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원 (조선대학교 강사,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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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광주시당 위원장 윤난실 씨가 지난 1월19일 광주광역시의회 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광주 시립대학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도 5월초 조선대학교 구성원과 시민사회단체에 조선대 공립화를 위한 시민모임을 제안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호남의 대표 사학인 조선대가 교육과학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정이사(正理事) 선임 강행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 장기적인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조선대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도 커다란 악재가 아닐 수 없다. 조선대는 단순한 하나의 사립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대는 해방직후, 각계각층에서 72,000여 명의 인사들이 국가를 건설한 새로운 인재를 지역에서 양성하자는 대의에 동의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성의를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다. 그러나 설립자 중의 일인이었던 구 재단의 고(故) 박철웅씨가 재단을 사유화하고 전횡을 휘두르면서 학교운영이 파행을 거듭했으며 결국 1988년 1월 8일 학생들의 100여일이 넘는 투쟁과 뜻있는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고(故) 박철웅씨가 재단에서 물러나면서 정상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구 재단 측은 이후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학교를 다시 탈취하려고 했지만 법에 의해 그리고 학교의 정상화 및 민주화를 추진하던 모든 이들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대가 20여 년의 관선이사 체제를 끝내고 정이사 체제로 전환하려던 시점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으며, 새로 집권한 정부의 친자본적 경향에 편승해 구 재단은 학교 본부, 교수평의회, 교직원노조, 학생회 및 민주동우회를 포함한 동문 등 거의 모든 관련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단이사의 선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교과부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동의하에 새로운 이사진에 구 재단 관계자들을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조선대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교과부의 결정에 반대하고 새로 구성된 정이사 퇴진 투쟁을 전개하면서 조선대학교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학내 곳곳에는 재단이사진의 총사퇴와 구 재단 관계자의 학내 진입을 성토하는 표어로 가득 찼으며, 이로 인해 캠퍼스는 40여 년 만에 찾아온 이상기온처럼 스산하기만 하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대가 단순한 하나의 사립대가 아니라 해방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수많은 민초들이 각자의 성의를 모아 설립한 민립대학이라는 점에서 동시에 거의 대부분의 졸업생과 재학생이 이 지역의 아들딸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대 문제는 단지 조선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며, 따라서 조선대 구성원을 중심으로 모든 지역 구성원들이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미 조선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해법이 제시되어 있다. 일부 구성원들은 정상화를 위한 4대 원칙(설립정신계승, 구 재단 배제, 1.8학원민주화정신계승, 조선대의 미래지향적 가치충족)에 의한 정이사 재구성, 또 다른 일부 구성원들은 민립대학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으며. 6월에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한 한 시장후보는 조선대를 공립(시립)대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조선대 정상화를 위해 제시된 방안들이 모두 조선대 구성원들이 제시하는 ‘정상화 4대 원칙’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는 문제는 학교를 운영할 자금과 발전을 위한 학교 운영을 위한 이사진의 구성이다. 조선대가 지금까지 내실 있는 운영으로 학생들의 등록금만으로 학교를 운영하면서 동시에 일정 규모의 기금을 조성했지만, 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 조성된 기금의 규모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중앙대학교의 파행적인 운영에서 보듯이 거대 자본을 재단으로 영입하는 것도 옳지 않다. 동시에 현재의 사립대 재단이사 구성에서 교과부가 승인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구성원들이 주장하는 4대 원칙에 부합하는 이사진을 구성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 조선대의 공립화가 적절한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대를 공립화하면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확신한다. 첫째, 모든 구성원들이 염원하는 민주적 이사진을 구성할 수 있다. 사립학교법이 존재하고 있는 현재 구조 아래에서는 조선대의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며 설립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민주적 개혁적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특히 조선대 문제에 대해 피상적 이해만 갖고 있는 교과부가 이사 구성의 전권을 행사하는 한 조선대 구성원들이 주장하는 4대 원칙을 견지할 수 있는 이사진을 구성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 정부에서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학교운영 전반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사가 되기 위해 이런 저런 적절치 못한 사람들이 교과부 또는 정치권을 통해 이사로 임명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조선대를 시립대로 전환한 뒤 광주시 산하에 ‘시립대학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고 대학에 대학 깊은 이해를 갖추고 있는 지역 출신의 구성원과 동문, 전문가, 시민단체 인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사진을 구성하여 상호 비판과 견제가 가능한 이사진을 구성하고 독립적인 운영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지자체가 조례로 이를 보장한다면, 지원과 운영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대학의 독자적이고 자율적 운영을 보장할 수 있다.

둘째, 등록금을 인하해 지역 인재의 역외 유출을 방지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는 인재를 길러낼 수 있다. 현재 광주/전남 지역의 중·고 수준은 전국 상위권에 속하지만 우수학생 상당수가 수도권으로 진학하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대부분 지역 밖으로 유출되고 있는 것이다. 조선대를 시립대로 전환해 국립대 수준으로 등록금을 낮춘다면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에 남도록 할 수 있다. 특히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자체의 공무원 임용규정을 활용해 시립대 출신의 훌륭한 인재들을 채용하고 이들에게 고향의 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효과는 더울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인재 확보와 지역사회 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지자체의 재정능력에 우려를 표명하는 견해가 있지만, 지역교육에 한해 380억 원을 투자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 정도의 예산은 연말마다 반복되는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치우기나 불필요한 토건사업 한 두건을 줄이는 것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정이사 선임 문제로 다시 점화된 조선대 정상화 문제가 다시 장기화 된다면 가장 직접적으로는 학생들에게 그리고 학교 구성원들과 이 지역에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으로는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어려워 보인다. 공립화라는 단어가 조금은 낯설고 쉽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합의만 이룰 수 있다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모든 구성원들과 지역민들의 적극적이고 대담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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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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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광역시학생인권조례제정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지난 5월 20일 광주 YMCA 백제실에서 ‘학생인권조례제정 등 학생인권복지신장 정책협약식’(이하 정책협약)을 가졌다.

요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지금도 인간답게 살기위해 희생해야 하는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하나의 주체들이 있다. 바로 ‘청소년’이다. 한국사회 청소년은 과도한 입시경쟁교육 시스템과 열악한 사회 환경 속에서 고통 받고 있지만, 누구도 그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늘 그렇듯 문제의 본질은 외면한 채 그저 청소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고만 있다. 이 처절한 경쟁과 열악한 사회조건 속에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힘들어 해야만 세상은 알아줄까.

특히 광주는 수능성적 1위의 허울아래 감춰진 교육청 청렴도 2년 연속 전국 최하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사교육 시설 증가율 전국최고, 지자체 교육복지 투자 예산 전무(교육복지투자우선지원사업 중 해당 부문 최하위 평가) 등 청소년의 삶이 매우 심각한 지경에 처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여전히 경쟁교육에만 치중하고 있고, 지자체는 청소년의 행복한 삶의 공간으로서 지역사회가 가지는 의미를 간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삶의 주요 의제들이 대두되는 선거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투표권이 없는 청소년들은 여전히 소외되기 일쑤고, 그러한 냉정한 정치적 이해득실의 판단으로 인해 교육․청소년 정책은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학생인권은 물론 노동, 빈곤, 장애, 성차별, 가정형태, 국적 등 사회지원이 절실한 청소년들을 위한 정책까지 외면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 급박함과 요구의 절박성에 출발하여, 뜻있는 청소년활동 단체와 개인들이 광주지역 청소년들이 보다 평등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기 위해 서로 긴밀히 연대가 필요하다. 경쟁과 보호의 논리로 청소년 권리증진과 지원 축소를 당연시하는 시각을 바로잡고, 올바른 교육․청소년정책이 실현될 수 있도록 건전한 비판과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145만 시민들과 함께 학생․청소년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청소년인권조례’. ‘학생인권조례’, ‘교육복지조례’ 등을 지방자치의 주된 의제로 다시 회복시켜 광주가 ‘청소년이 행복한 도시’로 재탄생하도록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위가 필요하다. 아울러 지역의 청소년정책을 연구하고 광주지역 다양한 인적․물적 자원을 연계하여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복지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최근 광주학생인권조례 추진위에서는 광주지역 청소년의 다양한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구하고 참여와 협력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청소년정책회의를 구성하였고 아래와 같은 의도로 시작하였다.

첫째, 청소년들의 실질적인 인권을 실현한다.

둘째, 지역사회 청소년들이 청소년 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권리의식과 참여의식을 확대한다.

셋째, 지역사회의 교육․청소년정책과 현안에 대해 연구 조사하여 정책 대안을 마련한다.

넷째, 지역사회 교육․청소년정책과 행정에 대한 감시 참여활동을 전개한다.

다섯째, 지역사회 청소년 관련 기관 및 단체, 학교와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정책운동의 역할

경기도 교육감이 진보세력의 상징이 되어 고군분투한 끝에 2010년 지방선거의 주요 의제로 ‘교육복지’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지자체 및 교육청의 수장을 준비하고 있는 대부분의 예비 후보자들은 ‘무상급식’을 공약화하며, ‘한정적 복지’를 기조로 하고 있던 MB 정부를 당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미 ‘보편적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제는 ‘복지권’을 통해 총체적인 청소년의 권리를 환기시키고, 그것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지방선거 공간에서의 수동적이고 개별적으로 대처하는 것을 극복하고 청소년 관련 공약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청소년 단체와 교육운동 단체, 사회복지사, 교육복지가 등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된다. 위장된 중립적 개입이 아닌, 보다 공세적인 실천을 말이다.

이를 위해 광주의 교육․청소년정책을 만들 때 우선시 되어야할 점은

첫째, 청소년을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홍보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둘째,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교육복지 발전을 위하여 교육감 및 지자체장들에게 정책을 제안하고, 관철시키도록 해야 한다.

셋째, 시민들에게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교육복지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제공해야 한다.

넷째, 향후 제시한 정책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니터링하는 등 감시와 비판 및 견제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특히 2010년 지방선거 이후,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각 정치세력의 향후 사회․정치적 기획을 가늠해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선거 공약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다음 선거를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의 청소년 활동 및 인권증진과 다양한 청소년 조례운동의 기획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물론 정책운동은 전문가 지식, 자료조사, 충분한 검토, 경험 등 이 필요한 일이라 활동가 개인들이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광주지역 청소년을 책임지는 주체로서 청소년정책을 함께 발굴하고, 후보자와 시민들에게 제안함으로써 청소년이 행복한 삶을 형성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뜻 깊은 일이라면 사소한 질의이라도 지금 고민해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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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태 (법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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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헌법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헌법이 죽어간다' 퍼포먼스를 진행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KT 앞으로 이동해 진행하고 있다.

2010년의 한국사회는, ① 수능시험 잘 못 보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② 각종 공무원시험이나 취직의 실패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③ 육아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낙태할 수도 있는 사회, ④ 살인적인 노동 강도 때문에 목숨 걸고 ‘투쟁’ 끝에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⑤ ‘투쟁’ 안 해도 때로는 작업환경 자체가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회, ⑥ 먹고사는 터전을 국가가 ‘개발’의 명목으로 매우 쉽게 제거할 수도 있고 농민들이 농약먹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⑦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⑧ 속칭 ‘남들이 보기에 꽤 괜찮은’ 직장과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주식실패,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⑨ 돈도 있고 ‘먹고 살 능력은 있는’ 노인들도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⑩ 이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장애인들이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⑪ 그러면서도 ‘유색인종’을 무시하는 사회,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정답은 ‘이순신’입니다. 백 중 99는 이것을 ‘정답’이라고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이 잣대를 들이대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저의 본적 성당인 안산 성마리아 성당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지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성당이지요. 이 성당을, 누가 지었을까요?

어떤 신부님은 ‘내가 지었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자들은 ‘신자들과 신부님이 합심해서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신자들은 ‘내 돈 내서 내가 지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직접 그 건물을 건축한 ‘xx건설’도 ‘내가 지었다’고 하겠지요. 아마도 정확하게는 그 회사 사장이 ‘내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직접 망치질하고 시멘트를 바른 노동자들 또한 ‘우리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신심이 깊은’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지으셨다’고 할 테지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철갑선의 구상은 이순신 장군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이 땅의 조선(造船) 노동자들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비용을 댄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음식 등을 제공한 여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갑선의 구상 중에서도 세부적인 부분에 개입하거나 작업에 참여한 이순신 장군의 동료 장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큰 배가 한 척 나가려면 5명 정도는 죽어나가고, 아파트 한 동 짓는데 평균 2명은 죽는다는데, 그 시절에 ‘산업재해’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철갑선을 만들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저는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다’고 정답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만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 작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런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이란 애초에,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만든 게 되는 게 아니라, 거북선을 만든 데 참여한 무수한 사람들 중에 거북선을 만든 사람을 이순신으로 하자고 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만은 분명합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라는 말은 ‘팩트’라기 보다는 ‘합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질문에는 오히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지요? 거기에 정답이 있을 수 있나요? 라구요. 혹은, (그 작업에 참여한 많은 사람 중에 굳이)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라구요.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①에서 ⑪까지 나열한 한국사회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그 만큼 우리 주위에서 죽음을 목격하기가 쉬운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한국사회는 누가 만들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하는. 철갑선은 쉽게 생각해보면, 당시의 ‘바다 위의 살인 병기’였을 것입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조선에서 철갑선이 세계 최초로 등장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란 생각해보면, ‘무역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약한 고리를 공격하거나 자국 스스로 내부 식민 사회를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온갖 좋은 말로 포장을 해 봤자, 누군가(또는 다른 국가)가 받아야 할 몫을 조금씩 떼어 와서 ‘몰아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한국사회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을까요? 비슷한 논리는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경제대국’을 ‘군사강국’ 또는 ‘강성대국’이라는 용어로 바꿔주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 성장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이 박정희가 해낸 일이라고들 합니다. 좋게 봐주자면, 박정희의 ‘지도’ 아래 ‘산업역군’ 한국 국민 전체가 해낸 일이라는 말이겠지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찬양하는 경우에도 김대중과 김영삼과 민주화운동을 한 전 국민이 했다고들 합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도 물어보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자살율과 낙태율이 높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조금 구체화시켜 보겠습니다. 2009년 봄, 용산에서 한 건물 철거에 투쟁하던 세입자 일부와 진압하던 경찰이 죽었습니다. 세입자는 누가 죽였습니까? 강경 진압한 경찰이 죽였습니까? 경찰은 누가 죽였습니까? 투쟁하던 세입자들이 죽였습니까?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강경진압을 지시한 당시 경찰청장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 근본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재개발이익에 개입하는 용산구청과 삼성물산 같은 대자본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집 값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해마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불길한 소식들이 전해집니다. 이제 수능 망친 누구가 어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더라, 와 같은 이야기들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왜 자살하는 것입니까? 수능 시험을 못 보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는데 망쳤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까? 주위 친구들보다 못 봐서 부끄러워서, 부모님 뵙기 죄송해서 자살하는 것입니까? 근본 원인은, 한국 사회가, 사실상 신분이 되어버린 학벌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더욱 근본 원인은, 소수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는 한국 중등 교육이 그 목적에 따라 ‘선발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그에 따른 ‘지식 몰입식 교육 방식’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죽습니다.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구상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저는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훌륭하신 한국의 교수님들과 철학자님들과 선생님들과 정치인님들과 판사님들과 검사님들과 변호사님들과 의사님들과 뭣님들과 뭣님들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 가운데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이 만일 잘 안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어야 할 텐데, 상황은 반대로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명박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을 ‘이명박’이 합니까? 그렇지요. 거북선도 ‘이순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판에. 생명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저는 요즘에야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솔직히 제가 제일 두려운 것은 확실시되는 수질 악화로 인한 전염병 창궐인데, 사람들은 ‘강’을 참 좋아하는구나.

뭐, 이유야 어쨌든, ‘4대강 사업’하는 게 토목 건설사들 배만 불리는 일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 사업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어떤 교수는 4대강 사업을 하면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은 아이큐가 100정도만 되면 알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거구나. 이게 그렇게 신랄한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로구나.

재개발을 해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재개발을 그만 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수능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투쟁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비정규직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주식투자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군 복무 중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군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생각해보면, 제 생각 자체가 참 어리석습니다. 성매매와 도박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세상에 판칩니다. 없애자고 법 규정까지 만들어도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재개발하는 것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재개발 과정에서 죽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수능시험제도 만들어 둔 것이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대학입시 과정에서 자살하는 수험생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비정규직 만들어 둔 것도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비정규직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아군 죽이자고 군대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자살하는 군인들은 생길 것입니다. 투자자 죽이자고 주식시장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주식투자 실패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4대강 사업’도 별반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게 거짓말이든 말든 강 살린답시고 강 좀 파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수질 좀 악화되고 농민들 쫓겨나고 사람들 좀 죽으면 어떻습니까? 돈이 되는데. 언제는 진리와 가깝기 때문에 공부했고 노동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산업역군이 되었고 국방의 의무가 신성해서 군인이 되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속세를 넘어서려다 보면, ‘성경’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도 적나라한 속세를 마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반말’을 합니다. 다른 것을 다 접어두고, ‘무엇이 더 복음적인가’를 항상 고민하시는 신부님, 목사님, 여러 한국의 성직자분들은 공생애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말을 툭툭 던지는’ 것으로 성경을 번역해 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한 번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반말 존댓말 구별이 없는 히브리어이지요. 라틴어나 그리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복음을 존댓말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은 이런 면에서 조금 자유로우신 듯합니다. 말씀이 한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그러니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헌법 10조)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반말 찍찍 싸면서’ 잘난 체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리’라는 것을, 혹자는 ‘논리의 결정체’라면서 추앙합니다. 하지만 논리와 진리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논리는 여러 가지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법리구성이 가능합니다. 조금 조야하게 표현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논리’의 핵심고리란, 실은 ‘우기기’다”라구요.

헌법재판소는 헌법 10조의 적용에 관하여 “기본권제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거나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보장조차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다면, 헌법 제 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반된다”고 판시(98헌마 216)한 바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 필요한 보장만 규정’하면 적어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이라는 판결은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아주 적은 판결들을 보면 대개 10조에서 파생되는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했다는 것들입니다. 유명한 동성동본금혼 헌법불합치 판결(95헌가6등)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고, 18세 미만 당구장 출입금지 위헌 판결(92헌마80)은 당구를 통해 소질과 취미를 살리고자 하는 소년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침해를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18세 미만자에게 당구장 못 들어가게 하는 게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 판결이 이미 18년 전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다른 조문도 아니고 헌법 10조 위배를 이유로 말이지요. 그러나 4대강 사업 한다고, 재개발 한다고, 쫓겨나는 사람들에게는 ‘헌법 10조 위헌’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필요한 보장’, 곧, 보상금이 지급되니까요. 이러한 구조에서는 본질적인 부분은 가려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마음대로 18세 미만자는 당구장 출입 금지 시켜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건물 철거해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농토에서 쫓아내도 돼?” 이런 질문들이지요. 그런데 보상금 싫으니까 농토에서 쫓아내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2010년 한국사회는 ‘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돈 받고 나가라는 거지요. ‘4대강 법’들도 헌법재판에 가면 위헌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날 ‘만들어진’ 한국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본다면,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다니는 하나의 ‘길’일 것이고, 그것은 마치 혈관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꾸 죽어나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어떤 지점들에는 생명의 붉은 피보다는 죽음의 검은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 있는 것이 ‘헌법’일 터, 그래서 저는 반말로 된 헌법전을 존댓말로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가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누가 만들지 잘 모르겠지만, 죽음보다는 삶과 가까운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삶을 대우’받아야만 합니다.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존엄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이 담긴 채로 말이지요.

사람의 몸 안의 수많은 세포들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번식하고 사라지지 않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라고 하더군요. 결코 죽지 않는 암세포들이 신체를 장악하면 생명은 멈춥니다. 사회라고 얼마나 다를까요? 한국전쟁 60년, 한국사회에서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자라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암세포들은 단칼에 쳐내야만 하고, 그것이 서양의학의 ‘수술’일 테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몸을 건강하게 하기는 힘듭니다. 암도 재발할 수 있구요. 따라서 몸 전체에 활기를 띠게 하여 건강을 되찾는 한의학의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를 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암세포의 특징이, 일단 살아 있는 세포를 죽이고 본다는 것인 듯합니다. 살아 있는 세포는 죽이고 암세포를 번식시키자. 이것이 유일한 목표인 듯합니다. 법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부족한 저이지만, 법 공부를 하다보면 사회의 저명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헌법 지식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지한 건지 무지한 척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솔직하게, ‘헌법 기본서 한 번만 읽어 봤어도 저런 말과 저런 행동과 저런 식의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듯이, 남도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다’는 게 현대 자본주의 헌법의 핵심정신(재산권 보장+공공복리)이고 여기서 모든 기본권이론과 기본권 조항들이 생겨나는데, 이걸 부정하는 암세포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활약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도 많이 듭니다. 저는 조금 간단한 지표로, 그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는지’, ‘죽여가고 있는지’는 한국 사회의 자살율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알아갈수록, 또는 알아간다고 생각할수록,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만이 자명해집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주제로 종종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헌법 조문과, 기존의 판례 검토와 해석, 그리고 사견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1) 즐겁게 쉬는 다른 방법을 잊어버렸고-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2) 각종 현안에 대해 몸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듯한 저 자신의 ‘연대 방식’에 대한 고민의 산물입니다.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헌법을 존댓말로 읽어보자고 생각한 저는 혹시빨갱이가 아닐까요? 저도 저를 잘 모르겠는데, 저를 뭐라고 부른다면야... 저를 누가 뭐라고 부르든지 그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으나, 저는 빨갱이라는 용어의 반대용어로 ‘검죽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거무죽죽하다’+‘죽어간다’는 말인데, 시도 때도 없이 남들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검죽이’라고 불러주면 괜찮을 듯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말은 해두어야겠네요. 저는 김정일을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거짓말을 잘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집단을 싫어합니다.

글을 쓰는 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① 대학입시 없는 사회, ② 취업으로 등급 매기지 않는 사회, ③ 낙태 없는 사회, ④ 사람이 할 만한 노동 강도를 요구하는 사회, ⑤ 노동환경이 보장되고 농민이 우대받는 사회, ⑥ 국가권력이 일반국민을 두려워하는 사회, ⑦ 군대 없는 사회, ⑧ 재화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 ⑨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 ⑩ 거리에서 자주 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사회, ⑪ 겸손이 미덕인 사회, 이런 사회가 ‘완벽에 가까운’ 사회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 그런 방식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입시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수능거부를 하는 친구들이 있고, 비정규직 넘쳐나도 비정규직 철폐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고, 의무복무제도임에도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장애인 이동이 현실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거리로 나오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어떤 일들도 결과적으로 악취만을 풍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뿐입니다.

법 공부를 할수록 드는 의문은, 국가에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이유로 법을 공부할 의미가 생깁니다. 국가와 권력과 자본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고삐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로 반드시 법을 알아야 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법은 글자인데, 그 글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또한 법 그 자체도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의 한국 사회는 ‘겸손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저의 자기확장욕은 깨어지고 부서져서 0에 가까워지기도 기도합니다.

MBC와 PD수첩을 지지하면서 다음달을 맞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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