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선언

 

 

서문

 

봉건 시대가 끝나고 문벌 집단은 해체되었지만, 학벌은 곧 그 자리를 차지한 후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학벌은 공화국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인 평등교육과 민주교육을 흔들며, 부자, 엘리트, 서울의 지배를 더욱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학벌주의는 입시성적이 곧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른 것이라는 미신을 퍼뜨려 지배층의 권력 독점과 자본 세습을 정당화한다.

 

그런 점에서 2016,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의 해산은 섣부른 것이었다. 이들은 2000년대 이후로 가파르게 치솟은 대졸자 실업률, 청년들의 실업난을 목격하면서, 소위 명문대학 졸업장조차 더는 피라미드 위쪽을 보장하는 사다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며, 학벌없는 사회 운동이 그 쓸모를 다 했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질수록, 소위 스카이(SKY)’로 대표되는 학벌의 힘이 고소득 전문직종 진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과 취업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대학졸업장이 노동시장 진입을 위한 기본 입장권이 되어 가난한 부모의 고혈을 쥐어짜고 청년들에게 학자금을 부채로 떠안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벌주의에 따른 대학 위계는 갈수록 첨예해졌고, 출신 대학에 따른 차별, 임금 격차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는 대학의 양극화가 사회 신분 양극화의 기반임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학벌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 한, 학벌없는사회를 향한 시민운동도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선언하려 한다. 이 선언에서는 학벌로 말미암은 많은 병폐 중 교육 문제와 권력 문제를 되짚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반복되는 교육개혁 실패

 

한국의 입시중심 교육은 초중등교육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초중등 교육에 대한 정책토론과 모범사례 연구는 많지만 그 모든 시도와 상상은 결국 대학 입시 앞에서 멈춘다. 국가권력기반은 민주화되었는데, 정작 민주주의를 책임 있게 운영할 시민을 기르는 민주시민교육은 들어서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간의 정책들이 모두 서열이라는 모순은 건드리지 않은 채 입시제도 개선 여부의 좁은 틀 안에서만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학벌에 대한 환상, 이에 기반을 둔 대학 서열체제가 개혁되지 않는 한 기득권 대학이 정한 선발기준에 초중등 교육과정이 장단을 맞추는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학벌주의로 병드는 것은 비단 초중등교육 뿐만이 아니다. 한국 대학은 학위장사를 하는 곳으로 전락하여 교양강의, 대형강의 위주의 질 낮은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학생이 항의하는 경우는 드물다. 학생들 역시 학위 취득이 주 목적일 뿐, 전공 지식이나 기술을 연마하려는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은 교육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학위를 상품으로 팔게 되며, 거래의 결과 대학에는 수익을, 부모와 학생에겐 등록금 부채를 남길 뿐이다. 학벌주의 풍토에서 고등교육 역시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한편, 대학은 사회, 국가 공동체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과제나 교육과정을 기획하는 능력은 잃어가는 대신 대학평가에서 좋은 순위를 받기 위한 공모사업, 전시 행사에 골몰하고 있다. 어차피 학문을 연구하는 내공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수치화된 실적으로 대학 서열을 높이기 위한 천박한 장삿속만 판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연구 윤리는 세계 최악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학벌에 의한 권력독점

 

학벌은 소속 대학을 매개로 한국사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물론,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은 어느 나라나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특정 대학 출신이 고위 공직을 압도적으로 독점하거나 이토록 상위권 대학 출신자들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곳은 흔치 않다. 서울대의 독점을 정점으로 출신대학에 따라 신분을 가르고, 개인의 능력을 그 신분에 따라 평가하는 관습이 우리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1대부터 20대 국회까지 당선된 역대 지역구 국회의원 중 1/3은 서울대 출신이었으며 SKY를 합치면 과반수를 차지한다. 법조계의 독점은 더욱 심각한데 1948년부터 2015년 사이 역대 대법관의 70% 이상이 서울대 출신이다. 2018100대 기업 CEO1/3 이상도 서울대출신이며 SKY를 합치면 과반수이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에 의한 권력 독점은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부유층 자녀들의 고학벌 대학 진학이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벌이 더는 권력세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과거보다 조금 완화된 부분을 과장한 것이거나 과거와 다른 모습의 병폐를 보지 못한 탓이다.

 

또한, 학벌주의는 빈부격차, 서울중심주의를 심화하고 정당화한다. 자본으로 얻은 학벌을 이용해 다시 자본을 얻는 순환구조는 부의 세습을 은폐한다. 지방대학은 지역의 독자적인 전망과 그에 따른 학문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갖춘 곳이 아니라 서울 진출에 탈락한 사람들의 대기소, 수용소로 취급된다. 학생과 교원들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서울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은 입시 체제 안에서 평등한 시민사회는 요원해지며, 시민들은 스스로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한편, 부당한 지배와 복종을 내면화한다.

 

심지어 학벌주의는 시민사회의 건강한 생태계마저 위협하고 있다. 시민 사회의 운동으로 성취된 가치는 수많은 시민들이 노력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학벌 좋은 명망가를 수식하는 경력으로 전락하곤 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청년 세대의 분노와 고통에 편견 없이 귀를 열기보다 소위 명문대학 청년 세대가 발언을 독점하고, 그 발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한다. 그 안에서 학벌없는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학벌주의에 대한 비통함은 더욱 무거워진다.

 

 

학벌타파운동의 과제

 

많은 사람들이 학벌의 폐해를 개탄하면서도 정작 학벌없는사회가 될 가능성을 믿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차별은 인간이 없앨 수 있다.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것 같다고 시민사회 운동이 스스로 학벌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닫아서야 되겠는가. 오히려 더욱 꼼꼼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벌없는사회가 가랑비에 옷 젖듯 실현될 것임을 설득해 나가야 한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벌주의로 곪아 터진 교육현장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학 평준화와 등록금 철폐를 통한 교육개혁, 사립 교육 기관의 공영화와 교육 공공성 강화 등 다양한 교육운동의 실천을 펼쳐나갈 것이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벌에 기대 권력을 만드는 자리를 막아설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을 통한 출신학교 차별 철폐, 일부 대학 출신자들의 고위공직 독점 모니터링 등을 비롯해 제반 인권운동, 정치운동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시민 사회와 시민운동 내부의 학벌 문제도 지나쳐서는 안된다. 학벌타파 운동은 학연과 지연이 아닌 평등한 시민 관계를 기반으로 시민운동을 재조직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병이 존재하는 한 이를 치료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듯, 학벌의 병폐가 존재하는 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학벌없는 사회 운동이 끝났다2016()학벌없는사회의 해체선언을 넘어서고자 하며, 오늘 다시 학벌없는사회를 위해 부지런히 투쟁할 것임을 선언한다.

 

 

2019108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토론회 참석자 일동

 

 

참고

사단법인 학벌없는사회는 1998년부터 준비를 시작하여 1999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는 시민단체의 분과단체인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행동을 거치고 2001년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나 2016년 해산했다.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2008년부터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으로 시작하여 2011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으로 정식출범하였고 2019년 정기총회에서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으로 명칭을 변경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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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는 사람들의 차이를 학력과 학벌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 환원시키고 단순한 차이를 불평등한 서열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획일화된 서열에 따라 부와 권력을 너무도 불평등하게 분배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인간성을 도야하고 자기의 개성과 소질을 계발하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들 대다수는 청소년기에는 학교에서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며 삽니다. 내가 남들보다 달리기를 못한다 하여 차별받는 것이 비정상인 것처럼, 내가 남들보다 공부를 못한다하여 차별 받는 것 역시 부당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교는 단지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학생을 차별합니다. 오직 시험성적만이 최고의 가치로 숭배되는 학교에서 인간의 보다 중요한 미덕과 상상력 그리고 다양한 소질들은 꽃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부당한 차별을 견디고 자라서 사회에 나오면 우리는 다시 학벌이 나쁘다 하여 평생을 차별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잣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부와 권력은 극소수의 상류대학 출신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을 통틀어 모든 공직과 경제계, 언론계, 학계 그리고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극소수의 학벌문중에 의해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런 우리 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 그리고 대학을 나왔더라도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유형 무형의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업은 신입사원을 뽑을 때 제일 먼저 학벌을 따지고, 젊은이들은 결혼할 때 상대편의 학벌을 따집니다. 이런 차별의식은 어느덧 우리의 무의식 속에도 스며들어 우리는 낯선 사람을 처음 만나면 그의 학벌을 알아야 그가 누군지 안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학벌이 좋으면 우리는 그가 모든 면에서 쓸모있는 사람일 것이라 판단하고, 그렇지 않으면 보잘것없는 사람일 것이라 단정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일과 기능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재능과 소질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학벌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함으로써 쓸모 없는 시험선수만을 양성할 뿐, 사회를 위해 진정으로 요구되는 소질과 재능을 구조적으로 억압함으로써 나라의 힘을 스스로 쇠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학벌사회가 야기하는 가장 심각한 비극은 학벌서열로 인해 교육이 돌이킬 수 없이 황폐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서열화된 학벌순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일상화된 까닭에 학생들은 일찍부터 남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인간성을 실현하고 개인의 개성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입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오늘날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고, 학생들이 아름다운 우정을 가꾸면서 미래의 꿈을 키워야 할 학교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경기장이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인간을 동물의 상태에서 참된 인간으로 도야해야 할 교육이 도리어 우리 사회를 상호 경쟁하는 야수들의 정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시경쟁은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기도 합니다. 배움의 영역에서도 사람의 재능과 소질은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입시경쟁은 모든 학생들을 한 가지 평가방식을 통해 서열화시킴으로써, 개인의 학문적 개성을 계발하고 발휘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사교육비를 투자하고 학생들은 입시를 위해 엄청난 양의 문제집을 암기하지만, 학생들은 정작 학문을 위해서는 문맹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옵니다. 철학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학생이 단지 일류대학의 간판을 얻기 위해 대학의 철학과에 들어가고, 스스로 한 벌의 옷도 지어보지 않은 학생이 의상학과에 들어가는 나라에서 대학이 경쟁력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학벌이 철폐되어야 할 까닭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학벌은 사람을 부당하게 차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로 만나지 못하게 단절시킵니다. 학벌은 현대판 문중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졸업한 학교는 모교요 마음의 고향이라고 세뇌 받습니다. 그 마음의 고향에서 스승은 부모와 같고 선후배는 언니 아우와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낯선 사람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듯이 모교를 사랑하고 동문을 아껴주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학벌의식은 같은 학교 출신들 사이에서는 맹목적인 결속을 낳고 출신학교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단절의 벽을 쌓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결속이나 무조건적인 배척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참된 만남이 뿌리내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 폐쇄적인 학벌의식은 우리를 자기도 모르는 새 학벌이기주의에 빠져들게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면화된 학벌이기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자기가 소속하여 일하는 단체의 이익보다 자기가 속한 학벌문중의 이익을 더 소중히 여기도록 함으로써 건전한 시민 사회의 형성을 방해합니다. 지난날 우리나라가 진정한 의미의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씨족들의 연립체에 지나지 않았던 까닭에 결국에는 열강과의 다툼 속에서 나라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학벌이기주의는 사회를 사분오열시켜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이 그가 속한 씨족 공동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립적인 주체로서 대접받고 평가되며, 사람들이 공동의 뜻과 일을 통해 만나고 헤어지는 사회를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에 개방적이고 공정하며 효율적인 사회적 관계의 원칙이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학벌의 굴레에서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학벌을 철폐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봉건성을 청산하기 위한 첫걸음인 것입니다. <학벌없는사회>는 이처럼 우리사회에 만연한 학벌에 따른 차별과 단절을 타파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선량함과 성실함이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 전체를 위해 가장 가치있는 미덕이며, 사람의 탁월함은 획일적인 시험에서의 우수함이 아니라 자기만의 개성적 소질을 계발함으로써 온전히 발휘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출신학교를 따지지 않고 오직 가슴에 품은 뜻과 같이 추구하는 일을 통해 만날 수 있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 뜻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대학서열을 철폐하고 대학들 사이의 폐쇄적인 장벽을 허물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죽어가는 우리 교육을 살리고 이 땅에 참된 인륜적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학벌없는사회>에는 학벌에 따른 차별이 없는 것은 물론, 주인과 손님이 따로 없고 아이와 어른이 따로 없으며 여자와 남자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으며 언제나 당당하지만 교만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학벌없는사회>는 그 자신,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공동체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이 씨앗에 물을 주고 북돋워 끝내 우리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때까지 싸워나갈 것입니다. 아무도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열린 광장에서 만날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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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교육학자들은 모든 교육권력을 장악하여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나라의 끊임없는 교육문제는 바로 그들이 제작하고 그들이 처리하는 악순환을 해방 이후 오늘까지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권력이란 교육관료와 그에 빌붙어 있는 교육학관련교수를 가리킨다. 우리는 그런 교육학권력자들이 우리 나라 교육피폐화의 주범이라고 규정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불필요한 과정과 시험을 양산하고 이후 그것의 존치를 위해 온갖 논리를 창작해왔다. 교육관료들은 교육학자들과 짜고 서로를 위한 제도를 이른바 '교육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을 지불하고 착복해왔다. 교육학 연구비라는 것은 그들만의 잔치였던 것이다.
우리는 관료교육학자와 그에 기생하는 교육학교수들이 교육학계에서 손을 뗄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오늘 우리 교육의 암울한 현실은 분명 그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대부분이어서 그들 스스로 자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권고하는 것은 교육학과 무관한 교육자들이 교육에 대해 발언할 수 있고 교육정책의 수립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 운영할 것을 제안한다.
재밌게도 우리의 입론 가운데 사범대학 해체론은 현재 교육부의 정책과도 상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범대학은 없어지지 않는가? 교사임용고사가 엄연히 있고 사범대학생으로서의 특혜도 없는데도 왜 사범대학은 존재해야 하는가? 많은 교육학과 그 인접 학문은 인문대학이나 사회대학 그리고 자연대학 등으로 편입이 가능함에도 왜 전혀 이루지지 않는가? 그것은 바로 교육학권력끼리의 거래와 암계 때문이다. 교육학권력이란 교육학과와 그 유사학과 출신의 교수와 관료를 가리킨다. 일부 교수들은 관료와의 연계를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나가고 있고, 일부 관료들은 미국연수 등을 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교육학자로서의 권위를 대학에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결탁이 바로 우리 교육계의 개혁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권력 해체 없는 사범대학 해체 없고, 사범대학 해체 없는 교육권력 해체 없다. 교육권력에 대한 정면적인 해부는 우리의 교육개혁을 위한 첫걸음이다. 교육개혁은 반드시 교육권력의 해체와 맞물려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평가위주의 교육정책이 우리 나라의 교육을 파행적으로 이끌어오기까지는 교육권력의 공헌이 지대했다. 이러한 교육행정체제의 개혁이야말로 국가행정체제 개선의 첫걸음이다.

주장 1. 교육권력독점을 해체하라.

교육학자들의 정책전횡의 배경에는 교육학권력의 독점이라는 학벌의 문제가 내재되어있다. 그 가운데 표면적으로 문제될 수 있는 것이 고등고시의 교육행정직이다. 우리는 고등고시제도의 전반적인 검토에 앞서 우선적으로 교육행정직 선발을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5급 이상의 교육학 관료들이 농단해온 교육학계의 현실을 우리는 직시한다. 그들은 연수라는 명목으로 약 3년간의 유학을 통해 미국 등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단순한 관료가 아닌 교육학자로 변신을 거듭하면서 교육계를 좌지우지해왔다. 이후에는 학위가 있다는 명목으로 교수로 진입하거나 아니면 총장 등의 관리직으로 진출해왔다.
우리는 교육계의 많은 부조리와 비합리성이 바로 이들의 전횡과 관련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행정지원을 포기하고 교육학자로 자임하면서 지휘감독의 입장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교육부는 교육을 위한 서비스를 저버리고 과다한 공문의 남발과 잦은 평가로 현장교육자의 수족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관료의 재생산은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들 관료와 손발이 맞는 교육학관련교수들(교원대학 및 교육개발원 포함)의 정책연구의 독점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들 교육학자들은 이미 신종 카르텔을 형성하고 현장과 무관하게 그들끼리의 중앙집권화를 즐겨왔다. 이른바 정책연구는 교육학자가 아닌 진정한 교육담당자인 비교육학 학자들에게도 개방되고 확대되어야 하며, 현재의 교육학자들의 과다한 정책연구 개입을 20% 이내로 제한해야 한다. 교육관료들만의 입안은 현장을 담지 못하고 논리와 이론으로만 저 위에서 겉돌기 마련이다. 교육관료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획 능력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의견의 종합과 조율 능력이다.
2004년도 수능시험에서 드러난 것처럼, 서울사대를 비롯한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 문제의 출제는 형평성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대 인맥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집단이 그들의 부와 권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가장 공정해야 할 대학입학시험조차 한쪽으로 편향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특히 서울사대는 교육의 중심이 아니라 권력의 중심이며, 그 권력은 더 큰 권력으로 커지기 위해 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원재벌 등 사회의 특권층과 결탁하고 있다.
청소년을 볼모로 삼고 있는 이런 교육권력은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에 기생하고 있는 사교육시장과의 관계를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교육과 권력이 분리되지 않는 한, 문제 하나가 돈 얼마가 되는 풍조는 만연될 수밖에 없다.
주장 2.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라.
우리는 현장교육자의 정책입안참여가 보장될 것을 촉구한다. 일선 교육자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 교육정책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우리는 법제심의위원회 등과 같은 각종 의사결정기구에 현장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60% 정도의 교사나 교수(교육학 관련학자 제외)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정책전횡을 막기 위해 교수 30%, 교사 30%, 교육학자(관료포함) 30%, 학부모 10%의 비율은 필수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교육위원회는 노무현 정부의 교육혁신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항구적으로 담당하는 기구를 말한다. 현재의 관료조직과는 달리, 연구를 중심으로 대안을 개발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현재에도 시민단체를 비롯한 많은 기구에서 망국적인 교육병을 치유하기 위한 갖가지 대안을 내놓고 있는데, 이것을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정리할 국가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안에 대하여 그것의 문제점은 없는지, 실현가능성은 있는지를 신중하고도 세심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교육이란 젊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결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국가교육위원회는 기존 교육부의 논리를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고 세계의 교육제도의 장점을 집약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법무부가 있어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있듯이, 우리의 망국적인 교육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직속의 국가교육위원회 설치가 시급하다.

질문과 답

▶ 국가의 조정역할은 어떻게 되나?
▷ 고위급 교육정책입안자가 없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교육의 관리감독체계가 아닌, 행정의 지원보완체계로 탈바꿈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마디로, 행정에 대한 교육 우선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교육정책은 아래로부터 상향되어야지, 위로부터 하달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교육관료는 학교와 싸울 일이 없어야 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경제부와 싸워 많은 돈을 끌어와서 집행하면 될 뿐이다. 교사와 학부모가 만들어 낸 것을 교육부가 따르면 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부가 교육현장에서 손을 떼고 귀를 여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교육부는 감독이 아니라 지원의 부서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우선은 기존의 체계 내에서 승진을 통한 진급제도를 선택해야 한다. 이는 교육학권력의 배타적 집권을 막기 위해서이다. 아울러 일정한 자격이 충족되면 현장의 교육자가 관료로서 발탁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2003년 현재 447명의 행정직(교육전문직, 일반직) 가운데 장학관과 연구관을 제외하면 현장파견교사는 4명에 불과하다. 독일의 교육행정직이 대부분 교사출신(현장 90%, 고시 10%)인 것과는 대조적이며, 프랑스가 동수(同數)위원회를 통해 교육행정국과 지역교육위원회를 같은 숫자로 안배하여 정책을 입안하는 것과도 비교된다.


▶ 대학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교육부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 우리가 꿈꾸는 것은 교육자치이다. 현재의 교육인적자원부는 두 가지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이는 분할되어야 한다. 교육부는 내무부(교육청)로, 인적자원부는 노동부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육청에서 모든 일을 알아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상위기관으로서의 교육부가 존속할 까닭이 없어진다.
서울대 학부개방, 사범대학원 설치와 같은 사업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하면 된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부를 개혁할 주체가 설정되어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국가부서로 교육부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국가교육정책의 결정에서 교육부가 필수불가결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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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학의 교육과 연구는 파행적이다. 이른바 '놀고 먹는 대학'의 모습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현상도 학벌과 직결되어 있다. 1등 대학은 1등이라서 공부하지 않고, 3등 대학은 3등이라서 공부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에게까지도 연결된다. 교수가 아무리 1류라도 그가 3류에 있으면 3류 교수일 뿐이다. 그가 1류로 옮기면 학문과는 무관하게 갑작스럽게 1류 교수가 된다. 결국 우리의 체계는 교수와 학생을 성실하게 평가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학벌만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인문사회계열은 모두 고시공부에 매달려 있고, 자연이공계열은 한의대, 수의대를 포함하여 의약계열 편입에 매달려 있다. 러시아를 전공하는 학생이 수업시간에 행정법을 보고,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공대생이 한의학과를 가겠다고 수능시험을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서울의 사립대학원은 학교재정을 위해 무시험제도 마구잡이로 선발하고 있고, 지방대생은 '학벌세탁'을 위해서 서울의 큰 규모의 대학원으로 몰려든다. 그러니 지방대의 대학원에서 탈락한 사람이 서울의 명문대학원을 합격하는 일도 생기고, 지방대 대학원은 고사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적어도 필요한 조치가 바로 실용학문의 대학원화이다. 실용학문의 선택을 대학을 입학하면서 하지 말고, 대학 4년을 지낸 후에 하자는 것이다. 이럴 때만이 인문자연계의 기초학문이 살아날 수 있다. 문학을 공부한 후 법학을 하고, 물리학을 공부하고 의학을 하자는 말이다. 사회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를 하고, 생물학을 공부하고 수의사를 하라는 말이다. 적어도 대학 4년 동안 충실하게 인문학과 자연학에 대한 기초를 닦고 난 다음 실용학문으로 나가야 한다.
따라서 대학의 학문체계가 전반적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전국 각 대학 내의 실용학문은 대학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현재에도 의대는 점차 학부정원을 줄이고 대학원 체제로 진행되고 있으며, 법대는 법조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학대학원(law school)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덧붙여 경영학과나 행정학과도 장기적으로 대학원 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대학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 단순히 점수만 높은 학생들이 대학의 인기학과를 찾아가는 형국에서는 진정한 학문이 자라날 방도가 없다. 순수학문을 전공해본 학생들이 실용학문을 찾아가는 서순을 밟는 것이 학문과 국가의 발전에 유리하다. 이상적으로는 역사학을 해본 사람이 법관이 되고, 문학을 해본 사람이 의학을 하고, 기계공학을 한 사람이 경영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의대, 법대는 진행 중에 있으며, 서울대의 경우, 행정대학원만 있을 뿐 행정학과는 없기에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사범대학이다. 현실적으로 사범대학이 존속할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기득권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현재 중등학교 교원수급은 임용고사라는 제도를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에, 굳이 사범대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교원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초등교원양성을 제외하고는, 일반대학과 병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범대학은 막강한 교육학권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흐트러뜨릴 어떤 조치도 거부하고 있다.
현재의 체재에서는 이를테면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과가 동시에 존재할 이유는 없다. 단지 국문과에서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교원임용고사를 치르면 될 뿐이다. 때로는 특정교육학과 때문에 그와 동일한 다른 학과에서는 교직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현상도 각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역사교육학과 때문에 사학과에서는 교직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범대학은 하루 속히 대학원체제로 바뀌어야 하다.

주장 1. 응용학문을 전문대학원에서 교육하라

사범대학 학부는 의대, 법대와 마찬가지로 원론적으로 폐지되어야 하며, 대학원체제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교사양성은 4+3 제도가 된다. 이는 법학대학원, 의학대학원, 경영대학원의 체제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다. 오늘날 교사가 학부형보다 높은 학력을 지닐 시대적 필요성은 요청되고 있다. 게다가 학부에서 전공해온 교과목을 바탕으로 교육대학원과정을 이수하면 교사의 수준은 한 층 더 전문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교육학 위주의 사범대학 과정은 일반교과목을 심층적으로 이수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사범대학 폐지는 아래의 과정을 겪으면서 재편성된다. 사범대학 소속의 교수는 이른바 '내용학'에 따라 자율적으로 기존 단과대학의 특정학과나 학부를 선택해서 가고, 해당학과는 의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수학교육학과 교수의 경우는 대체로 수학과를 선택하여 갈 것이나, 윤리교육학과 교수의 경우는 사회학과, 정치학과, 철학과를 선택해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교육학이나 교과교육학 교수들은 기존학과나 사범대학원으로 선택하여 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교원대학의 학부도 폐지되어야 한다. 현재 교원대학 학부는 일반사범대학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존속할 이유가 없다. 다만, 현행의 제도에서 교사의 재교육을 위해 2년 동안 파견(연구휴직)될 수 있는 석박사 과정은 일반학위가 아닌 전문학위, 다시 말해, 대학교수가 될 수 없는 과정으로 신중히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국내외의 일반박사학위자에게도 소정의 일정기간의 교육을 거쳐 교사자격증을 부여하고, 국가가 의무적으로 채용할 것을 권고한다. 일반박사라 해서 반드시 중등교육을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6개월 정도의 교육과정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반박사가 중등교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논법은 우리 나라 교육의 100년 대계와 상치하는 주장이다. 만일 박사가 중등학교에서조차 필요하지 않다면 우리 나라 교육에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 교육의 연계성을 위해서라도, 수박 겉 핥기 식의 교육이 아닌 진정한 내용교육을 위해서라도, 교육전문학위자가 아닌 일반박사학위자가 중등학교 교사를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요청되는 일이다.

주장 2. 대학의 학문체제를 조정하라

대학의 학문체제는 대학선발체제의 개편과 더불어 조정되어야 한다. 현재의 이공계 중심의 대학체제는 기업의 인력수급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그것이 대학의 중심교육목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립대학은 기초학문을 중심으로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인문계의 문학, 사학, 철학이나 자연계의 수학, 물리학, 화학은 돈이 되지 않지만 국가의 건강성을 유지시켜나가는데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학문이다.
응용학문이 대학원 체제로 전환되면 이런 현상은 일정부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학부에서는 기초를 위해 이런 과목을 성실히 이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자질이나 재능이 바로 기초학문에 있는 것을 깨닫고 이를 전공할 학생도 생길 것으로 기대된다. 이를테면 근래 자연계열의 적지 않은 학과들이 중국, 베트남의 학생으로 운영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인문대학도 이와 비슷한 처지로 점차 바뀌고 있다.
기초학문의 실력이 곧 응용학문의 밑바탕이 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전문대학원의 선발에서도 이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문학과 과학이 되지 않고 대학원을 공부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같은 학문의 통폐합도 신중히 고려되어야 한다. 중소도시에 독문과가 서너 개씩 있을 필요도 없으며, 물리학과가 네다섯 개씩 있을 필요도 없다. 모든 국립대에 같은 학과가 모두 있을 필요도 장차 사라질 것이다. 교양과목을 위한 교수는 확보되어야 하겠지만, 전문적인 연구를 위해 교수를 한 곳에 모아놓을 필요도 있다. 교수가 선택적으로 교양역사를 담당하거나(강의교수) 전공역사에만 매달 릴 수도 있고(연구교수), 특정 대학에 모여 같은 분야를 연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서양고대사는 A대학에, 과학사는 B대학에, 중국사는 C대학에 집중되어 있는 식이다.
학점관리도 당장 실명제가 되어야 한다. 어떤 과목에 A를 얻었다가 아니라 '누구의 어떤 과목'에 A를 얻었다고 표기되어야 한다. '법학개론(홍길동)'이라는 식의 성적표로 교수의 이름이 드러나게 만듬으로써 교수에게 책임감을 주어야 한다.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의 바로 그 성적을 사회적으로도 인정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 과목을 들었다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배웠다는 문화가 되어야 학문적 진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석박사 논문심사도 강화하여, 박사의 경우, 독일처럼 출판을 의무화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학위의 양산을 막아야 한다. 특히 교육대학원 학위의 경우, 때로는 학문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논문이 교사의 평가와 승진을 위해 남발되고 있어 학문적 평가절하를 야기하고 있다.

질문과 답

▶ 사범대학을 없애라는 것은 교육학을 완전히 없애자는 말인가?
▷ 아니다. 교육학은 학문 중의 학문으로 최상위에 놓여야 한다. 그러나 교육학이 대학의 과정으로 있으면서 단지 교육학 전공 교수를 위해 학과를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교육학은 대학원 과정에 있으면 되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교양과 과목과 같이 학생은 없고 교수만 있는 체제(교육학 교수부)로 존속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주장이 대학에서 교육학 과목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교육학 전공자는 공급과잉상태에 있다. 그것은 교육학 전공 교수를 위한 교육학과 개설이라는 앞뒤가 바뀐 대학운영에 그 원인이 있다. 교육학 전공자는 중등학교에서 교육학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거꾸로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게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현 제도이다. 교육학과 학생들은 국어, 영어, 수학, 그리고 윤리조차 부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아무 것이나 할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최초 교육학이 학교에 자리잡았던 까닭은 사범학교 시절 중등교사양성과정을 위해 교육학 과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63년 사범학교의 해체와 더불어 갈 때가 없어진 교육학 전공자들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대학 내에 교육학과를 설치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교육학은 교사가 되려는 학생이 반드시 들어야 할 과목 가운데 하나이지, 그것만으로 학부전공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테면, 중등학교에는 분명히 '교육학'이라는 과목이 없기 때문에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윤리교사를 하려면 윤리나 철학을 공부해야 함에도, 교육학과는 그러한 기본전공조차 없이 운영된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우리 교육의 왜곡이 시작된다.
아울러 학부과정에서는 교과교육학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 불필요하다. 각 과목마다의 교과교육학은 학문을 지나치게 기술화시킴으로써 창의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교육학이란 그 역사가 100년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실용의 학문이다. 실용학문을 목적화시켜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의 사범대학 폐지론은 한마디로 교육학 제자리 찾기 운동이다.

▶ 사범대학원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이 아닌가?
▷ 비록 대학원체제는 신설이라 할지라도, 기존의 대학의 시설과 교수를 이용하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범대학원의 설치는 상당히 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력의 수급을 조정하기 위한 정원의 감축은 필수불가결하다. 현재 교사자격증의 남발은 지나친 기대심리를 부여하고 있고, 이에 따라 제대로 된 교사양성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범대학원이 곧 현재의 교육대학원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국의 사립대학 등에서 영리의 목적으로 운영되는 교육대학원의 석사 과정은 단순한 승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른바 학벌 상승 효과만 있을 뿐, 실질적인 학습과 연구는 안중에도 없는 현재의 교육대학원은 실제적으로도 이미 효용성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

▶ 교원대학이 불필요하게 되지 않겠는가?
▷ 장기적으로는 그렇다. 특히 교원대학에서 남발하는 학위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교원대학의 학위는 전문학위이어야지 일반학위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교수가 되기 위한 학위가 아닌 교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학위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원대학의 기능조차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교원 재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은 필요할 것이다. 이른바 교원연수원으로서의 기능이다.

▶ 교원양성기간이 너무 길어지는 것은 아닌가?
▷ 길어져야 한다. 현재 학부모의 학력이나 교사의 학력이 비슷하거나 떨어진다는 것은 존경과 권위의 유지가 그만큼 어려워졌음을 뜻한다. 교사는 만인의 스승으로 일정정도의 자격이 당연히 요청되어야 한다. 과거의 교사자격이 미래에도 충족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학제개편(4+3)과 더불어 완성될 일이다. 다른 의학이나 법학전문대학원제도(4+3)와도 같을 수 있다. 여기에는 최소 6개월 이상의 실습과정이 포함된다. 다만, 국가교육전반에 걸친 학제개편(예: 5+5+4+2)은 별도로 논의되어야 한다.
현실에서도 교사가 되기 위해 재수, 삼수는 물론이고 편입조차 만연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2년의 대학원 체제는 그다지 시절과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실질적으로도 보건대학원, 환경대학원, 행정대학원 등은 학부가 설치되어있지 않은 대학도 있다. 이와 같이 사범대학원은 학부 상위의 체제로 정립되어야 한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범대학원이 졸업 후 자동적으로 교사가 되는 목적형 기관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게 설정될 필요가 있다.
이런 사범대학원 제도는 대학의 기초학문을 살리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 판단되며, 장기적으로는 교사의 신분상승과 전문성이 유도될 것이다. 운전면허 다음으로 많은 교사자격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 교육부의 전문학위제와는 어떻게 다른가?
▷ 교육부에서 계획하고 있는 전문대학원제도는 현재의 교육대학원이 실질적으로 그 효용가치가 없어지자 그 대안으로 제시된 미봉책에 불과하다. 전문대학원안은 전문학위(교육학전문박사, 예: Doctor of Education 또는 Doctor of Public Administration)와 학술학위(일반박사, 예: Ph.D. in Education 또는 Ph.D. in Public)를 구별하여 전문학위과정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많은 문제점을 담고 있다.
이른바 교육대학원이 더 이상 석사과정생을 공급받지 못하자 박사과정생으로 단계만을 올려 학벌상승만을 부추기고 있으며, 전문대학원을 신설하여 그 교수요원으로 교육학권력이 다시금 자리잡으려는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박사의 남용은 우리 교육계의 위상을 하락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 일반박사학위자가 교사가 된다면 기존의 교사와 갈등이 발생하지 않을까?
▷ 일반박사학위자라도 교사자격을 위해서 소정의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라고 할지라도 똑같은 교사의 훈련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들이 입시위주의 교육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교육현장이 왜곡된 것이 문제이지 그들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미래의 이상적인 중등교육에서는 학문의 깊이는 필요 없고 정제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일반박사학위자가 중등교육을 담당할 수 없다면, 우리 나라 교육의 미래는 없다. 장기적으로 교사요원은 교수요원과 마찬가지로 계급적 차별이나 학력의 차이가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질적 집단이 공존해야 서로를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학술박사와 교사의 일정부분의 마찰은 오히려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아울러 여러 악기를 다루어야 하는 음악(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이나 다양한 기법의 미술(뎃생, 사군자, 서예)과 같은 예능과목은 교원자격증이 없는 전문가가 강사로서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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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공직자의 출신대학별 비율을 보면 서울대(약 30.7%), 고려대(7.5%), 육사(7.4%), 연세대(6.5%), 성균관대(5.9%) 등 5개 대학 출신들이 전체 고위공직의 약 58%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관료제 사회에서 가장 권력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공직을 몇 개 대학 출신들이 독점하고 있다. 이러한 특정대학의 공직 독점은 다른 분야까지 영향을 끼친다. 기업에서 서울대 출신을 선호하는 것도 다른 어떤 이유보다 공직이 서울대에 독점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이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는 한국에서는 기업 운영을 할 때도 언제나 국가 기관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서울대 권력이 계속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위공직자 임명시 특정대학의 비율이 30%를 넘지 않아야 한다. 공직은 전국민을 위한 봉사직이지 몇몇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무원 채용시 특정대학이 10%를 넘게 되면 공직이 사유 체제로 변질되기 쉽다. 게다가 우리 나라의 행정을 좌지우지하는 고위공직자 가운데 특정대학 출신자가 30%를 넘는다는 것은, 공직의 공익성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우리가 '대학별 공직 제한제'를 주장하고 이를 위한 법안(가칭: [공직의 균등임용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자는 이유이다. 특히 이는 고위직의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의지로도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질문과 답

▶ 지역별 인재 할당제를 실시할 때, 대졸자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닌가?
▷ 지역별 인재 할당제는 우선 각지역의 인구비례에 따른 공직자의 배분을 뜻한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말하는 지역은 '출신 대학이 속한 지역'이 '태생에 따른 출신 지역'에 우선 적용되기 때문에 대졸자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다. 대졸자가 아니더라도 인재할당에 해당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시제도는 7급 중심의 선발체제로 개편되는 것이 옳다. 고시제도가 갑작스런 개인의 신분상승의 기회처럼 여기지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익성이 담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회성 시험으로는 인물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으며, 중간 및 최고 관리직이 되기 위한 공직자끼리의 경쟁도 보장하지 못한다.

▶ 지방의 거점국립대학들이 지나치게 중심화되는 것은 아닌가?
초기단계에서 이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서울소재의 대학과 상대할 다수의 지방의 국립대학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사립대학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며, 국립대학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집중 육성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지원과 더불어, 국립대학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중복투자와 같은 비효율성을 방지하는 적절한 체재개편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의 시점에서 법학대학원, 의학대학원, 사범대학원 그리고 경영대학원 등도 거점국립대학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관련 학부의 폐지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국립대학의 무상교육, 장학금 지급, 기숙사 설비 등 특단의 조치가 실시될 것을 요구한다. 서울대에 독점적으로 투자되는 돈이 지방의 국립대학에 분산되어야 한다. 전국의 거점국립대학의 육성은 수도권 집중 억제와 지역간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 현재에도 국립대학 교수채용시 한 대학 출신이 2/3 이상 되지 못하게 되어있는데도, 지켜지지 않는데?
▷ 현재 국립대학의 경우 교수채용시 특정 대학 출신이 2/3를 넘지 못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그 설정기준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집단위별 2/3'가 우선적이며, 게다가 '당해년도'라는 한정적 표현이 따라, 현실적으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3명의 신임교수를 뽑는다고 가정할 때, 한 과(예: 역사과)의 모든 교수가 A대 출신이더라도 그 과가 속한 같은 모집단위(예: 역사철학군) 내의 다른 과(예: 철학과)에서 1명의 B대 출신을 뽑았으면, 2명의 A대 출신을 더 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정의 기본원칙은 적법성에 있다. 따라서 그것이 규정으로서 강제성을 띤다면 어떤 공무원이라도 이를 지키지 않은 방법은 없다. 따라서 법령으로 제한된 할당을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실효성은 보장된다. 문제는 규정의 모호성에 있지, 규정의 실효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서울대에서 타교 출신 교수를 뽑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법령의 엄정함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개방성에 기초한 자발적인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서울대는 '같은 대학(university)'의 해석을 '같은 단과대학(college)'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 여전히 서울대 중심주의를 보완, 확대하고 있다.

▶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것은 당연한데, 이 제도 때문에 탈락된다면.
▷ 특정 대학에 특별의 기회를 주는 것은 상당한 불평등을 야기한다. 이를테면, 모 대학에만 취업의 기회를 주는 것 등이다. 그러나 전 대학에 일반의 기회를 주는 것은 평등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전 국민에게 공무원 임용시험의 합격 가능성을 넓혀주길 희망한다. 이른바 능력주의란 공정한 경쟁에서 타당한 개념이지, 우리의 현실에서처럼 경쟁조차 차단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도 능력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일류대에 간 능력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일류대에 가서 일류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파하자는 것이다. 일류대만 입학하면 일류가 아니라, 지방대에서도 일류의 인재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다.

▶ 학벌도 장애자, 여성, 외국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과 같이 분명한 차별의 기준이 있는가?
▷ 학벌은 여성, 외국인 노동자와 같이 천성 또는 신체적 조건에 따른 차별과는 다르다. 학벌은 오히려 이런 모든 차별 속에 또다시 내재한 차별이기 때문에 가장 '포괄적인 차별'에 속한다. 장애자, 여성,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로 차별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학벌로 다시 차별되는 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공고화시키는 기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여자로서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자들은 더욱 학벌을 차별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장애자와 외국인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 벌어지는 학벌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차별 받는 속에 더욱 차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벌은 어떤 차별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여성인재할당제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할당제에 적극 찬성하고, 학벌의 문제와 많은 교집합이 있을 것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대치되었을 때는 학벌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학벌은 공공의 이익(이를테면, 여성은 국민의 50%에 해당된다면 학벌차별은 국민의 대다수에 해당)과 관련되어 불평등이 너무도 크다는 점에서 학벌문제를 최우선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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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과 상급 학교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학생의 흐름을 양적, 질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시험 제도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입시는 국가가 관리하는 선발 시험 제도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평가가 교육 과정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평가에 의해 교육 과정이 역으로 왜곡 당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평가가 교육을 지배할 때 교수 학습 활동은 시험에 대비한 능력을 키우는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문제 해결력 등 시험에서 요구되는 기능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고,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주입식 수업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서열화된 대학 구조를 가진 우리 나라에서는 이 평가로 인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이 배제되어 있는 '입시선수'가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를 통해 시험을 위주로 하는 입시경쟁이 사라지면, 초중등학교 교육도 더 이상 대학을 가기 위한 시험에 종속되지 않고 본래의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윤리시간에는 철학을, 국어시간에는 시와 소설을 온전하게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의 타파를 위해, 우리는 수능의 난이도를 지속적으로 낮추어 자격고사화하며 궁극적으로는 학교나 학생이 시험을 선택할 수 있길 요구한다. 아울러, 대학입학전형을 대학에 완전히 맡겨 스스로 책임지고 학생을 선발할 수 있길 희망한다. 수능점수에 따른 '인간 서열'이라는 거짓이념은 더 이상 재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주장 1. 대학서열화 기제인 수능을 자격고사화하라.

수능시험의 본질이 권력집단에 들어갈 사람을 뽑고, 그 불평등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속임수 장치'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수능시험이 마치 한 개인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학벌로 권력을 독차지'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그러한 권력을 누린다고 착각한다. 한편 시험 점수 따기 경쟁에서 진 사람은 수능시험의 능력을 들먹이는 '거짓이념'에 속아 학벌차별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기 능력을 탓한다. 그래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대신 다시 시험에 매달려 그러한 권력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나라의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은 교육 목표의 성취 수준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상대적인 서열을 매기는 획일적 시험이다. 또한, 이 시험의 운영과 문제 출제 과정은 중등교육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진행되기 때문에, 중등교육 기관을 하나의 독립된 교육 과정을 책임지는 기관이 아닌, 대학 입학 이전의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의 하부 교육 기관처럼 전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점수에만 관심이 있는 현재의 수능은 교육과정의 극심한 왜곡을 가져온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격고사는 일회성 시험이 아닌, 교육과정의 평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시험은 선발과정의 통제 장치로서의 기능보다는,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했는지 여부를 평가한다. 이는 중등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며, 대학 입학전형의 자료로 선택적으로 활용된다. 수능의 졸업자격고사화는 본질적으로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대안이며, 수능성적만으로 형성되고 있는 수직적인 대학서열화를 타파하기 위한 방안이다.
아쉬운 것은 많은 교육계의 의식있는 인사들조차 학벌과 수능의 필연적인 관계에 대해 그다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학벌이 허상이라면, 그것의 설계도가 바로 수능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학벌과 수능으로서의 세계'로 정의된다. 오늘날 수능은 학벌이라는 요괴를 지키고자하는 매트릭스로서 작동하고 있다.

주장 2. 국립대 통합전형을 실시하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는 통합되어야 한다. 선발에서 졸업까지 국립대는 동일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 국립대가 통합전형된다는 것은 모든 국립대를 하나로 묶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서울대 학부가 사라짐을 뜻한다.
먼저 지나치게 비대화된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장기적으로는 지역별 국립대의 정원이 인구비례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선 신입생 선발은 소재지역 출신의 대학진학 희망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립대 신입생의 50%는 동일지역 소재의 고등학교 졸업자에게 할당한다(이는 지역인재할당제와도 관련된다). 나머지 50%는 지역의 구분 없이 개방하여 충원하는 식이다.
그리고 전형시에 대학은 무시험을 원칙으로 하되, 여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현행 제도도 학생 선발을 대학에 원칙적으로 맡긴다고는 하나, 수능이 전국의 학생들을 점수로 서열화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국가가 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대학이나 학과의 성격이나 특성을 무시한 현재의 선발방법은 중등교육의 황폐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대학이 입학의 진정한 자율성을 확보할 때 학생도 비로소 나름대로의 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재능과 취미 그리고 개성에 따른 선발방식이 다양하게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제도에는 소수자와 약자가 적극적으로 배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다양화는 장차 대학을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서열의 획일화의 둔화에도 크게 기여한다. 아울러 국립대학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소년소녀가장 및 농어촌자녀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원의 일부를 좀더 개방함으로써 공익성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경상대 사회과학원에서 제시한 '국립대학 통합네트워크 구축안'(사회과학원장 정진상 사회학과 교수, 2003.11.19.)에 적극 동의한다. 그 안은 내용에서도 밝혔듯이 처음부터 우리의 이념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작성된 것이며, 앞으로도 같은 방향의 목적을 위하여 동조할 것이다.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법학과 의학 및 교육학 등 전문대학원 입학을 우리는 대학4년 졸업 후로 비교적 늦게 잡고 있는 반면, 그 안은 대학2기 과정(현행의 3학년 과정)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잡고 있다.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경상대 사회과학원 안은 국립대학정원의 70%는 내신으로, 30%는 자격고사로 뽑은 후, 대학1기 과정 이수자(현행 2학년 이수자)에게 전문대학원 과정을, 대학2기(4학년 이수자)에게 일반대학원 과정을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전문대학원은 학부 1기 과정 성적 50%와 별도의 시험 50%로 선발하며, 서울대 일반대학원 정원의 80%를 국립대학 학부 출신에게 배정한다는 안이다.

질문과 답

▶ 수능시험과 대학서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 대학서열은 입시경쟁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이 입시 경쟁이 곧 수능시험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수능시험이 점수에 따라 1등부터 줄을 세운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입시경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입시경쟁은 많은 학생들이 학벌로 권력을 독점하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수능시험이 국가적 차원에서 엄격히 평가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변별력'이라는 구실로 난이도를 높이고 이른바 일류대학 입학가능자를 최우선적으로 골라내는 현실은, 학업의 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적 상위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수능이라는 국가적, 객관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세습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대학의 서열구조가 자꾸만 공고히 되는 것이다. 나아가 대학서열은 학벌 권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국가적 차원의 모순으로 드러나게 된다.
만일 특정 대학에 독점된 권력이 해체된 상황이라면, 수능시험이 현행대로 있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극심한 입시경쟁은 완화될 것이며, 입시경쟁에 따른 대학서열도 고정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입시경쟁은 대학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학벌 기득권을 누리는 이른바 일류대학의 문이 좁아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현재처럼 수능시험이 대학 서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한, 수능 서열과 대학 서열은 나란히 갈 수밖에 없다.

▶ 특정대학의 권력 독차지가 사라진다면, 대학이 평준화되는 게 아닌가?
▷ 평준화는 학업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평준화라는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바로 서열화를 공고히 하려는 집단에 의한 고의적인 왜곡 때문이다.
사실상 평준화는 모든 교육의 이념이다. 교육을 균등하게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평준화가 좋은 예이며, 미국의 주립대학이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학벌권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평준화에 대한 악의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평준화라는 말을 쓰면서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통합전형이나 졸업장 단일화 등과 같은 개념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평준화는 하향식 조정이 아닌 상향식 조정이라는 점이다. 서울대 학부의 개방과 더불어 등장하는 연고대에 비견될만한 대학으로 우선 전국의 국립대학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국립대학은 유수의 사립대학과 경쟁해야 한다.
엇비슷한 대학이 전국에 골고루 산재할 때만이 우리의 학문적 경쟁은 활발해 질 수 있다. 집중된 권력이 전국의 대학을 통해 분산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전통이 양산되길 희망하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몇 개 대학의 권력독차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제도(독점을 금지하는 법안 등)로 이를 방지하면서 입시제도를 개선한다면, 소수의 대학에 맞설만한 다수의 대학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졸업자격고사 또한 수능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 현재의 수능은 상위고득점자를 변별해내기 위한 시험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졸업자격고사는 고등학교 졸업학력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수능을 더욱 쉽게 낸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수능 만점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 시험에서 어떤 기준을 넘으면 거기서 점수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졸업자격고사는 먼저 학교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이다. 현행 수학능력시험은 시험의 출제나 채점, 그리고 관리에 있어 중등학교와 연관성이 적다. 이에 반해 졸업자격고사는 원하는 교육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 그 기본 성격이다.
이를 통해, 초중등 교육이 대학입학에 종속되지 않고, 학교와 급별로 아동과 청소년의 신체적 성장과 정서적 발달 단계에 걸맞는 교육목표를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가르치는 자가 평가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 졸업자격고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인가?
▷ 현재의 수능보다 좀더 완만한 격차를 둔 자격고사를 뜻한다. 정확한 점수보다는 대학에서 시행되는 성적판별기준인 A, B, C, D, F 정도의 변별성을 가리킨다. 점수로 환산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현재처럼 세밀한 점수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점수는 다시금 대학 서열을 조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졸업자격고사는 한마디로 '뭉뚱거려진 수학능력시험'이라고 보아도 좋다.
중등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내신성적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졸업자격고사는 입학전형의 참고용 자료로 이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센타시험'이 대학입학희망자 모두에게 강요되지 않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 본고사 부활의 가능성은 없나?
▷ 통합선발의 체제는 국가가 시험을 전형하는 것이다. 내신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을 적용할 수 없을 때는 졸업자격고사로 대체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대학 나름대로의 입시제도가 마련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창의력과 개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야지 과거의 본고사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형자료는 자기소개서를 중심으로 한 학업계획서를 위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종의 무시험 전형이다.
본고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수한 대학에서 자신들의 독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이다. 서울대 학부가 개방되어있고 공직독점금지가 실행되고 있는 마당에, 인재가 특정대학에 집중될 까닭은 없다. 학생들은 서울로 집중되지 않고 지역 내에서 수급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점차 서울에 집중된 관심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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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문제가 몇 개 대학이 우리사회 모든 분야의 권력을 독점해서 생긴 것이라면 학벌문제의 해결은 여러 방향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첫째는 권력 편중현상을 해체하는 것이며, 둘째는 낮은 서열의 대학을 육성하는 것이며, 셋째는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권력독점의 주범역할을 하고 있는 '권력집단으로서의 서울대'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서울대 학벌문중'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대의 권력 독점 현상을 2002년 1월 기준, 중앙 인사위원회 발표 자료를 참고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심각하다. 이 같은 편중현상은 오늘이라고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부처

장,차관

검사장 급

부장판사

재경부

외교통상부

서울대 비율

61%

69%

83%

74%

75%



이 독점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회적 차원에서 '지역별 인재 할당제'나 '대학별 고위공직자 제한제' 등을 통해 특정 대학 출신의 고위직 독점을 줄여나가는 노력도 해야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워낙 크고 힘센 지금의 서울대 권력을 해체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정책 차원에서도 서울대라는 권력집단이 더 이상 새로운 권력후계자를 충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대의 학문과 권력은 엄중히 구별되어야 한다. 현재 서울대는 학문의 중심부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울대 학부 졸업장이 곧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가치 부여되고 있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 학문은 학부가 아니라 대학원에서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가 진정 학문의 중심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학부를 버리고 대학원 체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현재 서울대에서 학부를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곧 서울대가 학문이 아닌 권력의 중심부임을 반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학부 없이 좋은 대학원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논리는 오늘의 서울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어불성설에 가깝다. 문과는 고시에, 이과는 의대 시험에 매달리고 있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학부교육은 시작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시 일정 때문에 학사 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 현 서울대의 현실이다.
전국 각지의 우수한 학생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교육시킬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겠다는 데도 학부를 고집하는 것은, 서울대가 학문보다는 권력의 계승에 더욱 집착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비서울대출신 대학원생은 서울대학벌이라는 신분획득을 일정부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의 순정성을 유지시키려는 유치한 발상이 서울대내에서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마치 조선시대에 적자와 서얼을 구별하는 태도와는 매우 흡사한 것으로, 학벌이 현대판 신분제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학생들 내부에서조차 편입한 학생들을 서자 취급을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학벌문제가 젊은이들의 의식에게까지도 얼마나 깊게 오염되어있고 넓게 폐해를 끼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주장 1. 서울대 학부를 개방하라.

우리는 서울대 학부를 완전히 개방할 것을 요구한다. 서울대는 그 설립에서부터 일반대학과는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또한 그 경영에 있어서 막대한 규모의 국민의 세금을 바탕으로 하여 운영되기에 서울대학교의 교육활동의 결과는 우리 사회 전체에게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대학교는 그런 국민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소수 권력집단의 생산소로 전락했다.
서울대 개혁의 첫 번째 단추는 권력을 재생산하는 자체 학부생을 모집하여 권력의 획득물인 졸업장을 제공하는 역할을 그만두는 데 있다. 서울대학교는 지금까지 축적해 놓은 학문적인 성과를 국민에게 개방하여야 한다.
우선적으로 전국의 국립대의 학생들에게 서울대학교의 학부과정을 개방하고, 그것이 안착되면 점차 모든 대학에로 확대 개방하여야 한다. 전국의 국립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소속학교의 학부과정을 이수하면서, 동시에 본인의 필요에 의해 서울대학교의 학부 과정에 개설된 전공 강좌에 수강신청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하여 학문적인 성취를 높여 나가야 한다.
우리의 주장은 서울대 ‘학부 폐지’가 아니라 ‘개방화’이다. 아울러, 우리는 서울대 ‘학부 축소안’으로 우리의 논의를 희석시키거나 정책의 지연을 야기하는 술수는 엄정히 거부한다. 축소안은 진정으로 기초학문의 소수정예를 기르는 방안으로 현재정원의 100분의 1(학년별 40명선)로 줄이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흔히 서울대 양성을 위해 거론되는 프랑스의 엘리트 양성소인 고등사범이나 폴리테크닉의 정원은 50명, 그리고 국립행정학교는 200여명에 불과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의 국립대 평준화안에는 서울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평준화가 이루어졌을 때, 서울대 학부 존속의 의미는 현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서울대 학부의 존치는 인문학 등 기초학문을 위해 일정 부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울대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력독점의 정점에 있음을 인지하고, ‘서울대 개혁 없는 다른 개혁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공교육 파행의 중심에 서울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주장 2. 서울대를 대학원대학으로 개편하라.

서울대는 자체 학부생을 선발하여 학벌권력을 구축해 가는 대신에 서울대학교의 교육 기능은 대학원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부 과정은 공개하는 것과 함께 대학원을 집중육성하여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이라는 국가의 미래를 감당하는 것이 서울대학교가 지닌 책무이다. 이를 통해 국내의 학문경쟁력을 높여 나가고 우리 학문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임으로써 국제사회 속에서 한국대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역할로 전환되어야 한다.
대학원 교육을 우선시하기 위한 많은 금전적 지원정책(BK21 등)이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개된 것은 서울대에서 ‘학부과정의 축소’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연구중심의 대학으로써 활용되어야 할 기금이 오히려 학부생의 재생산만 초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 개방화와 대학원 중심대학으로의 개편은 현재의 교육정책과도 부합한다.
원칙적으로 학문의 영역은 순수학문과 실용학문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대학은 순수학문의 영역을 맡고, 현재 학부과정으로 되어있는 의대, 법대, 사범대 및 경영대 등 실용학문은 학부를 졸업한 후 대학원 과정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의사, 판사, 교육자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의사, 판사, 교육자가 됨을 뜻한다. 이를 위해, 서울대는 순수학문 위주로 한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체제 개편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실용학문의 분리화 및 사범대학(교육대학 포함) 문제의 해결에도 일조할 것이다.

 

질문과 답

▶ 개방화하라는 것은 학부 교육을 포기하라는 의미인가?

▷ 서울대의 학부를 개방한다는 의미는 서울대가 소수 권력집단의 양성기관으로부터 국민의 교육기관으로 다시 자리를 잡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대는 자체의 학부생을 더 이상 선발하지 않으며, 분권화된 지방의 국립대학의 학부생들이 일정기간 동안 특정한 학문의 연구를 위해 지원하여 수강할 수 있도록 개방한다는 의미이다.
서울대 학부 과정에서 추가로 이수한 학점은 소속학교의 학점 취득으로 인정된다. 이는 국내외 다른 대학에서 취득한 학점과 마찬가지로 ‘타교 이수 학점’으로 인정됨을 말한다. 현재 10개 국립대학 및 몇몇 사립대학끼리는 이미 학점교환제도를 취하고 있으므로 현실적으로도 실효성이 높다.
서울대 학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들에게 열린 배움의 장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결국 서울대 학부를 개방한다는 것은 학부 교육의 포기가 아니라 오히려 학부 교육을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서울대 학부는 졸업장 수여기관이 아닌,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환골탈태되어야 한다.

 

▶ 그렇다면 엘리트 교육을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인가?

▷ 지금까지 정부정책은 한 대학에 집중적인 지원을 해서 이 나라를 지배할 소수의 인재를 키우자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의 엘리트라면 우리는 그 말 자체에 반대한다. 나라의 운영을 특정 집단이 좌우해서는 안되며, 모든 개인이 언제라도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자유롭고 동등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엘리트 교육'이라는 듣기 좋은 말로 위장된 서울대의 본질은, 국가의 운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서울대 학벌권력집단'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람을 충원하는 '지배계급 양성소'일 뿐이다.
하지만 사회 각 분야에 탁월성은 필요하다. 탁월한 요리사, 탁월한 청소부, 탁월한 학자와 기술자 그 모두가 한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소질의 탁월성은 지금처럼 획일적인 시험을 통해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 진로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사실상 점수이다. 결국 자신의 소질과 적성보다는 점수에 맞추어서 진로를 선택하는 것은 다양한 분야의 탁월성을 매몰시키는 결과를 낳게 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 교육은 너무도 비효율적이다. 우리 나라 학생들은 가장 많이 공부하지만 탁월하지는 않다. 대학교육도 전문성이 없다. 자기가 선택한 학문이 좋아서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전공학과와 관계없이 대학의 간판을 보고 대학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최근 많은 대학에서 다른 과로 옮기는 것을 허용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어떤 학과든지 무조건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보자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바로 대학서열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참된 의미의 엘리트 교육을 위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적성과 소질에 따라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 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취미에 몰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과목에서 일등을 해야 서울대를 비롯한 이른바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으니 어떻게 학생들이 자기 자신의 적성을 마음껏 도야할 수 있겠는가? 이런 환경 속에서는 시험선수만 만들어질 뿐 참된 영재는 길러낼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엘리트 교육인 영재교육은 대학원 체제(영재과정) 속에서 극소수의 인원을 선발하여 양성할 수 있으므로 굳이 대학부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과정에서의 영재교육도 지역의 해당 국립대학에서 담당하면 되므로 특별한 영재교육과정을 초중등교과과정에서 별도로 존치시킬 필요는 없다.

 

▶ 서울대를 개방하면, 그 자리에 연고대가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 이는 문제의 본질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반론이다. 우리의 주장은 대학서열화를 타파하여 학문의 본질을 되살리자는 것이지 특정 권력을 타파한 자리에 새로운 권력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서울대를 포함한 연고대 등의 특정 학벌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함께 분산해야 한다. 가능한 한 모든 대학에게 균질의 교육여건이 제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장차 연고대와 같은 사학권력집중도 분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권력의 독점에서 분산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1개 대학이 아닌 3, 4개의 대학이 경쟁하는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서울대 학부를 개방하더라도 서울대 권력은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므로, 그 자리에 연고대가 들어선다는 것은 그다지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우리의 대안은 ‘전국의 국립대학을 서울대와 같은 수준으로 올리자’는 것이니, 그 때쯤이면 지방국립대학이 연고대 등과 같은 유수의 사립대학과 함께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의 초대형 일류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상화를 포함하여 지방국립대에 대한 특단의 지원을 요청한다. 서울대만을 위한 지원이 전국으로 분산될 때, 각 대학은 특성화의 과정을 거쳐, 참다운 학문의 경쟁체제가 이루어질 것이다.
연고대와 경쟁하기 위한 전국의 국립대학의 특성화 및 통폐합은 이와 같은 서울대 개방화안과 더불어 이루어질 때만이 그 의미를 지닌다. 서울대 개혁이 전제되지 않는 한, 다른 국립대학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직독점금지의 원칙 아래, 한시적인 ‘지역인재 할당제’와 ‘대학별 공직 제한제’를 통해 연고대 등 특정대학의 득세를 방지해야 한다. 우리의 서울대 학부 개방화안은 이와 같은 공직독점금지에 대한 현실적인 조치와 더불어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다.
다만, 연고대가 완전 미국식 사학체제로 운영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이 때 연고대는 등록금을 자율적으로 책정하면서 귀족학교화할 것인데, 지방 국립대학이 무상으로 운영되는데 반드시 사학을 갈 필요는 없어지리라고 판단된다.
연고대가 인기 있는 까닭은 의대와 법대라는 신분상승의 기제와 관련이 깊다. 그런데 응용학문을 학부가 아닌 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게 하고, 그 대학원은 국가의 주도하에 설립되고 운영된다면 연고대는 결국 철저하게 여타의 학문적 경쟁으로만 살아남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연고대가 의미 있는 것은 의사, 관료, 변호사, 경영인, 교육자로서의 자격 때문일 터이나, 그것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여 전문대학원 체제로 엄격하게 관리한다면 연고대는 존립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러한 전문대학원은, 파리의 국립고등행정학교가 국경지역인 스트라스부르로 옮겨갔듯이, 지방으로 분산되어 지방분권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여야 한다.

 

▶ 학부 기준의 서열이 대학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 서울대의 권력 문제는 학부 권력의 문제이다. 그것도 대학에서의 교육과 학문의 수행 정도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입학 당시에 획득한 점수에 의한 성적으로 전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울대를 나왔기 때문에’ 대접받는다. 거꾸로 말해, ‘서울대를 졸업했기 때문’이 아니라 ‘서울대를 입학했기 때문에’ 인정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졸업장은 학업이수증이 아니라, 입학허가증이라는 유치한 단계를 아직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러한 유치한 단계를 벗어난 대학원 과정이라면 일정하게 대우받아야 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엘리트 교육의 참다운 의미도 대학원에서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서울대 학부졸업생이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대학출신이 경쟁하여 입학한다면, 대학원 과정이 학벌로 변질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서울대 대학원 과정은 반드시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발되어야 한다. 우리의 주장은 권력보다는 실력이 대접받는 풍토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 있다. 충실한 교육을 받은 대학원 졸업생을 무시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현재 지방의 대학과 대학원이 위기인 까닭은, 첫째, 학부 교육 이후에 미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 상업적인 이유가 가미되어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마구잡이로 모집하는 데 있다. 서울대 학부가 없어지면 서울대 대학원이 비교적 공정한 경쟁체재로 유지될 것이며, 4년 넘게 충실히 학업을 이수한 지방대학 졸업생도 객관적인 태도로 서울대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학부생보다 많은 대학원생을 모집하여 영업하고 있는 서울소재의 몇몇 사학은 단순히 ‘학벌세탁소’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의 실질적인 운영을 위해 적당한 방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 서민의 희망조차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 교육이 계층이동의 수단이라는 것은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는 진술이자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전설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빈곤과 차별이 세습되고 있다. 부자가 되지 못한 이 땅의 빈곤층의 부모들은 삶의 의욕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심지어 자식에 대한 기대조차도 상실한 채 나락에 빠져가고 있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장학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학업중단 청소년 실태 분석?(2002. 4. 윤여각.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학업중단 청소년의 부모나 보호자 중 86.2%가 고졸 이하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열화된 대학체제로 인한 학벌독점사회인 한국에서 최고의 가치는 학벌을 얻는 것에 있다. 이 학벌을 얻는 통로로서의 학교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간의 계층간 불평등을 구조화하고 있다. 교육 활동의 유일한 평가 절차인 대학입시의 선발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이제는 초중등학교 과정 자체에서 차별이 일상화되고 있다.
평준화가 문제라면서 학부모의 선택권과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자립형사립학교, 특수목적고등학교 등 그 이름만 가지고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많은 종류들의 학교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모두다 우리 학교 교육이 획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요자의 특성을 반영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본질은 분명하다. 자신의 아이만을 위한 부자들의 학교일뿐이다.
이제까지 현실로 드러난 이들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교육내용은 그 목적에 맞게 운영되지 못하고, 대학입시를 위해 획일적으로 운영되어 왔다. 이것은 다양성이 곧 서열을 만들기 위한 다양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선택 역시 마찬가지이다. 선택의 과정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시장에서 공급자를 선택하거나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누르고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경쟁에서의 승리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는 서열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 서열을 구분하는 최초의 출발은 학생의 능력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적인 능력이다. 학벌독점사회인 우리나라에서 학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돈인 것이다.
그러기에 등록금이 저렴한 서울대학교가 영세서민의 가정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철저한 거짓말이다. ‘공정성의 신화’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울대 학부를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기회의 확대이다. 설사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단독으로 서울대를 입학하여 신분의 상승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히 개인이 좋아지는 것이지 사회가 좋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같이 꿀 수 있는 꿈이 진정한 꿈이다.

 

▶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 서울대에 이해관계를 둔 당사자들(교수, 직원, 서울대 출신 사회인 전반)의 강력한 저항과 입시 관계 당사자들(서울대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 학부모, 각종 사교육기관 등)의 반대 여론이 예상된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권력집단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더는 늦출 수가 없다. 공교육이 황폐화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과외로 몸살을 앓는다. ‘고3’은 삶의 한 과정이 아니라, 왜곡과 환멸을 경험하는 한국병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도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있으며, 가족 파괴조차 진행되어 가고 있다. 또한, 현재 낮은 서열의 대학의 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이 상실감과 절망을 치유하고 당당한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거듭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우리는 이러한 학벌문제의 치유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있음을 확신한다. 어느 학부모가 자녀들을 입시지옥에 넣고자 하며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 자신이 부정을 저지르고자 하겠는가? 어느 교사가 자신의 임무를 학원에 떠맡기며 전인교육이라는 이념을 저버리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학생이 인격형성과 학문탐구를 위한 진정한 학교수업을 마다하겠는가?
실현 방안으로는, 먼저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여론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대 이해관계자들의 저항과 일부의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대다수(95%이상)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을 부각하여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의 경우 1968년 당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모든 대학의 평준화를 시행한 바가 있음을 참고하면 우리 사회도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다. 이미 서울대 내부에서도 자체 개혁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어 우리 모임의 고문인 장회익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대 학부 개방을 촉구하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번 2005년부터 시행될 서울대의 지역균형선발제(지역할당)도 결국 개혁의 요구에 대한 수세적인 서울대의 반응이다(우리는 서울대 지역균형제의 이념적 단초에는 동의하지만, 현실적으로 서울대 학부권력의 또 다른 형태의 확대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이를 원론적으로 반대한다.)
이를 위해 노무현 정부기간 동안 ‘학벌주의극복을 위한 특별위원회로부터 제안 → 범국민적 논의와 여론수렴(관련 시민단체와의 연계)을 거쳐 → 서울대 학부 개방화를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 추진(*노무현 정부와 관련하여 행정수도이전 건이 수도권의 반대에 의해 국민투표에 부쳐진다면 이때 함께 하는 것도 가능하다.) → 서울대학교설치령[대통령령 제17144호] 개정 절차 마련 → 서울대 개방 및 대학원중심대학으로의 전환’을 단행해야 한다.

 

▶ 서울대 개혁을 위해 서울대를 민영화하자는 주장도 있던데.

▷ 서울대 민영화는 학벌 문제 및 대학서열화, 그리고 대학의 경쟁력에 있어서도 전혀 실효성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이전의 문제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의 문제는 현실적인 권력독점의 문제이다. 서울대는 바로 그 정점에 위치함으로써 대입 이전의 모든 교육을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한 입시 경쟁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서울대를 필두로 한 대학서열 체제는 입시 서열화를 통해 능력 서열로 인정되어 학벌주의 사회 구조를 공고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특히 한번 정해지면 평생 바뀌지 않는 출신대학의 명함은 성공을 좌우하는 증표로서 결국 인생의 향방을 가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관문이기 때문에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서울대에 입학하려는 근본적 이유는 단지 서울대가 국립대여서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점에서 서울대가 민영화된다 하더라도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더구나 대학간의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결국 대학의 학문 경쟁력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는 것인데, 현재 상황에서 온전한 의미의 학문적 경쟁력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이미 대학서열화에 따라 경쟁력의 의미가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것은 단지 문제상황을 희석시킬 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서울대의 막강한 위상이 자본 시장의 화폐로 전환될 때의 문제이다. 이는 곧 기존 대학서열화의 시장화를 의미한다. 즉 연고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학벌주의와 시장적 자본과의 본격적 만남인 것이다. 결국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기초학문 분야의 도태와 더불어, 대학의 본래적 의무인 학문의 경쟁력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아울러 학벌주의와 시장적 자본과의 만남으로 인해 기존의 입시 경쟁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을 소유한 계층에게 유리해질 것이다.
특히 서울대 등 국립대학이 민영화되었을 때, 대학이 교육보다는 경쟁의 단위로 규정되어 교육의 공익성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능력있고 실력있는 사람이 아닌, 돈 있는 사람만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극심한 불평등을 국민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른다. 원론적으로 개별 대학은 경쟁의 단위라기보다는 기회의 단위이어야 한다. 교육이란 숨겨진 재능을 계발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황폐화, 과다한 사교육비, 입시 과열 경쟁 등 교육 전반의 문제들은 결국 대학서열 체제를 축으로 하는 학벌사회의 불평등 구조에서 비롯된다. 서울대는 이 구조의 핵심적 학벌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며, 설사 서울대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학벌 문중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경우 동일한 문제 상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점에서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특정 학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데에 있다.
서울대는 그러한 권력 독점의 정점에 있다. 학벌주의를 타파하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교육 전반의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서울대 민영화라는 변형된 문제가 아닌, 개방화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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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국가교육의 근간을 담당한다. 아무리 좋은 중등교육이 있더라도 그를 완성시켜주는 고등교육이 없을 때 교육의 이상은 온전해질 수 없다. 대학과 대학원은 그만큼 국가의 일정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대학교육은 어떠한가? 엄격하게 서열화된 제도로 말미암아, 1등 대학도 공부하지 않고 10등 대학도 공부하지 않는다. 대학서열의 1등은 영원한 1등이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 10등은 영원한 10등이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는다. 대학에서야말로 진정한 연구가 시작되는 곳임에도, 우월감과 좌절감은 젊은 학인들을 자만이나 퇴폐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우리는 '대학이 정상화되지 않는 한,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한)의대와 고시에 몰리는 우리의 병적인 상황은 정말 위험하다. 공대나 농대에는 사람이 없어 제3세계의 인력들이 석박사 과정에 몰리고, 국가의 과학을 책임져야 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는 의대 편입을 위해서 학업을 포기하고, 인문사회학도는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변호사 자격증을 위해 사법시험에 매달린다. 그 결과 기초학문은 인문학이나 자연학을 막론하고 붕괴되고 있고 교수나 학생은 서로 소 닭 보듯 자기의 이익에만 매달린다. 대학의 철학, 수학, 물리학과에 학생이 오지 않는 지는 벌써 오래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그 문제의 해결은 무엇보다도 서열화된 대학구조를 타파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대학이 철저하게 서열화 되어있는 한, '연구하는 대학'으로서의 이상은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서열타파의 견인차 역할을 우선 국립대학이 맡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인 국립대학이 공교육의 이념과 벌어져서는 안 되며 교육개혁의 중심으로 장차 자리 잡아야 한다.
다행히도, 현재 각 도의 국립대는 서울대를 제외하고는 그런 대로 평준화되어 있다. 10개 국립대학끼리는 이미 학점교환도 자유롭게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제안은 현실과도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방분권의 문제에서도 국립대학의 역할은 너무도 크다. 중앙집권화 현상의 타파가 지역거점 국립대학의 육성과 상관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방자치의 이상을 위해서라도 국립대가 무상교육체제로 바뀌기를 희망한다. 처음부터 실시되는 것이 어렵더라도 수업료는 면제되고 일정부분의 기성회계만으로 운영되는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 지방대육성사업의 핵은 이상적으로는 무상교육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많은 돈이 시설확충이나 교수연구비 등 비본질적인 발전에만 사용된다면 인재유치에 실패하게 되어 지방대육성은 그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2004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방대학혁신사업(NURI)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단기적인 소모성 정책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도 망해가는 지방사학의 재산을 기존의 법률에 의거하여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법으로도 일정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학재단의 재산이 정치적 권력의 농간에 의해 그들에게 돌아가게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학경영자의 대부분은 이미 본전치기는 끝난 상황일 터인데도 남은 부동산과 동산조차 갖겠다는 것은 그들이 교육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립대 육성책이 국립대학의 선점권을 고착화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개혁을 통해 국립대학이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립대와 교수·직원은 개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 되어야 한다.

주장 1. 국립대 졸업자격을 단일화하라.

서울대를 포함하여 국립대가 평준화되어야 한다. 또한 국립대는 지방자치의 인재를 기르는 터전이 되어야 한다. 지방의 인재들이 국립대학으로 모이고 그 체제 내에서 그들이 훌륭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립대의 졸업장은 단일화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졸업자격 단일화는 국가의 관리에 의거하여 국립대 졸업생에 대한 인증의 일원화를 가리킨다. 어느 국립대를 졸업하더라도 같은 내용의 졸업장을 받을 수 있고, 졸업 이후 취업시에 동등한 자격으로 취급될 수 있음을 뜻한다. 평준화를 넘어서, 서울대 학부가 개방되면 이같은 효과는 훨씬 더 가속화될 수 있다. 만일 서울대 학부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모든 국립대의 졸업장이 일원화된다면 현재의 서울대의 폭력적인 독점권은 약해질 것이다.
이런 대학의 구조는 이미 프랑스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파리 1대학, 2대학, 3대학 식으로 평준화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처럼 모든 대학의 졸업장을 국가가 관리하여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가 이상적이겠다. 그러나 당장은 서울의 유수의 사립대학을 평준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지방이 황폐화되고 있는 시점에 지역의 거점대학으로서 국립대를 육성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기 때문에, 우선 국립대 평준화와 무상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각도의 제1국립대학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대로 형평성을 이루고 있다. 교수정원에서도 서울대(2002년 기준 1474인)와 제주대(2002기준 444인)를 제외한다면 대략 600명에서 800명 정도의 교수로 이루어져 있고 등록금도 비슷하기 때문이다(서울대 제외).
프랑스의 대학이 평준화되었다고 해서 질적으로 낙후되었다는 보고는 듣기 어렵다. 평준화를 통해 대학이 얻고자 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독점이 아니라 진정한 학문의 경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경쟁의 다원화이지 결코 경쟁력의 약화가 아니다.

주장 2. 사립대를 국립대 체제로 전환하라.

현재 지방사립대학은 점차 붕괴되고 있다. 2003년을 기준으로 고등학교 졸업학생 수와 대학정원의 수가 균형을 맞추어가면서 지방대학은 정원조차 채우지 못하고 있다. 전문대학의 상황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시원적으로는 제5공화국시절 1981년부터 대학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졸업정원제'라는 명목으로 정원을 대폭적으로 늘인 데 있다. 지방대학이 정원을 늘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도권 대학은 수도권 정원억제라는 규제를 피하기 위하여 서울 근교나 통근이 가능한 곳에 분교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졸업정원제는 실시되지 못했고, 단순한 양적인 팽창만이 초래되어 오늘의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지방사학의 붕괴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경쟁력이 없는 사립대학은 점진적으로 국립대학을 중심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지나친 학력의 상승은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상황은 탁상공론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앞에 놓인 분명한 현실이다. 학생의 수업료로 운영되는 대학은 학생이 들어오지 않으면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의 기능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봉사라는 3대 책무로 이루어져있다. 연구원대학은 연구만으로도 대학의 역할이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같은 곳이 바로 대학원대학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립대를 중심으로 사학이 통폐합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법정정원수에도 못 미치는 교수확보율을 높이고, 기존 우수교수들을 확보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소정의 절차를 거쳐 사학의 우수교수를 국립대 교수로 충원하고 기존의 국립대 교수 가운데 정교수의 일정비율을 강의중심교수로 전환시키는 등의 방법을 취하면, 우수인력의 확보와 학문의 경쟁력 강화라는 두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국립대 체제개선은 무엇보다도 요구된다. 이를테면 의대, 법대, 사범대, 경영대의 대학원제도화라든가, 중복학과의 통폐합이라든가, 지나치게 작은 단과대의 합병 등은 우선시 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질문과 답

▶ 국립대학과 지방분권이 무슨 연관을 갖는가?
▷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 지방국립대학의 육성은 필수불가결하다. 사람들이 지방을 떠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육문제에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서울대 다음이 부산대', '경북대나 연세대'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서울의 모든 대학의 정원이 채워진 다음에서야 대체로 지방국립대가 정원을 채운다. 왜 서울로 몰리는가? 알려진 비밀이듯이, 지방대의 졸업장으로는 대기업에 원서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울로, 서울로 몰린다. 지방의 학생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하여 학업을 마치기까지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돈도 총 5조에서 6조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서울로 간 지방의 인재들은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수도권의 비대화와 지방의 공동화는 지방에 이른바 '일류대학'이 없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의 타파를 위해서 지방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현재에도 환경이나 설비가 좋은 국립대를 돈을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현실적인 장점이며, 이를 바탕으로 지역인재의 양성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방분권운동은 그런 점에서 지방국립대육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지방국립대학은 지방분권운동의 거점이 된다.

▶ 국립대의 졸업장을 일원화시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 우습게 말하자면, '모든 국립대를 서울대화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적어도 국립대 졸업장만큼은 어디서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때 국립대끼리는 어떠한 차별대우도 받지 않는다. 당연히 서울대 졸업장도 발부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국립대를 졸업하기 위해서는 일정부분에 대한 국가의 자격검증이 요구될 수 있다. 비록 선발의 일정부분과 졸업사정은 각 국립대의 자율에 맡기나, 국립대끼리의 학생이동이 완전히 보장되어야 하며 졸업시에는 필요에 따라 책임 있는 국가기관에서 실시하는 전공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시험은 어렵지 않더라도 무자격자를 걸러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 국립대 교육의 무상화라는 것이 어떤 근거로 될 수 있는가?
▷ 국가가 대학교육을 책임져야 하는가?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의무교육이 아닌 한,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학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은 이미 특권화되고 있지 못하며 보통교육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대학이 그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대학이 제자리를 찾는 시점까지라도 대학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막중하다.
우리는 전대학의 평준화를 꿈꾼다. 전국의 대학이 같은 졸업장을 갖게 되는 날, 우리 나라의 대학은 참다운 교육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사학을 건드린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당장 그 많은 대학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대학이 국가의 공공재(公共財; Public Goods)라는 생각은 여러 나라에서 보이고 있다. 공산주의국가를 제외하더라도 프랑스와 독일을 위시하여 대만 등이 그러하다. 카나다는 국사립의 명확한 구분 없이 일정부분은 학생들이 부담하고 일정부분은 국가가 보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운영상의 기술적인 문제는 점차 토론이 되어야 한다.
심한 경우, 프랑스에서는 '학생은 공부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국가가 혜택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로노블 선언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 사회나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학생할인요금제도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우리 나라에서 점차 대학생 할인요금이 없어지는 것은 그만큼 대학생이 진정한 지식노동자가 아닌 단순히 신분상승을 꿈꾸는 기회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좋은 예이다.
아울러 대학을 졸업하느라 돈을 낸 사람이 그만큼 더 돈을 받는다는 생각은 사라져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 맞는 일을 하면 될 뿐이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가 한꺼번에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벌로 이 셋을 모두 갖는 것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교졸업자나 전문대학 졸업자가 대학이나 대학원 졸업자보다도 일의 강도에 따라 더욱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다.

▶ 지나친 국립대 특혜 아닌가?
▷ 물론 특혜다. 그러나 일단은 기존의 국립대가 연고대와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시급하다. 서울대 학부가 개방된다면 그 후의 연고대의 과점(寡占) 상태를 견제할 수 있는 대학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런 역할을 지방의 거점국립대학들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지방국립대의 육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각 도의 제1국립대가 살아있지 않는 한, 지방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의 학생들은 입시를 통해 서울로 집중되고 있으며, 그들은 졸업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2003년도 1학기만 해도 지방에서 서울로 편입한 학생이 3,088명에 이른다. 편입조차 철저히 서열화되어있다. 서울은 커지고, 지방은 쇠퇴한다. 서울은 집이 없어 집 값이 오르고, 농촌은 빈 집 투성이다. 아무도 고향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립대에 대한 무상교육은 지방대학의 발전을 위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더불어 국립대는 기초학문육성의 본거지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하지 않으면 국가가 발전할 수 없음에도 사회적인 분위기는 기초학에 대한 괄시를 애써 눈감고 있다. 따라서 국립대는 철학, 문학, 수학, 물리학과 같이 돈이 되지 않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초학 발전의 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국립대 교수는 공무원의 지위 때문에 크게는 사립대의 반정도의 봉급만으로 생활하고 있다. 사립대의 연봉도 대기업에 비해 형편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국립대 교수는 명예직 가운데 명예직인 것이다.

▶ 군소사립대를 국립대가 수용하다보면 국립대조차 망치는 것 아닌가?
▷ 붕괴되는 사립대에서 보면 국립대에 대한 특혜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학생이 없는 와중에 서로 살겠다는 것은 같이 망하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지방대의 80% 내외의 학생확보율은 점차 악화될 것임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3년 전국대학의 모집정원은 668,639명인데 입학생은 587,786명으로 12.8%의 미충원율을 보이고 있는데, 수도권을 제외한 209개 지방대의 미충원율은 18.6% 수준으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전북지역의 경우는 심각하여, 19개 대학의 입학생은 27,199명으로 모집정원의 29%까지 미충원율이 급상승하고 있다. 2003년 1학기 편입의 경우도 지방대학은 모집예정인원 22,100여명의 71.5%인 15,800여명만 모집된 반면, 반면 수도권소재대학은 모집예정인원 11,858명의 96.1%인 11,399명이 모집되었다.
학생은 들어오지 않으면 그뿐이다. 그러면 남은 교수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국립대의 구조조정문제와 더불어 공론화하여 흡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망한 사학의 교수를 국립대가 일정한 기준을 거쳐 선발하거나 브레인 풀 제도와 같이 국가가 선발하여 국립대에 배분하는 방도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특정학과비율에서 동일대학 출신이 일정 비율을 넘어서는 안 되어야 하는 제도이다. 현재는 '학생모집단위별로 동일대학 출신이 2/3를 넘어서는 안 된다'(교육공무원임용령 제4조의3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특정대학의 학사학위소지자가 모집단위별 채용인원의 3분의 2를 초과할 수 없으며, 모집단위가 학부인 경우에는 전공단위별)고 규정하고 있지만, 더욱 강화될 필요가 있다. 만일 국가가 교수를 선발할지라도 심사위원의 출신대학이 골고루 안배되어야 하며 같은 대학출신이 1/5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제도가 잘만 운영되면 침체되어 있는 대학에 큰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좋은 교수의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자극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건비지출에 따른 국가예산의 확보이자 대학 내 교수시설의 확충인데, 이의 재원마련을 위해서는 법률에 따라 현재의 부실한 사학의 재정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국고로 환수시켜야 한다.

▶ 국립대 교수의 순환제는 어떠한가?
▷ 학생이 어느 대학을 다녀도 되는 상황에서 교수가 어느 대학에 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따라서 원론적으로 교수가 순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되었을 경우, 많은 교수들이 우리 나라의 교육제도를 탓하면서 거주지를 모두 서울로 옮길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데 있다. '어차피 돌고 도는 것, 집이라도 이사를 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으로 몸만 서울에서 오가기 쉽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어쩌면 국립대 교수들의 일정비율은 대단히 찬성할지도 모른다. 소속 대학의 학생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무적으로 다른 대학을 가야 한다던가 하는 제도는 비현실적이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승진요건으로 일정 정도의 기간 동안 타대학에서의 교육과 연구를 강제할 수는 있을 것이며, 아니면 정교수가 되기 전에 총 5년 정도의 이동근무의무연한을 두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것조차 점차 양적으로 축적되면 국립대의 체질개선에 상당히 많은 파급효과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공계열의 교수는 대학원생과 실험장비가 교수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동하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는 한, 연구의 지속성이 확보되지 않아 큰 어려움이 따른다.

▶ 지방국립대의 패권주의가 부활하는 것 아닌가?
▷ 지방토호의 등장은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지닌다. 지역사회에서의 패권주의는 비록 서울의 패권주의와는 규모면에서 큰 차이가 나더라도 같은 종류의 의식이기 때문에 지양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지방 안에서의 대학끼리의 경쟁은 서울과 비교할 때 오히려 권장될만한 수준으로 양질의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경북대와 영남대, 또는 충북대와 청주대 등의 경쟁이 그것이다.
따라서 대학과 교수는 각 지방국립대의 상황과 적절하게 그 지역출신의 학생을 뽑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제주대가 관광통역자원을 마련하기 위한 학부(경상대학의 관광개발학과, 1994년 신설)와 대학원(통역대학원, 2000년 신설)을 두는 것과 같다. 아울러, 미국의 주립대학이 그 주 출신의 학생이 지원할 때 등록금에서 차별을 두는 것과 같이(타주에서 오는 경우 1년간 3배 정도의 등록금을 내야 함),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지역출신에 대한 배려와 할당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지방세의 일정액을 지역의 국립대에 제공하는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학이 재단전입금이 거의 유명무실함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지방세의 작은 비율로도 지역출신학생들에 특혜를 줄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 국립대 운영에 관한 특별법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 정부는 2002년 2월 15일 대통령 업무보고를 통해 [국립대 운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공식화한 후, 2003년에는 공청회를 가졌고, 2004년 하반기에 국회통과를 목표로 하는 등 단계적으로 그것의 추진을 지속해오고 있다. 국운법은 기본적으로 국립대에 대학이사회나 재정위원회(이사회가 없는 경우 반드시 설치)를 두는 것을 골자로 삼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대학의 자율성을 제고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국립대 독립법인화의 형식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으로, 기존의 국고수입금과 기성회수입금을 국고수입금과 자체수입금으로 변경시켜 모든 수입을 자체수입계정으로 통합관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체수입금계정이 취약한 대학의 경우에는 현행제도보다 더욱 불안해질 수 있어 큰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대학이 알아서 수입사업 등으로 재원을 책임지라는 것으로 국립대를 사립화하는 서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대학의 민영화를 반대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법안을 찬성할 수 없다.
법률상에서도 재정위원회가 잘못될 경우 이를 보완하거나 견제할 기구가 없고, 재정위원회의 구성이 교육부나 총장의 의견만 반영되어 전횡될 수 있다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국공립대학협의회의 우려처럼 '국립대학회계에 관한 특별법'에 그칠 수 있어 많은 주의를 요한다. 게다가 재원의 확보를 위해 대학은 경쟁적으로 등록금을 상향조정할 수밖에 없어 우리의 국립대 무상화 원칙과는 상반된다.
현실적으로도 정작 필요한 것은 국운법이 아니라 '지방대육성특별법'이다. 이것이 제 모습을 갖춘 다음에야 국운법이 논의되어야 한다. 이 때 국운법은 당연히 기존의 '서울대학교설치령'의 폐지와 서울대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 학생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
▷ 이 문제는 대학입학제도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국립대학 정원의 50% 이상은 내신 등 학업성적만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50% 이상은 졸업자격고사시험 등급으로 선발한다.
현재까지의 대입전형은 사실상 수능성적 하나로 너무 쉽게 뽑아왔다. 소숫점까지 차별화된 점수의 적용으로 획일적으로 학생을 뽑는 바람에 학생의 재능이나 창의력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대학의 선발제도는 확실히 변화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국립대의 당장의 평준화와 장기적인 무상화가 전제되어야 하는 대개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때 수능시험은 고교학업이수자격고사 및 대학입시참고자료로서의 지위, 그리고 국립대학선발정원의 50% 이하의 충원을 위해서만 유지된다.

▶ 2년제 국립대나 국립산업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오늘날 전문대학의 문제는 그것이 나름대로의 2년제 전문기술학교의 기능을 상실하고 4년제 대학의 하위대학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이유에서 4년제 지방대학이 붕괴되는 시점에 2년제 지방전문대학이 붕괴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간대학으로서의 전문대학의 지위는 아직도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전문대학의 지위는 야간학습에 있는 것이다. 현재 국립산업대학(삼척, 상주, 충주)이 '산업'이라는 말을 떼고 일반대학화되고 있는 것은 국립대학의 통폐합문제와 결부되어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 또한 학벌과 관련된 어휘기피현상에 불과하다.
산업대학과 방송통신대학 그리고 기능대학은 나름의 독특한 역할에 충실히 해야 한다. 산업체 일꾼을 위한 야간대학의 운영은 국가적으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2년제와 4년제를 막론하고, 일반대학에 종속되지 않은 무상의 국립야간대학 운영의 원칙이 요청된다. 나아가, 4년제보다 나은 2년제 국립대가 존재할 수 있어야 국가의 장래에 미래가 있다. 그것이 '국립전통예술학교'의 경우처럼, '대학'이 아닌 '학교'라는 이름을 지니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지방대육성사업과는 어떤 차이를 갖는가?
▷ 2003년 교육인적자원부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방안을 보조하여 별도로 5년 동안 지방대육성사업에 1조5천억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사업이 현실화된다면, 교육인적자원부, 산업자원부, 과학기술부 등 정부 부처의 연구개발(R&D) 총괄예산까지 합해 총 4조에서 5조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붕괴되는 지방대의 입장에서 볼 때, 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 아니라 학벌이다. 돈으로 학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지방국립대의 평준화이자 무상화이다. 학생들이 서울로 가는 것은 교육환경이나 교수의 질 때문이 아니고, 바로 학벌의 사회경제적 가치 때문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학생이 오지 않는데 대학의 외형적인 규모와 설비만 늘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지방대육성사업은 현재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와 '교육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요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학벌주의 극복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학생들이 서울로 가는 까닭은 '학벌이 곧 권력'으로 환산될 수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04년에도 지방대혁신역량강화사업(NURI) 등 지방대를 지원하겠다는 취지의 사업이 많지만, 이 모두 장학금과 연구비라는 명목 속에 정원감축이라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해결책을 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해, 지방을 키우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여 문제를 없애겠다는 소극적인 정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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