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가난에 대한 두려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박고형준


1.jpg 

▲ 법정스님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저서를 읽으려는 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광화문 교보문고에 대표산문집 '무소유'의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무소유에 대한 소유욕을 보며


지난 3월, 법정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길상사에는 그를 위한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유의 욕망이 넘실대는 시대였기에 그만큼 무소유의 메시지가 힘을 얻었을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스님이 떠나신 후 무소유를 절판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앞다퉈 책을 소유하려는 진풍경을 벌였고, ‘무소유’는 전자책으로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를 차지했다. 이 땅의 인간을 좀 더 이해하셨더라면 법정스님도 책을 절판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법하다. 소유의 욕망은 존재의 욕망만큼이나 뿌리가 깊어, 무소유의 정신조차도 소유하게 만든다.


바로 소유가 문제


이처럼 대개 사람들은 돈을 소비해 물건을 소유하거나, 돈을 축적해 불로소득으로 부를 늘리려 노력한다. 상위 2%에 속하는 자들이 막강한 땅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여전히 경쟁과 착취의 틀 안에서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나는 인간의 ‘욕망’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한가? 얼마 전 김석순 이모(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부회장)가 잠비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열대지방 현지인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적어도 일정 정도 돈과 음식이 생기면 일을 중단하고 가족, 이웃들과 그것을 나눈다.’는 자급자족의 현실상을 그려주었다. 소유를 통해 행복할 수 있지만, 소유하지 않음을 통해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고 열대지방은 미성숙한 비자본주의 사회다. 한 때 한국도 자급자족 했던 사회다.’라며 일축할 수 있지만, 나는 소유의 문제를 꼭 자본주의나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토대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자립생활의 공동체가 대안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국가의 많은 제도는 기회의 평등보다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교육이나 지식조차 상품으로 변했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당한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산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다. 이러한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본다. 자급자립의 공동체, 자본 없이도 나름의 재능과 관심을 꽃 피우며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 정신과 인간됨으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 각자 제 재능을 살려가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나의 삶은 이제…


내가 받는 학벌없는사회 활동비는 한 달,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한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20만원, 통신비가 5만원. 그러니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삶을 충당했지만, 현재 내 자산은 카드빚으로 쌓여있다. 요즘같이 힘들 때가 없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욕망을 없애 준다. 내 처지를 아는지, 사람들은 함께 끼니를 나누고 음악을 가르쳐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건넨다. 배고픈 내게 항상 무언가 던져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의 문제는 결국 돈과 맺는 어떤 관계이기에 불편함이 있고, 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반복해야만 한다. 결국 자발적 가난이든 자급자족이든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긴 힘들 듯 하다. 때로,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어 다른 사람의 짐조차 들어줄 수 없는 삶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삶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 주류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실천하는 일이다. 이제 내 자신을 경계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