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름, 그 다채로움의 씨앗을 위하여...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도연

2001년, 장애운동을 하는 이들이 ‘이동권을 보장하라!’라고 외쳤을 때 지나가는 한 아이가 “아저씨 이름이 이동권이에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두고두고 활동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곤 하는 이때의 기억은 이동권과 같은 ‘당연한 권리’가 어느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에피소드입니다.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들의 인권을 가로지르는 기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장애 남성 내국인 이성애자를 중심으로 구조화 된 사회 속에서 아니 그것들을 포함한 특정한 가치를 기준으로 형성된 사회 속에서 ‘다름’은 곧 부족함이나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는 기존의 질서 내에서 차별받거나 배제되는 이들에게 있어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을 인지할 수 있는 최초의 나침반입니다. 하지만 과연 대한민국의 청소년 특히 장애 청소년들은 얼마나 이 ‘?’를 접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획일적인 선택을 강요당하고 무한 경쟁의 입시중심 교육에 신음하는 장애/비장애 청소년들, 그렇게 다르지만 또 닮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금의 청소년들 모습이 아닐까요?

1990년대 학교를 다니던 제게 학교 내에서의 장애차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다녔던 학교가 장애학생들만을 따로 모아둔 ‘인디언 보호구역’ 같은 특수학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통합교육이나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 등이 막 고민되고 만들어지던 때였고 극히 제한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장애차별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될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장애인 교육권 보장!’을 목표로 2003년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장애인 교육권 투쟁은 장애 청소년들에게 허락된 인디언 보호구역 같은 ‘특수학교’를 벗어나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 또는 통합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별 주체인 장애학생들은 ‘장애인’이란 하나의 묶음으로 사고되었고 여전히 개별적인 목소리는 막혀있습니다.

일제고사에서의 장애학생 배제로 드러난 2009년의 광주시의 교육 현실은 한 명 한 명의 주체들이 어떻게 묶음으로 취급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일제고사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학교 생활에 있어서의 장애학생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장애학생들에 대한 시험 볼 기획 박탈로 드러난 것 입니다.

이러한 장애학생들의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소풍 또는 학교 활동에서의 부모님 동행 강요나 학습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재·교구의 미 제공 등, 다름이 차별로 이어지는 일은 매우 일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이러한 장애학생들의 문제가 성인 또는 구조화된 학교 시스템만의 문제일까요??

청소년 인권을 고민하고 입시폐지 등을 요구하는 이들 내에서 장애청소년 또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에 대한 ‘?’는 존재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흔히 10대들 사이에서 통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세대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그 말들은 사용하는 주체들의 인식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자’란 장애인을 지칭하는 은어는 저를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성애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변태’라 지칭하는 것 역시 불편하기는 매일반이었습니다. 청소년 시기를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이들에게 두발규제와 입시경쟁은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일 것 입니다. 그러나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입시경쟁이 사라지고 획일적인 통제의 상징인 두발규제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청소년 인권운동은 현재 진행형일 수밖에 없으며 그 문제들을 외면하는 순간 청소년 인권 운동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잃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임을 믿기에 무한 경쟁의 입시교육에 다같이 ‘No!’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 입니다. ‘청소년’의 문제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만19세’란 기준선 아래 ‘미성년자’란 낙인이 찍혀 기성세대의 가치와 욕망을 강요당하며 생겨나는 것임을 인식하며 지금의 ‘청소년 인권운동’을 조직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좁게는 청소년들의 삶부터 넓게는 청소년기를 지난 모둔 이들의 삶을 위해 ‘?’로부터 시작되는 일상적인 자기 성찰과 다른 이들에 대한 예의는 좀 더 넓고 좀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청소년 인권운동을 만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희망하는 대로 조금씩 변해갈 것 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사회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성인들은 그 보다 젊은 세대들에 의해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촛불세대라 명명된 지금의 청소년들이 시간이란 강력한 힘으로 만들어 갈 미래는 장애문제, 성소수자 문제, 이주노동자 문제 등 정치적 소수자들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내가 동의할 수 없고 즐겁게 만들어 갈 수 없다면, 미래는 원치 않는 방향과 모습으로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가 생동하는 더 낮고 더 넓은 청소년 인권운동과 그러한 고민이 담긴 선언이 만들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다름’이 다채로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움직이는 그 길 위에서 섬세해진 감수성과 참을 수 없는 반가움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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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에서 청소년 인권선언의 의미

전국청소년학생연합 의장 유선경

현재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빈번한 일을 보자. 두발규제? 교복규제? 여러 가지 규제가 판치고 있는 학교 내에서 과연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것이 잘못된 거라고는 생각할까? 일반적으로는 ‘아, 내가 잘못했으니까 잡히는 거구나.’ 하고 합리화시킨다. ‘왜 우리가 선생님들이 만든 규칙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지?’ 라는 문제점을 제기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단지 ‘원래부터’ 그래 왔으니까, ‘다들’ 그러니까. 라는 말도 안되는 그런 소리들로 자신들을 그저 묶어놓고 있다. 학교의 구성원은 분명히 학생이 제일 많은데, 그러면 우리가 직접 생활하는 우리의 터전인 ‘학교’는 우리도 함께 환경을 만들어가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린 관리를 받아야하는 대상일까? 머리 길이 25cm, 교복 치마 무릎 밑으로 몇 센치 따위는 대체 누가 정해놓은 걸까?

또한 전문계 고교에 다니는 청소년들도 상황이 심각하다. 마치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전문계 고교에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문계 다녀요’ 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본다. 소위 ‘꼴통들’ 이라고 말하고, 못한다고 무시한다. 자기가 그쪽 공부 하고 싶어서 그쪽에 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다른 요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왜 하나로만 볼까?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인식이 이상하게 굳어져 있어서, 학교에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 즉 탈학교 청소년은 굉장히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어머 너는 왜 학교에 나가지 않는 거니?’ 마치 학교에 나가야 하는 게 정상인 것처럼. 학교에 나가지 않는 청소년들 중에는 학교 제도에 부적응한 학생들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환경이 되지 않는다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반드시 학교에 나가야만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거지? 그런 법칙은 누가 정한 거지?

대한민국에 있는 많은 청소년들은 아직 ‘인권’ 이라는 것에 대해 감을 못 잡고 있다. 그거야 당연히 우리는 배운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느끼고 있지 않는가. 두발을 잡는 것에 기분이 나쁘고, 교복 치마 길이를 잡는 거에 기분이 나쁜 게 그 예다. 정말 잘 된 거라면 아무런 느낌 없어야 하지 않을까. ‘인권’은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 즉 우리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필요한 당연한 것이다. 근데 왜 우린 이걸 모르는 거지? 그거야 우리가 잘 몰라야 내 권리를 찾기 위해 주장할 수가 없으니까. 그럼 우릴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우린 관리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 이라는 그 말 그 자체로 우리는 한 명의 인간이고 감정이 있는 ‘사람’ 인데, 누가 누굴 관리하고 누가 누굴 통제한다는 말일까. 중요한 건 다들 모른다는 거다. 아주 당연한 것처럼, 원래부터 그래 왔으니까 그냥 아무런 느낌 없이 그러려니 하고 만다.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분들은 내가 세상을 잘 살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 되는 거고 나는 그들을 보고 난 어떻게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앞으로의 내 인생에 지표가 되면 되는 거지 왜 나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라고 날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상호 협력적인 관계가 되면 되는 거지 왜 우리를 규제하고 우리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차이’와 ‘차별’이 틀리듯이 남과 나는 충분히 다를 수 있고 사람이라는 게 다른 존재인데, 어째서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거지. 왜 우리를 그쪽 기준에 맞게 만들려고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인권? 인권에 대해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모르니까 권리가 없다. 라는 걸까. 우리를 규제하기 위한 교칙, 그리고 체벌. 교칙은 학교의 삼주체 중 하나인 우리가 함께 만든 것도 아닌데 무조건 따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 교칙에 따르지 않으면 (혹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육체적인 벌을 가미한다는 것. 대체 어째서 그래야 하는걸까.

우리는 누구에게 규제받아야 할 대상도, 관리받아야 할 대상도 아니다. ‘청소년’으로서, 권리의 한 주체로서 당당하게 서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물론 청소년들도 잘못하고 있는 게 많다. 나와 남이 다른 걸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하다. 근데 우린 아까 말하다시피 ‘어리지’ 않는가. 어리다고 모든 걸 덮어버릴 수는 없지만 그만큼 더 삶의 경험이 없는 우리는, 우리보다 삶의 경험이 많은 그 사람들에게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 사람들이 우리를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 인권선언은,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알고 당당하게 우리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너무나도 침해받고 있고 심지어는 그 정도도 모른다. 많은 청소년들이 우리가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알고, 누리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반드시 된다. 한 명의 목소리도 아니고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준다면, 그리고 우리가 외치면 된다. 이 세상에 못할 일은 없으니까. 또한 이번 광주에서의 청소년 인권선언을 시발점으로 전 대한민국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 광주의 청소년들이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청소년들이 알고 공유하고 모든 것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때까지 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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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청소년인권선언을 말하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광주지부 활동가 이뮤

2008인권선언

2008선언은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맞아 세계인권선언의 한계를 인식하고 단순히 인권선언을 다시 읊는 것이 아닌 저용량정부 시대에 절박하게 요구되는 우리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사항을 새로운 2008인권선언으로 만들어 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많은 사항들이 인권의 영역으로 드러나게 되고 그것들을 선언으로서 다시 정립해나가는 과정은 서로의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의 감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큽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제안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우리 서로의 인권의식도, 연대의식도 높아지겠지요. 그 자리에서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제안도 하고, 토론도 하고, 실천 활동에 대한 평가도 하겠지요. 선언을 만들어가는 그 자체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권선언을 들고 우리는 12월 10일, 청와대로, 국회로, 대법원 등으로 행진합시다. [2008년 인권선언운동]을 제안하며 中

청소년 인권선언의 의미

아직도 청소년은 헌법에 나열되어있는 기본적 권리들을 누릴 수 없는 주체 아닌 주체들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생기고 수많은 인권선언 내용들을 접하게 되었지만 청소년들만큼은 그런 인권영역에서 권리를 갖고 서있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들을 대하는 국가적 선언이나 슬로건들-청소년들이야말로 나라를 이끌 주역이며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의 소중한 자원들이다-따위를 바라보노라면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수많은 일들을 낳았던 새로운 버젼의 일제고사, 여전히 계속되는 대학입시를 위한 학습노동, 다양한 가치들이 무시될 수밖에 없는 환경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존재로서의, 주체로서의 가치관을 내세우고 있을까요. 정부의 말마따나 인간이 아닌 학생들은 ‘자원’이기 때문에 인권 따위는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매년 죽어가는 수백 명의 청소년들은 지금의 인적자원 생산을 위한 희생자들이라는 것일까요.

청소년인권선언은 그런 점에서 더더욱 의미가 큰 것입니다. 2008청소년인권선언의 뒷담화 에서 이 사회에서 청소년인권이 보장될지의 가능성이 코딱지만큼도 안보이기 때문에 저항권을 무려 제 2조에 넣었다는 말은 더욱 이해가 됩니다. ‘너희들의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야’라고 외치는 듯한 수많은, 청소년들에 대한 규제, ‘너희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성숙해질 기회를 가져선 안 돼!’라고 외치며 청소년들의 수많은 당사자적인 권리와 기회를 박탈하며 그 행위들을 합리화하는 것을 보면 어떤 상식이하의 수준과 싸워나가는 기분까지 드는게 현실이니까요. 또한 청소년인권선언은 청소년보호주의를 명분으로 삼아 그것을 청소년의 통제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반대합니다.

♪ 쫓겨나서 살 곳이 없을까봐 다른 사람들(부모 등등)의 일방적인 명령을 들어야 하거나 인권침해 등을 당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야 해.

♪ 가출은 청소년들의 주거권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 만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적극적인 표현 방식일 수 있어. 청소년들이 원하는 독립적인 주거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야 해.

♪ 나의 삶의 주인은 나야. 주변 사람들이 우리에게 조언을 할 수도 있지만, 직업이나 가치관을 비롯해서 우리의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지 결정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고, 우리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어.

 

♪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거짓된 핑계로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하라! 찜질방, 게임방, 노래방 등에 10시 이후에 출입을 금지하거나, 청소년통행금지 거리를 지정하거나, 셧 다운제를 도입하려는 것은 청소년 보호가 아니라 청소년의 행동에 대한 통제라구!

♪ 만일 이 사회에 위험하거나 유해한 것들이 있다면 청소년에게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워야 해.

-2008 청소년인권선언 중

우리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로 청소년인권선언을 시작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당신들의 “조금만 더 참아라.”라는 말을 듣지 않겠다. 차라리 죽어서 무덤에 묻힐 때까지 참으라고 해라. 청소년들은 이제 훈육 받는 객체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하고 지키는 주체가 될 것이다. 나중 같은 건 필요 없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 또는 자격증 따고 나서 같은 건 필요 없다.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의 권리를 선언한다.

- 학생인권선언 2006 청소년 인권포럼 아수나로 -

이 땅의 청소년들은 주체로서 살지 못하는 현실, 끊임없는 주입, 강요 따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길이조차 선택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성향과 존재를 존중하고자 하는 어떤 ‘선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언을 실현시키고 설득해나가는 과정은 물론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인권선언자체로서의 의미도 충분히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청소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선언입니다.

선언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청소년인권선언의 완성은 아니다. 급하게 뚝딱뚝딱 만들어서 빠지고 부족한 부분도 많이 있다. 그리고 아직 많이 알려진 것도 아니다. 앞으로 청소년인권운동의 발달과 함께 성장하고 보완되는 청소년인권선언이길, 그리고 많은 청소년들이 읽고 영감을 얻는 청소년인권선언이길 바란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그런 청소년인권선언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 활동해나갈 일일 테지.

-욕심으로 가득 찬 청소년 인권선언 중-

‘2008’이라는 단어는 곧 이 선언이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겠지요. 그리고 이 선언에 각계각층의 청소년들이 수많은 구체적이고도 다양한 내용의 댓글을 달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 이 포럼의 시작입니다. 자 우리는 모두 똑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의 다름을 인정하고 공감할수 있는 선언을 시작합시다.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선언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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