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조항, 그리고 정치적 권리의 행방불명 -


공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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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보신각에서 '쥐를 잡는 쥐덫을 놓는 1인들'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있다.



정치의 실종


요즘에 청소년인권에 관한 따끈따끈한 신간,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를 읽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교육과 연구 등을 해오던 김민아 씨가 지은 책인데, 이 책의 서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인권교육을 다니다보면) “문제의 답을 고르듯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라고 묻는 청소년도 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쉽게 맞닥뜨릴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자신들이 처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고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인권침해 맞죠?” 그리고 마치 시험 답 맞춰보듯이 헌법 몇 조, 유엔아동권리협약 몇 조를 인용한다. 그 다음은? 인권침해 맞으니까 논리를 잘 갖춰서 얘기하겠다고 하거나 신고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보는 것은 청소년인권 문제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운동이나 저항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겪은 경험에 대해서 ‘인권’이라는 규범이 ‘정답’을 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잘못 채점된 시험 답안지에 대해 항의하러 가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고’를 하거나 하소연을 올리곤 하는 정도?

이때, 인권은 지금 여기에는 없는 권리를 사회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실현시키는 역사적인 과정과 그 결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인권은 이미 존재하는 교과서적 정답이자 도덕률 정도로만 이해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이 질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 그러니까,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2009년부터 만들어져온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2010년 경기도 교육위원회에 발의되었다. 그러나 발의된 안은 처음에 공개되었던 초안과 달리 집회의 자유에 관련된 조항이 삭제되고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세계관․인생관 또는 가치적․윤리적 판단 등 양심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대체된 안이었다. 결국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통과는 무산되었지만, 9-10월 즈음에 경기도의회에 재상정될 안 또한 그 내용은 같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청으로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한 최초의 사례인 경기도교육청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에 관한 부분에서 한 발 후퇴한 안을 내놓음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이 두 부분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슈가 될 듯싶다.

물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에서 집회의 자유에 관한 조항과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빠졌다고 해서 청소년들에게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초안에는 한 번 들어갔던 조항이 최종 발의안에서는 빠진 것을 학생인권에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할 사람들은 널려 있다. 최소한 교육청이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의지가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언론들에서는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안 발표를 “학생들 교내에서 집회 못한다”라는 식으로 표제를 뽑아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욕을 먹는 것일까? 그리고 왜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와 혁신학교로 일각에서 추앙받으시는 김상곤 교육감 님하도 집회의 자유 조항과 사상의 자유 조항을 부담스러워 하며 뺀 것일까? 따져보면 저 장대한 비극의 한국사 100여년을 거슬러 가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한국 사회에서 ‘정치’나 ‘사상’이라는 말에 관련된 프레임을 분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격적인 분석은 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하라고 하고, 나는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라고 말하겠다. (이 글의 컨셉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권 중에서도 정치적 권리의 대표 주자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이다.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 전반을 부정하는 셈이기도 하다. 사실 교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민주노동당에 후원금 좀 냈다고 교사들을 다 짜르겠다고 하는 꼴을 보면 분명 한국의 학교는 정치를 싫어한다. 요컨대, 입시교육은 정치와 정치적 권리, 특히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싫어한다는 얘기다.



입시교육은 어떻게 정치를 억압하는가


입시교육의 특징은 철저한 정답주의이다. 교육의 목적이 입시가 되어있는 이상, (그딴 걸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이 아니라 입시전형과 평가기준에 맞춘 답을 찾는 것이 주가 된다. 또한 입시교육은 개인주의적이다. 입시는 결국 개인의 능력주의와 출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의 이러한 특성들은 정치의 특성과는 여러모로 배치된다. 우선 정치는 상대적이다. 정치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가치의 재분배/조정이라고 정치를 정의하든, 배제된 사람들의 주체화라고 주장하든, 정치에서 정답을 찾기란 힘들다.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해관계들/이념들, 방법론들, 권력들이 있을 뿐이다. 정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는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를 단언하기 어렵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각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능력과 정세 등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교과서에 비추어볼 때 누구의 말이 옳으냐가 아니라, 누구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교과서나 해답지에 명확한 답이 있고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것이다.

또한 정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는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이 부각되는 때에도 사실은 그 개인에 얽힌 집단의 문제일 때가 많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김상곤 교육감의 정책도 김상곤 교육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조직화된 집단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소통, 공론장이 없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제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시키는 입시교육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문제’들이 정치에서는 다루어져야 한다. 입시교육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정치는 낯선 언어와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고, 정치적 언어와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순순히 입시교육에 순응하지 않기 십상이다.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 ‘반교육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그 말이 사람들에게도 왠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그림이 ‘입시교육’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어떤 올바른 것(정답)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학생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정답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장려한다니, 입시교육이 교육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반교육적으로 보이겠는가. 교육이 개인이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문제풀이 능력 등을 개발해서 입시나 취업에서 성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집회의 자유는 반교육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집회의 자유를 놓고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선동’에 휩쓸릴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또한 이런 경향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학생인권조례에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입시교육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눈에 띈다. 예컨대 학내 집회의 자유에 관해서 “학내 집회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장되는 것뿐이고 학교 운영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된다면 학내집회를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학교가 정치의 장이 될 거라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같은 말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결국 집회를 또 하나의 정답 정도로 만드는 것 아닐까?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을 때 학생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집회를 택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정당화되는 집회의 목적과 수단을 한정짓고, 집회를 온건하고 이성적이고 다소 비정치적인 무언가로 만드는 것 자체가 말이다.

사상의 자유를 단지 반성문을 강요하는 등 사상․양심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들을 막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뭐 물론 반성문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건 중요한 인권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만 사상의 자유를 얘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의 의미를, 학생들도 사람이니까,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내면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고 학교가 정치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좀 불만이다.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소극적으로 어떻게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까 하는 선에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에 대해 입시교육의 틀을 깨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전교조 조합원들 중 몇 명이 정당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인권단체 안에서는 이 사건을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청소년들이 집단 정당 가입을 발표해버릴까?” 하는 논의를 했었다. (전교조 자체가 별로 이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징계 절차나 양형이나 기준의 문제 정도로만 다투려는 것 같아서 접기는 했지만…) 이렇게 지금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교육을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교육이 정치의 장이고 사회적인 공론의 장이어야 하며 정답만 강요하고 개인주의를 강화시키는 입시교육을 부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미 그 자체가 정치적인 ‘입시교육’이, 자신은 비정치적인 양 탈을 쓰고 정치를 압살하는 이 시대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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