹은 전망을 고민하고 계획하는 기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좀 더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운동의 전략과 계획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중‧장기적 계획을 구성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세부적인 과제들이 있다. 첫 번째로, 지금까지 청소년운동의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와 평가가 필요하다. 그동안 청소년운동은 기억되지 못했으며, 새롭게 운동을 시작하는 청소년들은 기존의 시행착오를 다시 밟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고민을 갖고 있었던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는 2006년, 역사연구팀을 꾸려 주간웹진인 ‘인권오름’에 ‘청소년 인권운동, 길을 묻다.’라는 기획기사 형태로 청소년운동 역사를 정리하기도 했다. 역사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력과 시간의 부족 등의 이유로 인해 한계가 많다. 하루빨리, 청소년운동사에 대해서 운동자료의 데이터 화 등을 포함해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심도 깊은 평가를 진행하여 앞으로 청소년운동의 계획과 전략을 구성하는 데 큰 기반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청소년운동진영을 구성하고 있는 단위들의 치열한 소통이 가능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한계에서 살펴봤듯이 단위 간 소통의 기회는 굉장히 드물다. 청소년운동의, 청소년운동진영의 중‧장기적 계획과 특히 운동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은 일부 단위의 고민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운동진영을 구성하는 단위들이 모여서 함께 고민을 나눠야 더 구체적이고 의미 있는 내용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입장차가 있어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치열하게 소통하는 기회가 많아져야 되고 단위 역시도 소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구성해야 한다. 먼저 청소년운동의 전략을 수립한 후, 이에 필요한 과제들을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계획,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의 로드맵이 구상되어야 한다. 예컨대, 운동의 기반마련을 중심으로 보자면, 청소년운동사 자료 데이터화(자료실 설립), 청소년인권담론 혹은 의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연구소(모임) 구성의 계획들이 담겨질 수 있다. 로드맵 속에서 사업에 대해 각각의 역할을 나누고 계획에 맞추어 추진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2) 조직화 모델의 고민 및 지원체계 마련

어느 운동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조직화 문제는 청소년운동에 있어 더욱더 힘을 모으기 위한 작업 일 뿐 아니라 운동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다. 먼저 조직화와 관련되어 시도했던 수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이를 우선 정리하고 평가해야 할 것이며 소위 긍정적인 성과를 남긴 조직화 모델의 경우 적극적으로 보급해야 할 것이다.

조직화라는 과제를 위해서는 두 공간에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인터넷’이다. 운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점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청소년들 피시통신, 인터넷을 비롯한 사이버 공간을 거점으로 삼고, 또한 활동을 모색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운동조직이 이런 넓은 온라인 공간 속에서 청소년들을 어떻게 만나고 그들을 모아낼 수 있을지, 그것보다 더 나아가자면 어떻게 하면 그들을 다시 또 오프라인까지 활동을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지역’이다. 가상의 온라인 공간이 아닌 실제로 그들의 삶이 구성되는 공간, 지역에서 어떻게 그들을 만나고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이미 몇몇 소중한 성과들이 나타났는데, 경기도 고양의 교사-학생연대모임인 ‘새늘’과 서울의 구로지역에서 진행된 인문학아카데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새늘의 경우, 전교조 지회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사회적 이슈에 대해 토론을 진행하는 모임인데 굉장히 오랫동안 운영이 되고 있다. 서울 구로지역에서 열린 인문학아카데미의 경우, 전교조 남부지회와 청소년활동가 그리고 교육공동체 ‘나다’라는 청소년단체가 함께 인문학아카데미를 진행 한 후, 참가자들을 모아 지역청소년모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델들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변형시켜야 할 것이다.

한편, 청소년들이 안정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경제적 능력이 없는 청소년들의 경우, 교통비나 휴대폰비가 없어 활동을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가족이 활동을 반대할 경우, 제일 먼저 경제적인 부분을 갖고, 청소년들의 활동을 막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의 필요이다. 예컨대, 후원들을 모아 재단을 구성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기본적인 생활비(교통비, 통신비, 식대 등)를 제공하는 것도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후 재단의 규모가 더 커진다면 활동가들의 생활비 지원뿐 아니라 운동진영의 사업에 대한 재정지원까지 가능할 것이다.

(3) 사회운동진영과의 관계문제

촛불집회 이후, 아직 청소년운동에 대해, 혹은 청소년운동이 주장하고 있는 요구에 대한 이해는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등 한계가 큰 현실이지만 한국 사회운동진영(진보진영) 내에서 다시 청소년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 청소년운동진영은 사회운동진영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진보진영의 목표 속에 대안적인 사회의 모습에 있어 혹은 그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청소년의 억압을 없애는 것 역시 주요한 과제로서 인정할 것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적극적인 연대를 주장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운동진영 내 만연해있는 청소년을 대상화하거나, 나이에 따라 위계질서가 있는 문제 많은 운동문화를 혁신하는 것도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과제로서 고민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위와 같은 생각들은 그동안 주요한 연대의 주체였던 전교조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역시 가져온다. 그동안 전교조는 청소년운동의 주요한 우군이었으나, 앞서 언급한 운동문화, 청소년이나 청소년운동을 동등한 운동주체로 생각하기보다는 여전히 대상화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사업은 현재의 문제를 포함해 미래의 문제에 있어서도 전교조의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거나 혹은 레토릭으로만 그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들을 극복하기 위해 청소년운동진영의 적극적인 비판과 고민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자면, 학교 현실에서 교사와 학생간의 위계적 권력관계와 권위적 질서가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에 대해 이를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전교조와 함께 답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4) 청소년인권담론에 대한 구체적 고민

그동안 청소년인권담론 혹은 청소년의제가 확대되어왔지만 학생인권 담론에 비해 다른 의제들은 아직 전문적인 고민이 낮은 상태이다. 갖가지 의제에 있어서 여전히 쟁점과 고민이 많은 상황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인 논의와 모색이 필요하다. 이런 작업들은 나아가서 구체적인 대안까지 생산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운동진영 차원에서 해외 청소년운동진영의 사례 등을 적극적으로 수집하는 등의 작업이 이뤄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청소년 담론을 진보적인 혹은 청소년운동의 시각에서, 고민할 수 있는 연구모임 혹은 연구소의 구성역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의제의 생산과 구체적인 대안 마련을 통해 청소년운동의 원칙에 기반 한 대안과 요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이 연구모임에서 청소년운동의 역사와 자료를 정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5) 내부 운동문화의 혁신

앞서 한계에서 지적한 지금의 청소년운동 내 운동문화에 대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 지금 안고 있는 운동문화를 열어놓고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고 논의를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운동문화를 극복하는 것에 있어 레토릭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이뤄져야 하는 점이다. 예전에도 문제제기가 있어 논의가 이뤄진 적이 있었지만 그 자리의 논의뿐으로 그치고 말 뿐로만다. 논의가 실천적으로 논의날 수 있기 위해서 예컨대, 논의를 한 바탕으로 공동의 활동원칙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의가 이런 논의와 실천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전히 남아있는 논의를 부차시한 것으로 만드는 분위기를 조직 내부에서 문제제기하고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조직 내 청소년과 비청소년 활동가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진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위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비청소년 활동가들의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며, 구조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비청소년활동가들에게 업무와 경험이 집중되는 형태를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한 업무를 비청소년 개인만이 맡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과 함께 맡아 경험을 나누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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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포럼

십대 여성의 성적 행위성

김고연주(길을 묻는 아이들 저자)

십대 여성의 성

십대 여성은 성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의 성적 행동은 금기시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성적 욕망의 대상(ex.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등의 걸 그룹)이면서 동시에 성적인 행위를 했을 때 비난을 받는 이중적 윤리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섹슈얼리티가 쾌락과 위험 모두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십대 여성들은 매우 성애화되지만, 동시에 순결하고 순진하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을 받는다. 십대 여성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자신들의 성적 행위는 임신과 낙태, 성병, 그리고 성폭행 등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배우면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십대 여성들은 성에 대해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십대 여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들은 남성들의 성적 요구를 거절했을 때는 내숭이라고 비아냥을 받고, 수용했을 때는 ‘창녀’라고 비난 받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십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고 성인 남성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고 간주되어 고무되는 것과 비교되는 지점으로, 십대의 성에 대한 성별화된 시각은 십대 여성의 성이 조직되고 관리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톨만, 2005).

십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그러나 이같이 성적 행위를 곧 피해자가 되는 것과 동일시하는 시도가 적지 않은 십대 여성들이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또한 설명하지 못한다. 성적 욕망은 개인의 몸 그리고 타자와 연관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의 느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아의 정체성 형성과 타자와의 친밀한 관계 맺기에서 중요하다. 사회적 보호를 잃을까봐, 부모와 친구들을 실망시킬까봐 “침묵하는 몸silent body”으로 있었던 십대 여성들이 “욕망의 정치학”을 인지하고 자신의 성적인 느낌들을 말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톨만, 위의 책, 119쪽). 십대 여성들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곧 ‘창녀’가 되는 사회의 각본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많은 십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자신들의 성적인 욕망을 표현했을 때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고, 타인과 더 적극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쾌락과 위험 사이에서 협상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십대 여성이 놓인 특수한 조건

십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십대 여성이 위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인 여성도 행사하기 어려운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되는 십대 여성이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무엇을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는 논쟁적인 부분이다.

1) 이중적인 성규범의 대상

여성은 조신하고 순종적인 딸, 애인, 아내, 어머니 등 여성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비난과 처벌을 받는다. 특히 십대 여성들이 순종적이지 않거나 성적인 행위를 하면 가정이나 학교에서 감시를 당하게 되고, 이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십대 여성들의 삶은 성애화되어있기 때문에 십대 여성들은 그들의 성과 성적 표현이라는 좁은 틀에 집중하도록 고무되고, 일부 십대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성애화하는 것에 참여한다. 또한 십대 여성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한편 대중 매체를 통해 성적인 것이 친밀함, 감정적 교류, 상호 존중, 행복 등을 의미한다고 배우게 되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지지를 성적인 것에서 충족하게 된다. 성별화된 성애화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삶에서 성적이지 않은 많은 부분도 “성애화된 렌즈”로 보는 태도를 내재화하게 된다(샤프너, 1998, 272쪽).

2) 외모를 위한 소비

오늘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 지위를 드러내는 사회에서 십대들은 속물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계급의식에 지배받고 있다. 이들은 가정 형편이나 옷의 브랜드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옷차림이 초라하면 또래로부터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 형편과는 무관하게 매스컴에서 선전하는 옷을 입게 된다. 십대들은 또래 그룹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또는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일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되고 있다(쿼트, 2004, 41-42쪽).

이와 더불어 여성들에게 명품의 소비 뿐 아니라 몸이 자기계발 전략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여성들은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몸을 가꿈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오늘날 여성들에게 몸은 곧 브랜드이며, 명품 몸매는 명품 브랜드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다. 섹시함은 많은 여성들이 원하는 자아의 이미지일 뿐 아니라 남성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지위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많은 십대 여성들이 상호 격려하거나 견제하면서 외모를 가꾸고, 예쁜 외모를 지닌 친구가 십대 여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현상은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십대 여성의 행위성

성적인 존재이면서 성적인 행위가 금기시되어 있는 십대 여성들에게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된다. 성적인 행위를 하는 십대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인 일탈을 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사회적 현실을 인정하거나, 또는 성적인 행위를 놀이나 재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의 성적 행위에 부여된 차별적이고 신성화된 의미를 탈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의미화에도 불구하고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십대 여성이 대면해야 하는 사회적 시선은 냉정하다. 사정이 무엇이든 성을 매매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은 ‘나쁜’ 소녀들로 낙인찍히고, 원조교제를 하면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자신이 자초한 것이므로 사회적∙법적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성적인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명명되는 비유적인 의미의 ‘창녀’가 아니라 실제로 성을 매매한 문자적인 의미의 ‘창녀’이기 때문에 사회의 이러한 반응에 움츠려든다는 점이다. 이들은 원조교제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순결과 성적인 순진함 등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되고, 왜 그렇게 많은 십대 여성들이 순결을 지킴으로써 안전한 공간에 있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모두 사후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여성인 자신을 설명해내는 방식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이거나 모순적 사회에 대한 도전자일 수 있다. 또는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기 설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할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제라는 큰 틀 안에서 선을 넘은 이들의 자기 설명은 이들의 행위성이 잘 드러나고 나아가 대안적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일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Alissa Quart(2003), Branded: the Buying and Selling of Teenagers, Perseus, ([나이키는 왜 짝퉁을 낳았을까](2004), 유병규, 박태일 역, 한국경제신문).

Deborah L. Tolman(2005), Dilemmas of Desire, Havard University Press.

Laurie Schaffner(1998), "Do Bad Girls Get a Bum Rap?", Millennium Girls, Rowman & Little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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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포럼

대중문화와 청소년

정소연(문화연대 대안교육센터 활동가)

1. 들어가기

청소년문화는 오랫동안 대중문화영역에서 중요한 논쟁지점이다. 90년대 이 후, 새로운 소비주체로서의 떠오른 청소년들은 아이돌 가수들의 등장 후, 팬덤 문화의 발생까지 자신들만의 문화적 세력을 넓히며 대중문화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청소년 문화의 주요특성인 “일탈” 즉, 일상성의 전복은 제반질서의 붕괴 또는 뒤집기를 통해 일상의 억눌림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적으로 강력한 군집성을 띄면서도 순식간에 개별적으로 흩어지는 측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끌리면 취하고 쓰면 뱉는 형태다.

즉흥적이고, 일탈적이며, 반항적인 청소년문화는 보수적인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성문화의 충돌은 언제나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청소년들의 자극적 문화는 미디어를 통해 부정적 사회병리현상으로 비춰지면 “요즘 어린 것들은...” 이라는 말로 정리되며 청소년 보호론을 거세게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회적 윤리 잣대로 “평가받아야하는” 문화로 전락한 청소년문화는 이 같은 제도적 견제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과거 소비주체에 불과했던 청소년 문화는 현재 생산주체 뿐 만 아니라 소비자 운동의 형태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소년문화는 여전히 연예인 따라잡기 정도로만 평가절하 되거나 공부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으로 배척당하기 일 쑤다.

본 발제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청소년 문화에 대한 이해와 맹목적인 추종, 수동적 문화로서의 청소년 문화가 아닌 대중문화 속에서의 청소년 문화의 리터러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 청소년 문화 개념의 이해

우선 청소년 문화라는 용어부터 따지고 들어가보자. 이 용어에서 풍기는 명백한 세대 구분의 냄새는 여전히 청소년 세대를 기성세대와의 대립으로 규정짓고 특정 사건이나 현상으로서의 구별되어짐을 바탕으로 한다. 자유분방하거나 반항적이거나로 정의되는 10대 담론은 세대담론에서의 외부적 구별짓기를 당하지만 사실 내부적 구별짓기는 보다 고차적이다. 취향, 계급, 지역, 성별, 문화적 성향, 최근엔 정치 담론과 성정체성까지 보다 세밀한 그룹들을 그저 단순히 10대의 문화로 구별짓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절대 10대를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청소년 문화는 연령적 구별이 아닌 사회 속에서의 권력관계, 문화 주체들 간의 모순성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청소년 문화는 우려를 넘어 사회적 공포심을 양상하는 수준으로 진화하였다. 기성문화의 모방이지만 기성세대는 이해 할 수 없는 문화. 그래서 청소년과 연관된 다양한 문제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낯설듯 하지만 사실은 이미 익숙하게 진행되어왔던 사회적 병리현상의 발현에 대해 우리는 그저 그들의 문제라고 일축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대적으로 이미 일반적으로 변해 버린 것들을 단순히 비행과 버릇없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들은 대중문화에서 강력한 세력권을 행사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 관한 한 청소년들은 다른 영역과는 다르게 중심주체로 자리 매김 되었다. 이는 그동안 N세대, 신세대 등 불분명한 연령층으로 불렸던 세대담론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즉 청소년 문화는 세대적인 정체성이라고는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소비문화, 저항문화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3. 획일적 전체주의(tatalitarianism) 인가 자발적 전체주의(holism) 인가

2000년 이후 청소년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신들의 소비 욕구를 아주 신속하게 생산적인 욕구로 바꾼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급속한 발전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였다. 드라마 결말을 바꾸는 것,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적극적 지지 및 활동방향의 제시까지 2000년 이후 청소년 문화는 적극적 주체로의 변화를 이미 마쳤다. 그로 인해 이미 대중문화 속에서 청소년들은 더 이상 재현이 아닌 새로운 볼거리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똑같이’가 아니라 바탕에서의 전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보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고 촉각적으로 어떤 내용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소비하는지에 관심 있는 2000년 이후의 청소년들의 문화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획일적 전체주의를 들이대며 걱정을 해대고 있으니 과연 이들의 귀에 이건 무슨 소리로 들릴 것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청소년 문화 공간은 대폭 늘어났지만 공간의 자치 활용도는 여전히 부족하다. 지역의 청소년 수련관, 문화의 집들은 여전히 청소년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고 청소년들은 언제나 공간이 없어 방황한다. 주류문화에 저항하는 청소년문화로 인디문화, 독립문화 등은 몇 년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 매니아 문화로 축소되고 평가된다. 여전히 청소년 문화는 새로운 스타일을 유행형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는 무관하게 상품형식의 구성요소로 흡수될 위험이 많고 실제로 최근 많은 광고들이 청소년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스타일 변화를 선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새롭게 변화된 청소년 욕구에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따라 하기만 한다며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청소년들을 알고 있는가?

4. 이야기 해봅시다

청소년들의 일상은 인터넷 공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팬덤 문화와 청소년의 문화적 활동이나 세력권을 형성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며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문화의 발달은 그들만의 날것의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자율적인 참여가 가능하여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팬덤 문화역시 서로간의 적극적인 연대와 동시에 자신들만의 그룹의 이익을 위한 이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한편으로 혼자 놀기라는 이름의 개인적 독립화 현상의 가속까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옳고 그르냐가 아닌 좋고 싫음의 경계의 불명확성에 서있는 청소년 문화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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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포럼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야기

최승원(전남여고 교사)

1. 들어가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대부분 먼저 다가오는 이미지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 있었던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 충돌일 것이다. 이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보다 극적으로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던 교사의 활동과 수업 중에서 가장 원색적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학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질문이 가능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조선인 학생간의 충돌이 어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뿐이겠는가? 일제 지배 과정 동한 일본인-조선인 간의 충돌은 다양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광주에서의 충돌이 단순한 패싸움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처음에는 나주-광주를 통학하는 일본인-조선인 학생들의 감정이 쌓이면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렇게 우발적 충돌, 충돌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감정의 충돌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하고 항일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볼 때 비로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지와 지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2. 독서회를 기억하자

(1) 1920년대 학생 운동의 발전

거족적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을 거치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일제에 저항할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6년 6.10만세 운동을 학생들 스스로 조직하고 전개하면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 운동은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학생들은 자신들의 조직으로 각 학교에 독서회를 결성하고, 일본인 교원에 대한 불만, 학교 설비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학교당국에 저항하는 동맹 휴학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10만세 운동을 거치면서 동맹휴학은 ‘조선 본위의 교육 확립!’, ‘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 단위 학교를 뛰어넘는 반일적 성격의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사회 운동 세력의 대응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920년대 중반 각 세력의 입장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자치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다. 이들은 동맹휴학에 대하여 ‘식민지 교육’이 빚어낸 문제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동맹휴학은 민족의 역량 증대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고, 동맹휴학의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인 교사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사회주의 세력의 선동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당대의 학교 교육을 ‘맹목적 굴종적 봉건노예의 도덕과 논리를 청년 학생의 뇌리에 주입하여 반동세력의 도구를 만들고자’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학생들의 맹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맹휴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민족주의 우파와 달리 ‘교원자격과 학교설비에 대한 불평불만은 학생 측의 반항력이 폭발하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식민지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지적한다. 또한 동맹휴학의 원인을 학생의 도덕 결핍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치 석일(昔日)의 군신(君臣)관계를 의논함과 흡사’하다며 이러한 관념의 강조는 ‘지배 측에 선 자(者)임을 느끼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학생들의 맹휴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 지원을 하였던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사회주의계열은 1924년에 이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항일 학생 운동을 지원하였고, 사전 발각되어 전개하기 어려웠던 6.10만세 운동도 이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는 「강령」을 통해 학생 청년은 민족적으로 억압 당하고, 조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못하며, 학업을 마친 학생이 과잉 인구로 남는 것을 비판하며, 투쟁 목표를 일제 타도와 봉건 유제의 청산에 두었다.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일제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차별 교육, 노예 교육을 철폐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선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6.10만세 운동에 제출되었던 구호가 이후 각 지역의 맹휴에서 유사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성진회, 독서회 중앙 본부의 활동은 이들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 아래 학생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당원 또는 공청원인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강영석, 장석천 등은 왕재일, 정남균, 국순엽, 장재성 등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기반이 된 학생조직의 발전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광주지역의 독서회 활동

성진회는 1926년 6.10만세 운동 이후 지역의 학생들의 비밀 회합과 논의 끝에 11월 3일 결성하였다. 처음 참가한 학생은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등과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 정남균 등 16명이었다. 전남 지방 조공과 고려공청은 강해석, 지용수 등을 통해 성진회를 지도하였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 반대’를 지향하며 비밀 결사로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한 달에 1, 3주 토요일에 독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1927년 3월 모임을 주도하던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이 졸업하여 모임 개편이 필요하였고, 비밀 유지도 쉽지 않아 성진회는 해체되었다. 성진회의 운영기간이 짧아 모임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나, 성진회 활동이 이후 광주 지역 각 학교의 독서회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진회에서 활동하던 성원들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성진회 해산 후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독서 모임을 지속한다. 성진회에서 활동한 졸업생들은 후계자를 선정하여 재학생 지도하는 방법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유지하여, 1929년에는 광주고보, 광주농교, 전남사범 등에서 독서회가 유지되었으며, 광주여고보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독서회(‘소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 지역의 독서회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독서회에서 유력산 선배로 인정받았던 장재성이 각 학교 독서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고보를 졸업하면서 성진회 활동을 마쳤던 장재성은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유학하는 중에도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광주고보의 맹휴를 적극 지원하였고 방학 등으로 일시 귀국할 때에는 후배들과 만나 독서회 활동을 점검하고 있었다. 장재성은 1929년 6월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9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학생과 청년조직을 연결하며 적극적으로 독서회 조직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929년 6월 광주고보, 사범학교, 광주농교 독서회 활동 학생들과 만나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장재성은 책임 비서를 맡았다. 독서회 중앙부는 학교별 결사원에게 중앙부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각 학교 독서회를 재조직하여 각 학교별로 4개 반 가량의 독서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독서회원의 단결을 도모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회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학생 소비조합(문방구 판매)을 만들기로 하고, 지금의 금남로 공원자리의 장재성 빵집 옆 건물에 문방구점(학생 소비조합)을 차리고 내부적으로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 활용하였다. 이후 독서회 성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검증 조서에 의하면 문방구점의 2층은 방이 3개로 구성되었고, 큰 방에는 탁자 1개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등사판용 기계와 「공산당 선언」 등 몇 가지 사회과학 서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11월 3일 오후, 독서회 회원들과 장재성은 우발적인 집단 충돌을 의식적인 항일 투쟁으로 전화, 발전시킨다. 이어지는 11월 4, 5일 장재성은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장석천 등과 논의하여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시위를 전국화 할 것을 결정한다. 만약 의식적인 항일 학생 운동을 고민하고 준비하던 독서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11월 3일은 광주지역의 학생들 간의 작은 소요로 남았을 것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억, 기념하면서 광주지역에서 의식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들의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화 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활동하고, 주도했을 독서회들의 활동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동맹휴학

독서회의 활동이 있기 이전부터 자연 발생적인 동맹휴학이 있어왔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활동으로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민족적 자각을 키워갈 수 있었다. 광주지역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에 광주고보의 경우 1923, 1924, 1927, 1928년 총 4회의 맹휴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관공립 중등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이다. 한편, 광주농교에서도 1923, 1928년,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에 맹휴가 발생하였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맹휴는 성진회 회원 등 독서회와 연관된 사례가 높다. 대중적 저항 운동으로서의 맹휴와 독서회의 결합은 11월 3일 학생 운동을 항일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동맹휴학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광주고보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2월 초 맹휴 주동 학생을 처벌하지 않기로 학부형회의에서 약속한 교장이 주동학생 5명을 정학 처분하자 다시 맹휴를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광주농교에서는 3년 학제가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자 5년제로 승격할 것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1924년 6월 광주고보와 재광 일본 선발팀간 야구 경기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고보 일본인 교장의 의뢰로 관련 학생이 경찰의 취조를 받자, 이에 4백여 명의 학생이 항의하였고 교장은 전교생의 무기정학을 선언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고, 학부형들도 대회를 통해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맹휴는 9월에 수습되고 맹휴를 주도한 5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7년 5월 광주고보는 물리 화학교실의 신축 등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맹휴를 전개하였다. 시라이 교장이 이를 수용하여 맹휴가 마무리되었다.

1928년 3월 광주고보 5학년 학생인 이경채가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을 기재한 선언서를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주 등에 붙였다가 6월 체포되었다. 학교 측이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키자, 학생 대표들이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의에서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학교 측이 이들을 근신처분하자 6월 26일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이에 학교는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시킨다.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맹휴에 돌입한다. 이는 고보 맹휴에 대한 동조 맹휴의 성격이 강하였다. 학교 당국은 12명을 퇴학시키고 102명을 무기정학시킨다.

이에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맹휴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학부모 통고문을 보내고 교우에게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교장에게는 맹휴학생일동의 명의로 규탄서를 전달하기도하였다. 이를 지원하여 동경에서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우회 명의의 항의문과,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의 항의문이 발송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맹휴는 9월에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에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1929년 3월 졸업식에는 맹휴 주도 학생의 무더기 퇴학에 항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270여 명의 전교생이 교장실에 몰려가 면담을 요구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5, 6월경에는 화장식 벽 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 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으로 맹휴하자’ 등의 낙서 등이 나붙었다. 11월 3일은 느닷없이 오지 않았다.

3. 우연한 사건(?), 조직적 대응(!)

(1) 한-일 학생간의 갈등

눈을 돌려보자 1920년대의 광주-나주의 풍경과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학생 운동의 폭발은 독서회 등 지도부의 의식적인 노력, 의식적인 동맹 휴학 제안으로만 성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학생 대중의 광범한 동의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 소개한다.

1924년 봄 본정통(지금의 충장로)의 일본인 양화점에서 사소한 시비(?)로 격투가 벌어졌다. 발단은 일본인 주인이 구두를 제작, 판매하면서 같은 가격에도 조선인 학생에게는 질이 낮은 상품을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광주고보생이 항의하자, 양화점 옆 식료품점의 일본인이 가세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의 격투가 벌어졌다. 일본인이 기마경찰대를 부르면서 조선인 학생의 반일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6월 광주고보 대 재광 일본 선발팀의 야구 경기는 집단 충돌을 넘어 맹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그 안에 내재한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 의식이 독서회 지도부와 만나 조직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로 가보자. 당시 광주고보 학생의 1/6, 광주중학교 학생의 1/4가 나주-광주 열차로 통학하였다. 나주 지역에서 통학하는 일본인 학생은 지주, 상인, 공무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선인 학생의 경우 주로 중소지주층의 자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광주 간 통학을 하는 학생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영재라는 자의식과 식민지 조선인 학생이라는 피해의식이 혼재해 있었을 것이다. 복선형 학제로 광주 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상호 간의 경쟁의식이 강렬하였으며, 광주고보의 시설, 교육에 대한 불만도 컸다. 앞서 확인하였던 1927년의 동맹휴학은 그러한 불만을 잘 보여준다.

1929년 6월 나주-광주 간 아침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운암역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들이 개를 잡아 불에 그슬리는 것을 본 광주 중학 학생인 곤도가 ‘야만이다’하고 중얼거리자, 이를 들은 광주고보생이 ‘야만이란 무슨 뜻이냐? 조선사람을 가리켜 야만인이라 한 것이냐? 이것은 조선인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들은 광주중학의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은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광주고보의 교장에게 통보하였다. 그날 오후 하교 열차에서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곤도가 구타당하게 된다. 곤도는 나주경찰서장의 아들이었다. 이후 두 학교는 교사를 승차시겼고, 경찰에서도 형사를 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여 표면적으로는 무마되었다. 그러나 한-일 학생 간의 응어리는 감정은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1929년 11월 3일의 충돌은 예비된 것이었다.

(2) 11월 3일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간 통학열차를 탄 학생들이 하교하여 나주역에 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이때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였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가 후쿠다를 힐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으로 말하자 박준채는 후쿠다를 구타하였다. 이를 본 일본 순사가 박준채 만을 때리자 광주고보생들이 순사에 항의 하였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아침에도 시비가 붙었으나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31일 오후 하교 열차에서는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차장은 이들을 말리고 박준채와 후쿠다 등을 2등실로 연행하였는데, 2등실의 승객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후쿠다를 두둔하고 박준채를 비난하였다. 같은 칸에 탔던 당시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사 기자 또한 후쿠다에게만 경위를 취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모두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11월 1일 하교 시간에는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번져 집단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양측 교사의 제지로 충돌을 피하였다. 이 시기 일인 학생 학부형들의 요청으로 광주중학교 교사가 1개월간 영산포 여관에 숙박하며 학생들과 통학하였다고 하니, 당시 이 지역의 위기감이 컸음을 느낄 수 있다. 11월 2일 학교 주변에는 항일낙서가 학교 곳곳에 나타났다. 충돌은 없었다.

11월 3일 명치절이자 전남지역 산잠 6만석 돌파 축하연으로 광주 시내에는 인파가 붐볐다.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을 위해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개천절이기도 하였다. 기념식 후 신사(현 광주공원) 참배를 하도록 하였다. 11시 경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이 충돌하였고, 조선인 학생 최상을이 일본인 학생의 칼에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조선인 학생이 가세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인 학생이 광주역(현 동구 소방서)전으로 물러났다. 한편, 편파적인 보도를 한 광주일보(현 전일빌딩)에 항의하여 조선인 학생들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한일 학생들은 광주역전으로 몰려가 집단 난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늘어나 광주중학교 100명, 광주고보, 농교생 약 400명으로 일본인 학생이 밀리면서 성저리의 토교에서 대치하였다. 교사들의 만류와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장재성이 학교에 모여 선후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조선인 학생 300여 명은 광주고보 강당으로 모였다.

(3) 조직적 대응!

고보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관련 학생들의 경과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러 급진적 제안 속에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행동방침의 원칙을 제안하고, 시내로 재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 자리에는 장재성도 참석하여 당일 시내 재진출은 독서회의 주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교가와 응원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광주 시가를 한 바퀴 돈 시위대는 다시 강당에 모여 이후 연락 방법을 논의하고 방면 별 소대를 편성하여 해산, 귀가하였다.

학교는 임시 휴교를 단행하였고, 경찰 당국은 시위 주동학생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인 장석천, 강석원 등과 만나 시위 선후책을 논의하고 검거 학생 석방을 위해 재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격문 전단 4천 부를 인쇄하고 12일 수업 개시일에 맞추어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격문의 표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가) 우리 투쟁 희생자를 우리들의 힘으로 탈환하자!

나) 검거자를 즉각 석방하라!

다) 교내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방지하라!

라) 수업료와 교우회비를 철폐하라!

마)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사) 직원회의에 학생대표를 참석시켜라!

아)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차)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11월 12일 첫째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라’는 구호를 신호로 광주고보 전교생이 시가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때는 광주여고보, 사범학교는 학교 당국의 적극적 통제로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광주농교에서도 10수 명이 참여했으나 긴급 출동한 경찰대에 포위되어 참여하지 못하였다. 2차 시위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나 28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학교는 다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사이 학생 시위는 전남으로 확산되고, 서울 시위가 일어나면서 전국화된다. 1930년 1월 8일부터 광주에서는 개학과 함께 기말시험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백지 동맹을 결의하여 광주고보는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여고보에서도 2명이 퇴학당하고 17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다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획하다 광주고보생 48명이 퇴학처분을 받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여고보는 64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1월 3일 오후를 넘기면서 광주 학생 운동은 우발적 충돌을 넘어 조직적 항일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11월 3일 시위가 발생하자 서울의 각 사회단체는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원을 파견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11월 6일 광주로 내려와 진상을 파악하고 시위운동을 전국화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한편, 신간회에서도 허헌 등이 11월 8일 광주에 내려와 향후 계획을 협의하였다. 11월 12일 시위 이후 보도 통제로 시위의 진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조선인 학살’ 등의 소문이 나돌면서 비상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시위는 먼저 목포와 나주로 퍼졌다. 11월 10일 목포 상업학교 학생들이 장재성과 면담하고 19일 50여 명의 학생이 적기를 앞세우고 태극기, 격문을 뿌리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나주에서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다. 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조선민중만세’, ‘조선학생만세’ 등의 구호를 고창하였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학생 운동이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표면 단체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 두었던 학생전위동맹은 격문살포와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한편 조선청년총동맹도 11월 16일 상경한 장석천과 협의하고 신간회, 사상,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이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일제는 이를 포착하고 시내 사상, 청년 단체 간부 등 127명을 검거하고 격문 8,000매를 압수하는 등 검거에 혈안이 되었으나 12월 5일부터 14일까지 30여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맹휴에 참가하고 총 1천 4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휴교, 조기 방학했던 학교들이 1월 7일 개학을 맞자 또다시 서울 지역에서는 연합 시위를 전개한다. 서울의 시위가 알려지고 각 지역 사상, 청년 단체가 조력하면서 1930년 1월부터는 학생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 통계를 살펴보면 퇴학 학생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462명, 참가학교 194개교, 학생 수 54,000여 명이다. 국내의 학생 운동은 식민지 조선을 넘어 해외로도 확산되어 상해, 북경, 천진, 만주, 일본, 연해주, 미주로까지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4. 나오며 - 기념식 : 기념일 투쟁

1945년 해방 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이 전개되었다. 1953년 10월 30일 문교부령으로 ‘학생의 날’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지정한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학생의 날’은 6.25전쟁과 맞물리면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의식은 ‘반공’의 민족의식임을 알 수 있다. 1956년 12월에 학생의 날을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의 날’은 학생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1970년 11월 재경 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추진위원회는 전국대학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서울대 법대학생회는 학생의 날 기념토론회를 통해 학생의 기본권, 학생군사훈련 강화 등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971년에는 전국대학생연맹이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전국적 봉기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학생의 날’을 통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교육, 학생 관련 기념일을 통폐합 한다는 명분으로 각종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학생의 날을 제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생의 날을 즈음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독립유공자협회 등의 ‘학생의 날’ 부활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기념일로 지정한다. 이후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자리 잡혔으며, 한편에서는 역사적 주체로 학생의 위치를 재삼 확인하는 날로 의미가 지워지게 되었다.

2006년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뀐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1984년 부활한 ‘학생의 날’은 뚜렷한 추진 주체가 없이 광주광역시교육감이 주관해 광주지역의 일부 유족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초라한 행사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고, 명칭 변경 이후 교육부총리가 주관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11월 3일’이 화석화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학생의 날’은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으나,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명칭 규정은 ‘11월 3일’을 과거에 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로 단위 학교에서는 명칭 변경 이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경건하게’ 치를 것을 학생, 교사에게 요구하고 있다. 틀에 박힌 ‘경건’은 화석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11월 3일’을 어떻게 새롭게 불러낼 것인가?

학생의 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글도 비교적 예전의 것이지만,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우금치 기념사업에 참여한 지수걸 교수의 글에서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일제의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과거와 현실을 대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이른바 ‘기념투쟁’을 중시했는데, 일제 경찰이 만들어 배포한 이른바 「사상운동 경계력」에 따르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중시했던 기념일은 ① 1월 21일(레닌 사망일), ② 3월 1일, ③ 3월 2일(코민테른 창건일), ④ 3월 15일(2차 일본 공산당 검거일), ⑤ 4월 17일(조선공산당 창건일), ⑥ 5월 1일, ⑦ 5월 30일(상해 반일운동 기념일), ⑧ 6월 10일 <하략> 등이었다고 한다. 이런 날이 다가오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투쟁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경건한 기념식과 함께 민속놀이나 체육대회, 노래공연, 대자보 게시, 격문 배포, 기념 집회, 시위 등을 전개했다. 이 같은 ‘기념투쟁’은 계급적 혁명적 관점에서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기념행사는 특권화된 역사상을 의례적으로 반추하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요구나 정서를 반영한 민중 주도의 ‘기념(일)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기념투쟁’을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민중투쟁의 새로운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역사 만들기’는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찾고 가꾸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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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자유 한다고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공현(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너무 쉽게 망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참 쉽게 망하는 나라다. 화물연대나 철도노조가 며칠만 파업해도 나라가 흔들린다고 난리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친북좌파들의 발호로 나라가 망할 거라고 한다. 참, 국가보안법 따위가 국가안보의 ‘최후의 보루’라니 이런 막장스런 취약 국가를 봤나. 드디어 이제는 학생들에게 두발자유를 ‘허용’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식의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에 경기도교육청이 발표한 학생인권조례 이야기다. 학생들에게 두발복장의 자유를 주는 것만으로 나라가 흔들린다니, 불안해서 이딴 나라 못 살겠다. 역시 이민을 가야 하나? -_-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발이야 익히 예상된 바이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놓고 조중동문(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이나 좋은학교만들기 경기학부모모임, 한국교원노동조합, 자유교원조합, 대한민국교원조합 같은 데들이 보여준 반응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 교육감의 ‘행복한 학교’ 운운은 교육 황폐화의 둔사(遁辭)”(문화일보 사설) “운동권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해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을 모두 운동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일부 학부모 단체들의 기자회견 내용)등을 비롯하여, 자문위 구성에 대해 좌편향 색깔론을 제기하는 동아일보 등등. 이런 말들 속에서는 현재의 학생인권의 현실과 교육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 있는 논의나 우려는 보이지 않고 막연한 색깔론 및 음모론과 ‘자유’, ‘다양성’, ‘인권’에 대한 두려움만이 난무한다. 그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무책임한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무책임하고 별 근거 없는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와 좌익의 음모라고?

사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이야기가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획책”이라는 투의 음모론이다. 전교조가 그렇게까지 학생인권에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었다면, 참 나를 비롯해서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장담컨대, 그렇게 전교조의 음모랍시고 들이대는 ‘집회의 자유 보장’에 대해서도 전교조 조합원들 중에 좀 떨떠름해하는 사람들이다수일 것이다. 학생들의 학교운영 참여나 학생회 활성화에 대해 반대하는 전교조 조합원들은 많지 않겠으나, 집회시위의 자유에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다. 두발복장자유나 체벌금지 등 다른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다. 전교조가 일부지도부나 간부의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교조 조합원들 다수가 공감하는 성의 있고 실질성 있는 활동으로서 체벌금지나 두발복장자유를 외친 적은 별로 없다. 일단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를 대체로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얼마만큼 그 내부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음모가 아니라 학생인권 보장을 열망하는 많은 학생들과 인권활동가들, 개념 있는 학자들의 요구와 견해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인권의 기준들을 학교에 적용해놓은 것뿐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과정에서는 연구팀이 많은 국제기준이나 외국 사례들, 헌법이나 국가인권위 결정 등을 분석하고 면접조사, 설문조사 등을 통해 예시안을 제출했으며, 발표된 초안은 이를 기초로 많은 인권전문가나 교육현장의 교육자들이 참여하여 합의한 내용이다. 이러한 근거들 위에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면서 자기들은 정작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막연한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보수적인 편견과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만 가득하니, 이 얼마나 개념 없는가?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나 좌익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하승수 씨가 오마이뉴스에 썼듯이) “유엔도 좌파라고 우길텐가?” 학생들의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나 참여권은 UN 아동권리협약에 아예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다. 오히려 현재 발표된 학생인권조례초안에서 집회의 자유를 학교장이 제한할 수 있게 명시해놓은 것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이다.(이 부분은 옥외집회의 경우 그냥집시법에 따라 경찰에게 신고하여 하게 하면 될 텐데, 현재 한국 경찰들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금지하는 쪽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나온 합의점으로 보인다.) 또한 체벌금지나 인권에 부합하도록 학칙을 개정할 것 등은 UN 아동권리위원회 등이 한국 정부에 매번 권고해온 사안이다. 이런 내용들을 놓고 전교조의 음모라느니 좌익의 망국이라느니 설레발치는 것은 “우리우익은 인권 개념도 없고 국제 감각도 없습니다.”라고 자폭하는 꼴이다. 만약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세력 중에 정치적 성향이좌파인 사람들과 단체들이 많다면, 그건 한국에서는 좌파들이 인권감수성이 더 뛰어나고 국제 감각이 더 훌륭한 탓일 것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제조건이자 목표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교육에 해가 된다는 주장도, 교사들의 교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해괴하기 그지없다. 학교는 본래 쩌는 입시 공부를 하는 입시 학원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는 곳이다. 교육기본법을 봐도 그렇고,UN아동권리협약을 봐도 교육의 목표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으며, 교육의 방식이나 학교의 운영, 규율도 학생의 인권을 존중해야한다고 되어 있다.(UN아동권리협약 제28조, 29조) 이러한 가치들을 도외시해가면서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이야기는 학교의 본래 목적을 배반하는 일종의 ‘패륜적’ 드립인데, 대놓고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므로 강제성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꼴을 보니 이게 얼마나 무개념한 발언인지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불합리한 교칙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독재정권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조건적 준법, 부당한 규칙이라도 닥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능력이다. 인권을 개무시하고 학생들을 개고생 시키는 잘못된 규칙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권을 지키며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함께 만든 규칙을 함께 지키는 것을 배우게 해야 제대로 된 인권교육이요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책임감 없는 사람을 만들 것이라는 말도 비논리적이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해놓은 대로 말하는 대로 따르는 노예를 만드는 일이다. 자유가 없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요, 진정한 책임을 교육할 수 없다. 자기 머리카락이나 옷 입는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얼마나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자유가 인권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 보장은 교사들의 권리에도 친화적이다. 학생들의 두발복장규제 등 교육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면서 과중하고 불합리한 생활지도 업무에 노출되었던 교사들의 노동조건이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명시하고 있는 학교의교육환경 개선 등은 동시에 교사들의 노동환경 또한 개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을 보장하며 필요최소한의 규제만을 가지고 운영되는 학교가 교육에 더 효율적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교권조례도 같이 만들라고 하는 교사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지지한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항하고 균형을 맞추는 의미에서의 교권조례가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함께 더잘 학생들의 인권과 교사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례로서 교권조례는 바람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학생들을 교사들의 원수보듯이 하고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하는 걸로 파악하는 인식은 교권이 보장되지 않고 학생인권이 무시당하는 학교 현실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이다.

다양성과 자율,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좀 더 교육다운 교육을 만들어가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 과정에서 실현되어야 할 조건이자 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가장 교육적인 것이 가장 인권적인 것이다. 경기도지역 학교의 안습적인 학생인권 상황(내가 학생들로부터 들은 체벌 때문에 뼈가 부러져서 입원한 이야기나, 두발규제 과정에서의 강제이발 사례, 복장규제 과정에서의 변태스런 규제 등등을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을 굳이 하나하나 말하면서 독자들의 그로테스크한 취미를 만족시키지 않더라도, 200대 체벌이 언론을 타지 않더라도(200대를 때리든 1대를 때리든 체벌은 폭력이다. 폭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체벌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을 위해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두발자유 보장으로 망하는 빈약하고 괴상한 사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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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김태정(학교자치실현 교원평가저지 범국민대책위 준비모임)

1. 들어가며

교원평가 전면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교원평가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갑자기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교원평가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시도되어졌던 것으로 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의 연장선 속에서 배치되어 왔다. 그리고 교원평가 실시라는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 그리고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때문에 전교조는 줄곧 교원평가 법제화 시도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13일 전교조 위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원평가를 제한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였다. 경향신문 11월 19일자에 따르면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이종걸 위원장(민주당)이 교원평가제의 법제화를 위해 제안한 논의 구조인 6자협의체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으며, “협의체에 들어가서 무조건 전교조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겠다”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의 의사를 어떤 식으로 평가에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반하는 위원장 혹은 집행부의 독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협의체 참여과정의 나타난 절차적 문제에 있지 않다. 사태의 심각성은 교원평가가 가져올 폐해가 결코 교사에게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래에서 검토하겠지만 교원평가는 교육주체 전체에게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며 나아가 교육자체를 황폐화 시키고 교육의 공공성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교원평가는 교사들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른바 개혁성향이라고 불리는 언론조차 교원평가가 마치 전체 학부모들의 요구인 것처럼 왜곡하고, 심지어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전교조내 강경파의 반발’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번 토론회를 매개로 교원평가의 문제점을 다시 확인하고,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제 교육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향후 교육주체들의 공동의 실천을 조직하고자 한다.

2. 교원평가의 현황

이른바 교원 그중에서도 교사에 대한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이다. 우선 근무평가라는 이름으로 관리자에 의한 교사 평가는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에는 교육공무원승진규정을 개정하여, 다면평가(동료교사)를 도입함과 동시에 승진시 반영 연수도 승진전의 10년간의 근무평가를 반영하도록 변경하였다.

다음 성과급 평가가 진행 중이다. 성과급제는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교사들의 반발로 차등 폭이 적었으나 이후 확대되어 2006년부터는 성과급 비중 및 차등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성과급은 업무(실적)에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그 항목은 수업지도, 생활지도, 담당업무, 전문성개발 등으로 근무평가의 평가요소와 대동소이하다. 최근에는 단위학교별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원평가 부분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진행 중이다. 2006년 67개 학교에서 시범실시된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500여개로, 2009년 1761개로 그리고 2009년 9월 이후 3천여 개로 확대일로에 있다. 이는 전국의 학교가 1만 2천여 개 정도임을 고려할 때 실제로 전면실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9월 2일 교과부가 발표한 안에 따르면 평가 종류는 동료교원에 의한 평가, 학생에 의한 만족도평가, 학부모의 의한 만족도평가로 나누어지는데, 평가영역은 크게 수업지도와 학생지도로 구분된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원을 평가는 이 시스템은 교원평가를 실시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취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평가결과 기준 미달 교사로 판명될 경우 학교장이 지역교육청 시도교육청에 의뢰하여 장기집중연수에 투입된다. 그 비율은 아직 미발표이지만 대략 연간 400명 정도로 교원의 0.1% 수준으로 예상된다. 한편 2009년 10월 6일에 발표된 한국교육개발원 정책연구보고서에 근거하면 교원평가를 인사와 승진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출된 바 있다.

3. 교원평가! 무엇이 문제인가?

(1) 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부를 포함하여 교원평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의 주된 논리는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즉, 평가를 통해서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이 지속적으로 담보되기 위해서는 평가가 아닌 다른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우선 교원의 양성 임용체계가 보다 전문화되고 이에 대한 국가적인 책무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이다. 여전히 교원은 부족한데도 교원정원을 동결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교사대를 통폐합하려는가 하면 단기교사 자격증 부여방안을 추진하는 등 정부가 파행을 조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 교육과정에 편성에 대한 교사의 권한강화, 연구활동을 위한 지원, 안식년 도입 등 교사의 능력개발을 위한 지원 등 제도적인 보장을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저출산으로 취학아동수가 과거보다 줄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법정정원 확보나 표준수업시수 제정 그리고 교육시설을 포함한 교육환경은 열악하다. 또한 급식비를 포함한 여전히 교육비용의 민간부담은 줄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명박정부는 교육예산을 축소시키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입시경쟁체제는 초중등교육을 교육환경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교원평가의 진짜 목적은?

역대정부가 앞에서 언급한 교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외면하고 유독 교원평가만을 강행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몇 가지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총자본인 국가차원에서 노동력 비용절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며, 특히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최소화(규제완화로 표현)와 공공부문의 민영화(사유화) 그리고 작은 정부를 표방한다. 이때 작은 정부는 사회공적영역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축소 혹은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기업노동자들과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을 포함한다.

그동안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면서 역대정권은 공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강행하였으며,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의 과정에서 공무원노조가 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며, 교원의 경우는 전교조가 존재하였기에 상대적으로 그 속도가 늦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원평가는 결과적으로 이른바 기준미달교사를 퇴출하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며, 이는 비용의 절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공무원퇴출의 핵심이 비용절감 논리이었고, 교원평가 역시 공무원 구조조정의 본질(인건비 축소와 노동 통제)과 다르지 않다. 총자본으로 기능하는 국가 재정 운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원 인건비는 학교교육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2008년 교육재정 대비 65.5%)하는 투입 요소이며, 교원노동 유연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큰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4대강정비사업과 부자감세정책으로 인한 예산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교육, 복지, 중소기업, 지역현안사업 등을 삭감하는 것과 연동되며, 결국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교육이라는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교원에 대한 일상적인 노동통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원은 이중적인 지위를 갖는다. 이는 학교의 성격에서도 기인한다. 학교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체제순응적인 노동자를 양성하는 지배계급의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지배 권력의 말단에 서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과연 학교가 그렇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일 방향으로만 기능하는가? 교사를 비롯한 교육노동자와 수업노동을 수행하는 학생들 또한 수동적인 존재이기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되는 과정이 살아있는 인간을 소외시키며 이로 인해 노동자가 필연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듯이, 교육의 상품화의 과정 또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과정으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결국 학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즉,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교육과 학교를 상품화,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소수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계비(임금)의 상당부분을 교육비용으로 반강제적으로 지출당해야 하는 노동자 민중과의 이해가 충돌하게 된다. 교육노동이 산 노동이 아니라 죽은 노동으로 변질되고 스스로의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교육노동자들의 저항과 이를 억누르고 권력과 자본의 시종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노동통제가 충돌하게 된다. 또 노동내부에서는 지배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거나 타협하려는 경향과 그렇지 않는 경향이 충돌한다.

한편 교육과정에서도 이해가 대립한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교육과정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도록 통제하려 한다. 최근 이명박정부가 교과서개정을 진행하는 것과 미래형 교과과정이라는 것을 도입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즉 교육내용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입시위주 교육과정을 통해 악무한적인 경쟁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개개인에게 경쟁논리를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결국 미래세대의 구성원들에게 교육노동자들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교원이 체제순응적인 존재로 일상적으로 통제되는가 아닌가는 지배계급에게는 사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바로 여기서 교원평가의 문제가 단지 교사들의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국민국가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원평가가 이러한 지배계급의 노동통제 수단이 될 것임은 이미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그런 공직자는 자격 없다”고 발언 한 것이나, 최근 국가 및 지방 공무원의 복무규정 및 보수규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노동조합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를 수 없으며,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입장 표명도 못하게 하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원평가를 통해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잘못된 정부정책에 대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교사들을 퇴출 즉 분리 제거하고, 살아남은 교원들은 일상적인 통제 틀 즉 교원평가 시스템으로 묶어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사간의 경쟁은 다시 입시경쟁하에서 학생 간 경쟁의 심화로 확대되면서 종국에는 악무한적 경쟁논리가 인간내면을 지배하고, 결국 자본이 원하는 마치 좀비와도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셋째, 교육주체들에 대한 분할지배이다. 모든 지배계급의 지배전술 중의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분할하고 서로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통제의 경우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로, 내국인노동자와과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정규직와 비정규직으로 끊임없이 분할하고 단결을 거세하려 한다. 또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출신지역에 의한 분할 대립구도는 종종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지배는 교육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의 본질이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의 과정이자,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사회적인 보편적인 권리이며, 교원(교사, 비교사 등 교육노동자), 학생, 학부모 등 제 교육주체들의 협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바로 교육시장화의 논리이다. 이에 의하면 교육은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물건처럼 사고파는 상품이다. 상품이기 때문에 공급자와 구매자가 존재하고, 이때 구매자는 학생과 학부모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권리를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는 하나의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시스템 즉 학벌이다. 이는 대학과 학문의 위계서열화로 재구조화되어 왔으며, 학벌사회로의 진입장치인 입시제도는 그 자체로 이윤을 생산하는 기제로 최근에는 대학은 물론 초중고 학교마저도 노골적인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당연히 학벌사회의 상위로 진입하려는 욕망이 대중을 지배하면서 수요가 점증하고 반면 진입의 벽은 높아 그 비용이 상승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입의 벽이 높다는 것은 교육이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계급재생산의 기제로 다시 말해 부자에게는 부의 대물림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며, 그 자체로 불평등을 재구조화는 기제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더욱 문제는 그에 대한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사회적으로 입시경쟁의 심화, 폭등하는 사교육비로 나타나고 있으며, 교육문제의 사회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차단당하고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학교교육의 실패로 그리고 교사의 문제로 화살이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육의 구조적인 병폐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성찰은 사라지고 오직 즉자적인 분노만이 교사에게 집중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유독 교사에게 화살이 겨누어지는가? 이는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과 지위 때문이다. 동시에 그에 근거한 학교 안에서의 교사와 비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간의 비대칭적 심지어는 위계적인 질서에서 비롯된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교라는 공간 안의 비교사노동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업무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생들은 훈육과 통제의 대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학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맡긴 심정으로 늘 교사의 권력에 주눅 들게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체제는 이러한 비대칭적이며 위계적인 질서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구조 하에서 잊을만하면 툭툭 터져 나오는 이른바 ‘부적격교사’의 문제는 입시경쟁체제와 맞물리면서 공교육실패의 책임이 마치 교사에게 있는 것처럼 교사집단에 대한 마녀사냥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평가로 이른바 부적격교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분명하다. 전교조교사가 비전교조교사를 단순 비교해보자. 누가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인격적인 모욕과 체벌을 가할 것인가? 이른바 촌지 거부운동을 했던 집단이 누구인가? 교원평가로는 설사 부적격교사라 할지라도 잘못된 정부정책에 침묵 혹은 동조하고 교장에게 아부하며 시험풀이 기술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자들이라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후 교단을 장악할 것이다.

4. 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1) 교원평가저지투쟁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원평가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여전히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는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전술하였듯이 가장 큰 어려움의 교사의 사회적 지위와 학교 안에서의 위계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도 상존한다. 예를 들어 같은 노동조합들인데 전교조의 교원평가 반대투쟁에 대해 소극적이다. 왜 노동자들은 같은 노동자인 교사의 구조조정에 무관심할까? 또 이 투쟁이 단지 교사만의 투쟁이 아니라면 기간 연대운동에 어떤 한계점이 있었을까? 이는 결국 크게 다음 두 가지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노동자계급의 이중성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결코 계급적인 태도로 모든 사물을 대하지 못한다. 이는 상당부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선택이기도 하다. 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가?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그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출혈과도 같은 사교육비 지출이 자녀의 고학력과 안정된 직장을 즉각적으로 보장하지 않음에도, 현재의 삶의 처지를 개선하는 유력한 매개로 학력(학벌)이 기능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력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가들처럼 특별히 물려줄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민중들이 보기에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유독 교육문제에서 만큼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교육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 수단이자 일상적인 노동통제 기제인 교원평가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면서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대중들의 이러한 소박한 바람과 엄청난 사교육비 지출에도 불과하고 이미 트랙은 처음부터 나뉘어져있다는데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며,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비 지불능력이 곧 자녀의 성적과 갈 수 있는 대학을 결정하는 세상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민중들은 소수의 특권계층의 부의 대물림 도구가 된 대학서열체제하에서 들러리를 서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확인되는 방식이 개별적인 차원에 그친다면 그것은 개별(가족)의 낙담과 이른바 상위권대학 진출에 실패한 개인의 패배의식의 내면화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교육소비자담론으로 끊임없이 정당화되어 왔고 심지어는 계급고착화가 내면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교육은 결국 소수의 부의 대물림 도구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 자체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적인 인식에 도달한다면 ‘낙담은 분노로 분노는 다시 폭발적인 저항’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다음으로, 연대운동에 대한 왜곡된 관점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왜 연대를 해야 하는가? 일부에서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비해 노동조합에게 힘이 없으니까 보다 많은 우군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놓으면 만일 힘이 있으면 굳이 연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상 연대운동판에서 이른바 힘이 있는 덩치 큰 단체들(대체로 노동조합)의 패권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왜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제 사회운동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답을 해야 한다.

문제는 민주노조라고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경제적인 조직 즉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잔존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는 연대활동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즉 연대를 조합적인 이해를 위한 단순한 전술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으로 연대를 이해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노동조합이 단지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직인가? 노동조합을 이렇게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조직으로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가계급의 의도이고 이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자들이 바로 노동조합 관료모리배들 아니던가?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사회운동진영과 연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당장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비록 자본가들과 그 주구들은 노동조합을 노동력판매가격과 조건을 위한 협상도구로 제한하려 하지만, 노동조합의 역할은 결코 그렇게 가두어질 수 없다.

노동조합의 역사적인 위상은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힘’ 그 자체이다. 때문에 노동조합은 (개별)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에만 관심을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은 물론이고 수백만 피압박민중의 전반적인 해방을 최종 목표로 삼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칭 민주노조의 민주투사 혹은 간부라는 자들은 이러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는 입으로만 연대를 외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상태와 수준을 핑계 댄다. 즉 조합원들이 정치의식이 열악하고 보수화되었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는 식이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원칙 즉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계급성을 망가뜨리고 있는 주범이 아닌가?

되물어보자! 과연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가? 작업장이라는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만을 고민하는데 어찌 정치의식이 상승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제대로 된 활동가라면 조합원들의 정치적 무관심 탓으로만 돌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엇보다 그 스스로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실천하는지, 사회 정치문제에 관해 얼마만큼 생생한 폭로를 했는지, 그리고 조합원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 아닌가?

조합원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는 것! 바로 여기에 연대의 진정한 이유가 있다. 정치의식을 높이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모든 계급의 상호관계에 관하여 명료한 이해를 가지게 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는 노동조합이 사회의 주요한 문제와 쟁점들에 대해 개입하고,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연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교원평가가 교사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이를 널리 알려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교원평가는 단지 교사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씨가 말하는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교사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사라지고 남으면 학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들이 교원평가를 교사들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외면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일까? 가장 일차적인 피해자는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교육권의 박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원평가저지는 교사들만의 투쟁이 될 수 없음을 알려내자. 교원평가저지가 교육주체들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요구로 확대될 수 있도록 널리 알려내자! 힘들다고 바늘허리에 맬 수 없지 않은가? 교원평가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교원평가가 현재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왜곡 시킬 것임을 선전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당장 무정형의 대중들을 교원평가반대전선으로 이끌 수 없다면, 조직되어 있는 대중들을 먼저 만나자! “전교조 교사들이 짤릴 것 같으니 도와 달라”는 따위의 연대가 아니라, 교육시장화를 막아내기 위해서 교육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함께 싸우자고 당당하게 제안하자! 교원평가가 단지 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주체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보편적 권리인 교육권의 문제임을 선언하고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자! 나아가 한국사회 교육문제의 본질이 어디에서 기원하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다음, 교육주체들부터 단결하고 공동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이명박정부는 평가를 통한 위계서열화와 이를 통해 교육시장화 학교시장화를 획책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일제고사로, 비교사노동자들에게는 업무평가로 그리고 교사들은 교원평가라는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원이라도 할 때는 광의로는 교사와 비교사노동자를 모두 망라하는 것으로 비교사노동자의 구조조정저지 투쟁과 교사노동자의 교원평가저지 투쟁에 상호간에 연대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다수 교사들의 정서와 조건에서 이러한 연대가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의 모범을 확대하고 환류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는 비단 초중등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분야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공동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예로 현재의 교사들이 구조조정 당하는 것을 외면하고 예비교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미래형교육과정이 통폐합 될 해당 교과 교사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관련 대학과 학과의 문제로 연동되듯이, 초중등 영역의 학교시장화는 이미 진행되어온 대학부문 등의 시장화를 더욱 극단으로 내몰 것이다. 또 굳이 이런 논리적 연관을 따지지 않더라도 교육자체가 사회적 문제라도 했을 때 과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 하면서 연대를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교원평가를 찬성하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교육문제의 본질, 경쟁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교원평가에 찬성하거나 혹은 교원평가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권력관계에서 근거한다. 그리고 이 권력관계가 근본적으로 혁파되지 않는 한 교사와 학생간의 비적대적인 모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 개인이 학생들에게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이러한 권력관계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운동에 노동조합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재국면에서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 실현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실현은 현재의 학교 안에서의 교육주체들 특히 학생과 학부모들이 겪고 있는 비대칭적 위계적 질서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교조는 2006년에 학교자치(위원회)와 교장선출보직제 등을 대안으로 제출한 바 있으며, 법제화 이전의 실천방안으로 학부모 의견개진권 실질화와 학급 학부모-교사 협의회 설치, 학생-교사 협의회와 학생회 실질화, 교과/학년협의회 활성화 등이 제시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비록 학교자치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모든 평가의 폐지를! 교육주체의 소통을 가로막는 그리하여 학교자치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제도 안과 제도 밖에서의 실험들이 소통되고 환류되어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강고해 보이기만 한 지배질서의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교원평가저지 투쟁! 과연 소수의 단말마적 비명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교육주체의 단결과 연대로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대장정이 될 것인가? 그 미래는 오직 우리 자신의 실천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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