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애전선 안녕하신가?


조이소현 (전,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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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스펙과 학벌있는 졸업장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


연애. 생각만 해도 달콤한 그 이름. 아무도 자신과 그남/그녀 밖에 모를 것 같은 그 은밀한 이름.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선팅지'의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선팅지를 칠한 유리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선팅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검은 유리창'으로만 보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팅지 밖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안에 있다. 이 말은, 연애라는 '사적'인 행위들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사회적, 정치적'인 것들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달콤한 키스 혹은 섹스 포지션은 알고 보면 사회화된 것이고, 그 사회화된 것 속에는 무척이나 '잘못'인식되어 행해지는 것들이 많다.

예로부터 페미니즘에서의 고전적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으니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일터. 그런데 이 문장은 한국 권벌사회를 바라보는 한 시선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학벌'과 '여성주의'는 '연애'라는 장 속에서 마주친다.


예전만해도 서울대 법대 남학생과 이화여대 가정교육학과 여학생의 미팅은 아마도 대학생들의 만남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동경의 대상, 완벽한 모델로서 자리매김 해 왔다. 서울대 법대 여학생과 서강대 가정교육학과 남학생과의 만남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힘의 균형'을 잘 맞추려면 남성이 좀더 좋은 학벌/권벌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둘의 만남은 '선남선녀'의 만남으로 미화되고, 결국엔 결혼으로 골인하여, 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와 비슷한 예가 티비 프로그램 '장미의 전쟁'이다. 이것은 ‘남성 연예인+일반인 여성, 여성 연예인+일반인 남성’의 커플을 만들어 짝지어 주는 미팅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굉장한 일이 생길 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MC가 오늘의 로맨스를 대충 읊는다. 그리고선 죽 늘어선 양쪽의 청춘 남녀들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만의 신선함 혹은 독창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멋진 연예인들과 일반인의 로맨스‘


소위 스타라 불리우는 연예인들의 굉장한 외모에 기대어 여성들에게는 백마 탄 ‘왕자’를, 남성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같은 그녀들을 현실로 끌어내어 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일반인 남성이 연예인 여성과 미팅을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일반인이란 기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일반인 기준은 더 모호해졌다. 그 방송에서 일반인이란 ‘비연예인’ 즉 방송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반인 여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화려한 방송 경력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앞으로 방송계에서 일 할 사람이거나 관련과의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일반인 남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수도권 대학과 상위권 대학 출신이 반이 넘게 있었다. 일반인이라는 기준이 여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방 남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인 여성이라고 해도 학력이나 개인이 가진 능력보다는 보통 여성 연예인만큼의 외모가 중요하고 전부인 듯했다. 그렇지만 일반인 남성이 상대방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대방의 눈길을 이끌만한 외모도 필요해보였지만 학벌이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벌 있는 남성과 미모 출중한 여성의 만남은 어색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학벌 있는 여성과 미모만 있는 남성의 조합에서는 상당히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많이 묻어난다.


어디 이것이 텔레비젼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대학에 가면 학기 초 3월에 가장 많이 나붙는 홍보 자보가 '**고 / @@여고 조이트 동문회'이다. 대부분의 이 '조인트' 동문회는 지역에 있는 '유명'고등학교 와 함께 하루 만나서 놀자는 것이다. 하루 만나서 놀자고 말하는 '조인트 동문회'는 학벌을 조장하고, 이와 더불어 이성애적인 만남을 통해 학벌을 공고히 하자는 데에 있다.


연애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하는 이 장 속에서도 학벌은 보이게/보이지 않게 공고히 작용하고 있다. 학벌=능력으로 인식되는 이 사회 속에서, 주변 남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 애인이 ‘여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예쁘냐?’이다. 반면 주변 여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애인이 ‘남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물어보는 질문은 ‘어디 학교 다니는데?’이다. 이 속에서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애인으로 뒀을 경우, 대답을 쭈뼛쭈뼛하게 되고, 애인의 性이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이 아닐 경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니, ‘나 애인생겼어요~’라는 말조차가 그녀/그남들에게는 봉쇄되어있다. 물론 이 대답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답’은 ‘서울대 생이야’일 것이다. ‘응 그냥 대학다녀’라고 말하겠지. 왜 당신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렇지 않은 것같이 자연스러운 것은 알고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억압‘하는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학벌도, 이성애중심주의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연애는 얼마만큼 이 속에서 자유로운가? 얼마나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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