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킥 오프- ‘희망’이란 신기루 or 이런게 전쟁이야.


광주인권운동센터 활동가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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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킥오프> 중에서


종종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곤 한다. 더러 ‘영화같은 현실’을 목도하지만, 영화에서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속살들은 얼마나 많은가.


포스터만 보고 속을 뻔 했다. 잿빛 포스터 안에 ‘희망적인’ 스멜이 살짝 풍겨나오고 있었다. 월드컵 과열의 부작용으로 축구를 멀리하는 편인데, <킥오프>는 외려 관심이 갔다. 직업병(?) 일수도 있겠고, 쉬 접할 수 없는 이라크 영화라는 것도 마음을 움직였을 게다. 사실 축구보다야 이라크 현실을 어떻게 담아냈을까가 주요 관심사였다. 6월에 개봉했던 <맨발의 꿈>을 챙겨봤던 것도 순전히 동티모르가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화라니! 영화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축구에 빠진 아이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보는 건 즐거웠다.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축구의 마력이라니. <맨발의 꿈>은 실화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나름 맛깔스럽게 버무려냈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들이 너무 전형적이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아이들의 미소에 빠져 허우적 댔더랬다. 실제로 현지에 사는 유소년축구단 맴버들 이라고 하니 그 생동감을 누가 따라왔을까 싶다. 연기경험도 전무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연기는 일상에서 길어올린 삶의 빛깔이 뚝뚝 묻어난다.


나는 말랑말랑한 영화도 즐겨보지만, 현실의 생채기를 보여주는 쓰디쓴 질감의 영화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킥 오프>는 <맨발의 꿈>과 같은 소재를 차용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질감의 영화다.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스포츠와 아이들을 다룬 영화의 결말이 이리도 처연할 수 있다니, 제대로 킥을 당한 느낌이다.


<킥 오프>는 폭탄 테러가 일상이 돼버린 도시 키르쿠크의 파손된 스타디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쿠르드족, 아랍인, 터키인, 아시리아인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이야기다. 전쟁과 가난에 얼룩진 일상의 무게가 버겁지만, 그곳에도 사랑의 설레임이 있고, 희망이 꿈틀거린다. 가난과 폭격의 두려움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삼삼오오 축구를 하거나,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장면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선 나름 호사스러운 일이다. 너덜너덜한 스크린에, 화면도 지지직 거리지만 오순도순 모여 화면에 집중하는 장면은 아릿한 감동을 준다. 영화는 부족간 축구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수’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스타디움 곳곳을 스케치하듯 담아낸다. 늘 스타디움 한켠에 염소를 대동하고 하릴없이 앉아있는 묘령의 청년, 황량한 운동장 여기저기 묶여있는 가축들, 그리고 스타디움을 터삼아 오고가는 사람들. <킥 오프>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변변한 배우나 화려한 특수효과, 시선을 끌 만한 에피소드 하나 없는 모호한 색감의 흑백화면이 이라크의 현실인 듯 서늘하게 다가온다.


<킥 오프>는 열악한 촬영조건에서 힘들게 완성된 영화다.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현장 여건 때문에 참여하려는 스탭은 거의 없고, 출연을 결심한 배우가 촬영 전에 포기하고 달아나기도 했단다. 게다가 촬영 도중 테러리스트들의 협박 전화까지 감내해야 했다니.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제작진이 겪은 비화야말로 영화를 뛰어넘는 이라크의 현실일게다.


감독은 축구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절망의 기운을 드리운다. 잠시 망각했던 현실을 지독하게 상기시킨다. 이게 이라크의 생생한 현실이라고. 애초에 축구공 하나가 감동을 선사한다는 꿈같은 결론을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뒤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다. 섣부른 희망으로 장식되지 않은 날것의 현실, 덕분에 영화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다. <킥 오프>는 전투씬 하나 없는 소박한(?) 영화지만 그 어느 전쟁영화보다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렇게 폐허의 땅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부지불식간에 ‘죽음’과 대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전쟁이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듯 하다.


전쟁영화들은 다양한 변주를 꾀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며 잠시도 숨돌릴 틈을 주지않는 블록버스터부터,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차갑게 응시하는 작가주의 영화까지. 전쟁영화는 대자본의 수혈을 받고 계속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총질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기 힘들어하면서도 전쟁영화를 ‘꼭’ 챙겨보는 이유는, 전쟁의 실상을, 다시는 전쟁이란 ‘괴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영화라는 매체는 양면적이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생각을 이식시키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을 주목하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몇년 전 개봉했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가 영국 TV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 영국 시민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블레어 총리는 관타나모 기지 폐쇄를 부시 행정부에 촉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영상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물론 영화 한편이 당장에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순 없겠지만, 날것의 영상을 통해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무감한 마음밭에 조그만 ‘파문’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 변화들이 모여 세상에 파열음을 낼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이라크에 주둔 중이었던 미군의 마지막 전투여단이 철수했다고 한다. 2003년 침공이후 7년 5개월 만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미군이 물러가더라도 개입을 안하는 것은 아니란다. 비군사 개입은 지속될 전망이다. 사실상의 ‘간접통치’에 들어가기 위한 수순이다. 오바마의 공약이었으니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당장은 철수해야겠지만, 아마 이라크에 대한 간섭은 영원히 지속될게다. 지구촌 곳곳이 여전히 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킥 오프>를 보고난 후 맘이 착잡해졌다.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이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조각난 삶을 재건하기 위해 힘을 쏟겠지만, 걸프전부터 지금까지 전쟁의 상흔이 깊게 베인 이라크에서 ‘희망’을 꿈꾼다는 건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게 아닐까.


<킥 오프>의 결말을 보며 잠시의 행복도 앗아가 버린 전쟁의 참혹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공기처럼 한데 뒤섞여 있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을 터. 겹겹이 드리워진 폭력의 세계를 올곧게 응시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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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연애전선 안녕하신가?


조이소현 (전,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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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스펙과 학벌있는 졸업장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


연애. 생각만 해도 달콤한 그 이름. 아무도 자신과 그남/그녀 밖에 모를 것 같은 그 은밀한 이름.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선팅지'의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선팅지를 칠한 유리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선팅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검은 유리창'으로만 보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팅지 밖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안에 있다. 이 말은, 연애라는 '사적'인 행위들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사회적, 정치적'인 것들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달콤한 키스 혹은 섹스 포지션은 알고 보면 사회화된 것이고, 그 사회화된 것 속에는 무척이나 '잘못'인식되어 행해지는 것들이 많다.

예로부터 페미니즘에서의 고전적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으니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일터. 그런데 이 문장은 한국 권벌사회를 바라보는 한 시선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학벌'과 '여성주의'는 '연애'라는 장 속에서 마주친다.


예전만해도 서울대 법대 남학생과 이화여대 가정교육학과 여학생의 미팅은 아마도 대학생들의 만남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동경의 대상, 완벽한 모델로서 자리매김 해 왔다. 서울대 법대 여학생과 서강대 가정교육학과 남학생과의 만남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힘의 균형'을 잘 맞추려면 남성이 좀더 좋은 학벌/권벌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둘의 만남은 '선남선녀'의 만남으로 미화되고, 결국엔 결혼으로 골인하여, 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와 비슷한 예가 티비 프로그램 '장미의 전쟁'이다. 이것은 ‘남성 연예인+일반인 여성, 여성 연예인+일반인 남성’의 커플을 만들어 짝지어 주는 미팅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굉장한 일이 생길 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MC가 오늘의 로맨스를 대충 읊는다. 그리고선 죽 늘어선 양쪽의 청춘 남녀들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만의 신선함 혹은 독창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멋진 연예인들과 일반인의 로맨스‘


소위 스타라 불리우는 연예인들의 굉장한 외모에 기대어 여성들에게는 백마 탄 ‘왕자’를, 남성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같은 그녀들을 현실로 끌어내어 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일반인 남성이 연예인 여성과 미팅을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일반인이란 기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일반인 기준은 더 모호해졌다. 그 방송에서 일반인이란 ‘비연예인’ 즉 방송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반인 여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화려한 방송 경력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앞으로 방송계에서 일 할 사람이거나 관련과의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일반인 남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수도권 대학과 상위권 대학 출신이 반이 넘게 있었다. 일반인이라는 기준이 여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방 남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인 여성이라고 해도 학력이나 개인이 가진 능력보다는 보통 여성 연예인만큼의 외모가 중요하고 전부인 듯했다. 그렇지만 일반인 남성이 상대방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대방의 눈길을 이끌만한 외모도 필요해보였지만 학벌이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벌 있는 남성과 미모 출중한 여성의 만남은 어색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학벌 있는 여성과 미모만 있는 남성의 조합에서는 상당히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많이 묻어난다.


어디 이것이 텔레비젼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대학에 가면 학기 초 3월에 가장 많이 나붙는 홍보 자보가 '**고 / @@여고 조이트 동문회'이다. 대부분의 이 '조인트' 동문회는 지역에 있는 '유명'고등학교 와 함께 하루 만나서 놀자는 것이다. 하루 만나서 놀자고 말하는 '조인트 동문회'는 학벌을 조장하고, 이와 더불어 이성애적인 만남을 통해 학벌을 공고히 하자는 데에 있다.


연애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하는 이 장 속에서도 학벌은 보이게/보이지 않게 공고히 작용하고 있다. 학벌=능력으로 인식되는 이 사회 속에서, 주변 남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 애인이 ‘여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예쁘냐?’이다. 반면 주변 여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애인이 ‘남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물어보는 질문은 ‘어디 학교 다니는데?’이다. 이 속에서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애인으로 뒀을 경우, 대답을 쭈뼛쭈뼛하게 되고, 애인의 性이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이 아닐 경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니, ‘나 애인생겼어요~’라는 말조차가 그녀/그남들에게는 봉쇄되어있다. 물론 이 대답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답’은 ‘서울대 생이야’일 것이다. ‘응 그냥 대학다녀’라고 말하겠지. 왜 당신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렇지 않은 것같이 자연스러운 것은 알고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억압‘하는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학벌도, 이성애중심주의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연애는 얼마만큼 이 속에서 자유로운가? 얼마나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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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식칼 그리고 이별


김영대 (광주전남녹색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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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느 여중학생들이 버스유리창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 ‘하트’, ‘식칼’… 대체 이것들이 무얼 의미할까?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뛴다고 무슨 의미가 있냐? 그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우연히 알게 된 귀농한 부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너무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삶이 싫어 농촌의 여유로운 삶을 찾아왔다는 부부다. 나도 이런 숨 가쁜 삶은 싫다. 이런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사회도 싫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것은 두려워, 그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탄다. 버스를 놓칠세라, 숨 가쁘게 뛰듯 올라 탄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람들 또한 이런 숨을 내쉬고 있다. 거친 숨을 가득 담고 출발한 버스 창문은 흐 뿌옇다. 창밖을 본다. 옆에서 달리는 차량의 불빛만이 번지고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지쳐가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면서 버스 안은 여유로워졌다. 사람들의 숨결이 맺혀진 버스 창문은 차갑다. 그곳에 두 여중생이 그림을 그리며 깔깔대고 있다.


한 친구가 사람을 그리며, "이거 너야!" 또 한 친구는 문어 같은 사람을 그리며 "너야!" 한다. 이젠 하트를 그린다. "사랑" 이란다. "사랑? 이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 아니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느닷없이 식칼이 그려진다. "슝~ 얘도 죽고, 얘도 죽고, 얘도 죽… 아니 얘는 산다." 그리고 서로 깔깔대며 웃는다.


버스 엔진 소리, 그리고 적막. 그 적막에 깔깔대며 나누는 이야기가 버스 엔진소리에 묻힐 듯 내 귀에 들려온다. 정답다. 무서운 이야기인데… 멍하니 그들이 창가에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본다. 온기 있는 손가락 끝. 차가운 숨결을 녹였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의 선을 따라 버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큰 길 가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가의 푯말,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버스가 섰다. 그들이 내렸다. 그들이 내리고 난 자리에 '우리'란 단어가, 사랑과 식칼 그리고 죽음의 어느 공간에 적혀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는 '우리들'이 함께 타고 있다. 또 그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는 '우리들'도 함께 타고 있다.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이별도 있는 버스 안, 여중생이 그려놓은 식칼.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는 삶이 칼로 베어 이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인가? '우리들'이 아닌 '너희들'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아픔을 느낀다.


고민이다. 난 언제쯤에 내려야 할까? 버스에서 내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럴수록 거꾸로 가는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 또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차가운 숨결을 녹였던 손가락 끝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렇게 온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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