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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대 여성의 성적 행위성 2010.03.17
  2. 대중문화와 청소년 2010.03.17
  3.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야기 2010.03.17

청소년인권포럼

십대 여성의 성적 행위성

김고연주(길을 묻는 아이들 저자)

십대 여성의 성

십대 여성은 성적인 존재이지만 그들의 성적 행동은 금기시되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성적 욕망의 대상(ex.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등의 걸 그룹)이면서 동시에 성적인 행위를 했을 때 비난을 받는 이중적 윤리를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섹슈얼리티가 쾌락과 위험 모두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십대 여성들은 매우 성애화되지만, 동시에 순결하고 순진하며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을 받는다. 십대 여성들은 학교와 가정에서 자신들의 성적 행위는 임신과 낙태, 성병, 그리고 성폭행 등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배우면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결과적으로 십대 여성들은 성에 대해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십대 여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또한 이들은 남성들의 성적 요구를 거절했을 때는 내숭이라고 비아냥을 받고, 수용했을 때는 ‘창녀’라고 비난 받기 때문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십대 남성들의 성적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고 성인 남성이 되기 위한 관문이라고 간주되어 고무되는 것과 비교되는 지점으로, 십대의 성에 대한 성별화된 시각은 십대 여성의 성이 조직되고 관리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톨만, 2005).

십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

그러나 이같이 성적 행위를 곧 피해자가 되는 것과 동일시하는 시도가 적지 않은 십대 여성들이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또한 설명하지 못한다. 성적 욕망은 개인의 몸 그리고 타자와 연관되는 것으로 자신의 몸의 느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아의 정체성 형성과 타자와의 친밀한 관계 맺기에서 중요하다. 사회적 보호를 잃을까봐, 부모와 친구들을 실망시킬까봐 “침묵하는 몸silent body”으로 있었던 십대 여성들이 “욕망의 정치학”을 인지하고 자신의 성적인 느낌들을 말함으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톨만, 위의 책, 119쪽). 십대 여성들은 성관계를 갖는 것이 곧 ‘창녀’가 되는 사회의 각본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많은 십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자신들의 성적인 욕망을 표현했을 때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고, 타인과 더 적극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감을 가지게 되면서 쾌락과 위험 사이에서 협상 능력을 지닐 수 있다.

십대 여성이 놓인 특수한 조건

십대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십대 여성이 위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성인 여성도 행사하기 어려운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되는 십대 여성이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무엇을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는 논쟁적인 부분이다.

1) 이중적인 성규범의 대상

여성은 조신하고 순종적인 딸, 애인, 아내, 어머니 등 여성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비난과 처벌을 받는다. 특히 십대 여성들이 순종적이지 않거나 성적인 행위를 하면 가정이나 학교에서 감시를 당하게 되고, 이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가출을 하기도 한다.

반면에 십대 여성들의 삶은 성애화되어있기 때문에 십대 여성들은 그들의 성과 성적 표현이라는 좁은 틀에 집중하도록 고무되고, 일부 십대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성애화하는 것에 참여한다. 또한 십대 여성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한편 대중 매체를 통해 성적인 것이 친밀함, 감정적 교류, 상호 존중, 행복 등을 의미한다고 배우게 되면서 자신들이 필요한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지지를 성적인 것에서 충족하게 된다. 성별화된 성애화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삶에서 성적이지 않은 많은 부분도 “성애화된 렌즈”로 보는 태도를 내재화하게 된다(샤프너, 1998, 272쪽).

2) 외모를 위한 소비

오늘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 지위를 드러내는 사회에서 십대들은 속물적인 욕망에서 기인한 계급의식에 지배받고 있다. 이들은 가정 형편이나 옷의 브랜드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고, 옷차림이 초라하면 또래로부터 소외를 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정 형편과는 무관하게 매스컴에서 선전하는 옷을 입게 된다. 십대들은 또래 그룹에서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 또는 더 많이 소비하기 위해 일하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되고 있다(쿼트, 2004, 41-42쪽).

이와 더불어 여성들에게 명품의 소비 뿐 아니라 몸이 자기계발 전략의 새로운 대상으로 등장하였다. 여성들은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몸을 가꿈으로써 자신을 드러낸다. 오늘날 여성들에게 몸은 곧 브랜드이며, 명품 몸매는 명품 브랜드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다. 섹시함은 많은 여성들이 원하는 자아의 이미지일 뿐 아니라 남성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지위 가치를 내재하고 있다. 많은 십대 여성들이 상호 격려하거나 견제하면서 외모를 가꾸고, 예쁜 외모를 지닌 친구가 십대 여성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현상은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십대 여성의 행위성

성적인 존재이면서 성적인 행위가 금기시되어 있는 십대 여성들에게 성적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 된다. 성적인 행위를 하는 십대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인 일탈을 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사회적 현실을 인정하거나, 또는 성적인 행위를 놀이나 재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여성의 성적 행위에 부여된 차별적이고 신성화된 의미를 탈각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의미화에도 불구하고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십대 여성이 대면해야 하는 사회적 시선은 냉정하다. 사정이 무엇이든 성을 매매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들은 ‘나쁜’ 소녀들로 낙인찍히고, 원조교제를 하면서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자신이 자초한 것이므로 사회적∙법적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성적인 경험을 했다는 이유로 명명되는 비유적인 의미의 ‘창녀’가 아니라 실제로 성을 매매한 문자적인 의미의 ‘창녀’이기 때문에 사회의 이러한 반응에 움츠려든다는 점이다. 이들은 원조교제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순결과 성적인 순진함 등이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닫게 되고, 왜 그렇게 많은 십대 여성들이 순결을 지킴으로써 안전한 공간에 있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모두 사후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조교제 경험이 있는 여성인 자신을 설명해내는 방식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이거나 모순적 사회에 대한 도전자일 수 있다. 또는 어린 시절의 실수라고 크게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자기 설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개인에 따라 그리고 상황이나 시기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할 것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제라는 큰 틀 안에서 선을 넘은 이들의 자기 설명은 이들의 행위성이 잘 드러나고 나아가 대안적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일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Alissa Quart(2003), Branded: the Buying and Selling of Teenagers, Perseus, ([나이키는 왜 짝퉁을 낳았을까](2004), 유병규, 박태일 역, 한국경제신문).

Deborah L. Tolman(2005), Dilemmas of Desire, Havard University Press.

Laurie Schaffner(1998), "Do Bad Girls Get a Bum Rap?", Millennium Girls, Rowman & Little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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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포럼

대중문화와 청소년

정소연(문화연대 대안교육센터 활동가)

1. 들어가기

청소년문화는 오랫동안 대중문화영역에서 중요한 논쟁지점이다. 90년대 이 후, 새로운 소비주체로서의 떠오른 청소년들은 아이돌 가수들의 등장 후, 팬덤 문화의 발생까지 자신들만의 문화적 세력을 넓히며 대중문화영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청소년 문화의 주요특성인 “일탈” 즉, 일상성의 전복은 제반질서의 붕괴 또는 뒤집기를 통해 일상의 억눌림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대적으로 강력한 군집성을 띄면서도 순식간에 개별적으로 흩어지는 측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끌리면 취하고 쓰면 뱉는 형태다.

즉흥적이고, 일탈적이며, 반항적인 청소년문화는 보수적인 사회적 통념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성문화의 충돌은 언제나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청소년들의 자극적 문화는 미디어를 통해 부정적 사회병리현상으로 비춰지면 “요즘 어린 것들은...” 이라는 말로 정리되며 청소년 보호론을 거세게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사회적 윤리 잣대로 “평가받아야하는” 문화로 전락한 청소년문화는 이 같은 제도적 견제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과거 소비주체에 불과했던 청소년 문화는 현재 생산주체 뿐 만 아니라 소비자 운동의 형태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소년문화는 여전히 연예인 따라잡기 정도로만 평가절하 되거나 공부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으로 배척당하기 일 쑤다.

본 발제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인 청소년 문화에 대한 이해와 맹목적인 추종, 수동적 문화로서의 청소년 문화가 아닌 대중문화 속에서의 청소년 문화의 리터러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 청소년 문화 개념의 이해

우선 청소년 문화라는 용어부터 따지고 들어가보자. 이 용어에서 풍기는 명백한 세대 구분의 냄새는 여전히 청소년 세대를 기성세대와의 대립으로 규정짓고 특정 사건이나 현상으로서의 구별되어짐을 바탕으로 한다. 자유분방하거나 반항적이거나로 정의되는 10대 담론은 세대담론에서의 외부적 구별짓기를 당하지만 사실 내부적 구별짓기는 보다 고차적이다. 취향, 계급, 지역, 성별, 문화적 성향, 최근엔 정치 담론과 성정체성까지 보다 세밀한 그룹들을 그저 단순히 10대의 문화로 구별짓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절대 10대를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청소년 문화는 연령적 구별이 아닌 사회 속에서의 권력관계, 문화 주체들 간의 모순성에 주목해야 한다.

최근 청소년 문화는 우려를 넘어 사회적 공포심을 양상하는 수준으로 진화하였다. 기성문화의 모방이지만 기성세대는 이해 할 수 없는 문화. 그래서 청소년과 연관된 다양한 문제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낯설듯 하지만 사실은 이미 익숙하게 진행되어왔던 사회적 병리현상의 발현에 대해 우리는 그저 그들의 문제라고 일축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대적으로 이미 일반적으로 변해 버린 것들을 단순히 비행과 버릇없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들은 대중문화에서 강력한 세력권을 행사하는 주체로 등장했다. 적어도 문화의 영역에 관한 한 청소년들은 다른 영역과는 다르게 중심주체로 자리 매김 되었다. 이는 그동안 N세대, 신세대 등 불분명한 연령층으로 불렸던 세대담론과는 다른 맥락을 가진다. 즉 청소년 문화는 세대적인 정체성이라고는 나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소비문화, 저항문화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3. 획일적 전체주의(tatalitarianism) 인가 자발적 전체주의(holism) 인가

2000년 이후 청소년문화의 가장 큰 변화는 자신들의 소비 욕구를 아주 신속하게 생산적인 욕구로 바꾼다는 것이다. 디지털 문화의 급속한 발전은 문화를 향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였다. 드라마 결말을 바꾸는 것,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에 대한 적극적 지지 및 활동방향의 제시까지 2000년 이후 청소년 문화는 적극적 주체로의 변화를 이미 마쳤다. 그로 인해 이미 대중문화 속에서 청소년들은 더 이상 재현이 아닌 새로운 볼거리로의 전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똑같이’가 아니라 바탕에서의 전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보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고 촉각적으로 어떤 내용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소비하는지에 관심 있는 2000년 이후의 청소년들의 문화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획일적 전체주의를 들이대며 걱정을 해대고 있으니 과연 이들의 귀에 이건 무슨 소리로 들릴 것인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청소년 문화 공간은 대폭 늘어났지만 공간의 자치 활용도는 여전히 부족하다. 지역의 청소년 수련관, 문화의 집들은 여전히 청소년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고 청소년들은 언제나 공간이 없어 방황한다. 주류문화에 저항하는 청소년문화로 인디문화, 독립문화 등은 몇 년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수 매니아 문화로 축소되고 평가된다. 여전히 청소년 문화는 새로운 스타일을 유행형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과는 무관하게 상품형식의 구성요소로 흡수될 위험이 많고 실제로 최근 많은 광고들이 청소년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스타일 변화를 선언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새롭게 변화된 청소년 욕구에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데 우리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따라 하기만 한다며 책상에 앉아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청소년들을 알고 있는가?

4. 이야기 해봅시다

청소년들의 일상은 인터넷 공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팬덤 문화와 청소년의 문화적 활동이나 세력권을 형성할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도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 성향이 두드러지며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디지털 문화의 발달은 그들만의 날것의 문화적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자율적인 참여가 가능하여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팬덤 문화역시 서로간의 적극적인 연대와 동시에 자신들만의 그룹의 이익을 위한 이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한편으로 혼자 놀기라는 이름의 개인적 독립화 현상의 가속까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옳고 그르냐가 아닌 좋고 싫음의 경계의 불명확성에 서있는 청소년 문화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디서,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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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인권포럼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야기

최승원(전남여고 교사)

1. 들어가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대부분 먼저 다가오는 이미지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 있었던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 충돌일 것이다. 이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보다 극적으로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던 교사의 활동과 수업 중에서 가장 원색적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학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질문이 가능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조선인 학생간의 충돌이 어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뿐이겠는가? 일제 지배 과정 동한 일본인-조선인 간의 충돌은 다양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광주에서의 충돌이 단순한 패싸움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처음에는 나주-광주를 통학하는 일본인-조선인 학생들의 감정이 쌓이면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렇게 우발적 충돌, 충돌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감정의 충돌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하고 항일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볼 때 비로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지와 지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2. 독서회를 기억하자

(1) 1920년대 학생 운동의 발전

거족적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을 거치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일제에 저항할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6년 6.10만세 운동을 학생들 스스로 조직하고 전개하면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 운동은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학생들은 자신들의 조직으로 각 학교에 독서회를 결성하고, 일본인 교원에 대한 불만, 학교 설비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학교당국에 저항하는 동맹 휴학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10만세 운동을 거치면서 동맹휴학은 ‘조선 본위의 교육 확립!’, ‘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 단위 학교를 뛰어넘는 반일적 성격의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사회 운동 세력의 대응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920년대 중반 각 세력의 입장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자치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다. 이들은 동맹휴학에 대하여 ‘식민지 교육’이 빚어낸 문제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동맹휴학은 민족의 역량 증대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고, 동맹휴학의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인 교사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사회주의 세력의 선동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당대의 학교 교육을 ‘맹목적 굴종적 봉건노예의 도덕과 논리를 청년 학생의 뇌리에 주입하여 반동세력의 도구를 만들고자’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학생들의 맹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맹휴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민족주의 우파와 달리 ‘교원자격과 학교설비에 대한 불평불만은 학생 측의 반항력이 폭발하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식민지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지적한다. 또한 동맹휴학의 원인을 학생의 도덕 결핍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치 석일(昔日)의 군신(君臣)관계를 의논함과 흡사’하다며 이러한 관념의 강조는 ‘지배 측에 선 자(者)임을 느끼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학생들의 맹휴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 지원을 하였던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사회주의계열은 1924년에 이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항일 학생 운동을 지원하였고, 사전 발각되어 전개하기 어려웠던 6.10만세 운동도 이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는 「강령」을 통해 학생 청년은 민족적으로 억압 당하고, 조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못하며, 학업을 마친 학생이 과잉 인구로 남는 것을 비판하며, 투쟁 목표를 일제 타도와 봉건 유제의 청산에 두었다.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일제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차별 교육, 노예 교육을 철폐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선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6.10만세 운동에 제출되었던 구호가 이후 각 지역의 맹휴에서 유사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성진회, 독서회 중앙 본부의 활동은 이들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 아래 학생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당원 또는 공청원인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강영석, 장석천 등은 왕재일, 정남균, 국순엽, 장재성 등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기반이 된 학생조직의 발전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광주지역의 독서회 활동

성진회는 1926년 6.10만세 운동 이후 지역의 학생들의 비밀 회합과 논의 끝에 11월 3일 결성하였다. 처음 참가한 학생은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등과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 정남균 등 16명이었다. 전남 지방 조공과 고려공청은 강해석, 지용수 등을 통해 성진회를 지도하였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 반대’를 지향하며 비밀 결사로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한 달에 1, 3주 토요일에 독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1927년 3월 모임을 주도하던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이 졸업하여 모임 개편이 필요하였고, 비밀 유지도 쉽지 않아 성진회는 해체되었다. 성진회의 운영기간이 짧아 모임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나, 성진회 활동이 이후 광주 지역 각 학교의 독서회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진회에서 활동하던 성원들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성진회 해산 후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독서 모임을 지속한다. 성진회에서 활동한 졸업생들은 후계자를 선정하여 재학생 지도하는 방법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유지하여, 1929년에는 광주고보, 광주농교, 전남사범 등에서 독서회가 유지되었으며, 광주여고보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독서회(‘소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 지역의 독서회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독서회에서 유력산 선배로 인정받았던 장재성이 각 학교 독서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고보를 졸업하면서 성진회 활동을 마쳤던 장재성은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유학하는 중에도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광주고보의 맹휴를 적극 지원하였고 방학 등으로 일시 귀국할 때에는 후배들과 만나 독서회 활동을 점검하고 있었다. 장재성은 1929년 6월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9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학생과 청년조직을 연결하며 적극적으로 독서회 조직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929년 6월 광주고보, 사범학교, 광주농교 독서회 활동 학생들과 만나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장재성은 책임 비서를 맡았다. 독서회 중앙부는 학교별 결사원에게 중앙부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각 학교 독서회를 재조직하여 각 학교별로 4개 반 가량의 독서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독서회원의 단결을 도모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회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학생 소비조합(문방구 판매)을 만들기로 하고, 지금의 금남로 공원자리의 장재성 빵집 옆 건물에 문방구점(학생 소비조합)을 차리고 내부적으로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 활용하였다. 이후 독서회 성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검증 조서에 의하면 문방구점의 2층은 방이 3개로 구성되었고, 큰 방에는 탁자 1개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등사판용 기계와 「공산당 선언」 등 몇 가지 사회과학 서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11월 3일 오후, 독서회 회원들과 장재성은 우발적인 집단 충돌을 의식적인 항일 투쟁으로 전화, 발전시킨다. 이어지는 11월 4, 5일 장재성은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장석천 등과 논의하여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시위를 전국화 할 것을 결정한다. 만약 의식적인 항일 학생 운동을 고민하고 준비하던 독서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11월 3일은 광주지역의 학생들 간의 작은 소요로 남았을 것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억, 기념하면서 광주지역에서 의식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들의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화 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활동하고, 주도했을 독서회들의 활동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동맹휴학

독서회의 활동이 있기 이전부터 자연 발생적인 동맹휴학이 있어왔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활동으로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민족적 자각을 키워갈 수 있었다. 광주지역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에 광주고보의 경우 1923, 1924, 1927, 1928년 총 4회의 맹휴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관공립 중등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이다. 한편, 광주농교에서도 1923, 1928년,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에 맹휴가 발생하였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맹휴는 성진회 회원 등 독서회와 연관된 사례가 높다. 대중적 저항 운동으로서의 맹휴와 독서회의 결합은 11월 3일 학생 운동을 항일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동맹휴학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광주고보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2월 초 맹휴 주동 학생을 처벌하지 않기로 학부형회의에서 약속한 교장이 주동학생 5명을 정학 처분하자 다시 맹휴를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광주농교에서는 3년 학제가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자 5년제로 승격할 것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1924년 6월 광주고보와 재광 일본 선발팀간 야구 경기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고보 일본인 교장의 의뢰로 관련 학생이 경찰의 취조를 받자, 이에 4백여 명의 학생이 항의하였고 교장은 전교생의 무기정학을 선언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고, 학부형들도 대회를 통해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맹휴는 9월에 수습되고 맹휴를 주도한 5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7년 5월 광주고보는 물리 화학교실의 신축 등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맹휴를 전개하였다. 시라이 교장이 이를 수용하여 맹휴가 마무리되었다.

1928년 3월 광주고보 5학년 학생인 이경채가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을 기재한 선언서를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주 등에 붙였다가 6월 체포되었다. 학교 측이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키자, 학생 대표들이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의에서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학교 측이 이들을 근신처분하자 6월 26일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이에 학교는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시킨다.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맹휴에 돌입한다. 이는 고보 맹휴에 대한 동조 맹휴의 성격이 강하였다. 학교 당국은 12명을 퇴학시키고 102명을 무기정학시킨다.

이에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맹휴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학부모 통고문을 보내고 교우에게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교장에게는 맹휴학생일동의 명의로 규탄서를 전달하기도하였다. 이를 지원하여 동경에서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우회 명의의 항의문과,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의 항의문이 발송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맹휴는 9월에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에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1929년 3월 졸업식에는 맹휴 주도 학생의 무더기 퇴학에 항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270여 명의 전교생이 교장실에 몰려가 면담을 요구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5, 6월경에는 화장식 벽 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 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으로 맹휴하자’ 등의 낙서 등이 나붙었다. 11월 3일은 느닷없이 오지 않았다.

3. 우연한 사건(?), 조직적 대응(!)

(1) 한-일 학생간의 갈등

눈을 돌려보자 1920년대의 광주-나주의 풍경과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학생 운동의 폭발은 독서회 등 지도부의 의식적인 노력, 의식적인 동맹 휴학 제안으로만 성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학생 대중의 광범한 동의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 소개한다.

1924년 봄 본정통(지금의 충장로)의 일본인 양화점에서 사소한 시비(?)로 격투가 벌어졌다. 발단은 일본인 주인이 구두를 제작, 판매하면서 같은 가격에도 조선인 학생에게는 질이 낮은 상품을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광주고보생이 항의하자, 양화점 옆 식료품점의 일본인이 가세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의 격투가 벌어졌다. 일본인이 기마경찰대를 부르면서 조선인 학생의 반일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6월 광주고보 대 재광 일본 선발팀의 야구 경기는 집단 충돌을 넘어 맹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그 안에 내재한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 의식이 독서회 지도부와 만나 조직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로 가보자. 당시 광주고보 학생의 1/6, 광주중학교 학생의 1/4가 나주-광주 열차로 통학하였다. 나주 지역에서 통학하는 일본인 학생은 지주, 상인, 공무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선인 학생의 경우 주로 중소지주층의 자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광주 간 통학을 하는 학생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영재라는 자의식과 식민지 조선인 학생이라는 피해의식이 혼재해 있었을 것이다. 복선형 학제로 광주 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상호 간의 경쟁의식이 강렬하였으며, 광주고보의 시설, 교육에 대한 불만도 컸다. 앞서 확인하였던 1927년의 동맹휴학은 그러한 불만을 잘 보여준다.

1929년 6월 나주-광주 간 아침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운암역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들이 개를 잡아 불에 그슬리는 것을 본 광주 중학 학생인 곤도가 ‘야만이다’하고 중얼거리자, 이를 들은 광주고보생이 ‘야만이란 무슨 뜻이냐? 조선사람을 가리켜 야만인이라 한 것이냐? 이것은 조선인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들은 광주중학의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은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광주고보의 교장에게 통보하였다. 그날 오후 하교 열차에서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곤도가 구타당하게 된다. 곤도는 나주경찰서장의 아들이었다. 이후 두 학교는 교사를 승차시겼고, 경찰에서도 형사를 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여 표면적으로는 무마되었다. 그러나 한-일 학생 간의 응어리는 감정은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1929년 11월 3일의 충돌은 예비된 것이었다.

(2) 11월 3일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간 통학열차를 탄 학생들이 하교하여 나주역에 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이때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였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가 후쿠다를 힐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으로 말하자 박준채는 후쿠다를 구타하였다. 이를 본 일본 순사가 박준채 만을 때리자 광주고보생들이 순사에 항의 하였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아침에도 시비가 붙었으나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31일 오후 하교 열차에서는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차장은 이들을 말리고 박준채와 후쿠다 등을 2등실로 연행하였는데, 2등실의 승객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후쿠다를 두둔하고 박준채를 비난하였다. 같은 칸에 탔던 당시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사 기자 또한 후쿠다에게만 경위를 취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모두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11월 1일 하교 시간에는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번져 집단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양측 교사의 제지로 충돌을 피하였다. 이 시기 일인 학생 학부형들의 요청으로 광주중학교 교사가 1개월간 영산포 여관에 숙박하며 학생들과 통학하였다고 하니, 당시 이 지역의 위기감이 컸음을 느낄 수 있다. 11월 2일 학교 주변에는 항일낙서가 학교 곳곳에 나타났다. 충돌은 없었다.

11월 3일 명치절이자 전남지역 산잠 6만석 돌파 축하연으로 광주 시내에는 인파가 붐볐다.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을 위해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개천절이기도 하였다. 기념식 후 신사(현 광주공원) 참배를 하도록 하였다. 11시 경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이 충돌하였고, 조선인 학생 최상을이 일본인 학생의 칼에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조선인 학생이 가세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인 학생이 광주역(현 동구 소방서)전으로 물러났다. 한편, 편파적인 보도를 한 광주일보(현 전일빌딩)에 항의하여 조선인 학생들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한일 학생들은 광주역전으로 몰려가 집단 난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늘어나 광주중학교 100명, 광주고보, 농교생 약 400명으로 일본인 학생이 밀리면서 성저리의 토교에서 대치하였다. 교사들의 만류와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장재성이 학교에 모여 선후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조선인 학생 300여 명은 광주고보 강당으로 모였다.

(3) 조직적 대응!

고보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관련 학생들의 경과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러 급진적 제안 속에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행동방침의 원칙을 제안하고, 시내로 재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 자리에는 장재성도 참석하여 당일 시내 재진출은 독서회의 주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교가와 응원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광주 시가를 한 바퀴 돈 시위대는 다시 강당에 모여 이후 연락 방법을 논의하고 방면 별 소대를 편성하여 해산, 귀가하였다.

학교는 임시 휴교를 단행하였고, 경찰 당국은 시위 주동학생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인 장석천, 강석원 등과 만나 시위 선후책을 논의하고 검거 학생 석방을 위해 재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격문 전단 4천 부를 인쇄하고 12일 수업 개시일에 맞추어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격문의 표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가) 우리 투쟁 희생자를 우리들의 힘으로 탈환하자!

나) 검거자를 즉각 석방하라!

다) 교내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방지하라!

라) 수업료와 교우회비를 철폐하라!

마)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사) 직원회의에 학생대표를 참석시켜라!

아)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차)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11월 12일 첫째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라’는 구호를 신호로 광주고보 전교생이 시가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때는 광주여고보, 사범학교는 학교 당국의 적극적 통제로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광주농교에서도 10수 명이 참여했으나 긴급 출동한 경찰대에 포위되어 참여하지 못하였다. 2차 시위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나 28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학교는 다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사이 학생 시위는 전남으로 확산되고, 서울 시위가 일어나면서 전국화된다. 1930년 1월 8일부터 광주에서는 개학과 함께 기말시험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백지 동맹을 결의하여 광주고보는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여고보에서도 2명이 퇴학당하고 17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다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획하다 광주고보생 48명이 퇴학처분을 받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여고보는 64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1월 3일 오후를 넘기면서 광주 학생 운동은 우발적 충돌을 넘어 조직적 항일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11월 3일 시위가 발생하자 서울의 각 사회단체는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원을 파견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11월 6일 광주로 내려와 진상을 파악하고 시위운동을 전국화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한편, 신간회에서도 허헌 등이 11월 8일 광주에 내려와 향후 계획을 협의하였다. 11월 12일 시위 이후 보도 통제로 시위의 진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조선인 학살’ 등의 소문이 나돌면서 비상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시위는 먼저 목포와 나주로 퍼졌다. 11월 10일 목포 상업학교 학생들이 장재성과 면담하고 19일 50여 명의 학생이 적기를 앞세우고 태극기, 격문을 뿌리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나주에서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다. 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조선민중만세’, ‘조선학생만세’ 등의 구호를 고창하였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학생 운동이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표면 단체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 두었던 학생전위동맹은 격문살포와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한편 조선청년총동맹도 11월 16일 상경한 장석천과 협의하고 신간회, 사상,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이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일제는 이를 포착하고 시내 사상, 청년 단체 간부 등 127명을 검거하고 격문 8,000매를 압수하는 등 검거에 혈안이 되었으나 12월 5일부터 14일까지 30여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맹휴에 참가하고 총 1천 4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휴교, 조기 방학했던 학교들이 1월 7일 개학을 맞자 또다시 서울 지역에서는 연합 시위를 전개한다. 서울의 시위가 알려지고 각 지역 사상, 청년 단체가 조력하면서 1930년 1월부터는 학생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 통계를 살펴보면 퇴학 학생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462명, 참가학교 194개교, 학생 수 54,000여 명이다. 국내의 학생 운동은 식민지 조선을 넘어 해외로도 확산되어 상해, 북경, 천진, 만주, 일본, 연해주, 미주로까지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4. 나오며 - 기념식 : 기념일 투쟁

1945년 해방 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이 전개되었다. 1953년 10월 30일 문교부령으로 ‘학생의 날’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지정한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학생의 날’은 6.25전쟁과 맞물리면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의식은 ‘반공’의 민족의식임을 알 수 있다. 1956년 12월에 학생의 날을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의 날’은 학생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1970년 11월 재경 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추진위원회는 전국대학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서울대 법대학생회는 학생의 날 기념토론회를 통해 학생의 기본권, 학생군사훈련 강화 등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971년에는 전국대학생연맹이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전국적 봉기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학생의 날’을 통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교육, 학생 관련 기념일을 통폐합 한다는 명분으로 각종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학생의 날을 제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생의 날을 즈음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독립유공자협회 등의 ‘학생의 날’ 부활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기념일로 지정한다. 이후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자리 잡혔으며, 한편에서는 역사적 주체로 학생의 위치를 재삼 확인하는 날로 의미가 지워지게 되었다.

2006년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뀐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1984년 부활한 ‘학생의 날’은 뚜렷한 추진 주체가 없이 광주광역시교육감이 주관해 광주지역의 일부 유족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초라한 행사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고, 명칭 변경 이후 교육부총리가 주관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11월 3일’이 화석화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학생의 날’은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으나,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명칭 규정은 ‘11월 3일’을 과거에 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로 단위 학교에서는 명칭 변경 이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경건하게’ 치를 것을 학생, 교사에게 요구하고 있다. 틀에 박힌 ‘경건’은 화석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11월 3일’을 어떻게 새롭게 불러낼 것인가?

학생의 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글도 비교적 예전의 것이지만,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우금치 기념사업에 참여한 지수걸 교수의 글에서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일제의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과거와 현실을 대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이른바 ‘기념투쟁’을 중시했는데, 일제 경찰이 만들어 배포한 이른바 「사상운동 경계력」에 따르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중시했던 기념일은 ① 1월 21일(레닌 사망일), ② 3월 1일, ③ 3월 2일(코민테른 창건일), ④ 3월 15일(2차 일본 공산당 검거일), ⑤ 4월 17일(조선공산당 창건일), ⑥ 5월 1일, ⑦ 5월 30일(상해 반일운동 기념일), ⑧ 6월 10일 <하략> 등이었다고 한다. 이런 날이 다가오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투쟁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경건한 기념식과 함께 민속놀이나 체육대회, 노래공연, 대자보 게시, 격문 배포, 기념 집회, 시위 등을 전개했다. 이 같은 ‘기념투쟁’은 계급적 혁명적 관점에서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기념행사는 특권화된 역사상을 의례적으로 반추하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요구나 정서를 반영한 민중 주도의 ‘기념(일)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기념투쟁’을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민중투쟁의 새로운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역사 만들기’는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찾고 가꾸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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