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포럼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야기
최승원(전남여고 교사)
1. 들어가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대부분 먼저 다가오는 이미지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 있었던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 사건과 그에 따른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 충돌일 것이다. 이는 학교 교육과정에서 보다 극적으로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던 교사의 활동과 수업 중에서 가장 원색적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학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한 질문이 가능하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조선인 학생간의 충돌이 어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에서뿐이겠는가? 일제 지배 과정 동한 일본인-조선인 간의 충돌은 다양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광주에서의 충돌이 단순한 패싸움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처음에는 나주-광주를 통학하는 일본인-조선인 학생들의 감정이 쌓이면서 충돌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렇게 우발적 충돌, 충돌의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감정의 충돌이 아닌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하고 항일 운동으로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눈여겨 볼 때 비로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지와 지향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고, 전국화될 수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2. 독서회를 기억하자
(1) 1920년대 학생 운동의 발전
거족적 항일운동이었던 3.1운동을 거치면서,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일제에 저항할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26년 6.10만세 운동을 학생들 스스로 조직하고 전개하면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 운동은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학생들은 자신들의 조직으로 각 학교에 독서회를 결성하고, 일본인 교원에 대한 불만, 학교 설비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학교당국에 저항하는 동맹 휴학으로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6.10만세 운동을 거치면서 동맹휴학은 ‘조선 본위의 교육 확립!’, ‘식민지 노예 교육 반대!’ 등 단위 학교를 뛰어넘는 반일적 성격의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한 사회 운동 세력의 대응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1920년대 중반 각 세력의 입장을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자치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우파진영이다. 이들은 동맹휴학에 대하여 ‘식민지 교육’이 빚어낸 문제라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동맹 휴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동맹휴학은 민족의 역량 증대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으로 보고, 동맹휴학의 이유에 대해서도 일본인 교사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거나, 사회주의 세력의 선동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민족주의 좌파 진영은 당대의 학교 교육을 ‘맹목적 굴종적 봉건노예의 도덕과 논리를 청년 학생의 뇌리에 주입하여 반동세력의 도구를 만들고자’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학생들의 맹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맹휴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민족주의 우파와 달리 ‘교원자격과 학교설비에 대한 불평불만은 학생 측의 반항력이 폭발하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식민지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지적한다. 또한 동맹휴학의 원인을 학생의 도덕 결핍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순종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마치 석일(昔日)의 군신(君臣)관계를 의논함과 흡사’하다며 이러한 관념의 강조는 ‘지배 측에 선 자(者)임을 느끼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학생들의 맹휴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 지원을 하였던 것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사회주의계열은 1924년에 이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항일 학생 운동을 지원하였고, 사전 발각되어 전개하기 어려웠던 6.10만세 운동도 이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산하의 고려공산청년회는 「강령」을 통해 학생 청년은 민족적으로 억압 당하고, 조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못하며, 학업을 마친 학생이 과잉 인구로 남는 것을 비판하며, 투쟁 목표를 일제 타도와 봉건 유제의 청산에 두었다. 조선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일제의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교육’이라고 규정하고 차별 교육, 노예 교육을 철폐하기 위해 동맹휴교를 선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6.10만세 운동에 제출되었던 구호가 이후 각 지역의 맹휴에서 유사하게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 성진회, 독서회 중앙 본부의 활동은 이들 사회주의계열 민족운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전남 지역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 아래 학생위원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당원 또는 공청원인 강해석, 지용수, 한길상, 강영석, 장석천 등은 왕재일, 정남균, 국순엽, 장재성 등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기반이 된 학생조직의 발전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광주지역의 독서회 활동
성진회는 1926년 6.10만세 운동 이후 지역의 학생들의 비밀 회합과 논의 끝에 11월 3일 결성하였다. 처음 참가한 학생은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등과 광주농업학교의 박인생, 정남균 등 16명이었다. 전남 지방 조공과 고려공청은 강해석, 지용수 등을 통해 성진회를 지도하였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 반대’를 지향하며 비밀 결사로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한 달에 1, 3주 토요일에 독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1927년 3월 모임을 주도하던 왕재일, 장재성, 박인생이 졸업하여 모임 개편이 필요하였고, 비밀 유지도 쉽지 않아 성진회는 해체되었다. 성진회의 운영기간이 짧아 모임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나, 성진회 활동이 이후 광주 지역 각 학교의 독서회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성진회에서 활동하던 성원들은 이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성진회 해산 후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은 각 학교 별로 독서 모임을 지속한다. 성진회에서 활동한 졸업생들은 후계자를 선정하여 재학생 지도하는 방법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유지하여, 1929년에는 광주고보, 광주농교, 전남사범 등에서 독서회가 유지되었으며, 광주여고보도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의 주도로 독서회(‘소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 지역의 독서회 활동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독서회에서 유력산 선배로 인정받았던 장재성이 각 학교 독서회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고보를 졸업하면서 성진회 활동을 마쳤던 장재성은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유학하는 중에도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광주고보의 맹휴를 적극 지원하였고 방학 등으로 일시 귀국할 때에는 후배들과 만나 독서회 활동을 점검하고 있었다. 장재성은 1929년 6월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9월 전남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학생과 청년조직을 연결하며 적극적으로 독서회 조직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1929년 6월 광주고보, 사범학교, 광주농교 독서회 활동 학생들과 만나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하고, 장재성은 책임 비서를 맡았다. 독서회 중앙부는 학교별 결사원에게 중앙부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각 학교 독서회를 재조직하여 각 학교별로 4개 반 가량의 독서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독서회원의 단결을 도모하고,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회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학생 소비조합(문방구 판매)을 만들기로 하고, 지금의 금남로 공원자리의 장재성 빵집 옆 건물에 문방구점(학생 소비조합)을 차리고 내부적으로 독서회원의 모임 및 토론 장소로 활용하였다. 이후 독서회 성원들이 검거되었을 때 검증 조서에 의하면 문방구점의 2층은 방이 3개로 구성되었고, 큰 방에는 탁자 1개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등사판용 기계와 「공산당 선언」 등 몇 가지 사회과학 서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한 11월 3일 오후, 독서회 회원들과 장재성은 우발적인 집단 충돌을 의식적인 항일 투쟁으로 전화, 발전시킨다. 이어지는 11월 4, 5일 장재성은 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던 장석천 등과 논의하여 2차 시위를 계획하고, 시위를 전국화 할 것을 결정한다. 만약 의식적인 항일 학생 운동을 고민하고 준비하던 독서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역사에서 11월 3일은 광주지역의 학생들 간의 작은 소요로 남았을 것이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억, 기념하면서 광주지역에서 의식적으로 활동했던 독서회들의 활동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화 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활동하고, 주도했을 독서회들의 활동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3) 동맹휴학
독서회의 활동이 있기 이전부터 자연 발생적인 동맹휴학이 있어왔다. 동맹휴학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활동으로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민족적 자각을 키워갈 수 있었다. 광주지역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 이전에 광주고보의 경우 1923, 1924, 1927, 1928년 총 4회의 맹휴가 일어났다. 이는 조선의 관공립 중등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이다. 한편, 광주농교에서도 1923, 1928년, 광주여고보에서도 1928년에 맹휴가 발생하였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맹휴는 성진회 회원 등 독서회와 연관된 사례가 높다. 대중적 저항 운동으로서의 맹휴와 독서회의 결합은 11월 3일 학생 운동을 항일 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대표적인 동맹휴학을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923년 1월 광주고보에서는 일본인 학생이 이유 없이 학생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다. 2월 초 맹휴 주동 학생을 처벌하지 않기로 학부형회의에서 약속한 교장이 주동학생 5명을 정학 처분하자 다시 맹휴를 전개하였다. 1923년 3월 광주농교에서는 3년 학제가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있자 5년제로 승격할 것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이 전개되었다.
1924년 6월 광주고보와 재광 일본 선발팀간 야구 경기에서 우발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고보 일본인 교장의 의뢰로 관련 학생이 경찰의 취조를 받자, 이에 4백여 명의 학생이 항의하였고 교장은 전교생의 무기정학을 선언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였고, 학부형들도 대회를 통해 도민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맹휴는 9월에 수습되고 맹휴를 주도한 5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27년 5월 광주고보는 물리 화학교실의 신축 등 시설 개선을 요구하며 맹휴를 전개하였다. 시라이 교장이 이를 수용하여 맹휴가 마무리되었다.
1928년 3월 광주고보 5학년 학생인 이경채가 ‘자본주의 사회 파괴’ 등을 기재한 선언서를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 앞 전주 등에 붙였다가 6월 체포되었다. 학교 측이 형이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이경채를 권고 퇴학시키자, 학생 대표들이 해명을 요구하고, 학부형회의에서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학교 측이 이들을 근신처분하자 6월 26일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맹휴에 돌입하였다. 이에 학교는 27명을 퇴학시키고 281명을 무기정학시킨다. 1928년 6월 29일 광주농업학교에서도 맹휴에 돌입한다. 이는 고보 맹휴에 대한 동조 맹휴의 성격이 강하였다. 학교 당국은 12명을 퇴학시키고 102명을 무기정학시킨다.
이에 광주고보를 중심으로 맹휴 중앙본부를 결성하고 학부모 통고문을 보내고 교우에게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교장에게는 맹휴학생일동의 명의로 규탄서를 전달하기도하였다. 이를 지원하여 동경에서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우회 명의의 항의문과, 재동경 광주고보 졸업생의 항의문이 발송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맹휴는 9월에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에도 광주고보 학생들의 저항은 계속되어 1929년 3월 졸업식에는 맹휴 주도 학생의 무더기 퇴학에 항거하여 격문을 살포하고 270여 명의 전교생이 교장실에 몰려가 면담을 요구하고 유리창을 파괴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해산하였다. 이후로도 5, 6월경에는 화장식 벽 등에 ‘조선독립만세’, ‘조선 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전선적으로 맹휴하자’ 등의 낙서 등이 나붙었다. 11월 3일은 느닷없이 오지 않았다.
3. 우연한 사건(?), 조직적 대응(!)
(1) 한-일 학생간의 갈등
눈을 돌려보자 1920년대의 광주-나주의 풍경과 학생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학생 운동의 폭발은 독서회 등 지도부의 의식적인 노력, 의식적인 동맹 휴학 제안으로만 성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반 학생 대중의 광범한 동의가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를 잘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 소개한다.
1924년 봄 본정통(지금의 충장로)의 일본인 양화점에서 사소한 시비(?)로 격투가 벌어졌다. 발단은 일본인 주인이 구두를 제작, 판매하면서 같은 가격에도 조선인 학생에게는 질이 낮은 상품을 판매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광주고보생이 항의하자, 양화점 옆 식료품점의 일본인이 가세하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의 격투가 벌어졌다. 일본인이 기마경찰대를 부르면서 조선인 학생의 반일 감정은 더욱 심화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6월 광주고보 대 재광 일본 선발팀의 야구 경기는 집단 충돌을 넘어 맹휴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지만, 그 안에 내재한 민족적 차별에 대한 저항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저항 의식이 독서회 지도부와 만나 조직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나주-광주 간 통학 열차로 가보자. 당시 광주고보 학생의 1/6, 광주중학교 학생의 1/4가 나주-광주 열차로 통학하였다. 나주 지역에서 통학하는 일본인 학생은 지주, 상인, 공무원의 자녀들이었다. 조선인 학생의 경우 주로 중소지주층의 자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주-광주 간 통학을 하는 학생은 지역에서 인정받는 영재라는 자의식과 식민지 조선인 학생이라는 피해의식이 혼재해 있었을 것이다. 복선형 학제로 광주 중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상호 간의 경쟁의식이 강렬하였으며, 광주고보의 시설, 교육에 대한 불만도 컸다. 앞서 확인하였던 1927년의 동맹휴학은 그러한 불만을 잘 보여준다.
1929년 6월 나주-광주 간 아침 통학 열차가 운암역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운암역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들이 개를 잡아 불에 그슬리는 것을 본 광주 중학 학생인 곤도가 ‘야만이다’하고 중얼거리자, 이를 들은 광주고보생이 ‘야만이란 무슨 뜻이냐? 조선사람을 가리켜 야만인이라 한 것이냐? 이것은 조선인 전체를 모욕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들은 광주중학의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은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고 광주고보의 교장에게 통보하였다. 그날 오후 하교 열차에서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곤도가 구타당하게 된다. 곤도는 나주경찰서장의 아들이었다. 이후 두 학교는 교사를 승차시겼고, 경찰에서도 형사를 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도록 하여 표면적으로는 무마되었다. 그러나 한-일 학생 간의 응어리는 감정은 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1929년 11월 3일의 충돌은 예비된 것이었다.
(2) 11월 3일
1929년 10월 30일 나주-광주간 통학열차를 탄 학생들이 하교하여 나주역에 도착하여 하차하였다. 이때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인 학생들이 박기옥, 이광춘, 암성금자 등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였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가 후쿠다를 힐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으로 말하자 박준채는 후쿠다를 구타하였다. 이를 본 일본 순사가 박준채 만을 때리자 광주고보생들이 순사에 항의 하였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아침에도 시비가 붙었으나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다. 31일 오후 하교 열차에서는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차장은 이들을 말리고 박준채와 후쿠다 등을 2등실로 연행하였는데, 2등실의 승객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후쿠다를 두둔하고 박준채를 비난하였다. 같은 칸에 탔던 당시 일본어 신문 광주일보사 기자 또한 후쿠다에게만 경위를 취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모두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를 끓게 만들었다. 11월 1일 하교 시간에는 다툼이 통학생 전체로 번져 집단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양측 교사의 제지로 충돌을 피하였다. 이 시기 일인 학생 학부형들의 요청으로 광주중학교 교사가 1개월간 영산포 여관에 숙박하며 학생들과 통학하였다고 하니, 당시 이 지역의 위기감이 컸음을 느낄 수 있다. 11월 2일 학교 주변에는 항일낙서가 학교 곳곳에 나타났다. 충돌은 없었다.
11월 3일 명치절이자 전남지역 산잠 6만석 돌파 축하연으로 광주 시내에는 인파가 붐볐다.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을 위해 등교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개천절이기도 하였다. 기념식 후 신사(현 광주공원) 참배를 하도록 하였다. 11시 경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일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이 충돌하였고, 조선인 학생 최상을이 일본인 학생의 칼에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조선인 학생이 가세하자 수세에 몰린 일본인 학생이 광주역(현 동구 소방서)전으로 물러났다. 한편, 편파적인 보도를 한 광주일보(현 전일빌딩)에 항의하여 조선인 학생들은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한일 학생들은 광주역전으로 몰려가 집단 난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숫자가 늘어나 광주중학교 100명, 광주고보, 농교생 약 400명으로 일본인 학생이 밀리면서 성저리의 토교에서 대치하였다. 교사들의 만류와 경찰들의 해산 요구에 장재성이 학교에 모여 선후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하자 조선인 학생 300여 명은 광주고보 강당으로 모였다.
(3) 조직적 대응!
고보 강당에 모인 학생들은 관련 학생들의 경과 보고를 듣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여러 급진적 제안 속에 독서회원인 오쾌일이 행동방침의 원칙을 제안하고, 시내로 재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회의 자리에는 장재성도 참석하여 당일 시내 재진출은 독서회의 주도 속에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교가와 응원가,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등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하였다. 광주 시가를 한 바퀴 돈 시위대는 다시 강당에 모여 이후 연락 방법을 논의하고 방면 별 소대를 편성하여 해산, 귀가하였다.
학교는 임시 휴교를 단행하였고, 경찰 당국은 시위 주동학생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한편 장재성은 전남청년연맹 간부인 장석천, 강석원 등과 만나 시위 선후책을 논의하고 검거 학생 석방을 위해 재시위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격문 전단 4천 부를 인쇄하고 12일 수업 개시일에 맞추어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당시 격문의 표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궐기하라!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
가) 우리 투쟁 희생자를 우리들의 힘으로 탈환하자! 나) 검거자를 즉각 석방하라! 다) 교내 경찰권 침입을 절대 방지하라! 라) 수업료와 교우회비를 철폐하라! 마)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자! 바)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획득하자! 사) 직원회의에 학생대표를 참석시켜라! 아)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자)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차)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11월 12일 첫째 수업시간 종이 울리자,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들을 구하라’는 구호를 신호로 광주고보 전교생이 시가투쟁에 돌입하였다. 이때는 광주여고보, 사범학교는 학교 당국의 적극적 통제로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광주농교에서도 10수 명이 참여했으나 긴급 출동한 경찰대에 포위되어 참여하지 못하였다. 2차 시위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나 28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학교는 다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 사이 학생 시위는 전남으로 확산되고, 서울 시위가 일어나면서 전국화된다. 1930년 1월 8일부터 광주에서는 개학과 함께 기말시험이 시행되었다. 학생들은 다시 백지 동맹을 결의하여 광주고보는 17명의 학생이 퇴학당하고, 여고보에서도 2명이 퇴학당하고 17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다시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획하다 광주고보생 48명이 퇴학처분을 받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여고보는 64명의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11월 3일 오후를 넘기면서 광주 학생 운동은 우발적 충돌을 넘어 조직적 항일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4)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11월 3일 시위가 발생하자 서울의 각 사회단체는 진상조사를 위해 조사원을 파견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11월 6일 광주로 내려와 진상을 파악하고 시위운동을 전국화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한편, 신간회에서도 허헌 등이 11월 8일 광주에 내려와 향후 계획을 협의하였다. 11월 12일 시위 이후 보도 통제로 시위의 진상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조선인 학살’ 등의 소문이 나돌면서 비상한 관심이 확대되었다. 시위는 먼저 목포와 나주로 퍼졌다. 11월 10일 목포 상업학교 학생들이 장재성과 면담하고 19일 50여 명의 학생이 적기를 앞세우고 태극기, 격문을 뿌리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11월 27일에는 나주에서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다. 장날을 기해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학생 130여 명이 시내로 행진하여 ‘조선민중만세’, ‘조선학생만세’ 등의 구호를 고창하였다. 서울에서의 시위는 학생 운동이 전국화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표면 단체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 두었던 학생전위동맹은 격문살포와 시위 계획을 추진한다. 한편 조선청년총동맹도 11월 16일 상경한 장석천과 협의하고 신간회, 사상,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이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로 하였다. 일제는 이를 포착하고 시내 사상, 청년 단체 간부 등 127명을 검거하고 격문 8,000매를 압수하는 등 검거에 혈안이 되었으나 12월 5일부터 14일까지 30여개의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에서 1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맹휴에 참가하고 총 1천 4백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휴교, 조기 방학했던 학교들이 1월 7일 개학을 맞자 또다시 서울 지역에서는 연합 시위를 전개한다. 서울의 시위가 알려지고 각 지역 사상, 청년 단체가 조력하면서 1930년 1월부터는 학생 시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 통계를 살펴보면 퇴학 학생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462명, 참가학교 194개교, 학생 수 54,000여 명이다. 국내의 학생 운동은 식민지 조선을 넘어 해외로도 확산되어 상해, 북경, 천진, 만주, 일본, 연해주, 미주로까지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4. 나오며 - 기념식 : 기념일 투쟁 1945년 해방 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이 전개되었다. 1953년 10월 30일 문교부령으로 ‘학생의 날’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지정한 민족의식 앙양을 위한 ‘학생의 날’은 6.25전쟁과 맞물리면서 정부가 지향하는 민족의식은 ‘반공’의 민족의식임을 알 수 있다. 1956년 12월에 학생의 날을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의 날’은 학생들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1970년 11월 재경 광주학생운동 기념행사추진위원회는 전국대학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서울대 법대학생회는 학생의 날 기념토론회를 통해 학생의 기본권, 학생군사훈련 강화 등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1971년에는 전국대학생연맹이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전국적 봉기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학생의 날’을 통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교육, 학생 관련 기념일을 통폐합 한다는 명분으로 각종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학생의 날을 제외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학생의 날을 즈음한 학생들의 반민주 투쟁은 계속되었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독립유공자협회 등의 ‘학생의 날’ 부활 요구를 받아들여 다시 기념일로 지정한다. 이후 ‘학생의 날’은 1929년 광주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날로 자리 잡혔으며, 한편에서는 역사적 주체로 학생의 위치를 재삼 확인하는 날로 의미가 지워지게 되었다. 2006년 학생의 날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뀐 것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1984년 부활한 ‘학생의 날’은 뚜렷한 추진 주체가 없이 광주광역시교육감이 주관해 광주지역의 일부 유족과 학생들이 참가하는 초라한 행사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고, 명칭 변경 이후 교육부총리가 주관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다. ‘11월 3일’이 화석화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학생의 날’은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으나,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명칭 규정은 ‘11월 3일’을 과거에 매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실제로 단위 학교에서는 명칭 변경 이후,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경건하게’ 치를 것을 학생, 교사에게 요구하고 있다. 틀에 박힌 ‘경건’은 화석화에 다름 아닐 것이다. ‘11월 3일’을 어떻게 새롭게 불러낼 것인가? 학생의 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글도 비교적 예전의 것이지만,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한 우금치 기념사업에 참여한 지수걸 교수의 글에서 시사하는 바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일제의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과거와 현실을 대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이른바 ‘기념투쟁’을 중시했는데, 일제 경찰이 만들어 배포한 이른바 「사상운동 경계력」에 따르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이 중시했던 기념일은 ① 1월 21일(레닌 사망일), ② 3월 1일, ③ 3월 2일(코민테른 창건일), ④ 3월 15일(2차 일본 공산당 검거일), ⑤ 4월 17일(조선공산당 창건일), ⑥ 5월 1일, ⑦ 5월 30일(상해 반일운동 기념일), ⑧ 6월 10일 <하략> 등이었다고 한다. 이런 날이 다가오면 민족해방운동 주체들은 투쟁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경건한 기념식과 함께 민속놀이나 체육대회, 노래공연, 대자보 게시, 격문 배포, 기념 집회, 시위 등을 전개했다. 이 같은 ‘기념투쟁’은 계급적 혁명적 관점에서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 달리 말하면 ‘역사적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기념행사는 특권화된 역사상을 의례적으로 반추하는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민중들의 생활요구나 정서를 반영한 민중 주도의 ‘기념(일)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같은 ‘기념투쟁’을 통해서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민중투쟁의 새로운 ‘상징’이나 ‘전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역사 만들기’는 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을 찾고 가꾸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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