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평가, 청소년인권의 감수성으로 까칠하게 바라보기

아즈(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자. 보시기에 대한민국 교육이 어떻습니까? 장담컨대, 그렇게 1000명의 아무나에게 물어봤을 때 우리나라 교육이 ‘잘 되고 있다’, ‘성공했다’ 라 말할 사람은 손가락 열 개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정말로 그런지 궁금해져서, 어제 아침, 직접 밖에 나가 거리를 걸어가면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약 200명에게 즉석 조사를 했다. 망했다. “문제 있다”는 즉각적으로 튀어나왔지만 좋다, 괜찮다, 잘 한다는 뉘앙스가 담긴 말조차 결국엔 단 한 명에게서도 들어보질 못했다.

별보며 학교가고 달 보며 귀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들의 아들딸은 아직도 별 보며 등교해서 달 보며 하교한다. 달라진 게 없다. 게다가 이젠 뜨거운 사교육 열풍까지 덤으로 몰아친다. 그 와중 살고자, 이기고자, 옆 짝꿍의 머리를 밟고 더 높게 올라가고자 쏟아 붓는 기백만 원의 학원비로 만들어진 타율적 경쟁과 양극화속에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60년 교육사를 그 누가 성공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문제가 있다는 답은 만민 공통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문제의 해결책은 가지가지다. 평준화를 해체하고 경쟁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빡세게 전국 수준, 세계 수준에서 경쟁시키고 엘리트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사람들, 더 평등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서열화되지 않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 교육문제의 해결책이랍시고 정부가 내민 카드 중 하나가 ‘교원평가제’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 공통의 카드다.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국회의 입법에 상관없이 현재 시범 운영되고 있는 교원평가제를 내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겠다고 선언했고, 국회에는 교원평가제 법안이 논의 중이다. 교사들을 평가해서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을 줄이겠단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문제를 일정정도 해소시킬 단비로 이 교원평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교원평가가 교육을 변화시킬 단비가 아닌 산성비라면?

교사에게 점수 매기고 경쟁시키면 교육이 얼마만큼 나아질까?

지금까지 대한민국 교육은, 경쟁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교육이 발전하지 않기에 건전한 경쟁을 하도록 만들겠다며 입시경쟁의 압박을 지속시켜오고,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 또한 경쟁과 자율을 내세우며 대학교, 초중고교 할 것 없이 서열화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이제는 교사들이 노력이 부족해서 교육이 발전하지 않는다며 교사들을 평가하고 비교하며 압박을 하겠다며 교원평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학생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얼마나 잘 맞는가를 평가하는 것과 교사들을 종이 몇 장으로 평가해서 비교하는 교원평가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오해인가?

교육활동은 교사요인, 학생요인, 가정요인, 교육 환경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 속에 이루어지며 이런 요소들에 따라 교육의 과정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업의 수준은 교사의 학교 내에서의 역할, 수업시수 등에 영향을 받게 되며 학교나 교실의 환경, 학생 요인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야 ‘평가’란 것이 그나마 제대로 될 텐데 열 개가 있으면 그 중 한두 개(교사들에 관한 것들)만 들춰본 다음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교육문제의 책임이 교사들한테 전혀 없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교사들만 쪼면 학교교육이 더 학생들이 행복한 교육이 만들어질까?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지 몰라도 크게 나아지는 모습은 잘 그려지질 않는다. 더군다나 이 교원평가제는 학생들의 의견을 중심에 둔 제도도 아니다. 교장, 교감 등 학교 관리자들이나 교사들의 평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좋게 평가하는 교사의 덕목이란 대체로 무엇일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고 정책을 들여다보아도 점수매기고 평가하고 비교하는 지금까지의 평가/비교/경쟁위주와 다르지 않은 교육정책 같고, 교육이 좋아질 거라는 기대가 생기지를 않는다.

또한 평가로 사람을 관리하는 제도에는 필연적으로 강압이, 협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 평가의 목적이 교원의 ‘능력개발’이기 때문에(교원능력개발평가) 평가결과를 모든 교원의 능력개발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제적으로 연수를 보낸다던지 잘라버린다던지 하는 징벌의 요소가 있어야 시스템 유지가 가능하다.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을 폭력과 강압, 차별로 갈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뭐 교사들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임용고시를 통과했으니 알겠지만) 평가, 경쟁, 서열화, 점수매기기, 그리고 그에 따른 강압과 차별이 난무하는 학교가 별로 다니고 싶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사와 학생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교원평가의 목표인가?

교원평가의 미래는 대한민국 교육 60년사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학생과 교사들의 노력 부족이나 학부모의 관심 부족이 아닌 평가/비교/경쟁만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다. 주어만 다른 평가/비교/경쟁위주의 교육정책인 교원평가가 교육에 변화를 만든다? 말도 안 되는 사기다.

교원평가로 학생의 참여는 보장되지 않는다

정부는 교원평가를 통해 학생/학부모의 만족도를 참고하여 연수를 통해 교육능력을 발전시키고,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운영과 교육내용/과정에 의견을 개진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학생의 학교운영, 교육내용/과정 참여는 지난 몇 년간 청소년단체와 진보적인 교육단체 등에서 꾸준히 요구해온 부분이다. 교육을 진행하면서 그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의 의견들이 중요한 목소리로 인정되고, 논의를 거쳐 반영되는 것은 교육의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원평가가 이 부분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학생들의 참여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학생들은 학교운영이나 교육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의견을 낼 현실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그 시간에 영어 한 단어를 더 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참여는 사치이다. 둘째, 학생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의견을 내다보면 쓴 소리도 당연히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임교사에게, 학교장에게, 교육감에게 간언을 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물론, 청소년은 미숙하고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여타 건설적인 의견들조차 무시되는 게 현실이다. 셋째, 어떠한 참여구조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학교운영은 물론 교육과정 전반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내고 이를 반영시킬 어떤 통로도 권한도 없다. 학생회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이라 하지만 학생회 회의 또한 교사들이 소집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가 없다. 또한 학생회에서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모든 최종결정은 교장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원평가제는 이런 것들을 해결해줄 수 없다. 입시경쟁교육이 더욱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겐 여전히 교육의 과정/내용과 학교운영에 대해 논의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거기다가 현 상황에서는 평가조차 입시 위주로 평가되기 십상이다. 또한 교원평가에서도 ‘미성숙한 학생들’이라는 권위적인 인식은 여전하다. 이번 교원평가 6자 합의체에도 정당의 참여는 있지만 정작 교육정책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생, 청소년들의 참여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만들어가기보다는 단지 ‘교육을 받는 대상’인 학생들의 만족도를 물어 참고자료로만 쓰겠다는 이 제도는 학생들을 무시하는 제도에 가깝다.

교원평가제를 추진하면서, 정부는 마치 학생들이 교사들을 평가함으로써 수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학생들도 평소 불만이 있던 교사들을 평가하고 제재할 수 있다는 말에 자신들에게 힘이 생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그런 것 같지만, 교원평가제로는 결과적으로는 학생들에게는 별 다른 권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만족도를 점수화해서 주는 것이 과연 ‘참여’라고 할 수 있을까? 교사들을 서열화시킬 자료로 활용될 숫자들을 내놓는 ‘소비자’의 역할일 뿐이다. 학생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는 더 적극적인 주체이자 주인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제연수의 최종결정권자는 교장이나 교육감 같은 ‘윗사람’들이다. 교육감이 지금 학교의 촌지, 성추행, 체벌 교사 같은 부적격교사들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일까? 인터넷에 간단하게 검색만 해 봐도 문제교사들을 성토하는 글이 가득하고, 교육청 홈페이지에 지금까지 수백 건의 글이 올라왔지만 교육청은 그 글을 삭제하거나, 무시할 뿐이었다. 즉 이 평가를 통해 교육감이 부적격교사를 파악하더라도 문제 있는 부적격교사는 교육감의 권력 속에 숨어 보호받고, 교육감이나 교장 등을 귀찮게 하는 부적격교사에 대한 보복성징계의 근거로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교원평가는 오히려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평가만으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했다는 헛된 명분에 그쳐 실질적인 학교자치를 가로막고, 지금의 교육을 더욱 썩도록 만들뿐이다.

경쟁 아닌 소통을, 학생에게 권력을, 제대로 된 교육환경을!

우리는 평가와 경쟁이 아닌 소통을 원한다. 교육현장에서는 신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할 수 있고 교사가 학생을 신뢰할 수 있어야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진심으로 교육을 같이 만들어가고 서로 대화하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런데 학생이 평가당하고, 교사가 평가당하며 생존을 위해서 서로 앞서가려고 아둥바둥거릴 수밖에 없는 무한경쟁의 분위기가 팽배한 이상 불신이 만연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제안한다. 점수를 매기지 말고, 서로 무엇이 문제이고 그런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얘기를 하자는 것이다. 학부모, 교사, 학생 등 교육현장에 발을 담그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끼리 협력하고 논의하여 건설적으로 상황을 개선해나가자는 것이다. 얼핏 이상주의적으로 들리지만 사실 교원평가제를 실시하고 평가 설문지를 돌리고 채점하고 윗선으로 올려 보내고 점수 매기고 하는 것보다 절차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훨씬 우수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과밀학급 해소, 학교 시설 개선, 교사 수 증원 등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국은 OECD니 뭐니 하며 다른 나라들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교육예산도 낮은 편이다. 학생들은 냉난방 시설이 불안하고, 급식 질이 안 좋고, 탈의실도 동아리실도 학생회실도 없고, 교사당/학급당 학생수가 너무 많고, 운동장도 좁거나 없는 학교에 심각한 불편을 느끼고 있다. 교재비 등이 부담스러운 학생들도 많다. 교육예산은 잔뜩 깎으면서 교육의 질을 올리기 위해 교사들만 평가하겠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에 가깝게 들린다.

우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개혁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혁은 교원들이, 교육부가, 크게는 현재보다 힘이 센 사람들을 갈아치우고 청소년의 목소리를 그들의 논의와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현재 청소년들은 ‘덜’ 살았다는 이유로, 감정에 쉽게 치우친다는 이유로, 미숙하다는 이유로 각종 의사결정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청소년들에게 결정할 권한도, 참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미성숙’의 기준도 자의적일뿐더러, ‘미성숙’을 이유로 참여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할 수는 없다.

이제 두 번째, 아래로부터의 권력. 우리는 자치를 원하며 정당한 권력을 원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다. 그 결정들이 초기에는 비록 미진할지라도 청소년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학생이 인권침해를 당했을 때, 이를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1의 주체는 학생들이 아닐까? 학생인권을 보장하게 만들고 학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학생들이다. 학교 운영이나 교육 방식에서의 개선할 점을 제대로 짚을 수 있는 주체, 어떤 교사보다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불편해하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에게 권력을 달라. 정말로 인권을 침해하는 교사가 있다면 그 교사를 징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학생들이 스스로 논의하고 자정할 수 있는 권력을 달라. 교육과정과 학교운영에 당당하게 참여하여 논의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하라. 권력을 분립하고 나누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지금의 교육 현장은 독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자치의 권리를 주는 것은 비단 우리의 발언권 획득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내면적으로 더욱 성장할 수 있고, 사회적 능력의 발달을 꾀할 수 있다. 기존의 결정권자들은 더 이상 구름 위에서 이것저것 결정한 다음에 결정한 사안이 현실에 맞지 않아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때 머리를 싸매고 무엇이 문제인지 자기들끼리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잘 되는 교육현장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교원평가제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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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중단 청소년 문제에 대한 성찰과 전망

이치열(대안교육연대 사무국장)

매년 7만여 명의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 두고 있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일은 이 청소년들이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청소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우리사회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또 문제의 진단과 해결방안에 있어서도 본질적인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 없이 근원적 처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학업중단현상을 초래하는 근저에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탐색을 시작하고자 한다.

1. 왜 교육이 문제인가

“그래도 아이들 학원비는 대줘야 할 텐데…” 밤새 소주잔을 함께 기울이는 권고 사직당한 어느 아버지의 넋두리이다. 다니던 직장의 구조조정으로 권고 사직해 이제는 실업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아이들 교육문제를 고민하는데 그 첫 번째로 꼽는 것이 ‘학원비’이다. 여기에 우리사회 교육신화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는 흐름과 함께 근대적 학교제도가 생겨났다. 이전까지는 선택받은 귀족이 아니면 받을 수 없었던 교육을 많은 사람들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근대학교제도가 갖는 진보성이었다. 한편 자본주의 시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숙련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구조가 필요했다.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방식이 근대 학교제도인 것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명분하에 취학연령에 해당하는 모든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자본이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가르친다. 거기에는 개성보다는 획일성이, 비판보다는 순종이, 창의성보다는 무기력이 필연임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러한 학교제도를 통해 양산된 인간은 나만의 행복, 더 많은 돈, 더 높은 권력 등의 가치를 향해 체제 순응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경쟁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가끔 어려운 집안 출신 가운데는 드물게도 성공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한 모델은 마치 학교제도가 이 사회의 평등에 기여한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학교가 사실상 이 사회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틀로서 기능해 왔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학교제도가 갖는 본질적 속성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교육 현실은 어떤가? 2006년 판 OECD의 통계연보에는 우리나라가 OECD국가 30개국 중 GDP대비 공교육비 지출은 23위, 사교육비 지출은 1위로 나타나 있다. 왜 이토록 기형적인 교육비 지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는 한국사회가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임을 반증한다. 학벌사회로 불리는 우리사회는 교육이 온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을 길러낸다는 본연의 목적이 상실된 것은 물론이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임무를 포기한지도 오래된 일이다.

일단 수능시험이 끝나면 바로 점수대별 전국대학의 순위표가 작성되어 나오고, 이에 따라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자본과 권력에 근접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에 모든 이들은 이 ‘10대 결정론(어느 대학에 입학하느냐로 인생이 결정된다)’의 신화 앞에서 광신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 자본력과 문화자본력이 청소년의 미래 삶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회가 되었다. 아직도 대도시 중·고등학교에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장학금으로 써 달라고 전달한단다. 그러나 이제 우리사회에 ‘공부 잘하면서 가난한 아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70년대까지만 해도 소위 고학생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력과 아이의 성적간의 불균등 사례를 목격할 수 있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이제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는 오직 계급 재생산의 기제로서만 작동할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잘못된 이 교육신화와 내 아이만큼은 지긋지긋한 배제와 차별로부터 벗어나 경쟁의 승리자로 키우고픈 욕망에 가난한 노동자들도 너나할 것 없이 승산 없는‘로또 당첨’의 환상으로 그 ‘학원비’를 대주기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과 문제점

(1) 원인파악을 위한 통계자료 부족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책은 그 사유에 따라 다양하게 강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학업중단 청소년들에 대한 실태조사는 터무니없이 열악한 수준이다. [표1]에서 보다시피 현재 중단사유를 제시하는 유일한 통계시스템인 한국교육개발원의 통계시스템에서는 대책을 세우기에 적당한 구체적 사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통계에조차 잡히지 않는 학업중단 청소년들([표2]참조)에 대한 대책은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표1] 학업중단 청소년 현황 (단위 : 명, %)

연도

합계

인문계

전문계

‘06.2

18,403

(0.46)

15,669

(0.78)

10,166

(0.81)

12,910

(2.57)

23,076

(1.31)

57,148

(0.73)

‘07.2

23,898

(0.61)

18,968

(0.91)

12,616

(0.98)

15,314

(3.10)

27,930

(1.57)

70,796

(0.90)

‘08.2

20,450

(0.55)

20,101

(0.98)

15,477

(1.15)

17,466

(3.58)

32,943

(1.73)

73,494

(0.96)

‘09.2

18,132

(0.52)

19,681

(0.98)

16,174

(1.14)

18,099

(3.76)

34,273

(1.74)

72,086

(0.96)

[표2] 학업중단 이후 동선이 파악되는 청소년 현황

학업중단

이후 상황

관련기관

현 황

대안학교

- 각 대안학교별 관리

(서울의 경우, 서울시대안교육센터 종합 관리)

- 교육과학기술부

중등전원형: 약2,500명

중등도시형: 약 650명

초 등: 약1,300명

기초생활수급자

- 주민자치센터, 각 구청

- 보건복지가족부

미혼모지원시설

- 시설별 관리

- 보건복지가족부

약200명 추산

학업중단

이후 상황

관련기관

현 황

청소년 쉼터 등록

- 시설별 관리

-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그룹 홈 등록

- 시설별 관리

- 각 구청, 광역자치단체,

보건복지가족부

보호관찰소 등록

- 관찰소별 관리

- 법무부

- 서울지역 5개 보호관찰소

- 무직청소년으로 등록자 (약1,000명)

소년원 입소

- 원별 관리

- 법무부

기타 상황

※ 기숙형 학원 등록 / 홈스쿨링 / 아르바이트 / 히끼꼬모리 / 아무일 하지 않는다 등등

이는 결국 구체적인 사유에 근거한 대책수립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정책적 실패를 낳고 있다.

(2) 학업중단의 주요 요인

첫째는 제도권 교육의 문제이다. ‘교육=경쟁’의 논리로 교육 본연의 임무는 간 곳 없고 오직 상위 10%의 아이들의 성공신화를 위해 다수의 아이들이 들러리를 해야 하는 현행 제도권 교육의 문제가 1차적인 원인이다. 여기에서는 다수의 아이들이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개개인의 개성과 인권이 존중되는 것은 고사하고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질서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빈곤층 및 가족해체로 인한 문제이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 극심한 양극화 현상으로 인해 빈곤에 기인한 가족해체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소년들을 돌봐야하는 사회적 안전망은 부족하다. 요즘 청년 노숙인이 증가하고 있다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학업중단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라고 한다. 결국 학업중단은 OECD 보고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빈곤의 대물림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셋째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청소년들의 개인적, 심리 정서적 어려움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보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과도한 문화적 자극과 소외의식, 현실과 가상세계 사이의 혼동 등은 원만한 관계형성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3) 학업중단 이후의 경로

유 형

경 로

학교요인(1)

학업부진→학교일탈(게임, 학업흥미 상실, 비행 및 무단결석)→ 장기(반복)결석→ 칩거→ 재수(시험준비)→ 장기실업(비정규직)

학교요인(2)

왕따(집단 괴롭힘)→ 전학반복→ 자퇴→ 검정고시(대안학교)→ 부적응→ 칩거→ 게임중독(은둔형 외톨이)

가족요인(1)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학교 중도탈락→ 비행(불법취업)→ 사회적 낙인→ 취업(사회적 기회)상실→ 빈곤화→ 학대방임가정의 형성

가족요인(2)

학대방임(가족해체)→ 가족으로부터 방출→ 기관입소→ 가족복귀→ 기관전전→ 자립기반 실패→ 기관에서 퇴출→ 생존적 취업(동거)→ 성인기관 입소(경계적 적응)→ 사회부적응

개인요인(1)

외향적장애→ 반복적인 징계→ 정학(퇴학)→ 징계프로그램 실패→ 알바(인터넷게임, 폭주)→ 성인범죄(실업, 노숙)

개인요인(2)

내성적장애→ 불안(공포, 우울)→ 무기력→ 무존재감→ 학교흥미상실→ 칩거(게임)

(4) 학업중단 대책의 반복적 실패 요인

우선 학교가 아이의 정서적 문제와 행동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학업중단 아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하게는 대응방식이 지나치게 개인상담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또 아이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실생활 반경을 충분하게 알고 못한 채 대책을 강구해 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빈곤의 어려움, 학교문화에 대한 반감, 가족을 잃은 정서적 어려움 등의 요인을 바탕으로 정확한 대응을 준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상담을 중심으로, 학업을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무료해 하는 이론적 진로교육 등을 반복했기 때문에 실패를 거듭해 온 것은 아닌지 반성적 평가가 필요하다.

3. 학업중단 청소년에 대한 대안적 제언

(1) 경쟁과 서열중심의 교육을 바꿔야 한다

우리사회의 교육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늪이 되어가고 있다. 경쟁만을 앞세우는 입시지옥 속에서 아이들은 성적의 노예가 된다. 시험으로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기하고 점수가 인격을 대신하는 야만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고, 1등을 하는 아이 외에 모든 아이들은 반복되는 패배와 열등감을 내면화하며 자라고 있다. 이것이 학업중단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것이 지속되는 한 학업중단 현상을 지속될 수밖에 없다.

등수는 인격이 아니다. 서열 중심주의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파렴치한 교육관이다. 점수와 등수로 환원되는 ‘경쟁’을 ‘교육’이라 믿는 허상을 깨뜨려 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학교를 등지는 아이들의 숫자는 현격히 줄어들 것이라 확신한다.

(2) 학교로 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흔히 학교로 다시 복귀하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말한다. 학교라는 제도에 아이들이 모두 잘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학교에 잘 맞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해결방식도 더 넓게 열리게 된다.

아이들은 학업중단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심리적 고통과 진로불안, 사회적 고립감, 진학이나 취업 등의 고민을 갖는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해 학교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그들이 학습하고 자립하여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중요하다.

(3) 학습자의 권리, 청소년의 인권에 주목하자

비록 학교에서 나왔지만 엄연히 이들에게도 천부인권으로서의 교육받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학교에 다니지 않기에 받게 되는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이들의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학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학습과 성장이 가능하도록 따뜻한 사회적 배려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학교를 떠나더라도 가정에서 교육의 기회를 펼칠 수 있도록 가정학교(Home schooling)를 활성화 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한다. 또한 청소년도 엄연한 인격체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어야 하겠다.

(4)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

학교는 이제 아이들의 문제를 학교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아울러 지역사회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지역 청소년들을 지역사회가 돌봐야한다는 공동체의식으로 학교-가정-지역사회간의 지역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지역사회가 연계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문제이다. 자발적으로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작은 것부터 모범적인 사례를 만드는 것이 우선 중요하며, 정부와 지자체는 이러한 자발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5) 아이들의 실체에 접근하는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선 학업중단 청소년들의 정확한 현황파악을 위한 실태조사와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들이 학교 밖에서 대체 무엇을 하면서 지내는지, 어려운 점은 무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닌 아이들의 감성과 눈높이로 기꺼이 멘토가 되어 줄 다양한 전문가들이 주변에 필요하다. 또한 많은 예산을 들여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산을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존 청소년수련관, 위탁 또는 비인가 대안학교, 청소년 자활기관, 야학, 공부방, 쉼터 등 다양한 공간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인터넷상에서 학업중단 청소년들이 안정적인 성장과 자립을 할 수 있도록 소통, 상담, 교육, 관계 맺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적절할 것이다.

(6) 새터민,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도 관심 쏟아야

새터민과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업중단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민간차원에서 대안학교(한겨레학교, 셋넷학교, 자유터학교, 여명학교, 아세아공동체학교 등)를 설립하거나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간디교육연구소)을 전개하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지역에서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성원임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폐쇄성과 차별의식이 이들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으며, 아이들 또한 제도교육 체계에 부적응하는 사례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새로운 소수자인 이들에게도 각별한 배려가 요구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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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교육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혁명과 근대 공교육의 이념

지훈(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회원)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사회적 문맥에서 보자면 교육은 소수 특권계급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열린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그리하여 공교육은 모두에게 동등한 자기실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것의 혜택이 없었더라면 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확대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것이 근대 공교육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였던바, 그리하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복지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교육의 기회가 소수의 특권이었던 봉건적 계급 사회에서는 보편적 공교육이 뿌리내릴 수 없었던바, 공교육이란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통용될 때에 비로소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인식이 보편화된 곳에서 어떤 집단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이를테면 장애인을 교육에서 배제한다면 그것은 장애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오늘날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에 따라 교육제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교육의 가치가 사회적 합의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 같은 공교육의 이념을 가능하게 했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교육시설의 절대적인 부족상태는 없었지만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 프랑스 교육은 1791년의 헌법에 의해 초등교육은 법적으로 무상이고, 의무라고 선언됨으로써 교회 권력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민주화의 정신을 세울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이러한 무상국민의무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근대적 공교육제도의 수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이 콩도르세였다.

그는 “현실적으로 권리의 평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공교육은 시민에 대한 사회의 의무”라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학교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계몽의 압제가 힘의 압제에 합류해 있었다”고 지적하며 지식의 독점과 교육의 불평등이 억압의 기제로 작용함을 밝히며 이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는 부유한 집 어린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모든 원조를 재능에 제공하는 공교육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의 기회는 모든 시민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교육에 따른 불평등의 계급적 재생산은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교육개혁도 주장한다. 교육은 정치적 종교적 권력 아래에 있거나 학교가 선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며, 교직의 자율성을 보장하려고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교육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다. 그는 “교육은 공통적으로 주어져야 하며, 여성도 교육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며 공교육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가정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식의 봉건적 사고도 엿보이는 등의 한계가 보이지만, 당시로서 동등한 교육을 주장했던 것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교육의 일반 조직에 관한 보고 및 법안」을 혁명의회에 제출함으로써 민주적 교육체제의 선언인 헌법에 기초하여 계급과 성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교육이 더 이상 부와 결부되지 않을 때 교육의 특권은 사라질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평등에 대한 위험이 적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육에 의한 권력화도 경계하였다. 이는 교육이 계급재생산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한국사회에 더욱 의미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프랑스 혁명 시기 교육에 대한 많은 관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교육 개혁론들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은 미미했다. 나폴레옹에 의해서 중앙집권적 교육행정체계가 일정 정도 수립되었으며, 1882년 ‘훼리법’에 와서야 실질적으로 학교교육의 비종교화나 무상의무교육제도의 원칙이 확립된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우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보편화함으로써 공교육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바탕 위에 평등한 교육기회를 주장한 점, 무상교육의 제공을 통해 경제적 환경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려한 점, 그리고 교육에 따른 권력화를 경계한 것 등은 매우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오늘날까지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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