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능 거부인가

김찬욱(탈학생)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운 듯싶다. 2009년 11월 12일은 더 춥게 느껴졌다. 대한민국에서 대접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고자 한다면 ‘잘’ 봐야만 하는 수능 날이었다. 매년 11월이면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은 미친다. 아니 그 전부터 미쳐 있다. 중요한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코스를 밟을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점수를 받아 높은 코스로 가게 된다면 높은 연봉과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허나 낮은 코스로 가게 된다면 낮은 연봉은 물론이거니와 일자리 자체도 보장받을 수 없다. 코스에 따라 사회의 시선이 달리지는 건 당연하고, 그에 따라 처우가 달라진다. ‘절대’적인 ‘상대’평가인 수능시험의 점수로 이 모든 것이 판단되고 결정된다. 사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쇠고기를 1등급부터 분류하듯 학생들은 성적별로 분류되어 자본에 팔려나가야만 살 수 있다.

2009년 지금 나와 당신들은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수능 거부해볼래?” 원래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개인적인 사정과 복잡한 관계로 인해 대학진학을 하게 된 나로서는 대학진학 자체도 큰 부담이었던 나에게 수능 거부를 했을 때, 이미 수시에 합격하고 주변에 친한 친구들 대부분 수능을 보고 수능을 보지 않는 ‘나’에게 다가올 시선들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주변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의 시선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도 뭐라 할지 걱정됐다(물론 결국은 지지해주었지만).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난 잠깐의 고민도 없이 친구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래.”

‘수능’은 왜 보는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아니,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좋은’ 대학은 무엇인가? 능력 좋은 교수진과 제대로 된 환경을 갖춘 대학이다. 아니, 수능을 잘 본 사람들이 가는 ‘높은’ 대학이다. ‘높은’ 대학은 왜 가는가? 좋은 일자리와 고연봉의 직업을 위해서다. 아니,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못 받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아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언제까지나 시궁창 같은 현실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간디학교를 다니는 동안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며 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그리고는 수능을 앞두고서야 수능 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수능이 싫었다.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제도 하에서 시행되는 시험이었다. 나는 곧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제고사의 결정체인 수능, 나아가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이 빌어먹을 제도가 사라져야한다고 생각했다. 당사자인 학생들은 현실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수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있어도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회에서 말하는 적응이고 모범생인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고자 발버둥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그렇게 만드는 지금의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다시 깨달았다.

수능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수능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그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녀를 승리자로 만들기 위해 사교육에 돈을 퍼붓는 학부모와 그것에 복종하는 학생과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학교교육을 하는 교사. 이 모든 구성원들이 지금의 시궁창을 만든 것이다. 이곳이 시궁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만 잘살면 되지 라는 일념하나로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다.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하고 난 다음날부터 핸드폰과 미니홈피를 통해 중학교 때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기사를 보고 연락이 온 것이다. ‘짱 이다’ ‘멋있다’ ‘역시 너다’ 등등 많은 친구들이 수능 거부에 대해 긍정적이고 공감해주었다. 혹시나 나 자신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지 않으려 했으나 어쩌다 보게 된 댓글들에는 어김없이 다수의 악플들이 달려있었지만 격려하고 공감하는 댓글들이 더 많았다.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한다고 해서 수능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건 1인 시위를 준비할 때부터 누구보다 잘 알고 시작했다. 1인 시위를 릴레이로 한들 기껏해야 4명인데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수능을 거부하고 1인 시위를 하러 갔다. 지금의 제도는 잘못 되었다는 것을, 또 잘못된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아니, 찾아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청소년들에게는 투표권도 없고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한국에서, 제도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공유함으로서 앞으로의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문자와 댓글들을 보며 그 희망에 확신을 가졌다.

단지 암기력만을 평가하는 수능시험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나, 대학에 서열이 매겨져 명문대를 가지 않으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런 현실에서 무엇이 ‘대안’이라고 한가지만을 딱 내놓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은 대학평준화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바꾸어 나가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와 친구들의 작은 행동이 앞으로 지금의 입시제도에 대한 활발한 논의와 대안에 대한 논의들이 더 활성화 되고 지금의 제도를 바꾸기 위한 노력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물론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바꾸고자 행동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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