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은 모두가 싸워야 할 적”


돌아보면 외롭고 고된 싸움이었다. 그는 아직 어렸고, 세상은 고등학생인 그에게 생각을 갖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잘 외우고, 공부만 하는 아이가 칭찬 받는 곳이 학교였다. ‘인권’이란 말은 대한민국 학교에 없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허용되지 않아 싸웠고, 끊임없는 갈등의 날들을 보내야 했다. 자기 생각을 발언하는 학생에게 아량은 없었다. 그 모든 교육의 악순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적은 ‘학벌의 사회’였다. 교육이 성과로 재단되고, 공부만 잘 하면 좋은 대학에 가서 사회의 기득권으로 성장하는 구조가 이 땅의 학생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고민은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컴퓨터에 관심이 있었고, 지역의 한 전문계고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도 부모님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의 뜻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명문 대학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는 그의 생각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인문계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거의 10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는 지금 ‘학벌 없는 사회 광주모임’에서 활동한다. 박고형준(25) 씨다. 초등학생부터 아저씨까지 회원들의 성분이 다양하다. 그가 주축이 되어 활동은 하지만 모임에 직위로서의 대표는 없다. 생각이 같고, 함께 걸어갈 의지만 있다면 모두가 평등한 모임의 구성원이다.

지금 학생들의 인권을 짓밟는 대표적인 교육정책이 일제고사다. 그는 획일적인 그 시험을 거부한다. 지난해 10월 학업성취도 평가 때 몇몇의 학생들은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택했다. 아이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좋은 방향성을 고민하고, 결국 체험학습을 떠나는 모든 과정을 주도한 사람이 그였다. 오는 31일로 예정된 진단평가 때도 그는 학생들과 함께 영산강으로 생태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학생도 생각하는 사람

그의 고등학교 생활은 언제나 갈등구조에 놓였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학교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했다. 학교와의 충돌이 시작됐다. 0교시 때문이었다. 신문을 배달하고 나면 8시가 넘었다. 0교시 시작 시간은 오전 7시30분, 매일 1시간을 늦게 등교하는 그를 학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 하나로 교실 전체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학교의 강요에 의해 신문배달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여름방학 때는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는 보충수업을 강요했다. 그는 거부하고 해남 땅끝에서 임진각까지 국토 순례를 떠났다. 크게 의미를 둔 시도가 아니었다. 단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따라갔을 뿐이다. 근데 그 국토순례에서 다른 세상을 만났다.

“인터넷을 통해 만난 동호회 친구들과 함께 걸었는데 학교 밖엔 이런 세상이 있구나 싶었다. 오로지 공부만을 강요하는 학교보다 배우는 게 많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생각 나누는 법을 배웠고, 힘들게 걸으며 내 나라 국토의 깊이도 느꼈다. 전부처럼 보이는 학교 담장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국토 순례에서 깨우쳤다.”

자기가 느끼는 것을 다른 학생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2000년 서울에서 ‘중·고등학생연합’이 탄생했고, 그는 광주지부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다. 이 나라의 교육문제에 대해 교육의 주체로서 책을 읽고 펼쳤던 토론의 날들은 즐거웠다. 집회를 통해 두발자율화 요구도 했다. 학교운영위원회 학생참여 운동도 펼쳤다. 모두 학생이 주인 되는 학교를 위해 자청한 걸음이었다. 교육청과 학교는 끊임없이 탄압했고,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학교는 그에게 수업도 들여보내지 않았고, 두 달 넘는 시간을 상담이란 명목으로 회유했다.

수능시험 대신 1인 시위

2002년 그는 수능시험을 보지 않았다. 고사장 대신 교육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그가 든 피켓에는 ‘대학자율화·수능 자격고시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물론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침에 그가 시교육청으로 향할 때 집에서는 수능을 보러 가는지 알았다. 가방에는 어머니가 싸준 수능 도시락이 들어 있었다. 진작에 대학을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막상 실행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대한민국에서 대학 학력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다. 사실 수능 전날까지도 고민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을 사라지게 하고, 공부하는 기계로 만드는 것이 대학이다. 학벌의 기득권이 우리 사회를 적들의 세상으로 만든다. 나는 맞서 싸우는 방법을 택했다.”

결국 그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학생인권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2006년부터는 ‘특정 대학교 합격 현수막 설치를 반대하는 모임’을 하고 있다. 명문대 현수막은 학벌주의를 조장한다. 점수에 상관없이 적성을 찾아 학과를 선택한 선생들에게 패배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학교들이 공교육의 기능을 포기하고, 사설학원과 같은 방식의 홍보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학벌지상주의다.

그는 특정 계층만의 구호나 활동만으로 학벌사회가 없어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학벌의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그 제도에 휩쓸려 따라가는 이중성들이 결국 사회를 균열시킨다. 학벌의 문제는 사회 구성원 누구나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과 관련한 모든 불합리가 학벌로부터 파생한다. 대학이 삶이 전부인 것처럼 무섭게 공부하는 학생들은 정작 중요한 건 잃고 있다. 왜 생각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사는 게 아니다. 학벌은 모두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일제고사는 차별을 양산하는 시험”

일제고사에 대한 우려가 크다. 이미 지난 10월 학업성취도평가 성적 공개로 문제점이 드러났다. 성적 조작으로 나라가 시끄러웠으며 학교 서열화가 확산되고 있다. 성적 공개는 고교등급제 시행 자료로 악용될 위험성도 높다.

그는 오는 31일 실시될 예정인 진단평가 때 학생들과 함께 생태체험을 떠난다. 영산강과 광주천이 만나는 지점을 찾아가 하천습지 탐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경쟁을 부추기는 일제고사보다 모든 생명체와 우리 삶의 근원인 영산강을 찾아가는 게 훨씬 교육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 그가 주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크다. 지난해 10월 체험학습 때도 문제가 발생했다. 학생들의 얼굴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고, 체험학습을 허락한 교사에 대한 징계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참여한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으로 시험 대신 체험학습을 선택했는지도 의문이었다.

“학생이 부모나 주변의 부추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체험학습에 참여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인권 침해다.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학생을 먼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제도를 바꾸기 위한 대응은 그 다음이다.”

진보적이거나 양심적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자기 자식 교육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자기 안의 보수가 작동한다. 일제고사와 그에 따른 성적공개에 대한 반응도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학벌의 교육은 지금껏 기득권을 향해 가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일제고사가 차별을 양산하는 시험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기 자식만 차별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중성이 지금의 교육을 만들었다. 자기 것만 보는 시선이 세상을 망친다.”

글=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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