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젊은이에게 삼성은 무엇인가" 

지훈 (대학원생)

삼성 반도체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20대인 그녀는, 내가 대학생이랍시고 게으르게 뒹굴대며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반도체를 검사하기 위해 끝없이 제품을 납에 넣었다 빼며 제 자신을 죽여야 했다. 처음 직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녀가 가졌을 꿈을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져 나도 모르게 흐느끼게 된다. 고된 노동에도 때로는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했을 테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될 때, 지나가버린 그 시간을 얼마나 안타깝게 그리워했을지.

대학을 아직 떠나지 못한 나는 다시 등교를 한다. 도서관 전산실에 들렀는데 내 앞에는 삼성 컴퓨터가 놓여 있다. 책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서자 삼성 에어콘이 눈에 띈다. 어떤 학생은 삼성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꽃은 채 강의실로 들어오고, 어떤 학생은 삼성 애니콜에 전화가 와서 강의실을 나가며, 어떤 학생은 삼성 노트북 센스에 강의노트를 작성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삼성이 없는 곳이 없다. 새삼 느낀 것이지만, 나는 삼성에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20대의 어느 노동자의 손에서 나온 반도체가 들어있을 테지만, 학교에서는 공공물품을 거의 삼성 제품으로 구매하고, 학생들은 서비스 좋다는 삼성을 아무 생각 없이 손에 들고 있었다.

삼성의 제품만이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기업들이 학생들의 동아리나 모임 활동을 지원하곤 하는데, 너무나 프랜들리한 삼성은 그 지원에서 가장 앞서가며, 나아가 지원을 넘어 동아리를 대체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누추하게 잔디밭에 둘러 모여 기타치고 노래 부르기보다는 폼나게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길 원하는 대학생들은 기업이 지원하는 모임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데, 삼성은 영삼성(youngsamsung)을 운영하여 대학 내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은 언제나 욕망과 친구한다. 삼성은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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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대학생들. 이들은 극심한 취업 경쟁으로 지쳐 있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하면, 행복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삼성 문제를 푸는 것은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를 보다 낫게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자세한 뒷사정은 알지 못하나, 작년엔 학생회와 삼성이 손을 잡으려한 일이 있었는데, 서울 지역 '한대련'과 삼성의 합작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광고지면을 내주고 지원을 받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삼성 올앳카드 회원을 학생회가 대신 모집해주고 카드 가맹점에서 할인을 받는 형태의 사업으로, 의결이 끝나고 집행을 기다리다가 몇몇 대학의 반대로 뒤집어졌다고 하는데, 그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아직 듣지는 못했다. 욕망을 가진 누구라도 친하게 지내는 삼성은 이정도로 대학생들의 친구이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온 우리는 그래서 삼성을 멀리하지 못한다.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세상과 이어주고 더위도 식혀주며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도 시켜준다. 얼마나 고마운가. 삼성이 이렇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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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삼성 홈페이지.

그래서 그런지 대학생들에게 삼성은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줄곧 '삼성맨'이라는 이름이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것인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조금 서글퍼지지만 거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바로 삼성은 학벌을 중시한다는 것. 얼마 전에 언론에서 삼성 사장단의 학벌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삼성 임원의 꿈을 심어주기도 했는데, 대개의 기업들이 서울대 인맥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에 이는 특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른 곳에 있다.

김용철 변호사에 따르면, 삼성에서 임원이 되는 것은 로비/섭외 실력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로비/섭외는 서울대 인맥이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하면 그게 아니다. 뻔히 알고 있는 자기 동창에게 큰 돈을 쥐어주며 로비하는 것은 민망하기도 하고 불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일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리어 아예 관계가 없는 사람이 큰 돈을 챙겨주는 것이 로비에서는 훨씬 더 편할 수 있는데, 그런 까닭에 계열사 임원 중에는 비서울대출신이 많을 수 있지만, 권력의 정점인 구조본은 모두 소위 명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무튼 높은 경쟁률을 뚫고 직원이 된다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역시 또한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누군가는 자랑스럽게 올렸을지도 모르나 그저 황당함과 경악만을 안겨주었던 동영상에서 본 매스게임을 실제로 하러 동료들과 집결해야 한다. 물론 멋진 콘도에서 삼성은 돈의 힘을 보여줄 것이고, 임원이 방문해서 삼성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임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도 심어줄 것이다. 멋진 일 아닌가. 내가 삼성맨이라니. 그러나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재미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지속되기 힘들다. 이직률이 가장 높은 기업이라는 삼성에서의 재직 기간은 보통 7~8년이라고 하는데, 3~4년차 사원들이 이직률은 30%대나 된다고 한다.

삼성을 발판으로 더 나은 곳으로 가려는 것일 텐데, 삼성에 계속 충성하다간 너무 일찍 묘비를 세워야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물론 잘 견뎌낼 수도 있다. 경쟁과 성과주의는 한국에서 익숙한 것이니까. 삼성 안에서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못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근 삼성에 취직한 친구의 말로는 인터넷 포털 DAUM도 눈치가 보여 접속을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견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예가 아닌 한, 무작정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인간은 의미를 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막연히 긍정하며,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멈춰서있어서는 안 된다. 함석헌은 사람의 사람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할 뿐만 아니라 하는 줄을 아는 것이요, 알 뿐만 아니라 아는 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만 하며,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질적으로 도약한다.

사람들은 삼성의 세련된 사무실에서 잘나가는 현대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은 이미 인천 송도만 하수처리 시설 사업권을 차지한 '삼성 베올리아 인천환경주식회사'에 취직해서 물 사유화 사업에 앞장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생명에 취직해서 삼성이 추진하고 있는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민간 의료)보험", 즉 지금의 건강보험을 통째로 사적 의료보험으로 대체하려는 계획에 뛰어들 수도 있다.

또는 삼성캐피탈에 취직해서 부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고객 도장을 몰래 만들어 불법 대환 대출을 할 수도 있다.(걱정 마시라. 금융감독원은 알고서도 처벌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혹은 운이 좋은 사람은, 분식 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면 서류를 빼돌린 다음 어두운 밤 해운대 백사장에서 불태워버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고, 200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삼성 토탈(주)에 대한 가격 담합 조사를 했을 때처럼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는 액션을 즐겨볼 수도 있으며, 더 운이 좋아 압수수색과 같은 긴급상황이 벌어지면 검찰이 주는 충분한 시간동안 내부자료와 파일을 파기하는 스릴을 맛보는 기회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너무 걱정 마시라. 저런 일들은 가벼운 과태료만 내면 끝날 테니.)

더 화끈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만일 사무직 노동자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생산직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의 조립라인 노동자나 반도체 노동자가 처해 있는 그런 열악한 환경과 고된 노동을 개선하려 노조라도 만들라치면, "너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끌어 묻을 수 있다"는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 집단 폭행을 가하는 활극을 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일로 삼성 이미지가 나빠질까봐 걱정이 되면, 지뢰 제거 활동 홍보처럼 '글로벌 사회 공헌' 광고를 제작할 수도 있다.

물론 뒤에서는 삼성이 F15-K 전투기를 수출하고 공격형 아파치 헬기를 만들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미지는 이미지니까. 아쉽게 이런 일을 몸소 하지는 못하더라도, 옆에서 구경할 기회는 얻을 수도 있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에 나오는 일들이다. 더 많은 일들을 알기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보시기를.)

이런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삼성이 보여주는 기술의 눈부심이다. 영화 아바타에 세계가 열광한 것은 그것이 구현하고 있는 테크놀로지 때문이겠거니와, 삼성이 생산해내는 최첨단의 반도체와 LED TV, 휴대폰 등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잠시 시선을 거두어보자. 빛에 빼앗겨버린 시선을 조금만 돌려본다면, 그것이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더 크게 만드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애니콜, 컴퓨터나 노트북 센스에는 백혈병으로 숨져간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눈물이 스며있고, 손 닦는 수건도 없는 화장실에 그나마 맘대로 가지도 못하고 두 시간에 10분씩 쉬는 시간 외에는 꼼짝 없이 컨베이어 벨트에 묶여 있어야 하는(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122쪽) 생산직 노동자의 한숨이 녹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으로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청년들이여, 만일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교양을 원한다면, 제품의 월등함 때문도 노동자들 임금 때문도 아닌, 임원들 보너스 때문에 비싼 애니콜이나 센스는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한국 사회의 문제가 집약된 그 곳은, 정의를 위한 발걸음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옥죄어 노예로 만드는 권력에 저항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이 시대에 새롭게 노동자와 연대할 수 있는 창구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삼성 센스 노트북을 샀다. 자본과 노동에 대한 거대담론을 자주 말하는 그는 이러한 불매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사소한 문제인가? 아니다. 여기 사회의 모순이 있다. 여기 눈물이 있다. 여기 피맺힌 울음이 있고, 여기 한숨과 아우성이 있다. 자, 그러니 이제 여기를 떠나라. 그것이 교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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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영 (전남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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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과 전국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이 국가인권위 광주지역사무소에서 특정대학교합격 게시물에 관한 인권침해사례 보고 및 인권위 진정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수막에 대한 인권침해 진정은 2회째 진행 중이다.

인권연대 오창익 국장의 책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에서는 유독 한국사회에만 존재하는 여러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인신매매에 가까운 국제결혼 광고, 주민등록번호, 무소불위의 '검새', 무노조를 고집하는 기업, 네온사인 십자가 등 그야말로 한국사회에만 있을 법한 얘기들을 위트 있게 꼬집고 있다.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여러 풍경들 중에 '길거리를 뒤덮은 현수막 문화'에 대한 것도 있다. 오 국장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가히 한국은 현수막이 뒤덮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 광고에서부터 소상인들의 호객행위, 행정당국의 정책홍보와 행사안내, 정당의 의견표출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도 다양하다. 이제 곧 지방선거 국면이니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새긴 선거용 현수막들도 가세할 것이다. 불법 게시물 철거와 과태료 부과 등 행정당국의 엄포는 떼고 나면 곧바로 다시 붙는 현수막에 의해 간단히 무시된다. 현수막 하나 만나지 않고 길거리를 걷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실 현수막이 뒤덮은 거리의 모습은 문화라기보다는 공해라는 표현이 옳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시각의 어지러움은 물론이고 떨어져 너덜거리는 현수막의 위험성, 문구의 선정성 등은 다른 공해에 못지 않다. 현수막을 없앤다면 조금 불편함이야 있겠지만 별 이로운 구석도 없는 현수막이 꼭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국의 어지러운 간판문화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필요악이라기보다 그저 익숙해진 생활습관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현수막은 봐줄 만하다. 어지럽고 볼썽사납기는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소외감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시기에 각 고등학교 정문에 붙어 있는 현수막은 좀 다르다. 혹 눈여겨보았을지 모르지만, 요즘 고등학교 정문에는 대게 이런 종류의 현수막들이 걸려있다. ○○대 ○○명 합격, 수도권 ○○명 합격 등 대학 합격을 축하하는 내용들이다. 심지어 합격생 이름을 나열해놓은 학교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 대학진학이라는 목표 외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대다수일 테니 합격을 축하할 만도 하다. 하지만 합격 축하 현수막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우선 현수막에 포함되지 않은 대다수의 졸업생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다. 명문대 위주로 진학한 소수만을 위한 축하는 소위 '마이너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나 재수생들,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은 아예 설자리조차 없다. 어쩌면 입시위주의 교육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학교당국에게 그들은 단지 패배자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학률이 높은 것이 곧 명문이라는 천박한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현실, 교육당국의 현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합격 현수막이 담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동이 나와 주목된다. 참교육학부모회 광주지부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이 합격 현수막이 가진 반인권성을 지적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합격 현수막이 학교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입시학원화를 조장하고, 진학만을 고집하는 학력차별, 특정 대학만을 지향하는 학벌차별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현수막이 주는 패배감과 좌절감 때문에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피해도 양산하고 있다고 한다.

합격 현수막 철거를 위한 운동은 이미 2006년부터 광주지역에서 제기되었다. 처음에 각 학교와 교육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일부 학교가 시정을 하기도 했지만 매년 게시와 시정이 반복될 뿐 근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지난해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조사 과정에서 각 학교들이 지양하기로 함에 따라 "조치가 필요하지 아니한 경우"라며 기각되었던 사안이다. 그렇지만 올해도 여전히 같은 일이 반복되자 또 다시 진정을 하게 된 것이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는 비단 고등학교 문제만은 아니다. 대학 현수막도 다르지 않다. 과거 대학의 현수막은 주로 대학생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취업 관련 광고나 교내 행사 안내가 차지한 지 이미 오래다. 대학의 현실도 상아탑을 버리고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니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이름까지 버젓이 공개하며 사법고시 등 국가고시 합격을 축하하거나 대기업 취업을 축하하기에 급급한 현수막은 도가 지나쳤다.

합격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행복하다. 더구나 동네에 자랑할 것도 아니고 교내에 내건 현수막이 '자위' 말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의미 없는 행동이 도서관에서, 각종 취업준비 학원에서, 고시촌에서 시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소외를 줄 수 있다. 청년실업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부의 성공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성공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자극도 필요하겠지만 상처를 주는 자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합격 현수막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대학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따라서 이번 진정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시정 권고가 반드시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입시경쟁을 부추기고 서열과 학벌을 조장하는 풍토는 반드시 차별과 연결된다. 고시합격을 자랑하고 대기업 취업을 자랑하는 대학의 풍토도 마찬가지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그 맡은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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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입학 때만 되면 교문 앞에 현수막이 내걸려요. 매년 한결같아요. 이번에도 서울에서 잘나가는 대학이나 의·치·한의대에 합격한 선배들이에요.

지방변두리 대학합격자 명단이 올라가는 불상사는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학교는 명문대만 특별취급 해요. 일류대 진학자만이 학교의 위상을 높인다고 믿으니까요. 왜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이런 열패감과 자괴감부터 심어주나요. 이런 학교 짜증나요.

그때 어디선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와요. 3학년 진학부장 선생님이에요. 현수막에 자부심을 가지라내요. 내년에는 우리차례래요. 우리가 이름을 올려야 학교의 명예가 드높아진대요.

벌써부터 뒷목이 뻐근해 와요.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대학을 잘 가야 한대요. 저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낙오자 취급을 받을 것 같아요. 엄청 부담감도 쌓이고 스트레스도 많아요. 상위권 대학진학이 어려운 친구들은 벌써부터 열등감과 패배감을 곱씹어요.

그런데도 대학만 가면 마치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말해요. 수능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현실이 기분 나빠요. 명문대 진학자 수에 따라 학교평가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웃겨요.

하지만 3학년 학생 부장이자 진학부장 선생님은 SKY 때문에 웃어요. 합격자 수만큼 보너스를 받아요. 해마다 진학숫자에 따라 하늘을 날다가 추락하기도 해요. 일류대에 갈 것 같았던 제자가 시험을 망치면 위로는커녕 욕지기부터 해요. 학생들 성적을 밥줄로 생각하나 봐요.

그래서 학생들은 공부하는 기계가 돼야 해요. 인생은 성적순이라니까요. 개성이나 특기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래요.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소용없어요. 일류대에 간 선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요. 당장 명문대 몇 명 합격시켰는지 만 중요해요.

현수막에 이름을 올린 그 선배는 지금 행복할까요. 내 이름이 올라간다고 해도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 같지 않아요. 현수막에 적힌 그 선배와 나는 서로 잘하는 것도 다르고 관심분야도 달라요. 그런데 학교서열 때문에 비교되는 것이 화가 나요.

그런데도 대학 성적순으로 학교 순위가 매겨지고 입학생 수준이 달라진대요. 우라질레이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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