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자발적 대학교 퇴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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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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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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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수능시험날,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수능거부 일인시위를 하는 학생

우리의 삶은 학벌 문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대학의 경쟁을 넘어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을 밟는 사람들, 토플시험을 보겠다며 매일 인터넷 앞에서 죽치고 있는 사람들, 자격증 시험으로 가득 찬 약속과 밀린 과제물,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과외들. 우리 모두는 안정적인 삶을 위한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양심적 삶을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기서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어린 시절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한 증권사 간부로 일하셨다. 아버지의 수입을 통해 우리 가정은 '평범하게' 살았고, 직장 서열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통해 친척들에게 부끄럼 없이 살아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장기간의 병원 입원과 통원치료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게 됐고, 집을 팔아서 벌였던 사업은 잘 안 돼 결국 가족이 모두 단칸방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내 삶에서 가난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왜 우리 가정은 '가난'이라는 불편한 삶을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왜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같이 돈 때문에 싸우실까? 부모님은 하루도 안 쉬고 밤늦게까지 일하는데도 왜 우리 가정은 지금까지도 가난한 걸까? 왜 나에게 공부 잘 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라고 하는 걸까? 이젠 그 답을 알게 되었지만, 그 시절 내게 던졌던 질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됐을까 의문이 든다.

일탈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초등학교 때 몰랐던 '좋은 학교'란 개념을 알게 되었다. 그 '좋은 학교'는 지금도 강조되는 인문계 고등학교, 그리고 명문대(서울대·연세대·고려대)다. '좋은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내 친구들은 학교를 마친 후 교복도 벗지 못한 채 운동장이 아닌 학원으로 향했다. 초등학생 시절 뜨겁게 먼지 날리며 공을 찼던 때는 이미 과거가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 다녔던 학원은 고작 한 달. 부모님 고생하는 미안한 마음에 내가 싫어 그만뒀다. 허나 소외되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교과서로 공부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처럼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특수목적고 진학도 어렵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현실적 조건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고민 중 하나는 돈이었고, 두 번째 고민은 진로였다. "우리의 가정 형편으로 대학은 갈 수 있을까?", "좋은 학교 보내려고 내 삶의 일부를 부모님이 책임질 필요가 있나?" 등과 같은 고민 끝에 결국, 전자공고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은 그냥 평범하게 살라며 나를 달랠 뿐이었다.

결국 끌려가다시피 진학한 인문계 고등학교는 입시 사육장과 같았다. 암기를 강요하고, 공부 잘 하라고 용의복장을 단순화하고, 담장 밖에 나가지 말고 말 잘 들으라며 수시로 체벌을 가했다. 용돈을 벌기 위해 새벽에 하던 신문배달도 잠시, 멋지게 보이고파 머리도 길러보지만 그것도 잠시, 오직 학교는 승자를 기르기 위한 수용소 3년의 시간일 뿐이었다. 학교 밖을 벗어나 일탈도 해보았지만, 잠시 내 마음을 위로할 뿐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다른 청소년들과 함께 중고등학생연합이란 단체를 만들어 학생인권과 교육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당연히 학교와 사회는 사회적 약자의 외침을 들어주기는커녕 단체 탈퇴를 강요했고,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징계위원회까지 생겼다. 학생들의 양심적 목소리에 교사들의 권력과 폭력은 더 심해졌다. 교사들은 학벌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뤄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그들에게 학벌은 그저 또 다른 권위와 강자가 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래서 난 스스로 강자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학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 대학 진학 거부

실업계 학생이든 인문계 학생이든 고3 수험생이 되면, 대학 진학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된다. 나 역시 사회 경험을 통해 사회단체의 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고, 'NGO대학'이라 불리는 성공회대 진학을 고민했다. 하지만 수능 시험이 치러지던 날, 어머니께서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걸어간 곳은 고사장이 아닌 시교육청. '대학 평준화'를 주장하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며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를 거부하는 나의 양심에 따라 대학 진학 거부를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1인 시위 한다고 세상이 바뀔까? 세상은 학벌사회야.",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후회하지 마라." 그러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난 떳떳하게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남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살 거야!"

단순히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며 시작한 대학 진학 거부였다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의 삶으로 치부하기엔 우리 주변엔 치유하지 못한 아픈 과제들이 너무 많다. 매일같이 시험에 쫓겨 사는 학생들, 그 시험제도의 낙오자가 되거나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학생들…. 우리는 일상에 쫓겨 아픔을 느끼지 못할 뿐, 너무나도 아픈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 왔던 청소년 인권운동과 교육운동들이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학벌주의를 거부하며 시작한 나의 대학 진학 거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소년인권운동, 학벌없는사회운동과의 끈도 놓치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과 학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면 항상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정리가 된다. 현실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면서 학벌 문제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변화가 없을 경우, 세상은 아무 것도 진정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난 학벌주의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며 대학 진학을 거부한 나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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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빈 (서울 이화여고를 사직한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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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일상의 작은 비위는 물론 거대 권력과 자본도 개인 차원에서 거부한다. 불이익과 불편이 따르지만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승리한다.

경비행기 조종을 취미로 가진 진중권 선생이 내년에 필리핀으로 비행기 여행을 떠난단다.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훌쩍 어디로 향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MB정부가 끝나는 3년 동안은 돌아오지 않겠단다. 나로서야 비행기 여행, 세계 여행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부럽다. 그의 용기도 부럽고 그의 자유로운 영혼도 부럽다. 그렇다고 최근 중앙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의 자리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인 그가 돈이 엄청 많은 것도 아닐 것 같다. 베스트셀러 작가, 명강사로서 인세와 강연료가 제법 될 것이 분명하지만 시민단체에서 받은 강연료는 진보신당에 기부한단다. 독일 유학 시절에도 한 달에 50만원으로 숙박을 해결하며 전시회나 여행을 다녔단다.

그의 소식이 담긴 신문을 읽다말고 서둘러 수업에 들어간다. 이제 한 달이면 교직 생활 십년을 채운다. 흔히 교직을 천직이라고 한다. 특히 사립학교는 ‘평생직장’으로 불린다. 평생직장이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게다가 평생직장이라는 말에는 “평생 밥벌이할 수 있게 해 줬으니 고맙게 생각하라”, “평생 얼굴 보고 살 사람끼리 얼굴 붉히는 일 없도록 하자”는 식의 지긋지긋한 이데올로기의 울타리 안에 교사의 사고와 행동을 가둬놓기도 한다. 그 속에서 문제제기라도 하려고 든다면 곧장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는 말이 들리지 “절이 싫으니 주지 스님을 바꾸자”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 말 속에는 “용기 있게 떠나지도 못하면서 까불지 말라”는 의미까지 담겨있다.

십년을 한 학교에서 보냈다. 애당초 이 학교가 ‘평생직장’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이 학교가 교육활동을 실천할 소중한 ‘현장’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인지는 몰라도 지난 십년간 참으로 많은 땀과 눈물을 이 현장에 뿌렸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사랑을 주고받았다. 부당한 학교 현실에 저항하다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성과에 축배를 들기도 했다. 교과서와 입시를 뛰어넘는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며 웃음과 감동이 넘치는 교실에서 행복을 느꼈다. 하나하나 성장하며 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투쟁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정부는 학교가 과연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고 있고, 학교들은 서로 누가 더 나쁜 짓을 하는지 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제 학교 안에서는, 학교를 바꿀 동력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교조 운동의 위기도, 전교조가 그 동안 끊임없이 연대 사업을 강조해 온 것과 무관하게, 전교조 운동이 실제적으로는 ‘학교 안’, 혹은 ‘조합원 내부’에 머물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학교조차 바꿀 수 없는 시기가 분명히 온 것 같다. ‘학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학교를 바꾸게 되는 것이 아니나 나 자신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내년부터 우리 학교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다. 한창 신입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요즈음, 여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버젓이 일상의 풍경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상식이나 교육자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이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고 있다. 이른바 명문대 진학에 유리한 코스를 선점한 학생들의 욕망과, 이른바 명문고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교사들의 욕망과, 세 배 이상 되는 등록금의 본전을 뽑으려는 학부모들의 욕망이 들끓는 그 곳에서, 내가 학교를 바꾸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바뀌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내가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망명이다. 지금은 자본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식민지화해버린 시대이다. 학벌체제는 그것의 하수인이다. 예전 같으면 두만강을 건너서 망명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익환과 윤동주의 선조들이 그랬듯이 명동촌을 일구고 거기 학교를 세우고 식민지 반도와는 다른 자유로운 교육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국경을 넘어 망명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오직 내부로의 망명이 있을 뿐이다. 내부로 망명한다는 것은 체제 내에서 체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병무의 선친은 창씨개명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거는 일본형사에게 일본 헌법에 창씨개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지 물어 형사의 말문을 막았다. 어느 시대에나 내부에서 망명할 통로는 있다. 자기에게 정직하고 외부의 억압에 저항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 이것이 내부에서 망명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한 망명은 스스로 낙오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낙오자가 아니라 ‘스스로’라는 자발성이다. 낙오한다는 것은 무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선택을 가리킨다. 게다가 모두가 현존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있을 때 먼저 낙오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낙오하면서 선구자가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올바른 사회에서 낙오한다는 것은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물구나무 선 사회에서는 거꾸로 성공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 김상봉, <내부로의 망명 또는 낙오자 되기> 중에서

 

‘망명하기’ 또는 ‘낙오자 되기’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망명지로 떠나는 출발점은 학교가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임을 확인해 본다. 학교에 붙어 있으려고만 한다면, 학교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러다 무슨 일이든 하게 된다면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다. 그래서였을까. 김상봉 선생님은 어느 강연에서 “교사는 늘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어놓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나이 마흔, 학교를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상상해 본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여행이다. 그렇다고 진중권 선생처럼 삼 년씩이나 비행기 여행 같은 것을 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봄이 시작되는 섬진강이다. 그 시기는 학교에서 일 년 중에 가장 바쁘다는 삼월이다. 학교 안에 있다면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산수유와 매화 꽃망울이 터지는 섬진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이 김용택의 시를 가르쳐 왔고,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 본 적도 없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 왔다.

다음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은 대학 도서관이다. 40대의 나이에 영국의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자본론 원고를 집필했던 마르크스와 같은 삶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그저 오래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가에 처박혀 하염없이 빈둥대고 싶다. 이제는 한갓 대학 입시를 위한 스펙 쌓기로 전락한 독서가 아닌, 독서 그 자체가 주는 무상성의 즐거움을 나부터 누리고 싶다. 책읽기가 지루해지면 햇볕 따뜻한 대학 교정을 거닐며 싱그러운 젊음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싶다.

공부도 하고 싶다. 요즘 각종 단체마다, 지역마다 인문학 공부가 유행이다. 철학아카데미, 풀로엮은집, 한겨레문화센터, 민예총, 참여연대, 마들연구소 등에서 진행하는 좋은 강좌가 널려 있다. 그 동안 여기저기서 만나봤던 강사들은 홍세화, 하종강, 노회찬, 심상정, 강수돌, 김어준, 한비야, 강풀, 한홍구, 강정구, 김상봉, 진중권, 김규항, 김진혁, 신영복, 조세희, 권인숙, 정태인, 고미숙, 송순재, 고병헌 선생님 등이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박노자, 박원순, 정재승, 우석훈 선생님 등의 강연도 꼭 듣고 싶다. 시간을 내서 인내심 있게 공부해야 할 현대 철학, 나에게 너무나 취약한 분야인 경제학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

취미 생활도 하고 운동도 해야겠다.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플루트 연주 실력을 수준급으로 높이고 싶다. 어쩌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가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클래식 기타쯤은 곁들여 배워도 좋다. 자전거 타기 외에는 운동에 별 관심이 없으니 춤을 추면서 뱃살을 빼야겠다. 학교 축제 때마다 아이들을 비명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어설픈 춤 실력을 제대로 갈고 닦아야겠다. “내가 춤추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는 슬로건도 있던데, 춤이라는 몸의 언어를 마음껏 구사해 보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이렇게만 살도록 놔두지 않을 것만 같다. 나 혼자 행복하게 사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장 내년에는 지자체 선거, 교육감 선거가 있다. 그들은 얼씨구나 하면서 나를 선거운동 판으로 끌어들일 것이 분명하다. 그래, 작년 교육감 선거의 분풀이를 해야겠다. 저들은 전교조 조합원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경복 후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8명의 교사에게 해직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좋다. 이제 교육공무원이라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었으니 선거운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내친 김에 진보신당에도 가입을 해야겠다.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시민사회단체, 지역운동단체에서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당장 ‘은평 학부모 네트워크’에서 학부모 교육을 진행할 텐데, 학부모와 현장 교사들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다. 교육운동을 경험했던 현장 교사가 놀고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마포 민중의 집’에서도 늘 전교조에 지역 청소년 사업을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해 왔으나 그 사업에 함께 하지 못했다. 밀양에서 전교조 사업에 지역 운동까지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이계삼 선생은 아예 나더러 밀양으로 내려오라고 꼬드긴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은 한 수 더 뜰 것이다.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모임 관리도 하고 연수도 진행하라고 시킬지도 모른다. 학교 그만두면 더 바빠질 것이 분명하다.

‘학교 밖’에서 무슨 일이든 해 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행복한 낙오자’가 되어 ‘학교 안’과 ‘학교 밖’을 연결하고 ‘내부 망명지’를 확장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결코 나의 선택이 후회스럽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럼 앞으로 뭐 먹고 살 거냐?”는 질문이 당장 나올 것이다. 교직생활 십 년 퇴직금이면 삼 년 정도는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싱글이라는 조건이 얼마나 감사한지. 설마 삼 년 후면 (그 때면 적어도 MB 얼굴은 안 보게 된다)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겠는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는 성경 구절을 참 좋아한다.

만약 충분히 놀고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온갖 일을 벌이다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 때 다시 들어가면 된다. 임용고사 나이 제한도 없어졌다. 섬진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나는 김용택의 시를 실감 나게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고, 지리산 둘레 길에서 하염없이 빈둥거리던 나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독서의 무상성을 맛본 나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을 일러줄 수 있게 될 것이고, 온갖 인문사회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아이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음악과 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나는 아이들에게 지금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대안교육의 상상력으로 공교육에 충격을 줄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고, 지역운동과 풀뿌리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운동론으로 현장주의, 대중추수주의의 함정에 빠진 전교조 운동에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이미 ‘내부로의 망명길’에 오른 셈이다. 설사 학교 현장에서 매일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에 부딪히며 너저분한 일상을 반복하더라도 유쾌한 상상의 힘은 다시금 나를 추스르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실제로 망명길을 떠날지 아니면 여전히 현장을 지키며 고군분투 할 것인지, 나의 선택은 끝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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