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혁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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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그룹 에픽하이의 래퍼 타블로(본명 이선웅)의 학력위조 논란이 네티즌과 론의 대립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타블로의 학력위조 논란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학·석사 과정을 3년 6개월 만에 마쳤다고 주장해왔던 타블로가 지난 4월 학력위조를 주장하는 네티즌을 고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학력위조가 드러나기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타블로와 같은 유명 인사들은 여러 분야에서 능력 있는 인물로 칭송받지 않았는가? 바로 똑같은 언론들로부터 말이다. 그런데 단지 학력논란으로 인해 갑자기 그를 ‘능력 없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당하고 있다.

결국 역설적으로 증명된 것은 ‘학벌’과 ‘능력’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고졸자가 대졸자나 박사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학벌’이 능력을 평가하는 유일하게 공인된 장치라고 선전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학벌제도란, 부유한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반면 가난한 노동자 민중은 주변부로 밀려나 착취당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학벌제도를 바탕으로, 부자의 자식들은 ‘일류대를 나온 엘리트인 내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며 지배를 정당화하려 한다. 반면 노동자의 아들딸들에게는 ‘학력이 낮은, 능력 없는 우리는 당연히 지배받아야 한다’는 순종의식을 불어넣는다. 빈부격차가 교육격차를 필연적으로 낳는 상황에서, 학벌제도는 결국 부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할 뿐이다.

따라서 핵심 문제는 ‘유명인들의 작은 사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학벌제도의 거대한 사기’다. 이번 사건은 학력위조자들을 희생양으로 처벌해 자본주의 위계질서를 보호하려는 가엾은 시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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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삼성의 어둠'을 얘기해야 할 때

김상봉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의 판매 부수가 10만 부를 넘길 때가 머지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삼성 내부의 비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폭로의 대상인 삼성과 이건희 일가로부터 아직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허황된 거짓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김 변호사의 책을 읽고 단지 삼성의 비리에만 분노한다면, 아직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삼성 말고도 다른 모든 기업이 비리를 저지를 것이다. 문제는 삼성이 단순히 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집단이 지금 한국을, 아니 바로 우리들을 보이지 않게 지배한다는 데 있다.

외환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에 한국 사회는 심각한 변화를 겪었다. 심리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너나 가릴 것 없이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사회적으로도 자본 또는 기업이 한국 사회의 지배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그토록 노예적으로 돈을 숭배하는데 어떻게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은 그런 현실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정확한 말도 아니었다. 그가 좀 더 정직했더라면 시장이 아니라 삼성이 지배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자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지배한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무도 남을 지배할 수 없다. 모든 권력은 불평등하게 집중된 힘에서 생겨난다. 자본 권력 역시 자본의 불균등한 소유로부터 생겨나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더 커진다. 삼성의 자본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엄청나게 불어나 이제 다른 모든 기업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우리 사회는 속속들이 기업화되어 대통령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를 자처할 정도로 국가 전체가 가히 기업 국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기업이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니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기업이 주는 일자리는 인간의 삶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도구 삼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던지는 미끼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기업은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종업원들이 선거로 사장을 뽑는 재벌 기업을 보았는가?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고 기업화된다는 것은 국가가 독재 국가가 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이다. 기업 국가는 기업 독재 국가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5년에 한 번씩 국가의 CEO를 선출한다. 하지만 그는 유감스럽게도 바지사장일 뿐이다.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장님'은 따로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이 자기 혼자만을 위한 대통령 특별 사면을 받아내고 동계올림픽 선수단 환영 만찬장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 같이 앉은 모습이야말로 바로 그런 권력 구조의 극명한 상징이다. 선출된 권력 이면에 선출되지 않은 자본 권력이 군림할 때, 나라의 민주주의는 근본에서부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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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삼성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삼성만 갖고 그러는가? 다른 재벌 기업들이 아니 다른 중소기업들이 삼성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40년 전에 왜 '박정희'만이 문제인가, 모든 군인들이 또는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다 같이 나쁘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물음이었던 것과 같다. 박정희 씨를 제거하고서야 유신독재가 끝날 수 있었고,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추방한 뒤에야 비로소 신군부의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그 권력에서 추방하지 않고서는 기업독재를 끝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지금 재벌 기업이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의 군부와 같다면, 삼성은 군부의 실세였던 하나회와 같고, '회장님'은 '각하'와 같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는 삼성이 재벌 기업이라서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부유한 자본가라는 이유 때문에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더 나아가 무작정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나 시장경제가 타도되어야 할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건희 전 회장이 빌 게이츠 씨 같은 자본가였더라면 우리는 그가 아무리 부자라도 단지 그 때문에 그를 비판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건희 일가를 삼성으로부터 추방하고 삼성을 종국에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이 단순한 기업 집단도 자본가도 아니고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인 정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나라 경제를 살찌우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우리 모두는 그런 기업을 사랑하고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그 자본을 이용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온갖 불법을 일삼아 저지르며, 그것도 모자라 공직자들을 매수하여 국가 기구 전체를 부패에 빠뜨리고 마지막에는 나라의 공공성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에 이른다면, 이제 그런 기업, 그런 자본가는 타도되어야 할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삼성의 모든 타락상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업이 저지르는 불법이 아니라 삼성의 특권적 권력에서 비롯된다. 삼성의 권력이 삼성을 다른 기업과 다른 방식으로 반사회적인 기업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이며 이건희 전 회장이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라는 조사들을 우리는 심심찮게 보지만, 과연 이런 경우 사람들은 존경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것일까?

삼성이 얼마나 반사회적인 기업인지 알려면, 주변의 장애인 친구에게 삼성이 장애인 2퍼센트 의무 고용을 얼마나 지키는지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것을 또 어떠한가? 3년 전 태안 앞바다에서 삼성물산 소속의 배가 인천대교 건설에 투입되었던 해상 크레인을 끌고 가다 가만히 있는 초대형 유조선을 들이받아 충남 서해안 일대를 죽음의 바다로 만들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삼성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삼성답게 먼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항해 일지를 조작한 일이었다. 지역 해양청이 충돌 위험을 무선으로 알렸는데도 그런 경고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그리고 전 국민 수십만 명이 태안 앞바다에서 손으로 기름을 닦고 있을 때, 삼성은 마치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다가 사건 50일이 지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삼성은 앞으로는 사과하는 시늉을 내면서 뒤로는 배상액을 50억 원으로 제한해 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법원도 한 통속이어서 올해 1월 24일 서울고등법원은 삼성의 편을 들어 태안 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에 대해 삼성이 이미 공탁해둔 56억여 원 이외에는 더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액수는 삼성이 퇴직한 김용철 변호사의 차명계좌에 본인도 모르게 넣어 둔 돈 52억보다는 조금 많은 돈이지만, 삼성건설이 지은 서울 강남 타워팰리스의 큰 평수 아파트 한 채 값도 안 되는 돈이다.

삼성전자의 2009년 영업이익이 11조 원에 가까웠던 것을 생각하면 56억 원은 주머니 속의 동전에 불과하다. 그런데 천문학적 비자금을 쌓아두고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을 대선자금으로, 공직자 뇌물로 쓰면서도, 자기가 책임져야 할 사고에 대해 배상할 돈은 없는 기업이 삼성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삼성을 감정적으로 혐오하게 만들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모든 독재 권력이 그렇듯이 삼성은 국가 권력과 법질서의 통제 밖에 있다. 삼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공직자를 매수하고, 이것 역시 불가능할 경우에는 대놓고 법을 무시한다. 분식회계 장부가 법원에 넘어가자 법원 직원을 매수하여 서류를 빼돌려 불태우는가 하면,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삼성직원이 가로채 도망가면서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몇 천 만 원 벌금으로 모든 불법을 덮어 버린다.

하지만 삼성이 일삼아 불법을 저지른다 해서 우리가 삼성을 일종의 조직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사태를 오해하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는 그것이 탈법과 비리를 일삼아 저지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기구 자체를 이윤 추구의 도구로 삼고, 국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모든 공공적 기능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데 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의 하나이다. 이를 위해 많은 나라들이 이념의 차이에 관계없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공적인 사회 보장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의 보장 범위를 확대하려 할 때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기업이 삼성생명이었다. 국가가 다 보장해주면 삼성생명은 보험을 팔아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삼성이 꿈꾸는 세상이란 부자들은 감기만 걸려도 삼성병원 특실에서 황제처럼 대접받고 가난뱅이들은 죽을 병이 걸려도 동네병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고 앓다 죽는 세상, 부자들은 외국산 수입 생수로 집안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가난뱅이들은 재벌 기업이 운영하는 비싼 수도 요금을 내지 못해, 화장실과 부엌에 수도가 끊어져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빗물을 받아먹어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악몽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더 늦기 전에 삼성을 해체해야 한다. 우리가 박정희,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쫒아 내고 군부의 권력을 해체한 뒤에야 비로소 시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처럼, '회장님'의 권력을 박탈해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삼성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결코 기업 독재를 끝낼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자식들은 재벌 기업의 머슴으로 종노릇하는 운명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삼성 제품 불매는 자본의 독재, 삼성의 독재를 끝내기 위한 대장정의 첫 걸음이다. 유명무실한 삼성 특검 수사와, 대다수 범죄 행위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려줌으로써 요식 행위에 그친 재판과, 그 재판을 통해 내려진 법의 심판조차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린 최근의 특별 사면을 통해 분명해진 것처럼, 국가기구는 더 이상 삼성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미 삼성에 매수되어버린 국가 기구가 삼성이 온전한 기업이 되도록 만들어 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회장님의 비서가 회장님의 불법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소망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삼성을 해체하고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소비자뿐이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말은 공치사가 아니다. 화폐가 자기 증식 운동을 시작하면 자본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자본은 결코 저 혼자 불어나지는 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의 지갑을 털어 불어나는 것이다. 국가가 없다 하더라도 자본은 자기 증식할 수 있다. 

자본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까닭도 본질적으로 보자면 그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소비자가 없다면 자본은 절대로 혼자 증식할 수 없으며,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자본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노동자들과 소비자들밖에 없다. 하지만 삼성엔 노동조합이 없다. 삼성이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더 사악한 반사회적 기업이 된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안팎으로 아무런 견제가 없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도 노동조합도 삼성의 불법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직접 행동뿐이다. 삼성의 권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소비자들에게 자기 제품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 모든 자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하여 아무도 삼성 물건을 쓰지 않는다면 그날로 삼성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삼성은 주방용 가전제품부터 안방의 청소기, 사무실의 전화기와 컴퓨터, 가방 속의 노트북과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 그 속의 반도체 그리고 지갑 속의 신용카드, 생명보험과 자동차보험 등,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제공한다. 만약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삼성제품으로 채운다면, 마치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우리 모두 삼성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삼성제품을 거부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버릴 것은 수도 없이 많이 널려 있다.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해약하고 해지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하자. 지구 위에 생명체가 등장한 뒤에 모래알처럼 작은 개미들은 영원히 살아남아도 공룡이 멸종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게다가 삼성이란 공룡을 멸종시키기 위해 우리가 엄청난 노고를 쏟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하지 않으면 된다. 삼성 제품을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하는 일은 어려워도 하지 않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하던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마음을 바꾸는 일뿐이다. 우리의 삶을 삭막한 사막으로 만드는 것도, 푸른 초원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삼성이 어떤 기업인지 그 실상을 깨닫고 삼성에 대한 맹목적인 애착과 삼성의 권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생각하면 이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더 좋은 제품을 사용하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소비자의 권리라 생각한다. 이 기준에서 보자면 삼성은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기업임이 분명하다. 제품의 품질은 물론이고 저녁 시간에 냉장고 수리를 신청했더니 두 시간 반만에 고쳐줄 정도로(<한겨레> 3월 9일자 김선주 칼럼) 완벽한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완벽한 서비스의 이면에 그만큼 완벽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통제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톱니바퀴로서 도구화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아무 불편 없이 저녁을 준비할 수 있도록 나의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노동자가 자기 가족과의 저녁 식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와 소비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윤리이다. 단순히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나 개인이 느끼는 만족이 아니라 그 제품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전 과정이 얼마나 정의롭고 자연 친화적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것이 소비자로서 제품 선택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 불매 운동이란 단순히 외적 억압과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의 탐욕 및 아집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철학자가 삼성 불매 운동의 선두에 나선 까닭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전환은 결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비싸더라도 유기농 농산물을 선택하고 공정 무역 커피를 구매한다. 아마도 거기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보다 좋은 것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개인적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려 하는 인간의 선한 의지이다. 그런 선한 의지에 의해 우리의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해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삼성을 해체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중을 위해 남겨두려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한국의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재벌 경제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과제라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나중에 삼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하기 전에 무조건 삼성 제품을 불매함으로써 삼성의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즉시 시작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 타도'가 무조건적인 대의였으며, 전두환 독재 치하에서 그 독재자의 제거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선결 문제였던 것과 같다. 그렇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삼성 불매를 통해 삼성과 이건희 일가의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역사적 과제라고 우리는 믿는다.

어떤 경우이든, 분명한 것은 박정희 씨가 죽었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았듯이 삼성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쓰지 않고 다른 회사 제품을 쓴다 해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나라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이제 우리, 삼성은 더 이상 아니라고 말하자. 그리고 삼성 제품을 쓰지 않는 것이 고상한 인간의 품위와 교양의 징표가 되게 하자.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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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배 (진보신당 20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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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황정음 역)이 다니는 서운대를 숨기기 위해 새벽부터 싸인펜을 들고 자신이 나온 서운대 버스광고판 얼굴에 ‘낙서’을 해야만 했던 지붕하이킥 보셨어요? 

이번 6월 2일 지방선거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13,14일 본선에 뛸 후보들이 등록을 마치면 더욱 더 뜨거워 질 것이다. 이런 와중에 유시민 국민참여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김진표 민주당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구여권 단일후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리는 기사들을 보는 중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있다. 바로 경쟁후보들의 인연을 부각시키는 기사다. 한나라당의 김문수 후보,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와 서울대 동문이라는 것. 어느 언론사는 이에 더해서 ‘고대 출신의 안동섭 민주노동당 후보가’ 라며 ‘SK(서울대와 고려대)’의 대결이라는 걸 알리고 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학벌들의 대결이라는 것.

정말 무게 없고 후보를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않음에도 이런 기사들은 큰 폐해를 낳는다. 정치인과 일반인은 다르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들이 정치의 무관심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자들은 알아야 하고 이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또한 후보를 삶과 철학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학벌로 평가하게 되어 돼먹지도 못한 놈이 떵떵거리며 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실제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런 폐해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큰일을 할 깜냥이 되지도 않으면서 학벌 하나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학벌네트워크를 공고히 하고 또 자기들이 필요할 때 이걸 사용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 학벌네트워크에 들어갈 수 없고 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한 세대인 20대의 모습을(한 마디로 ‘중복 피해’를 보는) 제대로 보여준 드라마 주인공이 있다면? 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난 『지붕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을 뽑고자 한다.(아! 벌써 ‘뭐가 그래’라는 반론이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혹자는 현실성 없는 등장인물이라고 혹평했다고 한다. 하지만 황정음 만큼 현실 속 다수의 20대를 표현한 등장인물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스펙을 늘리기 위해 죽어라고 공부하고 겨우 취직한 회사에서의 반 인권적 행위에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장면, 너무나 힘든 삶 속에서 받는 사랑이 부담스러워서 그 사랑을 거부하고 아파하는 장면을 보며 공감하지 못한 사람은 누가 있었을까?

이런 그녀에게 학벌은 하나의 콤플렉스였다.(비록 이에 대한 사연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서운대’ 아니 ‘서운하다’라는 말에도 놀라야 하는 그녀의 모습은 좋은 대학에 다니지 못해 피해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 좋은 대학으로 편입하려 준비하는 대학생들을 보는 거 같다. 또한 황정음이 서운대 출신이라는 걸 알고 과외를 끊어버린 (필요에 따라서 물리적 진압까지 이용한) 이현경은 학벌이란 기준에 사로잡혀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 어르신들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다행히 시트콤 속에서 황정음은 취직에 성공했고 팀장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험난한 사회와 싸워 이겼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20대의 대다수는 아직도 출신이나 재학 중인 대학이란 주홍글씨에 시달리고 있다. 언제 쯤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학벌이란 편견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사회에 대한 ‘서운함’은 커져 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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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전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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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시험인 법학적성시험(LEET)을 치르기 위한 모의시험을 마친 응시자들이 시험장을 나서고 있다.

우리사회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시행 된지도 2년이 되어간다. 로스쿨제도는 기존의 사법시험을 대체하여 법조인을 선발하여 양성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대학 졸업자 중 매년 2000명을 선발한다. 선발된 로스쿨 재학생은 3년간의 엄격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변호사시험을 통해 변호사로서의 자질을 검증받고 변호사로 활동하게 된다. 로스쿨과정을 거친 법조인은 2012년 처음으로 사회에 배출될 예정이다. 기존의 사법시험은 2016년까지 단계적 축소를 거쳐 폐지된다.

현재 1기 입학생의 경우 작년한해동안 기초법학을 이수하였고, 다가올 2학년 여름방학동안 법원, 검찰청, 로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무연수를 가질 예정이다. 2기의 경우 기초법학을 들으면서 법률가로서 초석을 다지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로스쿨은 2009년 첫 개원이 후 성공적인 로스쿨제도의 정착을 위해 내부적으로 정부, 교수, 학생간의 끊임없는 토론과 논쟁을 거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발과정의 공정성이나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진입장벽의 문제 등 아직 개선해야 할 점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로스쿨 제도에 있어 기대되는 긍정적 측면을 살펴보고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강의의 질적 향상의 측면 -교수법, 학생과 커뮤니케이션

로스쿨이 시행되면서 기존 법대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동일한 수업을 듣는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로스쿨 수업을 들어보니 기존의 법대 수업과 달리 교수님들의 교수법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그간의 법대수업은 교수에서 학생으로의 일방적 전달방식이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법대 학생들이 수업을 등한시하고 신림동 강의에 의존하는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로스쿨이 시행된 이 후 새로운 제도에 발맞춰 교수 스스로 학생들의 지적수준에 부합하는 교수법을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학생들이 수업내용을 잘 이해하고 따라오는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기존 법대수업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학생들 역시 비싼 등록금을 내는 만큼 그에 부합하는 질 높은 수업을 듣기를 요구하고 과거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로스쿨이 기존 법대보다는 더 나은 방향으로 교육의 질이 향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 양성 측면

로스쿨 제도의 취지자체가 기존의 획일적인 법조인 양성 시스템을 탈피하기 위한 게 주요한 것인 만큼 로스쿨 재학생의 출신은 실로 다양하다. 인권운동가, 기자, 공무원, 펀드매니저, 군인, 공학박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들은 앞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에 법적 지식을 더해 특화된 변호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몇 년 뒤에 그들이 사회에 진출한다면 법적 분쟁에 특화된 전문변호사가 대거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민들 역시 자신의 분쟁에 특화된 전문가를 통해 전보다 질 높은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투명하지 못한 선발과정

로스쿨제도 도입으로 법조인 양성 과정의 많은 부분들이 변화했지만 아직 개선되어야 할 점들이 산재해 있다. 그 첫 번째가 입학과정에서 불투명성으로 인하여 수험생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이다. 로스쿨을 입학하기 위해서는 1차로 법학적성시험(LEET), 공인영어점수, 학점이 필요하고 2차로 논술, 면접, 기타 경력사항 등이 점수에 반영된다. 그러나 많은 대학들이 그 구체적인 요소별 반영비율을 밝히기 꺼려하고 있어 수험생들은 자신의 실제 점수가 몇 점인지 조차도 알지 못한 채 로스쿨에 지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사설 학원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입시설명회를 열어 학생들을 유인하는가 하면, 인터넷 카페에서는 추측성 글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로스쿨 입시는 미래 우리 사회의 법조인을 선발하는 제도이다. 따라서 이들이 공정하고 투명한 과정을 거쳐 뽑혀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로스쿨의 취지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재를 법조인으로 선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LEET나 영어점수와 같은 정량평가보다는 수험생의 전체적인 자질을 보는 정성평가 비율이 늘어야할 것이다. 즉 선발 주체인 각 로스쿨들이 로스쿨의 취지에 벗어나 학생의 잠재력을 보지 않고 훗날 변호사 시험을 잘 볼 것 같은 시험선수들만을 가려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로스쿨도 하나의 교육기관으로써 한국사회의 대학들처럼 입시에 매달리기보다는 재능 있는 학생들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보다 나은 법조인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한다.

비싼 등록금과 장학혜택의 부족

현재 로스쿨의 한해 평균 등록금은 1,400만 원 정도이다. 이에 더해 3년간의 생활비와 그동안 직장을 다니지 못한데 대한 기회비용까지 생각한다면 경제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법조인이 되기 어렵다. 이러한 높은 등록금은 비단 로스쿨 재학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선 앞으로 법조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높은 등록금의 벽 앞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고 이는 소위 ‘가진 자’만이 법조인이 되는 기회의 불평등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크다.

이에 따라 로스쿨에서의 장학금 비율을 확충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정부학자금 대출을 확대 시행하여 대출금 및 이자 상환을 유예해 주는 방안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로스쿨 선발과정에서 사회적 취약계층 비율을 확대할 필요성도 있다. 첫 입시에서 10%이던 사회적 취약계층 선발 비율을 일부대학의 경우 2기 선발에서 5%로 축소하였다. 기존의 사법시험에 비해 사회적 취약계층의 법조인 선발을 늘리자는 로스쿨의 취지를 고려할 때 이러한 선발 인원을 다시 늘려야한다. 이렇듯 진입장벽을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동반 될 때 로스쿨이 ‘그저 가진 자들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제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법조윤리의 교육의 부족

최근 논란이 되었던 ‘검사 스폰서’사건이 시사하듯 법률가는 높은 윤리의식과 공정심을 가지고 직무에 임해야 한다. 따라서 로스쿨에서는 법조인으로서 바람직한 인적 소양에 대한 교육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로스쿨 교육과정에서 이와 관련한 과목은 ‘법조윤리’ 한 과목과 외부인사 초청특강이 전부로써 그 비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기존 사법시험 제도에서의 법조인 특권의식이나 윤리의식의 부족이 로스쿨제도 하에서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의 원인은 변호사시험 수험과목에 비중을 두는 수업과정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법조윤리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육당국과 학생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커리큘럼 및 현장교육에 법조윤리 부분을 더 강화하여 법조인으로서의 높은 윤리의식을 함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로스쿨 제도의 문제점들뿐만 아니라 한해 전국적으로 2000여명의 로스쿨 정원이 공익의 차원에서 적정한가에 대한 논란, 수도권 출신의 학벌을 가진 지원자들이 지방 로스쿨을 잠식하는 문제, 법조계의 서열문화를 로스쿨이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등 더 숙고해야 할 많은 쟁점들을 로스쿨이 안고 있다. 이러한 쟁점들이 비단 필자와 같은 재학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12년이면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가 활동하기 시작하며 2016년 사법시험이 폐지되면 로스쿨을 통해서만이 법조인을 배출하게 된다. 로스쿨이 사회에서 법조인 양성의 핵심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스쿨제도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한편 올바른 법조인을 양성해 국민들이 질 높은 법률지원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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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주영 (신광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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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한국인 강제징용노무자들의 미불임금 내역 등이 담긴 공탁금 자료를 주일한국대사관을 통해 전달한 가운데 7일 오후 서울 외교통상부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양금덕(82) 어르신이 우리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있다.

“배주영 샘은 왜 이렇게 바빠~?”

쉬는 시간 전화를 돌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며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나에게 옆 선생님이 말을 건넨다.  

“아 네~ 제가 투잡을 하잖아요~^^”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 사무차장이라 한다. 어떤 직책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보거나 누군가에게 소개해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그런 인사가 무척이나 쑥스럽고 어색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듯하다. 그렇다 나는 현재 중학교 교사이고, 2009년 3월에 출범한 시민모임의 사무차장이다.

2008년으로 기억한다. 광주인권영화제에서 우연히 본 <열 네 살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들>이란 영화는 역사적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문제가 지금의 문제임을, 과거의 사실(史實)이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고통임을 너무도 아프게 가르쳐 주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광기로 치닫고 있을 1944년에 전시 노동력 보충을 위해 동원한 여성 노동자들을 이야기한다. 당시 그들의 나이 불과 13~15살. 일본에 가면 중학교에 갈 수 있다, 돈도 벌 수 있다라는 말에 부분 희망을 품고 일본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책상과 공책이 아니었다. 그들은 감금 상태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하루 10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온갖 학대와 배고픔, 외로움을 견뎌야했다. 약속했던 임금은 한 푼도 없었다. 해방이 되어 돌아온 조국에서도 그녀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는 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 일본에 갔다온 여자라는 이유로 이들은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들의 아픔을 함께 감싸안고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 20여 년 전 일본의 나고야 지원회 사람들이었다.

역사를 가르치고 산다는 내게 영화는 커다란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영화를 함께 본 많은 사람들이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공감을 했고, 자연스럽게 광주에서 그 분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 사회에서 철저히 잊혀지고 버려졌던 문제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의 20여년이 넘은 운동의 결과 이 곳 광주에서도 답을 하게 된 것이다. 한참 늦은 발걸음이지만, 양국의 평범한 시민들이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간에 주목하고 함께 평화를 얘기하고 연대를 고민하게 됐다는 점이 참 소중하다.

그렇게 참여한 시민모임에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 안이라는 매우 안정된 그렇지만 틀에 박힌 공간을 벗어나 다양한 생각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서 난 참 많은 것을 느낀다. 시민모임에는 소위 ‘운동’의 전문가가 없다.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열심히 살아낸 사람들이 부끄러움에서 시작한 발걸음들은 서툴고 더디다. 그러나 없는 시간을 쪼개고 조그마한 능력이나마 나누고,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는 운동은 그 진정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 같다. 과연 될까? 라고 생각했던 1인 시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치지 않고 진행돼 100회를 훌쩍 넘어 200회를 가까이 두고 있다. 누구도 가능을 확신하지 못했던 사죄촉구 10만명 서명운동은 조직을 동원하지 않고도 회원들의 노력과 시민들의 협조로 7만 명이 넘었다. 시민모임의 활동이 계속되자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지역 언론은 물론 중앙언론과 일본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쑥스럽지만 시민모임, 대단하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외로움과 서러움에 혼자 울었던 할머니가 웃음꽃을 피우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변화는 우리 스스로, 나 스스로가 변했다는 것이다.

근로정신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수업도 달라졌다. 현장의 생생함이 수업에도 전달이 되었나보다. 학생들은 내가 수업을 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실천하고 변했다. 할머니들께 미안함의 편지를 썼고,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20여 년 동안 이 문제를 붙잡고 있는 나고야 지원회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학생들의 편지는 나고야의 평화전시회에 <광주에서 온 희망의 메시지>라는 제목이 붙어 전시되기도 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오자 매우 신기해하며 자신들의 작은 행동이 뭔가를 변화시킬수도 있다라는 것에 자부심도 느꼈다. 근로정신대 문제를 주제로 한 학생 촛불문화제에서 연극을 해 보자고 한 제안을 한 것도 학생들이었다.

작년에 우리학교 학생들이 일본에 보낸 편지가 계기가 되어 최근에 노래가 하나 만들어졌다. 한 방울의 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자’라는 내용으로, ‘나고야 소송 지원회’와 광주 ‘시민모임’이 함께 손잡고 앞으로 나가자는 내용을 담은 <화이팅! 용기를 내고!>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일본어로 만들어진 노래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로도 만들어졌고,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주인공인 하라다 요시오님이 우리 학교 학생들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함께 수업을 했던 하라다상과 학생들, 그리고 수업을 함께 계획했던 음악 선생님, 수업을 참관한 동료 선생님들께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고, 자체로 감동이었던 수업이다.

살다보면 애초의 계획에는 없었던 일들이 닥쳐오는 경우가 있다. 시민모임과의 만남이 나에게는 그렇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8년, 그리 열심히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루하루 학교 생활을 하던 내게, 시민모임은 내가 교사라서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시민모임에서의 활동도, 학생들과의 만남도, 그리고 올해 여름에 예정된 한․일 청소년의 평화교류까지...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었고 생각하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커진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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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준호 (청년유니온 광주지역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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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붙이고 고려대를 자퇴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김예슬 씨가 대자보에 다 담아 내지 못했던 말과 자신에게 쏟아졌던 질문들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지난 3월, 한 대학생의 선언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 국가와 자본에 포섭된 대학 그리고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제조되어 자격증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양산되는 대학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과 함께 그 학생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편으로는 무모해 보였지만 진정한 大學人이 되기 위해 대학교를 거부하는 모습은 파문이 일듯 각종 매체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지성인의 요람으로서의 대학, 대학인의 몰락은 물론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의 선언에 주목했던 것은 비판의 칼날이 무뎌질 때로 무뎌진 이 시대 지식인(대학인), 청년들에게 더 날카로워져야 한다며 숫돌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말로서만이 아닌 직접적인 저항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보였다. 그 일이 있은 뒤에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 성찰적 글을 각종 매체에 실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얼마 전에는 김예슬씨의 글을 모은 작은 책이 발간되었고 그의 생각을 좀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의 이야기

비인간적인 경쟁과 미친 학습노동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후 들어간 소위 명문대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유나 정의, 진리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또 다른 트랙이 펼쳐져 학생들을 경주마처럼 양육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대학의 지위는 이미 자본의 시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기업이 돈만 준다면 진리나 정의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삼성과 글로벌, 이명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 명문대는 순수한 영혼이나 진리, 자유, 정의, 저항이 사라진 곳, 더 이상 대학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눈과 귀를 막아 옳고 그름의 대한 판단을 유보 하고 대학에서 양육하는 경주마가 되어 취업이라는 끝나지 않을 트랙을 돌아야 하는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집어 삼키고 있는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적들의 이야기

대학생의 현실은 무엇일까? 실제 삶을 위한 배움과는 괴리된 자격증과 학점, 어학과 같은 스펙에 매달려 무직(無職), 무지(無知), 무능(無能)으로 대표되는 3무(無)의 졸업장이 그토록 모두가 가고자하는 대학의 결과다. 대학은 학위 자격증을 발급하는 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진정한 의미의 배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매달리는 졸업장과 자격증은 기업이 요구하는 것들이다. 이윤을 위해 저비용 고효율의 잣대를 최상으로 여기는 자본이 대학을 하청업체로 만들었다. 본질에서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자본에게 대학생은 거대한 이윤구조의 한 부품일 뿐이다.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그러한 구조를 유지하게끔 하는 국가의 역할을 감안하면 국가, 자본, 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이 청년들을 인간이 아닌 자원화하고 그들의 꿈과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할 근원적인 사실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교육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무교육의 틀은 사회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이며 ‘학교 교육의 주술’과 ‘능력사회’라는 구호 속에서 계급적 낙인을 내면화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국가의 의무교육과 자본과 기업이 요구하는 자격증 제도가 살아있는 한 배움의 자유와 삶의 자유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교육이나 지식이 상품화되어 소비되고 있고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 당하고 있음을 꼬집는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되어버린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계속해서 주입한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사회적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는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자급자립의 기반과 공동체가 살아나 자격증이 없이도 자신이 나름의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받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등 각자 자신의 재능을 살려나가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공동체를 꿈꾼다.

거짓희망에 맞서다

그는 한국사회의 진보에 대해 묻는다. 충분히 레디컬(Radical)한가? 그리고 다시 말한다. 그렇지 않다고. 일상과의 연결이 느슨한 진보운동, 감동이 없고 사람향기 나지 않는 주장, 권력부터 달라고 하는 진보세력이 진정한 진보일까 라는 회의적인 의문과 함께 우리사회의 진보는 근원적인 가치투쟁에 실패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충분히 근원적이지 못했기에 불필요하게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투박하며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이기 위해서는 넓은 시각과 고민을 가지고 구조에서 생활문화, 감성, 영성까지 품어내는 운동을 해야 하며 진보적 신념을 운동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현해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근원적 문제의식을 끌어내리려는 다양한 담론들을 지적한다. 김연아를 상징으로 청년 세대를 ‘G세대’로 부른다. ‘김연아를 꿈꾸라’는 담론에는 거짓이 숨어있다. 그것은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 없는 현실, 오히려 청년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과 알바생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은폐하고 거짓 희망을 품에 안기는 ‘G세대’는 글로벌 카스트에 가깝다. 88만원 세대 운동도 청년실업 해결과 사회복지 확충과 임금 상향을 위한 연대투쟁으로 현실성이라는 이름의 중도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88만원이라는 수치화가 우리 세대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우리세대는 욕망이라는 굴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진정한 욕망이 아닌 자본에 의해 주어진 욕망이다. 그 안에 단답형이 되어버린 우리의 꿈이 있다. 그건 대개는 돈이 있으면 해결되는 꿈들이다. 또한 돈이 없으면 안 된다는 학습된 두려움에도 갇혀 있다. 우리는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을 버리고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를 직시해야 한다. 대학이나 직업이 먼저가 아니라 내 자신, 나의 삶이 더 큰 존재다.

앞서 말해온 악순환, 국가-자본-대학이라는 억압의 삼각동맹에서 의무교육과 자격증제도는 우리의 삶을 거짓 기준들로 수단화하고 비인간화된 비교경쟁 속으로 등 떠민다. 끝없는 트랙을 그저 당근을 생각하며 의식 없는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트랙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자기 부정이 필요하다. 저자는 ‘나 자신이 바로 그 적이다.’라는 명제를 자신에게 각인시키며, 대학을 거부하기까지 무수한 성찰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는 너무나 거대한 잘못된 사회구조, 의식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그가 얻어낸 결론은 불복종이다. 자신의 불복종을 통해 거대한 벽에 작지만 의미 있는 균열을 냈다. 그러한 저항은 그가 특별하기보다 어쩌면 젊기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청년은 곧 저항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불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이 있다. 옛 사람들에게는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라는 경구가 있는데(不鏡於水)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다. 거울에 비치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경어인(鏡於人), 모름지기 사람들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기를 가르치는 글이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 대학이 만들어낸 자격증 시스템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김예슬이라는 사람의 ‘삶’을 거울로 삼아볼 필요가 있다. 그에게서 필자는 주어지는 삶이 아닌 참된 자신의 삶을 선택한 한 개인이 보인다. 또 청년으로서 실천하는 저항만이 진정한 꿈을 품고 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임을 깨닫는다. 그를 거울로 비춰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앞서 말한 균열은 더 이상 작은 균열이 아니며 거대한 적은 더 이상 그 지위에 있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본 ‘내 깡패같은 애인’이라는 영화에서 옆방 깡패(박중훈)가 취업에 좌절해있는 지방대생인 옆방이웃(정유미)에게 던진 대사를 기억해본다.

“우리나라 백수들은 참 착해. 거 텔레비전 보니까.. 외국에서는 일자리 안 준다고 대학생들이 데모도 하고 난리던데 우리나라 백수들은 그저 자기 잘못인줄 알아.. 사회가 제도적으로 만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다 자기 잘못인줄만 알아.. 사회가 잘못한 거야.. 괜찮아.. 당당하게 살아~!”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 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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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엡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교육담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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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동구청 관내 11개 중학교 1,2학년 학생 40명을 대상으로 한 '성동 영어수월성교육' 개강식이 광희중학교에서 열렸다.


수월성 교육, 수월하게 교육받는건가?

몇 년 전부터 '수월성 교육'이라는 말이 뉴스나 신문에서 심심치않게 들려온다. '수월성 교육'이라니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좋은 정책처럼 들린다. '수월성 교육'을 하면 '수월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수월하게 교육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사실 '수월성 교육'의 '수월'은 '수월하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단어이다. '수월성 교육'은 ‘Excellence in Education’의 번역어로, '수월성'은 빼어날 수와 넘을 월 자를 써서 새로이 만들어낸 단어이다. 그렇다면 수월성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고 정의된다(고형일, 2006). 그러나 실제 수월성 교육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수월성을 내세운 정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등을 볼 필요가 있다.

Q. 수월성 교육이란 무엇인가.
A. "현재는 보통 학생이나 영재나 한 교실에 섞여 공부한다. 그러나 제대로 교육하려면 학생의 수준에 맞게 나눠 가르치는 게 바람직하다. 수월성 교육은 특정 분야에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소수의 학생에 대한 집중교육을 의미하는 엘리트 교육과는 다르다."

Q.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A. "전체 초중고교생 800만명 중 영재교육 대상자 1%와 일반학교의 상위 4% 등 모두 5% 정도인 40만 명이다. 영재학교, 영재학급, 영재교육원에서 배우는 학생과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 등 특수목적고 학생은 영재교육 대상자다. 일반 학교의 수월성 교육 대상자는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 과정, 집중이수과정, 심화학습 이수인정제(AP·Advanced Placement) 등에 참가하는 학생이다.
(동아일보 2004-12-23 보도)

결국 수월성 교육이 실제로는 '모든 학생들의 재능 계발'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이 능력을 더 높일 수 있게' 시행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교의 학력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존의 고교 평준화 기조에서 벗어나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잘할 수 있도록' 수월성 구조를 강화"하겠다고 이명박 당선자가 2007년 대선 직후 밝힌 것에서도 확인된다(연합뉴스 2007-12-24 보도).

요컨대 교육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월성'의 개념이 '모든 학생들의 재능을 계발하여 뛰어나고 개성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에 가깝다면, 실제 정치적으로 이야기되거나 교육 현장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이루어지는 교육들은 '상위권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 능력을 더 계발시키도록 집중 투자'하는 것에 가깝다.

수월성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수월성 교육'은 경쟁을 더욱 심화시킨다. 특목고, 자사고 등이 생겨나면서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 정책들은 성적이 높은 학생들을 따로 모으고 계속해서 서열을 확인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 높은 서열이 되기 위해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는 건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이는 특목고와 자사고를 확대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이 훨씬 더 심해질 뿐이다. 학부모와 학생들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들어가길 원하는 건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급을 늘리면, 그 늘어난 특목고·자사고 사이에서도 서열이 생기면서 더 높은 서열의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강화, 재생산하는데 기여한다. 교육시스템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특목고·자사고에 입학하는 학생들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이거나 전문직 부모를 두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한겨레 2009-09-14 보도). 그런데 교육에 이러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무시하고 능력(성적)에 따라 차별적 교육을 하겠다고 하면, 결국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결과 나타나는 사교육의 성행이나 특목고·자사고의 높은 학비 등도 이러한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수월성 교육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이 더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만듦으로써, 성적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킨다. 수월성 교육으로 인해 성적에 근거한 분리·서열화가 이루어지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피그말리온 효과(1), 하위권 학생들에게는 낙인 효과(2) 등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다양한 학업성취도의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적으로 학업성취도가 향상되고, 수준별로 나눠서 교육을 할 경우 전체 학업성취도는 하락하지만 상위권 학생들 일부만 성적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프레시안 2009-10-07 보도).

그래도 수월성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수월성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전지구적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시대에 경쟁을 하지 않고서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겠는가" 따위일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들이 죽도록 불행하더라도 경쟁을 하는 것이 더 중 요한 것이냐"는 의문은 잠시 미뤄 두자. 이 논리는 일종의 말장난을 치고 있다. 대놓고 "경쟁은 스포츠에나 필요하지, 교육엔 필요 없다"(피터 존슨, 핀란드 교장협의회 회장)고 말하는 핀란드가 국가경 쟁력 순위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한다는 것만 보더라도,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조건 경쟁을 열심히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교육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하며 국가경쟁력에 종속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관점을 취하더라도 현재 한국에서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벌어지는 경쟁은 오히려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의 능력을 오직 성적만으로 판단하기에, 학생들은 획일적인 시험의 틀 속에 갇혀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학생·학부모의 교육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취향에 맞는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수월성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면 그러한 선택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실제 교육현실에 대해 눈감고 있다. 학생들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학들을 보자. 과연 선택인가? 학생이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가 학생을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최상위권 학생은 A대학, 상위권 학생은 B대학, 중위권 학생은 C대학. 이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월성 교육은 원래 이런게 아니다!

미국영재학회 회장인 조이스 반타셀 바스카는 "수월성이란 사회적으로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에서 이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과 수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다. 앞서 말한 "수월성이란 개별 학생이 개인 내적으로 자신의 적성, 소질, 잠재력 등을 최대한 계발시킨 상태"라는 정의를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교육학자들은 결코 '수월성 교육'을 '상위권과 하위권 학생들을 분리시켜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집중 투자'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발전시키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수월성 교육인 것이다.

사람들의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은 '인권'이 교육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UN아동권리협약> 제29조 1항은 아동교육은 "아동의 인격,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제대로 된 의미의, 모두를 위한 '수월성 교육'은 '인권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이 '수월성 교육'이란 말이 '반인권적인 교육' 차별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육 아닌 교육을 옹호하는 데 이용되고 있는 것은 이토록 어이없는 일이다.

진정한 '수월성 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학생들은 성적과 관계없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다. 한 반의 학생 수는 지금보다 훨씬 적어 교사가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공통된 학습내용을 배운 후 자신의 실력에 따라 보충·심화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교사는 교실 안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개개인을 지도해준다. 그러면 교사가 가르쳐 줄 능력이 안 되는 분야의 공부는 어떻게 할까? '교육 바우처' 등의 제도를 이용하여 외부 기관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은 대사관이나 문화원 등에 쿠폰을 내면 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서 공부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자전적 소설 <창가의 토토>에 나오는 '도모에 학원'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운영하였다.

나는 '수월성 교육'에 반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 찬성한다. 수월성 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각주>
(1) 피그말리온 효과 :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2) 낙인 효과 : 특정인에게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면 그 사람은 그 평가에 위축되어 결국 그 평가대로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을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 피그말리온 효과와 반대되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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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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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7일 진행예정이던 김용철 변호사 강연회 일방적으로 대관취소에 대한 주최 측이 걸은 현수막이다.

학교계단에서 강연회를 들었다.

 

 5월의 끝자락, 조선대학교에서 김용철 변호사의 강연회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대학교는 강연실로 예정되었던 서석홀 강당의 대관을 허락하지 않았고, 강연회는 서석홀 앞 광장에서 이뤄졌다. 지난 전남대 강연회에서도 대학본부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걸로 봐서 비단 조선대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글쎄, 이번 사건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불신을 더 굳히게 만들어줬다고 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어떤 화두도 되지 못한다. ‘대관 불허’사실은 대학사회에서 어떤 토론거리도 되지 않았고, 그냥 묻히는(드러났었다면) 분위기다. 대학교 학생처뿐만이 아닌 대학교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문제라고 할 만하다.


대학문화는 과연 상큼해질까


강연회에서 흘러나왔던 김상봉교수의 '대학생들의 동맹휴학 제안'이 떠오른다. 시장만능-자본주의체제에 대항할만한 대학생들의 운동방식으로서 제안했던것으로 기억한다.(그 운동의 역사는 훨씬 전부터 계속 되었던것이지만) 허나 올해도 상큼한(입시에 쩔어있을텐데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으나) 1학년 학생들의 유입은 계속 되었고, 시큼하다 못해 떫어서 입이 얼얼할만한 대학생활은 내년에도 계속될것만 같다.


마치 대학교는 지난 12년간 수능시험체제에 순응하며 지냈던 수험생들을 어떤 '완전체'로 만드 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12년간의 입시생활은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체제를 체화시키려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경쟁몬 완전체'로 향해 간다랄까. 대학교의 학생평가체제는 상대평가이며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은 고민 없이 제적해버린다. 여전히 학생들은 이제까지 하던 대로 시험공부를 하며 하던 대로 성적에 목을 맨다. 신입생들부터 '취직에 도움이 될 만한'따위의 말을 곁들이며 모든 수업의 동기부여는 '기업'에 관련한다. 이 체제의 기반은 쉽게 무너질 것만 같지는 않다. 학생의 자살이나 선생의 자살에도 그다지 눈길을 쏟지 않으며(조선대에서는 한 시간강사가 자살했었다) 강연회조차 그 성격이 불온하다는 이유 때문에 마찰이 있었음에도 이것들이 대학사회에 큰 이슈로 불거지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것은 개념 없는 대학생들이 데모도 안하고 취직자리에만 정신 팔려있어서만도 아니고 어느 순간 대통령 하나 잘못 뽑아서 갑자기 이렇게 된 것도 아니다. "니들은 아직 어려"라는 주문아래 좀비 취급하던 어린애들이 대학입학하면 갑자기 진지한 자세를 취하며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촛불에 기대 한국사회의 젊은이에 대한 갖가지 분석을 시작하는 노인네들을 볼라치면 속이 답답하다. '20대 개새끼론'이나 들먹이면서 그들은 이 사회를 쥐락펴락 하려는 '개새끼 세력'이 여러 세대의 '수많은 개새끼들'이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김용철씨의 강연회를 그 성격이 불온하다 하여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던 대학교의 입장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던 '이명박스러움'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MB의 삽질을 욕하는 일이 정말 시급해 보이지만 대학사회의 '이명박스러움'을 생각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 인것 같다. 조선대학교는 여전히 '정이사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보인다. '정이사 제도로!'라는 구호는 이제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정이사제도' 자체는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제도의 민주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더더욱 반발하는것 아닌가? 이제는 '민주적 정이사로!'라는 구호가 '민주적 학생회!','민주적 학내문화!','민주적 학칙!' 따위의 문제로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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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강연회 대관 불허를 보고

서부원 (살레시오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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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24일 조선대학교 본부측의 대관취소로 인해 조선대학교 서석홀 앞에서 김용철 강연을 진행한 가운데, 200여명의 학생, 시민들이 함께 하였다.

분노가 일기보다 솔직히 가엾은 마음이 앞선다. 대부분의 학과가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는 현실에다 비리 혐의로 내쫓긴 옛 재단이사들의 복귀를 앞둔 어수선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럴밖에. 조선대학교가 지난 5월 24일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강연회를 갑작스럽게 대관 불허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외 이미지가 나빠지고, 학생들의 취업에 지장을 줄까봐 그렇단다. 조선대학교에서 한 해 삼성에 취업하는 학생이 몇이고, 삼성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대놓고 삼성에 잘 보이려 애쓴다고 과연 취업률 높아질까. 지방대 졸업생들의 극심한 취업난을 모르지 않지만, 대학 측의 이런 대응은 나가도 너무 나간 '찌질한' 짓이다.  

지방대생이 대기업 취업하면 현수막 내거는 시대

주지하다시피 대학이 대체로 자본에 포섭된 지는 이미 오래다. 대학생은 물론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까지도 언제부턴가 성균관대를 '삼성대'로, 중앙대를 '두산대'로 부르고 있고, 고등학교 교실마다 내걸려있는 입시지원사정표에 성균관대와 중앙대가 과거에 비해 사뭇 서열이 올라가 있는 것도 삼성과 두산 때문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어처구니없게도 '팔이 안으로 굽듯 성균관대나 중앙대에 진학하면 삼성과 두산에 취업할 기회가 아무래도 더 늘지 않겠냐'며 내심 기대하는 아이들 또한 의외로 많다. 기실 지방 사립대학에서는 졸업생이 웬만한 대기업에 취업이라도 할라치면 고시 합격의 경우처럼 학교 구석구석에 경축 현수막을 내거는 건 이젠 더 이상 낯선 광경이 아니다.

자본이 대학을 통째로 '구매하는' 시대를 넘어 대학이 자본에 자발적으로 알아서 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명문대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을 곳곳에 내걸어 광고해주듯, 이젠 전국의 대학이 앞 다퉈 대기업을 띄워주고 있는 셈이다. 대학은 대기업의 홍보를 위한 자회사이자, 자본이 요구하는 인력을 공급하는 양성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이 시나브로 돼 버렸다.

현대사 이끌어온 대학생들, 이젠 기억조차 아스라한 전설

'대학'이라는 이름이 어색한 그곳에 대학생이라고 멀쩡할 리 없다. 한때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맨 앞에서 이끌어온 선구적 지식인이었지만, 이젠 기억조차 아스라한 '전설'이 돼 버렸다. 조선대학교의 경우, 대학 측이 삼성에 사과하듯 무릎을 꿇은 모양새가 됐지만 이를 문제 삼을 총학생회조차 꾸려지지 않는 상황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삼성의 탈법적 지배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대학생들이 삼성에 취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삼성의 독점적 시장 지배가 경제 구조를 왜곡시킨다며 핏대 세워 욕하는 그들이 의기투합한다며 에버랜드로 엠티(MT)가는 현실이다. 공교육을 붕괴시키는 주범이 학벌구조라면서도 자녀를, 제자를 기어이 서울대를 보내야 한다는 인식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대학 교수의 '광대짓'도 가엾긴 마찬가지이다.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해야만 하는 처절한 상황이라지만, 명색이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이 아무런 부끄럼 없이 자본에 휘둘려서야 되겠는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대학 본연의 모습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지성의 상징인 그들도 살고, 그들의 제자이자 미래의 지식인인 대학생도 산다.

대학들의 못난 행태, 비루하기 짝이 없다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적어도 내 아이를 조선대학교에 보낼 일은 없어야 겠다고 다짐한다. 아이가 실력이 되고, 경제적인 여력이 있다고 해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성균관대, 중앙대도 그렇고, 고려대를 비롯해 재벌의 오너라는 이유로 명예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대학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과 같은 황당한 사례를 꼭 기억해 두었다가 아이가 철들 때 납득할 때까지 설명하고 이해시킬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또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비루하기 짝이 없는 대학들의 못난 행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다. 대학 측이 그토록 강조하는 대외 이미지가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또렷이 보여줄 것이다. 삼성을 비롯한 자본을 향해 눈치 보는 일이 대학에 얼마나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들과 우리 사회 장삼이사들의 분노가 대학에 얼마나 큰 고통을 안기는지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다.

하자면 해당 대학에 대한 입학 거부 운동이자 불매 운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이라면, 그 대학에 입학원서 쓰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도록 만들겠다는 의미다. 듣자니까 조선대학교 재학생들의 분위기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지만, 졸업생이라면 이번 대학 측의 '찌질한' 행태를 두고 동문이라는 사실이 적잖이 수치스러웠을 것이다.

대학이라고 불매 운동 하지 말라는 법 없다. 학생과 학부모가 없으면 교수도, 대학도 존재할 수 없다. 대학 측, 그들이 말하는 대외 이미지란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것인지 부디 깨닫기를 바란다. 자본 앞에 알아서 설설 기는 대학의 작태를 보고 대학생들이 무얼 배우게 될까. 젊은 세대의 '개념 없음'을 탓하기 전에 기성세대 스스로의 비굴함과 탐욕을 반성하길 바란다.

대학 측의 불허 방침에 따라 건물 안에서는 쫓겨났지만, 예정대로 서석홀 앞 광장에서 강연회를 진행하였다. 정치적 시위나 집회가 아닌 단순한 강연회를 두고 대학 측이 공권력을 동원해 해산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이번 일을 통해 이 땅의 권력화한 자본이 지성의 전당 대학을 얼마나 천박하게 만들고, 단숨에 숨통을 틀어막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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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8일(수), 전남대 법과대
강연 정리/재구성: 오방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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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를 들으러 온 많은 분들이 대학생들인 것 같은데요. 요즘 대학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무슨 놈의 나라가 동년배의 8~90%가 대학을 간답니까?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 있나요? 그게 대학이에요? 대다수가 대학 간다면 의무 교육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등록금을 받고 그런답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대학 나와서 취직이 되니 안 되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대학을 나온 사람은 국가시험제도로 말한다면 중간간부이상의 능력을 갖췄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고시를 합격할 수준이 돼야 되고, 7급 공무원은 2년제 대학 정도, 9급은 고졸 ‧ 중졸 정도에 합당한 것이죠. 예전엔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즘에 환경미화원 시험에 석사학위소지자가 쓰레기봉투 들고 뛰더라고요. 물론 저는 직업의 귀천을 이야기하자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적절치 않은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아마 대부분 기업체 취직을 목표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잠시 기업 인사 이야기부터 조금 하겠습니다. 학력제한 철폐되어있다고 외부적으론 그러지요. 그러나 사실은 전국의 대학을 핵심대학/우수대학/그 밖의 대학으로 나누어 서열화하고 있어요. 그래서 핵심대학과 우수대학의 분류에 들어가는 대학출신들을 대부분 등용하고 있죠. 물론 고졸도 뽑아요. 그러나 그 숫자는 상징적일 뿐이죠.

제가 삼성에 근무할 당시, 임원 2천 명 중에 여성이 없었어요. 고가(?)를 6개월에 한 번씩 하는데, 삼성의 인사제도는 사업체를 삼백 개 단위를 나누어 A, B, C등급으로 평가하고, 다시 각 사업체의 하위에서 직원들을 A, B, C등급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이익 및 실적을 가지고 등급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반도체나 휴대폰 이런 곳의 직원들은 A 등급 비율이 더 높지만, 경쟁력 없는 업체, 만년 적자인 업체에 소속된다면 직원의 능력과 무관하게 낮은 등급을 받습니다. 이런 경우 진급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승진하려면 몇 년간 A등급을 계속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여성에게는 A등급을 주지 않는 게 일반화되어 있어요. 제가 A등급을 매겨도 무슨 여자가 A냐고 하면서 깎아버려요. 이러니 여성은 승진할 수가 없고, 자연히 여성 임원도 없는 것이죠. 아, 그런데 요즘엔 여성 임원이 있긴 합니다. 윗분들 따님들이 임원 하더라고요. 또 삼성 직원 이십 몇 만 명 중에 장애자가 한 명도 없어요. 그런데 장애인고용은 의무화되어 있거든요. 그럼 아마 고용의무를 안 지키고 과태료 몇 푼으로 때운 것이겠죠. 제가 이런 암울한 이야기부터 강연을 시작한 것은 여러분 대학생들도 현실을 알아야 하거든요. 제가 근무할 당시에 보면 신입사원 50% 정도가 삼년내로 그만둡니다. 물론 무능한 사람이 그만 두는 것은 아니에요. 교사라든지, 공무원이라든지 다른 곳으로 갈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그만두는 거죠.

제가 마침 회사 들어갔을 때, 한국이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갔고 그 때 HM 명단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여러분 HM이 뭔지 모르시죠? 희망퇴직자 명단이에요. 그런데 이 희망퇴직자는 본인이 희망하는 게 아니고 회사가 희망하는 사람들이에요. 책임자들은 그 명단에 지정된 사람들을, 소주 같이 마시며 울든 어쩌든 간에,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서 자진 사표 내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6만 명을 잘랐죠. 어찌 보면 집안이 어려우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는 것 당연한 것일 수 있어요. 그런데 집안 형편이 피면 다시 데려와야 하는 거죠. 삼성은 그렇게 해서 내보낸 사람들 한 명도 다시 부르지 않았죠. 뭐 새로운 사람은 늘 있으니까. 삼성은 연봉제를 하는데, 어떤 분은 오십대 부장임에도 불구하고 연봉이 9백만 원이에요. 또 다른 어떤 분은 오십대인데 직급이 대리더라고요. 이런 분들 참 처절하게 출근해요. 지각, 조퇴, 결근 없이 꼭 정시 출근해야 해요. 출퇴근으로 걸리면 안 되니까. 회사는 이들이 나가길 바라기 때문에 일은 안주거든요. 회사에서 나가달라 하는데, 안 나가고 버티는 경우죠. 이게 인간다운 것은 아니죠.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끝까지 붙어있는 경우죠.

제게 반도체 근로자들 중 사망한 분들에 대해서 묻는 분들이 있어요. 저도 거기 한 번 돌아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유심히 안 봤어요. 그 땐 그렇게 위험한 줄 몰랐죠.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할 말은 없어요. 다만 젊은 사람들이 가서 이상하게 병이 많이 걸리고 그러면 문제 있는 거죠. 이럴 경우 외국에서는 개연성 이론이라고 해서 산업체가 손해 배상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의 판사님들은 굉장히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삼성 사장단 중에 고졸 출신이 대여섯 명 있어요. 물론 입사할 땐 고졸이었는데, 나중엔 박사학위까지 갖추긴 하죠. 그 사람들이 그 학력에도 불구하고 사장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섭외의 대가들이었기 때문이에요. 장관급에 청탁할 일이 생겼을 때, 지시가 떨어지면 그날 저녁 장관 사모님과 식사를 함께 할 정도에요. 아주 탁월한 능력이죠. 그런 사람이 회사에선 필요하죠. 그런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회사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아니면 세계적으로 탁월한 기술자여서 이건희 말마따나 십만 명을 먹여 살릴 재주가 있던지 해야죠.

제가 대학 다닐 때 유신치하였어요. 고등학교 땐 긴급조치 시대구요. 살벌한 시절이었지만 그때도 학생들은 데모를 했어요. 심지어 고등학생도 데모하다 체포되고 학교를 그만 두고 했어요. 그 당시 학생들은 취업이 너무 잘 돼서, 그렇게 여유가 있어서 학생들이 데모를 했을까요? 여러분들을 나무라자는 것은 아니고, 지금과 견주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교수들 4천여 명이 시국선언을 했어요. 그런데 그 때 이 땅의 백만 학도는 어디서 무얼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먹고 살기 열악한 환경이어서 취업 문제로 바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과연 그렇게 열심히 취업준비하면 취업이 잘 됩니까? 직장을 갖는다 해도,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한갓 기계 부품 취급받고 금세 버려지기 십상이에요. 폭력혁명 이야기하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세상일에 기본적인 관심과 참여의식을 갖자는 이야기예요. 무엇보다 여러분들 모두 유권자일 테니 관심 갖고 선거 잘 하세요. 우리가 사년, 오년 만에 한 번씩 투표하는데, 그 때마다 제발 제대로 뽑으세요. 광주는 대부분이 민주당을 찍죠? 그런데 민주당이 그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합니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제가 경기도 양평 사는데, 아직도 한나라당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사람들이 아파트 산다고 해서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착각을 해요. 그래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라고 한나라당을 찍어요. 그런데 그들이 정말 중산층일까요? 중산층이라면 적어도 식욕이나 생존을 위해 먹는 수준에선 벗어나야 해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사하는 것은 인간적인 식사가 아니에요. 동물적인 것이죠.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식사가 인간과 인간의 소통과 만남의 기회일 때, 그것이 인간적인 식사죠. 그런데 한국에선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듯이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실 여러분들 취업이 좀 안됐으면 좋겠어요. 동료들을 짓밟고 몇몇 소수는 성공한 듯이 보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게 잠시 잠깐일 뿐이거든요. 좀 잔인한 이야기 같지만 취업도 안 되고 갈 길 모르는 젊은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는 거죠. 지금이 바로 그런 위험한 시기예요. 여러분들은 등록금 투쟁하고 한 명이라도 더 기업체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그게 다 부질없는 일이에요. 환상 깨십시오. 기업은 이제 한국에 생산기지가 없어요. 심지어 된장공장도 중국으로 옮겨갔을 지경이에요. 삼성의 생산기지 현재 70% 이상이 외국에 있어요. 그런 까닭에 국내에서 기업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겠죠. 여기 계신 분들 중 삼성에 몇 분이나 취직할지 몰라요. 그러니 거기에 너무 목을 매지 말란 겁니다. 그럼 대안이 뭘까요? 저는 모릅니다. 저도 대안이 없어요. 여러분들에게 희망적이고 대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만한 것이 별로 없더군요.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기업 1위가 삼성전자라는 말이 있다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거기 들어가서 뭐하려는 건가요? 삼성전자의 핵심산업이 반도체와 휴대폰이니까 거기 들어가서 반도체 만들고, 휴대폰 회로 설계하는 등 기술자로 살려는 건가요? 기술자할 수 있어요? 아니면 뭐 복사할 건가요? 그도 아니면 비자금 만드는 거 심부름하고 그럴 건가요? 그렇게 해서 삼성에서 사장되고 임원 되고 싶은 건가요? 삼성에서 사장되려면 비자금 잘 만들고 뇌물 심부름 확실히 하면 됩니다. 할 수 있으면 하세요. 선망 기업 1위라는 삼성전자의 이미지는 아마 월급 잘 주고, 국가 다음으로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을 거에요.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그런데 책에서도 말했듯이 삼성이 그다지 인간적이진 않습니다.

삼성이 광고를 통해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니 우스운 이야기죠. 누가 자기 식구를 그렇게 죽인답니까?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그런 광고들 별로 진실한 것 아니죠. 광고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삼성은 매 년 초에 광고비를 언론사별로 할당하는데, 이것은 방송CF이나 지면광고의 단가와는 무관한 금액입니다. 언론은 구조적으로 삼성과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주는 사료를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우습게도, 진보적인 언론은 그 의존도가 훨씬 심해 거기서 주는 돈이 생존과 직결됩니다. ‘조중동’ 같은 경우는 따로 자산도 있고 임대소득도 있어서 흑자를 유지하지만 진보적 언론들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형국이거든요. 요즘 김상봉 선생님이 주도하는 ‘삼성 불매 운동’, 이거 프레시안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한 까닭은 프레시안이 대기업 광고를 받지 않기 때문이죠.

저 같은 경우는 살 날이 산 날보다 적을 겁니다. 그리고 또 이 땅은 여러분들의 후손들이 살아갈 곳이죠. 그렇다면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 아니에요? 최소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되어야 할 것 아니에요? 현재로선 가장 본받을만한 사례는 서구 북유럽과 같은 시스템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되면 아플 때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고, 공부하고 싶으면 무상으로 공부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선 이런 말 잘못하다간 빨갱이되기 쉽죠. 말조심해야 해요. 그런데 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아주 기본이 되는 사항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저는 있는 사람 몫을 빼앗아서 없는 사람도 잘 먹고 잘 살자고 주장하는 것 아니에요. 이를테면 병들어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주자는 거예요. 이른바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기본 전제는 세금 제대로 걷는 것이죠. 누군가 불법적으로 조성한 검은 돈을 제대로 조사해서 국고로 환수하기만 하면 여러분들 등록금 문제 해결하고, 무상 교육 실현할 수 있는 거거든요. 사실 간단해요. 세금 제대로 걷으면 되는 거예요. 서민들의 푼돈이 문제가 아니라 억, 조 단위의 불법적인 비자금들을 수사하고 찾아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현실은 참 암담하죠. 단군기원 이래 희대의 탈세 사건을 불구속으로 하고 사면하는데, 이런 기준에 의하면 전국 7만 교도소 수감자들 다 석방해야 돼요. 그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른 자만 남겨두어야 할 테니까요.

현재 삼성을 생각한다의 출간과 함께 삼성 불매 운동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전략에 있어서 상당히 조심해야 할 지점이 있어요. 삼성이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포장된 현 상황에서는 ‘삼성 불매’라는 화두가 반체제 내지는 반정부와 동일시될 위험이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삼성불매운동이 적절한 대안일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삼성이 정관계는 물론이고 법조계까지 휘어잡고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구조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소비자의 권리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이건 누가 누구에게 강요해서 해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니죠. 각자가 판단하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삼성 제품을 갖고 다니는 게 부끄러운 세상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옛날부터 국산품 애용을 국민적 운동의 차원에서 실시해왔습니다. 이를테면 저 어렸을 때 모두가 국산품 연필을 썼어요. 그런데 수십 년간을 국산품 써줬는데 요즘 독일제, 일제에 다 내수시장까지 전부 빼앗겨 버렸어요. 이게 우리의 애국심 부족 탓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줄 곧 국산품 써줄 때 국내 연필회사들은 전문가용 연필을 안 만들었어요. 보통 연필만 만들어도 되니까 안이하게 처신했던 거죠. 그런 태도가 지금 이 형국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삼성도 우리 기업 아닙니다. 생산기지가 국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회사법상 주식회사는 주주가 회사 지분 소유하는 것인데, IMF 체제 때 보니까 삼성 주식의 75%가 외국인 지분이었어요. 그게 어떻게 우리나라 회사입니까? 삼성이 우리나라에 세적지를 두고 있는 까닭은 우리나라가 가장 낫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가 더 나으면 이미 옮겼죠. 실지로 제가 근무할 당시에도 여러 번 세적지 문제를 검토한 적 있어요. 그런데 삼성은 절대로 못 옮겨요. 한국에선 참 편하게 금융에서 흑자를 내거든요. 내수만으로, 내국민만을 상대로 해서 전부 조 단위 흑자를 내는 금융을 유지하고 있는데, 외국으로 가면 이거 불가능하거든요. 더군다나 뇌물 수수로 법령까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이렇게 좋은 나라를 두고 어디로 나가겠습니까? 삼성이 여러분의 직장을 위해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에서 기업 꾸리고 있는 거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면 적어도 세금 문제는 확실히 했겠죠.

삼성을 생각한다가 현재 13만부를 넘겼다고 합니다. 제 욕심 같아서는 한 백만 부 팔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인세가 욕심나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제가 엉터리같이 쓰긴 했지만 그래도 읽고 나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저한테 더 이상 험한 욕은 못할 거 아니에요. 제가 거기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썼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세상에 영원히 남을 책인데, 저도 손자가 둘인데 말이에요.

세상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묻는 분이 있던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런 예가 생각나네요.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전화 연락을 받는 순간 지옥이잖아요. 비통해지죠. 그런데 조금 이따가 동명이인이라 잘못된 연락이 갔다고 다시 전화가 오면 그 자리에서 천국으로 바뀌죠. 이렇게 객관적 상황의 변화가 없는데 스스로 천당과 지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조중동’이나 ‘삼성’과 같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암적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실천한다면, 곧 자신이 인식한 바를 널리 알린다면,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물론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 밖에도 또 정계나 법조계도 문제는 많죠.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그 조직의 구성원이 된다면, 분명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거예요. 달리 말하자면, 상식을 가지고선 끝까지 갈 수 없는 조직이라는 거요. 그 때 올바로 판단을 해야겠죠. 저는 검사 재직 시절에 언제든 사직할 생각을 하고 일했어요. 검사, 그거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거든요. 일을 제대로 하다보면 정권 실세나 인사권자와 계속 부딪히게 되거든요. 이 말은 그 조직에서 버티려면 나쁜 짓을 해야 될 때가 온다는 거죠. 그러니 때가 되면 나와야 해요. 그런 직업이니까 사실 좋은 직업은 아니죠. ‘엘리트 검사’라는 말이 있던데, 가족이나 본인에겐 엘리트일지 몰라도,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엘리트 아니죠.

저에게 희망이 있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희망을 바란다면, 30년 전 오월 이 땅에서 여러분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여러분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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