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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이 체제의 노예로 기르는 방법 2009.06.05
  2.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2009.06.05
  3. 학벌은 신분 문제일까? 2009.06.05

by 이뮤

뭐라 딱히 비유하기는 어렵지만 김상봉 씨는 학벌을 신분과 비교했다. 책 ‘학벌사회’에서는 어떤 지배계급이 가질 수 있는 정당성 따위를 생각해보면서 단순히 고등학교 입시성적’에 의한 학벌사회에서의 권력부여는 사회적인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학벌사회에서 피어나는 수많은 편견들과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 싶을만한 생각들을 언급한다. 

“이들이(=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권력이나 이런 것을 잡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겠죠.”[학벌사회 토론게시판의 글 中] 그렇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악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 학벌주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대다수 학벌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기들만의 지배와 권력독점을 정당화 한다.
 -책 '학벌사회' 중에서..

마치 어떤 노예를 기르는 방법이랄까,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땅한 권리와 그 권리들을 쟁취하기 위한 권리들을 잊도록, 자기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이 학벌따위의 가치관들을 주입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정 학문과 학생을 멀어지게 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직결될 문제들에 대해 의기소침한 이 땅의 학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학벌이 아닌가 싶다.

다시 생각해보면 학벌사회와 그에 항상 따라다니는 입시성적에 의한 사람에 대한 가치판단들은 어떤 평등한 사회, 다원화사회와는 전혀 다른 시대의 전유물들인 것만 같다. 예를 들자면 수도권이 아닌 지역의 어떤 전문대학교 에 다니는 사람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로 느끼게 하는 학벌사회의 중요한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신분과 유사하다고 할만하다!’는 말도 책에서 나오지만, 이른바 지배세력이라 불릴만한 것들은 넘을 수 없는 차별의 선이 있다. 어떤 학업성취도를 가지고 있건, 같은 학력수준(?)이라고 하건 그 질(?)의 차이로 여겨지는 대학간판 따위 말이다. 아무리 제 위치에서 열심히 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선-말이다. 토론을 통해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학벌사회를 은근히 작동시키게 하는 원동력일수도 있겠다. 어쩌면 학벌사회의 노예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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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똘레랑스

나는 내 살아생전에 한국사회에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본디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개인 요구의 반영이라기보다 사회공공성 확충을 요구한 공화주의 이념의 반영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할 수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육받을 수 없는 사회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에 나라의 정체성으로 규정한 민주공화국을 배반하는 것이다. ‘Republic’이 '공적인 일(res publica)'을 어원으로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공화국의 출발점은 모든 사회구성원을 위한 '공공성' '공익성' 확보에 있다. 자유와 평등 의식과 함께 연대와 인권 의식을 전제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의식이 부재한 탓에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본디 사민주의의 요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경제력은 전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실현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고 있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이라면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이미 이루어졌어야 마땅하다. 교육은 과잉상태에 있고, 의료 또한 의료의 공공성은 채워지지 않은 채 일탈된 형태의 과잉을 보여주고 있다. 물적 토대가 충분하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요구하면 수구기득권 세력은 바로 ‘사회주의적 발상’이니 ‘좌파적 발상’이니 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것은 바로 수구기득권세력이 민주공화국의 기본인 사회공공성, 공익성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을 뜻하며, 바로 그들이 분단이후 반세기를 넘는 동안 민주공화국을 철저히 배반하면서 사익을 추구해 왔다는 점을 말해준다.

일제부역세력

누구나 잘 알듯이 남한에서 친일파로 불리는 일제부역세력은 청산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말로는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실은 일제부역세력이 청산되지 않았다는 점보다 바로 그들이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모든 공적 부분을 장악한 헤게모니 집단이 되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한번 짚어보자. 정치, 경제, 법조, 경찰, 군사, 언론, 교육, 종교의 모든 부분에서 일제 부역세력에 뿌리를 둔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지 않은 부분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그들은 청산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 지배세력 그 자체가 되었다. 당연히 민족적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강대국의 힘을 빌려 비어있는 일부를 채웠고, 좌우 분단구도를 타고 ‘보수’와 ‘민족’을 참칭함으로써 또 다른 부분을 채웠다. 일신을 위해 민족을 배반했던 그들이 국가를 경영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공익은 물론 민족이익이 염두에 있을 리 없었고 오직 사익추구에 열심이었다. 가령 조선일보를 보자. 공기, 즉 사회구성원들이 공정성에 입각하여 공익을 추구하리라고 믿는 신문을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찬가지로 공당도 없었다. 공익을 추구해 마땅한 나라의 공적 부분이 온통 사익추구의 장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공교육의 장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그러면 일제부역세력에 뿌리를 둔 사익추구 집단이 반 세기동안 헤게모니를 관철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민주’가 독재에 의하여 유린되고 민주공화국이 철저히 배반되었는데도 그들이 이 땅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냉전의식에 바탕을 둔 색깔론과 지역패권주의가 강력하게 관철되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장악한 지배집단은 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어떤 의식을 형성시키고 주입시켰을까. 바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다. 민족적 정통성도 없는 지배계급에게 피지배계급이 스스로 복속하려면 어떤 의식을 가져야 하겠는가. 바로 존재를 스스로 배반하는 의식이다.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통해 전 사회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화작업이 체계적이고 일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16세기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선언한 이래 의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나 칸트가 이미 지적했듯이 인간은 의식하는 존재이긴 하나 자유롭게 의식하는 존재는 아니다. 즉 의식하는 것에 대하여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어느 집안에 태어났고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사회 환경에 있는가에 의해 인간의 의식은 규정된다. 19세기에 칼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함으로서 의식을 규정하는 출발점이 존재 자체임을 명료하게 밝혀주었다. 칼 마르크스 자신이 이미 교육이 존재를 벗어나는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위험을 제기한바 있지만, 현대에는 더욱 교육과정과 대중매체에 의해 왜곡될 수 있고 급기야 존재를 스스로 배반하거나 부정하는 의식형성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지배집단은 그들이 장악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통하여 사회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복속하도록 획책했던 것이다. 한국과 같이 일제침탈, 분단, 전쟁과 독재로 이어진 사회에서 의식 주입과 세뇌는 전일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자기 존재의 요구조차 스스로 거부하고 부정하는 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처럼 칼 마르크스의 명제가 통하지 않는 사회는 보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칼 마르크스의 이 명제의 뜻은 본디 아주 간단하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본가의 의식을 갖고, 노동자, 농민은 노동자, 농민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자, 농민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계급결정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 존재가 계급의식의 당연한 출발점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진보진영에서 걸핏하면 한국에 1500만 노동자가 있고, 350만 농민, 400만 도시빈민이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1500만 노동자 의식, 350만 농민의식, 400만 도시빈민의식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회변화를 원하는 주체형성이 그것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1500만 노동자라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그들 중 노동자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농민의식, 빈민의식도 마찬가지다. 칼 마르크스의 명제는 한국에서 철저히 배반되고 있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때문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분단체제 속에서 전일적으로 관철된 냉전의식화, 안보의식화, 질서의식화, 친미사대의식화, 물신숭배의식화, 지역감정의식화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사회에는 분명 집안에 병자가 생겼을 때 병 걱정에 앞서 돈 걱정을 해야 되는 존재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당연히 비인간화를 가져온다. 그 존재들은 당연히 ‘무상의료’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존재의 요구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상의료에 비상한 관심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의혹의 시선을 보내거나 불안해하면서 스스로 거리를 둔다. 존재의 요구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무상교육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지배집단이 반세기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와 같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있었던 것이다.

탈의식화

따라서 나는 ‘탈의식화’를 주장한다. 오늘 한국사회의 진보를 위한 일차적 과제는 탈의식화에 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권에서 흔히 의식화를 말하지만 거기엔 중대한 오류가 있다. 첫째 오류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아무런 의식이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며, 둘째 오류는 전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관철돼 왔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긍정적 의미의 의식화는 탈의식화를 거친 다음에나 가능했다. 어쩌면 탈의식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탈의식화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하지 못했을 수 있다. 가령 지금 한국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식과 안목을 갖고 있는 사회구성원은 어느 시점에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의식을 반전시킨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탈의식화를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가 지금도 관철되고 있음을 뜻하며 그것에서 벗어날 기회를 가진 사회구성원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의식을 갖고 있는 노동자나 농민의식을 갖고 있는 농민은 거의 계급적 존재에 따라 그러한 의식을 가진 게 아니라 모두 탈의식화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진보의 길

진보란 사회진보이며, 사회진보는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변화로 담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적 토대의 성장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이미 충분히 추동되고 있다. 모든 정치사회 현상은 사회구성원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사회가 한국사회인 것은 한국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반영이며, 한국사회의 진보는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의 진보를 전제한다.

운동은 왜 운동인가. 잘 알려졌듯이 모든 운동은 ‘조직’ ‘학습’ ‘선전’을 기본 축으로 이루어진다. 운동, 즉 움직임은 변화로서 조직을 요구한다. 혼자 힘으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해야 한다. ‘학습’은 나(우리)의 의식을 바꾸기 위함이요, ‘선전’은 이웃의 의식을 바꾸기 위함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도 강조했듯이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조차 무지와 헤게모니 작동에 의해 고집한다. 진보가 느리고 어려운 까닭이 이 때문이며, 진보가 불편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사회구성원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느리고 어려운 것이며, 고집하는 의식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모색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실상 진보가 편하고 쉬운 것이라면 진보는 그 의미조차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의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진보의 길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인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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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프락사스

 「학벌과 불평등」은 두 가지 언제를 언급하는 걸로 시작된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기준으로 만든다는 것. 둘째, 학벌은 학력, 곧 배움의 정도가 아닌 학교, 즉 ‘출신 성분’의 문제라는 것. 요컨대 학벌 문제를 계급문제라기보다는 신분 문제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그 타당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사실상 한국의 대학 입시는 프랑스의 바칼레로아나 미국의 SAT처럼 일종의 자격증 시험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규모가 커진지 오래다. 한국의 수능은 그 자체로 대학 입시를, 대학 입시를 넘어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으로 취급되곤 한다. 이를 테면 전근대 동양의 과거 시험이 그랬듯이.

김상봉은 학벌이 계급보다는 신분에 가깝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 저자 자신은 계급에 속한다고 여기는 - 직업 문제를 예로 든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직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므로 신분이 아닌 계급 문제에 불과(?)하지만 학벌은 한번 얻은 이상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례가 학벌 문제 신분제적 성격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사회에서 직업 변화가 그렇게 잘 일어난다면 모르되, 어제의 트럭운전사가 갑자기 오늘 의사가 되는 수준의 직업 변화는 실제 노동 시장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극심한 불황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에 진출하지 않는 상황을 보라. 이는 일단 중소기업에 들어가고 나면 대기업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걸 젊은이들이 알기 때문이다. 직업이 곧 현대판 ‘신분’ 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직업 또한 학벌과 마찬가지로 ‘신분’ 문제로 여겨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학벌차별을 학력차별이나 성별차별, 직업차별 혹은 외모차별과는 구분되는 ‘신분 문제’로 판단할 것인지는 좀 더 많은 논의와 좀 더 많은 논거를 찾아야 한다. 굳이 학벌 문제를 신분 문제로 이야기해야만 그 심각성이 부각되는 건 아닐 터이니, 보다 정확하고 보다 적절한 개념을 찾아내는 게 건전한 학벌 논쟁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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