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과 상급 학교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학생의 흐름을 양적, 질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시험 제도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입시는 국가가 관리하는 선발 시험 제도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평가가 교육 과정에 발전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평가에 의해 교육 과정이 역으로 왜곡 당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평가가 교육을 지배할 때 교수 학습 활동은 시험에 대비한 능력을 키우는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문제 해결력 등 시험에서 요구되는 기능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고,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주입식 수업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서열화된 대학 구조를 가진 우리 나라에서는 이 평가로 인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인생의 경험이 배제되어 있는 '입시선수'가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를 통해 시험을 위주로 하는 입시경쟁이 사라지면, 초중등학교 교육도 더 이상 대학을 가기 위한 시험에 종속되지 않고 본래의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윤리시간에는 철학을, 국어시간에는 시와 소설을 온전하게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의 타파를 위해, 우리는 수능의 난이도를 지속적으로 낮추어 자격고사화하며 궁극적으로는 학교나 학생이 시험을 선택할 수 있길 요구한다. 아울러, 대학입학전형을 대학에 완전히 맡겨 스스로 책임지고 학생을 선발할 수 있길 희망한다. 수능점수에 따른 '인간 서열'이라는 거짓이념은 더 이상 재생산되어서는 안 된다.

주장 1. 대학서열화 기제인 수능을 자격고사화하라.

수능시험의 본질이 권력집단에 들어갈 사람을 뽑고, 그 불평등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속임수 장치'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수능시험이 마치 한 개인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학벌로 권력을 독차지'하는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은, 정말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그러한 권력을 누린다고 착각한다. 한편 시험 점수 따기 경쟁에서 진 사람은 수능시험의 능력을 들먹이는 '거짓이념'에 속아 학벌차별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자기 능력을 탓한다. 그래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대신 다시 시험에 매달려 그러한 권력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 나라의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은 교육 목표의 성취 수준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상대적인 서열을 매기는 획일적 시험이다. 또한, 이 시험의 운영과 문제 출제 과정은 중등교육 과정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을 전적으로 배제한 채 진행되기 때문에, 중등교육 기관을 하나의 독립된 교육 과정을 책임지는 기관이 아닌, 대학 입학 이전의 교육을 담당하는 대학의 하부 교육 기관처럼 전락시키고 있다. 따라서 점수에만 관심이 있는 현재의 수능은 교육과정의 극심한 왜곡을 가져온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격고사는 일회성 시험이 아닌, 교육과정의 평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 시험은 선발과정의 통제 장치로서의 기능보다는, 중등학교 교육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했는지 여부를 평가한다. 이는 중등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것이며, 대학 입학전형의 자료로 선택적으로 활용된다. 수능의 졸업자격고사화는 본질적으로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한 대안이며, 수능성적만으로 형성되고 있는 수직적인 대학서열화를 타파하기 위한 방안이다.
아쉬운 것은 많은 교육계의 의식있는 인사들조차 학벌과 수능의 필연적인 관계에 대해 그다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한마디로 학벌이 허상이라면, 그것의 설계도가 바로 수능이다. 따라서 한국사회는 '학벌과 수능으로서의 세계'로 정의된다. 오늘날 수능은 학벌이라는 요괴를 지키고자하는 매트릭스로서 작동하고 있다.

주장 2. 국립대 통합전형을 실시하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는 통합되어야 한다. 선발에서 졸업까지 국립대는 동일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 국립대가 통합전형된다는 것은 모든 국립대를 하나로 묶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서울대 학부가 사라짐을 뜻한다.
먼저 지나치게 비대화된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장기적으로는 지역별 국립대의 정원이 인구비례성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우선 신입생 선발은 소재지역 출신의 대학진학 희망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이를테면 국립대 신입생의 50%는 동일지역 소재의 고등학교 졸업자에게 할당한다(이는 지역인재할당제와도 관련된다). 나머지 50%는 지역의 구분 없이 개방하여 충원하는 식이다.
그리고 전형시에 대학은 무시험을 원칙으로 하되, 여러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현행 제도도 학생 선발을 대학에 원칙적으로 맡긴다고는 하나, 수능이 전국의 학생들을 점수로 서열화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국가가 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대학이나 학과의 성격이나 특성을 무시한 현재의 선발방법은 중등교육의 황폐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대학이 입학의 진정한 자율성을 확보할 때 학생도 비로소 나름대로의 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재능과 취미 그리고 개성에 따른 선발방식이 다양하게 등장할 수 있다. 이런 제도에는 소수자와 약자가 적극적으로 배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시제도의 다양화는 장차 대학을 일률적으로 비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서열의 획일화의 둔화에도 크게 기여한다. 아울러 국립대학은 현재 시행하고 있는 소년소녀가장 및 농어촌자녀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정원의 일부를 좀더 개방함으로써 공익성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적으로 경상대 사회과학원에서 제시한 '국립대학 통합네트워크 구축안'(사회과학원장 정진상 사회학과 교수, 2003.11.19.)에 적극 동의한다. 그 안은 내용에서도 밝혔듯이 처음부터 우리의 이념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작성된 것이며, 앞으로도 같은 방향의 목적을 위하여 동조할 것이다.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 법학과 의학 및 교육학 등 전문대학원 입학을 우리는 대학4년 졸업 후로 비교적 늦게 잡고 있는 반면, 그 안은 대학2기 과정(현행의 3학년 과정)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잡고 있다.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경상대 사회과학원 안은 국립대학정원의 70%는 내신으로, 30%는 자격고사로 뽑은 후, 대학1기 과정 이수자(현행 2학년 이수자)에게 전문대학원 과정을, 대학2기(4학년 이수자)에게 일반대학원 과정을 입학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전문대학원은 학부 1기 과정 성적 50%와 별도의 시험 50%로 선발하며, 서울대 일반대학원 정원의 80%를 국립대학 학부 출신에게 배정한다는 안이다.

질문과 답

▶ 수능시험과 대학서열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 대학서열은 입시경쟁 때문에 생긴다. 그러나 이 입시 경쟁이 곧 수능시험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수능시험이 점수에 따라 1등부터 줄을 세운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입시경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입시경쟁은 많은 학생들이 학벌로 권력을 독점하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수능시험이 국가적 차원에서 엄격히 평가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변별력'이라는 구실로 난이도를 높이고 이른바 일류대학 입학가능자를 최우선적으로 골라내는 현실은, 학업의 성취도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성적 상위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수능이라는 국가적, 객관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세습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대학의 서열구조가 자꾸만 공고히 되는 것이다. 나아가 대학서열은 학벌 권력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국가적 차원의 모순으로 드러나게 된다.
만일 특정 대학에 독점된 권력이 해체된 상황이라면, 수능시험이 현행대로 있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극심한 입시경쟁은 완화될 것이며, 입시경쟁에 따른 대학서열도 고정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의 입시경쟁은 대학 문이 좁아서가 아니라, 학벌 기득권을 누리는 이른바 일류대학의 문이 좁아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현재처럼 수능시험이 대학 서열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는 한, 수능 서열과 대학 서열은 나란히 갈 수밖에 없다.

▶ 특정대학의 권력 독차지가 사라진다면, 대학이 평준화되는 게 아닌가?
▷ 평준화는 학업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평준화라는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바로 서열화를 공고히 하려는 집단에 의한 고의적인 왜곡 때문이다.
사실상 평준화는 모든 교육의 이념이다. 교육을 균등하게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평준화가 좋은 예이며, 미국의 주립대학이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도 우리의 학벌권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평준화에 대한 악의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평준화라는 말을 쓰면서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통합전형이나 졸업장 단일화 등과 같은 개념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평준화는 하향식 조정이 아닌 상향식 조정이라는 점이다. 서울대 학부의 개방과 더불어 등장하는 연고대에 비견될만한 대학으로 우선 전국의 국립대학을 육성하자는 것이다. 국립대학은 유수의 사립대학과 경쟁해야 한다.
엇비슷한 대학이 전국에 골고루 산재할 때만이 우리의 학문적 경쟁은 활발해 질 수 있다. 집중된 권력이 전국의 대학을 통해 분산되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전통이 양산되길 희망하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몇 개 대학의 권력독차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제도(독점을 금지하는 법안 등)로 이를 방지하면서 입시제도를 개선한다면, 소수의 대학에 맞설만한 다수의 대학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 졸업자격고사 또한 수능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 현재의 수능은 상위고득점자를 변별해내기 위한 시험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졸업자격고사는 고등학교 졸업학력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실력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수능을 더욱 쉽게 낸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수능 만점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 시험에서 어떤 기준을 넘으면 거기서 점수차이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졸업자격고사는 먼저 학교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이다. 현행 수학능력시험은 시험의 출제나 채점, 그리고 관리에 있어 중등학교와 연관성이 적다. 이에 반해 졸업자격고사는 원하는 교육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 그 기본 성격이다.
이를 통해, 초중등 교육이 대학입학에 종속되지 않고, 학교와 급별로 아동과 청소년의 신체적 성장과 정서적 발달 단계에 걸맞는 교육목표를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가르치는 자가 평가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 졸업자격고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인가?
▷ 현재의 수능보다 좀더 완만한 격차를 둔 자격고사를 뜻한다. 정확한 점수보다는 대학에서 시행되는 성적판별기준인 A, B, C, D, F 정도의 변별성을 가리킨다. 점수로 환산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현재처럼 세밀한 점수로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정확한 점수는 다시금 대학 서열을 조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졸업자격고사는 한마디로 '뭉뚱거려진 수학능력시험'이라고 보아도 좋다.
중등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내신성적만으로도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졸업자격고사는 입학전형의 참고용 자료로 이용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센타시험'이 대학입학희망자 모두에게 강요되지 않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 본고사 부활의 가능성은 없나?
▷ 통합선발의 체제는 국가가 시험을 전형하는 것이다. 내신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을 적용할 수 없을 때는 졸업자격고사로 대체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대학 나름대로의 입시제도가 마련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창의력과 개성을 강조하는 것이어야지 과거의 본고사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형자료는 자기소개서를 중심으로 한 학업계획서를 위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일종의 무시험 전형이다.
본고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유수한 대학에서 자신들의 독점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체제이다. 서울대 학부가 개방되어있고 공직독점금지가 실행되고 있는 마당에, 인재가 특정대학에 집중될 까닭은 없다. 학생들은 서울로 집중되지 않고 지역 내에서 수급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점차 서울에 집중된 관심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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