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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대행진 1 2009.06.05
  2. 팔뚝질을 너머 2009.06.05
  3. 학벌 논의와 세대론 2009.06.05

안녕하세요.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준)에서는 2007, 2008년에 이어 2009년 입시폐지대학평준화 대행진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자전거가 아닌 도보를 통해 전국방방곡에 널리 알리고 많은 분들과 만나고 함께 할 예정입니다.

이번 순례를 통해 교육혁명을 열망하는 목소리를 함께 지르고 전국의 열망을 만나고 싶으신 종주자를 모집합니다. 입시폐지대학평준화 열망이 크시고 자전거를 페달을 힘차게 밟으실 체력이 있는 분이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한반도 남단을 대학평준화의 깃발로 수놓으실 분은 냉큼 연락주시길 바랄께요.^^

0 주최 :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광주-순천지역 실천단

0 일시 : 8월 초 예정 (변경되었습니다.)


0 지점 : 전라남도 지역순례

0 주유 슬로건
- 0교시, 우열반 미친교육 갈아엎자!!
- 이제는 교육혁명 입시폐지․대학평준화!!
- 입시폐지․대학평준화로 교육을 살리자!!
- 초중등은 입시폐지 대학은 평준화, 무상화!!
- 교육과정개혁, 과감한 교육투자로 한국교육 업!!
- 사교육, 시험지옥 안녕 교육혁명 고고싱!! 등.

0 신청 및 문의 : 070-8234-1319, antihakbul@gmail.com

0 신청 기간 : 7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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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가반점

설레임

『학벌 없는 사회』란 이름을 들었을 때 설레였다. 사실은, 강준만의 『서울대 죽이기』에서 느낀 분노와 깨달음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참으로 이성적이고 쿨하다. 학교나 학력 따위는 상관없이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난다고 모두들 스스로 주문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우리들은 그렇게 쿨한 자신을 배반하고, 나도 모르게-그게 바로 무의식이지!- 괴물이 튀어나온다.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어 그대가 학생인권운동에 매진했던 학생투사였고, 세상의 모든 차별에 맞서는 용감한 자였음에도 대학입학원서를 쓸 때! 중하류층 부모의 “대학 나와야 사람된다”는 말에서부터 상징자본이 풍부한 중류층 부모의 유도형 언설들,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스스로 너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가보는게 어떨까?” 라는 등의 이야기와는 상관없다. 문제는 다름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입학배치표 앞에 서서 한없이 작아져 그 줄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어떤 변명들로 위안하고 자책하기도 하고.

생활은 늘 ‘학벌 없는 사회’속에서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학벌없는 사회’속에서 어느덧 계산(혹은 짱구 굴리기)을 하는 우리의 모습. 자,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결의를 하여야 할까?

지겨운 첫마음 타령들

“..전화를 걸면, 의무감으로 약속을 하고/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당신을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예전에는 없는 두근거림은 아니야..”

오래된 노래, 015B의 “오래된 여인들”가수 중에 일부다. 학벌없는 사회에 관한 담론, 오래된 연인들처럼 시들시들 하다. 노래는 그런데 허무하게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연애 오래하고 시들하면, 처음 만난 그느낌 따위는 다른 놈(년)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것이 자연 이치가 아닌가? 자연 이치에 거슬리며 “처음 느낌”을 기대는 그 마음보는 안쓰럽다. 안습이다. 자연이치에 거슬리면서 저렇게 매달리는 이유? 단 하나다. 지금, 바로 여기가 허무하고 슬퍼서. 한마디로 지금 무능해서!

첫사랑 타령을 잘 뜯어보면 무능한 자들의 한숨이요 죽은 노동의 흔적일 뿐이다. 학벌없는 사회는 어떤가? 학벌없는 사회 혹은 차별없는 사회를 지향하면서 혹시 열폭(열등감 폭발)한다면, 그 사람의 노래들은 무능한 자들의 슬픈 웅얼댐이다. 경쾌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팔뚝질을 너머서

대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 시민운동진영이 어떤 운동의 쟁점을 차지했던 영광을 잃어버린 듯하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운동이란 것이 대중들의 욕망이 어느 계기에 화끈하게 분출되는 물리현상이라고 할 때, 진보진영과 시민운동진영이 뒤로 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늘, 이 운동단체들은 그대로 머문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극한 상황들을 이용(?)하여 아스팔트로 향하게 하거나, 미디어 뚜쟁이들에게 퍼포먼스를 하거나, 팔뚝질을 하는 등의 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게 투쟁위에서 ‘수습’위로 변한다.

투쟁위에서 수습위로 변신하기. 팔뚝질하기. 그런데 그러면서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스팔트에 서 있으며, 가장 차별 받는 당사자를 위해 싸워주고 있는데 ‘현장’에 서 있지 않다니 무슨 모략이냐고? 그러나 이제 현장은 아스팔트에 있지 않다. 자본이 전일적으로 노동의 살아있는 피를 마셔가는 이 지구화된 제국 속에서 현장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은 결코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주 미시적인 형식으로 침투, 전염병으로 이동시킨다. 우리자신이 이미 스스로 차별에 물들어 있었다는 담론(김상봉의 학벌사회의 이론들)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팔뚝질을 너머 설 것인가? 현장을 살아야 한다. 매일 매일 만나서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좁은 ‘광주’를 탓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것에 우리 자신을 흐름 속에 내 던져야 한다. 불편했던 것, 깜짝 놀라 이맛살이 찌푸려 졌던 것, 꼬물꼬물 징그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곤충 같은 현상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도둑질로 공동체를 이뤄가는 청소녀(전남대 사회학과 추주희논문에서 파헤친)들. 그들과 접속할 수 있어야겠지. 우리들의 ‘구호’들에 동감하는 사람과 모여 팔뚝질 하는 것 보다 더 흥미롭고 즐거운 것을 찾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괴물’로 변신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 팔뚝질로 학벌없는 사회는 너무 정체되지 않았나? 늘 같은 책들로, 같은 신세한탄(?)으로 같은 커리큘럼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자. 학교와 학벌로 이루어진 지식의 그 답답하고 저열함을 거부한 자들이 학벌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그 불쾌함은, 실은 학교를 벗어나 새로운 지식, 즐거운 지식에 대한 벌떡임으로 너무나 넘쳐나기에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저들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라 불온하며 즐겁고 쾌활한 욕망들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넘쳐 흐르는 그 지식들과 기쁨을 공유하기. 어떻게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이 더 행복한가를 더 충분히 나눠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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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프락사스 

사실 학벌 관련 논의의 중심에는 대개 대학수학능력검정시험과 그에 수반한 입시 경쟁에 놓여 있곤 한다. 다시 말해 학벌 논의는 학벌을 주로 10대 학생들에게 가혹하고 부조리한 입시 경쟁을 부여하는 기제로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짙다. 이 지점에서 학벌 논의는 세대론과 관계를 맺는다. 이는 학벌 문제가 암묵적으로 서울대 입시에 실패한 (왕년의) 10대, 혹은 사회의 쓴맛을 보지 못한 이들의 철부지같은 소리로 치부되는 현상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가령 김상봉 씨가 인용했던,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자살한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사례에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이를 반증한다. 아버지의 노동시간과 자신의 학습시간을 비교하며 한탄하던 유서에 당시 네티즌들이 보여주었던 반응은 ‘어떻게 아버지 일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느냐’하는 냉소였다. 죽은 학생에 비해 더 나이 많은 축이었던 이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춰 그 경험을 낮춰봤기 때문이다. 즉, ‘사회인들이 겪는 경쟁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라는 논리다.

학벌 문제가 철부지들의 울음으로만 이야기되는 한 학벌 논의는 노동이나 성과 같은 진지한 문제로 이야기되질 못한다. (실제로 대학의 사회과학동아리에서조차 학벌은 세미나의 주제가 되질 못한다. 선배들은 새내기들에게 학벌 의식을 떨쳐내야 한다는 의식을 주문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의식에서 학벌 문제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 학벌에 대한 엄밀한 성찰과 반성을 낳지는 못한다.)

진짜 ‘철부지’ 즉 어린 세대를 제외하고는 학벌에 관심을 두는 세대가 나올 수가 없고 설령 관심을 갖게 된다 해도 사회의 쓴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항변 내지 억압에 의해 논의 자체가 묵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비단 대학 입시와 같은 특정 세대 - 곧 수험 당사자 세대. 넓게 보면 학부모세대 - 에게만 먹힐 수 있는 주제 외에 20대, 30대 등 다른 세대들이 공감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들을 새로 개발해내야 한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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