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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로 읽는 헌법 (사형제도)


법대생 차진태 모세


얼마 전에 모 부장판사님께서 자살을 하셨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동일 직역 등 유사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보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사실, 곧 ‘자살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많이 슬프고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벌 없는 사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사람들을 자꾸 죽고 싶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학벌을 ‘현대판 신분’에 비유하곤 하는데, 신분 사회가 ‘나쁜’ 이유는 그것이 생산력이 약하거나 문화적으로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극소수의 양반층의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벌을 신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던 중에 작년에 초중고생 자살이 47% 급증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자살이 많은 사회.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생명은 등가성을 가진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과 존재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존중하는 문제는 범죄자의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의 문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존재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의 문제가 실은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 지를 바라보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사형제도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사형제도의 문제는 사실, 형벌 제도로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합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것은 거칠게 나누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합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2월 25일 ‘사형제도 사건’(형법 제41조 등 위헌제청)에서 합헌이라고 판시(2008헌가23)하였습니다. 판결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형제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는지 여부’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헌법적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상, 범죄자의 생명권 박탈을 내용으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는 당해 범죄자가 스스로 선택한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의 결과라 할 것인바, 이러한 형벌제도를 두고 범죄자를 오로지 사회방위라는 공익 추구를 위한 객체로만 취급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 것으로 보아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으로 일부위헌의견 1인, 위헌의견 3인이 있었으나 다수의견이었던 합헌의견이 법정의견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합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헌법적으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10년 동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TV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그 생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나은 놈’이라는 판단은 누가 하나요?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죽여야 한다면, 반대로 절대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판단은 누가 하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사형 제도의 논의가 매우 쉽게 해결됩니다. “신의 영역”의 것을 인간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이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선한) 신은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므로,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천주교 등 일반적인 그리스도교계의 입장이고, 논리는 조금 다르지만 불교에서도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입장 아래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해 왔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는 근대 철학에서도, 인권의 문제에 관하여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사실, 신분사회 안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주장할 근거는 매우 미약했지요. 서구에서 ‘인권은 하늘이 준 것이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아주 쉬운 말로 인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물론 그것은 고려시대 ‘만적의 난’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도 알려져 있듯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목영준 재판관은 위헌의견에서 “생명권은... 헌법상 제한이 불가능한 절대적 기본권”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로 돌아가서, 현재는 확립된 판시 사항이기도 한 위 판례를 다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은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바, 어느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보호가 곧바로 다른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제한이 될 수밖에 없거나, 특정한 인간에 대한 생명권의 제한이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나 이에 준하는 매우 중대한 공익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는 비록 생명이 이념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생명권 역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논리적으로 조금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이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내면적 사상의 자유와 같은 권리는 해석상 절대적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고, 따라서 생명권을 절대적 기본권으로 해석하여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사실상 학술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보통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입법자의 결단의 문제로 보아 소극적인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명문 규정이 없으니 일단 생명권은 절대적 기본권은 아닌 것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이와 같이 진행됩니다. “예컨대 생명에 대한 현재의 급박하고 불법적인 침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로서 그 침해자의 생명에 제한을 가하여야 하는 경우, 모체의 생명이 상실될 우려가 있어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하여야 하는 경우, 국민 전체의 생명에 대하여 위협이 되는 현재적이고 급박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거나 그에 못지 아니한 중대한 공공이익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범죄자에 대한 극형의 부과가 불가피한 경우 등 매우 예외적인 상황 하에서 국가는 생명에 대한 법적인 평가를 통해 특정 개인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헌법재판소는 ① 정당방위, ② 산모 보호, ③ 전쟁, ④ 흉악범죄의 경우를 나열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①, ②, ③의 경우에 비해서 ④의 경우는 법률이 사후 개입한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①, ②, ③의 경우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침해에 대한 급박한 방어행위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침해로 이어진 경우 그 방어행위에 대한 법률의 보호에 관한 문제인 반면, ④의 경우는 다른 생명의 침해로 이어진 행위를 한 자 등에 대한 처벌의 문제로써 그 재발방지에 목적을 둔 국가의 사후개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의 법정신에 입각할 때, 다른 것을 같은 것인 것처럼 나열한 점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매우 강한 힘으로 쳐들어와서 모두를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죽어나가야 했던 걸까요?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해’ 보이는데 왜 당한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이자고 하지 않을까요?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유럽’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대중의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0만 유대인들을 히틀러가 혼자서 죽인 것일까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사실, 대중들의 적극적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합법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사실, ‘우기면’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수를 죽인 더러운 민족인 유대인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대중들처럼.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면서 “안 했다”고 우기면 그만인 줄 아는 이스라엘처럼. 광주를 학살한 다음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발표한 전두환처럼. 물론 그 안에는 굉장히 ‘섬세한’ 논리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논리의 존재가 비참하게 희생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청년과, 광주 시민의 무죄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그 논리들도 결국 ‘우기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할 지 여부와 그 생명을 제거할 지 여부는 분명히 사회적 합의의 산물일 것인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기준에서 비추어 보면) ‘짐승보다 나은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라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헌법재판소 판례는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어떻게 잘 우길 것인가’의 한 ‘나쁜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섬세한 논리로 ‘우김’을 포장하면 그걸로 게임은 끝인데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사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부 못하는 초중고생’은 ‘존재 가치’가 있나요? 없나요? 많은 초중고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요?


헌법재판소의 판시에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 사회는 ‘존재 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생명이 존재 가치를 갖게 되는 데 매우 심한 압박을 주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전방위적으로 사회 분위기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 30 대 여성 자살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남성도 비슷하지만;) 최근의 기사는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재생산불능의 사회, ‘웬만하면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존속시킬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합의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폐지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높은 강력범죄율 등은 사형제도와 같은 강력한 형벌로는 결코 잡을 수 없고, 사실은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사랑, 또는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음란물들을 생산, 유포하지 않는 것들과 같은 법 바깥의 노력들을 통해서만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율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절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제대로 되기가 매우 요원하니까요.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정면 승부를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은가요? 죽음으로 도피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뵙지요.


2010. 8. 24.차진태 모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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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직무 연수를 받고 나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광주지역 인권교사연수 후기-


이겨라 (광주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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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지역 초·중·고 교사 40여 명이 지난 25일부터 `인권교육 직무연수’에 참여해 `복지가 숨쉬는 학교’ `인권교육의 원칙’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첫 시간부터 자기들끼리 약간은 도도한 모습으로 중요한 회의라도 하듯 계속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치를 여러 번 주었으나 잠깐 후에는 그들만의 중요한 회의는 여전했다. 작은 쪽지에 자신의 목표나 희망을 담은 명함을 만들어 자기소개를 하게 하였는데 여전히 딴 세상에 있는 듯이 행동하는 그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고 그 아이들 곁에 멈추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함에 휘갈겨 쓴 내용을 어렵게 읽었을 때 내 마음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말을 꺼냈으나 급기야는 호통으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학기 내내 그 아이들과의 씨름은 매시간 나를 고군분투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들과의 부딪힘은 그 반 전체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한 시간도 그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그 반 아이들은 나의 숙제가 되었으며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만남은 특별할 것도 없다. 1년 동안 만나게 되는 학급들 중에서 한 두 반 정도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이 있으며 그 반 아이들은 그해 연구실천의 중심이 된다. 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좀 쉬운 과제는 더 잘 풀 수 있게 되는 식이다. 무난한 반 원만한 아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사실적으로는 그 아이들은 교사의 전제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된다. 한껏 날이 선 아이들은 정말 조심해서 접근하는데 아이들 눈에는 그저 좀 열심히 하고 착한 듯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답답한 인간으로 비춰지는 듯하다.


내가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그저 연구실천의 정반합이다. 이렇게 해보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또 보완해서 저렇게 해보면서 중간 중간 종이에 생각을 표현하게 해본다. 어쩔 땐 시원스러운 결론이 보이는 듯 하다가고 어쩔 땐 미궁속이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한번이라도 더, 한명이라도 더, 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영원한 텍스트다. 문제의 출발도 과정 탐색도 해결 방안도 그들 속에서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가 아이들에게는 숨 막히는 혹은 불쾌한 느낌을 주어 충돌을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반성도 해본다.


이즈음 되면 마치 아이들과 교사의 만남이 진공 유리관속의 관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와 아이들과의 만남은 비유하자면 ‘포화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사는 숱한 외부적 장애와 내적인 편견을 극복하면서 아이들과의 만남을 쟁취해 가고 있다. 교육은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만남 이상의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피상적인 모습만이라도 유지 하는데는 일상적인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마치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녀로서, 좋은 인간으로서 살고 싶지만 마음(자신의 마음 혹은 상대의 마음) 같지 않기에 늘 노력(만남, 소통을 위한 연구실천)해야 하는 점과 같다.


교사인권연수가 남긴 것


“엄마는 내가 어떨 것 같아...지금 행복할 것 같아?” ....

“ 제 아이가 어렸을 때 저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서 방학때 까지도 쉬지 못하고 수업해야 했고, 그런 구조 속에서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내 아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 2010 인권교육 직무연수 - 인권, 교육철학과 만나다 >라는 연수를 받고 나눈 소감 중에서 가슴을 적셨던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삶과 내 자식의 삶,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이 어찌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인권연수 모든 강사분의 강연은 우리의 아픔을 애도하여주고 우리 삶의 어려움을 해석하여 주었으며, 우리가 나아갈 바를 상기시켜주며 우리를 더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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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를 위해 특권층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외고 설립 중단되어야


김대준(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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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시 특수목적고등학교 지정·운영위원회가 24일 오전 광주시교육청에서 열릴 예정인 가운데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시교육청 정문 앞에서 외고 설립 반대를 주장하는 집회를 가졌다. 운영위는 이날 비공개, 경찰병력까지 비치된 회의에서 광주 외국어고등학교 전환을 신청한 학교법인 홍복학원(대광여고)에 대해 승인하였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딸의 채용 특혜 문제로 전국이 시끄럽다. 편법․불법으로 얼룩진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일부 장관들의 사퇴가 얼마되지 않아 국민들의 마음은 더욱 허탈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도 연이은 악재로 빛을 바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우리 지역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외고 설립이 과연 공정한 사회와 얼마나 부합되는지 의문스럽다. 이미 외고는 본래 목적과 취지를 달성하지 못하고 명문대 입학 통로로 변질되면서 사교육비 상승의 주범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학생들 대다수가 잘사는 부모의 자녀로 채워지면서 교육양극화, 교육불평등을 넘어 국민 통합까지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오죽했으면 자사고, 외고 등을 확대하고자 했던 한나라당 조차 외고 폐지를 언급하고 나섰겠는가. 이렇듯 사실상 외고는 더 이상 확대되어서는 안되는 실패한 학교인 것이다.


반면 시교육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외고가 없는 우리 지역에 외고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과 지역의 우수 인재 유출 방지 등을 위해 외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화, 학부모 선택권, 수요자 중심 교육을 들먹이며 임기가 3개월도 안 남은 현 교육감이 외고 설립을 군사작적 방불케 하듯 밀어붙이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그럴싸하다. 일부 시민들도 시교육청에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시교육청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 시민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일부 특권층을 위한 학교로서 외고를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속내를 철저히 숨기면서 철저히 국민과 시민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전국에 유일하게 외고가 없기 때문에 외고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매우 비객관적인 주장이다. 외고가 설립되면 광주 교육이 더욱 발전할 것이라 떠들어대지만 다른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어느 지역을 둘러보아도 외고 때문에 그 지역의 교육환경이 더욱 좋아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외고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을 받다보니 사교육비가 상승되고 공교육이 파행으로 흐른다는 지적만 있다. 또한 외고가 설립된 서울, 경기 지역은 전국 하위권 수준의 학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부산, 대구, 대전 등의 지역도 우리 지역보다 학생들의 학력이 낮다. 오히려 외고가 없는 우리 지역이 수능 성적 6년 연속 1위로 전국 최고의 학력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민노당 권영길 의원이 밝혔듯이 다른 지역에 비하여 평준화제도가 훼손되지 않아 학생들의 학력이 높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문제들을 초래하고 있는 외고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둘째, 글로벌 시대에 맞는 인재 양성과 우수 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외고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글로벌 시대를 대비하여 외국어가 중요하다면 학교 교육과정의 다양화, 외국어 영재교실 운영 등을 통하여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외고가 설립되면 대다수 졸업생들이 서울이나 수도권 소재 대학으로 진학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것이 지역의 우수 인재 유출을 방지하는 것인지 회의적이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시도로 가는 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시도로 가는 학생보다 애향심이 있기 때문에 외고 설립으로 지역의 우수 인재가 유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우매한 주장까지 하고 있다.


셋째, 학교 다양화, 선택권, 수요자 중심 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이면은 특권층을 위한 특권학교로서 외고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다양화, 선택권 운운하며 생기는 학교들이 대부분 국제중․고, 자사고, 외고 등으로 잘사는 계층의 자녀가 입학하는 귀족학교이다. 다양화, 선택권 등을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교육정책이 작동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학생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일부 특권계층의 자녀를 위한 학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외고가 설립되면 소위 말하는 상위권 학생들이 진학하는 학교가 과학고 1개교, 외고 1개교, 자율형사립고 3개교, 자율형공립고 3개교 등으로 총 8개교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입시교육을 하고 있는 우리 지역의 50여개 고등학교 가운데 외고를 비롯한 8개교가 일류고로, 나머지 학교가 이류고로 재편되면서 평준화 제도는 해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경쟁교육, 특권교육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확산되면서 공교육 파행과 사교육 조장 등 지역교육에 많은 문제점들이 초래될 것이다.


현재 우리 교육은 대단히 계급적, 계층적인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교육 공공성과 가치중립성은 철저히 훼손되고 있다. 자율화, 다양화, 선택권 등등의 그럴듯한 말들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특권층의 요구와 입장을 반영한 교육정책이 전면화되고 있다. 외고를 비롯한 국제중․고, 자사고 등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무한만능,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이 지속되는 한 공정한 사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경쟁교육, 특권교육을 중단하고 협력교육, 상생교육으로 교육정책 기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 지역의 외고 설립도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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