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연전에 대해 묻는다 Q&A


안티연고전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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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친구들 하고 재밌게 놀려고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도가 없는데 왜 즐겁게 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딴지를 거는건가요?


A 고연전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앞의 글들을 읽어보셨다시피 학벌주의 문제와 남성 중심적인 고대문화의 문제 그리고 축제답지 않은 축제 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개인에 의해 생긴다기보다는 고연전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에서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학벌문제의 경우 아무리 자신이 학벌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하더라도 고연전에서 ‘고연’이 양대 명문사학이고 그 명문사학이라는 기준도 수능성적의 상위 퍼센티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을 때 애초에 고연전은 학벌이 없다면 열릴 수 없는 행사입니다. 한 개인이 사회에 속해있는 이상 사회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우리가 학벌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상 ‘고대인’이라는 학벌에 따른 자아인식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학벌의 상위에 있는 사람들이니 상대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무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응원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은 그것을 남성 중심적이라 인식하지 않았고 그저 재밌어서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연전에서 보여 지는 응원문화의 특징들은 사회에서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입니다. 이것 역시 사회의 주류가치로 자리매김해 있기 때문에 남성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연전의 행사내용을 보면 스포츠 경기와 그에 따른 응원으로만 이뤄지고 있는데 스포츠경기를 보면서 응원을 즐기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남성적’인 놀이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주류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행사인 고연전에서 비주류의 문화는 소외당하고 그 행사를 즐기는 개인들 또한 고연전에 나타나는 주류 가치를 그대로 내면화시키게 됩니다.


고연전의 모든 프로그램은 이미 짜여 있고 학생들은 거기 가서 즐기기만 하면 되는 형식입니다.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축제를 기획하고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축제에 주변상점과 기업들의 스폰이 들어오면서 우리들의 축제는 상업적인 성격마저 띠게 됩니다. 만들어진 축제에 가서 즐겨야하는 학생들은 축제의 내용을 그저 받아야 들여야 할 뿐입니다.


결국 자신은 ‘순수하게’ 고연전을 즐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고연전 자체가 순수할 수 없는 구조로 이뤄져있기 때문에 그 구조로 만들어진 고연전을 즐긴다면 개인들도 고연전의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고연전을 참여하고 그러한 가치들을 즐긴다는 것 은 고연전에서 발현되는 수많은 가치들(학벌주의, 남성중심성 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연전이 고려대의 가장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수많은 문제들을 매년 재생산하는데도 그런 점들을 개선하거나 바꾸려는 그 어떤 반성과 비판도 없는 모습에 고연전이 얼마나 고대문화를 장악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면서 우리는 같이 바꿔가자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Q 학벌에 대한 부분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고연전을 즐기는 이유는 학벌보다도 애교심이 더 큽니다. 당연히 다른 학교랑 운동경기를 하면 우리 학교를 응원하고 싶고 그런 응원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닙니까? 학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A 자신이 속한 공간에 대해 생기는 애정에 대해서는 물론 공감합니다. 다른 학교와 하는 운동경기에서 우리 학교를 응원하면서 소속감도 느낄 수 있고 재미도 느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왜 꼭 우리의 상대가 연세대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가까이 있는 다른 수많은 학교들이 아닌 연세대와 매년 이런 운동경기를 하고 유독 연세대와 하는 운동경기에만 특별히 ‘고연전’이란 이름을 붙여 축제로 만든 것은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대 사학으로 매년 수능점수에서도 엎치락뒤치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일 겁니다. 결국은 학벌을 기준으로 한 라이벌 학교와의 운동경기를 통해 애교심을 고취하는 셈입니다. 그 애교심이라는 것도 고려대가 명문 사학이라는 자부심으로 이뤄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 자부심 역시 수능점수의 상위권, 결국 학벌에서 오는 것이지요.


학벌의 상위권이라는 자부심이 없다면-고려대와 연세대가 학벌의 상위권이 아니라면- 고연전이 지금보다는 아마 덜 재밌을지도 모릅니다. 기차놀이와 같은 일탈도 학벌의 상위권에 있는 두 대학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용납해 줄 수 있는 것 이구요. 애교심이라는 것이 고려대의 학벌체제에서의 위상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단순히 내가 소속했기 때문에 애정을 느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Q 학벌의식의 발로라고 계속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결국 고려대 학벌보고 온 것 아닌가요? 애초에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닌가요?


A 물론 고연전에서 드러나는 학벌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학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학벌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혼자서만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학벌주의의 폐해를 알게 된 이상 그것을 같이 바꾸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 학벌이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데 고작 수능점수를 기준으로 삼고 그 미약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경쟁에 내몰게 하고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이 주변부로 밀려나는 지금의 현실은 분명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려대에 온 우리는 다행히 입시경쟁에서 승리하여 학벌사회의 수혜자가 되었으니 마음껏 즐기면 된다는 생각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고등학교 때 항상 마음 졸이며 옆의 친구들을 이겨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혔던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했던 그 치열하고 비정한 입시경쟁 속에서 해마다 몇 명의 친구들은 자살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경쟁 속에 내몰려서 서로에게 삭막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는 입시체제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능시험 한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이런 입시체제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이런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Q 제가 느끼기에 대다수의 여학우들은 고연전의 응원문화를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장애학생의 경우에도 요즘은 장애학생을 배려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소외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A 고대의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사발식, FM 그리고 응원 등은 집단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는 얘기를 합니다. 남성 중심적이건 여성 중심적이건 그건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남성적’인 것을 우위에 놓는 경향을 보이는 현실 속에서 고대의 문화가 남성 중심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 건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성적인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그 기준에 따라 다른 특성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학우들은 현재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쉽고 실제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즐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대 문화의 남성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특성이 변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고연전의 비장애 중심적인 문화를 비판할 때 요구하는 것은 장애친화적인 고연전이 아닙니다.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해서 수화로 응원을 한다거나 하는 등의 변화는 장애인을 기존의 비장애인 문화에 포섭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존의 비장애인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장애인이 좀 더 ‘수월하게’ 즐길 수 있도록 ‘배려’와 ‘연민’을 보여준다고 해서 비장애중심성을 탈피할 수는 없습니다. 비장애남성중심적인 문화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이 고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Q 고대와 연대의 모든 개인이 고연전을 다 즐길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행사든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대의 다른 행사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요.


A 물론 고연전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고연전이 고대의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고연전은 개인의 선택이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고대인’이 되려면 FM-사발식-고연전으로 이어지는 고대 문화의 매뉴얼을 모두 마스터해야 된다는 사실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고연전이 대표하는 집단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고대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고대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성적이거나 ‘여성적’인 특성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장애학우들은 자연스럽게 고대의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렵고 결국 이런 행사들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고대의 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고연전이 고대의 가장 큰 축제 중의 하나라면 모두가 다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고대의 가장 큰 축제라는 고연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많은 가치들이 배제되는데도 매년 아무런 변화와 비판이 없다는 것은 이 축제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강압적인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결국 고연전을 없애자는 것인가요? 그럼 고대의 전통적인 문화가 없어지는 것인데 대안은 있습니까?


A ‘안티 고연전’은 고연전이 생산해내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축제답지 못한 부분에 대해 반대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것들을 알려내고 같이 변화시켜보자는 취지를 갖고 고연전에 대한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대안을 ‘안티 고연전’에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안티 고연전’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모두 다 따르자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안티 고연전’의 의도와 맞지 않습니다. ‘안티 고연전’에서 그리는 축제는 모두가 다양한 목소리들을 내고 그 다양한 목소리들이 각각의 주체가 되는 자유로운 축제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우리 각자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고대 문화라고 대표되던 고연전에 의해 다른 상상력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지만 고연전이 사라진다면 축제에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고연전이 없어진다고 해서 학벌주의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주류를 차지하는 지금의 가치체계 그리고 비장애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시스템과 점점 상업화되는 교육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학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의 축제에만도 수많은 사회의 권력이 작용한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그것에 대한 고민과 논의를 계속 한다면 분명 대학 내에서 나아가 대학을 넘어서서 긍정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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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전이 이틀 동안 내 머리 속에 집어넣은 혹은 넣을 것들

민~족의 영원한 고동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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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9년 올해로 39회째를 맞는 정기 연고전 또는 고연전에서 파란색(연세대)/붉은색(고려대) 옷을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응원하며, 자신의 집단소속감을 들어내고 있다.


글을 쓰기 전에 응원에 대한 제 생각을 밝히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 응원은 즐거운 행위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하고 몸을 움직이고, 이 과정에서 쌓여 있던 스트레스도 풀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하면 야구장에 가 응원을 합니다.


고연전의 응원도 응원 하나만을 놓고 생각하면 꽤 즐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안티 연고전 자료집에 글을 쓰는 것은 고연전에서의 응원은 콘서트나, 야구장에서의 응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연전은 대학의 공식 행사이며 모든 학생의 축제이고, 고대와 연대가 만난다는 점에서 학벌 사회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고연전에 가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응원에 대한 좋고 싫은 감정이 고연전에 가고 안가는 차이를 낳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잠실로 향하며


해마다 고연전 날이 되면 두 개의 물결이 잠실로 몰려갑니다. 이들이 몰려가는 곳은 바로 고연전 개막식이 있는 잠실 실내체육관입니다. 학생들은 반 단위로 혹은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이동을 시작합니다. 잠실까지 걸어갈 수는 없기에 흔히 지하철,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는 참 장관입니다. 붉은 티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지하철 앞 칸부터 끝 칸까지 가득가득 차게 됩니다. 지하철 안뿐만 아니라 승차장에서부터 지하철입구까지 온통 붉은 색뿐입니다. 고려대 학생들이 전세를 낸 듯한 버스도 있습니다. 붉은 색이란 시각 효과는 참 큽니다. 붉은 색 옷을 입은 학생들은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동질감, 소속감을 서로 간에 느끼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붉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알지 못할 친근감을 느낍니다.


타 학교 학생이거나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직장인들은 붉은 티셔츠를 입은 고려대 학생들을 보며 오늘이 바로 고연전 날임을 알게 되고(이미 알고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고려대와 고려대 학생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축제를 앞에 둔 고려대 학생들은 단순히 붉은 티만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 안에서 응원 연습도 하고 가끔은 소리 높여 FM도 하며, 떠들고 장난치기에 사람들의 눈초리는 그다지 곱지 않습니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고 지하철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고려대 학생이기에 사람들은 못 본 척 조용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려대 학생들의 생각도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도 현재 자신은 개인이 아니라 고려대 학생으로 있기에 할 수 있게 됩니다.


운동장에서


운동장에 도착한 학생들이 처음 보게 되는 것은 거대한 운동장을 꽉 채우고 있는 두 색의 대립입니다. 붉은 색으로 대표되는 고려대와 파란 색으로 대표되는 연세대, 선명한 시각 대비는 수능 성적표로만 생각되던 라이벌 의식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는 동시에 대학에 대한 소속감을 한층 더 강하게 느끼게 합니다. 응원이 시작되면 이러한 의식은 더 강해집니다. 붉은 색과 파란 색이란 시각적 효과 위에 응원은 좋은 멜로디와 가사를 바탕으로 한 청각적 효과 그리고 몸을 움직이며 느끼는 즐거움을 얹어 주게 됩니다.


고려대의 응원은 크게 보아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민족의 아리아, 석탑으로 대표되는 소위 무겁고 장중한 응원과 엘리제로 대표되는 연세대를 까고 승리를 기원하는 응원입니다. 이 분류는 응원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나누어집니다. 요즘 응원단이 만든 응원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가볍고 흥겨운 음악으로 엘리제와 비슷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세계로 나가는 고려대’라는 가사가 보여주듯 민족의 기둥을 넘어 GLOBAL 고대를 꿈꾼다는 고려대의 행보를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두 종류의 응원 모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후자는 가볍고 흥겨운 멜로디와 연세대를 놀리고 까는 가사로 응원을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형태이기에 그러한 듯합니다. 그런데 전자가 고연전 등에서 계속 불려오고 있고 많은 학생들에게 응원으로써 사랑받고 있는 사실은 얼핏 보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흥겹게 노는 축제의 응원인데도 이 응원들의 멜로디는 무겁고 장중하며 가사는 ‘민족의 고동이 되리라’와 같이 절대 가볍지 않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마 다른 축제에서 민족 운운하는 가사가 담긴 응원을 한다면 분위기가 금세 냉랭해졌을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학생들은 ‘민족의 아리아’를 최고의 응원 곡으로 꼽습니다. 이 이유에는 많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응원이 고연전에서 불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고연전과 엘리트 의식


고연전은 연세대와 고려대 간의 끊임없는 상호 비방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끝은 다릅니다. 운동 경기가 끝나고 나면 이들은 다시 안암으로 신촌으로 함께 이동하고 이곳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하나가 됩니다. 경기 중에는 서로를 헐뜯었지만 마치 허물없는 친한 친구 사이에 있는 일과 같이 사실은 서로를 좋아하고 인정하는 라이벌이었다는 것이 그 결말입니다. 그렇게 그 두 학교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고연전의 해피엔딩을 생각해 보면 엘리제나 민족의 아리아가 인기 있는 이유는 훤히 드러납니다. 엘리제는 친한 친구 사이의 짓궂은 장난이었다면 민족의 아리아는 고려대와 연세대가 이후에 나아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아리아는 우리에게 ‘너는 민족의 고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민족의 고동, 기둥. 응원을 하는데 있어 이러한 가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들이 이 응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학 명문인 고려대와 연세대의 학생들은 이후에 민족의 기둥, 고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고연전이 만들어내는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고 그래서 학생들은 응원을 하며 벅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고연전이 연세대와 고려대 간의 라이벌 의식을 만들어 낸다면 응원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연전이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말은 곧 엘리트 의식의 형성을 말합니다. 엘리트 의식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비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연전은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축제이고 라이벌이지만 서로를 아끼는 미묘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것은 곧 고려대, 연세대 학생의 엘리트 의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고연전이 벌어지는 이틀 간 학생들은 고연전이 열리는 잠실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붉은 티를 입고 응원 연습을 할 수 있고, 운동장에서 응원을 하며 신촌, 안암에서 민족 고대, 통일 연세를 외치며 기차놀이를 하며 뒤풀이를 즐길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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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고대인’이 되는가


곰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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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는 하나은행과 업무제휴를 통해 스마트카드 한 장에 학생증 및 각종 전자화폐 기능이 들어간 고려대학교 전자학생증을 발급한다. 자랑스럽게 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고대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특별한 함의는 단순히 고려대학교를 다니는 ‘고대생’과는 조금 다른 어감을 지닌다. ‘고대인’은 고려대학교를 사랑하고, 그 명문 사립대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고대가 사랑받을 구석은 별로 없다는 건 캠퍼스 안의 학생들로선 쉽게 공감하곤 한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와 사회적 담론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민주적 체계마저 박탈당한 채 학점과 취업경쟁으로 대학 생활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를 볼 때, 진리의 상아탑은 이미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어느새 우리는 붉은 색 옷을 입은 이들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찬양조의 응원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있다. 합리적인 동기는 없다. 우리는 고대생이기에 고대를 사랑한다. 그 사랑은 아주 체계적으로 강요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고려대학교’만이 가능한, 엘리트의식으로 점철된 패거리문화와 ‘고대인’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몇 가지 행동규범에서 그 엄청난 체계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 없는 자기소개’ FM


‘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강요는 대학친구들과의 첫 인사치레, FM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 만나 아직은 어색한 이들과의 거리를 가장 먼저 좁힐 수 있는 이들은 새터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서 FM을 잘하는 이들이다. 강원도로 향하는 긴 시간동안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함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선배의 인사말과 함께 가장 먼저 진행되는 인사치레는 요란스러운 FM이었다.


새터 자료집에는 FM이 군사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자랑처럼 써져 있다. 군사문화의 가장 위험한 폭력성 그대로, FM에는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다. FM을 띄우기 위한 선창과 사람들의 환호는 그 폭력에 대한 거부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타인들의 눈총을 피해 팔을 거칠게 휘저으며 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민족고대 호안정대 자주정경6반 06학번’과 같이 전체로부터 수렴되는 정체성을 주입받고 거대한 집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문화’를 물씬 느낄 수 있다.


내면을 토해내고 ‘고대인’으로 변신하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지 않는 정체성 주입은 사발식으로 이어진다. 사발식은 일제 치하의 보성전문학교 시절, 일 제국주의와 조선민족 수탈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일 경시청 앞에서 토악질을 하던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토사물을 내뱉은 곳은 일본 경시청 앞도, 미 대사관도 아닌 변기통밖에 안 되는 주제에 선배들은 드디어 너도 ‘고대인’이라며 등을 토닥여 준다.


그리고 더 무섭게도, 자유와 인격마저 박탈당한 채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의자위에 올라서서 FM과 막걸리를 대야(사발도 아니다)채 원 샷 하도록 강요받았던 새내기들은 비로소 강요한 선배와 똑같은 모습의 ‘고대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들도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지 않느냐’는 변명과 함께 다음 해 과실의 달력에 큼직하게 사발식을 그려 넣는다. 대대로 재생산되면서 점점 커져만 가는 그 패거리 동류의식은 놀라움을 넘어서서 무섭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러한 획일적인 정체성과 공통의 가치규범으로 유인하는 ‘고대인이 된다는 것’의 매력이 궁금해진다.


‘학벌’이라는 가면


내적 발로로부터 발산되는 정체성이 차단당할 수밖에 없는 12년의 입시 전쟁을 치른 이들에게 각자의 인격과 개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몽달귀신마냥 몰개성한 이들의 얼굴은 국가나 민족과 같은 집단의 가면으로 덮어지기가 쉬울 것이다. 월드컵과 고연전의 공통점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삶을 스스로 이끌어 가는 눈곱만큼의 주체성도 없이 비정규직으로서 하루하루를 고용불안에 시달리며 기계처럼 노동하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되는 욕망에 의해 강요받은 대로 소비하며, 매 순간 부딪치는 인간관계마저 경제적 계급에 따라, 학벌과 동류집단에 따라 타산적인 관계로 조작당한 이들, 한마디로 ‘주물’된 인격들에게 집단이라는 가면은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고 자위하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고대인’이라는 가면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계산대 앞에서 자랑스럽게 하나은행 학생증 카드를 내미는 쾌감을 또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쾌감은 혼자 즐기면 치졸한 생색이지만, 모두가 함께 즐기면 아름다운 문화가 된다. 경쟁이 습관처럼 굳어진 이들에게 남을 밟고 일어서는 그 쾌감이 FM과 사발식, 거리 응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체계적인 정체성 강요의 결과는 절대로 학생증 카드를 내밀고 나서의 단순한 쾌감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명문대생을 연예인쯤으로 바라보는 계산대 너머의 점원과 나 사이의 확고한 위계와 그 관계의 불편함. 그것은 학벌사회가 맺어준 관계망에서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일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주의의 피해자는 여기에 편승하지 못하는 ‘비(非)엘리트’뿐만이 아니다. ‘고대인’이라는 조작된 정체성을 강요받아 학벌사회의 경쟁논리에 던져지고, 또 그 그릇된 위계를 강화하도록 규정된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모두에게서도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역설적 지위가 부여된다.


모두가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잊고, 각각 고대와 연대의 가면으로 스스로를 대신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최상위집단으로 한데 뭉쳐진 오늘, 고대의 붉은 가면과 연세의 파란 가면이 내게는 월드컵 때 사방을 도배했던 태극마크로 보인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학생들을 감시했던 태극기의 권위처럼, 초일류 사립대 간의 각축은 엘리트 의식과 권위주의로 무장한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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