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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2010.06.16
  2.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2010.06.16
  3. 대학생활 상큼합니까. 2010.06.16

[서평]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준호 (청년유니온 광주지역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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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고 고려대를 자퇴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김예슬 씨가 대자보에 다 담아 내지 못했던 말과 자신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지난 3월, 한 대학생의 선언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 국가와 자본에 포섭된 대학 그리고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제조되어 자격증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양산되는 대학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과 함께 그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였지만 진정한 大學人이 되기 위해 대학교를 거부하는 모습은 파문이 일듯 각종 매체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지성인의 요람으로서의 대학, 대학인의 몰락은 물론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선언에 주목했던 것은 비판의 칼날이 무뎌질 때로 무뎌진 이 시대 지식인(대학인), 청년들에게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며 숫돌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말로서만이 아닌 직접적인 저항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 성찰적 글을 각종 매체에 실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얼마 전에는 김예슬씨의 글을 모은 작은 책이 발간되었고 그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이야기

비인간적인 경쟁과 미친 학습노동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들어간 소위 명문대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유나 정의, 진리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또 다른 트랙이 펼쳐져 학생들을 경주마처럼 양육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지위는 이미 자본의 시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기업이 돈만 준다면 진리나 정의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삼성과 글로벌, 이명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 명문대는 순수한 영혼이나 진리, 자유, 정의, 저항이 사라진 곳, 더 이상 대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눈과 귀를 막아 옳고 그름의 대한 판단을 유보 하고 대학에서 양육하는 경주마가 되어 취업이라는 끝나지 않을 트랙을 돌아야 하는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집어 삼키고 있는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적들의 이야기

대학생의 현실은 무엇일까? 실제 삶을 위한 배움과는 괴리된 자격증과 학점, 어학과 같은 스펙에 매달려 무직(無職), 무지(無知), 무능(無能)으로 대표되는 3무(無)의 졸업장이 그토록 모두가 가고자하는 대학의 결과다. 대학은 학위 자격증을 발급하는 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진정한 의미의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매달리는 졸업장과 자격증은 기업이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윤을 위해 저비용 고효율의 잣대를 최상으로 여기는 자본이 대학을 하청업체로 만들었다. 본질에서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자본에게 대학생은 거대한 이윤구조의 한 부품일 뿐이다.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그러한 구조를 유지하게끔 하는 국가의 역할을 감안하면 국가, 자본, 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이 청년들을 인간이 아닌 자원화하고 그들의 꿈과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할 근원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교육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무교육의 틀은 사회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며 ‘학교 교육의 주술’과 ‘능력사회’라는 구호 속에서 계급적 낙인을 내면화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국가의 의무교육과 자본과 기업이 요구하는 자격증 제도가 살아있는 한 배움의 자유와 삶의 자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교육이나 지식이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고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 당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되어버린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계속해서 주입한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사회적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는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자급자립의 기반과 공동체가 살아나 자격증이 없이도 자신이 나름의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등 각자 자신의 재능을 살려나가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공동체를 꿈꾼다.

거짓희망에 맞서다

그는 한국사회의 진보에 대해 묻는다. 충분히 레디컬(Radical)한가?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일상과의 연결이 느슨한 진보운동, 감동이 없고 사람향기 나지 않는 주장, 권력부터 달라고 하는 진보세력이 진정한 진보일까 라는 회의적인 의문과 함께 우리사회의 진보는 근원적인 가치투쟁에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충분히 근원적이지 못했기에 불필요하게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투박하며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이기 위해서는 넓은 시각과 고민을 가지고 구조에서 생활문화, 감성, 영성까지 품어내는 운동을 해야 하며 진보적 신념을 운동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근원적 문제의식을 끌어내리려는 다양한 담론들을 지적한다. 김연아를 상징으로 청년 세대를 ‘G세대’로 부른다. ‘김연아를 꿈꾸라’는 담론에는 거짓이 숨어있다. 그것은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 없는 현실, 오히려 청년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과 알바생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은폐하고 거짓 희망을 품에 안기는 ‘G세대’는 글로벌 카스트에 가깝다. 88만원 세대 운동도 청년실업 해결과 사회복지 확충과 임금 상향을 위한 연대투쟁으로 현실성이라는 이름의 중도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88만원이라는 수치화가 우리 세대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우리세대는 욕망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진정한 욕망이 아닌 자본에 의해 주어진 욕망이다. 그 안에 단답형이 되어버린 우리의 꿈이 있다. 그건 대개는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꿈들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학습된 두려움에도 갇혀 있다. 우리는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을 버리고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를 직시해야 한다. 대학이나 직업이 먼저가 아니라 내 자신, 나의 삶이 더 큰 존재다.

앞서 말해온 악순환, 국가-자본-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에서 의무교육과 자격증제도는 우리의 삶을 거짓 기준들로 수단화하고 비인간화된 비교경쟁 속으로 등 떠민다. 끝없는 트랙을 그저 당근을 생각하며 의식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트랙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나 자신이 바로 그 적이다.’라는 명제를 자신에게 각인시키며, 대학을 거부하기까지 무수한 성찰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잘못된 사회구조, 의식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그가 얻어낸 결론은 불복종이다. 자신의 불복종을 통해 거대한 벽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냈다. 그러한 저항은 그가 특별하기보다 어쩌면 젊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청년은 곧 저항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있다. 옛 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는데(不鏡於水)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다.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글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 대학이 만들어낸 자격증 시스템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김예슬이라는 사람의 ‘삶’을 거울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서 필자는 주어지는 삶이 아닌 참된 자신의 삶을 선택한 한 개인이 보인다. 또 청년으로서 실천하는 저항만이 진정한 꿈을 품고 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그를 거울로 비춰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앞서 말한 균열은 더 이상 작은 균열이 아니며 거대한 적은 더 이상 그 지위에 있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본 ‘내 깡패같은 애인’이라는 영화에서 옆방 깡패(박중훈)가 취업에 좌절해있는 지방대생인 옆방이웃(정유미)에게 던진 대사를 기억해본다.

“우리나라 백수들은 참 착해. 거 텔레비전 보니까.. 외국에서는 일자리 안 준다고 대학생들이 데모도 하고 난리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그저 자기 잘못인줄 알아.. 사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다 자기 잘못인줄만 알아.. 사회가 잘못한 거야.. 괜찮아.. 당당하게 살아~!”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 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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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엡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교육담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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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동구청 관내 11개 중학교 1,2학년 학생 40명을 대상으로 한 '성동 영어수월성교육' 개강식이 광희중학교에서 열렸다.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1),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2)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 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 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각주>
(1) 피그말리온 효과 :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2) 낙인 효과 :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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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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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7일 진행예정이던 김용철 변호사 강연회 일방적으로 대관취소에 대한 주최 측이 걸은 현수막이다.

학교계단에서 강연회를 들었다.

 

 5월의 끝자락, 조선대학교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강연회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대학교는 강연실로 예정되었던 서석홀 강당의 대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연회는 서석홀 앞 광장에서 이뤄졌다. 지난 전남대 강연회에서도 대학본부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걸로 봐서 비단 조선대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글쎄, 이번 사건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불신을 더 굳히게 만들어줬다고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떤 화두도 되지 못한다. ‘대관 불허’사실은 대학사회에서 어떤 토론거리도 되지 않았고, 그냥 묻히는(드러났었다면) 분위기다. 대학교 학생처뿐만이 아닌 대학교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문제라고 할 만하다.


대학문화는 과연 상큼해질까


강연회에서 흘러나왔던 김상봉교수의 '대학생들의 동맹휴학 제안'이 떠오른다. 시장만능-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만한 대학생들의 운동방식으로서 제안했던것으로 기억한다.(그 운동의 역사는 훨씬 전부터 계속 되었던것이지만) 허나 올해도 상큼한(입시에 쩔어있을텐데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1학년 학생들의 유입은 계속 되었고, 시큼하다 못해 떫어서 입이 얼얼할만한 대학생활은 내년에도 계속될것만 같다.


마치 대학교는 지난 12년간 수능시험체제에 순응하며 지냈던 수험생들을 어떤 '완전체'로 만드 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12년간의 입시생활은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체제를 체화시키려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경쟁몬 완전체'로 향해 간다랄까. 대학교의 학생평가체제는 상대평가이며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은 고민 없이 제적해버린다. 여전히 학생들은 이제까지 하던 대로 시험공부를 하며 하던 대로 성적에 목을 맨다. 신입생들부터 '취직에 도움이 될 만한'따위의 말을 곁들이며 모든 수업의 동기부여는 '기업'에 관련한다. 이 체제의 기반은 쉽게 무너질 것만 같지는 않다. 학생의 자살이나 선생의 자살에도 그다지 눈길을 쏟지 않으며(조선대에서는 한 시간강사가 자살했었다) 강연회조차 그 성격이 불온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찰이 있었음에도 이것들이 대학사회에 큰 이슈로 불거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것은 개념 없는 대학생들이 데모도 안하고 취직자리에만 정신 팔려있어서만도 아니고 어느 순간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도 아니다. "니들은 아직 어려"라는 주문아래 좀비 취급하던 어린애들이 대학입학하면 갑자기 진지한 자세를 취하며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촛불에 기대 한국사회의 젊은이에 대한 갖가지 분석을 시작하는 노인네들을 볼라치면 속이 답답하다. '20대 개새끼론'이나 들먹이면서 그들은 이 사회를 쥐락펴락 하려는 '개새끼 세력'이 여러 세대의 '수많은 개새끼들'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김용철씨의 강연회를 그 성격이 불온하다 하여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대학교의 입장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이명박스러움'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MB의 삽질을 욕하는 일이 정말 시급해 보이지만 대학사회의 '이명박스러움'을 생각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 인것 같다. 조선대학교는 여전히 '정이사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보인다. '정이사 제도로!'라는 구호는 이제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정이사제도' 자체는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제도의 민주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더더욱 반발하는것 아닌가? 이제는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가 '민주적 학생회!','민주적 학내문화!','민주적 학칙!' 따위의 문제로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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