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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로 읽는 헌법 (사형제도)


법대생 차진태 모세


얼마 전에 모 부장판사님께서 자살을 하셨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동일 직역 등 유사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보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사실, 곧 ‘자살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많이 슬프고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벌 없는 사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사람들을 자꾸 죽고 싶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학벌을 ‘현대판 신분’에 비유하곤 하는데, 신분 사회가 ‘나쁜’ 이유는 그것이 생산력이 약하거나 문화적으로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극소수의 양반층의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벌을 신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던 중에 작년에 초중고생 자살이 47% 급증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자살이 많은 사회.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생명은 등가성을 가진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과 존재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존중하는 문제는 범죄자의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의 문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존재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의 문제가 실은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 지를 바라보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사형제도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사형제도의 문제는 사실, 형벌 제도로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합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것은 거칠게 나누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합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2월 25일 ‘사형제도 사건’(형법 제41조 등 위헌제청)에서 합헌이라고 판시(2008헌가23)하였습니다. 판결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형제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는지 여부’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헌법적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상, 범죄자의 생명권 박탈을 내용으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는 당해 범죄자가 스스로 선택한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의 결과라 할 것인바, 이러한 형벌제도를 두고 범죄자를 오로지 사회방위라는 공익 추구를 위한 객체로만 취급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 것으로 보아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으로 일부위헌의견 1인, 위헌의견 3인이 있었으나 다수의견이었던 합헌의견이 법정의견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합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헌법적으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10년 동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TV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그 생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나은 놈’이라는 판단은 누가 하나요?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죽여야 한다면, 반대로 절대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판단은 누가 하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사형 제도의 논의가 매우 쉽게 해결됩니다. “신의 영역”의 것을 인간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이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선한) 신은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므로,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천주교 등 일반적인 그리스도교계의 입장이고, 논리는 조금 다르지만 불교에서도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입장 아래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해 왔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는 근대 철학에서도, 인권의 문제에 관하여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사실, 신분사회 안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주장할 근거는 매우 미약했지요. 서구에서 ‘인권은 하늘이 준 것이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아주 쉬운 말로 인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물론 그것은 고려시대 ‘만적의 난’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도 알려져 있듯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목영준 재판관은 위헌의견에서 “생명권은... 헌법상 제한이 불가능한 절대적 기본권”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로 돌아가서, 현재는 확립된 판시 사항이기도 한 위 판례를 다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은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바, 어느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보호가 곧바로 다른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제한이 될 수밖에 없거나, 특정한 인간에 대한 생명권의 제한이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나 이에 준하는 매우 중대한 공익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는 비록 생명이 이념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생명권 역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논리적으로 조금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이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내면적 사상의 자유와 같은 권리는 해석상 절대적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고, 따라서 생명권을 절대적 기본권으로 해석하여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사실상 학술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보통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입법자의 결단의 문제로 보아 소극적인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명문 규정이 없으니 일단 생명권은 절대적 기본권은 아닌 것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이와 같이 진행됩니다. “예컨대 생명에 대한 현재의 급박하고 불법적인 침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로서 그 침해자의 생명에 제한을 가하여야 하는 경우, 모체의 생명이 상실될 우려가 있어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하여야 하는 경우, 국민 전체의 생명에 대하여 위협이 되는 현재적이고 급박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거나 그에 못지 아니한 중대한 공공이익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범죄자에 대한 극형의 부과가 불가피한 경우 등 매우 예외적인 상황 하에서 국가는 생명에 대한 법적인 평가를 통해 특정 개인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헌법재판소는 ① 정당방위, ② 산모 보호, ③ 전쟁, ④ 흉악범죄의 경우를 나열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①, ②, ③의 경우에 비해서 ④의 경우는 법률이 사후 개입한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①, ②, ③의 경우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침해에 대한 급박한 방어행위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침해로 이어진 경우 그 방어행위에 대한 법률의 보호에 관한 문제인 반면, ④의 경우는 다른 생명의 침해로 이어진 행위를 한 자 등에 대한 처벌의 문제로써 그 재발방지에 목적을 둔 국가의 사후개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의 법정신에 입각할 때, 다른 것을 같은 것인 것처럼 나열한 점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매우 강한 힘으로 쳐들어와서 모두를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죽어나가야 했던 걸까요?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해’ 보이는데 왜 당한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이자고 하지 않을까요?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유럽’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대중의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0만 유대인들을 히틀러가 혼자서 죽인 것일까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사실, 대중들의 적극적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합법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사실, ‘우기면’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수를 죽인 더러운 민족인 유대인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대중들처럼.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면서 “안 했다”고 우기면 그만인 줄 아는 이스라엘처럼. 광주를 학살한 다음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발표한 전두환처럼. 물론 그 안에는 굉장히 ‘섬세한’ 논리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논리의 존재가 비참하게 희생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청년과, 광주 시민의 무죄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그 논리들도 결국 ‘우기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할 지 여부와 그 생명을 제거할 지 여부는 분명히 사회적 합의의 산물일 것인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기준에서 비추어 보면) ‘짐승보다 나은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라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헌법재판소 판례는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어떻게 잘 우길 것인가’의 한 ‘나쁜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섬세한 논리로 ‘우김’을 포장하면 그걸로 게임은 끝인데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사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부 못하는 초중고생’은 ‘존재 가치’가 있나요? 없나요? 많은 초중고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요?


헌법재판소의 판시에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 사회는 ‘존재 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생명이 존재 가치를 갖게 되는 데 매우 심한 압박을 주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전방위적으로 사회 분위기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 30 대 여성 자살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남성도 비슷하지만;) 최근의 기사는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재생산불능의 사회, ‘웬만하면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존속시킬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합의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폐지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높은 강력범죄율 등은 사형제도와 같은 강력한 형벌로는 결코 잡을 수 없고, 사실은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사랑, 또는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음란물들을 생산, 유포하지 않는 것들과 같은 법 바깥의 노력들을 통해서만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율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절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제대로 되기가 매우 요원하니까요.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정면 승부를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은가요? 죽음으로 도피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뵙지요.


2010. 8. 24.차진태 모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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