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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신의 연애전선 안녕하신가? 2010.10.12
  2. 사랑, 식칼 그리고 이별 2010.10.12
  3. 자발적 가난에 대한 두려움 2010.10.12

당신의 연애전선 안녕하신가?


조이소현 (전,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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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스펙과 학벌있는 졸업장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


연애. 생각만 해도 달콤한 그 이름. 아무도 자신과 그남/그녀 밖에 모를 것 같은 그 은밀한 이름.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선팅지'의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선팅지를 칠한 유리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선팅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검은 유리창'으로만 보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팅지 밖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안에 있다. 이 말은, 연애라는 '사적'인 행위들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사회적, 정치적'인 것들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달콤한 키스 혹은 섹스 포지션은 알고 보면 사회화된 것이고, 그 사회화된 것 속에는 무척이나 '잘못'인식되어 행해지는 것들이 많다.

예로부터 페미니즘에서의 고전적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으니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일터. 그런데 이 문장은 한국 권벌사회를 바라보는 한 시선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학벌'과 '여성주의'는 '연애'라는 장 속에서 마주친다.


예전만해도 서울대 법대 남학생과 이화여대 가정교육학과 여학생의 미팅은 아마도 대학생들의 만남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동경의 대상, 완벽한 모델로서 자리매김 해 왔다. 서울대 법대 여학생과 서강대 가정교육학과 남학생과의 만남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힘의 균형'을 잘 맞추려면 남성이 좀더 좋은 학벌/권벌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둘의 만남은 '선남선녀'의 만남으로 미화되고, 결국엔 결혼으로 골인하여, 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와 비슷한 예가 티비 프로그램 '장미의 전쟁'이다. 이것은 ‘남성 연예인+일반인 여성, 여성 연예인+일반인 남성’의 커플을 만들어 짝지어 주는 미팅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굉장한 일이 생길 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MC가 오늘의 로맨스를 대충 읊는다. 그리고선 죽 늘어선 양쪽의 청춘 남녀들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만의 신선함 혹은 독창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멋진 연예인들과 일반인의 로맨스‘


소위 스타라 불리우는 연예인들의 굉장한 외모에 기대어 여성들에게는 백마 탄 ‘왕자’를, 남성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같은 그녀들을 현실로 끌어내어 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일반인 남성이 연예인 여성과 미팅을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일반인이란 기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일반인 기준은 더 모호해졌다. 그 방송에서 일반인이란 ‘비연예인’ 즉 방송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반인 여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화려한 방송 경력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앞으로 방송계에서 일 할 사람이거나 관련과의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일반인 남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수도권 대학과 상위권 대학 출신이 반이 넘게 있었다. 일반인이라는 기준이 여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방 남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인 여성이라고 해도 학력이나 개인이 가진 능력보다는 보통 여성 연예인만큼의 외모가 중요하고 전부인 듯했다. 그렇지만 일반인 남성이 상대방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대방의 눈길을 이끌만한 외모도 필요해보였지만 학벌이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벌 있는 남성과 미모 출중한 여성의 만남은 어색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학벌 있는 여성과 미모만 있는 남성의 조합에서는 상당히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많이 묻어난다.


어디 이것이 텔레비젼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대학에 가면 학기 초 3월에 가장 많이 나붙는 홍보 자보가 '**고 / @@여고 조이트 동문회'이다. 대부분의 이 '조인트' 동문회는 지역에 있는 '유명'고등학교 와 함께 하루 만나서 놀자는 것이다. 하루 만나서 놀자고 말하는 '조인트 동문회'는 학벌을 조장하고, 이와 더불어 이성애적인 만남을 통해 학벌을 공고히 하자는 데에 있다.


연애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하는 이 장 속에서도 학벌은 보이게/보이지 않게 공고히 작용하고 있다. 학벌=능력으로 인식되는 이 사회 속에서, 주변 남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 애인이 ‘여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예쁘냐?’이다. 반면 주변 여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애인이 ‘남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물어보는 질문은 ‘어디 학교 다니는데?’이다. 이 속에서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애인으로 뒀을 경우, 대답을 쭈뼛쭈뼛하게 되고, 애인의 性이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이 아닐 경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니, ‘나 애인생겼어요~’라는 말조차가 그녀/그남들에게는 봉쇄되어있다. 물론 이 대답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답’은 ‘서울대 생이야’일 것이다. ‘응 그냥 대학다녀’라고 말하겠지. 왜 당신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렇지 않은 것같이 자연스러운 것은 알고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억압‘하는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학벌도, 이성애중심주의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연애는 얼마만큼 이 속에서 자유로운가? 얼마나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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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식칼 그리고 이별


김영대 (광주전남녹색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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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느 여중학생들이 버스유리창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 ‘하트’, ‘식칼’… 대체 이것들이 무얼 의미할까?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뛴다고 무슨 의미가 있냐? 그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우연히 알게 된 귀농한 부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너무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삶이 싫어 농촌의 여유로운 삶을 찾아왔다는 부부다. 나도 이런 숨 가쁜 삶은 싫다. 이런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사회도 싫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것은 두려워, 그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탄다. 버스를 놓칠세라, 숨 가쁘게 뛰듯 올라 탄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람들 또한 이런 숨을 내쉬고 있다. 거친 숨을 가득 담고 출발한 버스 창문은 흐 뿌옇다. 창밖을 본다. 옆에서 달리는 차량의 불빛만이 번지고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지쳐가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면서 버스 안은 여유로워졌다. 사람들의 숨결이 맺혀진 버스 창문은 차갑다. 그곳에 두 여중생이 그림을 그리며 깔깔대고 있다.


한 친구가 사람을 그리며, "이거 너야!" 또 한 친구는 문어 같은 사람을 그리며 "너야!" 한다. 이젠 하트를 그린다. "사랑" 이란다. "사랑? 이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 아니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느닷없이 식칼이 그려진다. "슝~ 얘도 죽고, 얘도 죽고, 얘도 죽… 아니 얘는 산다." 그리고 서로 깔깔대며 웃는다.


버스 엔진 소리, 그리고 적막. 그 적막에 깔깔대며 나누는 이야기가 버스 엔진소리에 묻힐 듯 내 귀에 들려온다. 정답다. 무서운 이야기인데… 멍하니 그들이 창가에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본다. 온기 있는 손가락 끝. 차가운 숨결을 녹였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의 선을 따라 버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큰 길 가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가의 푯말,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버스가 섰다. 그들이 내렸다. 그들이 내리고 난 자리에 '우리'란 단어가, 사랑과 식칼 그리고 죽음의 어느 공간에 적혀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는 '우리들'이 함께 타고 있다. 또 그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는 '우리들'도 함께 타고 있다.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이별도 있는 버스 안, 여중생이 그려놓은 식칼.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는 삶이 칼로 베어 이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인가? '우리들'이 아닌 '너희들'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아픔을 느낀다.


고민이다. 난 언제쯤에 내려야 할까? 버스에서 내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럴수록 거꾸로 가는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 또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차가운 숨결을 녹였던 손가락 끝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렇게 온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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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에 대한 두려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박고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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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저서를 읽으려는 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광화문 교보문고에 대표산문집 '무소유'의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무소유에 대한 소유욕을 보며


지난 3월, 법정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길상사에는 그를 위한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유의 욕망이 넘실대는 시대였기에 그만큼 무소유의 메시지가 힘을 얻었을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스님이 떠나신 후 무소유를 절판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앞다퉈 책을 소유하려는 진풍경을 벌였고, ‘무소유’는 전자책으로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를 차지했다. 이 땅의 인간을 좀 더 이해하셨더라면 법정스님도 책을 절판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법하다. 소유의 욕망은 존재의 욕망만큼이나 뿌리가 깊어, 무소유의 정신조차도 소유하게 만든다.


바로 소유가 문제


이처럼 대개 사람들은 돈을 소비해 물건을 소유하거나, 돈을 축적해 불로소득으로 부를 늘리려 노력한다. 상위 2%에 속하는 자들이 막강한 땅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여전히 경쟁과 착취의 틀 안에서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나는 인간의 ‘욕망’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한가? 얼마 전 김석순 이모(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부회장)가 잠비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열대지방 현지인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적어도 일정 정도 돈과 음식이 생기면 일을 중단하고 가족, 이웃들과 그것을 나눈다.’는 자급자족의 현실상을 그려주었다. 소유를 통해 행복할 수 있지만, 소유하지 않음을 통해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고 열대지방은 미성숙한 비자본주의 사회다. 한 때 한국도 자급자족 했던 사회다.’라며 일축할 수 있지만, 나는 소유의 문제를 꼭 자본주의나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토대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자립생활의 공동체가 대안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국가의 많은 제도는 기회의 평등보다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교육이나 지식조차 상품으로 변했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당한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산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다. 이러한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본다. 자급자립의 공동체, 자본 없이도 나름의 재능과 관심을 꽃 피우며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 정신과 인간됨으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 각자 제 재능을 살려가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나의 삶은 이제…


내가 받는 학벌없는사회 활동비는 한 달,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한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20만원, 통신비가 5만원. 그러니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삶을 충당했지만, 현재 내 자산은 카드빚으로 쌓여있다. 요즘같이 힘들 때가 없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욕망을 없애 준다. 내 처지를 아는지, 사람들은 함께 끼니를 나누고 음악을 가르쳐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건넨다. 배고픈 내게 항상 무언가 던져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의 문제는 결국 돈과 맺는 어떤 관계이기에 불편함이 있고, 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반복해야만 한다. 결국 자발적 가난이든 자급자족이든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긴 힘들 듯 하다. 때로,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어 다른 사람의 짐조차 들어줄 수 없는 삶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삶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 주류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실천하는 일이다. 이제 내 자신을 경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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