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근거>

2020년 6월 29일 국회의원 10인의 참여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바로 다음날인 30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전원위원회를 열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예상대로 종교계 일각에서는 차별금지법 입법시도에 크게 반발하고 있으며 대다수의 정치인들은 좀처럼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 장면들로 인해 이번에도 안될거라 기대를 접었지만 지난 7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 광주인권사무소에서 열렸던 정책간담회에서 다소 뜻밖의 낙관적인 전망을 들었다. 낙관의 직접적인 근거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속적인 노력과 설명으로 종교계 일부를 적극적인 반대에 나서지는 않겠다는 정도로 설득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안발의에 참여한 국회의원들에게 비난과 압력이 가해지고 반대집회까지 열리고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또한 10인의 국회의원들에게 가해지는 요란한 압력보다 나머지 국회의원들에게 가해지고 있을지도 모를 조용하면서도 확실한 힘이 얼마인지 가늠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시민사회의 일각에서는 차별금지법이 도입된 해외의 사례를 들어 언젠가 한국에도 도입될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나라가 더 많고 차별금지법과 같은 제도는 OECD 회원국과 같은, 이른바 제 1세계 국민들이나 누리는 특권에 가까운 것이 현실이다. 더 나아가 차별금지법 등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이러한 관점이 희망의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이 글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낙관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무엇인지 탐구하기 위해 쓰였다. 먼저 한국사회에서 차별금지법이 등장하고 전개되었던 주요국면을 되짚어보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펴본다. 그런다음 이번 차별금지법 제정권고와 발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배경인 2017년 촛불혁명과 2020년 코로나19의 대유행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에서 차별금지법의 단초를 찾아본다.

<2006년, 2013년, 2020년>

차별금지법 제정의 역사는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무총리에게 제정을 권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2007년 노무현 정부는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으나 17대 국회의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되었다. 그 이후 일부 국회의원들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했고 2013년에는 5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공동발의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차별금지법에 맞서는 종교조직이 결집되었고 차별금지법의 찬성대오는 법안발의 철회로 주저앉아버렸다.

2013년 이전 차별금지법이 그저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좋은 제도 정도로 여겨졌을 때는 발의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2013년 이후 차별금지법은 종교계의 거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벌집과 같은 존재가 되어 단 한번의 발의도 성공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정치인들이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미신적인 문구를 긍정해야 했다.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차별금지법은 상식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청년정치인들이 당선되었고 이들은 법안 발의 요건인 10인의 국회의원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 2013년 이전의 발의가 따라올 시련을 알지 못했던 시도였던 것에 반해 2020년의 발의는 다가올 압력을 알고서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초라하지만 분명한 진보이다. 2013년의 시도는 순식간에 흩어졌지만 2020년 정부, 국회, 언론, 시민사회, 종교계의 차별금지법 찬성파들은 단단한 대오를 이루었다.

<팬데믹과 민주주의>

2020년의 변화는 2017년 촛불혁명과 2020년 코로나19의 대유행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두사건은 선거시기를 전후로 하여 전개되어 선거결과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정치공학적인 측면보다도 더 근원적으로 어떻게 이 사건들이 차별금지법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범유행(汎流行)이라고들 번역하는 팬데믹(pandemic)은 유행성 질환이 광범하게, 특히 전지구적으로 확산하는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고대 희랍어를 현대어로 만든 것인데, 전철 ‘판pan-’은 ‘모두’를 뜻하고, 명사 ‘데모스dēmos’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뜻하며 이것의 어미 ‘-os’ 대신 달아놓은 영어 어미 ‘–ic’는 ‘~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팬데믹을 있는 그대로 옮기자면 ‘모든 사람과 관련된 일’이다.”

- 양진호, 「팬데믹, 주인은 누구인가」 -

철학자 양진호는 팬데믹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밝히며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에서부터 2020년의 K-방역 현상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팬데믹은 고대 그리스어를 응용해서 새롭게 만든 용어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판데메이(pandēmei, 모두 함께)라는 부사형태로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양진호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아테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한 판데메이의 경험이 아테네인들의 평등의식을 일깨워 민주주의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갑오년, 유무상자(有無相資)를 끄덕이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서로 손을 내놓았던 사람들, 금남로에서 주먹밥을 뭉치고 황금동에서 피를 나누었으며 택시와 버스를 몰고 와서는 기꺼이 계엄군과 대치했던 사람들, 명동 어느 담벼락 너머로 얼굴 없이 초코파이를 던져주던 사람들, 광화문 거리에서 염화미소를 지으며 귤과 핫팩을 나누던 사람들, 그렇게 묵묵히 민주주의의 지분을 넓혀왔던 사람들. 우리는 이들로부터 이미 판데메이를 배워 알고 있었다.”

- 양진호, 「팬데믹, 주인은 누구인가」 -

고대 그리스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설명을 마친 양진호는 우리나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한국 근현대를 이어온 민중항쟁의 경험이야 말로 판데메이를 연습해온 역사라는 결론을 내린다. 양진호의 결론처럼 이미 많은 표어들이 ‘국난극복’이라는 말로 시민들의 익숙한 기억을 이끌어내고 있다.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과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것은 외견상 정반대의 일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모두 국난극복을 위한 시민들의 참여이다.

판데메이와 민주주의의 흐름을 거부하며 다시 차별과 억압의 사회로의 회귀를 말하는 주장의 구심이 되어버린 종교 또한 한국 근현대사에서는 차별철폐를 앞장서서 외쳤던 선구자들의 구심이었다.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천주 앞의 평등을 믿었고 그 믿음을 위해 순교했다. ‘시천주’를 외치며 모든 인간을 신처럼 모실 것을 강조한 동학은 차별철폐를 위해 죽창으로 기관총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차별철폐를 위해 순교한 수많은 종교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차별금지법 제정시도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뿌리>

촛불혁명과 코로나19에 맞선 방역의 경험은 한국사회의 평등의식을 급진적으로 일깨우고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급증해 재난지원금이라는 실험이 이루어지고 차별금지법 등 보편적 인권에 대한 제도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흐름은 한국 민중항쟁사의 진행이자 결과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낙관할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종교인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민중항쟁의 엮사라는 우리의 뿌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우리민족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차별금지법 반대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과거의 차별적인 문화와 억압적 질서, 혹은 인종적 동일성이 아니면 ‘우리’가 해체될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1894년 새로운 사회를 갈망하며 봉기했던 사람들부터 2020년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사람들까지 이 땅에 살았고 살고있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적 가치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문화나 생활양식 같은 것이 아니며 인종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민중항쟁을 가리키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지극히 한국적인 제도이며 우리의 빛나는 전통에 잘 부합하는 제도이다. 지금 어떤 힘이 국회에 작용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뿌리인 민중항쟁의 흐름보다 더 근원적일 수는 없다. 결국 우리사회는 차별금지법으로 통합될 것이며 차별금지법은 우리를 설명하는 예시가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번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돈과 조직을 앞세운 종교계 일각의 힘보다는 우리의 뿌리를 믿겠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탤 것이다. 부디 300명의 21대 국회의원들도 그러길 바란다.

 

황법량(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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