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발자유 한다고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공현(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너무 쉽게 망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참 쉽게 망하는 나라다. 화물연대나 철도노조가 며칠만 파업해도 나라가 흔들린다고 난리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친북좌파들의 발호로 나라가 망할 거라고 한다. 참, 국가보안법 따위가 국가안보의 ‘최후의 보루’라니 이런 막장스런 취약 국가를 봤나. 드디어 이제는 학생들에게 두발자유를 ‘허용’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식의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에 경기도교육청이 발표한 학생인권조례 이야기다. 학생들에게 두발복장의 자유를 주는 것만으로 나라가 흔들린다니, 불안해서 이딴 나라 못 살겠다. 역시 이민을 가야 하나? -_-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발이야 익히 예상된 바이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놓고 조중동문(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이나 좋은학교만들기 경기학부모모임, 한국교원노동조합, 자유교원조합, 대한민국교원조합 같은 데들이 보여준 반응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 교육감의 ‘행복한 학교’ 운운은 교육 황폐화의 둔사(遁辭)”(문화일보 사설) “운동권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해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을 모두 운동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일부 학부모 단체들의 기자회견 내용)등을 비롯하여, 자문위 구성에 대해 좌편향 색깔론을 제기하는 동아일보 등등. 이런 말들 속에서는 현재의 학생인권의 현실과 교육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 있는 논의나 우려는 보이지 않고 막연한 색깔론 및 음모론과 ‘자유’, ‘다양성’, ‘인권’에 대한 두려움만이 난무한다. 그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무책임한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무책임하고 별 근거 없는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와 좌익의 음모라고?

사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이야기가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획책”이라는 투의 음모론이다. 전교조가 그렇게까지 학생인권에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었다면, 참 나를 비롯해서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장담컨대, 그렇게 전교조의 음모랍시고 들이대는 ‘집회의 자유 보장’에 대해서도 전교조 조합원들 중에 좀 떨떠름해하는 사람들이다수일 것이다. 학생들의 학교운영 참여나 학생회 활성화에 대해 반대하는 전교조 조합원들은 많지 않겠으나, 집회시위의 자유에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다. 두발복장자유나 체벌금지 등 다른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다. 전교조가 일부지도부나 간부의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교조 조합원들 다수가 공감하는 성의 있고 실질성 있는 활동으로서 체벌금지나 두발복장자유를 외친 적은 별로 없다. 일단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를 대체로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얼마만큼 그 내부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음모가 아니라 학생인권 보장을 열망하는 많은 학생들과 인권활동가들, 개념 있는 학자들의 요구와 견해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인권의 기준들을 학교에 적용해놓은 것뿐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과정에서는 연구팀이 많은 국제기준이나 외국 사례들, 헌법이나 국가인권위 결정 등을 분석하고 면접조사, 설문조사 등을 통해 예시안을 제출했으며, 발표된 초안은 이를 기초로 많은 인권전문가나 교육현장의 교육자들이 참여하여 합의한 내용이다. 이러한 근거들 위에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면서 자기들은 정작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막연한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보수적인 편견과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만 가득하니, 이 얼마나 개념 없는가?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나 좌익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하승수 씨가 오마이뉴스에 썼듯이) “유엔도 좌파라고 우길텐가?” 학생들의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나 참여권은 UN 아동권리협약에 아예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다. 오히려 현재 발표된 학생인권조례초안에서 집회의 자유를 학교장이 제한할 수 있게 명시해놓은 것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이다.(이 부분은 옥외집회의 경우 그냥집시법에 따라 경찰에게 신고하여 하게 하면 될 텐데, 현재 한국 경찰들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금지하는 쪽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나온 합의점으로 보인다.) 또한 체벌금지나 인권에 부합하도록 학칙을 개정할 것 등은 UN 아동권리위원회 등이 한국 정부에 매번 권고해온 사안이다. 이런 내용들을 놓고 전교조의 음모라느니 좌익의 망국이라느니 설레발치는 것은 “우리우익은 인권 개념도 없고 국제 감각도 없습니다.”라고 자폭하는 꼴이다. 만약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세력 중에 정치적 성향이좌파인 사람들과 단체들이 많다면, 그건 한국에서는 좌파들이 인권감수성이 더 뛰어나고 국제 감각이 더 훌륭한 탓일 것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제조건이자 목표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교육에 해가 된다는 주장도, 교사들의 교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해괴하기 그지없다. 학교는 본래 쩌는 입시 공부를 하는 입시 학원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는 곳이다. 교육기본법을 봐도 그렇고,UN아동권리협약을 봐도 교육의 목표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으며, 교육의 방식이나 학교의 운영, 규율도 학생의 인권을 존중해야한다고 되어 있다.(UN아동권리협약 제28조, 29조) 이러한 가치들을 도외시해가면서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이야기는 학교의 본래 목적을 배반하는 일종의 ‘패륜적’ 드립인데, 대놓고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므로 강제성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꼴을 보니 이게 얼마나 무개념한 발언인지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불합리한 교칙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독재정권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조건적 준법, 부당한 규칙이라도 닥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능력이다. 인권을 개무시하고 학생들을 개고생 시키는 잘못된 규칙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권을 지키며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함께 만든 규칙을 함께 지키는 것을 배우게 해야 제대로 된 인권교육이요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책임감 없는 사람을 만들 것이라는 말도 비논리적이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해놓은 대로 말하는 대로 따르는 노예를 만드는 일이다. 자유가 없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요, 진정한 책임을 교육할 수 없다. 자기 머리카락이나 옷 입는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얼마나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자유가 인권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 보장은 교사들의 권리에도 친화적이다. 학생들의 두발복장규제 등 교육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면서 과중하고 불합리한 생활지도 업무에 노출되었던 교사들의 노동조건이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명시하고 있는 학교의교육환경 개선 등은 동시에 교사들의 노동환경 또한 개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을 보장하며 필요최소한의 규제만을 가지고 운영되는 학교가 교육에 더 효율적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교권조례도 같이 만들라고 하는 교사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지지한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항하고 균형을 맞추는 의미에서의 교권조례가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함께 더잘 학생들의 인권과 교사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례로서 교권조례는 바람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학생들을 교사들의 원수보듯이 하고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하는 걸로 파악하는 인식은 교권이 보장되지 않고 학생인권이 무시당하는 학교 현실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이다.

다양성과 자율,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좀 더 교육다운 교육을 만들어가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 과정에서 실현되어야 할 조건이자 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가장 교육적인 것이 가장 인권적인 것이다. 경기도지역 학교의 안습적인 학생인권 상황(내가 학생들로부터 들은 체벌 때문에 뼈가 부러져서 입원한 이야기나, 두발규제 과정에서의 강제이발 사례, 복장규제 과정에서의 변태스런 규제 등등을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을 굳이 하나하나 말하면서 독자들의 그로테스크한 취미를 만족시키지 않더라도, 200대 체벌이 언론을 타지 않더라도(200대를 때리든 1대를 때리든 체벌은 폭력이다. 폭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체벌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을 위해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두발자유 보장으로 망하는 빈약하고 괴상한 사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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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김태정(학교자치실현 교원평가저지 범국민대책위 준비모임)

1. 들어가며

교원평가 전면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교원평가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갑자기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교원평가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시도되어졌던 것으로 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의 연장선 속에서 배치되어 왔다. 그리고 교원평가 실시라는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 그리고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때문에 전교조는 줄곧 교원평가 법제화 시도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13일 전교조 위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원평가를 제한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였다. 경향신문 11월 19일자에 따르면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이종걸 위원장(민주당)이 교원평가제의 법제화를 위해 제안한 논의 구조인 6자협의체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으며, “협의체에 들어가서 무조건 전교조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겠다”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의 의사를 어떤 식으로 평가에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반하는 위원장 혹은 집행부의 독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협의체 참여과정의 나타난 절차적 문제에 있지 않다. 사태의 심각성은 교원평가가 가져올 폐해가 결코 교사에게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래에서 검토하겠지만 교원평가는 교육주체 전체에게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며 나아가 교육자체를 황폐화 시키고 교육의 공공성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교원평가는 교사들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른바 개혁성향이라고 불리는 언론조차 교원평가가 마치 전체 학부모들의 요구인 것처럼 왜곡하고, 심지어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전교조내 강경파의 반발’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번 토론회를 매개로 교원평가의 문제점을 다시 확인하고,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제 교육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향후 교육주체들의 공동의 실천을 조직하고자 한다.

2. 교원평가의 현황

이른바 교원 그중에서도 교사에 대한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이다. 우선 근무평가라는 이름으로 관리자에 의한 교사 평가는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에는 교육공무원승진규정을 개정하여, 다면평가(동료교사)를 도입함과 동시에 승진시 반영 연수도 승진전의 10년간의 근무평가를 반영하도록 변경하였다.

다음 성과급 평가가 진행 중이다. 성과급제는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교사들의 반발로 차등 폭이 적었으나 이후 확대되어 2006년부터는 성과급 비중 및 차등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성과급은 업무(실적)에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그 항목은 수업지도, 생활지도, 담당업무, 전문성개발 등으로 근무평가의 평가요소와 대동소이하다. 최근에는 단위학교별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원평가 부분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진행 중이다. 2006년 67개 학교에서 시범실시된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500여개로, 2009년 1761개로 그리고 2009년 9월 이후 3천여 개로 확대일로에 있다. 이는 전국의 학교가 1만 2천여 개 정도임을 고려할 때 실제로 전면실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9월 2일 교과부가 발표한 안에 따르면 평가 종류는 동료교원에 의한 평가, 학생에 의한 만족도평가, 학부모의 의한 만족도평가로 나누어지는데, 평가영역은 크게 수업지도와 학생지도로 구분된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원을 평가는 이 시스템은 교원평가를 실시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취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평가결과 기준 미달 교사로 판명될 경우 학교장이 지역교육청 시도교육청에 의뢰하여 장기집중연수에 투입된다. 그 비율은 아직 미발표이지만 대략 연간 400명 정도로 교원의 0.1% 수준으로 예상된다. 한편 2009년 10월 6일에 발표된 한국교육개발원 정책연구보고서에 근거하면 교원평가를 인사와 승진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출된 바 있다.

3. 교원평가! 무엇이 문제인가?

(1) 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부를 포함하여 교원평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의 주된 논리는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즉, 평가를 통해서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이 지속적으로 담보되기 위해서는 평가가 아닌 다른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우선 교원의 양성 임용체계가 보다 전문화되고 이에 대한 국가적인 책무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이다. 여전히 교원은 부족한데도 교원정원을 동결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교사대를 통폐합하려는가 하면 단기교사 자격증 부여방안을 추진하는 등 정부가 파행을 조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 교육과정에 편성에 대한 교사의 권한강화, 연구활동을 위한 지원, 안식년 도입 등 교사의 능력개발을 위한 지원 등 제도적인 보장을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저출산으로 취학아동수가 과거보다 줄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법정정원 확보나 표준수업시수 제정 그리고 교육시설을 포함한 교육환경은 열악하다. 또한 급식비를 포함한 여전히 교육비용의 민간부담은 줄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명박정부는 교육예산을 축소시키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입시경쟁체제는 초중등교육을 교육환경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교원평가의 진짜 목적은?

역대정부가 앞에서 언급한 교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외면하고 유독 교원평가만을 강행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몇 가지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총자본인 국가차원에서 노동력 비용절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며, 특히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최소화(규제완화로 표현)와 공공부문의 민영화(사유화) 그리고 작은 정부를 표방한다. 이때 작은 정부는 사회공적영역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축소 혹은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기업노동자들과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을 포함한다.

그동안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면서 역대정권은 공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강행하였으며,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의 과정에서 공무원노조가 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며, 교원의 경우는 전교조가 존재하였기에 상대적으로 그 속도가 늦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원평가는 결과적으로 이른바 기준미달교사를 퇴출하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며, 이는 비용의 절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공무원퇴출의 핵심이 비용절감 논리이었고, 교원평가 역시 공무원 구조조정의 본질(인건비 축소와 노동 통제)과 다르지 않다. 총자본으로 기능하는 국가 재정 운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원 인건비는 학교교육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2008년 교육재정 대비 65.5%)하는 투입 요소이며, 교원노동 유연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큰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4대강정비사업과 부자감세정책으로 인한 예산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교육, 복지, 중소기업, 지역현안사업 등을 삭감하는 것과 연동되며, 결국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교육이라는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교원에 대한 일상적인 노동통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원은 이중적인 지위를 갖는다. 이는 학교의 성격에서도 기인한다. 학교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체제순응적인 노동자를 양성하는 지배계급의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지배 권력의 말단에 서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과연 학교가 그렇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일 방향으로만 기능하는가? 교사를 비롯한 교육노동자와 수업노동을 수행하는 학생들 또한 수동적인 존재이기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되는 과정이 살아있는 인간을 소외시키며 이로 인해 노동자가 필연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듯이, 교육의 상품화의 과정 또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과정으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결국 학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즉,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교육과 학교를 상품화,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소수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계비(임금)의 상당부분을 교육비용으로 반강제적으로 지출당해야 하는 노동자 민중과의 이해가 충돌하게 된다. 교육노동이 산 노동이 아니라 죽은 노동으로 변질되고 스스로의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교육노동자들의 저항과 이를 억누르고 권력과 자본의 시종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노동통제가 충돌하게 된다. 또 노동내부에서는 지배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거나 타협하려는 경향과 그렇지 않는 경향이 충돌한다.

한편 교육과정에서도 이해가 대립한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교육과정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도록 통제하려 한다. 최근 이명박정부가 교과서개정을 진행하는 것과 미래형 교과과정이라는 것을 도입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즉 교육내용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입시위주 교육과정을 통해 악무한적인 경쟁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개개인에게 경쟁논리를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결국 미래세대의 구성원들에게 교육노동자들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교원이 체제순응적인 존재로 일상적으로 통제되는가 아닌가는 지배계급에게는 사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바로 여기서 교원평가의 문제가 단지 교사들의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국민국가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원평가가 이러한 지배계급의 노동통제 수단이 될 것임은 이미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그런 공직자는 자격 없다”고 발언 한 것이나, 최근 국가 및 지방 공무원의 복무규정 및 보수규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노동조합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를 수 없으며,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입장 표명도 못하게 하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원평가를 통해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잘못된 정부정책에 대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교사들을 퇴출 즉 분리 제거하고, 살아남은 교원들은 일상적인 통제 틀 즉 교원평가 시스템으로 묶어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사간의 경쟁은 다시 입시경쟁하에서 학생 간 경쟁의 심화로 확대되면서 종국에는 악무한적 경쟁논리가 인간내면을 지배하고, 결국 자본이 원하는 마치 좀비와도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셋째, 교육주체들에 대한 분할지배이다. 모든 지배계급의 지배전술 중의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분할하고 서로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통제의 경우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로, 내국인노동자와과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정규직와 비정규직으로 끊임없이 분할하고 단결을 거세하려 한다. 또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출신지역에 의한 분할 대립구도는 종종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지배는 교육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의 본질이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의 과정이자,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사회적인 보편적인 권리이며, 교원(교사, 비교사 등 교육노동자), 학생, 학부모 등 제 교육주체들의 협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바로 교육시장화의 논리이다. 이에 의하면 교육은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물건처럼 사고파는 상품이다. 상품이기 때문에 공급자와 구매자가 존재하고, 이때 구매자는 학생과 학부모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권리를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는 하나의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시스템 즉 학벌이다. 이는 대학과 학문의 위계서열화로 재구조화되어 왔으며, 학벌사회로의 진입장치인 입시제도는 그 자체로 이윤을 생산하는 기제로 최근에는 대학은 물론 초중고 학교마저도 노골적인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당연히 학벌사회의 상위로 진입하려는 욕망이 대중을 지배하면서 수요가 점증하고 반면 진입의 벽은 높아 그 비용이 상승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입의 벽이 높다는 것은 교육이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계급재생산의 기제로 다시 말해 부자에게는 부의 대물림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며, 그 자체로 불평등을 재구조화는 기제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더욱 문제는 그에 대한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사회적으로 입시경쟁의 심화, 폭등하는 사교육비로 나타나고 있으며, 교육문제의 사회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차단당하고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학교교육의 실패로 그리고 교사의 문제로 화살이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육의 구조적인 병폐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성찰은 사라지고 오직 즉자적인 분노만이 교사에게 집중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유독 교사에게 화살이 겨누어지는가? 이는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과 지위 때문이다. 동시에 그에 근거한 학교 안에서의 교사와 비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간의 비대칭적 심지어는 위계적인 질서에서 비롯된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교라는 공간 안의 비교사노동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업무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생들은 훈육과 통제의 대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학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맡긴 심정으로 늘 교사의 권력에 주눅 들게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체제는 이러한 비대칭적이며 위계적인 질서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구조 하에서 잊을만하면 툭툭 터져 나오는 이른바 ‘부적격교사’의 문제는 입시경쟁체제와 맞물리면서 공교육실패의 책임이 마치 교사에게 있는 것처럼 교사집단에 대한 마녀사냥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평가로 이른바 부적격교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분명하다. 전교조교사가 비전교조교사를 단순 비교해보자. 누가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인격적인 모욕과 체벌을 가할 것인가? 이른바 촌지 거부운동을 했던 집단이 누구인가? 교원평가로는 설사 부적격교사라 할지라도 잘못된 정부정책에 침묵 혹은 동조하고 교장에게 아부하며 시험풀이 기술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자들이라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후 교단을 장악할 것이다.

4. 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1) 교원평가저지투쟁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원평가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여전히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는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전술하였듯이 가장 큰 어려움의 교사의 사회적 지위와 학교 안에서의 위계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도 상존한다. 예를 들어 같은 노동조합들인데 전교조의 교원평가 반대투쟁에 대해 소극적이다. 왜 노동자들은 같은 노동자인 교사의 구조조정에 무관심할까? 또 이 투쟁이 단지 교사만의 투쟁이 아니라면 기간 연대운동에 어떤 한계점이 있었을까? 이는 결국 크게 다음 두 가지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노동자계급의 이중성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결코 계급적인 태도로 모든 사물을 대하지 못한다. 이는 상당부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선택이기도 하다. 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가?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그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출혈과도 같은 사교육비 지출이 자녀의 고학력과 안정된 직장을 즉각적으로 보장하지 않음에도, 현재의 삶의 처지를 개선하는 유력한 매개로 학력(학벌)이 기능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력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가들처럼 특별히 물려줄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민중들이 보기에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유독 교육문제에서 만큼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교육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 수단이자 일상적인 노동통제 기제인 교원평가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면서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대중들의 이러한 소박한 바람과 엄청난 사교육비 지출에도 불과하고 이미 트랙은 처음부터 나뉘어져있다는데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며,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비 지불능력이 곧 자녀의 성적과 갈 수 있는 대학을 결정하는 세상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민중들은 소수의 특권계층의 부의 대물림 도구가 된 대학서열체제하에서 들러리를 서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확인되는 방식이 개별적인 차원에 그친다면 그것은 개별(가족)의 낙담과 이른바 상위권대학 진출에 실패한 개인의 패배의식의 내면화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교육소비자담론으로 끊임없이 정당화되어 왔고 심지어는 계급고착화가 내면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교육은 결국 소수의 부의 대물림 도구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 자체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적인 인식에 도달한다면 ‘낙담은 분노로 분노는 다시 폭발적인 저항’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다음으로, 연대운동에 대한 왜곡된 관점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왜 연대를 해야 하는가? 일부에서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비해 노동조합에게 힘이 없으니까 보다 많은 우군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놓으면 만일 힘이 있으면 굳이 연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상 연대운동판에서 이른바 힘이 있는 덩치 큰 단체들(대체로 노동조합)의 패권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왜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제 사회운동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답을 해야 한다.

문제는 민주노조라고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경제적인 조직 즉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잔존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는 연대활동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즉 연대를 조합적인 이해를 위한 단순한 전술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으로 연대를 이해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노동조합이 단지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직인가? 노동조합을 이렇게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조직으로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가계급의 의도이고 이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자들이 바로 노동조합 관료모리배들 아니던가?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사회운동진영과 연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당장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비록 자본가들과 그 주구들은 노동조합을 노동력판매가격과 조건을 위한 협상도구로 제한하려 하지만, 노동조합의 역할은 결코 그렇게 가두어질 수 없다.

노동조합의 역사적인 위상은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힘’ 그 자체이다. 때문에 노동조합은 (개별)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에만 관심을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은 물론이고 수백만 피압박민중의 전반적인 해방을 최종 목표로 삼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칭 민주노조의 민주투사 혹은 간부라는 자들은 이러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는 입으로만 연대를 외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상태와 수준을 핑계 댄다. 즉 조합원들이 정치의식이 열악하고 보수화되었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는 식이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원칙 즉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계급성을 망가뜨리고 있는 주범이 아닌가?

되물어보자! 과연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가? 작업장이라는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만을 고민하는데 어찌 정치의식이 상승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제대로 된 활동가라면 조합원들의 정치적 무관심 탓으로만 돌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엇보다 그 스스로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실천하는지, 사회 정치문제에 관해 얼마만큼 생생한 폭로를 했는지, 그리고 조합원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 아닌가?

조합원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는 것! 바로 여기에 연대의 진정한 이유가 있다. 정치의식을 높이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모든 계급의 상호관계에 관하여 명료한 이해를 가지게 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는 노동조합이 사회의 주요한 문제와 쟁점들에 대해 개입하고,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연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교원평가가 교사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이를 널리 알려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교원평가는 단지 교사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씨가 말하는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교사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사라지고 남으면 학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들이 교원평가를 교사들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외면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일까? 가장 일차적인 피해자는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교육권의 박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원평가저지는 교사들만의 투쟁이 될 수 없음을 알려내자. 교원평가저지가 교육주체들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요구로 확대될 수 있도록 널리 알려내자! 힘들다고 바늘허리에 맬 수 없지 않은가? 교원평가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교원평가가 현재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왜곡 시킬 것임을 선전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당장 무정형의 대중들을 교원평가반대전선으로 이끌 수 없다면, 조직되어 있는 대중들을 먼저 만나자! “전교조 교사들이 짤릴 것 같으니 도와 달라”는 따위의 연대가 아니라, 교육시장화를 막아내기 위해서 교육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함께 싸우자고 당당하게 제안하자! 교원평가가 단지 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주체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보편적 권리인 교육권의 문제임을 선언하고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자! 나아가 한국사회 교육문제의 본질이 어디에서 기원하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다음, 교육주체들부터 단결하고 공동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이명박정부는 평가를 통한 위계서열화와 이를 통해 교육시장화 학교시장화를 획책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일제고사로, 비교사노동자들에게는 업무평가로 그리고 교사들은 교원평가라는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원이라도 할 때는 광의로는 교사와 비교사노동자를 모두 망라하는 것으로 비교사노동자의 구조조정저지 투쟁과 교사노동자의 교원평가저지 투쟁에 상호간에 연대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다수 교사들의 정서와 조건에서 이러한 연대가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의 모범을 확대하고 환류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는 비단 초중등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분야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공동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예로 현재의 교사들이 구조조정 당하는 것을 외면하고 예비교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미래형교육과정이 통폐합 될 해당 교과 교사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관련 대학과 학과의 문제로 연동되듯이, 초중등 영역의 학교시장화는 이미 진행되어온 대학부문 등의 시장화를 더욱 극단으로 내몰 것이다. 또 굳이 이런 논리적 연관을 따지지 않더라도 교육자체가 사회적 문제라도 했을 때 과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 하면서 연대를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교원평가를 찬성하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교육문제의 본질, 경쟁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교원평가에 찬성하거나 혹은 교원평가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권력관계에서 근거한다. 그리고 이 권력관계가 근본적으로 혁파되지 않는 한 교사와 학생간의 비적대적인 모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 개인이 학생들에게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이러한 권력관계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운동에 노동조합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재국면에서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 실현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실현은 현재의 학교 안에서의 교육주체들 특히 학생과 학부모들이 겪고 있는 비대칭적 위계적 질서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교조는 2006년에 학교자치(위원회)와 교장선출보직제 등을 대안으로 제출한 바 있으며, 법제화 이전의 실천방안으로 학부모 의견개진권 실질화와 학급 학부모-교사 협의회 설치, 학생-교사 협의회와 학생회 실질화, 교과/학년협의회 활성화 등이 제시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비록 학교자치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모든 평가의 폐지를! 교육주체의 소통을 가로막는 그리하여 학교자치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제도 안과 제도 밖에서의 실험들이 소통되고 환류되어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강고해 보이기만 한 지배질서의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교원평가저지 투쟁! 과연 소수의 단말마적 비명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교육주체의 단결과 연대로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대장정이 될 것인가? 그 미래는 오직 우리 자신의 실천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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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청소년인권의 감수성으로 까칠하게 바라보기

아즈(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보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습니까? 장담컨대, 그렇게 1000명의 아무나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잘 되고 있다’, ‘성공했다’ 라 말할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져서, 어제 아침, 직접 밖에 나가 거리를 걸어가면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 200명에게 즉석 조사를 했다. 망했다. “문제 있다”는 즉각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좋다, 괜찮다, 잘 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조차 결국엔 단 한 명에게서도 들어보질 못했다.

별보며 학교가고 달 보며 귀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의 아들딸은 아직도 별 보며 등교해서 달 보며 하교한다.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젠 뜨거운 사교육 열풍까지 덤으로 몰아친다. 그 와중 살고자, 이기고자, 옆 짝꿍의 머리를 밟고 더 높게 올라가고자 쏟아 붓는 기백만 원의 학원비로 만들어진 타율적 경쟁과 양극화속에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60년 교육사를 그 누가 성공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답은 만민 공통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제의 해결책은 가지가지다. 평준화를 해체하고 경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빡세게 전국 수준, 세계 수준에서 경쟁시키고 엘리트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사람들, 더 평등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서열화되지 않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랍시고 정부가 내민 카드 중 하나가 ‘교원평가제’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공통의 카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회의 입법에 상관없이 현재 시범 운영되고 있는 교원평가제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 국회에는 교원평가제 법안이 논의 중이다. 교사들을 평가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겠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를 일정정도 해소시킬 단비로 이 교원평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원평가가 교육을 변화시킬 단비가 아닌 산성비라면?

교사에게 점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교육이 얼마만큼 나아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은,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교육이 발전하지 않기에 건전한 경쟁을 하도록 만들겠다며 입시경쟁의 압박을 지속시켜오고,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 또한 경쟁과 자율을 내세우며 대학교,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서열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사들이 노력이 부족해서 교육이 발전하지 않는다며 교사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압박을 하겠다며 교원평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얼마나 잘 맞는가를 평가하는 것과 교사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비교하는 교원평가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오해인가?

교육활동은 교사요인, 학생요인, 가정요인, 교육 환경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 속에 이루어지며 이런 요소들에 따라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업의 수준은 교사의 학교 내에서의 역할, 수업시수 등에 영향을 받게 되며 학교나 교실의 환경, 학생 요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야 ‘평가’란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될 텐데 열 개가 있으면 그 중 한두 개(교사들에 관한 것들)만 들춰본 다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교육문제의 책임이 교사들한테 전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교사들만 쪼면 학교교육이 더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 만들어질까?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크게 나아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원평가제는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에 둔 제도도 아니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이나 교사들의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좋게 평가하는 교사의 덕목이란 대체로 무엇일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점수매기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지금까지의 평가/비교/경쟁위주와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 같고, 교육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를 않는다.

또한 평가로 사람을 관리하는 제도에는 필연적으로 강압이, 협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평가의 목적이 교원의 ‘능력개발’이기 때문에(교원능력개발평가) 평가결과를 모든 교원의 능력개발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연수를 보낸다던지 잘라버린다던지 하는 징벌의 요소가 있어야 시스템 유지가 가능하다.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폭력과 강압, 차별로 갈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뭐 교사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임용고시를 통과했으니 알겠지만) 평가, 경쟁, 서열화, 점수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는 학교가 별로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교원평가의 목표인가?

교원평가의 미래는 대한민국 교육 60년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과 교사들의 노력 부족이나 학부모의 관심 부족이 아닌 평가/비교/경쟁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다. 주어만 다른 평가/비교/경쟁위주의 교육정책인 교원평가가 교육에 변화를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교원평가로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는 교원평가를 통해 학생/학부모의 만족도를 참고하여 연수를 통해 교육능력을 발전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운영과 교육내용/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학생의 학교운영, 교육내용/과정 참여는 지난 몇 년간 청소년단체와 진보적인 교육단체 등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부분이다.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의견들이 중요한 목소리로 인정되고, 논의를 거쳐 반영되는 것은 교육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원평가가 이 부분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학생들은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낼 현실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 시간에 영어 한 단어를 더 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사치이다. 둘째, 학생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의견을 내다보면 쓴 소리도 당연히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학교장에게, 교육감에게 간언을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청소년은 미숙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타 건설적인 의견들조차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셋째, 어떠한 참여구조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교운영은 물론 교육과정 전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시킬 어떤 통로도 권한도 없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이라 하지만 학생회 회의 또한 교사들이 소집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다. 또한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모든 최종결정은 교장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원평가제는 이런 것들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겐 여전히 교육의 과정/내용과 학교운영에 대해 논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거기다가 현 상황에서는 평가조차 입시 위주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또한 교원평가에서도 ‘미성숙한 학생들’이라는 권위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이번 교원평가 6자 합의체에도 정당의 참여는 있지만 정작 교육정책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생, 청소년들의 참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만들어가기보다는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물어 참고자료로만 쓰겠다는 이 제도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제도에 가깝다.

교원평가제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마치 학생들이 교사들을 평가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평소 불만이 있던 교사들을 평가하고 제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들에게 힘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교원평가제로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만족도를 점수화해서 주는 것이 과연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서열화시킬 자료로 활용될 숫자들을 내놓는 ‘소비자’의 역할일 뿐이다. 학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주체이자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제연수의 최종결정권자는 교장이나 교육감 같은 ‘윗사람’들이다. 교육감이 지금 학교의 촌지, 성추행, 체벌 교사 같은 부적격교사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인터넷에 간단하게 검색만 해 봐도 문제교사들을 성토하는 글이 가득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수백 건의 글이 올라왔지만 교육청은 그 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즉 이 평가를 통해 교육감이 부적격교사를 파악하더라도 문제 있는 부적격교사는 교육감의 권력 속에 숨어 보호받고, 교육감이나 교장 등을 귀찮게 하는 부적격교사에 대한 보복성징계의 근거로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원평가는 오히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만으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헛된 명분에 그쳐 실질적인 학교자치를 가로막고, 지금의 교육을 더욱 썩도록 만들뿐이다.

경쟁 아닌 소통을, 학생에게 권력을,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우리는 평가와 경쟁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교육현장에서는 신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할 수 있고 교사가 학생을 신뢰할 수 있어야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대화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런데 학생이 평가당하고, 교사가 평가당하며 생존을 위해서 서로 앞서가려고 아둥바둥거릴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 불신이 만연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제안한다. 점수를 매기지 말고, 서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학생 등 교육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끼리 협력하고 논의하여 건설적으로 상황을 개선해나가자는 것이다.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고 평가 설문지를 돌리고 채점하고 윗선으로 올려 보내고 점수 매기고 하는 것보다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과밀학급 해소, 학교 시설 개선, 교사 수 증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니 뭐니 하며 다른 나라들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교육예산도 낮은 편이다. 학생들은 냉난방 시설이 불안하고, 급식 질이 안 좋고, 탈의실도 동아리실도 학생회실도 없고, 교사당/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고, 운동장도 좁거나 없는 학교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 교재비 등이 부담스러운 학생들도 많다. 교육예산은 잔뜩 깎으면서 교육의 질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에 가깝게 들린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혁은 교원들이, 교육부가, 크게는 현재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그들의 논의와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은 ‘덜’ 살았다는 이유로, 감정에 쉽게 치우친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종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결정할 권한도,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미성숙’의 기준도 자의적일뿐더러, ‘미성숙’을 이유로 참여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이제 두 번째, 아래로부터의 권력. 우리는 자치를 원하며 정당한 권력을 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들이 초기에는 비록 미진할지라도 청소년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학생이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이를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1의 주체는 학생들이 아닐까? 학생인권을 보장하게 만들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학교 운영이나 교육 방식에서의 개선할 점을 제대로 짚을 수 있는 주체, 어떤 교사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달라. 정말로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를 징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학생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자정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교육과정과 학교운영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논의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하라. 권력을 분립하고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지금의 교육 현장은 독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주는 것은 비단 우리의 발언권 획득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고, 사회적 능력의 발달을 꾀할 수 있다. 기존의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이것저것 결정한 다음에 결정한 사안이 현실에 맞지 않아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때 머리를 싸매고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들끼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잘 되는 교육현장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교원평가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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