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태 (법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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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헌법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헌법이 죽어간다' 퍼포먼스를 진행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KT 앞으로 이동해 진행하고 있다.

2010년의 한국사회는, ① 수능시험 잘 못 보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② 각종 공무원시험이나 취직의 실패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③ 육아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낙태할 수도 있는 사회, ④ 살인적인 노동 강도 때문에 목숨 걸고 ‘투쟁’ 끝에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⑤ ‘투쟁’ 안 해도 때로는 작업환경 자체가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는 사회, ⑥ 먹고사는 터전을 국가가 ‘개발’의 명목으로 매우 쉽게 제거할 수도 있고 농민들이 농약먹고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⑦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⑧ 속칭 ‘남들이 보기에 꽤 괜찮은’ 직장과 가정을 가진 사람들도 주식실패,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⑨ 돈도 있고 ‘먹고 살 능력은 있는’ 노인들도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⑩ 이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장애인들이 자살할 수도 있는 사회, ⑪ 그러면서도 ‘유색인종’을 무시하는 사회, 인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정답은 ‘이순신’입니다. 백 중 99는 이것을 ‘정답’이라고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이 잣대를 들이대면 달라집니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 저의 본적 성당인 안산 성마리아 성당 봉헌식이 있었습니다. 지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성당이지요. 이 성당을, 누가 지었을까요?

어떤 신부님은 ‘내가 지었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자들은 ‘신자들과 신부님이 합심해서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어떤 신자들은 ‘내 돈 내서 내가 지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직접 그 건물을 건축한 ‘xx건설’도 ‘내가 지었다’고 하겠지요. 아마도 정확하게는 그 회사 사장이 ‘내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직접 망치질하고 시멘트를 바른 노동자들 또한 ‘우리가 지었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신심이 깊은’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지으셨다’고 할 테지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거북선은 누가 만들었나요?”

대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철갑선의 구상은 이순신 장군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이 땅의 조선(造船) 노동자들이 작업을 했습니다. 그 작업에 비용을 댄 이들이 있을 것이고, 음식 등을 제공한 여성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철갑선의 구상 중에서도 세부적인 부분에 개입하거나 작업에 참여한 이순신 장군의 동료 장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도 큰 배가 한 척 나가려면 5명 정도는 죽어나가고, 아파트 한 동 짓는데 평균 2명은 죽는다는데, 그 시절에 ‘산업재해’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철갑선을 만들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저는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다’고 정답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만든 게 아니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 작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정답이 되나요? 그런 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이란 애초에,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어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만든 게 되는 게 아니라, 거북선을 만든 데 참여한 무수한 사람들 중에 거북선을 만든 사람을 이순신으로 하자고 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만은 분명합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라는 말은 ‘팩트’라기 보다는 ‘합의’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 질문에는 오히려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묻지요? 거기에 정답이 있을 수 있나요? 라구요. 혹은, (그 작업에 참여한 많은 사람 중에 굳이)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라구요.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①에서 ⑪까지 나열한 한국사회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그 만큼 우리 주위에서 죽음을 목격하기가 쉬운 것이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한국사회는 누가 만들었나요?”

많은 사람들이 거북선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 하는. 철갑선은 쉽게 생각해보면, 당시의 ‘바다 위의 살인 병기’였을 것입니다. 만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조선에서 철갑선이 세계 최초로 등장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위용을 찬양합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들 하지요. 저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란 생각해보면, ‘무역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약한 고리를 공격하거나 자국 스스로 내부 식민 사회를 만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것은 온갖 좋은 말로 포장을 해 봤자, 누군가(또는 다른 국가)가 받아야 할 몫을 조금씩 떼어 와서 ‘몰아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거치지 않았더라도, 한국사회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되었을까요? 비슷한 논리는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경제대국’을 ‘군사강국’ 또는 ‘강성대국’이라는 용어로 바꿔주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 성장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이 박정희가 해낸 일이라고들 합니다. 좋게 봐주자면, 박정희의 ‘지도’ 아래 ‘산업역군’ 한국 국민 전체가 해낸 일이라는 말이겠지요.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찬양하는 경우에도 김대중과 김영삼과 민주화운동을 한 전 국민이 했다고들 합니다. 자, 그러면 이번에도 물어보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자살율과 낙태율이 높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조금 구체화시켜 보겠습니다. 2009년 봄, 용산에서 한 건물 철거에 투쟁하던 세입자 일부와 진압하던 경찰이 죽었습니다. 세입자는 누가 죽였습니까? 강경 진압한 경찰이 죽였습니까? 경찰은 누가 죽였습니까? 투쟁하던 세입자들이 죽였습니까?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강경진압을 지시한 당시 경찰청장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 근본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재개발이익에 개입하는 용산구청과 삼성물산 같은 대자본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집 값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있는 것입니까? 더욱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해마다 수능시험이 끝나면 불길한 소식들이 전해집니다. 이제 수능 망친 누구가 어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더라, 와 같은 이야기들은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왜 자살하는 것입니까? 수능 시험을 못 보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컸는데 망쳤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까? 주위 친구들보다 못 봐서 부끄러워서, 부모님 뵙기 죄송해서 자살하는 것입니까? 근본 원인은, 한국 사회가, 사실상 신분이 되어버린 학벌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더욱 근본 원인은, 소수 엘리트 교육에 집중하는 한국 중등 교육이 그 목적에 따라 ‘선발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그에 따른 ‘지식 몰입식 교육 방식’을 행하기 때문입니까? 더욱 더욱 더 근본 원인은,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패배자’를 만들고 ‘내부 식민지화’하여 하층으로부터 수탈하는 방식으로 상층부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경제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성장 패러다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북한 때문입니까? 신자유주의 때문입니까?

제가 궁금한 것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죽습니다.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구상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저는 누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훌륭하신 한국의 교수님들과 철학자님들과 선생님들과 정치인님들과 판사님들과 검사님들과 변호사님들과 의사님들과 뭣님들과 뭣님들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 가운데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이 만일 잘 안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거나 적어도 줄어들어야 할 텐데, 상황은 반대로 더욱 악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4대강 사업’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명박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4대강 사업’을 ‘이명박’이 합니까? 그렇지요. 거북선도 ‘이순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판에. 생명의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저는 요즘에야 느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구나. 솔직히 제가 제일 두려운 것은 확실시되는 수질 악화로 인한 전염병 창궐인데, 사람들은 ‘강’을 참 좋아하는구나.

뭐, 이유야 어쨌든, ‘4대강 사업’하는 게 토목 건설사들 배만 불리는 일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그 사업 자체를 중단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어떤 교수는 4대강 사업을 하면 수질이 개선된다는 것은 아이큐가 100정도만 되면 알 수 있는 거짓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 그런 거구나. 이게 그렇게 신랄한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로구나.

재개발을 해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재개발을 그만 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수능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비정규직 투쟁을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비정규직을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다가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주식투자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군 복무 중 사람이 죽었습니다. 별로 군대를 없애자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없애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생각해보면, 제 생각 자체가 참 어리석습니다. 성매매와 도박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세상에 판칩니다. 없애자고 법 규정까지 만들어도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재개발하는 것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재개발 과정에서 죽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수능시험제도 만들어 둔 것이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대학입시 과정에서 자살하는 수험생들은 생길 것입니다. 사람 죽이자고 비정규직 만들어 둔 것도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비정규직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아군 죽이자고 군대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자살하는 군인들은 생길 것입니다. 투자자 죽이자고 주식시장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주식투자 실패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은 생길 것입니다. ‘4대강 사업’도 별반 다를 게 있겠습니까? 그게 거짓말이든 말든 강 살린답시고 강 좀 파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수질 좀 악화되고 농민들 쫓겨나고 사람들 좀 죽으면 어떻습니까? 돈이 되는데. 언제는 진리와 가깝기 때문에 공부했고 노동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산업역군이 되었고 국방의 의무가 신성해서 군인이 되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속세를 넘어서려다 보면, ‘성경’을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도 적나라한 속세를 마주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반말’을 합니다. 다른 것을 다 접어두고, ‘무엇이 더 복음적인가’를 항상 고민하시는 신부님, 목사님, 여러 한국의 성직자분들은 공생애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말을 툭툭 던지는’ 것으로 성경을 번역해 둔 것이 ‘얼마나 복음적인지’ 한 번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반말 존댓말 구별이 없는 히브리어이지요. 라틴어나 그리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복음을 존댓말로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부처님은 이런 면에서 조금 자유로우신 듯합니다. 말씀이 한자로 되어 있는 바람에.;

‘그러니까’,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헌법 10조)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반말 찍찍 싸면서’ 잘난 체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리’라는 것을, 혹자는 ‘논리의 결정체’라면서 추앙합니다. 하지만 논리와 진리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논리는 여러 가지입니다. 정확히 같은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법리구성이 가능합니다. 조금 조야하게 표현하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논리’의 핵심고리란, 실은 ‘우기기’다”라구요.

헌법재판소는 헌법 10조의 적용에 관하여 “기본권제한에 있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다거나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의 필요한 보장조차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다면, 헌법 제 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위반된다”고 판시(98헌마 216)한 바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본권형성에 있어서 최소한 필요한 보장만 규정’하면 적어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이라는 판결은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아주 적은 판결들을 보면 대개 10조에서 파생되는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했다는 것들입니다. 유명한 동성동본금혼 헌법불합치 판결(95헌가6등)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고, 18세 미만 당구장 출입금지 위헌 판결(92헌마80)은 당구를 통해 소질과 취미를 살리고자 하는 소년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침해를 이유로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18세 미만자에게 당구장 못 들어가게 하는 게 헌법 10조 위반으로 위헌 판결이 이미 18년 전에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다른 조문도 아니고 헌법 10조 위배를 이유로 말이지요. 그러나 4대강 사업 한다고, 재개발 한다고, 쫓겨나는 사람들에게는 ‘헌법 10조 위헌’이 적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필요한 보장’, 곧, 보상금이 지급되니까요. 이러한 구조에서는 본질적인 부분은 가려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마음대로 18세 미만자는 당구장 출입 금지 시켜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건물 철거해도 돼?” “국가가 마음대로 농토에서 쫓아내도 돼?” 이런 질문들이지요. 그런데 보상금 싫으니까 농토에서 쫓아내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적어도 2010년 한국사회는 ‘별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돈 받고 나가라는 거지요. ‘4대강 법’들도 헌법재판에 가면 위헌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날 ‘만들어진’ 한국 사회의 모습입니다.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본다면,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이 다니는 하나의 ‘길’일 것이고, 그것은 마치 혈관과 같은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꾸 죽어나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어떤 지점들에는 생명의 붉은 피보다는 죽음의 검은 피가 돌고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장부에 있는 것이 ‘헌법’일 터, 그래서 저는 반말로 된 헌법전을 존댓말로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가 한국 사회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앞으로도 누가 만들지 잘 모르겠지만, 죽음보다는 삶과 가까운 사회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삶을 대우’받아야만 합니다.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보다 더 존엄했으면 좋겠다.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진심이 담긴 채로 말이지요.

사람의 몸 안의 수많은 세포들 가운데 유일하게 끝까지 번식하고 사라지지 않는 세포가 바로 암세포라고 하더군요. 결코 죽지 않는 암세포들이 신체를 장악하면 생명은 멈춥니다. 사회라고 얼마나 다를까요? 한국전쟁 60년, 한국사회에서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자라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암세포들이 너무 많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암세포들은 단칼에 쳐내야만 하고, 그것이 서양의학의 ‘수술’일 테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몸을 건강하게 하기는 힘듭니다. 암도 재발할 수 있구요. 따라서 몸 전체에 활기를 띠게 하여 건강을 되찾는 한의학의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를 놓고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암세포의 특징이, 일단 살아 있는 세포를 죽이고 본다는 것인 듯합니다. 살아 있는 세포는 죽이고 암세포를 번식시키자. 이것이 유일한 목표인 듯합니다. 법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부족한 저이지만, 법 공부를 하다보면 사회의 저명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헌법 지식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지한 건지 무지한 척을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솔직하게, ‘헌법 기본서 한 번만 읽어 봤어도 저런 말과 저런 행동과 저런 식의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듯이, 남도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다’는 게 현대 자본주의 헌법의 핵심정신(재산권 보장+공공복리)이고 여기서 모든 기본권이론과 기본권 조항들이 생겨나는데, 이걸 부정하는 암세포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활약하면서 자기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도 많이 듭니다. 저는 조금 간단한 지표로, 그들이 한국사회를 ‘만들었는지’, ‘죽여가고 있는지’는 한국 사회의 자살율이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씩 알아갈수록, 또는 알아간다고 생각할수록, 너무나 무지하다는 사실만이 자명해집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존댓말로 읽는 헌법’을 주제로 종종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헌법 조문과, 기존의 판례 검토와 해석, 그리고 사견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1) 즐겁게 쉬는 다른 방법을 잊어버렸고-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2) 각종 현안에 대해 몸으로 부딪히지 못하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듯한 저 자신의 ‘연대 방식’에 대한 고민의 산물입니다.

한국 사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저는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헌법을 존댓말로 읽어보자고 생각한 저는 혹시빨갱이가 아닐까요? 저도 저를 잘 모르겠는데, 저를 뭐라고 부른다면야... 저를 누가 뭐라고 부르든지 그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으나, 저는 빨갱이라는 용어의 반대용어로 ‘검죽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거무죽죽하다’+‘죽어간다’는 말인데, 시도 때도 없이 남들보고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검죽이’라고 불러주면 괜찮을 듯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말은 해두어야겠네요. 저는 김정일을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거짓말을 잘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집단을 싫어합니다.

글을 쓰는 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① 대학입시 없는 사회, ② 취업으로 등급 매기지 않는 사회, ③ 낙태 없는 사회, ④ 사람이 할 만한 노동 강도를 요구하는 사회, ⑤ 노동환경이 보장되고 농민이 우대받는 사회, ⑥ 국가권력이 일반국민을 두려워하는 사회, ⑦ 군대 없는 사회, ⑧ 재화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 ⑨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 ⑩ 거리에서 자주 장애인을 만날 수 있는 사회, ⑪ 겸손이 미덕인 사회, 이런 사회가 ‘완벽에 가까운’ 사회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 그런 방식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입시가 존재하는 오늘날에도 수능거부를 하는 친구들이 있고, 비정규직 넘쳐나도 비정규직 철폐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고, 의무복무제도임에도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고, 장애인 이동이 현실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거리로 나오는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 없이 이루어지는 어떤 일들도 결과적으로 악취만을 풍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뿐입니다.

법 공부를 할수록 드는 의문은, 국가에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오히려 반대의 이유로 법을 공부할 의미가 생깁니다. 국가와 권력과 자본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고삐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자 무기로 반드시 법을 알아야 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법은 글자인데, 그 글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또한 법 그 자체도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의 한국 사회는 ‘겸손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저의 자기확장욕은 깨어지고 부서져서 0에 가까워지기도 기도합니다.

MBC와 PD수첩을 지지하면서 다음달을 맞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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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젊은이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지훈 (대학원생)

삼성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20대인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게으르게 뒹굴대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도체를 검사하기 위해 끝없이 제품을 납에 넣었다 빼며 제 자신을 죽여야 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가 가졌을 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져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된다. 고된 노동에도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테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지나가버린 그 시간을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워했을지.

대학을 아직 떠나지 못한 나는 다시 등교를 한다. 도서관 전산실에 들렀는데 내 앞에는 삼성 컴퓨터가 놓여 있다.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자 삼성 에어콘이 눈에 띈다. 어떤 학생은 삼성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꽃은 채 강의실로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삼성 애니콜에 전화가 와서 강의실을 나가며, 어떤 학생은 삼성 노트북 센스에 강의노트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없는 곳이 없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삼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20대의 어느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반도체가 들어있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공공물품을 거의 삼성 제품으로 구매하고, 학생들은 서비스 좋다는 삼성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삼성의 제품만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학생들의 동아리나 모임 활동을 지원하곤 하는데, 너무나 프랜들리한 삼성은 그 지원에서 가장 앞서가며, 나아가 지원을 넘어 동아리를 대체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누추하게 잔디밭에 둘러 모여 기타치고 노래 부르기보다는 폼나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길 원하는 대학생들은 기업이 지원하는 모임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삼성은 영삼성(youngsamsung)을 운영하여 대학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욕망과 친구한다. 삼성은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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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들. 이들은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지쳐 있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면,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삼성 문제를 푸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를 보다 낫게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자세한 뒷사정은 알지 못하나, 작년엔 학생회와 삼성이 손을 잡으려한 일이 있었는데, 서울 지역 '한대련'과 삼성의 합작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광고지면을 내주고 지원을 받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삼성 올앳카드 회원을 학생회가 대신 모집해주고 카드 가맹점에서 할인을 받는 형태의 사업으로, 의결이 끝나고 집행을 기다리다가 몇몇 대학의 반대로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다. 욕망을 가진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는 삼성은 이정도로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우리는 그래서 삼성을 멀리하지 못한다.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세상과 이어주고 더위도 식혀주며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도 시켜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삼성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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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삼성 홈페이지.

그래서 그런지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줄곧 '삼성맨'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지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삼성은 학벌을 중시한다는 것. 얼마 전에 언론에서 삼성 사장단의 학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성 임원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는데, 대개의 기업들이 서울대 인맥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이는 특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에 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로비/섭외 실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로비/섭외는 서울대 인맥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하면 그게 아니다. 뻔히 알고 있는 자기 동창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로비하는 것은 민망하기도 하고 불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관계가 없는 사람이 큰 돈을 챙겨주는 것이 로비에서는 훨씬 더 편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계열사 임원 중에는 비서울대출신이 많을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구조본은 모두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직원이 된다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올렸을지도 모르나 그저 황당함과 경악만을 안겨주었던 동영상에서 본 매스게임을 실제로 하러 동료들과 집결해야 한다. 물론 멋진 콘도에서 삼성은 돈의 힘을 보여줄 것이고, 임원이 방문해서 삼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임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심어줄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내가 삼성맨이라니. 그러나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재미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지속되기 힘들다.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이라는 삼성에서의 재직 기간은 보통 7~8년이라고 하는데, 3~4년차 사원들이 이직률은 30%대나 된다고 한다.

삼성을 발판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것일 텐데, 삼성에 계속 충성하다간 너무 일찍 묘비를 세워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 견뎌낼 수도 있다. 경쟁과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익숙한 것이니까. 삼성 안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못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 삼성에 취직한 친구의 말로는 인터넷 포털 DAUM도 눈치가 보여 접속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한, 무작정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막연히 긍정하며,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멈춰서있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만 하며,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사람들은 삼성의 세련된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현대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인천 송도만 하수처리 시설 사업권을 차지한 '삼성 베올리아 인천환경주식회사'에 취직해서 물 사유화 사업에 앞장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생명에 취직해서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민간 의료)보험", 즉 지금의 건강보험을 통째로 사적 의료보험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에 뛰어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캐피탈에 취직해서 부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고객 도장을 몰래 만들어 불법 대환 대출을 할 수도 있다.(걱정 마시라. 금융감독원은 알고서도 처벌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혹은 운이 좋은 사람은, 분식 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면 서류를 빼돌린 다음 어두운 밤 해운대 백사장에서 불태워버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토탈(주)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했을 때처럼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는 액션을 즐겨볼 수도 있으며, 더 운이 좋아 압수수색과 같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검찰이 주는 충분한 시간동안 내부자료와 파일을 파기하는 스릴을 맛보는 기회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너무 걱정 마시라. 저런 일들은 가벼운 과태료만 내면 끝날 테니.)

더 화끈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무직 노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라인 노동자나 반도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을 개선하려 노조라도 만들라치면,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 묻을 수 있다"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활극을 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삼성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걱정이 되면, 지뢰 제거 활동 홍보처럼 '글로벌 사회 공헌' 광고를 제작할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삼성이 F15-K 전투기를 수출하고 공격형 아파치 헬기를 만들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미지는 이미지니까. 아쉽게 이런 일을 몸소 하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구경할 기회는 얻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에 나오는 일들이다. 더 많은 일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보시기를.)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삼성이 보여주는 기술의 눈부심이다. 영화 아바타에 세계가 열광한 것은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때문이겠거니와, 삼성이 생산해내는 최첨단의 반도체와 LED TV, 휴대폰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거두어보자. 빛에 빼앗겨버린 시선을 조금만 돌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애니콜, 컴퓨터나 노트북 센스에는 백혈병으로 숨져간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눈물이 스며있고, 손 닦는 수건도 없는 화장실에 그나마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시간 외에는 꼼짝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어야 하는(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122쪽) 생산직 노동자의 한숨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여, 만일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교양을 원한다면, 제품의 월등함 때문도 노동자들 임금 때문도 아닌, 임원들 보너스 때문에 비싼 애니콜이나 센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그 곳은, 정의를 위한 발걸음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어 노예로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삼성 센스 노트북을 샀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거대담론을 자주 말하는 그는 이러한 불매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소한 문제인가? 아니다. 여기 사회의 모순이 있다. 여기 눈물이 있다. 여기 피맺힌 울음이 있고, 여기 한숨과 아우성이 있다. 자, 그러니 이제 여기를 떠나라. 그것이 교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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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영 (전남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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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과 전국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이 국가인권위 광주지역사무소에서 특정대학교합격 게시물에 관한 인권침해사례 보고 및 인권위 진정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수막에 대한 인권침해 진정은 2회째 진행 중이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의 책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에서는 유독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여러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인신매매에 가까운 국제결혼 광고, 주민등록번호, 무소불위의 '검새', 무노조를 고집하는 기업, 네온사인 십자가 등 그야말로 한국사회에만 있을 법한 얘기들을 위트 있게 꼬집고 있다.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여러 풍경들 중에 '길거리를 뒤덮은 현수막 문화'에 대한 것도 있다. 오 국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히 한국은 현수막이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 광고에서부터 소상인들의 호객행위, 행정당국의 정책홍보와 행사안내, 정당의 의견표출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도 다양하다. 이제 곧 지방선거 국면이니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새긴 선거용 현수막들도 가세할 것이다. 불법 게시물 철거와 과태료 부과 등 행정당국의 엄포는 떼고 나면 곧바로 다시 붙는 현수막에 의해 간단히 무시된다. 현수막 하나 만나지 않고 길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실 현수막이 뒤덮은 거리의 모습은 문화라기보다는 공해라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각의 어지러움은 물론이고 떨어져 너덜거리는 현수막의 위험성, 문구의 선정성 등은 다른 공해에 못지 않다. 현수막을 없앤다면 조금 불편함이야 있겠지만 별 이로운 구석도 없는 현수막이 꼭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의 어지러운 간판문화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요악이라기보다 그저 익숙해진 생활습관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현수막은 봐줄 만하다. 어지럽고 볼썽사납기는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감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시기에 각 고등학교 정문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좀 다르다. 혹 눈여겨보았을지 모르지만, 요즘 고등학교 정문에는 대게 이런 종류의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대 ○○명 합격, 수도권 ○○명 합격 등 대학 합격을 축하하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합격생 이름을 나열해놓은 학교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 대학진학이라는 목표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대다수일 테니 합격을 축하할 만도 하다. 하지만 합격 축하 현수막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선 현수막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졸업생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명문대 위주로 진학한 소수만을 위한 축하는 소위 '마이너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나 재수생들,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아예 설자리조차 없다. 어쩌면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학교당국에게 그들은 단지 패배자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학률이 높은 것이 곧 명문이라는 천박한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현실, 교육당국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합격 현수막이 담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나와 주목된다.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이 합격 현수막이 가진 반인권성을 지적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합격 현수막이 학교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입시학원화를 조장하고, 진학만을 고집하는 학력차별, 특정 대학만을 지향하는 학벌차별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현수막이 주는 패배감과 좌절감 때문에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피해도 양산하고 있다고 한다.

합격 현수막 철거를 위한 운동은 이미 2006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제기되었다. 처음에 각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일부 학교가 시정을 하기도 했지만 매년 게시와 시정이 반복될 뿐 근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지난해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과정에서 각 학교들이 지양하기로 함에 따라 "조치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라며 기각되었던 사안이다. 그렇지만 올해도 여전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또 다시 진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는 비단 고등학교 문제만은 아니다. 대학 현수막도 다르지 않다. 과거 대학의 현수막은 주로 대학생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취업 관련 광고나 교내 행사 안내가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대학의 현실도 상아탑을 버리고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니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이름까지 버젓이 공개하며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 합격을 축하하거나 대기업 취업을 축하하기에 급급한 현수막은 도가 지나쳤다.

합격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행복하다. 더구나 동네에 자랑할 것도 아니고 교내에 내건 현수막이 '자위'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의미 없는 행동이 도서관에서, 각종 취업준비 학원에서, 고시촌에서 시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소외를 줄 수 있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부의 성공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성공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극도 필요하겠지만 상처를 주는 자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대학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가 반드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입시경쟁을 부추기고 서열과 학벌을 조장하는 풍토는 반드시 차별과 연결된다. 고시합격을 자랑하고 대기업 취업을 자랑하는 대학의 풍토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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