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과 근대 공교육의 이념

지훈(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회원)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사회적 문맥에서 보자면 교육은 소수 특권계급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열린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그리하여 공교육은 모두에게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것의 혜택이 없었더라면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이 근대 공교육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였던바, 그리하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복지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육의 기회가 소수의 특권이었던 봉건적 계급 사회에서는 보편적 공교육이 뿌리내릴 수 없었던바, 공교육이란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때에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보편화된 곳에서 어떤 집단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이를테면 장애인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교육제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육의 가치가 사회적 합의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같은 공교육의 이념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상태는 없었지만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프랑스 교육은 1791년의 헌법에 의해 초등교육은 법적으로 무상이고, 의무라고 선언됨으로써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민주화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무상국민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근대적 공교육제도의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 콩도르세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학교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계몽의 압제가 힘의 압제에 합류해 있었다”고 지적하며 지식의 독점과 교육의 불평등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함을 밝히며 이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부유한 집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모든 원조를 재능에 제공하는 공교육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의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교육에 따른 불평등의 계급적 재생산은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개혁도 주장한다. 교육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 아래에 있거나 학교가 선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교직의 자율성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다. 그는 “교육은 공통적으로 주어져야 하며, 여성도 교육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며 공교육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가정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식의 봉건적 사고도 엿보이는 등의 한계가 보이지만, 당시로서 동등한 교육을 주장했던 것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교육의 일반 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을 혁명의회에 제출함으로써 민주적 교육체제의 선언인 헌법에 기초하여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교육이 더 이상 부와 결부되지 않을 때 교육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평등에 대한 위험이 적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육에 의한 권력화도 경계하였다. 이는 교육이 계급재생산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한국사회에 더욱 의미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시기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교육 개혁론들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은 미미했다. 나폴레옹에 의해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계가 일정 정도 수립되었으며, 1882년 ‘훼리법’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학교교육의 비종교화나 무상의무교육제도의 원칙이 확립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우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보편화함으로써 공교육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장한 점, 무상교육의 제공을 통해 경제적 환경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려한 점, 그리고 교육에 따른 권력화를 경계한 것 등은 매우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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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공부와 해방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현식(연구공간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11월, 어김없이 수능의 여파가 전국을 흔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 정책이 바뀌어도 벌어지는 현상은 언제나 똑같다. 문제는 이 뜨거운 열기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공부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유쾌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적절한 보상이라도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다. 바야흐로 공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때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프랑스의 지식인인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 있다. 그의 책, 무지한 스승은 제목부터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무지한 스승이 어떻게 제자들을 앎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의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을 보면 그가 말하는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아닌 ‘지적 해방’이다. 일단 우리의 질문을 접어놓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질문 하나. 유식한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

랑시에르가 이 책, 무지한 스승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요체는 이렇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32쪽)” 무척이나 도발적인 질문이다. 어떤 스승을 필요로 하는가. 해방하는 스승,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해방을 위한 스승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식한 스승이어야 할까, 무지한 스승이어야 할까. 놀랍게도 그는 무지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스승이야말로 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유식한 스승은 학생을 끊임없이 바보로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유식한 스승은 끊임없이 학생의 무능함을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어야만 학생이 무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우월한 지능(유식한 스승)이 열등한 지능(무지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바보로 제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월과 열등의 구분을 하는 순간 이 둘은 모두 바보가 된다.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왜냐하면 두 지능의 평등을 입증할 수 있는 비슷한 자에게 말을 거는 자만이 자신의 지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월한 정신은 (자신의 말을) 열등한 자들에게 억지로 들리지 않게 한다. 우월한 정신은 그를 인정해줄 수 있는 자들을 얕잡아봄으로써만 자신의 지능을 확보할 뿐이다.(83-84쪽)”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겠는가. 고상한 지식인의 언어는 그렇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든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란 지능의 퇴화가 아니다. 따라서 그 반대는 ‘천재 만들기’가 아니다. 오히려 바보란 해방되지 못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보 만들기의 반대말은 해방이다. 자기가 가진 고유한 지능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열등한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다른 말로 옮기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국 프랑스에서 망명한 자코토는 루벵에서 강사직을 얻는다. 그가 맡은 수업은 프랑스 문학.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몰랐다는 데 있었다. 유일한 소통 수단이란 통역뿐이었다. 그러나 자코토는 학생들과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맺는다. 바로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주문한 것은 매우 간단했다. 네덜란드 번역문을 가지고 프랑스 텍스트를 익히라는 것. 특별한 교수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외울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그리고 텍스트를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기.

이 실험의 결과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무지한 스승인 자코토가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가르친 그 방법에 랑시에르는 주목한다. 그 공부의 결과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열등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아니면 해방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이야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된 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코토는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것도 히브리어를! 그 뒤 그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무지한 스승, 자코토를 통해 경험한 배움이 그를 구원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 해방된 자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부가 꼭 쓸모 있는 지식을 익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인쇄공 아들에게 히브리어가 결과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질문 둘. 굴레를 씌우는 공부이냐 해방을 이루는 공부이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논어 첫 장을 펴면 나오는 말이다. 논어가 언제, 누구의 손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구절로 논어 시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배움의 문제가 중요하다. 공자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때도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스스로를 호학好學,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한다. 주희는 이 배움(學)을 ‘본받는다(效)’는 뜻으로 해석한다.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를 본받는 것이 바로 배움이라는 것이다. 주희의 해석을 따른다면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學)란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바보 만들기’에 불과할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었다면 주희에게는 먼저 깨달은 자와 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다.

이 바보 만들기는 끊임없이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열등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우월한 자와의 커다란 간극. 공자 시대에도 이미 공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공자의 수제자로 꼽히는 안연이었다. 안연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굳세다. 앞에 계신 듯 보이다가도 홀연히 뒤에 계신다. ... 선생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좇아갈 방도가 없구나!” 안연의 이 말은 도저히 공자를 좇아갈 수 없다는 탄식이다. 공자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안연조차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공자 시대에 일부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성인聖人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스승으로서의 공자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사실 유가전통에서 말하는 스승은 대체로 이렇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이 사제간의 관계에서 열등한 자는 언제나 열등한 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는 제자일 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비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랑시에르가 목표하는 해방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떨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해방된 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속박당한 자인가.

공자는 자신의 삶을 지우학志于學으로 시작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로 정리한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어긋남이 없었다는 말. 이것이 바로 해방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더구나 유가전통에서는 배움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보면 이렇다. 위기지학이란 자기 공부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자기는 물론 사물들을 이루어주는(成物) 데까지 이르는 공부를 말한다. 반대로 위인지학은 남의 평가에 좌지우지하는 공부를 하다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喪己) 데까지 이르는 공부다. 자기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공부, 이것을 랑시에르의 말로 바꾸면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유가전통에서 이런 두 가지 상반된 표상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속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는 그 스승을 통해 자기 해방을 경험한다. 유가 지식인이라면 랑시에르의 말, 무지한 스승이 되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무지한 스승보다는 위대한 스승을!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선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철학적 지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랑시에르가 지식과 지능의 문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를 제시한 반면 유가전통에서는 지식과 지능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랑시에르가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어 모든 존재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지능을 가졌음을, 따라서 지능이 우월한 자도, 열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 해방’이라는 부제는 이처럼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가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곧바로 배움의 문제로 도약할 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경계하듯 지능의 분할, 즉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굴레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전통이 그의 비판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바로 이 때문이다. 스승은 권위를 갖되 해방케 하는 존재다. 따라서 선각자先覺者와 후각자後覺者로 구분한 주희의 구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이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분할로 빠질 수 있지만 또한 그로부터 탈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지적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각자 또한 언젠가는 깨달은 자(覺者)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비판한 우월한 자-유식한 스승을 다시 살펴보자. 그가 말하는 스승은 능력의 우월함을 자임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설명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유식한 스승이란 바로 설명하는 자다. 그래서 ‘보편적 가르침’에 해방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우는 학습 방식. 여기서 해방의 고리가 있다. 무지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을 대신해서 ‘의지’가 필요하다. “이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29쪽)”

유가 지식인들은 유식한 스승이었을까? 적어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유식한 스승의 방법과 닮아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승은 의지를 일깨운다. 무지한 스승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선뜻 대답을 찾기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그 ‘공부’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속박하는 공부가 아닌 해방하는 공부. 그래서 유가 지식인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촉발하는 스승.

질문 셋. 전체의 전체냐 부분의 부분이냐

해방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방의 지식을 얻고 나서는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또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항상 새로운 해방을 찾아야 할까?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힌 네덜란드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익힌 인쇄공의 아들에게 또 다른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이 익힌 프랑스어와 히브리어는 세상의 지식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결국 그 해방이라는 것도 일부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자코토는 말한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그가 학생들과 읽은 텍스트 텔레마코스의 모험, 그 자체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전체가 있다. 그것은 칼립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이 인류 모든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를 가지고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들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우리가 새로 배우게 될 모든 것을 그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어떤 중심. 이 새로운 것들 각각 이해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 것, 그것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수단을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어떤 고리. 보편적 가르침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48쪽)”

전체와 전체가 만나야 한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전체를 볼 것, 끊임없이 전체와 연관시킬 것. 이것을 유가전통의 말로 옮기면 구도求道, 혹은 궁리窮理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이름이 ‘궁리’이다! 책 뒷날개에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위학지요爲學之要 막선어궁리莫先於窮理 궁리지요窮理之要 필재어독서必在於讀書 배움의 요체는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에 있다.” 의상이 지었다는 「법성게法性偈」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세계 전체가 담겨있다. 따라서 진정한 깨달음, 지적 해방이란 배움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나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 텍스트 안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앎을 이룰 수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부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결코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루벵의 프랑스어반 학생들의 지적 모험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지적 모험은 곧 전체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해방이 낯선 빈자들에게 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랑시에르는 설명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거나 여러 해 동안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는 이상 교육받을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빈자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한다고. 그러나 이 것 역시 빈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전체를 위한 것이다. 교육-바보 만들기는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른바 지식인의 자기 해방은 이 지식 해방에 동참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해방은 전체적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누리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해방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누구와 함께 해방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구원해줄 사람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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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각을 창간하며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암울하지만 다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입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광주에서도 수능시험을 보고 난 재수생이 점수가 낮게 나왔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공부하기가 버겁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기 집 가스배관에 목을 매달은 일도 있었고요. 이런 일은 매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데, 언론에 종종 나오는 이러한 일들은 수많은 학생 자살 가운데 몇 개만 뽑고 있고, 사람들은 그나마 언론에 나온 학생들의 자살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언제까지 학생들의 죽음행렬을 두고 보기만 해야 할까요? 도대체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특정대학 출신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 있는 높은 자리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몇 개 대학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대는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때부터 정치권력의 특별지원과 비호 속에서 한국사회 지배엘리트 양성소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오래 전부터 공직, 언론, 국영연구소, 정치계, 법조계 등 거의 모든 분야 핵심 요직의 십중팔구를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권력 상층부를 독식한 이들은 자기들끼리 남 배척하는 패거리를 만들고 유형무형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권력집단 바깥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사회 운영과정에서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권력, 꼭 필요하나요? 전 권력 없는 사람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근데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흔히 진보적인 사람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높은 공직에 올라가야 한다면, 대학원을 다닌다거나 자신의 직급을 높이기 위해 내조하거나 정치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 이들 역시 불평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생들도 이른바 일류대에 들어가 우리사회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거고요. 이처럼 교육이 계급 획득의 싸움터가 된 까닭에 이 땅의 교육은 지금까지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한국 교육의 목적은 암기위주의 문제풀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일류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고유한 적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게다가 공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이른바 일류대에 간 학생들도 단순한 문제풀이 연습만 했지, 대학에서 고등 학문을 할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지금의 학교교육이 경쟁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다른 직업을 둔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학교 안에서는 시험성적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평가되고 남들과 비교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강요되는 비교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러한 경쟁 속에서 인간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대의 논리'보다 '경쟁의 논리' 교육받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오면 또다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어릴 때부터 경쟁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바꾸려고 하는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처럼 특정대학의 권력독점에서 비롯된 학벌은 온 사회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학벌문제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학벌을 조장하는 갖가지 보도를 일삼아 있지요. 이것은 대부분의 언론도 특정대학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성 언론에서 학벌을 정당화하는 ‘지배 논리’를 퍼트릴 때, 양심 있는 학자라면 ‘대항 논리’를 만들어 그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계는 다른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그 일을 해왔을지 몰라도, 제가 알기론 김상봉, 정진상 교수 말고는 학벌문제와 관련해서는 학문적인 대항논리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열한 고민 없이 서구 학문의 개념을 끌어와 한국 현실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우리학계의 한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의 학계도 특정대학 출신이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었는지 학벌문제는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한 번도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의 계급을 이야기 할 때 학벌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육운동 진영에서조차 이 땅의 교육모순을 이야기 할 때, 정작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인 ‘학벌 없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합니다.

더욱이 학벌체제의 재생산 공간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자신들의 문제인 학벌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게 되는 기득권에 대해 별 고민이 없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일류대가 아닌 대다수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현실을 인정해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고민하고 깨어있어야 할 대학사회도 이런 것을 보면, 우리사회가 차별이 당연시되는 '계급 사회'로 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합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신분제도 자체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육생각>은 한국사회의 경쟁교육을 비판하고, 지배계급이 퍼트리는 학벌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일조로 창간했습니다.

책을 펴내기 위한 자본, 편집 작업,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한 고뇌들… 책을 내기란 참 힘듭니다. 이번 창간호에서는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공교육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공부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밖에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교원평가제’, ‘학생인권조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에서 진행되었던 ‘청소년인권포럼’, 대학평준화를 꿈꾸는 작은 실천들, 서평 등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적어보았습니다.

필진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하는 <교육생각>이 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고와 참여, 토론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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