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이 아닌 삶에게 (2010.6.24 김규항 강연회 후기)


정다영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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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은 누구?

○ 경력

․ 출판사 야간비행 운영

․ 출판사 고래가 그랬어 운영

․ 사회문화비평지 아웃사이더 편집주간

․ 칼럼니스트

(1998,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 저서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예수전, 나는 왜 불온한가, B급좌파


후기랍시고 강연회의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강의가 궁금한 사람은 학벌없는 사회 광주모임 홈페이지에 들러 강연회 동영상을 차분히 보면 될 것이고, 꽤 긴 강연이기 때문에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김규항의 홈페이지에 들러 시간 나는대로 짬짬히 글을 읽어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말보다는 글이 더 좋은 사람이다.) 여기서 나는 김규항에게서 우리가 들어야할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짧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강연이 끝난 뒤 내가 만난 몇몇 사람들의 반응에 오랫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물론 그의 강연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 중요한 것들을 가지고 갔을 테지만, 유독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강의의 내용이 부실했다거나 별 내용이 없었다는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들이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이야기처럼 들렸을까. 또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들이 그가 계속 써온 글들에 대한 반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왔을까.


그의 말은 새롭지 않다. 그의 말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 까닭은 그는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이론을 내놓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말과 글은 우리의 인식의 즐거움을 향해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와 생활태도, 가치관을 향해 말한다. 제주 해녀 할머니가 굳이 해녀복을 입지 않고 잠수를 하는 까닭이 해녀복을 입으면 나 혼자서 더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의 수확을 위해 생물들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다는 예를 들면서 그는 그것이 가까운 과거의 우리들의 심성이었다고 말한다. 제 삶의 풍요를 생각하느라 남의 삶을 생각하지 않게 된 우리의 마음이 현재의 이명박 정권의 출현과 자녀교육에서 드러났으며, 이 두 산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지금 서있는 자리이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까?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정말 다른 사회를, 인간적인 세상을 원합니까?”라고 그들의 마음에 되묻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거리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는 대안이 없다. 그는 ‘그래도 현실이…’라는 변명으로 계속 이대로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일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현실이 이렇다’는 반성을 통해 지금 새롭게 살아가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학원을 끊으면 당장 우리 아이는 같이 놀 친구가 없는데 어떡하나, 대학을 안가면 취직은 어떻게 하고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묻는 질문들에 그는 독일 사회에서 살아가며 교육문제에 관해 글을 쓰는 무터킨더 박성숙의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사는 곳은 독일이 아닌데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우리가 그 책에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뿌리깊게 경쟁의식에 길들여져 있었는지를 체감하고 그것을 버리려는 노력에서부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의 적, 우리의 적은 외부에 있는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 속에 내면화된 그러나 우리가 비판하는 사회의 가치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런데 나만 달라진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오히려 나만 혹은 내 아이만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어린이 잡지를 만들고 또 고래커뮤니티를 만들어,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대안이라고 말하기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누군가 길을 내기 시작하면 길이 다져지고 넓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새롭지도 그럴 듯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은 아름답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또 언제나 새롭다. 이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서 최근의 독서에서 김선우의 소설을 예로 들고 싶은데, 김선우의 <<캔들 플라워>>를 읽으며 느껴지는 감동과 아름다움은 문장의 미려함에서 오는 것이기보다는(물론 문장 자체도 좋지만) 세계관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듯이 김규항의 말과 글에서의 감동 역시 비슷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과 글에서 외화된 것들보다 그 속에 자리한 세계관과, 고민들, 삶의 긴장에 대한 노고를 생각하다보면, 이 시대에도 이런 이들이 살고 있어서 아직 살만하고 다른 세계를 꿈꿔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또한 그의 말이 새롭지 않음에도 언제나 새로운 까닭은 점점 나이가 들수록 실천의 어려움 때문에 생각의 급진성도 거기에 맞추어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달리, 그는 실천의 보폭을 생각의 급진성에 맞추어 가려고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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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가 학벌타파를 주장한다고?

 

안정혁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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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주1) 8월 13일 이명박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학력이 낮더라도 능력에 따라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어느 의견에 대해서 "적극 찬성한다. 학벌타파해야 한다."며 잠깐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헌데 실상은 특목고․외국어고 설립, 일제고사 시행 등 또 다른 학벌의 통로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지 않은가.


2. 트위터는 주로 스마트폰을 통해 이용되는데, 트위터 뿐만 아니라 이메일, 인터넷 등 각종 컨텐츠를 쉽게 얻을 수 있어 인기가 좋다. 근데 걱정은 사교육자본들이 입시정보 (스마트폰 프로그램)어플이 유행이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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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킥 오프- ‘희망’이란 신기루 or 이런게 전쟁이야.


광주인권운동센터 활동가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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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킥오프> 중에서


종종 영화와 현실을 착각하곤 한다. 더러 ‘영화같은 현실’을 목도하지만, 영화에서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속살들은 얼마나 많은가.


포스터만 보고 속을 뻔 했다. 잿빛 포스터 안에 ‘희망적인’ 스멜이 살짝 풍겨나오고 있었다. 월드컵 과열의 부작용으로 축구를 멀리하는 편인데, <킥오프>는 외려 관심이 갔다. 직업병(?) 일수도 있겠고, 쉬 접할 수 없는 이라크 영화라는 것도 마음을 움직였을 게다. 사실 축구보다야 이라크 현실을 어떻게 담아냈을까가 주요 관심사였다. 6월에 개봉했던 <맨발의 꿈>을 챙겨봤던 것도 순전히 동티모르가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화라니! 영화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축구에 빠진 아이들의 역동적인 몸짓을 보는 건 즐거웠다. 고단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축구의 마력이라니. <맨발의 꿈>은 실화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나름 맛깔스럽게 버무려냈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들이 너무 전형적이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아이들의 미소에 빠져 허우적 댔더랬다. 실제로 현지에 사는 유소년축구단 맴버들 이라고 하니 그 생동감을 누가 따라왔을까 싶다. 연기경험도 전무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연기는 일상에서 길어올린 삶의 빛깔이 뚝뚝 묻어난다.


나는 말랑말랑한 영화도 즐겨보지만, 현실의 생채기를 보여주는 쓰디쓴 질감의 영화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킥 오프>는 <맨발의 꿈>과 같은 소재를 차용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질감의 영화다. 일반적인 스포츠 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스포츠와 아이들을 다룬 영화의 결말이 이리도 처연할 수 있다니, 제대로 킥을 당한 느낌이다.


<킥 오프>는 폭탄 테러가 일상이 돼버린 도시 키르쿠크의 파손된 스타디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쿠르드족, 아랍인, 터키인, 아시리아인등 다양한 소수민족들의 이야기다. 전쟁과 가난에 얼룩진 일상의 무게가 버겁지만, 그곳에도 사랑의 설레임이 있고, 희망이 꿈틀거린다. 가난과 폭격의 두려움을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삼삼오오 축구를 하거나,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축구중계를 보는 장면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선 나름 호사스러운 일이다. 너덜너덜한 스크린에, 화면도 지지직 거리지만 오순도순 모여 화면에 집중하는 장면은 아릿한 감동을 준다. 영화는 부족간 축구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수’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스타디움 곳곳을 스케치하듯 담아낸다. 늘 스타디움 한켠에 염소를 대동하고 하릴없이 앉아있는 묘령의 청년, 황량한 운동장 여기저기 묶여있는 가축들, 그리고 스타디움을 터삼아 오고가는 사람들. <킥 오프>는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 변변한 배우나 화려한 특수효과, 시선을 끌 만한 에피소드 하나 없는 모호한 색감의 흑백화면이 이라크의 현실인 듯 서늘하게 다가온다.


<킥 오프>는 열악한 촬영조건에서 힘들게 완성된 영화다. 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현장 여건 때문에 참여하려는 스탭은 거의 없고, 출연을 결심한 배우가 촬영 전에 포기하고 달아나기도 했단다. 게다가 촬영 도중 테러리스트들의 협박 전화까지 감내해야 했다니.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제작진이 겪은 비화야말로 영화를 뛰어넘는 이라크의 현실일게다.


감독은 축구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절망의 기운을 드리운다. 잠시 망각했던 현실을 지독하게 상기시킨다. 이게 이라크의 생생한 현실이라고. 애초에 축구공 하나가 감동을 선사한다는 꿈같은 결론을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뒤통수 제대로 맞은 느낌이다. 섣부른 희망으로 장식되지 않은 날것의 현실, 덕분에 영화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다. <킥 오프>는 전투씬 하나 없는 소박한(?) 영화지만 그 어느 전쟁영화보다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이렇게 폐허의 땅에서 근근히 살아가며 부지불식간에 ‘죽음’과 대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전쟁이라고 나직이 읊조리는 듯 하다.


전쟁영화들은 다양한 변주를 꾀하며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화려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며 잠시도 숨돌릴 틈을 주지않는 블록버스터부터,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차갑게 응시하는 작가주의 영화까지. 전쟁영화는 대자본의 수혈을 받고 계속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총질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기 힘들어하면서도 전쟁영화를 ‘꼭’ 챙겨보는 이유는, 전쟁의 실상을, 다시는 전쟁이란 ‘괴물’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영화라는 매체는 양면적이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생각을 이식시키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을 주목하게 하는 힘도 가지고 있다. 몇년 전 개봉했던 <관타나모로 가는 길>의 사례를 보자. 이 영화가 영국 TV에서 방송되고 난 이후 영국 시민들이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블레어 총리는 관타나모 기지 폐쇄를 부시 행정부에 촉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보여주고 증명하는 영상의 힘은 이토록 놀랍다. 물론 영화 한편이 당장에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순 없겠지만, 날것의 영상을 통해 이 세상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고, 무감한 마음밭에 조그만 ‘파문’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그런 변화들이 모여 세상에 파열음을 낼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


이라크에 주둔 중이었던 미군의 마지막 전투여단이 철수했다고 한다. 2003년 침공이후 7년 5개월 만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미군이 물러가더라도 개입을 안하는 것은 아니란다. 비군사 개입은 지속될 전망이다. 사실상의 ‘간접통치’에 들어가기 위한 수순이다. 오바마의 공약이었으니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당장은 철수해야겠지만, 아마 이라크에 대한 간섭은 영원히 지속될게다. 지구촌 곳곳이 여전히 미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킥 오프>를 보고난 후 맘이 착잡해졌다.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이들은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조각난 삶을 재건하기 위해 힘을 쏟겠지만, 걸프전부터 지금까지 전쟁의 상흔이 깊게 베인 이라크에서 ‘희망’을 꿈꾼다는 건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게 아닐까.


<킥 오프>의 결말을 보며 잠시의 행복도 앗아가 버린 전쟁의 참혹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삶과 죽음의 운명이 공기처럼 한데 뒤섞여 있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폭력은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을 터. 겹겹이 드리워진 폭력의 세계를 올곧게 응시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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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연애전선 안녕하신가?


조이소현 (전,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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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스펙과 학벌있는 졸업장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한국사회


연애. 생각만 해도 달콤한 그 이름. 아무도 자신과 그남/그녀 밖에 모를 것 같은 그 은밀한 이름.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선팅지'의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선팅지를 칠한 유리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선팅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검은 유리창'으로만 보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팅지 밖에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안에 있다. 이 말은, 연애라는 '사적'인 행위들이 실제로는 엄청나게 '사회적, 정치적'인 것들의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너와 나의 달콤한 키스 혹은 섹스 포지션은 알고 보면 사회화된 것이고, 그 사회화된 것 속에는 무척이나 '잘못'인식되어 행해지는 것들이 많다.

예로부터 페미니즘에서의 고전적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으니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일터. 그런데 이 문장은 한국 권벌사회를 바라보는 한 시선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 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공유하고 있는 '학벌'과 '여성주의'는 '연애'라는 장 속에서 마주친다.


예전만해도 서울대 법대 남학생과 이화여대 가정교육학과 여학생의 미팅은 아마도 대학생들의 만남 중에서도 최고의 만남이라고 불리워질 만큼 동경의 대상, 완벽한 모델로서 자리매김 해 왔다. 서울대 법대 여학생과 서강대 가정교육학과 남학생과의 만남은 왠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힘의 균형'을 잘 맞추려면 남성이 좀더 좋은 학벌/권벌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둘의 만남은 '선남선녀'의 만남으로 미화되고, 결국엔 결혼으로 골인하여, 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와 비슷한 예가 티비 프로그램 '장미의 전쟁'이다. 이것은 ‘남성 연예인+일반인 여성, 여성 연예인+일반인 남성’의 커플을 만들어 짝지어 주는 미팅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굉장한 일이 생길 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MC가 오늘의 로맨스를 대충 읊는다. 그리고선 죽 늘어선 양쪽의 청춘 남녀들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만의 신선함 혹은 독창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멋진 연예인들과 일반인의 로맨스‘


소위 스타라 불리우는 연예인들의 굉장한 외모에 기대어 여성들에게는 백마 탄 ‘왕자’를, 남성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주’ 같은 그녀들을 현실로 끌어내어 준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일반인 남성이 연예인 여성과 미팅을 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나는 일반인이란 기준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일반인 기준은 더 모호해졌다. 그 방송에서 일반인이란 ‘비연예인’ 즉 방송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반인 여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화려한 방송 경력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앞으로 방송계에서 일 할 사람이거나 관련과의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반면 일반인 남성이라고 나온 사람들의 프로필에는 수도권 대학과 상위권 대학 출신이 반이 넘게 있었다. 일반인이라는 기준이 여남에 따라 차등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방 남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일반인인 여성이라고 해도 학력이나 개인이 가진 능력보다는 보통 여성 연예인만큼의 외모가 중요하고 전부인 듯했다. 그렇지만 일반인 남성이 상대방 여성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대방의 눈길을 이끌만한 외모도 필요해보였지만 학벌이 빠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벌 있는 남성과 미모 출중한 여성의 만남은 어색해하지 않지만 반대로 학벌 있는 여성과 미모만 있는 남성의 조합에서는 상당히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많이 묻어난다.


어디 이것이 텔레비젼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대학에 가면 학기 초 3월에 가장 많이 나붙는 홍보 자보가 '**고 / @@여고 조이트 동문회'이다. 대부분의 이 '조인트' 동문회는 지역에 있는 '유명'고등학교 와 함께 하루 만나서 놀자는 것이다. 하루 만나서 놀자고 말하는 '조인트 동문회'는 학벌을 조장하고, 이와 더불어 이성애적인 만남을 통해 학벌을 공고히 하자는 데에 있다.


연애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위하는 이 장 속에서도 학벌은 보이게/보이지 않게 공고히 작용하고 있다. 학벌=능력으로 인식되는 이 사회 속에서, 주변 남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 애인이 ‘여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예쁘냐?’이다. 반면 주변 여자친구가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애인이 ‘남자’임을 의심치 않아하고 물어보는 질문은 ‘어디 학교 다니는데?’이다. 이 속에서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애인으로 뒀을 경우, 대답을 쭈뼛쭈뼛하게 되고, 애인의 性이 주변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이 아닐 경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니, ‘나 애인생겼어요~’라는 말조차가 그녀/그남들에게는 봉쇄되어있다. 물론 이 대답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답’은 ‘서울대 생이야’일 것이다. ‘응 그냥 대학다녀’라고 말하겠지. 왜 당신들은 이러한 질문들이 상대방에게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렇지 않은 것같이 자연스러운 것은 알고 보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을 억압‘하는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학벌도, 이성애중심주의도, 모두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연애는 얼마만큼 이 속에서 자유로운가? 얼마나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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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식칼 그리고 이별


김영대 (광주전남녹색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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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느 여중학생들이 버스유리창에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우리’, ‘하트’, ‘식칼’… 대체 이것들이 무얼 의미할까?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뛴다고 무슨 의미가 있냐? 그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우연히 알게 된 귀농한 부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너무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의 삶이 싫어 농촌의 여유로운 삶을 찾아왔다는 부부다. 나도 이런 숨 가쁜 삶은 싫다. 이런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 사회도 싫다. 그래서 매일 아침 나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는 것은 두려워, 그 안에서 거꾸로 뛰고 있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탄다. 버스를 놓칠세라, 숨 가쁘게 뛰듯 올라 탄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 사람들 또한 이런 숨을 내쉬고 있다. 거친 숨을 가득 담고 출발한 버스 창문은 흐 뿌옇다. 창밖을 본다. 옆에서 달리는 차량의 불빛만이 번지고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렇게 지쳐가고 있다.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내리면서 버스 안은 여유로워졌다. 사람들의 숨결이 맺혀진 버스 창문은 차갑다. 그곳에 두 여중생이 그림을 그리며 깔깔대고 있다.


한 친구가 사람을 그리며, "이거 너야!" 또 한 친구는 문어 같은 사람을 그리며 "너야!" 한다. 이젠 하트를 그린다. "사랑" 이란다. "사랑? 이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 아니야, 이건 사랑이 아니야!" 느닷없이 식칼이 그려진다. "슝~ 얘도 죽고, 얘도 죽고, 얘도 죽… 아니 얘는 산다." 그리고 서로 깔깔대며 웃는다.


버스 엔진 소리, 그리고 적막. 그 적막에 깔깔대며 나누는 이야기가 버스 엔진소리에 묻힐 듯 내 귀에 들려온다. 정답다. 무서운 이야기인데… 멍하니 그들이 창가에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본다. 온기 있는 손가락 끝. 차가운 숨결을 녹였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의 선을 따라 버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큰 길 가에 즐비하게 들어선 상가의 푯말,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버스가 섰다. 그들이 내렸다. 그들이 내리고 난 자리에 '우리'란 단어가, 사랑과 식칼 그리고 죽음의 어느 공간에 적혀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는 '우리들'이 함께 타고 있다. 또 그 버스 안에서 거꾸로 뛰는 '우리들'도 함께 타고 있다. 사랑도 있고, 미움도 있고, 이별도 있는 버스 안, 여중생이 그려놓은 식칼.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는 삶이 칼로 베어 이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인가? '우리들'이 아닌 '너희들'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아픔을 느낀다.


고민이다. 난 언제쯤에 내려야 할까? 버스에서 내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럴수록 거꾸로 가는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 말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 또 누군가는 말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버스 안에서 차가운 숨결을 녹였던 손가락 끝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그렇게 온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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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에 대한 두려움 


학벌없는사회 광주모임 상근활동가 박고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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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스님 세상을 떠나신 후, 그의 저서를 읽으려는 독자들이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광화문 교보문고에 대표산문집 '무소유'의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다


무소유에 대한 소유욕을 보며


지난 3월, 법정 스님이 이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길상사에는 그를 위한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유의 욕망이 넘실대는 시대였기에 그만큼 무소유의 메시지가 힘을 얻었을까?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스님이 떠나신 후 무소유를 절판한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앞다퉈 책을 소유하려는 진풍경을 벌였고, ‘무소유’는 전자책으로도, 가장 읽고 싶은 책 1위를 차지했다. 이 땅의 인간을 좀 더 이해하셨더라면 법정스님도 책을 절판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법하다. 소유의 욕망은 존재의 욕망만큼이나 뿌리가 깊어, 무소유의 정신조차도 소유하게 만든다.


바로 소유가 문제


이처럼 대개 사람들은 돈을 소비해 물건을 소유하거나, 돈을 축적해 불로소득으로 부를 늘리려 노력한다. 상위 2%에 속하는 자들이 막강한 땅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면서도, 여전히 경쟁과 착취의 틀 안에서 소유하려 한다. 이것을 나는 인간의 ‘욕망’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는 가능한가? 얼마 전 김석순 이모(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부회장)가 잠비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며, ‘열대지방 현지인들은 아무리 가진 것이 적어도 일정 정도 돈과 음식이 생기면 일을 중단하고 가족, 이웃들과 그것을 나눈다.’는 자급자족의 현실상을 그려주었다. 소유를 통해 행복할 수 있지만, 소유하지 않음을 통해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고 열대지방은 미성숙한 비자본주의 사회다. 한 때 한국도 자급자족 했던 사회다.’라며 일축할 수 있지만, 나는 소유의 문제를 꼭 자본주의나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토대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자립생활의 공동체가 대안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국가의 많은 제도는 기회의 평등보다 부의 세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교육이나 지식조차 상품으로 변했고,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강요당한다. 소비를 위한 소비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는 돈을 계속 벌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산다. 그야말로 과잉경쟁과 과잉소비의 사회다. 이러한 모순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본다. 자급자립의 공동체, 자본 없이도 나름의 재능과 관심을 꽃 피우며 살아갈 수 있는 곳, 장인 정신과 인간됨으로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소박하고 자유로운 농부, 자격증이 필요 없는 목수, 요리사, 시인 등 각자 제 재능을 살려가며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꾼다.


나의 삶은 이제…


내가 받는 학벌없는사회 활동비는 한 달, 1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한데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 20만원, 통신비가 5만원. 그러니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삶을 충당했지만, 현재 내 자산은 카드빚으로 쌓여있다. 요즘같이 힘들 때가 없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욕망을 없애 준다. 내 처지를 아는지, 사람들은 함께 끼니를 나누고 음악을 가르쳐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건넨다. 배고픈 내게 항상 무언가 던져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발적 가난의 문제는 결국 돈과 맺는 어떤 관계이기에 불편함이 있고, 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반복해야만 한다. 결국 자발적 가난이든 자급자족이든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긴 힘들 듯 하다. 때로, 너무 마르고 기운이 없어 다른 사람의 짐조차 들어줄 수 없는 삶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져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삶이 더 가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 주류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들의 자기합리화가 되지 않도록 꾸준히 실천하는 일이다. 이제 내 자신을 경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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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조항, 그리고 정치적 권리의 행방불명 -


공현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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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보신각에서 '쥐를 잡는 쥐덫을 놓는 1인들'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서있다.



정치의 실종


요즘에 청소년인권에 관한 따끈따끈한 신간, 『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를 읽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교육과 연구 등을 해오던 김민아 씨가 지은 책인데, 이 책의 서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인권교육을 다니다보면) “문제의 답을 고르듯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라고 묻는 청소년도 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다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쉽게 맞닥뜨릴 수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온라인을 통해서 자신들이 처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고서 이렇게 묻는다. “이거 인권침해 맞죠?” 그리고 마치 시험 답 맞춰보듯이 헌법 몇 조, 유엔아동권리협약 몇 조를 인용한다. 그 다음은? 인권침해 맞으니까 논리를 잘 갖춰서 얘기하겠다고 하거나 신고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청소년들이 ‘청소년인권운동’에서 보는 것은 청소년인권 문제라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운동이나 저항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겪은 경험에 대해서 ‘인권’이라는 규범이 ‘정답’을 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잘못 채점된 시험 답안지에 대해 항의하러 가는 듯이 행동한다. 그러고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고’를 하거나 하소연을 올리곤 하는 정도?

이때, 인권은 지금 여기에는 없는 권리를 사회적인 투쟁을 통해 쟁취하고 실현시키는 역사적인 과정과 그 결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인권은 이미 존재하는 교과서적 정답이자 도덕률 정도로만 이해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실종되어 있다는 것을 이 질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인권침해가 일어났을 때 답이 뭐예요?” 그러니까,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2009년부터 만들어져온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2010년 경기도 교육위원회에 발의되었다. 그러나 발의된 안은 처음에 공개되었던 초안과 달리 집회의 자유에 관련된 조항이 삭제되고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세계관․인생관 또는 가치적․윤리적 판단 등 양심의 자유”라는 표현으로 대체된 안이었다. 결국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통과는 무산되었지만, 9-10월 즈음에 경기도의회에 재상정될 안 또한 그 내용은 같을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청으로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한 최초의 사례인 경기도교육청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에 관한 부분에서 한 발 후퇴한 안을 내놓음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의 학생인권조례 역시 이 두 부분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이슈가 될 듯싶다.

물론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에서 집회의 자유에 관한 조항과 사상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빠졌다고 해서 청소년들에게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초안에는 한 번 들어갔던 조항이 최종 발의안에서는 빠진 것을 학생인권에는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할 사람들은 널려 있다. 최소한 교육청이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의지가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언론들에서는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안 발표를 “학생들 교내에서 집회 못한다”라는 식으로 표제를 뽑아서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는 욕을 먹는 것일까? 그리고 왜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와 혁신학교로 일각에서 추앙받으시는 김상곤 교육감 님하도 집회의 자유 조항과 사상의 자유 조항을 부담스러워 하며 뺀 것일까? 따져보면 저 장대한 비극의 한국사 100여년을 거슬러 가볼 수도 있을 것이고 한국 사회에서 ‘정치’나 ‘사상’이라는 말에 관련된 프레임을 분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격적인 분석은 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하라고 하고, 나는 “이게 다 입시교육 때문이라고”라고 말하겠다. (이 글의 컨셉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인권 중에서도 정치적 권리의 대표 주자는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이다. 단순화시켜서 얘기하면,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 전반을 부정하는 셈이기도 하다. 사실 교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민주노동당에 후원금 좀 냈다고 교사들을 다 짜르겠다고 하는 꼴을 보면 분명 한국의 학교는 정치를 싫어한다. 요컨대, 입시교육은 정치와 정치적 권리, 특히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싫어한다는 얘기다.



입시교육은 어떻게 정치를 억압하는가


입시교육의 특징은 철저한 정답주의이다. 교육의 목적이 입시가 되어있는 이상, (그딴 걸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이 아니라 입시전형과 평가기준에 맞춘 답을 찾는 것이 주가 된다. 또한 입시교육은 개인주의적이다. 입시는 결국 개인의 능력주의와 출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입시교육의 이러한 특성들은 정치의 특성과는 여러모로 배치된다. 우선 정치는 상대적이다. 정치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다양한 집단들 사이의 가치의 재분배/조정이라고 정치를 정의하든, 배제된 사람들의 주체화라고 주장하든, 정치에서 정답을 찾기란 힘들다.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다양한 이해관계들/이념들, 방법론들, 권력들이 있을 뿐이다. 정치적인 사고방식 속에서는 무엇이 옳다 무엇이 그르다를 단언하기 어렵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각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능력과 정세 등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교과서에 비추어볼 때 누구의 말이 옳으냐가 아니라, 누구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교과서나 해답지에 명확한 답이 있고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것이다.

또한 정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는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이 부각되는 때에도 사실은 그 개인에 얽힌 집단의 문제일 때가 많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김상곤 교육감의 정책도 김상곤 교육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조직화된 집단과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소통, 공론장이 없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 문제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차원으로 한정시키는 입시교육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문제’들이 정치에서는 다루어져야 한다. 입시교육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정치는 낯선 언어와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고, 정치적 언어와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순순히 입시교육에 순응하지 않기 십상이다.

학생들에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이 ‘반교육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그 말이 사람들에게도 왠지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그림이 ‘입시교육’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어떤 올바른 것(정답)을 가르치고 주입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학생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정답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한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이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장려한다니, 입시교육이 교육이라고 믿던 사람들에게는 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반교육적으로 보이겠는가. 교육이 개인이 자신의 지적 능력이나 문제풀이 능력 등을 개발해서 입시나 취업에서 성공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집회의 자유는 반교육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집회의 자유를 놓고서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적 선동’에 휩쓸릴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또한 이런 경향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좀 더 적극적으로


학생인권조례에 집회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입시교육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눈에 띈다. 예컨대 학내 집회의 자유에 관해서 “학내 집회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택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보장되는 것뿐이고 학교 운영에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된다면 학내집회를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학교가 정치의 장이 될 거라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같은 말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결국 집회를 또 하나의 정답 정도로 만드는 것 아닐까?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잘 반영되지 않을 때 학생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집회를 택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정당화되는 집회의 목적과 수단을 한정짓고, 집회를 온건하고 이성적이고 다소 비정치적인 무언가로 만드는 것 자체가 말이다.

사상의 자유를 단지 반성문을 강요하는 등 사상․양심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침해하는 것들을 막는 것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뭐 물론 반성문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건 중요한 인권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만 사상의 자유를 얘기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의 의미를, 학생들도 사람이니까, 학생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내면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고 학교가 정치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좀 불만이다.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소극적으로 어떻게 사상의 자유를 보호할까 하는 선에서가 아니라, 사상의 자유에 대해 입시교육의 틀을 깨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전교조 조합원들 중 몇 명이 정당을 후원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인권단체 안에서는 이 사건을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의 정치적 자유에 대한 탄압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행동으로 “청소년들이 집단 정당 가입을 발표해버릴까?” 하는 논의를 했었다. (전교조 자체가 별로 이 사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징계 절차나 양형이나 기준의 문제 정도로만 다투려는 것 같아서 접기는 했지만…) 이렇게 지금은 우리가 더 적극적으로 교육을 정치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집회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교육이 정치의 장이고 사회적인 공론의 장이어야 하며 정답만 강요하고 개인주의를 강화시키는 입시교육을 부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미 그 자체가 정치적인 ‘입시교육’이, 자신은 비정치적인 양 탈을 쓰고 정치를 압살하는 이 시대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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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가 필요하다

- 수완중학교 교사 성추행 의혹사건을 보면서 -


신가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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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산구 주민이다. 수완중학교(이하 수완중) 근처에 사는 주민이다. 동네 주민으로서 작년 초 여름부터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서술하고자 한다. “학교 근처에 사는 사람이 왜 학교일에 관심이 있나?”면서 의아해 할 지 모르겠다. 국가기관이 정해준 학교란 공간은 오로지 그 안에서 노동하거나 학습하는 주체들‘학생․교사․학부모’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학교라는 공교육기관이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인근 주민과는 그저 “운동장 사용” 혹은 “배드민턴 동호회”정도나 관련이 있다. 그래서 학교 인근에 사는 주민이 학교일과 관련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일은 주제 넘는 짓이라고 여기기 쉽다. 나는 반문한다. “왜 안 되는가? 왜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가?”


국가가 국민 세금으로 지어놓은 학교라는 공간, 공교육 공간은 과연 교사와 교장의 것인가? 그곳에 다니는 학생만의 것인가? 학생을 둔 학부모만의 것이어야만 하는가? 왜 학교 인근 주민은 인근 공적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없고, 말할 수 없는가? 수완중 주민인 소위 학교라는 공적인 ‘배움의 공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가?


내가 오지랖 넓게 이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나또한 교육공무원 노동자기 때문이다. 소위 공교육이라고 불리는 현장에서 노동하고 먹고 살고 있는 사람이다. 수완중에서 근무하고 있지는 않다. 이점은, 내가 수완중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진실’을 볼 수 없는 한계에 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다.


그 안에 있지 않고서는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일들이 많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조직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일들을 서술 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조직 아니면,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고말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다. 따라서 이글이 그 내부 구성원에 쓰여 졌으면 신뢰성과 타당성이 더 확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한계가 있다. 조직 내부에서 벌어진 그 미세한 일들과 의미들과, 그 안에 중첩된 욕망과 두려움, 무능과 비열한 슬픔을 상세히 서술할 수 없다.


나는 수완동주민이며, 학교라는 노동현장에서 일해서 먹고 사는 자로서, 일정한 것들을 유추해서 내 관점(perspective)을 통해 진실은 구성하려 한다. 수완중에서 6월 16일부터 2박3일간 완도청소년 수련장으로 1학년 학생이 수련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그동안 선생들이 뭘 할 것인지 유추할 수 있다. 애들 줄 세우고, 카운트하고, 아픈 아이들 형식적으로 묻고, 짐 나르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아이들은 소란하고 붕 떠서 말을 듣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고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친다. ‘저놈은 왜 입지 말라는 초미니반바지를 입고 온 거야?’ 라면서 나온 저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등을 고민한다. 도착해서 안전하게 교관들에게 넘기고, 그 이후에 같은 학년 선생끼리 모여서 땀을 식히며 음료수 한잔하면서 아이들 이야기하기. 비슷한 노동현장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기에 유추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전해들은 말들과 읽은 신문기사와 동네를 떠도는 풍문과 냄새를 통해 담담히 사실을 적으려고 한다. 이글을 쓰는 목적은 이미 지나간 사건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 누군가를 벌주고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을 기술하여 남김으로서, 사건 내에 담긴 여러 다양한 의미들을 탄광의 광부처럼 캐내서 그를 자세히 검토해보기 위해서다. 물론 망치와 곡갱이, 그리고 어두운 갱도를 밝힐 램프가 필요하고 이는 독자의 몫이다.


1. 수완중, 그리고 K 교장에 대해


6월 16일 수완중은 1학년 10개반은 교사들과 함께 진도청소년회관으로 수련회를 떠난다. 학생들은 대개 수련회를 좋아한다. 교실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 아닌가? 별다른 일 없이 수련활동은 시작되었다. 진도 수련관에서는 지리산 청학동이나, 해병대 극기 훈련과는 다른 유연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는 바다에서 보트로 활동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조교라고 불리는 이들도 강압적이지만은 않다.


수완중은 왜 이 진도수련회를 택했는가? 작년에 갔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학교에서는 관행을 따른다. 작년에 별 문제가 없었으면, 그냥 그대로 추진한다.


수완중은 작년에 개교를 했다. 교장 K(존칭생략)는 평교사 출신의 공모제 교장이다. 이점은 수완중 정체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교원 승진은 교감자격증을 소지한 후, 교장이 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나 K교장은 공모제 교장제도를 통해 평교사에서 바로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새 학교로 부임한다. K교장은 평교사 전교조 출신으로 알려졌다. 또한 전교조가 추진하는 ‘(혁신학교를 위한) 새로운 학교모임’에 관심이 많다. 2년차 되는 해(2010)에는 전교조 상근자 출신(소위 강성 전교조)을 초빙한다. J, B, L 등 광주광역시에서 전교조 핵심 멤버들을 초빙하여 학교를 재구조화 하겠다고 한다. 이들은 경기도의 혁신학교, 그리고 핀란드를 모델로 학교들을 연구하며 새로운 학교를 연구하며 공부하는 분들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새로운 학교를 연구하는 일부 회원들도 같이 초빙하여 학교의 재구조화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 알려진다.


문제는 K 교장이 이들과 의견을 같이하는 이들뿐 아니라, 전혀 색깔이 다른 교사들을 초빙했다는 점이다. 일정한 철학을 공유하고, 학교재구조화의 그림을 그리며, 학생과 학부모를 주체로 세우는 큰 그림 없다. 일부 전교조 선생을 초빙하고, 일부는 교총소속이며, 무난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분들을 또 초빙했다는 점. 학교는 첫 출발부터 삐그덕 한다.


학교의 교직문화에는 이상한 ‘연공서열’이 있는데, 그 학교 근무 연수가 상당히 중요한 힘이 된다. 학교 개교 멤버들은, 개교과정에서 아주 힘든 업무들을 맡는다. K교장이 전교조 출신이긴 했지만, 교사들의 업무 경감이나 학생인권 문제에는 별다른 주안점을 관심을 전혀 두지 않는다. 원년 멤버들은 개교 첫해 엄청난 업무에 시달렸다. 그들은 두 번째 해에 초빙된 교사들과 보직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동시에 학생인권주장을 하는 일부 극소수 교사와도 갈등하는 상황에 놓인다.


초빙교사와 개교멤버 교사간의 갈등은 물론 전교조라는 교원노동조합의 문제이기도 하다. 전교조 소속이긴 하지만, 학생인권이나 학교재구조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기도 한 조합원도 많다. 회비납부를 기부와 비슷하게 여기는 평범한 조합원과 상근자 출신으로 전교조에 정열적인 조합원간의 갈등이기도 하다. 이는 주로 학생지도 문제를 통해 나타나는데, 두발단속/자치활동/용모 문제에 대해서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상근자 출신중에서도 일부만 학생인권에 관심이 있고 각각 우선순위도 다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전교조 정체성이 강한 J교사와 다른 교사들 사이에서 학급운영을 두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있고, 갈등이 쌓이고 있다고 한다.


원년멤버 vs 초빙교사의 갈등, 그리고 전교조 교사 중에서도 학생인권을 두고 ‘잡자’vs‘놔두자’의 갈등. 이 갈등의 배후에는 전교조 출신 교장 K의 철학부재가 있다. 첫해부터 그가 중점에 둔 것은 시를 통한 학생인성교육이라는 기치였는데, 교육청이 보면 너무너무 좋아 할 말랑말랑한 것들이었다.


그는 첫해부터 전교조 이념을 구현하는 어떤 정책도 없이 시설을 중점적으로(일반 교장들과 같이)‘예산따오기’에 중점을 두었다. (화장실 들어가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두고 인성교육예산투자라고 여기는.) 그래서 ‘시비(詩碑)’등을 제막하고, 학생들에게 ‘시외우기’와 같은 것으로 인성교육을 한다고 했다. 교사들은 그의 의중이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어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더구나 명품 수완중 학군에서는 빈부격차가 많아서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는 학생이 한반에 5명이 넘을 정도로 힘든 형편에 있는 학생들이 있고, 본드 등을 흡수해서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로 교사들은 지도가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들에게 “시를 외워라”라면서 인성지도를 한다고 하는 교장이 답답하고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일부 교사는 그래서 첫해 교사들은 의견서를 수렴하여 제출했다고 한다. K 교장은 그러나, 방과 후 학교 등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대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전교조에도 멤버쉽을 자랑한 듯 하다. 전교조 핵심멤버들과 함께 <이우학교>나 <핀란드교육모델>을 도입하자고 했지만, 그가 단단한 철학적 배경위에서 학교운영을 하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극적인 사건은 올해 6월 교과부가 민주노동당 가입 교사를 징계하려고 했을 때 벌어졌다. J교사가 광주에 5명 징계대상자에 포함되었다. 많은 교사들이 이에 분노하고 항의했으나, 교장은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전교조 현수막을 불편해 했다는 것이다. J교사에게 은근히 “내가 안순일 씨에게 전화를 해서 빼주라고 부탁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부 교사는 K교장이 안순일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교장을 한 것이지 전교조 철학과는 무관하다고 실망했다고 한다.


2. 사건에 대해.


6월 16일부터 2박 3일간 수완중 1학년 진도수련회는 진행된다. 참교육학부모회(이하 참학)에서는 7월1일자 성명서에서 교사들이 “교사들이 프로그램과 내용을 채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련관에 모든 프로그램을 맡기는 경우가 허다하다.(중략) 이 때 교사들은 모든 프로그램을 수련관의 강사에게 맡긴 체 교사들만 머무는 공간에서 음주를 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이 대부분이다.”라고 썼다. 맞다. 대부분 교사들은 프로그램을 맡기고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할 일 없이 아이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거나, 뒤쳐진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하지만, 교사로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는 생각을 안 해 본 교사는 거의 없다. 자유롭게 즐거운 시간 때우기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도 교육과정 자체에서 소외된 느낌으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소외현상이다. 물론 이 소외는 교사들이 수련회 2박 3일 프로그램을 직접 짜고, 행할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교사들에게 2박 3일 약 400명 되는 집단을 인솔해서 프로그램을 짜고 안전을 다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면, 교사들은 매우 가혹하게 여긴다. 왜 수련회가 필요한가? 모두 거부할 것이다.


교사들끼리 하는 이야길(일명 꼰대토크)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주 독특하다. 대개 서로 딱딱한 갑옷을 차고 말을 나눈다. 자기 삶과 속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성(性)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동료와 이야기 해본 적이 없다는 10년차 여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성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것이 삶을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 음담패설처럼 히히덕거리는 농담을 하는 중년교사 아니면 서로 자기의 개인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자기 내면과 삶을 드러내기 힘든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좁고, 말 많은 세계라는 인식이 퍼져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 교장흉보는 이야기(같은 그룹에서만), 아이들 이야기로 채워진다. 서먹서먹한 경우, 그 차가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는 ‘알코올’이 필요하기도 하다.


수완중 1학년 교사들 중에 술을 아주 즐겨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남교사도 있었지만, 문제가 된 H교사 외 만취상태까지 술을 즐긴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H 교사는 수련회 도중에 ‘회’를 사서 먹어야 한다면서 일부러 진도까지 나와 회를 사가지고 왔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은, 그가 23일 성추행 논란이 일자 학교 담당자들과 의논하여 ‘병가’를 낸 후 학년 모임 담당선생님한테 “그때 우리가 먹은 회 값을 계좌로 부쳐주라.”라고 문자를 보냈다는 것.


그날은 월드컵 한국전이 있는 날이다. 왜들 그렇게 미치는지 모르겠지만, 4년마다 한 번씩 세계는 축구를 통한 국가주의자들로 넘쳐난다. 한국은 더 심하다. 캠프파이어를 진도청소년수련원에서는 밤에 진행한다. 그러나 이날은 특별히 교사들과 협의 후에 해가 반짝반짝한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진행했다. 저녁에 한국과 아르헨티나 축구경기를 봐야 하니까. 소리 지르면서, 축구경기를 모두 다 관람한다. 아무리 “대~~한민국” 외쳐도 4-1로 농락당한 경기다. 학생들은 흥분해서 소리 지르며 경기를 보고 그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그런데 더 식히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교사들이다.


교사들은 술을 더 마시기로 한다. 마침 17일 오후에 교장이 맥주를 사가지고 방문해 교사들을 위로한다. K교장은 이 사실을 언론과 감사팀에 부인한다. 광주드림 홍성장기자의 <못된 교사, 수련회서 중 1제자 성추행 (6월30일보도)>에 보면, 교장은 모든 것을 부인한다. “(교장 왈)수련회에 함께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다. 그는 수련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수련회에는 교장, 혹은 교감이 따라가서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K교장은 함께 따라가지 않았다. 2학년 수학여행도 6월16일 떠났을 때 오히려 교감에게 가라고 부탁(명령?)했다고 한다. 그는 함께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술을 사들고 수련회장을 방문한다. 맥주를 말이다.


그렇지만, 광주드림 기자에게는 딱 잡아떼기로 일관한다. 광주드림 기자가 질문하자 처음 보인 반응은 ‘어디서 알았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는 많이 들어본 역겨운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가 서부교육청 청렴감사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고 하고, 본인이 전화를 교육청으로부터 받고 질책 맞은 후 일부 사실을 시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술을 사들고 수련회장을 방문한 것은 강력히 부인한다. 이를 후에 2학년 학년 부장인 J선생이 묻자 그때도 그는 강력히 부인했다고 한다. J선생은 “거짓말 하지 마세요.”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열기가 식지 않은 일부 교사들은 방에서 술을 마시고, 일부 교사는 잠을 자러간다.


교사들 일부가 그 다음 경기, 새벽에 하는 경기마저 봐야겠다고 기다렸다고 한다. 평소 조용한 교사인 H가 많이 취했다고 한다. 체육교사인 H는 교총소속이면서,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다. 예절바른 성격에 남다른 체격을 가진 그는 매우 호감이 가는 교사다. 180이상의 키에 누구라도 인정할만한 외모에 광주 교사들 사이에서 배구로 유명한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다만, 학생들에게는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두발 문제 등에 있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체적으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했다고 한다. 중간고사 시험을 앞두고 교실을 개방하여 저녁 늦게까지 희망자에 한해 공부를 하도록 지도했다고 한다. 초등과 달리 중등교직에서는 배구가 일상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H교사는 수완중에 발령 받자마자, 교사 팀을 조직해서 대회에도 나가는 등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부 여교사들은 뒷담화로 외모가 출중한 그의 과거 연애담을 험담삼아 나누기도 한 모양이지만, 이제 서른 중반의 미남이자 첫아이 출산을 앞둔 초등교사 아내를 둔 그가 성추행 추문에 휩싸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다.


6월 21일, 수련회를 마친 후 월요일, H교사는 출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1학년 학년 부장을 통해 H교사가 성추행 추문에 쌓였다는 사실만 1학년 선생들을 통해 알려진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히려 교사들도 모른다. 학부모가 항의를 했고, 교감과 교장이 주말 무렵 H교사를 호출해서 상의를 했다고 한다. 동료 교사들은 모두 놀랐고 믿겨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로지 교장과 교감, H교사만이 안다. 6월23일자로 H교사는 병가를 냈다고 한다.


학년 부장과 그 외 1명만이 교육청 청렴감사팀의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학년 부장을 통해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은 것으로 하고, H혼자 술을 마신 것으로 한다.” 정해진다. 두 명이 감사팀에 의해 서약서(거짓말을 할 경우 처벌받겠다)를 썼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은 입을 다물기로 한다. 과연 H가 진짜 그랬을까? 그럴 리가 없겠지…하는 추측들만 조용히 선생님들 사이에서 오간다.


학생들 중 일부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다. “수련회일 때문에 못나오죠?”라고 하는 학생의 질문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왜 체육선생님이 안 나오는지 모른다. 학교는 그 반에 담임배정과 체육시간 땜빵 문제가 오히려 시급해진다.


6월 29일 뉴시스에서 <광주 모 중학교 교사 학생 성추행 논란>이라는 인터넷 기사가 뜬다. 맹대환 기자가 작성했다. 오후 6시 18분이다.


매우 조심스러운 기사다. 이니셜을 수완중을 A중으로, 문제의 교사도 B로 되어 있다. 분명히 ‘피해 학부모의 항의’로 조사 중 이란다. 교육청은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피해학생을 상대로 조사할 방침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교육청은 학생을 상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물론 ‘학무모 동의’가 없기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수련회에 참여한 교사들 진술도 받지 않고, 학교 교직원들도 감사팀이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조사가 어디 있는가? 그것이 조사인가? 학년부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 그리고 학교에서 떠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해서 정해주면, 존중해서 해주겠다.”고 했단다. 사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교육청 인사가 와서 조사해서 파헤칠 수 있는 진실이란 것이 있을까? 소위 감사팀 공무원이 보는 사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이름 할 커다란 그림에서 작은 색소도 못 칠하는 것이다. 그는 관료적으로 와서, 적당히 관계망 속에서 조용히 처리되기를 바란다. 다만, 언론에서 떠드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은밀히 그가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3시간 후에 뉴시스에서 다시 기사가 나온다. 속사포 같다. 제목은 “광주 中 수련회 성추행 논란 일단락”이다.


자. 사실들은 갑자기 변한다. 세시간만에 말이다. ‘해당학생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고, 항의했던 학부형은 ‘자녀를 상대로 진위를 파악한 결과 성추행은 없었다.’고 했단다. 왜 이렇게 갑자기 변했을까?


실은 기사가 나온 6월 29일은 사건이 터지고 난 일주일이 거의 지난 무렵이다. 일주일동안 학교에서 나온 말들은 이 기사의 배경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학교 교장과 교감, 학년부장, H교사, 한마디로 사건 관련자들은 매일 그 학부모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H교사는 계속 부인했지만, 어떻게 되었건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학교 관계자들은 학부모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애가 잘되게 하는 것, 아닐까요? 아마 부형님도 그걸 바랄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주 간절하게.


신혼인 H교사는 아내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출근하는 척 했다고 한다. 출산을 며칠 앞둔 아내도 낌새가 이상해서 학교에 몇 번씩 전화했다고 한다. 신혼인 H교사의 개인적인 딱함을 부형에게 호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그 학부모가 원하는 게 뭘까 라는 말들이 오고 갔다고 한다.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추잡한 이야기들.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오로지 그것은 당사자만 아는 것이다. H교사와 학부형은 ‘술을 마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제 소문만 퍼져 나가지 않으면 된다.


수련회에 다녀온 교사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H교사와 같은 방을 쓰던 남교사에 의하면, 새벽에 그가 컴퓨터를 가지고 아이들 방에 갔고, 아이들과 영화를 봤다고 한다. 새벽 6시 무렵, 그가 남자 방에 돌아왔는데, 자고 있는 중에 들으니 혼자서 “아,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라고 중얼대었다고 한다. 그 남교사는 그때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해보니 H교사가 정말 ‘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또 어떤 교사는 추론했다. 만약, H교사가 자기 증언대로 만취한 상태에서 학생들 방에서 잤다면, 어디서 일어났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말로 만취해서 잠에 들었다면, 계속 아이들 방에서 잤을 것 아니냐. 컴퓨터 앞에서 그대로 꼬구라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잤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가 3시까지 만취해서 술을 마신 후 아이들 방에서 영화를 본 후 잠이 들었다가 교사 방으로 6시 무렵 돌아왔다면, 앞뒤가 맞지 않지 않느냐… 등.


교사들은 피해의혹이 있는 학생이 누군지 알았다. 그 아이를 쳐다볼 때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일부 교사들은 액션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7월1일 광주드림 오프라인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기사<못된 교사, 수련회서 중 1제자 성추행>가 나간다. 교장은 전날 기자에게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다가 오히려 청렴감사위로부터 지적을 받고, ‘조사 중’임을 시인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 이후에 학교는 범인색출에 들어갔다. “누가 찌른거야?” 말을 하지 않고,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바깥으로 떠벌린 자들을 색출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전교조 상근자 출신이며, 강성이미지를 지닌 특성화 부장 B선생은 광주드림에 전화를 걸어 “누가 제보했는가.” 물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학교 내에서 계속 의심을 받는 눈초리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학년 부장도 돌아다니면서 교사들에게 “누가 제보했을까?”,“혹시 남편도 알아”라고 물었다고 한다.


7월 1일 동시에 참교육학부모회에서 <광주 A중 여제자 성추행 의혹 철저한 조사를>이란 시원한 성명이 나온다.


성명서 문구 중‘더구나 이 학교는 올해 교사, 학생, 학부모가 힘을 합쳐 배움의 공동체를 실현하고, 공교육의 기능을 살리고자 뜻있는 교사들이 많이 모인 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학교 관계자라면, 대체적으로 수완중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참학 뿐 아니라, 전교조 광주지부도 성명을 냈다고 했지만, 전교조 성명서는 홈페이지에 탑재되어 있지도 않고 찾을 수 없다.


교장은 7월 2일, 사건을 공식화 한다. 몇몇 교사들의 낌새를 눈치 챈 것이다. 몇 명의 교사들이 교장에게 사건을 쉬쉬한다는 항의를 했다. 교장은 직원회의를 연다. 그리고 광주드림 기사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반박했다고 한다.


자신은 수련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못된 교사”라고 수완중 전체교사를 욕보인 점에 분개한다는 것. 처음 언론을 대했기 때문에 약간 미숙한 점이 있었다는 점 등. 참석 교사들의 분위기는 우울하고 교장에 대해서 짜증이 났지만, ‘못된 교사’라는 표현에 대체적으로 분노했다고 한다.


교장은 눈물까지 보이면서, H교사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한국의 공직자들이 늘 보이는 모습이다.) 이를 듣던 교감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수완중의 명예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학교차원에서 직권면직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단다. 재빠른 대응이다. “이제부터 H교사는 수완중 교사가 아닙니다.”라고 선언했다. 전교조 교사 중에 일부교사들이 문제를 삼으려 하자, “이제 우리학교 교사가 아니다. 교육청이 징계할 문제다.”라고 발뺌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제기를 할 주체가 없다. 조용히 있다가 사건은 잊혀지는 것이니까. 그 후에 7월 23일 H교사는 감봉 3개월 처분이 떨어졌다. 학생인권조례 위에서 수완중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명서를 발표하지만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에 상무지구 근처에 있는 중학교로 전보되었다는 ‘인사’발표가 난다. 수완중은 8월26일자로 기간제 교원 모집공고를 낸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학생들의 수업은?


모두가 그렇겠지만, 학교란 배움이 일어나는 곳이다. 교사의 추문으로 거의 2달 가량 수완중은 파행적인 교육과정이 운영된다. 체육수업은 생략되거나 자율학습으로 대체된다. 다른 체육교사들이 합반을 하는 파행운영이 계속된다. 전교조 평교사 출신 교사라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문제였는데, 교장 K는 이에 관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더구나 징계가 나온 이후에 9월 되어서야 기간제 교원모집공고를 낸 것은 학생들의 수업권을 얼마나 관행적으로 무시하는지 잘 보여주는 처사라 하겠다.


3. 잡생각들.


지금까지 최대한 수완중 동네 주민으로서, 또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으로서 듣고, 보고, 느끼고, 냄새 맡은 것을 적었다. 이는 엄밀하게 법적요건을 충족시키는 사실(fact)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누구를 욕보이기 위해서나 다시 H를 벌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아님을 다시 한 번 말한다. 다만, 이 사건을 접하면서 느낀 점을 몇 가지 적으려 한다.


첫째, 참학과 학생인권조례위의 성명서관련.


내가 제일 반가운 성명서였다. 아, 우리 편도 있구나.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참학의 성명서 내용에는 ‘성추행 교사 엄중 처벌로 교육비리 추방하라’는 것이고, 부제는 ‘학부모들은 이러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디에 하소연 할 곳이 없다’라고 하면서 “교육청은 성추행 교사를 엄중 처벌하라”고 했다. 그러나 교육청이 왜 그렇게 하겠는가? 교과부는 이미 4월 달에 3대비리(성적조작/성추행/금품수수)는 봐주지 않고 중징계 하겠다고 발표했다. 교과부란 관료조직을 우리는 진정성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교육청 관계자들도 시끄러워 비판 받기보다는 성추행이 있다면, 깨끗이 처벌할 분위기는 되었다. 


하지만, 왜 안 되는가? 관료 입장에서 보자. 그들이 문제가 터진 학교에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학부모가 항의를 했고, 갑자기 학부모가 잘못 알았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사건은 내부에서만 알 수 있지 않은가? 부에서도 당사자들, 그러니까 공모제 중간평가를 앞둔 교장, 교장승진을 앞두고 있는 교감, 교감승진을 위해 경력을 쌓는 학년부장, 당사자가 아닌 이상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할 수 있는가? 물론 그가 냉정한 관료라면, 학생도 부르고 학부모도 직접 만나서 조사할 수 도 있겠지만, 성명서에 나온대로 ‘~~해라~!!’외치는 것은 효과가 거의 없는 부르짖음이다.


성명서에는 차라리 실명을 그대로 쓰고, 침묵하는 전교조 교사와 분회를 비판했어야 했다. 오히려 참학과 학생인권위가 나서서 직접 목격학생을 조사하고, 교사들을 조사하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바뀔 리가 없다. 참학은 ‘어디에 하소연 할 곳이 없다’고 했지만, 미안하지만, 게으른 외침처럼 느껴진다. 참학 입장에서는 학부모 입장을 충분히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갑자기 학교에 항의를 하다가 입장을 바꾸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애가 잘 되는 게 우리 목표 아닌가요?”라고 굽신거리며 은밀히 협박하는 학교 측에 누가 배겨날 수 있을 것인가? 충분히 이해도 할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액션이다. 지금은 적이 도처에 있다. 구획을 나눠서 선생편, 학부모편, 학생편을 나누는 것은 구체적인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명서에 ‘하소연도 할 곳 없다. 우리 학부모는 약자다’라는 등의 호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전교조란 조직은 더 이상 어떤 이미지로 구성된 조직이 아니라, 그야말로 노동조합의 이익에 걸 맞는 국가기구의 한 파트란 점이다. 따라서 그를 환원해서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야 말로 위험하다는 점이다. 이점은 전교조 출신 교육감, 그리고 교육위원에게도 해당하는 것이다. 역할(Role)과 위치(Position)가 사람을 만들지 그 역은 아니라는 냉정한 인식을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전교조 출신 중에 대다수는 학생인권에 침묵했고, 일부 교사만 반응했다. 일부 교사도 전교조라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자신이 직접 교사에게 당했던 그 상처가 되살아나면서 분노했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과 관련해서 교사에게, 혹은 전교조에게 기대하기는 접어야 한다. (물론, 이글을 읽는 독자라면 접었겠지만). 기대를 접고 오히려 담담하게 노동조합의 이해관계에 맞도록 파트너 쉽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교사들은 매우 방어적으로 침묵 속으로 자기들의 짓거리를 도피할 수 있는 유용한 기제가 있음을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교사들이 나쁜 놈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 침묵을 어떻게 깨부술 수 있는가를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들에게 침묵문화를 깨라, 라고 강요하는 것은 6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고삼수험생에게 ‘공부 좀 더해라’라는 강요와 비슷하다. 한줌도 안 되는 관료 몇 명이 사건을 만들어 버리고 의미를 창출하여 결론 내버리는 이 구조 자체를 뒤집기 위해 교사 내부의 문화를 미시적으로 파악하고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대개 교사들은 침묵하고 자기보신에 강하다.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연애할 때 ‘그/그녀를 어떻게 꼬실 것인가’처럼 고민해야 한다. 침묵하는 그 학생/목격자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중산층 의식에 사로잡혀 아이미래를 위해 침묵을 결정한 학부모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점들을 현실성 있는 질문으로 제출해야 한다. 범죄자 색출하여 처벌하기 관점에서 벗어나 실효성 있는 토론으로 나가야 한다.


세 번째


행사문화. 수련회를 학생들이 좋아한다. 공부 않고 교실 바깥으로, 야외로 나가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바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야 이것도 교육과정의 일부로서 구성되는 척한다. 이는 교사도 알고, 학부모도 알고, 당국도 다 알지만, 형식적으로 그럴 뿐이지 잠시 수업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체험학습이라고 이름을 달지만, 수업에서 벗어나 노는 것이다. 왜 놀면 안 되는가? 참학 성명서를 보면, 이러한 수련회 문화, 교사음주문화를 비판했지만, 그 전제는 교육청 꼰대들의 전제와 같다. 학교는 뭔가를 배워야만 하는 곳이며, 교육 과정 속에서 학습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놀아선 안 된다?


아니다. 놀아도 된다. 이런 좀 통 큰 생각을 하자. 그리고 교사가 프로그램 짜고, 교사가 관리하는 것, 바라지 말자. 그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멍청한 짓이다. 수련회 프로그램이 그중에서도 가장 낫다. 학생들을 재미있게 해준다. 400명 가량 는 아이들을 차량 10대 빌려서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형태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수련회 자체를 제고해야 한다. 학년 전체로 뭔가 체험학습으로 행사를 잡고 교육과정에 반영하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작은 학급 단위로 무엇이든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과정에 체험학습 쇼를 하는 척하지 말고 ‘노는 날’을 각 학급에 자율적으로 부여하여 학급 단위로, 혹은 학생회 자치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프로그램 짜고, 니들이 운영해야지, 술판이나 벌여서야 되겠냐.’는 비난은 울림 없는 메아리요, 또 다른 교육청관료 꼰대 목소리에 불과하다.


네 번째


학교 내 성희롱은 권력관계 문제다. 아니, 모든 성폭력은 권력의 문제다. 학교폭력자치위(이하 자치위)가 있는데, 왜 교사의 폭력은 자치위에 회부가 안 되는가? 학교의 주체는 분명히 학생, 학부모, 교사라면서 왜 교사는 자치위에 회부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이점에 비추어 봐도 성폭력은 미세한 권력의 문제다. 따라서 이 권력이 균등하게 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될 리 없다. 또한 권력은 결코 스스로 그 힘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은밀하게 작동한다. 따라서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스스로 주장하는 권력(실은 텅 비어있음)을 개무시하며 개입해야 한다. 즉, 문제가 생기면, 자율적으로 소위 시민단체가 개입해서 조사하는 관행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성문제처럼 민감한 문제일 경우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점(상담과 치료제공)도 있겠지만, 수완 중처럼 미묘하고 미세하게 침묵의 안개 속으로 덮여 버리는 경우가 훨씬 빈번하다.


이 시큼하고, 추잡한 안개 속에서도 눈 또렷이 뜰 램프가 ‘외부’아닐까? 그리고 곡갱이, 망치를 통해 파헤치는 광물을 파헤치는 광부처럼 사실과 진실을 구성해야 하는 것 아닐까? 교장, 교감, 학년부장, H교사, 그리고 아이 미래가 두려운 학부모는 자기들만의 ‘사실’을 만들고 ‘진실’을 만들었다. 한줌도 안 되는 그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더 큰 진실구성력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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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로 읽는 헌법 (사형제도)


법대생 차진태 모세


얼마 전에 모 부장판사님께서 자살을 하셨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한 명 존재한다는 것은 그 주위의 동일 직역 등 유사한 상황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생각해 보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는 사실, 곧 ‘자살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증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많이 슬프고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벌 없는 사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사람들을 자꾸 죽고 싶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학벌을 ‘현대판 신분’에 비유하곤 하는데, 신분 사회가 ‘나쁜’ 이유는 그것이 생산력이 약하거나 문화적으로 후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극소수의 양반층의 귀족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벌을 신분에 비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이 글을 쓰던 중에 작년에 초중고생 자살이 47% 급증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자살이 많은 사회.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입니다. 생명은 등가성을 가진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과 존재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을 존중하는 문제는 범죄자의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의 문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가장 존재가치 없는 것으로 판단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지의 문제가 실은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어떻게 대우하는 지를 바라보는 척도가 됩니다. 그래서 사형제도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사형제도의 문제는 사실, 형벌 제도로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합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것은 거칠게 나누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합의의 문제인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2월 25일 ‘사형제도 사건’(형법 제41조 등 위헌제청)에서 합헌이라고 판시(2008헌가23)하였습니다. 판결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형제도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규정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는지 여부’의 문제였는데,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헌법적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는 이상, 범죄자의 생명권 박탈을 내용으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헌법 제10조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는 당해 범죄자가 스스로 선택한 잔악무도한 범죄행위의 결과라 할 것인바, 이러한 형벌제도를 두고 범죄자를 오로지 사회방위라는 공익 추구를 위한 객체로만 취급함으로써 범죄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한 것으로 보아 위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반대의견으로 일부위헌의견 1인, 위헌의견 3인이 있었으나 다수의견이었던 합헌의견이 법정의견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위와 같은 합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사실상 사형 폐지국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형수들에 대한 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헌법적으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10년 동안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그 자체로 사형 제도를 용인하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TV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며 그 생명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저의 의문은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승보다 나은 놈’이라는 판단은 누가 하나요? 잔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으니까 죽여야 한다면, 반대로 절대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판단은 누가 하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사형 제도의 논의가 매우 쉽게 해결됩니다. “신의 영역”의 것을 인간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이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해하는 등의 큰 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선한) 신은 죄를 지은 사람이 회개하기를 원하므로,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천주교 등 일반적인 그리스도교계의 입장이고, 논리는 조금 다르지만 불교에서도 생명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입장 아래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데 큰 역할을 해 왔지요.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는 근대 철학에서도, 인권의 문제에 관하여 ‘천부인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사실, 신분사회 안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인민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주장할 근거는 매우 미약했지요. 서구에서 ‘인권은 하늘이 준 것이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아주 쉬운 말로 인권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물론 그것은 고려시대 ‘만적의 난’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로도 알려져 있듯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에서도 목영준 재판관은 위헌의견에서 “생명권은... 헌법상 제한이 불가능한 절대적 기본권”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은 이러한 생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위로 돌아가서, 현재는 확립된 판시 사항이기도 한 위 판례를 다시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헌법은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며, 헌법 제37조 제2항에서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 바, 어느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보호가 곧바로 다른 개인의 생명권에 대한 제한이 될 수밖에 없거나, 특정한 인간에 대한 생명권의 제한이 일반국민의 생명 보호나 이에 준하는 매우 중대한 공익을 지키기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는 비록 생명이 이념적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생명에 대한 법적 평가가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할 것이므로, 생명권 역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판시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논리적으로 조금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 헌법이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내면적 사상의 자유와 같은 권리는 해석상 절대적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고, 따라서 생명권을 절대적 기본권으로 해석하여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사실상 학술적인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보통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입법자의 결단의 문제로 보아 소극적인 해석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명문 규정이 없으니 일단 생명권은 절대적 기본권은 아닌 것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이와 같이 진행됩니다. “예컨대 생명에 대한 현재의 급박하고 불법적인 침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당방위로서 그 침해자의 생명에 제한을 가하여야 하는 경우, 모체의 생명이 상실될 우려가 있어 태아의 생명권을 제한하여야 하는 경우, 국민 전체의 생명에 대하여 위협이 되는 현재적이고 급박한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위하여 부득이하게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거나 그에 못지 아니한 중대한 공공이익을 침해하는 극악한 범죄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하여 범죄자에 대한 극형의 부과가 불가피한 경우 등 매우 예외적인 상황 하에서 국가는 생명에 대한 법적인 평가를 통해 특정 개인의 생명권을 제한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헌법재판소는 ① 정당방위, ② 산모 보호, ③ 전쟁, ④ 흉악범죄의 경우를 나열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도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①, ②, ③의 경우에 비해서 ④의 경우는 법률이 사후 개입한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①, ②, ③의 경우는 이미 존재하는 생명에 대한 침해에 대한 급박한 방어행위가 또 다른 생명에 대한 침해로 이어진 경우 그 방어행위에 대한 법률의 보호에 관한 문제인 반면, ④의 경우는 다른 생명의 침해로 이어진 행위를 한 자 등에 대한 처벌의 문제로써 그 재발방지에 목적을 둔 국가의 사후개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의 법정신에 입각할 때, 다른 것을 같은 것인 것처럼 나열한 점에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매우 강한 힘으로 쳐들어와서 모두를 죽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면, 자신은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이스라엘이 정착촌을 건설할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왜 죽어나가야 했던 걸까요?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해’ 보이는데 왜 당한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죽이자고 하지 않을까요?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는 히틀러 치하의 ‘나치 유럽’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가 대중의 관점에서 노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0만 유대인들을 히틀러가 혼자서 죽인 것일까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사실, 대중들의 적극적 혹은 묵시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합법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사실, ‘우기면’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수를 죽인 더러운 민족인 유대인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홀로코스트를 진행한 20세기 초반의 유럽의 대중들처럼.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면서 “안 했다”고 우기면 그만인 줄 아는 이스라엘처럼. 광주를 학살한 다음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발표한 전두환처럼. 물론 그 안에는 굉장히 ‘섬세한’ 논리들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논리의 존재가 비참하게 희생된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청년과, 광주 시민의 무죄한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그 논리들도 결국 ‘우기기’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할 지 여부와 그 생명을 제거할 지 여부는 분명히 사회적 합의의 산물일 것인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사람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기준에서 비추어 보면) ‘짐승보다 나은 사람’일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라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한 헌법재판소 판례는 ‘사형제도가 합헌이라고 어떻게 잘 우길 것인가’의 한 ‘나쁜 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섬세한 논리로 ‘우김’을 포장하면 그걸로 게임은 끝인데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사회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부 못하는 초중고생’은 ‘존재 가치’가 있나요? 없나요? 많은 초중고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요?


헌법재판소의 판시에도 보이듯이, 우리 사회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게 볼 것인지”의 명제 중 후자를 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하게는, 우리 사회는 ‘존재 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존재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생명이 존재 가치를 갖게 되는 데 매우 심한 압박을 주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은 전방위적으로 사회 분위기를 매우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2, 30 대 여성 자살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남성도 비슷하지만;) 최근의 기사는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합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재생산불능의 사회, ‘웬만하면 탈출하고 싶어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사형 제도를 존속시킬 것인지는 우리 사회의 합의의 문제이겠지만, 그것이 폐지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생명에 대한 시각을 전환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나치게 높은 강력범죄율 등은 사형제도와 같은 강력한 형벌로는 결코 잡을 수 없고, 사실은 타인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사랑, 또는 퇴폐적이고 자극적인 음란물들을 생산, 유포하지 않는 것들과 같은 법 바깥의 노력들을 통해서만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율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절대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잘못되었고,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제대로 되기가 매우 요원하니까요. 세상이 잘못되었다면 정면 승부를 한 번 해 볼 만하지 않은가요? 죽음으로 도피하지 맙시다. 그것이야말로 더러운 세상이 원하는 것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뵙지요.


2010. 8. 24.차진태 모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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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직무 연수를 받고 나서 저 자신을 되돌아 봅니다.

-광주지역 인권교사연수 후기-


이겨라 (광주공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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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지역 초·중·고 교사 40여 명이 지난 25일부터 `인권교육 직무연수’에 참여해 `복지가 숨쉬는 학교’ `인권교육의 원칙’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첫 시간부터 자기들끼리 약간은 도도한 모습으로 중요한 회의라도 하듯 계속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치를 여러 번 주었으나 잠깐 후에는 그들만의 중요한 회의는 여전했다. 작은 쪽지에 자신의 목표나 희망을 담은 명함을 만들어 자기소개를 하게 하였는데 여전히 딴 세상에 있는 듯이 행동하는 그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고 그 아이들 곁에 멈추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명함에 휘갈겨 쓴 내용을 어렵게 읽었을 때 내 마음은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고 그 자리에서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말을 꺼냈으나 급기야는 호통으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학기 내내 그 아이들과의 씨름은 매시간 나를 고군분투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들과의 부딪힘은 그 반 전체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은 한 시간도 그저 쉽게 만나지지 않았다. 그 반 아이들은 나의 숙제가 되었으며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만남은 특별할 것도 없다. 1년 동안 만나게 되는 학급들 중에서 한 두 반 정도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이 있으며 그 반 아이들은 그해 연구실천의 중심이 된다. 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좀 쉬운 과제는 더 잘 풀 수 있게 되는 식이다. 무난한 반 원만한 아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방식일 수도 있지만 사실적으로는 그 아이들은 교사의 전제로부터 좀 더 자유롭게 된다. 한껏 날이 선 아이들은 정말 조심해서 접근하는데 아이들 눈에는 그저 좀 열심히 하고 착한 듯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답답한 인간으로 비춰지는 듯하다.


내가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그저 연구실천의 정반합이다. 이렇게 해보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고 또 보완해서 저렇게 해보면서 중간 중간 종이에 생각을 표현하게 해본다. 어쩔 땐 시원스러운 결론이 보이는 듯 하다가고 어쩔 땐 미궁속이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한번이라도 더, 한명이라도 더, 해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의 영원한 텍스트다. 문제의 출발도 과정 탐색도 해결 방안도 그들 속에서 그들과의 만남 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가 아이들에게는 숨 막히는 혹은 불쾌한 느낌을 주어 충돌을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반성도 해본다.


이즈음 되면 마치 아이들과 교사의 만남이 진공 유리관속의 관계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와 아이들과의 만남은 비유하자면 ‘포화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교사는 숱한 외부적 장애와 내적인 편견을 극복하면서 아이들과의 만남을 쟁취해 가고 있다. 교육은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만남 이상의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 피상적인 모습만이라도 유지 하는데는 일상적인 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마치 좋은 부모로서, 좋은 자녀로서, 좋은 인간으로서 살고 싶지만 마음(자신의 마음 혹은 상대의 마음) 같지 않기에 늘 노력(만남, 소통을 위한 연구실천)해야 하는 점과 같다.


교사인권연수가 남긴 것


“엄마는 내가 어떨 것 같아...지금 행복할 것 같아?” ....

“ 제 아이가 어렸을 때 저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서 방학때 까지도 쉬지 못하고 수업해야 했고, 그런 구조 속에서 이제는 고등학생이 된 내 아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 2010 인권교육 직무연수 - 인권, 교육철학과 만나다 >라는 연수를 받고 나눈 소감 중에서 가슴을 적셨던 말씀입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삶과 내 자식의 삶,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이 어찌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인권연수 모든 강사분의 강연은 우리의 아픔을 애도하여주고 우리 삶의 어려움을 해석하여 주었으며, 우리가 나아갈 바를 상기시켜주며 우리를 더 무장시켜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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