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고대인’이 되는가


곰팡이


1.jpg 

▲ 고려대는 하나은행과 업무제휴를 통해 스마트카드 한 장에 학생증 및 각종 전자화폐 기능이 들어간 고려대학교 전자학생증을 발급한다.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고대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특별한 함의는 단순히 고려대학교를 다니는 ‘고대생’과는 조금 다른 어감을 지닌다. ‘고대인’은 고려대학교를 사랑하고, 그 명문 사립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대가 사랑받을 구석은 별로 없다는 건 캠퍼스 안의 학생들로선 쉽게 공감하곤 한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와 사회적 담론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민주적 체계마저 박탈당한 채 학점과 취업경쟁으로 대학 생활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볼 때, 진리의 상아탑은 이미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어느새 우리는 붉은 색 옷을 입은 이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찬양조의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 합리적인 동기는 없다. 우리는 고대생이기에 고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아주 체계적으로 강요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만이 가능한, 엘리트의식으로 점철된 패거리문화와 ‘고대인’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몇 가지 행동규범에서 그 엄청난 체계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 없는 자기소개’ FM


‘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강요는 대학친구들과의 첫 인사치레, FM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 만나 아직은 어색한 이들과의 거리를 가장 먼저 좁힐 수 있는 이들은 새터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FM을 잘하는 이들이다. 강원도로 향하는 긴 시간동안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선배의 인사말과 함께 가장 먼저 진행되는 인사치레는 요란스러운 FM이었다.


새터 자료집에는 FM이 군사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자랑처럼 써져 있다. 군사문화의 가장 위험한 폭력성 그대로, FM에는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FM을 띄우기 위한 선창과 사람들의 환호는 그 폭력에 대한 거부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타인들의 눈총을 피해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민족고대 호안정대 자주정경6반 06학번’과 같이 전체로부터 수렴되는 정체성을 주입받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문화’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내면을 토해내고 ‘고대인’으로 변신하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는 정체성 주입은 사발식으로 이어진다. 사발식은 일제 치하의 보성전문학교 시절, 일 제국주의와 조선민족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일 경시청 앞에서 토악질을 하던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토사물을 내뱉은 곳은 일본 경시청 앞도, 미 대사관도 아닌 변기통밖에 안 되는 주제에 선배들은 드디어 너도 ‘고대인’이라며 등을 토닥여 준다.


그리고 더 무섭게도, 자유와 인격마저 박탈당한 채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의자위에 올라서서 FM과 막걸리를 대야(사발도 아니다)채 원 샷 하도록 강요받았던 새내기들은 비로소 강요한 선배와 똑같은 모습의 ‘고대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도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지 않느냐’는 변명과 함께 다음 해 과실의 달력에 큼직하게 사발식을 그려 넣는다. 대대로 재생산되면서 점점 커져만 가는 그 패거리 동류의식은 놀라움을 넘어서서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러한 획일적인 정체성과 공통의 가치규범으로 유인하는 ‘고대인이 된다는 것’의 매력이 궁금해진다.


‘학벌’이라는 가면


내적 발로로부터 발산되는 정체성이 차단당할 수밖에 없는 12년의 입시 전쟁을 치른 이들에게 각자의 인격과 개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몽달귀신마냥 몰개성한 이들의 얼굴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의 가면으로 덮어지기가 쉬울 것이다. 월드컵과 고연전의 공통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는 눈곱만큼의 주체성도 없이 비정규직으로서 하루하루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기계처럼 노동하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욕망에 의해 강요받은 대로 소비하며, 매 순간 부딪치는 인간관계마저 경제적 계급에 따라, 학벌과 동류집단에 따라 타산적인 관계로 조작당한 이들, 한마디로 ‘주물’된 인격들에게 집단이라는 가면은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고 자위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고대인’이라는 가면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계산대 앞에서 자랑스럽게 하나은행 학생증 카드를 내미는 쾌감을 또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쾌감은 혼자 즐기면 치졸한 생색이지만, 모두가 함께 즐기면 아름다운 문화가 된다. 경쟁이 습관처럼 굳어진 이들에게 남을 밟고 일어서는 그 쾌감이 FM과 사발식, 거리 응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계적인 정체성 강요의 결과는 절대로 학생증 카드를 내밀고 나서의 단순한 쾌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명문대생을 연예인쯤으로 바라보는 계산대 너머의 점원과 나 사이의 확고한 위계와 그 관계의 불편함. 그것은 학벌사회가 맺어준 관계망에서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일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주의의 피해자는 여기에 편승하지 못하는 ‘비(非)엘리트’뿐만이 아니다. ‘고대인’이라는 조작된 정체성을 강요받아 학벌사회의 경쟁논리에 던져지고, 또 그 그릇된 위계를 강화하도록 규정된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모두에게서도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역설적 지위가 부여된다.


모두가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잊고, 각각 고대와 연대의 가면으로 스스로를 대신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최상위집단으로 한데 뭉쳐진 오늘, 고대의 붉은 가면과 연세의 파란 가면이 내게는 월드컵 때 사방을 도배했던 태극마크로 보인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학생들을 감시했던 태극기의 권위처럼, 초일류 사립대 간의 각축은 엘리트 의식과 권위주의로 무장한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도 해야 할 것 같다.

,

공감주술 FM


아치


1.jpg 

▲ 연고전 시즌, 신촌입구에 연세대학교 응원단이 걸어놓은 현수막. 《(문구) 고대! 연대로의 편입의 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해리포터도 입시에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만 마법학교가 이 땅에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호그와트도 이래저래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마법학교 ‘카이(KY)’… 물론 처음 듣는 이름일 수도 있다. 맨 앞의 ‘스(S)’가 스르륵 떨어져 나가 꽤 낯설게 보이니까.


그런데 마법영재 해리는 어떻게 마법학교 ‘카이’ 입학을 거부당하고 재수 없게도 재수(再修)의 길을 걷게 됐을까? 하기야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계단 밑에 엎드려 사는 천덕꾸러기 해리가, 사교육 마술 없이는 결코 통과할 수 없다는 통합형 마술(논술) 입시의 덫을 어찌 재능만으로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 인문 마술학부 대기번호 96번을 가까스로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91번까지만 행운의 여신과 입맞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카이’의 9와 3/4 승강장을 두드리고 또 두드릴 것이다. ‘카이’는 다르기 때문이다. “Look KY. It's different." 글로벌 흐름에 맞춰 마법도 영어로 배우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꼭 별 다방 커피만을 마시니까.


학교에 들어간 새내기는 가장 먼저 선배로부터 공감주술(sympathetic magic) FM을 배운다. 어쩔 수 없이 설명 들어간다. 공감(共感)이란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비슷한 심리를 만드는 일이다. 공감의 대상과 나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심리적 동일성을 경험하려 하기 때문에, 일체화나 동일화와는 다르다. 한 마디로 공감하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위계가 있다는 말이다. 주술은 어떤 행위를 바르게 흉내 내면 그에 걸맞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고, 흉내 내면 어떤 일이 그대로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고 형태다.


새내기는 아무 생각 없이 선배가 시키는 대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몸짓도 크게×3 주문을 외치는 게 좋다. 대략 난감해도 대략 공감이라도 해야 한다. 이 간단한 주술만 제대로 익히면 그 뒤로는 순탄하게 마법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헤르미온느와 같은 성별을 지닌 새내기는 에로틱 FM 주문을 외우면 더 큰 편애를 받을 수 있다. 자칫 가장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다가 자신이 앞으로 누릴 모든 달콤한 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12년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게임으로 즐기시라.


이것만 통과하고 나면 귀찮기는 하지만 꼼꼼히 챙겨주기만 하면 되는 학점주술 밖에 배울 게 없다. 그러면 늙어 죽을 때까지 무한대의 학벌주술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 호그와트처럼 거추장스러운 마술 지팡이 따위는 필요도 없다.


그런데 솔직히 나 같이 천한 머글이 보기에는 그 마술이란 것들이 이해가 안 되고 오해가 오며, 이상한 게 아니라 요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거 뭐 마술도 아니고….’ 부디 고귀하신 마법사들께서 머글의 헛소리를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란다.


87년, 허접한 머글 학교의 새내기였던 나는 영광스럽게도 마법학교 ‘카이’의 ‘퀴디치 경기’인 셈인 ‘카이전(고연전)’의 뒤풀이에 초대받았다. 빗자루 대신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나타난 친구 녀석을 따라 안암골로 간 나는 그날 요단강 강물 대신 막걸리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K와 Y 양쪽의 FM 주문에 귀가 멍멍하고 그들의 광기에 타자로서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떤 권위나 동질화의 논리도 의심하고 거부하던 나였지만, 자리를 지킨 건 그냥 공짜 술이 더 좋아서였을까? 결국 누가 그리핀도르인가를 놓고 K와 Y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가지고 있던 나는 꼼짝없이 친구와 한 패로 몰려 안암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글 출신의 경찰이 웃음기 띤 몇 마디 잔소리로 훈방 처리! 경찰서에서 나온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막걸리 집을 찾아 끈적끈적한 우애를 다졌다. 역시 마법의 힘은 위대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FM주문도 짤막해지고 귀엽게 바뀐 것 같다. 특히 주문 앞머리의 ‘자유 민주’가 ‘통일’이 되고, ‘민족’은 여전히 ‘민족’이라는 게 눈에 띈다. 현재는 자유와 민주가 이뤄진 상황이라 통일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마법사들의 말처럼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가 이뤄졌을까? 10,000,000 비정규 머글에게, 입시 앞에선 인권도 없는 청소년 머글에게,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화장 떡칠하고 살 빼고 성형해야 하는 여성 머글에게 자유와 민주가 오롯이 왔을까? 통일을 사라져버린 구닥다리 ‘통일호’ 열차쯤으로 여기는 젊은 마법사들이, 자기 이름에 앞서는 정체성으로 그것을 내세운다니 믿을 수 없다. 또 'Global KU'에서 쑥스럽게도 변함없이 민족이 들먹여지고 있다. 설마 아직도 단일민족이라는 초글링 개념을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FM이 학생운동의 잔영이라면 이제는 모든 ‘카이’가 이른바 ‘운동권’ 된 것인가?


당신은 선배의 이름으로 후배에게 FM주술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 모진 순응(수능)시험을 보고, 그 지긋지긋한 12년을 떨쳐내려 하는 새내기에게 당신은 웃으며 ‘야전 수칙’을 들이민다. 누구도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할 수 없다. 이곳은 마법 학교다. 위계질서를 체화하고 자유를 꿈꾸지 말 것. 그러면 새장 째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새가 될 수 있다. 대학 역시 폭력과 경쟁밖에 없다. FM으로 기를 팍 죽여서 머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라. 그러니 이왕이면 서로 웃으면서 코미디 클리셰에 충실하면 어떠하리.


사실 진짜 코미디는 하늘 위의 하늘 ‘스(S)’는 FM주술 같은 2류 마법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순응(수능) 1%의 순수 혈통이고, 대기번호 따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 교활하고 뛰어난 슬리데린이니까. 오두방정 떨며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경천동지할 흑마술 정도는 써야 머글을 지배할 진정한 마법사가 아닐까?

,

담장 없는 사회를 바라보며, 연고전 담장 부수기!

 

학벌없는사회

 

"9월은 내게 있어서 정말 신나는 날이다.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응원실력을 우리들과 비슷한 그들과 함께 겨뤄볼 수 있고, 서울 안암/신촌골 거리를 활보하며 우리들의 단합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거 생각만 해도 신나는 걸?"

 

올해도 어김없이 9월이 찾아왔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에게 9월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정기 고연전’일 것입니다. ‘필승! 전승! 압승!’의 슬로건으로 벌써부터 그들은 크게 들떠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응원단들의 연습소리가 끊이질 않고 학생들의 입에는 올해 고연전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연전은 9월의 즐거움으로 자리 매김 되어 있는 듯합니다.

 

고연전에 대한 소고
 

가을은 식욕의 계절, 독서의 계절, 그리고 소위 ‘2만 고대인의 축제’인 고연전의 계절입니다. 고연전이라는 축제는 고대의 문화 중에서 규모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입니다.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고, 또 즐기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대의 '최고'의 문화가 과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을 해봅니다.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고대의 문화토양에서, 고연전은 그것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자리였습니다. 야성과 패기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격렬한' 문화는 여성들에 대한 동의와 배려 없이 진행되는 문화입니다. 그 틈에 끼어 자신의 주장을 밝히지 못했던 많은 여학우들의 역사가 바로 고연전과 고대의 문화의 역사입니다.

고연전, 연고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축제는 순수하고 순결한, 단순한 축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대 사학’이 매년 자웅을 가리기 위해서 5개의 운동경기를 벌이고, 그것을 학생들이 응원하는 행사는 말 그대로 고대와 연대 어느 쪽이 잘났는지 밝혀내기 위한 상징적인 싸움입니다. 마치 한일전과도 유사한 모습을 띠는 이 경기는, 하나의 전제하에 이루어집니다. 

 

이 전제는 바로 '학벌 라이벌'이라는 전제입니다. 매년 연대에서 연고전을 하지 말자고 주장이 나오는데, 이 주장 중 하나가 '수준 이하의 고대와 라이벌로 비추어지면 연대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최고위급 학벌을 가지고 있는 SKY에게만 열을 내고 즐길 수 있는 고답(高踏)적인 농담이겠지요. 고연전은 고대와 연대를 홍보하고, 그들을 다른 대학과 차별하기 위한 학벌주의적인 멋진 기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 대안을 모색하는 안티고연전!

 

하지만 자신은 축제를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고연전이 너무 좋다는 학우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학교의 운동경기를 편 갈라서 응원하는 행사인 고연전. 학교의 색을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학교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응원. 뜯어보면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이 문화가 고대의 일 년의 최대의 축제라는 것은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축제는 좋습니다. 그런데 축제는 더 다양한 모습으로 다른 형태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존재해 왔던 문화가 아니라 각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축제. 

 

위와 같은 고연전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고연전을 다양다각으로 비판하며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문화를 모색해보자 <교육생각 기획>기사로 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매번 문제제기 되고 있지만, 강행되고 있는 일제고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봤습니다. 글을 읽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생기신 분, 편집일꾼에게 꼭 한 마디 해 주고 싶으신 분, 관심이 생겨서 같이 해보고 싶다는 분,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해달라고 해 주실 분. 이 모든 사항들에 해당되시는 분들과 함께 학벌없는사회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달려 나갔으면 합니다. 자, 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