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간의 관심인 세월호 침몰사고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학생들이 대거 실종하거나 사망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상실감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점점 가라앉는 배를 망연자실 바라보면서 국민들의 슬픔과 분노 역시 심장 저 밑바닥까지 차 들어가 사회 전반의 우울증을 가져오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생존자를 발견하기는커녕 국정 책임을 방관하거나 민간에게 문제를 떠넘기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분노에 못 이겨 정홍원 국무총리가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단순히 국정책임자가 그만뒀다고 이 사건이 쉽게 수그러들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수학여행 금지가 대안인가?


 물론 국가 차원에서 아무 것도 안했다고 볼 수는 없다. 정부가 내세운 여러 대책들 예로 지난 21일 교육당국이 제시한 ‘1학기 수학여행 전면 금지’가 있다. 이번 수학여행 금지내용은 세월호 침몰사고를 결정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교육당국 차원의 안전대책을 논한 임시정책으로 유일하다. 하지만 교육당국이 내세운 이 대책이 근본적인 이 사건의 해결책인지는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안전을 위한 가장 적극적인 태도는 상호협력, 현장과 상황에 대한 이해, 면밀한 소통이다. 그러나 교육당국은 수학여행 떠날시 징계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며 학교주체들을 겁박하고 있다. 이처럼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상태는 안전도모에 있어 주도성, 민감성, 적극성을 저해하여 도리어 대처능력이 줄어들게 할 것이 우려된다. 학교는 교육활동을 도모하는 터전이자 책임소재지이다. 즉, 이러한 사건이 터질수록 학교 자체적으로 능동적이게 대처할 수 있는 안전대책과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것이 책무일 것이다.


 현재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수학여행을 진단하는 핵심은 ‘단체여행’이다. 대게 수학여행은 한 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다수의 형태였다. 그러므로 인해 교사와 학생의 생활공간이 분리돼 크고 작은 생활문제가 일어났고, 프로그램의 차질없이 진행하기 위해 무리한 관광버스의 꼬리물기 운행을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또한 수학여행 저녁엔 교사들의 은밀한 단합대회로 변하고, 학생들 또한 나름대로 일탈의 현장으로 변하는 등 수학여행의 본질은 날로 훼손되며 관행화되어 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 차원에서 바라볼 때 이제 수학여행은 소규모 테마수학여행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여행지 선정부터 학생들이 참여해 직접 결정하고, 각 학급이 주제를 정하는 쪽으로 수학여행 방식이 변해야 한다. 청소년이 수련활동을 포함한 각종 청소년활동을 기획하고 참여할 권리는 행복추구권에 내포된 일반적 행동 자유권으로서 자유권적 기본권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당국 정책으로 수학여행을 제한할 경우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 제한의 일반원칙을 준수하여야 마땅하다.


 어른들의 말만 믿고 대기했다가 수많은 인명피해 당한 학생들을 생각해보자. 학생들을 존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복종만 가르쳤던, 교육적 사회적 풍토가 나은 처참한 결과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지 않은 채 마련된 수학여행 금지 정책에 대해서도 다시금 되짚어보자. 많은 폐해가 예상되는 만큼, 지금이라도 즉각 수학여행 금지 조치를 중단하고 학생, 교사, 학부모 등 학교현장과 대화의 장부터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세월호 피해자들의 고통과 사회 구성원이 받은 상처에 함께 하는 사회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이처럼 학교현장은 세월호 침몰사고에 둔감하다. 계기수업을 하지는 못할망정, 교육당국은 허위사실 유포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학교현장의 침착함을 권고한다. 결국 도덕 교육은 받지만, 공감 교육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 사태에 대해 큰 감정적 흔들림이 없을지도 모른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렇게 공감 능력을 잃은 학생들이 우리의 미래세대 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구조를 기다리는 일도, 남은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도, 문제 해결과 책임 요구 등 교육주체들이 힘을 모으는 공감 과정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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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을 시작하자마자 정치공방이 뜨겁다. 선거 초반부터 새정치연합이 독자 창당을 준비하면서 양당 선거체제가 깨지는가 싶더니, 최근 합당결정에 의해 도로 민주당이 되면서 다시 양당 경쟁으로 선거분위기가 반전됐다. 정치는 양적인 투표로 결정되는 것이고, 득표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특정정당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야합은 한국정치에 익숙한 풍토로 자리잡고 있다. 결국 이런 정치문화가 세속되다 보니, 광주에서는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공천 받아서 홍보물에만 실려도 당선된다는 말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느 출신이란 것은 선거에 유·불리함을 가릴 수 있는 절대적 수단이다.


 이처럼 한국정치의 경쟁 시스템은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이기보다는 정당에 의해 배타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또 다른 배타적 평가 잣대가 있는데 바로 ‘출신학교’이다. 학벌을 통한 승자 독식체제 또한 그 대물림 현상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음을 자랑하고 있다. 출신학교가 국민들의 드넓은 의식까지 깊은 영향을 주며 정치적 판단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후보 중 36%가 SKY(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었다. 300명 중 무려 109명이며, 109명 중 62명은 서울대 출신이다. 이에 반해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대 최종학력 출신은 16%뿐이었다(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조사결과). 비단 이 현상은 국회의원 선거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선거, 대통령 선거에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나고 있다.


 결과를 보면 느끼듯 좌파-우파, 보수-진보를 가릴 것 없이 주요 정당에서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다수가 서울대 등 특정대학 출신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한국정치에서 특정대학의 학벌이 권력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특정대학 출신이 이 나라의 성골인 셈이다. 하지만, 정치적 선택의 기준은 후보자의 정책, 양심, 소신 등 가치가 중심이어야지, 특정정당과 출신학교를 통해 판단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대선에 김순자 후보는 자기소개에 출신학교를 기재하지 않았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구)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7명 전원이 출신학교를 기재하지 않았다. 홍세화, 박노자 등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후보들의 출신학교를 기재하지 않은 것은, 출신학교 기재가 진보정당이 지향하는 학벌 철폐라는 방향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진보정당의 이런 목소리는 지금도 변함없다. 이번 지방선거에만 보더라도 노동당 광주시당에서는 시장후보 뿐만 아니라, 당내 모든 후보가 출신학교를 미기재하여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녹색당 등 진보정당에서도 일부 예비후보들이 출신학교를 기재하지 않는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출신학교 미기재 운동은 단순한 정치문화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만은 아니다. 청년들 또한 ‘구직이력서의 출신학교 기재’로 인해 불필요한 편견과 차별로 구직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이들에게 취업기회를 확대 제공하고, 경제력이 부족한 소수자들의 구직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구직이력서에도 출신학교 미기재가 적극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최근 서울시에서는 고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신학교를 적지 않는 차별 없는 표준 이력서 도입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이력서는 개인능력과 무관한 차별요소를 제거하고 직무중심으로 공정한 채용을 진행하고 있으며, 직업역량과 무관한 과도한 스펙 쌓기를 조장하는 요소도 삭제하고 있다.


 이런 노력들 속에서도 대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이름 다음으로 ‘어느 학교 다니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 관습적인 이 질문을 누구도 피해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진보정당과 서울시의 의미 있는 출신학교 미기재의 열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수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된다. 하지만 변화와 희망을 기대해보자. 2010년 김예슬의 자퇴서를 되새기며….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대학생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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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드림 딱꼬집기]누구를 위한 실력 광주인가?

-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다가오는 6월 교육감선거(지방선거)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었다. 등록 전부터 저마다 출사표를 던지고 본인이 적임자라며 위세를 높이고 있는 가운데, 대다수 후보자들이 현 교육감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어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거기서 거기’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예비후보자들의 특별한 공약이나 정책, 이슈들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실력 광주’가 추락하고 있다는 말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광주교육의 실력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는 현재 입증하기엔 애매한 시점이다. 금년도 대학 입시가 마무리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단순히 수시성적으로 대학 입시결과를 점칠 수도 없을 것이고, 대학 입시결과로 ‘실력 광주’를 따지는 것이 제대로 된 평가인지 냉정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은 학력 저하, 명문대 배출 숫자를 근거로 현 교육감 비난선거를 치르려는 ‘초보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을 입시로 줄 세우는 교육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현 교육감이 진보교육감이라 해서 실력 광주의 표상이 다를 것인가? 이 질문 또한 애매하다. 물론 광주시교육청 입장에서는 빛고을혁신학교 확산, 학생인권조례 시행 등 다양한 교육정책의 성과들을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서울대 등 특정대학교 입시설명회를 이전 교육감보다 많이 개최하며 학벌주의 교육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선행학습을 주창하는 사교육 종사자를 초청해 학부모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지나친 대학 진학을 위한 행사와 예산을 배치하며 오락가락한 진보교육의 행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단적인 사례만 보아도 현 교육감 역시 학력, 명문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실력 광주 교육의 표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는 이유는 왜 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교육감 선거표심이 유권자의 절대 다수인 학부모이고, 학부모들의 기대에 부흥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반대로 학생들(청소년)은 선거법 상 교육감 선거에서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감 후보입장에서 보면 학생들의 기대와 요구는 크게 신경 안 써도 된다는 얘기와도 같다. 교육의 절대 주체가 학생임에도 말이다. 결국 광주교육은 학부모들의 표심으로 결정되고, 선거현상만 놓고 보자면 학생들은 교육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학생들의 선거참여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른 선거는 몰라도 교육감 선거부터라도 먼저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고, 선거에서 불리한 야당과 의식 있는 청소년단체들이 선거 연령을 낮추자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하지만, 당위적인 요구일 뿐, 야권에서 동조하지 않고 있는 상황 또한 끊임없기는 마찬가지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 선거권 낮추자는 논의 또한 자비로운 비(非)학생들의 시선과 요구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권 논의 또한 학생들이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학생들이 직접 선거에 참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2010년 교육감 선거 당시 청소년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청소년 후보가 직접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교육에서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0순위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호0번을 달고 출마한 청소년 후보는 말하자면 일종의 계급 후보였으며, 벽보도 안 붙여주고 공보물도 안 보내주는 선거관리위원회를 원망하면서 열심히 유세를 다닌 바 있다. ‘기호0번 청소년 교육감후보…’ 다른 건 몰라도 학생들과 학교 밖 청소년들의 시선에서 교육을 얘기한다는 점은 선명하다. 어쩌면 기성 교육감 후보들이 학생들의 기대와 요구를 무시한 것은 청소년 정치참여에 대한 견제를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육감 선거가 5달 남짓 남았다. 벌써부터 언론에서는 실력 광주교육 논란도 모자라, 교육감 선거방식에 대한 방식을 가지고 정치주제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아마도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도 학생들의 목소리를 귀담아줄 진실된 후보는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이라도 가져보자. ‘학생들을 위해 우리가 투표로 결정했다’는 자비로운 척 하는 기성인들의 말에 ‘시험만 골백번, 현장경험 풍부’라고 뒤틀어 외치는 청소년들의 저항의 목소리가 언젠가 교육정책으로 반영될 그날을 꿈꿔보며….


박고형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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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흥행작인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송우석. 그는 학연, 지연, 재력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일명 고졸 출신이다. 송우석은 오로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든 공사장 일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평범한 가장이다. 그러던 그가 잠시 접어두었던 고시 공부를 재개해 당당히 판사, 변호사로 거듭난다. 바로 이런 사람을 옛말로 ‘개천의 용’이라 부른다. 그동안 송우석을 괴롭힌 학벌과 가난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를 벼랑 끝으로 몰기도 하고, 반대로 힘이 되어주는 반전이 되기도 한다.


 영화처럼 1980년대 당시는 시골에서 가장 큰 재산인 가축을 팔아 공부를 시키고 개천의 용을 배출시키는 시대이다. 가난한 집의 경우 공부 잘하는 한 명의 자식을 대표로 서울에 보냈고, 훗날 ‘대표 자식’은 성공해서 부모님과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집안의 중심역할을 해야 했다. 돈이 없어도 가족 중 한 명만 소위 명문대를 나오면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가장이 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한국사회도 ‘명문대=성공’ 시나리오는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서 부의 대물림이 상쇄되어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를 완화해 왔지만, 이제는 오히려 교육으로 인해 부의 대물림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실제 어렵게 부모들이 사교육비를 마련해도, 소득에 따른 사교육비의 격차는 곧 교육기회의 불평등을 불러와 직업 선택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로 변화한 지 오래다. 급기야 지금은 소를 파는 것은 물론, 집을 팔아 교육시키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재작년 한국은행 통계 결과, 소득이 낮을수록 사교육비 목적의 주택 담보 대출사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난 점이 이를 증명한다.


 느끼다시피 영화 속 당시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경쟁체제 속에서 살아남기란 어렵고 험난한 건 마찬가지다. 그런 어려운 관문을 뚫고 변호사가 된 송우석은 ‘데모를 해서 세상을 바꾸려드는 학생들’을 가당치 않아 했다. 그저 데모를 핑계로 공부도 안 하고 쉽게 자신의 이득을 가져가려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돈만 밝히던 세법 변호사 송우석이 많은 변호사들이 기피하던 국가보안법 위반 재판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변호인 송우석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소중한 ‘그 이유-무언가’를 끄집어낸다. 그건 바로 사회문제를 기피해왔던 자기 자신의 ‘양심’이다. 


 영화 변호인의 양심을 보며 요즘 다시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사회, 정치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요즘 한참 유행인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나 국정원 댓글사건의 소신발언도 이러한 양심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 어록처럼 행동하는 양심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약소하게라도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사람들의 진정한 마음은 변호인 송우석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주체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반성과 소신을 적은 양심선언이 시간이 흐를수록 흐름이 커져가고 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점이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이런 양심선언들도 갑자기 수그러들 것 같은 위기의식 때문이다. 즉, 자신의 반성과 소신은 언제든 밝힐 수 있지만 자신의 삶까지 전환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영화 속 변호인처럼 철도파업 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학입시거부자와 같이 자기 소신을 가지고 잘못된 삶을 거부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양심을 찾아보기 힘들 때 일수록, 작지만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려 주고 응원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서태지가 부른 ‘교실 이데아’의 가사처럼, 이런 세상을 남이 바꾸길 바라지만 말고, 같이 바꾸도록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변호인이 되길 바라며….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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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외벽게시판에 올린 대자보가 학교 안팎으로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 바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 정치와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의 뒤늦은 반성과 고통스런 현실, 연대의 목소리를 담은 한 편의 고백이다. 대부분 당당히 실명을 넣었고, 덧붙여 출신학교명과 학번을 밝혔다.


 그런데 `고려대학교 학생’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특별한 함의는 단순히 비수도권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과는 조금 다른 어감을 지닌다. 대부분 고대생은 고려대학교를 사랑하고, 어려운 입시를 뚫고 명문 사립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짜 명대사인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밝히는 것도 그런 특별한 함의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대자보에 당당한 출신학교 학력


 그런데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보면 고려대가 사랑받을 구석은 별로 없다는 건 캠퍼스 안의 학생들로선 쉽게 공감하곤 할 것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와 사회적 담론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민주적 체계마저 박탈당한 채, 학점과 취업경쟁으로 대학 생활에 얽매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무리 명문 사립대학을 나와도 잘못된 사회구조 속에서 학생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대자보에는 당당히 출신학교명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출신학교명을 밝히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익숙해진 문화라고 본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의도로 그러한 질문과 답변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우리 내면의 학벌주의와 대학중심주의가 숨겨져 있으며, 이로 인해 소외받는 소수자들이 존재한다. 이를 증명할 고졸학력의 한 시민이 작성한 `안녕들합시니까’ 대자보의 일부분이다. “저는 대학에 가지 않고, 가지 못한 무명 민중가수입니다. `안녕들하십니까’와 수많은 대자보들은 저에게 감동을 주었고, 대학가에는 그것들이 붙습니다. 저 역시 대자보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디다 붙일 곳이 없더군요. 한마디 구시렁 구시렁 툭 튀어나오더이다.”


 이 대자보 문구가 고대 학생들의 단순한 비아냥 혹은 라이센스를 취득하지 못한 자의 부러움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 시선에서 보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섞인 하소연이다. 한 사람이 출신학교를 밝힘으로써 다른 주체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처럼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 역시, 안녕하지 못한 사회임은 분명하다.


 타인과 나를 배척하는 기준 없애야 


 날이 갈수록 고졸이하 학력자들이 늘어만 간다. 경쟁교육의 문제점 때문에 대학을 거부한 사람, 학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재밌게 개척하는 사람, 다양각색한 고졸이하 학력자들이 우리사회에 여럿 존재한다. 이들이 당당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소위 고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 않다는 건 누구나 아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장애인 주차장처럼 이들을 위한 자보공간을 만들어주지 못할망정, 우선적으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고 본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에게 바라는 것은 간단하다. 안녕하지 못한 이유, 부당함을 말하는 것이 제한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렇기에 학벌과 재력, 성별 등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타인을 나와 배척시키는 모든 절대적 기준들을 없애는 것부터 출발해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안녕을 외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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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 2005년 KBS2TV에서 방영했던 폭소클럽 ‘블랑카의 뭡니까 이게’라는 프로그램을 기억하시는가?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또 다른 한편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를 풍자해 1년 동안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개그 프로그램이다. 


 이 코너는 단순히 이주민의 말투를 흉내 내며 그들을 희화하거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주민 ‘일명 블랑카’를 연기한 당시 개그맨은 창원의 공업단지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경험을 살려, 실제 그들이 직장생활에서 겪는 어려움, 인권침해 등을 잘 묘사했다. 이러한 사실성과 풍자를 바탕으로 ‘뭡니까 이게’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었다.


 프로그램이 종영한지 8년이 지난 지금, 애석하게도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게 어려움과 차별을 받고 있다. 특히 인권도시라 불리는 광주에서마저 최근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이 사용자로부터 임금체불과 인권침해를 당했는데, 광주시 어느 부서도 구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겪은 사건이 있었다. 되레 이 소식을 들은 노동·국제단체, 노무사가 이 문제를 나서게 되며, 피해 받은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한 노동현장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게 광주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최근 광주시에서 인권상담, 조사, 구제 등 업무를 구체화하고자 출범시킨 인권옴부즈맨 제도가 있다. 상임 인권옴부즈맨이 달랑 한 명뿐이기 때문에 그 업무의 한계는 뚜렷하다. 하지만 다양한 인권영역의 전문가들이 인권옴부즈맨에 참여했기에 인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인권침해에 대한 심도 있는 활동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특히 이주민 몫으로 참여하고 있는 권현희(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 광주센터장) 비상임 인권옴부즈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 문제가 잘 풀릴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광주시의 답변은 기대 이하였다. 시 산하 기관만 조사대상이기에 자신의 영역이 아니란 이유로 해결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광주에는 이주노동자 노동조합도 없고, 이주노동자 인권단체도 없고, 이주노동자 인권과 관련한 전문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주노동자들이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주인 셈이다. 이처럼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사회영역에서, 만약 똑같이 그들의 권리가 침해당한다면 누가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인권의 가면을 쓴 광주시가 조그만 양심이라도 있다면, 이런 사안에 대해 노동청, 사용자, 당사자, 광주시, 인권단체에게 ‘사회적 합의’를 제안하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시도해봤으면 어땠을까 되돌아 생각해본다.


 광주시 인권담당관실에서 인권옴부즈맨을 도입한지 한 달이 되어간다. 물론 시작이기에 이와 같은 사건의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아주 가깝게 상담할 수 있는 민주인권포털 사이트마저 인권침해 상담기능을 막아놓은 상황에서 무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특히 광주인권지표를 통해 ‘기업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부당노동행위 발생 수 등을 지표화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지표대상인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현실은 외면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현재 광주시가 인권에 관한 예산을 늘려가므로 인해 인권교육, 각종행사, 거버넌스 등을 펼쳐나가고 있고, 인권옴부즈맨를 통해 본격적으로 인권침해를 구제화하겠다는 의지는 박수쳐줘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인권을 단순 수치로 삼고 ‘적량평가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앞으로의 광주시의 위상이 돈으로 포장한 자본의 위상하고 똑같아 질 것이라고 예상된다. 지금이라도 광주시가 이주노동자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친화도시를 고민해주길 바라고, 더 나아가 노동청, 시민단체, 노동조합도 이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해주길 기대한다.


박고형준<학벌없는사회를 위한 광주시민모임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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