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6일 다수의 언론이 광주광역시 소재 사립중학교의 반인권적인 ‘용의 및 생활규정’에 대해 보도했다. 해당 학교에서는 학교장 방침으로 학생들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복장, 두발, 용모를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이를 준수하지 않을 시 처벌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여학교로 한국사회가 강요해왔고 지금도 강요하고 있는 ‘순종적인 여성상’에 부합하는 기준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학생들은 이러한 인권침해에 저항하며 ‘겨울에 외투를 착용할 시 안에 교복재킷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규정의 완화를 요구했다. 학생 대표자는 이러한 요구를 학교장에게 전달하였으며 일부 교사들 또한 반인권적인 규정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학교장은 모든 요구를 묵살했다.

 

 더 나아가 2019년 11월 1일 학교생활규정 제·개정 위원회를 열어 ‘학생회는 학교장 직무에 관한 행정사항에 관여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학교생활규칙을 제정했다.

 

 학교장의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학생들은 ‘우리의 몸은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대자보와 포스트잇을 학내에 게시했다.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은 해당 학교장의 처분이 광주학생인권조례를 위반한 것에 대해 광주교육청의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출했다.

 

 ‘인권도시’와 ‘민주시민교육’을 표방하는 광주는 2011년부터 광주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하여 헌법상 보호받아야 할 초·중·고 학생 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리고 광주학생인권조례는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자치와 참여에 관한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의 ‘용모 및 생활규정’과 ‘학교생활규칙’ 등은 광주학생인권조례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보여주는 것
 
 민주공화국에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통치에 참여하고 부당한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벌주의 입시교육에 발이 잡힌 한국교육은 형식과 당위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을 표방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억압적인 노예교육을 유지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사학재단’의 문제가 결합하면서 여전히 반인권적인 규정을 시행하는 학교가 다수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번 사건은 이러한 한국교육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 모순은 광주에서 더욱 극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은 인권조례 제정 이후 인권 무법지대였던 학교를 바꾸려 꾸준히 노력해왔고 학생자치 활성화를 강조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체제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군부독재 시기의 교육관을 가진 학교장 1인만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학교를 그 시절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미 수많은 여성이 성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는 대한민국, 그것도 인권도시를 표방하는 광주에서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성차별을 교육하고 강요하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암울한 모순뿐이 아니다. 그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자유의 황무지’ 같은 사립중학교에서 자유를 위한 시민항쟁이 싹텄다는 것이다. 누가 이 학생들에게 혁명을 사주했는가? 학생들의 배후에 어떤 강력한 음모집단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학생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이 작은 사립중학교의 현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교장의 처분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의 결단으로 자유를 외쳤다. 광주교육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실력광주’ 따위의 노예족쇄가 아니라 학생들이 억압에 맞서 자유시민으로 거듭난 바로 지금이다. 1929년 ‘노예교육 철폐’를 외쳤던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정신이 다시 광주교육에 나타난 것이다.
 
▲학생, 대표자, 교사의 용기
 
 한 명의 시민으로서 학생들의 자유투쟁을 지지하며 법과 역사, 그리고 시민사회가 여러분의 편이라는 것을 강조드린다. 지금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일탈행동을 하는 것은 민주공화국의 헌법정신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의 교육관에 따른 처분을 보여준 학교장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행동은 민주주의 사회의 도덕과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걸맞은 학교를 만들기 위한 지극히 정당한 행위이다.

 

 한 명의 학생운동 활동가로서 학생의 편에 선 학생 대표자의 용기에 지지를 보낸다. 그동안 수많은 학생 대표직은 이른바 ‘모범생’이라 불리는 학생들의 차지였고 이들은 학생의 의견을 대변하기보다 학교의 편에 서서 학생들의 혁명을 사전에 방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학생운동의 전통이 사라진 지금의 대학교학생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학교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받게 될 엄청난 압력에도 학생의 편에 선 학생 대표자의 선택으로 이번 사건은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학생의 편에서 인권침해 규정을 문제제기한 교사들에게도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인권보호에 앞장서야할 교사들이 정작 학생자치를 탄압하고 인권침해를 자행해온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의 편에 서서, 그리고 스스로 압제의 부역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교사들의 양심과 용기는 더욱더 값지다.

 더 많은 교사가 학생의 편에 서 민주공화국 교사의 모범을 보여주길 바란다.
 
▲시민사회는 연대에 나서야 한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여성과 청소년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지 않는 차별주의자들이 온갖 모욕과 비난을 학생들에게 퍼붓고 있다. 반면 광주의 시민사회는 아직 이번 사건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너무 사안이 명백하여 광주교육청의 빠른 조치를 예상하는지 별다른 호응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규정이나 제도적인 부분보다도 학생들의 투쟁이다. 지금 상황은 학생들이 학교 밖의 세상에 소식을 전하자 모욕과 비난만 돌려받은 것이다. 교육청의 조치와는 별개로 시민사회에는 연대의 의무가 있다. 교문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이 마주해야 할 것은 차별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위대한 용기를 보여준 것을 축하하는 시민들이어야 한다.

 

 또한 이번 사건을 ‘구출을 기다리는 어린 여성에 대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차별주의자들의 관심을 끌뿐, 다른 시민들의 연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결국 구출은 교육청과 제도의 몫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을 스스로의 결단으로 쟁취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외부의 간섭’이 되어버린다. 시민사회는 학생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고 연대해야 한다.

 

 학생들이 판단하기에 필요한 것이 교육청의 조치일 뿐이라면 보다 많은 시민들이 교육청의 신속한 조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학생들이 보다 빠르고 확실한 사태해결을 원한다면 기자회견, 공개 토론회, 집회 등을 실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 투쟁에서 판단과 책임은 학생들의 몫이지만 그들의 선택에 함께하는 시민들이 있으며 다양한 지원이 있을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시민사회의 일이다. 억압을 가르쳤으나 자유를 외치고 있는 이 기적 같은 학생들의 투쟁에 광주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줄 만한 강력한 연대와 지지로 화답해야 한다.


황법량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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