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주술 FM


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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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고전 시즌, 신촌입구에 연세대학교 응원단이 걸어놓은 현수막. 《(문구) 고대! 연대로의 편입의 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해리포터도 입시에서 주르륵 미끄러지고 만 마법학교가 이 땅에 있다. 거짓말이 아니다. 세계 최고의 호그와트도 이래저래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마법학교 ‘카이(KY)’… 물론 처음 듣는 이름일 수도 있다. 맨 앞의 ‘스(S)’가 스르륵 떨어져 나가 꽤 낯설게 보이니까.


그런데 마법영재 해리는 어떻게 마법학교 ‘카이’ 입학을 거부당하고 재수 없게도 재수(再修)의 길을 걷게 됐을까? 하기야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계단 밑에 엎드려 사는 천덕꾸러기 해리가, 사교육 마술 없이는 결코 통과할 수 없다는 통합형 마술(논술) 입시의 덫을 어찌 재능만으로 넘어설 수 있었겠는가? 인문 마술학부 대기번호 96번을 가까스로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91번까지만 행운의 여신과 입맞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해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카이’의 9와 3/4 승강장을 두드리고 또 두드릴 것이다. ‘카이’는 다르기 때문이다. “Look KY. It's different." 글로벌 흐름에 맞춰 마법도 영어로 배우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꼭 별 다방 커피만을 마시니까.


학교에 들어간 새내기는 가장 먼저 선배로부터 공감주술(sympathetic magic) FM을 배운다. 어쩔 수 없이 설명 들어간다. 공감(共感)이란 타인의 사고나 감정을 자기 내부로 옮겨 넣어, 타인의 체험과 비슷한 심리를 만드는 일이다. 공감의 대상과 나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심리적 동일성을 경험하려 하기 때문에, 일체화나 동일화와는 다르다. 한 마디로 공감하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위계가 있다는 말이다. 주술은 어떤 행위를 바르게 흉내 내면 그에 걸맞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고, 흉내 내면 어떤 일이 그대로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고 형태다.


새내기는 아무 생각 없이 선배가 시키는 대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몸짓도 크게×3 주문을 외치는 게 좋다. 대략 난감해도 대략 공감이라도 해야 한다. 이 간단한 주술만 제대로 익히면 그 뒤로는 순탄하게 마법 졸업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헤르미온느와 같은 성별을 지닌 새내기는 에로틱 FM 주문을 외우면 더 큰 편애를 받을 수 있다. 자칫 가장 작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다가 자신이 앞으로 누릴 모든 달콤한 권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12년의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게임으로 즐기시라.


이것만 통과하고 나면 귀찮기는 하지만 꼼꼼히 챙겨주기만 하면 되는 학점주술 밖에 배울 게 없다. 그러면 늙어 죽을 때까지 무한대의 학벌주술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시라. 호그와트처럼 거추장스러운 마술 지팡이 따위는 필요도 없다.


그런데 솔직히 나 같이 천한 머글이 보기에는 그 마술이란 것들이 이해가 안 되고 오해가 오며, 이상한 게 아니라 요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거 뭐 마술도 아니고….’ 부디 고귀하신 마법사들께서 머글의 헛소리를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란다.


87년, 허접한 머글 학교의 새내기였던 나는 영광스럽게도 마법학교 ‘카이’의 ‘퀴디치 경기’인 셈인 ‘카이전(고연전)’의 뒤풀이에 초대받았다. 빗자루 대신 새하얀 고무신을 신고 나타난 친구 녀석을 따라 안암골로 간 나는 그날 요단강 강물 대신 막걸리로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끝도 없이 이어지는 K와 Y 양쪽의 FM 주문에 귀가 멍멍하고 그들의 광기에 타자로서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떤 권위나 동질화의 논리도 의심하고 거부하던 나였지만, 자리를 지킨 건 그냥 공짜 술이 더 좋아서였을까? 결국 누가 그리핀도르인가를 놓고 K와 Y 사이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경찰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가지고 있던 나는 꼼짝없이 친구와 한 패로 몰려 안암경찰서에 끌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머글 출신의 경찰이 웃음기 띤 몇 마디 잔소리로 훈방 처리! 경찰서에서 나온 그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막걸리 집을 찾아 끈적끈적한 우애를 다졌다. 역시 마법의 힘은 위대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FM주문도 짤막해지고 귀엽게 바뀐 것 같다. 특히 주문 앞머리의 ‘자유 민주’가 ‘통일’이 되고, ‘민족’은 여전히 ‘민족’이라는 게 눈에 띈다. 현재는 자유와 민주가 이뤄진 상황이라 통일이라는 구호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일까? 마법사들의 말처럼 이 땅에서 자유와 민주가 이뤄졌을까? 10,000,000 비정규 머글에게, 입시 앞에선 인권도 없는 청소년 머글에게, 가부장제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화장 떡칠하고 살 빼고 성형해야 하는 여성 머글에게 자유와 민주가 오롯이 왔을까? 통일을 사라져버린 구닥다리 ‘통일호’ 열차쯤으로 여기는 젊은 마법사들이, 자기 이름에 앞서는 정체성으로 그것을 내세운다니 믿을 수 없다. 또 'Global KU'에서 쑥스럽게도 변함없이 민족이 들먹여지고 있다. 설마 아직도 단일민족이라는 초글링 개념을 포기하지 못한 것일까? FM이 학생운동의 잔영이라면 이제는 모든 ‘카이’가 이른바 ‘운동권’ 된 것인가?


당신은 선배의 이름으로 후배에게 FM주술로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 모진 순응(수능)시험을 보고, 그 지긋지긋한 12년을 떨쳐내려 하는 새내기에게 당신은 웃으며 ‘야전 수칙’을 들이민다. 누구도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할 수 없다. 이곳은 마법 학교다. 위계질서를 체화하고 자유를 꿈꾸지 말 것. 그러면 새장 째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새가 될 수 있다. 대학 역시 폭력과 경쟁밖에 없다. FM으로 기를 팍 죽여서 머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라. 그러니 이왕이면 서로 웃으면서 코미디 클리셰에 충실하면 어떠하리.


사실 진짜 코미디는 하늘 위의 하늘 ‘스(S)’는 FM주술 같은 2류 마법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야말로 순응(수능) 1%의 순수 혈통이고, 대기번호 따위로 들어가는 곳이 아닌 교활하고 뛰어난 슬리데린이니까. 오두방정 떨며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경천동지할 흑마술 정도는 써야 머글을 지배할 진정한 마법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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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없는 사회를 바라보며, 연고전 담장 부수기!

 

학벌없는사회

 

"9월은 내게 있어서 정말 신나는 날이다. 한 해 동안 갈고 닦은 응원실력을 우리들과 비슷한 그들과 함께 겨뤄볼 수 있고, 서울 안암/신촌골 거리를 활보하며 우리들의 단합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거 생각만 해도 신나는 걸?"

 

올해도 어김없이 9월이 찾아왔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에게 9월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정기 고연전’일 것입니다. ‘필승! 전승! 압승!’의 슬로건으로 벌써부터 그들은 크게 들떠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응원단들의 연습소리가 끊이질 않고 학생들의 입에는 올해 고연전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연전은 9월의 즐거움으로 자리 매김 되어 있는 듯합니다.

 

고연전에 대한 소고
 

가을은 식욕의 계절, 독서의 계절, 그리고 소위 ‘2만 고대인의 축제’인 고연전의 계절입니다. 고연전이라는 축제는 고대의 문화 중에서 규모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입니다.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고, 또 즐기는 행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대의 '최고'의 문화가 과연 지금까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을 해봅니다. 기존의 남성중심적인 고대의 문화토양에서, 고연전은 그것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자리였습니다. 야성과 패기의 이름 아래 진행되는 '격렬한' 문화는 여성들에 대한 동의와 배려 없이 진행되는 문화입니다. 그 틈에 끼어 자신의 주장을 밝히지 못했던 많은 여학우들의 역사가 바로 고연전과 고대의 문화의 역사입니다.

고연전, 연고전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축제는 순수하고 순결한, 단순한 축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대 사학’이 매년 자웅을 가리기 위해서 5개의 운동경기를 벌이고, 그것을 학생들이 응원하는 행사는 말 그대로 고대와 연대 어느 쪽이 잘났는지 밝혀내기 위한 상징적인 싸움입니다. 마치 한일전과도 유사한 모습을 띠는 이 경기는, 하나의 전제하에 이루어집니다. 

 

이 전제는 바로 '학벌 라이벌'이라는 전제입니다. 매년 연대에서 연고전을 하지 말자고 주장이 나오는데, 이 주장 중 하나가 '수준 이하의 고대와 라이벌로 비추어지면 연대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소위 최고위급 학벌을 가지고 있는 SKY에게만 열을 내고 즐길 수 있는 고답(高踏)적인 농담이겠지요. 고연전은 고대와 연대를 홍보하고, 그들을 다른 대학과 차별하기 위한 학벌주의적인 멋진 기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 대안을 모색하는 안티고연전!

 

하지만 자신은 축제를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고연전이 너무 좋다는 학우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학교의 운동경기를 편 갈라서 응원하는 행사인 고연전. 학교의 색을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학교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응원. 뜯어보면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이 문화가 고대의 일 년의 최대의 축제라는 것은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축제는 좋습니다. 그런데 축제는 더 다양한 모습으로 다른 형태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존재해 왔던 문화가 아니라 각자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축제. 

 

위와 같은 고연전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고연전을 다양다각으로 비판하며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문화를 모색해보자 <교육생각 기획>기사로 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매번 문제제기 되고 있지만, 강행되고 있는 일제고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봤습니다. 글을 읽고 하시고 싶은 말씀이 생기신 분, 편집일꾼에게 꼭 한 마디 해 주고 싶으신 분, 관심이 생겨서 같이 해보고 싶다는 분, 응원할 테니 열심히 해달라고 해 주실 분. 이 모든 사항들에 해당되시는 분들과 함께 학벌없는사회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달려 나갔으면 합니다. 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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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자발적 대학교 퇴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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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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