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아닌 삶에게 (2010.6.24 김규항 강연회 후기)


정다영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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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은 누구?

○ 경력

․ 출판사 야간비행 운영

․ 출판사 고래가 그랬어 운영

․ 사회문화비평지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칼럼니스트

(1998,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 저서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예수전, 나는 왜 불온한가, B급좌파


후기랍시고 강연회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강의가 궁금한 사람은 학벌없는 사회 광주모임 홈페이지에 들러 강연회 동영상을 차분히 보면 될 것이고, 꽤 긴 강연이기 때문에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김규항의 홈페이지에 들러 시간 나는대로 짬짬히 글을 읽어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말보다는 글이 더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김규항에게서 우리가 들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강연이 끝난 뒤 내가 만난 몇몇 사람들의 반응에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그의 강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갔을 테지만, 유독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강의의 내용이 부실했다거나 별 내용이 없었다는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들이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이야기처럼 들렸을까. 또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들이 그가 계속 써온 글들에 대한 반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을까.


그의 말은 새롭지 않다. 그의 말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 까닭은 그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이론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말과 글은 우리의 인식의 즐거움을 향해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와 생활태도, 가치관을 향해 말한다. 제주 해녀 할머니가 굳이 해녀복을 입지 않고 잠수를 하는 까닭이 해녀복을 입으면 나 혼자서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수확을 위해 생물들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다는 예를 들면서 그는 그것이 가까운 과거의 우리들의 심성이었다고 말한다. 제 삶의 풍요를 생각하느라 남의 삶을 생각하지 않게 된 우리의 마음이 현재의 이명박 정권의 출현과 자녀교육에서 드러났으며, 이 두 산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지금 서있는 자리이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정말 다른 사회를, 인간적인 세상을 원합니까?”라고 그들의 마음에 되묻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거리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는 대안이 없다. 그는 ‘그래도 현실이…’라는 변명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현실이 이렇다’는 반성을 통해 지금 새롭게 살아가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원을 끊으면 당장 우리 아이는 같이 놀 친구가 없는데 어떡하나, 대학을 안가면 취직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묻는 질문들에 그는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며 교육문제에 관해 글을 쓰는 무터킨더 박성숙의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독일이 아닌데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우리가 그 책에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뿌리깊게 경쟁의식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를 체감하고 그것을 버리려는 노력에서부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의 적, 우리의 적은 외부에 있는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 속에 내면화된 그러나 우리가 비판하는 사회의 가치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 나만 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오히려 나만 혹은 내 아이만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또 고래커뮤니티를 만들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누군가 길을 내기 시작하면 길이 다져지고 넓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새롭지도 그럴 듯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은 아름답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또 언제나 새롭다. 이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최근의 독서에서 김선우의 소설을 예로 들고 싶은데, 김선우의 <<캔들 플라워>>를 읽으며 느껴지는 감동과 아름다움은 문장의 미려함에서 오는 것이기보다는(물론 문장 자체도 좋지만) 세계관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듯이 김규항의 말과 글에서의 감동 역시 비슷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과 글에서 외화된 것들보다 그 속에 자리한 세계관과, 고민들, 삶의 긴장에 대한 노고를 생각하다보면, 이 시대에도 이런 이들이 살고 있어서 아직 살만하고 다른 세계를 꿈꿔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또한 그의 말이 새롭지 않음에도 언제나 새로운 까닭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실천의 어려움 때문에 생각의 급진성도 거기에 맞추어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는 실천의 보폭을 생각의 급진성에 맞추어 가려고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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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가 학벌타파를 주장한다고?

 

안정혁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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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주1) 8월 13일 이명박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학력이 낮더라도 능력에 따라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어느 의견에 대해서 "적극 찬성한다. 학벌타파해야 한다."며 잠깐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헌데 실상은 특목고․외국어고 설립, 일제고사 시행 등 또 다른 학벌의 통로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지 않은가.


2. 트위터는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 이용되는데, 트위터 뿐만 아니라 이메일, 인터넷 등 각종 컨텐츠를 쉽게 얻을 수 있어 인기가 좋다. 근데 걱정은 사교육자본들이 입시정보 (스마트폰 프로그램)어플이 유행이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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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킥 오프- ‘희망’이란 신기루 or 이런게 전쟁이야.


광주인권운동센터 활동가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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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킥오프> 중에서


종종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곤 한다. 더러 ‘영화같은 현실’을 목도하지만, 영화에서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속살들은 얼마나 많은가.


포스터만 보고 속을 뻔 했다. 잿빛 포스터 안에 ‘희망적인’ 스멜이 살짝 풍겨나오고 있었다. 월드컵 과열의 부작용으로 축구를 멀리하는 편인데, <킥오프>는 외려 관심이 갔다. 직업병(?) 일수도 있겠고, 쉬 접할 수 없는 이라크 영화라는 것도 마음을 움직였을 게다. 사실 축구보다야 이라크 현실을 어떻게 담아냈을까가 주요 관심사였다. 6월에 개봉했던 <맨발의 꿈>을 챙겨봤던 것도 순전히 동티모르가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화라니! 영화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축구에 빠진 아이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보는 건 즐거웠다.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축구의 마력이라니. <맨발의 꿈>은 실화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나름 맛깔스럽게 버무려냈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들이 너무 전형적이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아이들의 미소에 빠져 허우적 댔더랬다. 실제로 현지에 사는 유소년축구단 맴버들 이라고 하니 그 생동감을 누가 따라왔을까 싶다. 연기경험도 전무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연기는 일상에서 길어올린 삶의 빛깔이 뚝뚝 묻어난다.


나는 말랑말랑한 영화도 즐겨보지만, 현실의 생채기를 보여주는 쓰디쓴 질감의 영화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킥 오프>는 <맨발의 꿈>과 같은 소재를 차용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질감의 영화다.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스포츠와 아이들을 다룬 영화의 결말이 이리도 처연할 수 있다니, 제대로 킥을 당한 느낌이다.


<킥 오프>는 폭탄 테러가 일상이 돼버린 도시 키르쿠크의 파손된 스타디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쿠르드족, 아랍인, 터키인, 아시리아인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이야기다. 전쟁과 가난에 얼룩진 일상의 무게가 버겁지만, 그곳에도 사랑의 설레임이 있고, 희망이 꿈틀거린다. 가난과 폭격의 두려움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삼삼오오 축구를 하거나,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장면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선 나름 호사스러운 일이다. 너덜너덜한 스크린에, 화면도 지지직 거리지만 오순도순 모여 화면에 집중하는 장면은 아릿한 감동을 준다. 영화는 부족간 축구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수’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스타디움 곳곳을 스케치하듯 담아낸다. 늘 스타디움 한켠에 염소를 대동하고 하릴없이 앉아있는 묘령의 청년, 황량한 운동장 여기저기 묶여있는 가축들, 그리고 스타디움을 터삼아 오고가는 사람들. <킥 오프>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변변한 배우나 화려한 특수효과, 시선을 끌 만한 에피소드 하나 없는 모호한 색감의 흑백화면이 이라크의 현실인 듯 서늘하게 다가온다.


<킥 오프>는 열악한 촬영조건에서 힘들게 완성된 영화다.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현장 여건 때문에 참여하려는 스탭은 거의 없고, 출연을 결심한 배우가 촬영 전에 포기하고 달아나기도 했단다. 게다가 촬영 도중 테러리스트들의 협박 전화까지 감내해야 했다니.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제작진이 겪은 비화야말로 영화를 뛰어넘는 이라크의 현실일게다.


감독은 축구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절망의 기운을 드리운다. 잠시 망각했던 현실을 지독하게 상기시킨다. 이게 이라크의 생생한 현실이라고. 애초에 축구공 하나가 감동을 선사한다는 꿈같은 결론을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뒤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다. 섣부른 희망으로 장식되지 않은 날것의 현실, 덕분에 영화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다. <킥 오프>는 전투씬 하나 없는 소박한(?) 영화지만 그 어느 전쟁영화보다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렇게 폐허의 땅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부지불식간에 ‘죽음’과 대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전쟁이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듯 하다.


전쟁영화들은 다양한 변주를 꾀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며 잠시도 숨돌릴 틈을 주지않는 블록버스터부터,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차갑게 응시하는 작가주의 영화까지. 전쟁영화는 대자본의 수혈을 받고 계속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총질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기 힘들어하면서도 전쟁영화를 ‘꼭’ 챙겨보는 이유는, 전쟁의 실상을, 다시는 전쟁이란 ‘괴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영화라는 매체는 양면적이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생각을 이식시키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을 주목하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몇년 전 개봉했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가 영국 TV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 영국 시민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블레어 총리는 관타나모 기지 폐쇄를 부시 행정부에 촉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영상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물론 영화 한편이 당장에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순 없겠지만, 날것의 영상을 통해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무감한 마음밭에 조그만 ‘파문’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 변화들이 모여 세상에 파열음을 낼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이라크에 주둔 중이었던 미군의 마지막 전투여단이 철수했다고 한다. 2003년 침공이후 7년 5개월 만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미군이 물러가더라도 개입을 안하는 것은 아니란다. 비군사 개입은 지속될 전망이다. 사실상의 ‘간접통치’에 들어가기 위한 수순이다. 오바마의 공약이었으니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당장은 철수해야겠지만, 아마 이라크에 대한 간섭은 영원히 지속될게다. 지구촌 곳곳이 여전히 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킥 오프>를 보고난 후 맘이 착잡해졌다.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이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조각난 삶을 재건하기 위해 힘을 쏟겠지만, 걸프전부터 지금까지 전쟁의 상흔이 깊게 베인 이라크에서 ‘희망’을 꿈꾼다는 건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게 아닐까.


<킥 오프>의 결말을 보며 잠시의 행복도 앗아가 버린 전쟁의 참혹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공기처럼 한데 뒤섞여 있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을 터. 겹겹이 드리워진 폭력의 세계를 올곧게 응시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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