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포럼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야기

최승원(전남여고 교사)

1. 들어가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대부분 먼저 다가오는 이미지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 있었던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 충돌일 것이다. 이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보다 극적으로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던 교사의 활동과 수업 중에서 가장 원색적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학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질문이 가능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조선인 학생간의 충돌이 어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뿐이겠는가? 일제 지배 과정 동한 일본인-조선인 간의 충돌은 다양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광주에서의 충돌이 단순한 패싸움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처음에는 나주-광주를 통학하는 일본인-조선인 학생들의 감정이 쌓이면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렇게 우발적 충돌, 충돌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감정의 충돌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하고 항일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볼 때 비로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지와 지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2. 독서회를 기억하자

(1) 1920년대 학생 운동의 발전

거족적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을 거치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일제에 저항할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6년 6.10만세 운동을 학생들 스스로 조직하고 전개하면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 운동은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학생들은 자신들의 조직으로 각 학교에 독서회를 결성하고, 일본인 교원에 대한 불만, 학교 설비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학교당국에 저항하는 동맹 휴학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10만세 운동을 거치면서 동맹휴학은 ‘조선 본위의 교육 확립!’, ‘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 단위 학교를 뛰어넘는 반일적 성격의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사회 운동 세력의 대응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920년대 중반 각 세력의 입장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자치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다. 이들은 동맹휴학에 대하여 ‘식민지 교육’이 빚어낸 문제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동맹휴학은 민족의 역량 증대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고, 동맹휴학의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인 교사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사회주의 세력의 선동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당대의 학교 교육을 ‘맹목적 굴종적 봉건노예의 도덕과 논리를 청년 학생의 뇌리에 주입하여 반동세력의 도구를 만들고자’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학생들의 맹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맹휴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민족주의 우파와 달리 ‘교원자격과 학교설비에 대한 불평불만은 학생 측의 반항력이 폭발하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식민지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지적한다. 또한 동맹휴학의 원인을 학생의 도덕 결핍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치 석일(昔日)의 군신(君臣)관계를 의논함과 흡사’하다며 이러한 관념의 강조는 ‘지배 측에 선 자(者)임을 느끼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학생들의 맹휴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 지원을 하였던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사회주의계열은 1924년에 이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항일 학생 운동을 지원하였고, 사전 발각되어 전개하기 어려웠던 6.10만세 운동도 이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는 「강령」을 통해 학생 청년은 민족적으로 억압 당하고, 조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못하며, 학업을 마친 학생이 과잉 인구로 남는 것을 비판하며, 투쟁 목표를 일제 타도와 봉건 유제의 청산에 두었다.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일제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차별 교육, 노예 교육을 철폐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선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6.10만세 운동에 제출되었던 구호가 이후 각 지역의 맹휴에서 유사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성진회, 독서회 중앙 본부의 활동은 이들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 아래 학생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당원 또는 공청원인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강영석, 장석천 등은 왕재일, 정남균, 국순엽, 장재성 등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기반이 된 학생조직의 발전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광주지역의 독서회 활동

성진회는 1926년 6.10만세 운동 이후 지역의 학생들의 비밀 회합과 논의 끝에 11월 3일 결성하였다. 처음 참가한 학생은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등과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 정남균 등 16명이었다. 전남 지방 조공과 고려공청은 강해석, 지용수 등을 통해 성진회를 지도하였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 반대’를 지향하며 비밀 결사로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한 달에 1, 3주 토요일에 독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1927년 3월 모임을 주도하던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이 졸업하여 모임 개편이 필요하였고, 비밀 유지도 쉽지 않아 성진회는 해체되었다. 성진회의 운영기간이 짧아 모임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나, 성진회 활동이 이후 광주 지역 각 학교의 독서회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진회에서 활동하던 성원들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성진회 해산 후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독서 모임을 지속한다. 성진회에서 활동한 졸업생들은 후계자를 선정하여 재학생 지도하는 방법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유지하여, 1929년에는 광주고보, 광주농교, 전남사범 등에서 독서회가 유지되었으며, 광주여고보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독서회(‘소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 지역의 독서회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독서회에서 유력산 선배로 인정받았던 장재성이 각 학교 독서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고보를 졸업하면서 성진회 활동을 마쳤던 장재성은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유학하는 중에도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광주고보의 맹휴를 적극 지원하였고 방학 등으로 일시 귀국할 때에는 후배들과 만나 독서회 활동을 점검하고 있었다. 장재성은 1929년 6월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9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학생과 청년조직을 연결하며 적극적으로 독서회 조직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929년 6월 광주고보, 사범학교, 광주농교 독서회 활동 학생들과 만나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장재성은 책임 비서를 맡았다. 독서회 중앙부는 학교별 결사원에게 중앙부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각 학교 독서회를 재조직하여 각 학교별로 4개 반 가량의 독서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독서회원의 단결을 도모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회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학생 소비조합(문방구 판매)을 만들기로 하고, 지금의 금남로 공원자리의 장재성 빵집 옆 건물에 문방구점(학생 소비조합)을 차리고 내부적으로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 활용하였다. 이후 독서회 성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검증 조서에 의하면 문방구점의 2층은 방이 3개로 구성되었고, 큰 방에는 탁자 1개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등사판용 기계와 「공산당 선언」 등 몇 가지 사회과학 서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11월 3일 오후, 독서회 회원들과 장재성은 우발적인 집단 충돌을 의식적인 항일 투쟁으로 전화, 발전시킨다. 이어지는 11월 4, 5일 장재성은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장석천 등과 논의하여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시위를 전국화 할 것을 결정한다. 만약 의식적인 항일 학생 운동을 고민하고 준비하던 독서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11월 3일은 광주지역의 학생들 간의 작은 소요로 남았을 것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억, 기념하면서 광주지역에서 의식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들의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화 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활동하고, 주도했을 독서회들의 활동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동맹휴학

독서회의 활동이 있기 이전부터 자연 발생적인 동맹휴학이 있어왔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활동으로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민족적 자각을 키워갈 수 있었다. 광주지역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에 광주고보의 경우 1923, 1924, 1927, 1928년 총 4회의 맹휴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관공립 중등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이다. 한편, 광주농교에서도 1923, 1928년,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에 맹휴가 발생하였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맹휴는 성진회 회원 등 독서회와 연관된 사례가 높다. 대중적 저항 운동으로서의 맹휴와 독서회의 결합은 11월 3일 학생 운동을 항일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동맹휴학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광주고보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2월 초 맹휴 주동 학생을 처벌하지 않기로 학부형회의에서 약속한 교장이 주동학생 5명을 정학 처분하자 다시 맹휴를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광주농교에서는 3년 학제가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자 5년제로 승격할 것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1924년 6월 광주고보와 재광 일본 선발팀간 야구 경기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고보 일본인 교장의 의뢰로 관련 학생이 경찰의 취조를 받자, 이에 4백여 명의 학생이 항의하였고 교장은 전교생의 무기정학을 선언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고, 학부형들도 대회를 통해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맹휴는 9월에 수습되고 맹휴를 주도한 5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7년 5월 광주고보는 물리 화학교실의 신축 등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맹휴를 전개하였다. 시라이 교장이 이를 수용하여 맹휴가 마무리되었다.

1928년 3월 광주고보 5학년 학생인 이경채가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을 기재한 선언서를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주 등에 붙였다가 6월 체포되었다. 학교 측이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키자, 학생 대표들이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의에서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학교 측이 이들을 근신처분하자 6월 26일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이에 학교는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시킨다.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맹휴에 돌입한다. 이는 고보 맹휴에 대한 동조 맹휴의 성격이 강하였다. 학교 당국은 12명을 퇴학시키고 102명을 무기정학시킨다.

이에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맹휴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학부모 통고문을 보내고 교우에게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교장에게는 맹휴학생일동의 명의로 규탄서를 전달하기도하였다. 이를 지원하여 동경에서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우회 명의의 항의문과,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의 항의문이 발송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맹휴는 9월에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에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1929년 3월 졸업식에는 맹휴 주도 학생의 무더기 퇴학에 항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270여 명의 전교생이 교장실에 몰려가 면담을 요구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5, 6월경에는 화장식 벽 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 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으로 맹휴하자’ 등의 낙서 등이 나붙었다. 11월 3일은 느닷없이 오지 않았다.

3. 우연한 사건(?), 조직적 대응(!)

(1) 한-일 학생간의 갈등

눈을 돌려보자 1920년대의 광주-나주의 풍경과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학생 운동의 폭발은 독서회 등 지도부의 의식적인 노력, 의식적인 동맹 휴학 제안으로만 성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학생 대중의 광범한 동의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 소개한다.

1924년 봄 본정통(지금의 충장로)의 일본인 양화점에서 사소한 시비(?)로 격투가 벌어졌다. 발단은 일본인 주인이 구두를 제작, 판매하면서 같은 가격에도 조선인 학생에게는 질이 낮은 상품을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광주고보생이 항의하자, 양화점 옆 식료품점의 일본인이 가세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의 격투가 벌어졌다. 일본인이 기마경찰대를 부르면서 조선인 학생의 반일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6월 광주고보 대 재광 일본 선발팀의 야구 경기는 집단 충돌을 넘어 맹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그 안에 내재한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 의식이 독서회 지도부와 만나 조직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로 가보자. 당시 광주고보 학생의 1/6, 광주중학교 학생의 1/4가 나주-광주 열차로 통학하였다. 나주 지역에서 통학하는 일본인 학생은 지주, 상인, 공무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선인 학생의 경우 주로 중소지주층의 자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광주 간 통학을 하는 학생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영재라는 자의식과 식민지 조선인 학생이라는 피해의식이 혼재해 있었을 것이다. 복선형 학제로 광주 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상호 간의 경쟁의식이 강렬하였으며, 광주고보의 시설, 교육에 대한 불만도 컸다. 앞서 확인하였던 1927년의 동맹휴학은 그러한 불만을 잘 보여준다.

1929년 6월 나주-광주 간 아침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운암역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들이 개를 잡아 불에 그슬리는 것을 본 광주 중학 학생인 곤도가 ‘야만이다’하고 중얼거리자, 이를 들은 광주고보생이 ‘야만이란 무슨 뜻이냐? 조선사람을 가리켜 야만인이라 한 것이냐? 이것은 조선인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들은 광주중학의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은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광주고보의 교장에게 통보하였다. 그날 오후 하교 열차에서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곤도가 구타당하게 된다. 곤도는 나주경찰서장의 아들이었다. 이후 두 학교는 교사를 승차시겼고, 경찰에서도 형사를 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여 표면적으로는 무마되었다. 그러나 한-일 학생 간의 응어리는 감정은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1929년 11월 3일의 충돌은 예비된 것이었다.

(2) 11월 3일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간 통학열차를 탄 학생들이 하교하여 나주역에 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이때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였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가 후쿠다를 힐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으로 말하자 박준채는 후쿠다를 구타하였다. 이를 본 일본 순사가 박준채 만을 때리자 광주고보생들이 순사에 항의 하였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아침에도 시비가 붙었으나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31일 오후 하교 열차에서는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차장은 이들을 말리고 박준채와 후쿠다 등을 2등실로 연행하였는데, 2등실의 승객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후쿠다를 두둔하고 박준채를 비난하였다. 같은 칸에 탔던 당시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사 기자 또한 후쿠다에게만 경위를 취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모두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11월 1일 하교 시간에는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번져 집단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양측 교사의 제지로 충돌을 피하였다. 이 시기 일인 학생 학부형들의 요청으로 광주중학교 교사가 1개월간 영산포 여관에 숙박하며 학생들과 통학하였다고 하니, 당시 이 지역의 위기감이 컸음을 느낄 수 있다. 11월 2일 학교 주변에는 항일낙서가 학교 곳곳에 나타났다. 충돌은 없었다.

11월 3일 명치절이자 전남지역 산잠 6만석 돌파 축하연으로 광주 시내에는 인파가 붐볐다.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을 위해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개천절이기도 하였다. 기념식 후 신사(현 광주공원) 참배를 하도록 하였다. 11시 경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이 충돌하였고, 조선인 학생 최상을이 일본인 학생의 칼에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조선인 학생이 가세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인 학생이 광주역(현 동구 소방서)전으로 물러났다. 한편, 편파적인 보도를 한 광주일보(현 전일빌딩)에 항의하여 조선인 학생들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한일 학생들은 광주역전으로 몰려가 집단 난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늘어나 광주중학교 100명, 광주고보, 농교생 약 400명으로 일본인 학생이 밀리면서 성저리의 토교에서 대치하였다. 교사들의 만류와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장재성이 학교에 모여 선후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조선인 학생 300여 명은 광주고보 강당으로 모였다.

(3) 조직적 대응!

고보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관련 학생들의 경과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러 급진적 제안 속에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행동방침의 원칙을 제안하고, 시내로 재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 자리에는 장재성도 참석하여 당일 시내 재진출은 독서회의 주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교가와 응원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광주 시가를 한 바퀴 돈 시위대는 다시 강당에 모여 이후 연락 방법을 논의하고 방면 별 소대를 편성하여 해산, 귀가하였다.

학교는 임시 휴교를 단행하였고, 경찰 당국은 시위 주동학생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인 장석천, 강석원 등과 만나 시위 선후책을 논의하고 검거 학생 석방을 위해 재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격문 전단 4천 부를 인쇄하고 12일 수업 개시일에 맞추어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격문의 표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가) 우리 투쟁 희생자를 우리들의 힘으로 탈환하자!

나) 검거자를 즉각 석방하라!

다) 교내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방지하라!

라) 수업료와 교우회비를 철폐하라!

마)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사) 직원회의에 학생대표를 참석시켜라!

아)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차)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11월 12일 첫째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라’는 구호를 신호로 광주고보 전교생이 시가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때는 광주여고보, 사범학교는 학교 당국의 적극적 통제로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광주농교에서도 10수 명이 참여했으나 긴급 출동한 경찰대에 포위되어 참여하지 못하였다. 2차 시위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나 28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학교는 다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사이 학생 시위는 전남으로 확산되고, 서울 시위가 일어나면서 전국화된다. 1930년 1월 8일부터 광주에서는 개학과 함께 기말시험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백지 동맹을 결의하여 광주고보는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여고보에서도 2명이 퇴학당하고 17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다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획하다 광주고보생 48명이 퇴학처분을 받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여고보는 64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1월 3일 오후를 넘기면서 광주 학생 운동은 우발적 충돌을 넘어 조직적 항일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11월 3일 시위가 발생하자 서울의 각 사회단체는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원을 파견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11월 6일 광주로 내려와 진상을 파악하고 시위운동을 전국화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한편, 신간회에서도 허헌 등이 11월 8일 광주에 내려와 향후 계획을 협의하였다. 11월 12일 시위 이후 보도 통제로 시위의 진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조선인 학살’ 등의 소문이 나돌면서 비상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시위는 먼저 목포와 나주로 퍼졌다. 11월 10일 목포 상업학교 학생들이 장재성과 면담하고 19일 50여 명의 학생이 적기를 앞세우고 태극기, 격문을 뿌리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나주에서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다. 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조선민중만세’, ‘조선학생만세’ 등의 구호를 고창하였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학생 운동이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표면 단체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 두었던 학생전위동맹은 격문살포와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한편 조선청년총동맹도 11월 16일 상경한 장석천과 협의하고 신간회, 사상,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이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일제는 이를 포착하고 시내 사상, 청년 단체 간부 등 127명을 검거하고 격문 8,000매를 압수하는 등 검거에 혈안이 되었으나 12월 5일부터 14일까지 30여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맹휴에 참가하고 총 1천 4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휴교, 조기 방학했던 학교들이 1월 7일 개학을 맞자 또다시 서울 지역에서는 연합 시위를 전개한다. 서울의 시위가 알려지고 각 지역 사상, 청년 단체가 조력하면서 1930년 1월부터는 학생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 통계를 살펴보면 퇴학 학생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462명, 참가학교 194개교, 학생 수 54,000여 명이다. 국내의 학생 운동은 식민지 조선을 넘어 해외로도 확산되어 상해, 북경, 천진, 만주, 일본, 연해주, 미주로까지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4. 나오며 - 기념식 : 기념일 투쟁

1945년 해방 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이 전개되었다. 1953년 10월 30일 문교부령으로 ‘학생의 날’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지정한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학생의 날’은 6.25전쟁과 맞물리면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의식은 ‘반공’의 민족의식임을 알 수 있다. 1956년 12월에 학생의 날을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의 날’은 학생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1970년 11월 재경 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추진위원회는 전국대학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서울대 법대학생회는 학생의 날 기념토론회를 통해 학생의 기본권, 학생군사훈련 강화 등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971년에는 전국대학생연맹이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전국적 봉기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학생의 날’을 통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교육, 학생 관련 기념일을 통폐합 한다는 명분으로 각종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학생의 날을 제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생의 날을 즈음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독립유공자협회 등의 ‘학생의 날’ 부활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기념일로 지정한다. 이후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자리 잡혔으며, 한편에서는 역사적 주체로 학생의 위치를 재삼 확인하는 날로 의미가 지워지게 되었다.

2006년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뀐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1984년 부활한 ‘학생의 날’은 뚜렷한 추진 주체가 없이 광주광역시교육감이 주관해 광주지역의 일부 유족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초라한 행사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고, 명칭 변경 이후 교육부총리가 주관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11월 3일’이 화석화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학생의 날’은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으나,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명칭 규정은 ‘11월 3일’을 과거에 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로 단위 학교에서는 명칭 변경 이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경건하게’ 치를 것을 학생, 교사에게 요구하고 있다. 틀에 박힌 ‘경건’은 화석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11월 3일’을 어떻게 새롭게 불러낼 것인가?

학생의 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글도 비교적 예전의 것이지만,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우금치 기념사업에 참여한 지수걸 교수의 글에서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일제의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과거와 현실을 대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이른바 ‘기념투쟁’을 중시했는데, 일제 경찰이 만들어 배포한 이른바 「사상운동 경계력」에 따르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중시했던 기념일은 ① 1월 21일(레닌 사망일), ② 3월 1일, ③ 3월 2일(코민테른 창건일), ④ 3월 15일(2차 일본 공산당 검거일), ⑤ 4월 17일(조선공산당 창건일), ⑥ 5월 1일, ⑦ 5월 30일(상해 반일운동 기념일), ⑧ 6월 10일 <하략> 등이었다고 한다. 이런 날이 다가오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투쟁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경건한 기념식과 함께 민속놀이나 체육대회, 노래공연, 대자보 게시, 격문 배포, 기념 집회, 시위 등을 전개했다. 이 같은 ‘기념투쟁’은 계급적 혁명적 관점에서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기념행사는 특권화된 역사상을 의례적으로 반추하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요구나 정서를 반영한 민중 주도의 ‘기념(일)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기념투쟁’을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민중투쟁의 새로운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역사 만들기’는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찾고 가꾸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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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자유 한다고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공현(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너무 쉽게 망하는 나라?

대한민국은 참 쉽게 망하는 나라다. 화물연대나 철도노조가 며칠만 파업해도 나라가 흔들린다고 난리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친북좌파들의 발호로 나라가 망할 거라고 한다. 참, 국가보안법 따위가 국가안보의 ‘최후의 보루’라니 이런 막장스런 취약 국가를 봤나. 드디어 이제는 학생들에게 두발자유를 ‘허용’하고 인권을 보장하여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식의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에 경기도교육청이 발표한 학생인권조례 이야기다. 학생들에게 두발복장의 자유를 주는 것만으로 나라가 흔들린다니, 불안해서 이딴 나라 못 살겠다. 역시 이민을 가야 하나? -_-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발이야 익히 예상된 바이지만, 학생인권조례를 놓고 조중동문(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이나 좋은학교만들기 경기학부모모임, 한국교원노동조합, 자유교원조합, 대한민국교원조합 같은 데들이 보여준 반응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 교육감의 ‘행복한 학교’ 운운은 교육 황폐화의 둔사(遁辭)”(문화일보 사설) “운동권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해 학부모들은 우리 아이들을 모두 운동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일부 학부모 단체들의 기자회견 내용)등을 비롯하여, 자문위 구성에 대해 좌편향 색깔론을 제기하는 동아일보 등등. 이런 말들 속에서는 현재의 학생인권의 현실과 교육의 문제에 대한 책임감 있는 논의나 우려는 보이지 않고 막연한 색깔론 및 음모론과 ‘자유’, ‘다양성’, ‘인권’에 대한 두려움만이 난무한다. 그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무책임한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무책임하고 별 근거 없는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와 좌익의 음모라고?

사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해서 가장 어이가 없었던 이야기가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획책”이라는 투의 음모론이다. 전교조가 그렇게까지 학생인권에 우호적이고 적극적이었다면, 참 나를 비롯해서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내가 장담컨대, 그렇게 전교조의 음모랍시고 들이대는 ‘집회의 자유 보장’에 대해서도 전교조 조합원들 중에 좀 떨떠름해하는 사람들이다수일 것이다. 학생들의 학교운영 참여나 학생회 활성화에 대해 반대하는 전교조 조합원들은 많지 않겠으나, 집회시위의 자유에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다. 두발복장자유나 체벌금지 등 다른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다. 전교조가 일부지도부나 간부의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교조 조합원들 다수가 공감하는 성의 있고 실질성 있는 활동으로서 체벌금지나 두발복장자유를 외친 적은 별로 없다. 일단 전교조는 학생인권조례를 대체로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그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얼마만큼 그 내부에서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전교조의 음모가 아니라 학생인권 보장을 열망하는 많은 학생들과 인권활동가들, 개념 있는 학자들의 요구와 견해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여러 가지 보편적인 인권의 기준들을 학교에 적용해놓은 것뿐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과정에서는 연구팀이 많은 국제기준이나 외국 사례들, 헌법이나 국가인권위 결정 등을 분석하고 면접조사, 설문조사 등을 통해 예시안을 제출했으며, 발표된 초안은 이를 기초로 많은 인권전문가나 교육현장의 교육자들이 참여하여 합의한 내용이다. 이러한 근거들 위에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면서 자기들은 정작 제대로 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막연한 음모론과 색깔론으로 일관하고 있고 보수적인 편견과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만 가득하니, 이 얼마나 개념 없는가?

학생인권조례가 전교조나 좌익의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하승수 씨가 오마이뉴스에 썼듯이) “유엔도 좌파라고 우길텐가?” 학생들의 집회결사표현의 자유나 참여권은 UN 아동권리협약에 아예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다. 오히려 현재 발표된 학생인권조례초안에서 집회의 자유를 학교장이 제한할 수 있게 명시해놓은 것이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항이다.(이 부분은 옥외집회의 경우 그냥집시법에 따라 경찰에게 신고하여 하게 하면 될 텐데, 현재 한국 경찰들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는 금지하는 쪽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나온 합의점으로 보인다.) 또한 체벌금지나 인권에 부합하도록 학칙을 개정할 것 등은 UN 아동권리위원회 등이 한국 정부에 매번 권고해온 사안이다. 이런 내용들을 놓고 전교조의 음모라느니 좌익의 망국이라느니 설레발치는 것은 “우리우익은 인권 개념도 없고 국제 감각도 없습니다.”라고 자폭하는 꼴이다. 만약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는 세력 중에 정치적 성향이좌파인 사람들과 단체들이 많다면, 그건 한국에서는 좌파들이 인권감수성이 더 뛰어나고 국제 감각이 더 훌륭한 탓일 것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제조건이자 목표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의 교육에 해가 된다는 주장도, 교사들의 교권을 침해한다는 주장도 해괴하기 그지없다. 학교는 본래 쩌는 입시 공부를 하는 입시 학원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는 곳이다. 교육기본법을 봐도 그렇고,UN아동권리협약을 봐도 교육의 목표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으며, 교육의 방식이나 학교의 운영, 규율도 학생의 인권을 존중해야한다고 되어 있다.(UN아동권리협약 제28조, 29조) 이러한 가치들을 도외시해가면서 학생들의 면학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이야기는 학교의 본래 목적을 배반하는 일종의 ‘패륜적’ 드립인데, 대놓고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므로 강제성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꼴을 보니 이게 얼마나 무개념한 발언인지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 규칙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불합리한 교칙도 필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독재정권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무조건적 준법, 부당한 규칙이라도 닥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할 능력이다. 인권을 개무시하고 학생들을 개고생 시키는 잘못된 규칙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인권을 지키며 민주적인 방식에 따라 스스로 함께 만든 규칙을 함께 지키는 것을 배우게 해야 제대로 된 인권교육이요 민주주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책임감 없는 사람을 만들 것이라는 말도 비논리적이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해놓은 대로 말하는 대로 따르는 노예를 만드는 일이다. 자유가 없이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요, 진정한 책임을 교육할 수 없다. 자기 머리카락이나 옷 입는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얼마나 책임감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적인 자유가 인권이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 보장은 교사들의 권리에도 친화적이다. 학생들의 두발복장규제 등 교육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소모적인 싸움을 벌이면서 과중하고 불합리한 생활지도 업무에 노출되었던 교사들의 노동조건이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가 명시하고 있는 학교의교육환경 개선 등은 동시에 교사들의 노동환경 또한 개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권을 보장하며 필요최소한의 규제만을 가지고 운영되는 학교가 교육에 더 효율적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교권조례도 같이 만들라고 하는 교사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지지한다. 학생인권조례에 대항하고 균형을 맞추는 의미에서의 교권조례가 아니라, 학생인권조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함께 더잘 학생들의 인권과 교사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례로서 교권조례는 바람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학생들을 교사들의 원수보듯이 하고 학생인권과 교권이 대립하는 걸로 파악하는 인식은 교권이 보장되지 않고 학생인권이 무시당하는 학교 현실이 일으키는 착시현상이다.

다양성과 자율,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좀 더 교육다운 교육을 만들어가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인권은 교육의 전 과정에서 실현되어야 할 조건이자 교육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가장 교육적인 것이 가장 인권적인 것이다. 경기도지역 학교의 안습적인 학생인권 상황(내가 학생들로부터 들은 체벌 때문에 뼈가 부러져서 입원한 이야기나, 두발규제 과정에서의 강제이발 사례, 복장규제 과정에서의 변태스런 규제 등등을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을 굳이 하나하나 말하면서 독자들의 그로테스크한 취미를 만족시키지 않더라도, 200대 체벌이 언론을 타지 않더라도(200대를 때리든 1대를 때리든 체벌은 폭력이다. 폭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체벌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학생인권조례는 교육을 위해서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두발자유 보장으로 망하는 빈약하고 괴상한 사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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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김태정(학교자치실현 교원평가저지 범국민대책위 준비모임)

1. 들어가며

교원평가 전면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교원평가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갑자기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교원평가는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꾸준히 시도되어졌던 것으로 이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교육시장화’의 연장선 속에서 배치되어 왔다. 그리고 교원평가 실시라는 입장에서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 그리고 한나라당과 민주당과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때문에 전교조는 줄곧 교원평가 법제화 시도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13일 전교조 위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교원평가를 제한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였다. 경향신문 11월 19일자에 따르면 국회 교육과학기술위 이종걸 위원장(민주당)이 교원평가제의 법제화를 위해 제안한 논의 구조인 6자협의체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으며, “협의체에 들어가서 무조건 전교조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겠다”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의 의사를 어떤 식으로 평가에 반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조합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에 반하는 위원장 혹은 집행부의 독단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협의체 참여과정의 나타난 절차적 문제에 있지 않다. 사태의 심각성은 교원평가가 가져올 폐해가 결코 교사에게만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래에서 검토하겠지만 교원평가는 교육주체 전체에게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며 나아가 교육자체를 황폐화 시키고 교육의 공공성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교원평가는 교사들의 문제로 치부되어 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는 이른바 개혁성향이라고 불리는 언론조차 교원평가가 마치 전체 학부모들의 요구인 것처럼 왜곡하고, 심지어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전교조내 강경파의 반발’이라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이번 토론회를 매개로 교원평가의 문제점을 다시 확인하고, 교원평가를 반대하는 제 교육주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향후 교육주체들의 공동의 실천을 조직하고자 한다.

2. 교원평가의 현황

이른바 교원 그중에서도 교사에 대한 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이다. 우선 근무평가라는 이름으로 관리자에 의한 교사 평가는 진행되어 왔으며, 2007년에는 교육공무원승진규정을 개정하여, 다면평가(동료교사)를 도입함과 동시에 승진시 반영 연수도 승진전의 10년간의 근무평가를 반영하도록 변경하였다.

다음 성과급 평가가 진행 중이다. 성과급제는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되었다. 초기에는 교사들의 반발로 차등 폭이 적었으나 이후 확대되어 2006년부터는 성과급 비중 및 차등 폭이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성과급은 업무(실적)에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는 것으로 그 항목은 수업지도, 생활지도, 담당업무, 전문성개발 등으로 근무평가의 평가요소와 대동소이하다. 최근에는 단위학교별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원평가 부분이다. 교원평가는 이미 진행 중이다. 2006년 67개 학교에서 시범실시된 것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500여개로, 2009년 1761개로 그리고 2009년 9월 이후 3천여 개로 확대일로에 있다. 이는 전국의 학교가 1만 2천여 개 정도임을 고려할 때 실제로 전면실시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9월 2일 교과부가 발표한 안에 따르면 평가 종류는 동료교원에 의한 평가, 학생에 의한 만족도평가, 학부모의 의한 만족도평가로 나누어지는데, 평가영역은 크게 수업지도와 학생지도로 구분된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원을 평가는 이 시스템은 교원평가를 실시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취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평가결과 기준 미달 교사로 판명될 경우 학교장이 지역교육청 시도교육청에 의뢰하여 장기집중연수에 투입된다. 그 비율은 아직 미발표이지만 대략 연간 400명 정도로 교원의 0.1% 수준으로 예상된다. 한편 2009년 10월 6일에 발표된 한국교육개발원 정책연구보고서에 근거하면 교원평가를 인사와 승진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출된 바 있다.

3. 교원평가! 무엇이 문제인가?

(1) 교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부를 포함하여 교원평가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의 주된 논리는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즉, 평가를 통해서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허구에 불과하다. 교원의 전문성과 능력개발이 지속적으로 담보되기 위해서는 평가가 아닌 다른 제도적 장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우선 교원의 양성 임용체계가 보다 전문화되고 이에 대한 국가적인 책무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반대이다. 여전히 교원은 부족한데도 교원정원을 동결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교사대를 통폐합하려는가 하면 단기교사 자격증 부여방안을 추진하는 등 정부가 파행을 조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음 교육과정에 편성에 대한 교사의 권한강화, 연구활동을 위한 지원, 안식년 도입 등 교사의 능력개발을 위한 지원 등 제도적인 보장을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저출산으로 취학아동수가 과거보다 줄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법정정원 확보나 표준수업시수 제정 그리고 교육시설을 포함한 교육환경은 열악하다. 또한 급식비를 포함한 여전히 교육비용의 민간부담은 줄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명박정부는 교육예산을 축소시키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 입시경쟁체제는 초중등교육을 교육환경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교원평가의 진짜 목적은?

역대정부가 앞에서 언급한 교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외면하고 유독 교원평가만을 강행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몇 가지로 파악될 수 있다.

첫째, 총자본인 국가차원에서 노동력 비용절감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국가는 총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며, 특히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최소화(규제완화로 표현)와 공공부문의 민영화(사유화) 그리고 작은 정부를 표방한다. 이때 작은 정부는 사회공적영역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축소 혹은 포기하는 것이며, 동시에 공기업노동자들과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을 포함한다.

그동안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면서 역대정권은 공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강행하였으며, 공무원에 대한 구조조정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의 과정에서 공무원노조가 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며, 교원의 경우는 전교조가 존재하였기에 상대적으로 그 속도가 늦추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원평가는 결과적으로 이른바 기준미달교사를 퇴출하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며, 이는 비용의 절감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공무원퇴출의 핵심이 비용절감 논리이었고, 교원평가 역시 공무원 구조조정의 본질(인건비 축소와 노동 통제)과 다르지 않다. 총자본으로 기능하는 국가 재정 운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원 인건비는 학교교육비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2008년 교육재정 대비 65.5%)하는 투입 요소이며, 교원노동 유연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이 갖는 의미가 매우 큰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4대강정비사업과 부자감세정책으로 인한 예산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교육, 복지, 중소기업, 지역현안사업 등을 삭감하는 것과 연동되며, 결국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교육이라는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파괴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교원에 대한 일상적인 노동통제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원은 이중적인 지위를 갖는다. 이는 학교의 성격에서도 기인한다. 학교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체제순응적인 노동자를 양성하는 지배계급의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는 지배 권력의 말단에 서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과연 학교가 그렇게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일 방향으로만 기능하는가? 교사를 비롯한 교육노동자와 수업노동을 수행하는 학생들 또한 수동적인 존재이기만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되는 과정이 살아있는 인간을 소외시키며 이로 인해 노동자가 필연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듯이, 교육의 상품화의 과정 또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과정으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결국 학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 된다. 즉,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교육과 학교를 상품화, 시장화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소수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생계비(임금)의 상당부분을 교육비용으로 반강제적으로 지출당해야 하는 노동자 민중과의 이해가 충돌하게 된다. 교육노동이 산 노동이 아니라 죽은 노동으로 변질되고 스스로의 노동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교육노동자들의 저항과 이를 억누르고 권력과 자본의 시종으로 길들이고자 하는 노동통제가 충돌하게 된다. 또 노동내부에서는 지배 권력과 자본에 굴종하거나 타협하려는 경향과 그렇지 않는 경향이 충돌한다.

한편 교육과정에서도 이해가 대립한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는 교육과정이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적합하도록 통제하려 한다. 최근 이명박정부가 교과서개정을 진행하는 것과 미래형 교과과정이라는 것을 도입하려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즉 교육내용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입시위주 교육과정을 통해 악무한적인 경쟁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개개인에게 경쟁논리를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결국 미래세대의 구성원들에게 교육노동자들이 어떤 교육을 시키는가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교원이 체제순응적인 존재로 일상적으로 통제되는가 아닌가는 지배계급에게는 사활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바로 여기서 교원평가의 문제가 단지 교사들의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국민국가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이해와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원평가가 이러한 지배계급의 노동통제 수단이 될 것임은 이미 수없이 확인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그런 공직자는 자격 없다”고 발언 한 것이나, 최근 국가 및 지방 공무원의 복무규정 및 보수규정 개정안을 내놓으면서 노동조합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를 수 없으며,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입장 표명도 못하게 하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원평가를 통해 저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잘못된 정부정책에 대해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교사들을 퇴출 즉 분리 제거하고, 살아남은 교원들은 일상적인 통제 틀 즉 교원평가 시스템으로 묶어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평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교사간의 경쟁은 다시 입시경쟁하에서 학생 간 경쟁의 심화로 확대되면서 종국에는 악무한적 경쟁논리가 인간내면을 지배하고, 결국 자본이 원하는 마치 좀비와도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셋째, 교육주체들에 대한 분할지배이다. 모든 지배계급의 지배전술 중의 하나는 피지배계급을 분할하고 서로간의 대립을 부추기는 것이다. 노동자에 대한 통제의 경우 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로, 내국인노동자와과 외국인(이주)노동자로, 정규직와 비정규직으로 끊임없이 분할하고 단결을 거세하려 한다. 또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출신지역에 의한 분할 대립구도는 종종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지배는 교육영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의 본질이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의 과정이자,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사회적인 보편적인 권리이며, 교원(교사, 비교사 등 교육노동자), 학생, 학부모 등 제 교육주체들의 협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바로 교육시장화의 논리이다. 이에 의하면 교육은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가 아니라, 물건처럼 사고파는 상품이다. 상품이기 때문에 공급자와 구매자가 존재하고, 이때 구매자는 학생과 학부모가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권리를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는 하나의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시스템 즉 학벌이다. 이는 대학과 학문의 위계서열화로 재구조화되어 왔으며, 학벌사회로의 진입장치인 입시제도는 그 자체로 이윤을 생산하는 기제로 최근에는 대학은 물론 초중고 학교마저도 노골적인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당연히 학벌사회의 상위로 진입하려는 욕망이 대중을 지배하면서 수요가 점증하고 반면 진입의 벽은 높아 그 비용이 상승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입의 벽이 높다는 것은 교육이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계급재생산의 기제로 다시 말해 부자에게는 부의 대물림도구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며, 그 자체로 불평등을 재구조화는 기제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더욱 문제는 그에 대한 결과가 즉각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결국 사회적으로 입시경쟁의 심화, 폭등하는 사교육비로 나타나고 있으며, 교육문제의 사회적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차단당하고 있는 절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학교교육의 실패로 그리고 교사의 문제로 화살이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육의 구조적인 병폐의 원인에 대한 진지한 진단과 성찰은 사라지고 오직 즉자적인 분노만이 교사에게 집중되는 셈이다.

그런데 왜 유독 교사에게 화살이 겨누어지는가? 이는 무엇보다 앞에서 언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와 교사의 역할과 지위 때문이다. 동시에 그에 근거한 학교 안에서의 교사와 비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간의 비대칭적 심지어는 위계적인 질서에서 비롯된다.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교라는 공간 안의 비교사노동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중요하고 핵심적인 업무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대다수의 교사들은 학생들은 훈육과 통제의 대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학부모들은 자녀를 학교에 맡긴 심정으로 늘 교사의 권력에 주눅 들게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학서열화와 입시경쟁체제는 이러한 비대칭적이며 위계적인 질서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구조 하에서 잊을만하면 툭툭 터져 나오는 이른바 ‘부적격교사’의 문제는 입시경쟁체제와 맞물리면서 공교육실패의 책임이 마치 교사에게 있는 것처럼 교사집단에 대한 마녀사냥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평가로 이른바 부적격교사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 봐도 분명하다. 전교조교사가 비전교조교사를 단순 비교해보자. 누가 학생들에게 스스럼없이 인격적인 모욕과 체벌을 가할 것인가? 이른바 촌지 거부운동을 했던 집단이 누구인가? 교원평가로는 설사 부적격교사라 할지라도 잘못된 정부정책에 침묵 혹은 동조하고 교장에게 아부하며 시험풀이 기술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자들이라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후 교단을 장악할 것이다.

4. 교원평가! 이대로 수용할 것인가?

(1) 교원평가저지투쟁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교원평가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여전히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는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전술하였듯이 가장 큰 어려움의 교사의 사회적 지위와 학교 안에서의 위계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도 상존한다. 예를 들어 같은 노동조합들인데 전교조의 교원평가 반대투쟁에 대해 소극적이다. 왜 노동자들은 같은 노동자인 교사의 구조조정에 무관심할까? 또 이 투쟁이 단지 교사만의 투쟁이 아니라면 기간 연대운동에 어떤 한계점이 있었을까? 이는 결국 크게 다음 두 가지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노동자계급의 이중성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결코 계급적인 태도로 모든 사물을 대하지 못한다. 이는 상당부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의 효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노동자계급의 현실적 선택이기도 하다. 왜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거는가? 바로 학력에 따른 임금격차와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그 어느 사회보다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출혈과도 같은 사교육비 지출이 자녀의 고학력과 안정된 직장을 즉각적으로 보장하지 않음에도, 현재의 삶의 처지를 개선하는 유력한 매개로 학력(학벌)이 기능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강력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자본가들처럼 특별히 물려줄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민중들이 보기에는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이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기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유독 교육문제에서 만큼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같은 노동자이면서 교육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 수단이자 일상적인 노동통제 기제인 교원평가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지 않거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판단을 하면서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대중들의 이러한 소박한 바람과 엄청난 사교육비 지출에도 불과하고 이미 트랙은 처음부터 나뉘어져있다는데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을 갈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며,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교육비 지불능력이 곧 자녀의 성적과 갈 수 있는 대학을 결정하는 세상이다. 결국 다수의 노동자민중들은 소수의 특권계층의 부의 대물림 도구가 된 대학서열체제하에서 들러리를 서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이 확인되는 방식이 개별적인 차원에 그친다면 그것은 개별(가족)의 낙담과 이른바 상위권대학 진출에 실패한 개인의 패배의식의 내면화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교육소비자담론으로 끊임없이 정당화되어 왔고 심지어는 계급고착화가 내면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아무리 노력해도 교육은 결국 소수의 부의 대물림 도구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 자체를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적인 인식에 도달한다면 ‘낙담은 분노로 분노는 다시 폭발적인 저항’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다음으로, 연대운동에 대한 왜곡된 관점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왜 연대를 해야 하는가? 일부에서는 자본과 국가권력에 비해 노동조합에게 힘이 없으니까 보다 많은 우군을 만들기 위해서 연대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놓으면 만일 힘이 있으면 굳이 연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상 연대운동판에서 이른바 힘이 있는 덩치 큰 단체들(대체로 노동조합)의 패권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왜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제 사회운동과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답을 해야 한다.

문제는 민주노조라고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경제적인 조직 즉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아직까지도 잔존한다는데 있다. 그리고 이는 연대활동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즉 연대를 조합적인 이해를 위한 단순한 전술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으로 연대를 이해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런데 과연 노동조합이 단지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직인가? 노동조합을 이렇게 고용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조직으로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가계급의 의도이고 이에 충실하게 부합하는 자들이 바로 노동조합 관료모리배들 아니던가?

노동조합이 노동조합 밖의 사회운동진영과 연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당장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위상과 역할’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비록 자본가들과 그 주구들은 노동조합을 노동력판매가격과 조건을 위한 협상도구로 제한하려 하지만, 노동조합의 역할은 결코 그렇게 가두어질 수 없다.

노동조합의 역사적인 위상은 ‘임금노동과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힘’ 그 자체이다. 때문에 노동조합은 (개별)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에만 관심을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노동자계급은 물론이고 수백만 피압박민중의 전반적인 해방을 최종 목표로 삼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칭 민주노조의 민주투사 혹은 간부라는 자들은 이러한 노동조합의 역할을 슬그머니 뒤로 숨기고는 입으로만 연대를 외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상태와 수준을 핑계 댄다. 즉 조합원들이 정치의식이 열악하고 보수화되었는데 뭘 어쩌라는 거냐는 식이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야말로 민주노조운동의 근본원칙 즉 자본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성(자주성), 민주성 그리고 계급성을 망가뜨리고 있는 주범이 아닌가?

되물어보자! 과연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어떻게 고양될 수 있는가? 작업장이라는 협소한 틀 안에 갇혀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만을 고민하는데 어찌 정치의식이 상승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제대로 된 활동가라면 조합원들의 정치적 무관심 탓으로만 돌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엇보다 그 스스로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실천하는지, 사회 정치문제에 관해 얼마만큼 생생한 폭로를 했는지, 그리고 조합원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반성해야 할 것 아닌가?

조합원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는 것! 바로 여기에 연대의 진정한 이유가 있다. 정치의식을 높이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모든 계급의 상호관계에 관하여 명료한 이해를 가지게 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는 노동조합이 사회의 주요한 문제와 쟁점들에 대해 개입하고,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참여와 경험을 통해 정치적으로 각성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노동조합이 연대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교원평가가 교사만의 문제가 아님을 인식하고 이를 널리 알려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교원평가는 단지 교사의 문제가 아니다. 이명박씨가 말하는 “정부방침에 대항하고.. 길거리에 나오고 벽보 부치는” 교사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교사들이 교단에서 사라지고 남으면 학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들이 교원평가를 교사들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외면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일까? 가장 일차적인 피해자는 학생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교육권의 박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원평가저지는 교사들만의 투쟁이 될 수 없음을 알려내자. 교원평가저지가 교육주체들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요구로 확대될 수 있도록 널리 알려내자! 힘들다고 바늘허리에 맬 수 없지 않은가? 교원평가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교원평가가 현재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왜곡 시킬 것임을 선전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당장 무정형의 대중들을 교원평가반대전선으로 이끌 수 없다면, 조직되어 있는 대중들을 먼저 만나자! “전교조 교사들이 짤릴 것 같으니 도와 달라”는 따위의 연대가 아니라, 교육시장화를 막아내기 위해서 교육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함께 싸우자고 당당하게 제안하자! 교원평가가 단지 교사들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주체 전체 사회구성원 전체의 보편적 권리인 교육권의 문제임을 선언하고 지역과 현장에서부터 교원평가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자! 나아가 한국사회 교육문제의 본질이 어디에서 기원하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하고 대안을 제시하자!

다음, 교육주체들부터 단결하고 공동실천을 전개해야 한다. 이명박정부는 평가를 통한 위계서열화와 이를 통해 교육시장화 학교시장화를 획책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일제고사로, 비교사노동자들에게는 업무평가로 그리고 교사들은 교원평가라는 칼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원이라도 할 때는 광의로는 교사와 비교사노동자를 모두 망라하는 것으로 비교사노동자의 구조조정저지 투쟁과 교사노동자의 교원평가저지 투쟁에 상호간에 연대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다수 교사들의 정서와 조건에서 이러한 연대가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없을 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운동의 모범을 확대하고 환류시켜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는 비단 초중등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분야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공동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예로 현재의 교사들이 구조조정 당하는 것을 외면하고 예비교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미래형교육과정이 통폐합 될 해당 교과 교사의 문제로 그치지 않고 관련 대학과 학과의 문제로 연동되듯이, 초중등 영역의 학교시장화는 이미 진행되어온 대학부문 등의 시장화를 더욱 극단으로 내몰 것이다. 또 굳이 이런 논리적 연관을 따지지 않더라도 교육자체가 사회적 문제라도 했을 때 과연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은 얼마나 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 하면서 연대를 확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혁파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교원평가를 찬성하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지 교육문제의 본질, 경쟁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무지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교원평가에 찬성하거나 혹은 교원평가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권력관계에서 근거한다. 그리고 이 권력관계가 근본적으로 혁파되지 않는 한 교사와 학생간의 비적대적인 모순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사 개인이 학생들에게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는 식의 다짐을 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이러한 권력관계 위계적인 학교구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운동에 노동조합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재국면에서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 실현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무상교육실현은 현재의 학교 안에서의 교육주체들 특히 학생과 학부모들이 겪고 있는 비대칭적 위계적 질서를 즉각적으로 해소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교조는 2006년에 학교자치(위원회)와 교장선출보직제 등을 대안으로 제출한 바 있으며, 법제화 이전의 실천방안으로 학부모 의견개진권 실질화와 학급 학부모-교사 협의회 설치, 학생-교사 협의회와 학생회 실질화, 교과/학년협의회 활성화 등이 제시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며, 비록 학교자치가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모든 평가의 폐지를! 교육주체의 소통을 가로막는 그리하여 학교자치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제도 안과 제도 밖에서의 실험들이 소통되고 환류되어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강고해 보이기만 한 지배질서의 균열이 시작될 것이다. 교원평가저지 투쟁! 과연 소수의 단말마적 비명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교육주체의 단결과 연대로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대장정이 될 것인가? 그 미래는 오직 우리 자신의 실천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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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청소년인권의 감수성으로 까칠하게 바라보기

아즈(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보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습니까? 장담컨대, 그렇게 1000명의 아무나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잘 되고 있다’, ‘성공했다’ 라 말할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져서, 어제 아침, 직접 밖에 나가 거리를 걸어가면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 200명에게 즉석 조사를 했다. 망했다. “문제 있다”는 즉각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좋다, 괜찮다, 잘 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조차 결국엔 단 한 명에게서도 들어보질 못했다.

별보며 학교가고 달 보며 귀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의 아들딸은 아직도 별 보며 등교해서 달 보며 하교한다.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젠 뜨거운 사교육 열풍까지 덤으로 몰아친다. 그 와중 살고자, 이기고자, 옆 짝꿍의 머리를 밟고 더 높게 올라가고자 쏟아 붓는 기백만 원의 학원비로 만들어진 타율적 경쟁과 양극화속에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60년 교육사를 그 누가 성공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답은 만민 공통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제의 해결책은 가지가지다. 평준화를 해체하고 경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빡세게 전국 수준, 세계 수준에서 경쟁시키고 엘리트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사람들, 더 평등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서열화되지 않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랍시고 정부가 내민 카드 중 하나가 ‘교원평가제’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공통의 카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회의 입법에 상관없이 현재 시범 운영되고 있는 교원평가제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 국회에는 교원평가제 법안이 논의 중이다. 교사들을 평가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겠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를 일정정도 해소시킬 단비로 이 교원평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원평가가 교육을 변화시킬 단비가 아닌 산성비라면?

교사에게 점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교육이 얼마만큼 나아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은,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교육이 발전하지 않기에 건전한 경쟁을 하도록 만들겠다며 입시경쟁의 압박을 지속시켜오고,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 또한 경쟁과 자율을 내세우며 대학교,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서열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사들이 노력이 부족해서 교육이 발전하지 않는다며 교사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압박을 하겠다며 교원평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얼마나 잘 맞는가를 평가하는 것과 교사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비교하는 교원평가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오해인가?

교육활동은 교사요인, 학생요인, 가정요인, 교육 환경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 속에 이루어지며 이런 요소들에 따라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업의 수준은 교사의 학교 내에서의 역할, 수업시수 등에 영향을 받게 되며 학교나 교실의 환경, 학생 요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야 ‘평가’란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될 텐데 열 개가 있으면 그 중 한두 개(교사들에 관한 것들)만 들춰본 다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교육문제의 책임이 교사들한테 전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교사들만 쪼면 학교교육이 더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 만들어질까?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크게 나아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원평가제는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에 둔 제도도 아니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이나 교사들의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좋게 평가하는 교사의 덕목이란 대체로 무엇일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점수매기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지금까지의 평가/비교/경쟁위주와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 같고, 교육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를 않는다.

또한 평가로 사람을 관리하는 제도에는 필연적으로 강압이, 협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평가의 목적이 교원의 ‘능력개발’이기 때문에(교원능력개발평가) 평가결과를 모든 교원의 능력개발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연수를 보낸다던지 잘라버린다던지 하는 징벌의 요소가 있어야 시스템 유지가 가능하다.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폭력과 강압, 차별로 갈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뭐 교사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임용고시를 통과했으니 알겠지만) 평가, 경쟁, 서열화, 점수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는 학교가 별로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교원평가의 목표인가?

교원평가의 미래는 대한민국 교육 60년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과 교사들의 노력 부족이나 학부모의 관심 부족이 아닌 평가/비교/경쟁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다. 주어만 다른 평가/비교/경쟁위주의 교육정책인 교원평가가 교육에 변화를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교원평가로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는 교원평가를 통해 학생/학부모의 만족도를 참고하여 연수를 통해 교육능력을 발전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운영과 교육내용/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학생의 학교운영, 교육내용/과정 참여는 지난 몇 년간 청소년단체와 진보적인 교육단체 등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부분이다.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의견들이 중요한 목소리로 인정되고, 논의를 거쳐 반영되는 것은 교육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원평가가 이 부분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학생들은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낼 현실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 시간에 영어 한 단어를 더 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사치이다. 둘째, 학생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의견을 내다보면 쓴 소리도 당연히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학교장에게, 교육감에게 간언을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청소년은 미숙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타 건설적인 의견들조차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셋째, 어떠한 참여구조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교운영은 물론 교육과정 전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시킬 어떤 통로도 권한도 없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이라 하지만 학생회 회의 또한 교사들이 소집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다. 또한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모든 최종결정은 교장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원평가제는 이런 것들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겐 여전히 교육의 과정/내용과 학교운영에 대해 논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거기다가 현 상황에서는 평가조차 입시 위주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또한 교원평가에서도 ‘미성숙한 학생들’이라는 권위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이번 교원평가 6자 합의체에도 정당의 참여는 있지만 정작 교육정책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생, 청소년들의 참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만들어가기보다는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물어 참고자료로만 쓰겠다는 이 제도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제도에 가깝다.

교원평가제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마치 학생들이 교사들을 평가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평소 불만이 있던 교사들을 평가하고 제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들에게 힘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교원평가제로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만족도를 점수화해서 주는 것이 과연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서열화시킬 자료로 활용될 숫자들을 내놓는 ‘소비자’의 역할일 뿐이다. 학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주체이자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제연수의 최종결정권자는 교장이나 교육감 같은 ‘윗사람’들이다. 교육감이 지금 학교의 촌지, 성추행, 체벌 교사 같은 부적격교사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인터넷에 간단하게 검색만 해 봐도 문제교사들을 성토하는 글이 가득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수백 건의 글이 올라왔지만 교육청은 그 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즉 이 평가를 통해 교육감이 부적격교사를 파악하더라도 문제 있는 부적격교사는 교육감의 권력 속에 숨어 보호받고, 교육감이나 교장 등을 귀찮게 하는 부적격교사에 대한 보복성징계의 근거로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원평가는 오히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만으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헛된 명분에 그쳐 실질적인 학교자치를 가로막고, 지금의 교육을 더욱 썩도록 만들뿐이다.

경쟁 아닌 소통을, 학생에게 권력을,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우리는 평가와 경쟁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교육현장에서는 신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할 수 있고 교사가 학생을 신뢰할 수 있어야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대화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런데 학생이 평가당하고, 교사가 평가당하며 생존을 위해서 서로 앞서가려고 아둥바둥거릴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 불신이 만연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제안한다. 점수를 매기지 말고, 서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학생 등 교육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끼리 협력하고 논의하여 건설적으로 상황을 개선해나가자는 것이다.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고 평가 설문지를 돌리고 채점하고 윗선으로 올려 보내고 점수 매기고 하는 것보다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과밀학급 해소, 학교 시설 개선, 교사 수 증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니 뭐니 하며 다른 나라들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교육예산도 낮은 편이다. 학생들은 냉난방 시설이 불안하고, 급식 질이 안 좋고, 탈의실도 동아리실도 학생회실도 없고, 교사당/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고, 운동장도 좁거나 없는 학교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 교재비 등이 부담스러운 학생들도 많다. 교육예산은 잔뜩 깎으면서 교육의 질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에 가깝게 들린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혁은 교원들이, 교육부가, 크게는 현재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그들의 논의와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은 ‘덜’ 살았다는 이유로, 감정에 쉽게 치우친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종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결정할 권한도,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미성숙’의 기준도 자의적일뿐더러, ‘미성숙’을 이유로 참여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이제 두 번째, 아래로부터의 권력. 우리는 자치를 원하며 정당한 권력을 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들이 초기에는 비록 미진할지라도 청소년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학생이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이를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1의 주체는 학생들이 아닐까? 학생인권을 보장하게 만들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학교 운영이나 교육 방식에서의 개선할 점을 제대로 짚을 수 있는 주체, 어떤 교사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달라. 정말로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를 징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학생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자정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교육과정과 학교운영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논의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하라. 권력을 분립하고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지금의 교육 현장은 독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주는 것은 비단 우리의 발언권 획득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고, 사회적 능력의 발달을 꾀할 수 있다. 기존의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이것저것 결정한 다음에 결정한 사안이 현실에 맞지 않아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때 머리를 싸매고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들끼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잘 되는 교육현장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교원평가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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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중단 청소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전망

이치열(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매년 7만여 명의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일은 이 청소년들이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청소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우리사회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또 문제의 진단과 해결방안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없이 근원적 처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학업중단현상을 초래하는 근저에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탐색을 시작하고자 한다.

1. 왜 교육이 문제인가

“그래도 아이들 학원비는 대줘야 할 텐데…” 밤새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는 권고 사직당한 어느 아버지의 넋두리이다. 다니던 직장의 구조조정으로 권고 사직해 이제는 실업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아이들 교육문제를 고민하는데 그 첫 번째로 꼽는 것이 ‘학원비’이다. 여기에 우리사회 교육신화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흐름과 함께 근대적 학교제도가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선택받은 귀족이 아니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학교제도가 갖는 진보성이었다. 한편 자본주의 시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숙련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가 필요했다.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 근대 학교제도인 것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취학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가르친다. 거기에는 개성보다는 획일성이, 비판보다는 순종이, 창의성보다는 무기력이 필연임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러한 학교제도를 통해 양산된 인간은 나만의 행복,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등의 가치를 향해 체제 순응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경쟁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가끔 어려운 집안 출신 가운데는 드물게도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한 모델은 마치 학교제도가 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학교가 사실상 이 사회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틀로서 기능해 왔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학교제도가 갖는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은 어떤가? 2006년 판 OECD의 통계연보에는 우리나라가 OECD국가 30개국 중 GDP대비 공교육비 지출은 23위, 사교육비 지출은 1위로 나타나 있다. 왜 이토록 기형적인 교육비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국사회가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임을 반증한다. 학벌사회로 불리는 우리사회는 교육이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길러낸다는 본연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물론이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임무를 포기한지도 오래된 일이다.

일단 수능시험이 끝나면 바로 점수대별 전국대학의 순위표가 작성되어 나오고, 이에 따라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자본과 권력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에 모든 이들은 이 ‘10대 결정론(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로 인생이 결정된다)’의 신화 앞에서 광신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자본력과 문화자본력이 청소년의 미래 삶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회가 되었다. 아직도 대도시 중·고등학교에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전달한단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에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아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7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고학생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력과 아이의 성적간의 불균등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는 오직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서만 작동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잘못된 이 교육신화와 내 아이만큼은 지긋지긋한 배제와 차별로부터 벗어나 경쟁의 승리자로 키우고픈 욕망에 가난한 노동자들도 너나할 것 없이 승산 없는‘로또 당첨’의 환상으로 그 ‘학원비’를 대주기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과 문제점

(1) 원인파악을 위한 통계자료 부족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책은 그 사유에 따라 다양하게 강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학업중단 청소년들에 대한 실태조사는 터무니없이 열악한 수준이다. [표1]에서 보다시피 현재 중단사유를 제시하는 유일한 통계시스템인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시스템에서는 대책을 세우기에 적당한 구체적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 학업중단 청소년들([표2]참조)에 대한 대책은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표1]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 (단위 : 명, %)

연도

합계

인문계

전문계

‘06.2

18,403

(0.46)

15,669

(0.78)

10,166

(0.81)

12,910

(2.57)

23,076

(1.31)

57,148

(0.73)

‘07.2

23,898

(0.61)

18,968

(0.91)

12,616

(0.98)

15,314

(3.10)

27,930

(1.57)

70,796

(0.90)

‘08.2

20,450

(0.55)

20,101

(0.98)

15,477

(1.15)

17,466

(3.58)

32,943

(1.73)

73,494

(0.96)

‘09.2

18,132

(0.52)

19,681

(0.98)

16,174

(1.14)

18,099

(3.76)

34,273

(1.74)

72,086

(0.96)

[표2] 학업중단 이후 동선이 파악되는 청소년 현황

학업중단

이후 상황

관련기관

현 황

대안학교

- 각 대안학교별 관리

(서울의 경우, 서울시대안교육센터 종합 관리)

- 교육과학기술부

중등전원형: 약2,500명

중등도시형: 약 650명

초 등: 약1,300명

기초생활수급자

- 주민자치센터, 각 구청

- 보건복지가족부

미혼모지원시설

- 시설별 관리

- 보건복지가족부

약200명 추산

학업중단

이후 상황

관련기관

현 황

청소년 쉼터 등록

- 시설별 관리

-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그룹 홈 등록

- 시설별 관리

- 각 구청,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보호관찰소 등록

- 관찰소별 관리

- 법무부

- 서울지역 5개 보호관찰소

- 무직청소년으로 등록자 (약1,000명)

소년원 입소

- 원별 관리

- 법무부

기타 상황

※ 기숙형 학원 등록 / 홈스쿨링 / 아르바이트 / 히끼꼬모리 / 아무일 하지 않는다 등등

이는 결국 구체적인 사유에 근거한 대책수립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정책적 실패를 낳고 있다.

(2) 학업중단의 주요 요인

첫째는 제도권 교육의 문제이다. ‘교육=경쟁’의 논리로 교육 본연의 임무는 간 곳 없고 오직 상위 10%의 아이들의 성공신화를 위해 다수의 아이들이 들러리를 해야 하는 현행 제도권 교육의 문제가 1차적인 원인이다. 여기에서는 다수의 아이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개개인의 개성과 인권이 존중되는 것은 고사하고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빈곤층 및 가족해체로 인한 문제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 극심한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빈곤에 기인한 가족해체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소년들을 돌봐야하는 사회적 안전망은 부족하다. 요즘 청년 노숙인이 증가하고 있다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학업중단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라고 한다. 결국 학업중단은 OECD 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빈곤의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청소년들의 개인적, 심리 정서적 어려움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보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과도한 문화적 자극과 소외의식,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혼동 등은 원만한 관계형성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3) 학업중단 이후의 경로

유 형

경 로

학교요인(1)

학업부진→학교일탈(게임, 학업흥미 상실, 비행 및 무단결석)→ 장기(반복)결석→ 칩거→ 재수(시험준비)→ 장기실업(비정규직)

학교요인(2)

왕따(집단 괴롭힘)→ 전학반복→ 자퇴→ 검정고시(대안학교)→ 부적응→ 칩거→ 게임중독(은둔형 외톨이)

가족요인(1)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학교 중도탈락→ 비행(불법취업)→ 사회적 낙인→ 취업(사회적 기회)상실→ 빈곤화→ 학대방임가정의 형성

가족요인(2)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기관입소→ 가족복귀→ 기관전전→ 자립기반 실패→ 기관에서 퇴출→ 생존적 취업(동거)→ 성인기관 입소(경계적 적응)→ 사회부적응

개인요인(1)

외향적장애→ 반복적인 징계→ 정학(퇴학)→ 징계프로그램 실패→ 알바(인터넷게임, 폭주)→ 성인범죄(실업, 노숙)

개인요인(2)

내성적장애→ 불안(공포, 우울)→ 무기력→ 무존재감→ 학교흥미상실→ 칩거(게임)

(4) 학업중단 대책의 반복적 실패 요인

우선 학교가 아이의 정서적 문제와 행동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학업중단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대응방식이 지나치게 개인상담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또 아이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실생활 반경을 충분하게 알고 못한 채 대책을 강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빈곤의 어려움, 학교문화에 대한 반감, 가족을 잃은 정서적 어려움 등의 요인을 바탕으로 정확한 대응을 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상담을 중심으로, 학업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무료해 하는 이론적 진로교육 등을 반복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적 평가가 필요하다.

3.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안적 제언

(1) 경쟁과 서열중심의 교육을 바꿔야 한다

우리사회의 교육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늪이 되어가고 있다. 경쟁만을 앞세우는 입시지옥 속에서 아이들은 성적의 노예가 된다. 시험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기하고 점수가 인격을 대신하는 야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1등을 하는 아이 외에 모든 아이들은 반복되는 패배와 열등감을 내면화하며 자라고 있다. 이것이 학업중단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이 지속되는 한 학업중단 현상을 지속될 수밖에 없다.

등수는 인격이 아니다. 서열 중심주의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파렴치한 교육관이다. 점수와 등수로 환원되는 ‘경쟁’을 ‘교육’이라 믿는 허상을 깨뜨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학교를 등지는 아이들의 숫자는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 확신한다.

(2) 학교로 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흔히 학교로 다시 복귀하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말한다. 학교라는 제도에 아이들이 모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학교에 잘 맞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해결방식도 더 넓게 열리게 된다.

아이들은 학업중단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과 진로불안, 사회적 고립감, 진학이나 취업 등의 고민을 갖는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해 학교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들이 학습하고 자립하여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3) 학습자의 권리, 청소년의 인권에 주목하자

비록 학교에서 나왔지만 엄연히 이들에게도 천부인권으로서의 교육받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교에 다니지 않기에 받게 되는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이들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학습과 성장이 가능하도록 따뜻한 사회적 배려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학교를 떠나더라도 가정에서 교육의 기회를 펼칠 수 있도록 가정학교(Home schooling)를 활성화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또한 청소년도 엄연한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어야 하겠다.

(4)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

학교는 이제 아이들의 문제를 학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지역 청소년들을 지역사회가 돌봐야한다는 공동체의식으로 학교-가정-지역사회간의 지역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연계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자발적으로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작은 것부터 모범적인 사례를 만드는 것이 우선 중요하며, 정부와 지자체는 이러한 자발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5) 아이들의 실체에 접근하는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선 학업중단 청소년들의 정확한 현황파악을 위한 실태조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이 학교 밖에서 대체 무엇을 하면서 지내는지, 어려운 점은 무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닌 아이들의 감성과 눈높이로 기꺼이 멘토가 되어 줄 다양한 전문가들이 주변에 필요하다. 또한 많은 예산을 들여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산을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존 청소년수련관, 위탁 또는 비인가 대안학교, 청소년 자활기관, 야학, 공부방, 쉼터 등 다양한 공간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학업중단 청소년들이 안정적인 성장과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소통, 상담, 교육, 관계 맺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적절할 것이다.

(6) 새터민,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도 관심 쏟아야

새터민과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업중단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민간차원에서 대안학교(한겨레학교, 셋넷학교, 자유터학교, 여명학교, 아세아공동체학교 등)를 설립하거나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간디교육연구소)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지역에서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임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폐쇄성과 차별의식이 이들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아이들 또한 제도교육 체계에 부적응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새로운 소수자인 이들에게도 각별한 배려가 요구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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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과 근대 공교육의 이념

지훈(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회원)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사회적 문맥에서 보자면 교육은 소수 특권계급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열린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그리하여 공교육은 모두에게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것의 혜택이 없었더라면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이 근대 공교육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였던바, 그리하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복지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육의 기회가 소수의 특권이었던 봉건적 계급 사회에서는 보편적 공교육이 뿌리내릴 수 없었던바, 공교육이란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때에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보편화된 곳에서 어떤 집단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이를테면 장애인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교육제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육의 가치가 사회적 합의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같은 공교육의 이념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상태는 없었지만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프랑스 교육은 1791년의 헌법에 의해 초등교육은 법적으로 무상이고, 의무라고 선언됨으로써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민주화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무상국민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근대적 공교육제도의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 콩도르세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학교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계몽의 압제가 힘의 압제에 합류해 있었다”고 지적하며 지식의 독점과 교육의 불평등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함을 밝히며 이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부유한 집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모든 원조를 재능에 제공하는 공교육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의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교육에 따른 불평등의 계급적 재생산은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개혁도 주장한다. 교육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 아래에 있거나 학교가 선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교직의 자율성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다. 그는 “교육은 공통적으로 주어져야 하며, 여성도 교육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며 공교육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가정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식의 봉건적 사고도 엿보이는 등의 한계가 보이지만, 당시로서 동등한 교육을 주장했던 것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교육의 일반 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을 혁명의회에 제출함으로써 민주적 교육체제의 선언인 헌법에 기초하여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교육이 더 이상 부와 결부되지 않을 때 교육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평등에 대한 위험이 적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육에 의한 권력화도 경계하였다. 이는 교육이 계급재생산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한국사회에 더욱 의미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시기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교육 개혁론들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은 미미했다. 나폴레옹에 의해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계가 일정 정도 수립되었으며, 1882년 ‘훼리법’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학교교육의 비종교화나 무상의무교육제도의 원칙이 확립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우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보편화함으로써 공교육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장한 점, 무상교육의 제공을 통해 경제적 환경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려한 점, 그리고 교육에 따른 권력화를 경계한 것 등은 매우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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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공부와 해방에 대한 세 가지 질문

현식(연구공간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11월, 어김없이 수능의 여파가 전국을 흔들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교육 정책이 바뀌어도 벌어지는 현상은 언제나 똑같다. 문제는 이 뜨거운 열기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공부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다. 유쾌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적절한 보상이라도 있다면 다행일 테지만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다. 바야흐로 공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때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프랑스의 지식인인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 있다. 그의 책, 무지한 스승은 제목부터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무지한 스승이 어떻게 제자들을 앎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의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의 부제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을 보면 그가 말하는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이 아닌 ‘지적 해방’이다. 일단 우리의 질문을 접어놓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질문 하나. 유식한 스승이냐 무지한 스승이냐

랑시에르가 이 책, 무지한 스승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요체는 이렇다. “해방하는 스승이냐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이냐. 유식한 스승이냐 아니면 무지한 스승이냐.(32쪽)” 무척이나 도발적인 질문이다. 어떤 스승을 필요로 하는가. 해방하는 스승, 아니면 바보로 만드는 스승.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해방을 위한 스승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유식한 스승이어야 할까, 무지한 스승이어야 할까. 놀랍게도 그는 무지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지한 스승이야말로 해방하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유식한 스승은 학생을 끊임없이 바보로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유식한 스승은 끊임없이 학생의 무능함을 확인할 뿐이기 때문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설명’해주어야만 학생이 무지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우월한 지능(유식한 스승)이 열등한 지능(무지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이것이야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비판한다. 흥미로운 것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바보로 제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월과 열등의 구분을 하는 순간 이 둘은 모두 바보가 된다.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왜냐하면 두 지능의 평등을 입증할 수 있는 비슷한 자에게 말을 거는 자만이 자신의 지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월한 정신은 (자신의 말을) 열등한 자들에게 억지로 들리지 않게 한다. 우월한 정신은 그를 인정해줄 수 있는 자들을 얕잡아봄으로써만 자신의 지능을 확보할 뿐이다.(83-84쪽)”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야말로 바보가 아니겠는가. 고상한 지식인의 언어는 그렇게 스스로를 바보로 만든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바보 만들기’란 지능의 퇴화가 아니다. 따라서 그 반대는 ‘천재 만들기’가 아니다. 오히려 바보란 해방되지 못한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바보 만들기의 반대말은 해방이다. 자기가 가진 고유한 지능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열등한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다른 말로 옮기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랑시에르는 자코토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국 프랑스에서 망명한 자코토는 루벵에서 강사직을 얻는다. 그가 맡은 수업은 프랑스 문학.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으며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조금도 몰랐다는 데 있었다. 유일한 소통 수단이란 통역뿐이었다. 그러나 자코토는 학생들과 새로운 연결 고리를 맺는다. 바로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이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주문한 것은 매우 간단했다. 네덜란드 번역문을 가지고 프랑스 텍스트를 익히라는 것. 특별한 교수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외울 때까지 끊임없이 되풀이하기. 그리고 텍스트를 자기의 말로 이야기하기.

이 실험의 결과는 의외로 성공적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학생들은 작가 수준의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무지한 스승인 자코토가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가르친 그 방법에 랑시에르는 주목한다. 그 공부의 결과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지식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보-열등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아니면 해방된 자를 만드는 지식이었는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이야기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된 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자코토의 인쇄공에게는 정신이 박약한 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코토는 아이에게 가르쳤다. 그것도 히브리어를! 그 뒤 그 아이는 훌륭한 석판공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히브리어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무지한 스승, 자코토를 통해 경험한 배움이 그를 구원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 해방된 자의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부가 꼭 쓸모 있는 지식을 익히는 것일 필요는 없다. 인쇄공 아들에게 히브리어가 결과적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해방’이라고 부른다.

질문 둘. 굴레를 씌우는 공부이냐 해방을 이루는 공부이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논어 첫 장을 펴면 나오는 말이다. 논어가 언제, 누구의 손에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구절로 논어 시작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배움의 문제가 중요하다. 공자가 자기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할 때도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논어 곳곳에서 공자는 스스로를 호학好學, 배움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한다. 주희는 이 배움(學)을 ‘본받는다(效)’는 뜻으로 해석한다. 먼저 깨달은 자(先覺者)를 본받는 것이 바로 배움이라는 것이다. 주희의 해석을 따른다면 논어에서 말하는 공부(學)란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바보 만들기’에 불과할 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등한 자와 열등한 자가 있었다면 주희에게는 먼저 깨달은 자와 나중에 깨닫는 자가 있다.

이 바보 만들기는 끊임없이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한다. 열등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우월한 자와의 커다란 간극. 공자 시대에도 이미 공자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공자의 수제자로 꼽히는 안연이었다. 안연은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굳세다. 앞에 계신 듯 보이다가도 홀연히 뒤에 계신다. ... 선생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좇아갈 방도가 없구나!” 안연의 이 말은 도저히 공자를 좇아갈 수 없다는 탄식이다. 공자의 칭찬을 독차지하던 안연조차 이렇게 말했으니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공자 시대에 일부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성인聖人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 스승으로서의 공자는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다.

사실 유가전통에서 말하는 스승은 대체로 이렇다.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다. 이 사제간의 관계에서 열등한 자는 언제나 열등한 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제자는 제자일 뿐이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비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긋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랑시에르가 목표하는 해방의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어떨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해방된 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속박당한 자인가.

공자는 자신의 삶을 지우학志于學으로 시작해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로 정리한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어긋남이 없었다는 말. 이것이 바로 해방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더구나 유가전통에서는 배움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끌어들인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라고 말한다. 남을 위한 배움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보면 이렇다. 위기지학이란 자기 공부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자기는 물론 사물들을 이루어주는(成物) 데까지 이르는 공부를 말한다. 반대로 위인지학은 남의 평가에 좌지우지하는 공부를 하다 결국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喪己) 데까지 이르는 공부다. 자기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공부, 이것을 랑시에르의 말로 바꾸면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째서 유가전통에서 이런 두 가지 상반된 표상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삶이 속박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는 그 스승을 통해 자기 해방을 경험한다. 유가 지식인이라면 랑시에르의 말, 무지한 스승이 되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무지한 스승보다는 위대한 스승을!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다. 모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해방을 위해선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한다!

이러한 차이는 철학적 지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랑시에르가 지식과 지능의 문제로부터 해방이라는 문제를 제시한 반면 유가전통에서는 지식과 지능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찾을 수 없다. 랑시에르가 데카르트의 말을 뒤집어 모든 존재는 생각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지능을 가졌음을, 따라서 지능이 우월한 자도, 열등한 자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 해방’이라는 부제는 이처럼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로 가능하다. 그러나 유가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곧바로 배움의 문제로 도약할 뿐이다.

따라서 랑시에르가 경계하듯 지능의 분할, 즉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스승과 제자의 구분이 굴레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전통이 그의 비판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바로 이 때문이다. 스승은 권위를 갖되 해방케 하는 존재다. 따라서 선각자先覺者와 후각자後覺者로 구분한 주희의 구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이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의 분할로 빠질 수 있지만 또한 그로부터 탈출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랑시에르가 지적하듯 지적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각자 또한 언젠가는 깨달은 자(覺者)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비판한 우월한 자-유식한 스승을 다시 살펴보자. 그가 말하는 스승은 능력의 우월함을 자임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설명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유식한 스승이란 바로 설명하는 자다. 그래서 ‘보편적 가르침’에 해방의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우는 학습 방식. 여기서 해방의 고리가 있다. 무지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을 대신해서 ‘의지’가 필요하다. “이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29쪽)”

유가 지식인들은 유식한 스승이었을까? 적어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유식한 스승의 방법과 닮아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스승은 의지를 일깨운다. 무지한 스승이었을까? 아니었을까? 선뜻 대답을 찾기 어렵다.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도 그것은 그 ‘공부’ 자체의 문제가 아닐까? 속박하는 공부가 아닌 해방하는 공부. 그래서 유가 지식인들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촉발하는 스승.

질문 셋. 전체의 전체냐 부분의 부분이냐

해방된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방의 지식을 얻고 나서는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면 또 다시 새로운 지식을 찾아 모험을 떠나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항상 새로운 해방을 찾아야 할까? 텔레마코스의 모험을 통해 프랑스어를 익힌 네덜란드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익힌 인쇄공의 아들에게 또 다른 해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들이 익힌 프랑스어와 히브리어는 세상의 지식 가운데 일부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결국 그 해방이라는 것도 일부의 해방이 아니겠는가.

자코토는 말한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그가 학생들과 읽은 텍스트 텔레마코스의 모험, 그 자체가 전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 전체가 있다. 그것은 칼립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책이 인류 모든 지식의 총체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를 가지고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책들 중 하나인 것이다.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우리가 새로 배우게 될 모든 것을 그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어떤 중심. 이 새로운 것들 각각 이해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본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한 것, 그것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수단을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어떤 고리. 보편적 가르침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관시켜야 한다.(48쪽)”

전체와 전체가 만나야 한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전체를 볼 것, 끊임없이 전체와 연관시킬 것. 이것을 유가전통의 말로 옮기면 구도求道, 혹은 궁리窮理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 이름이 ‘궁리’이다! 책 뒷날개에 이런 구절이 붙어 있다. “위학지요爲學之要 막선어궁리莫先於窮理 궁리지요窮理之要 필재어독서必在於讀書 배움의 요체는 궁리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궁리의 요체는 반드시 독서에 있다.” 의상이 지었다는 「법성게法性偈」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세계 전체가 담겨있다. 따라서 진정한 깨달음, 지적 해방이란 배움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나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한 텍스트 안에서 세계 전체에 대한 앎을 이룰 수 있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바꿔 말하면 이렇다. 부분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결코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루벵의 프랑스어반 학생들의 지적 모험은, 히브리어를 배운 인쇄공 아들의 지적 모험은 곧 전체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해방이 낯선 빈자들에게 더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랑시에르는 설명자들에게 돈을 지불하거나 여러 해 동안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는 이상 교육받을 다른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빈자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한다고. 그러나 이 것 역시 빈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전체를 위한 것이다. 교육-바보 만들기는 열등한 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우월한 자들을 바보로 만든다. 이른바 지식인의 자기 해방은 이 지식 해방에 동참하는 데 있는 것이다. 해방은 전체적이다. 구원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누리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해방은 결코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누구와 함께 해방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구원해줄 사람을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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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각을 창간하며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회원)

암울하지만 다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입시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광주에서도 수능시험을 보고 난 재수생이 점수가 낮게 나왔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했습니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공부하기가 버겁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기 집 가스배관에 목을 매달은 일도 있었고요. 이런 일은 매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데, 언론에 종종 나오는 이러한 일들은 수많은 학생 자살 가운데 몇 개만 뽑고 있고, 사람들은 그나마 언론에 나온 학생들의 자살을 보면서도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언제까지 학생들의 죽음행렬을 두고 보기만 해야 할까요? 도대체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특정대학 출신들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권력 있는 높은 자리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몇 개 대학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대는 전신인 경성제국대학 때부터 정치권력의 특별지원과 비호 속에서 한국사회 지배엘리트 양성소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오래 전부터 공직, 언론, 국영연구소, 정치계, 법조계 등 거의 모든 분야 핵심 요직의 십중팔구를 서울대 출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 권력 상층부를 독식한 이들은 자기들끼리 남 배척하는 패거리를 만들고 유형무형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권력집단 바깥에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한국사회 운영과정에서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권력, 꼭 필요하나요? 전 권력 없는 사람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근데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흔히 진보적인 사람들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높은 공직에 올라가야 한다면, 대학원을 다닌다거나 자신의 직급을 높이기 위해 내조하거나 정치를 하는 모습들을 보면 이들 역시 불평등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학생들도 이른바 일류대에 들어가 우리사회 지배계급이 되기 위해 경쟁하는 거고요. 이처럼 교육이 계급 획득의 싸움터가 된 까닭에 이 땅의 교육은 지금까지 왜곡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치원 때부터 한국 교육의 목적은 암기위주의 문제풀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일류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고유한 적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게다가 공부 잘한다는 말을 들으며 이른바 일류대에 간 학생들도 단순한 문제풀이 연습만 했지, 대학에서 고등 학문을 할 준비는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지금의 학교교육이 경쟁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다른 직업을 둔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학교 안에서는 시험성적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평가되고 남들과 비교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강요되는 비교 때문에 학생들은 친구들과 경쟁해야 하고, 그러한 경쟁 속에서 인간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연대의 논리'보다 '경쟁의 논리' 교육받은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오면 또다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어릴 때부터 경쟁의 논리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이 사회를 인간다운 사회로 바꾸려고 하는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처럼 특정대학의 권력독점에서 비롯된 학벌은 온 사회를 좀먹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학벌문제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학벌을 조장하는 갖가지 보도를 일삼아 있지요. 이것은 대부분의 언론도 특정대학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기성 언론에서 학벌을 정당화하는 ‘지배 논리’를 퍼트릴 때, 양심 있는 학자라면 ‘대항 논리’를 만들어 그에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학계는 다른 영역에서는 나름대로 그 일을 해왔을지 몰라도, 제가 알기론 김상봉, 정진상 교수 말고는 학벌문제와 관련해서는 학문적인 대항논리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치열한 고민 없이 서구 학문의 개념을 끌어와 한국 현실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우리학계의 한계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한국의 학계도 특정대학 출신이 주도하기 때문입니다.

운동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었는지 학벌문제는 사회운동 차원에서도 한 번도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한국사회의 계급을 이야기 할 때 학벌은 부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육운동 진영에서조차 이 땅의 교육모순을 이야기 할 때, 정작 가장 크고 직접적인 원인인 ‘학벌 없는 사회 운동’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합니다.

더욱이 학벌체제의 재생산 공간인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자신들의 문제인 학벌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게 되는 기득권에 대해 별 고민이 없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일류대가 아닌 대다수 학생들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현실을 인정해 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고민하고 깨어있어야 할 대학사회도 이런 것을 보면, 우리사회가 차별이 당연시되는 '계급 사회'로 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합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신분제도 자체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육생각>은 한국사회의 경쟁교육을 비판하고, 지배계급이 퍼트리는 학벌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일조로 창간했습니다.

책을 펴내기 위한 자본, 편집 작업,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위한 고뇌들… 책을 내기란 참 힘듭니다. 이번 창간호에서는 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져 ‘공교육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공부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밖에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교원평가제’, ‘학생인권조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에서 진행되었던 ‘청소년인권포럼’, 대학평준화를 꿈꾸는 작은 실천들, 서평 등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적어보았습니다.

필진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함께 하는 <교육생각>이 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고와 참여, 토론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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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졸업식에서 두부 퍼포먼스를 한 이유

“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출석부라는 죄수명단’에 올라 ‘교복이란 죄수복’을 입고 ‘공부라는 벌’을 받고 ‘졸업이란 석방’을 기다린다.”

학생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받으며 지금도 인터넷 여기저기에 다양한 버전으로 떠돌고 있는 문구입니다. 입시경쟁을 중심으로 두발복장규제, 체벌, 강제야자… 그리고 수많은 비인간적인 대우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고 있는 ‘학교를 감옥’에 빗대어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학생들의 인권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수나로 등 청소년·교육단체에서는 학생들의 인권이 너무나 쉽게 무시당하고 침해당하고 있는 학교의 현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졸업식 시기에 ‘두부 퍼포먼스’를 진행합니다. 감옥에서 출소하면 두부를 먹는 사회적 관습처럼, 현재 한국의 학교가 감옥과 비슷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억압적 공간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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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신호인가. 요즘 소리 없이 비만 내리네요.

2 10일에도 비가 왔지요?

이 날, 수요캠페인10회를 맞이하고 KBS ‘학벌조장’드라마 <공부의 신>에 대한 항의차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어요.

 

굳은 날씨에도 우리 회원, 연대단체들이 참여해주었고, 기자들도 취재에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했답니다.

다만, KBS사측이 우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만 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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