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신가반점

설레임

『학벌 없는 사회』란 이름을 들었을 때 설레였다. 사실은, 강준만의 『서울대 죽이기』에서 느낀 분노와 깨달음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참으로 이성적이고 쿨하다. 학교나 학력 따위는 상관없이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난다고 모두들 스스로 주문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우리들은 그렇게 쿨한 자신을 배반하고, 나도 모르게-그게 바로 무의식이지!- 괴물이 튀어나온다. 결정적인 순간? 예를 들어 그대가 학생인권운동에 매진했던 학생투사였고, 세상의 모든 차별에 맞서는 용감한 자였음에도 대학입학원서를 쓸 때! 중하류층 부모의 “대학 나와야 사람된다”는 말에서부터 상징자본이 풍부한 중류층 부모의 유도형 언설들,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스스로 너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가보는게 어떨까?” 라는 등의 이야기와는 상관없다. 문제는 다름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입학배치표 앞에 서서 한없이 작아져 그 줄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어떤 변명들로 위안하고 자책하기도 하고.

생활은 늘 ‘학벌 없는 사회’속에서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학벌없는 사회’속에서 어느덧 계산(혹은 짱구 굴리기)을 하는 우리의 모습. 자, 그렇다면, 다시 우리는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결의를 하여야 할까?

지겨운 첫마음 타령들

“..전화를 걸면, 의무감으로 약속을 하고/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당신을 사랑한단 말로 서로에게 위로하겠지만/예전에는 없는 두근거림은 아니야..”

오래된 노래, 015B의 “오래된 여인들”가수 중에 일부다. 학벌없는 사회에 관한 담론, 오래된 연인들처럼 시들시들 하다. 노래는 그런데 허무하게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는다면, 우리가 느낀 싫증은 이젠 없을 거야..”라고 정리(?)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연애 오래하고 시들하면, 처음 만난 그느낌 따위는 다른 놈(년)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것이 자연 이치가 아닌가? 자연 이치에 거슬리며 “처음 느낌”을 기대는 그 마음보는 안쓰럽다. 안습이다. 자연이치에 거슬리면서 저렇게 매달리는 이유? 단 하나다. 지금, 바로 여기가 허무하고 슬퍼서. 한마디로 지금 무능해서!

첫사랑 타령을 잘 뜯어보면 무능한 자들의 한숨이요 죽은 노동의 흔적일 뿐이다. 학벌없는 사회는 어떤가? 학벌없는 사회 혹은 차별없는 사회를 지향하면서 혹시 열폭(열등감 폭발)한다면, 그 사람의 노래들은 무능한 자들의 슬픈 웅얼댐이다. 경쾌한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팔뚝질을 너머서

대체적으로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 시민운동진영이 어떤 운동의 쟁점을 차지했던 영광을 잃어버린 듯하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운동이란 것이 대중들의 욕망이 어느 계기에 화끈하게 분출되는 물리현상이라고 할 때, 진보진영과 시민운동진영이 뒤로 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늘, 이 운동단체들은 그대로 머문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 극한 상황들을 이용(?)하여 아스팔트로 향하게 하거나, 미디어 뚜쟁이들에게 퍼포먼스를 하거나, 팔뚝질을 하는 등의 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게 투쟁위에서 ‘수습’위로 변한다.

투쟁위에서 수습위로 변신하기. 팔뚝질하기. 그런데 그러면서 놓치는 것은 무엇일까? 현장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스팔트에 서 있으며, 가장 차별 받는 당사자를 위해 싸워주고 있는데 ‘현장’에 서 있지 않다니 무슨 모략이냐고? 그러나 이제 현장은 아스팔트에 있지 않다. 자본이 전일적으로 노동의 살아있는 피를 마셔가는 이 지구화된 제국 속에서 현장은 도처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은 결코 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아주 미시적인 형식으로 침투, 전염병으로 이동시킨다. 우리자신이 이미 스스로 차별에 물들어 있었다는 담론(김상봉의 학벌사회의 이론들)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팔뚝질을 너머 설 것인가? 현장을 살아야 한다. 매일 매일 만나서 그 나물에 그 밥으로 좁은 ‘광주’를 탓하지 말고, 전혀 새로운 것에 우리 자신을 흐름 속에 내 던져야 한다. 불편했던 것, 깜짝 놀라 이맛살이 찌푸려 졌던 것, 꼬물꼬물 징그러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곤충 같은 현상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도둑질로 공동체를 이뤄가는 청소녀(전남대 사회학과 추주희논문에서 파헤친)들. 그들과 접속할 수 있어야겠지. 우리들의 ‘구호’들에 동감하는 사람과 모여 팔뚝질 하는 것 보다 더 흥미롭고 즐거운 것을 찾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괴물’로 변신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 팔뚝질로 학벌없는 사회는 너무 정체되지 않았나? 늘 같은 책들로, 같은 신세한탄(?)으로 같은 커리큘럼으로. 다시 한 번 돌아보자. 학교와 학벌로 이루어진 지식의 그 답답하고 저열함을 거부한 자들이 학벌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그 불쾌함은, 실은 학교를 벗어나 새로운 지식, 즐거운 지식에 대한 벌떡임으로 너무나 넘쳐나기에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저들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라 불온하며 즐겁고 쾌활한 욕망들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넘쳐 흐르는 그 지식들과 기쁨을 공유하기. 어떻게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이 더 행복한가를 더 충분히 나눠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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